마니피캇(Magnificat)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parvenir a soi)과 자신에게 현존하는 것(presence a soi)

나뭇잎숨결 2024. 6. 29. 09:56

사진작가 분이가 태풍이 몰려오기 전, 탱큐!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parvenir a soi)과 자신에게 현존하는 것(presence a soi)

- 연중13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를 중심으로

 

 

1. 서정주,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머리에 석남꽃 꽂고 / 네가 죽으면 / 머리에 석남꽃 꽂고 / 나도 죽어서 // 나 죽는 바람에 네가 놀래 깨어나면/ 너 깨는 서슬에 / 나도 깨어나서//한 서른 해만 더 살아볼거나/죽어서도 살아나서/머리에 석남꽃 꽂고 / 서른 해만 더 한번 살아볼꺼나

 

서정주,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는 '수삽석남(首揷石枏)'이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이 신라의 설화는 고려 때 박인량이 지은 설화집 <수이전(殊異傳)>에 수록된 것이다. 신라 최항(崔伉)은 자를 석남(石枏)이라 했다. 그에겐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나, 그녀와의 결합을 부모가 반대하여 만나지 못하더니 몇 달 후 죽고 말았다. 여드레 후 항의 혼이 애인의 집에 찾아갔는데, 여인은 항이 죽은 줄 모르고 반가이 맞았다. 항이 자기 머리에 꽂은 석남 가지를 나누어 애인 머리에 꽂아주며 말하기를 "부모가 그대와 같이 살도록 허락해주어 왔다"고 하니, 여인은 항을 따라 그의 집에 갔다. 그런데 항은 여인을 두고 혼자 담을 넘어 들어간 뒤 날이 밝도록 나오지 않는 것이다. 마침내 대문이 열렸다. 하지만 나온 사람은 최항이 아니라 집안 어른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도련님하고 같이 왔습니다. 도련님이 집안에 들어간 뒤에 나오질 않으셨습니다.” 집안 어른은 놀라서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항이가 죽은 지 여드레나 되었다. 오늘 장례를 치를 예정인데 이 무슨 해괴한 소리냐?” “분명 어젯밤에 저희 집에 왔습니다. 제게 석남가지를 꽂아주셨는데, 도련님 머리에도 꽂혀 있었으니 확인해보십시오.” 항의 관을 열고 보니 과연 머리에 석남 가지가 꽂혀 있고, 옷은 이슬에 젖었으며 발에는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여인이 그의 죽음을 알고 슬피 우니, 그 울음소리를 듣고 항이 다시 살아났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함께 서른 세 해를 늙도록 잘 살았다.

 

서정주의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는 화자에게 도착한 죽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가 하는 화두를 던진 셈이다. 사랑한다고? 그 사랑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사랑인가? 죽음을 사랑으로 반응했을 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닌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남마리안 수녀님께서 여수의 돌산, 감사합니다!

 

 

 

2.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에 쓰여진 내용이 아니고 책 제목만 인구에 화자되는 책들이 참 많다. 우주적인 농담을 목격한 사람에 대한 글 가운데 니체의 산문시 혹은 잠언시라 불리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그 부류에 속한 책이다.

 

