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함으로 표현된 사랑, 하느님은 전능하시지만, 사랑이신 하느님은 전능하지 않다!
-연중14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1. 이육사,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가 익어가는 계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빛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두렴.(1939년)
7월에 이육사의 「청포도」를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우리는 이육사가 18번이나 옥중생활을 했고, 그렇게 기다렸던 해방을 보지 못한 채(1904~1944) 귀천했다는 것에서 이 시가 어떤 상황에서 쓰여졌는지 대략 추론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1연에서 3연까지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칠월의 고향 풍경을, 4연에서 6연까지는 청포를 입고 찾아올 손님을 기다리는 화자의 마음이 투명하게 그려진다. 청포도, 푸른 바다, 청포와 같은 푸른 빛깔과 흰 돛단배, 은쟁반, 하이얀 모시수건과 같은 흰빛의 대응은 이 시가 지향하는 투명한 서정성을 담보한다. 기다림을 기다림이 배신하지 않게 하는 1차적인 조건이 바로 이 투명한 서정성에 있다. 그 서정성에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 서정성은 도취적인 기다림이 된다.
이육사, 「청포도」 가 우리의 기다림을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이유는 이 시에 대해 화자가 기다리고 있는 청포를 입은 손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논의의 통합에서 찾을 수 있다. 청포를 입고 기다리는 손님을 시인자신으로 보거나 혹은 조국광복으로 보는 엇갈린 시선이 묘하게 통합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청포도」를 쓴 시인의 시간, 질곡의 시간을 통과했던 한 시인이 지닌 고결한 인격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가 지닌 백미가 아닐까 싶다. 의지가 너무 앞서거나 혹은 서정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서정과 의지가 하나로 된 인격 말이다.
2. 칼 구스타프 융, 『원형과 집단 무의식』
서정과 의지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 깊은 곳에 있는 아름다운 원형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집단무의식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환경결정론이 지배적인 이 세계에서 자기 본래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을 집단무의식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본 이가 있다.
『원형과 집단 무의식』, 제목 그대로, 칼 융 심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원형과 집단 무의식을 다루고 있다. 이 두 개념은 인간의 의식적 삶의 미스터리를 푸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융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의식적으로도 존재하고 무의식적으로도 존재하며, 인간 존재의 무의식적 측면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이다. 바로 이 무의식이 집단 무의식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과는 다른 개념이다. 칼 융은 억눌러지거나 망각된 의식을 일컫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개인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문화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시대가 달라도 거의 비슷한 무의식적 충동이나 욕망을 표현해 왔다. 이것을 바탕으로 칼 융은 인간의 정신 깊은 곳에 공통적인 요소가 존재한다고 추론했다. 이 비슷한 요소들을 칼 융은 원형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원형을 꼽는다면 페르소나와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영웅, 노인 현자, 자기(self)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자기는 종종 충돌을 빚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고 완전성을 이루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 경향을 칼 융의 심리학에서 개성화 과정이라고 부른다.
칼 융은 이 원형들이 주로 개인의 꿈을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꿈들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상징들은 보편적이다. 말하자면, 동일한 상징은 인종을 불문하고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그와 동시에 꿈은 매우 개인적이기도 하다는 것이 칼 융의 지론이다. 그래서 꿈 해석은 그 꿈을 꾼 개인에 관한 정보를 많이 요구한다. 융은 꿈들이 우리의 정신 중에서 의식적으로 발달이 덜 된 부분을 보완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꿈을 연구하면 