그 책은 1883~85년에 간행되었다. 차라투스트라(고대 페르시아의 배화교[拜火敎] 교조 자라투스투라의 독일식 이름)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산을 내려와 여행하면서 가르침을 전하는 모습을 뛰어난 문장으로 기술했다. 이 작품에는 니체의 중심사상인 '권력(힘)에의 의지', '초인(超人)', '영겁회귀(永劫回歸)' 등이 비유와 상징 및 시적인 문장으로 전개되어 있다. 기존의 그리스도교적 질서를 파괴하고 현대인의 중심문제를 예언한 이 책은 뒤에 오는 철학자·시인·작가 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그리스도가 전하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카테고리, 즉 그리스도를 앞세운 기득권적 질서(기독교 안의 반그리스도적 행태, 종교적 엄숙주의, 배타주의)를 부정했음을 알 수 있다. 신에 대한 강한 부정은 신적인 것의 열렬한 갈망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신적인 것의 발현은 환시나 초월적인 경지에서가 아니라, 신적인 것을 두루 갖춘 위버멘쉬의 출현, 즉 정신적 육체적으로 자기 초극이 가능한 진정한 인간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외침이다... 니체의 사상뿐 아니라 .비판적 책읽기는 모든 텍스트를 대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조건일 것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운데 좋아하는 부분을 옮겨본다.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63~)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게으름을 피워가며 책을 뒤적이는 자들을 미워한다. 독자를 아는 자는 독자를 위해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이런 독자들의 시대가 한 세기 더 지속되기라도 한다면넋조차도 악취를 풍기게 되리라.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배워 읽을 수 있게 되면, 시간이 흐르면서 쓰는 것은 물론 생각까지 부패하게 마련이다. 한때는 넋이 신이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사람이 되더니 지금은 천민이 되고 말았다. 피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저 읽히기를 바라지 않고 암송되기를 바란다. 산줄기에서 가장 짧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길이다. 그러나 그런 길을 가려면 긴 다리를 가져야 할 것이다. 잠언은 산봉우리라 할 수 있다. 그것들을 들으려면 크고 우람한 체구를 가져야 할 것이다. 엷고 깨끗한 대기, 신변의 위험, 유쾌한 악으로 가득찬 넋, 이런 것들은 썩 잘 어울린다. 나는 내 가까이에 요미를 두려 한다. 나 용기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유령들을 위협하여 쫒아내는 그런 용기는 자기 자신을 위해 요마를 만들어낸다. 용기는 웃고 싶은 것이다. 나의 느낌은 너희의 느낌과 더 이상 같지 않다. 내 발 아래 있는 이 구름, 내가 비웃고 있는 이 어둡고 무거운 구름, 그것이 바로 뇌우를 가져오는 너희의 구름이렷다. 높이 오르려 할 때 너희는 위를 올려다 본다. 그러나 이미 높이 올라와 있는 나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너희 가운데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높이 올라가 있을 수 있는 자가 있는가? 더없이 높은 산에 오르는 자는 모든 비극과 비극적 엄숙성이라는 것을 비웃는다. 지혜. 그것은 우리가 용감하고, 의연하고, 냉소적이며 난폭하기를 소망한다. 지혜는 여인이고, 그리하여 늘 전사만을 사랑한다. 너희는 말한다. "삶은 견뎌내기 힘들다"고. 그러나 너희는 어찌하여 오전에 긍지를 갖다가도 저녁에 이르러서는 체념하는가? 삶은 견뎌내기 힘들다. 그러나 그토록 연약한 언동을 삼가라! 우리 모두는 짐깨나 질 수 있는 연약한 암수 나귀가 아닌가. 우리는 한 방울 이슬이 떨어졌다 하여 파르르 떨고 있는 저 장미 꽃봉오리와 어떤 점에서 같은가? 그렇다. 삶에 친숙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 속에는 얼마간의 광기가 있기 마련이다. 광기 속에는 얼마간의 이성이 마련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내게도 나비와 비누방울이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와 같은 자들이 행복에 관하여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들 경쾌하고 어리숙하며 사랑스러운 그리고 발랄한 작은 영혼들이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날아다니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스트라는 눈물을 흘리며 노래부르게 된다. 나는 춤을 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그런데 나의 악마, 나는 그가 엄숙하며, 심각하고, 심오하며 당당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력의 악령이었던 것이다. 저 악마로 인해 모든 사물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사람들은 노여움이 아니라 웃음으로써 살해를 한다. 자, 저 중력의 악령을 죽여 없애도록 하자! 나는 걷는 법을 배웠다. 그 후 나는 줄곧 달렸다.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그 후 나는 법을 배웠다. 그 후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움직일 수가 있었다. 이제 나는 가볍다. 나 날고 있으며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제야 어떤 신이 나로 인해 춤을 추고 있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 정동호역, 책세상, 2007, 63~65쪽

 

 

 

오쇼 라즈니스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하여, ,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웃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럽다. 미소를 지을 수는 있어도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에 대해 웃음을 터뜨렸단 말인가? 웃음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농담에 갓난아기 짜라투리트라는 웃음을 터뜨렸는가? 그것은 바로 우주적인 농담이다. 이 존재계 전체를 감싸안고 있는 우주적인 농담에 그는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렇다. 그대의 노트에 우주적인 농담이라고 쓰고 밑줄을 그어라. 나는 그대가 밑줄을 긋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는 참으로 듣기 좋다. 내 귀가 얼마나 좋은지 아는가? 내가 원할 때면 나는 연필 굴러가는 소리도,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원할 때면 나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을 때면 나는 전혀 듣지 않을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린 짜라투스트라!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전생애가 하나의 웃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잊었다. 고통 속에서 삶을 산 사람은 오래 기억되지만, 삶이 하나의 환희가 되고 넘치는 웃음이었던 사람은 금방 잊혀진다. 영어권에서 그의 이름을 조로아스터로 바꾸기까지 했다. 이 얼마나 괴물같은 이름인가! '짜라투스트라'는 장미 꽃잎과 같은 향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조로아스터' 는 기계 냄새가 나고 죽은 이름이다. 짜라투스트라까지도 자기의 이름이 '조로아스터'로 바뀐 것을 알면 너털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그 책을 쓰기 전 까지는 짜라투스트라는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교도들의 강압에 못이겨 짜라투스트라의 추종자들은 회교도로 개종했다.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인도로 탈출했가. 인도 말고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그 당시 인도는 여권이나 비자 없이도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살인자 회교도들의 탄압을 피해 아주 적은 숫자의 짜라투스트라의 추종자들만이 인도로 탈 출했다. 현재 그들의 숫자는 십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자, 불과 십만 명 정도의 추종자밖에 갖지 않은 종교에 대해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그들 대부분이 인도에 살고 있을 뿐이고, 그것도 봄베이라는 한 도시 주변에만 모여 산다. 그들 자신조차도 짜라투스트라를 잊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힌두교인과 타협한 것이다. 늪을 피해서 달아났지만 결국 진흙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도 더 깊은 진흙 웅덩이에 한쪽에는 늪, 다른 쪽에는 진흙 웅덩이, 그 중간에만 '길'이 있다. 붓다는 그 길을 중도라고 불렀다. 줄 위를 걷는 광대처럼 정확히 중간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니체의 위대한 공헌은 짜라투스트라를 현대에 되살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크나큰 잘못은 아돌프 히틀러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그는 둘다를 동시에 했다. 물론 그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선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니체의 초인 사상을 잘못 해석한 것은 히틀러 자신이었다. 그것은 니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한다면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잘못 해석하는 것은 사람들의 자유다.

 

 

 

 

 

 

 

 

 

3.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마르코 5,21-43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코 5,21-43)라고 전하는 소생설화는 공관복음에 동시에 있는 말씀으로(마태오9,18-26/루카8,40-56)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신 두 개의 기적사화가 병치되어, 자연의 풍파와 더러운 영을 다스리신 예수께서 불치병과 죽음까지도 관장하시는 분임을 드러낸다.

 

언뜻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의 극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 12년동안 하혈하는 여인의 처지를 끼워넣은 듯 보이는 이 두 개의 기적사화는 믿음과 구원의 관계에 대해 성찰을 이끈다.

 

하혈은 부정한 병이기에 그녀는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소외되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병들과 부정한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회적 신분의 차이라는 어떤 대조적인 구도를 통해 믿음과 구원의 구조는 어떤 일정한 틀을 갖고 있음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언급한대로, 이 두 여성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적사화의 틀을 뛰어넘어 믿음과 구원이라는 대 주제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두 여성을 통해 드러나는 믿음은 구원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여성은 모두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다. 믿음은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34절, 36절) 상황에서 그분께 구원을 받게 되는 은총이 된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의 믿음이든 죽은 소녀의 아버지의 믿음이든 믿음은 그에 대한 응답을 반드시 받는다.

 

28-34절은 치유기적사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 옷에 손을 댄 여인을 통해 구원은 몸의 치유뿐 아니라 영혼과 정신 등이 모두 완전해 지는 것을 말한다. 하혈하던 여인이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그의 몸의 병은 나았지만, 그때까지는 구원받지는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기적을 체험하고도 그분을 믿지 못하고 떠난 수많은 이들에 대한 예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인이 구원을 받게되는 것은 33절 이하에서 예수께 여인이 나아갔을 때이다. 정결법을 어긴 여인의 이 용기에 예수님은 여인을 딸이라 부른다. 그리고 평안히 가라로 평화를 빌어준다. 그녀에게 평화의 문이 열린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지라고 하심으로써 병으로부터 깨끗해진 여인은 이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원은 죽음의 상태로부터 생명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신 여인에게서 일어난 이 치유기적사화는 예수님의 일에 대한 중요한 묵상을 우리에게 전한다. 회당장과 여인은 여러 측면에서 상반된 사회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을 상징한다. 남성과 여성, 지역유지와 버림받은 여인, 건강한 이와 병든 이, 깨끗한 이와 부정한 이 가운데 예수께서는 사회적 약자인 여인을 먼저 치유하고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다. 사회적 위로에서 배제된 절망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에 대한 감수성이야말로 치유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35-43절은 하나의 딸을 구하는 사이에 하나의 딸이 죽는 사건이 벌어진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라는 상황보고에 예수께서느는 응답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고 응답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라고 전한다.

 

여기서도 구원하고 생명을 주기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음이 시사된다.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수많은 죽음과 같은 상황의 대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분은 죽음은 한낱 잠일뿐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소녀의 손을 잡고 한 말씀 "소녀여 일어나라 달리다 쿰"은 예수님의 모어 아람어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아이는 즉시 일어나 걸어다닌다. 여기서 구원의 즉시성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을 향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기적사건을 공공연히 기 공식화 하였다면 이 소녀의 소생사화에 관해서는 침묵을 명하신다. 당시 예수님 시대에는 수많은 치유사들이 있었다. 원격치료는 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육체의 치유사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다.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이 소생사화는 예수의 부활의 빛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소생사화에서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코 5,21-43)에서 중요한 성찰의 포인트는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다섯어절이 지닌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믿지 않으면 서지도 못한다(이사야7, 9)라고 전하는 믿음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 5개의 어절이 지닌 함의를 듣고 삶으로 사는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이 곧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듣고 있는가하는 질문과 같은 맥락에 해당한다. 내가 죽음의 소리를 듣고 있는가? 생명의 소리를 듣고 있는가? 지혜서의 저자와 바오로 사도는 죽음의 존재이유에 대해, 풍요와 가난의 원칙에 대해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간곡하게 전한다. 그들이 전한 것이 그들이 누구의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알 수 있다. 그분의 말을 듣는 것이 믿음이고 구원이라는 사실이다.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지혜서 1,13-15; 2,23-24) 13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14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15 정의는 죽지 않는다. 2,23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24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가난한 형제들의 궁핍을 채워 줄 것입니다.>(코린토 28,7.9.13-15) 형제 여러분, 7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13 그렇다고 다른 이들은 편안하게 하면서 여러분은 괴롭히자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게 하자는 것입니다. 14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15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누구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는 그런 맥락에서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이 다섯 어절은 믿음과 구원의 구조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를 라칭거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믿음이 바로 너(예수)를 듣는 사건임을 전한다.

 

“여기서 믿음은 나는 무엇을 믿는다가 아니고 나는 너를 믿는다는 것이다. 믿음은 인간 예수와의 상봉이고 이 상봉 안어서 세계의 뜻이 인격(Person)임을 체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너는 하나의 물음으로 머무는 너일 수 없고ㅡ 다른 어느 바탕도 필요하지 않는 만유의 근거인 너(J)인 것이다. 그렇게 믿음이란 하나의 너를 나를 바쳐주며 부족하고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인간 상봉가운데에서 불멸의 사랑, 즉 영원을 갈망할 뿐 아니라 영원을 보증해 주는 너를 찾아 얻음을 말한다.”

 

칼 라너는 『영성신학논총』에서 ‘달리다 쿰’과 같은 예수의 원초적인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전하는 사제(보편사제직)는 불가피하게 시인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전하며 그것은 사물과 현상의 표피와 심연을 동시에 볼 수 있고 본 것을 말하는 능력이기에 사제의 입에서 발설되는 발화는 곧 <말의 신학>이라고 전한다.

 

“원초적인 말 하나하나에는 그 말로 표상된 실재의 편린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편린 속에는 우리는 실재 전반이라는 바닥모를 심연 속으로 끌어들이는 문이 열려 있는 것이다. 원초저긴 말이 실재로 발설될 때마다 사물이 당초의 신선한 자태를 띠고 말 속에서 자태를 나타날 때마다 거기에는 시인이 일하고 있다. ”

 

 

우리는 구약성서가 히브리어로, 신약성서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오늘 도착한 성경은 번역의 번역을 거친 몇 번의 누군가의 입김이 쌓인 번역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서에 예수님 모어(mother tongue)로 알려진 아람어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지 않은 채' 그대로 기록되고 그 뜻이 설명되는 몇몇 어형들이 남아 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ܐܠܗܝ ܐܠܗܝ ܠܡܢܐ ܫܒܩܬܢܝ)

에파타(ܐܬܦܬܚ) 탈리타 쿰(ܛܠܝܬܐ ܩܘܡܝ)마라나 타(ܡܪܢ ܐܬܐ)...등등

 

 성서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역사 속의 예수가 썼던 말은 아람어이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히브리어(구약)와 그리스어(신약)를 어느 정도 썼다고 본다. 일단 예수가 살았던 마을인 나자렛과 카파르나움은 아람어가 쓰였던 지방이었으므로 아람어가 예수의 모어임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예수가 당시 히브리어로만 되어 있던 구약성서를 읽는 구절이 성경에 기술된 것으로 보아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상당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루카 4장 16-17절) 또한 이방인 지역에서 주로 쓰이는 그리스어. 로마상류층이 사용하는 라틴어 등 종합해보면 예수가 일상에서 일차적으로 썼던 말은 아람어이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맥락에서  탈리타 쿰(ܛܠܝܬܐ ܩܘܡܝ) 예수의 모어인 아람어이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성서에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에 해당하는 탈티타 쿰이  번역되지 않고 들어왔다. 번역할 수 없는 생생한 그분의 육성에서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할까?

 

일단, 모어는 언제 우리가 사용하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ܐܠܗܝ ܐܠܗܝ ܠܡܢܐ ܫܒܩܬܢܝ) 에파타(ܐܬܦܬܚ) 탈리타 쿰(ܛܠܝܬܐ ܩܘܡܝ)마라나 타(ܡܪܢ ܐܬܐ)...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절실하고 절박한 순간에 자신 안에서 모어는 단발마처럼 튀어나온다. 걸러져서 말해진 것이 아니라 심장에서 즉물적으로 튀어나온 말, 심장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심장에서 튀어나온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육성(ipsissimavox Jesu)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알아 들어야 할까? 그동안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그 병자의 상태에 맞는 말씀이 동시에 주어졌던 것을 기억해보자. 대부분,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러니 편안히 가라'는 것이었다. 

 

신앙생활을 통해 가장 힘든 부분이 죽음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분명한 생명을 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 예수님 육성을 듣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는 에수님의 육성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

 

우리가 말씀의 원초적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자기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이라고 일컫는다. 근원적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은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과 자신에게 현존하는 것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전한다.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parvenir a soi)과 자신에게 현존하는 것(presence a soi) 을 아는 것, 그것을 아는 것은 바로 그것을 사는 것! 여기에 모든 것을 경험하는 영적 감수성이 필요하다. 정신과 육체, 가까움과 멂, 무한한 심연과 어린아이의 천진성, 죽음과 생명, 빛과 어둠...수많은 이질적인 현상들이 우리에게 온다. 우리를 에워싼다. 그것을 통합하고 그것을 생명으로 수렴시키는 것이 들음의 은총이고 그것이 믿음이고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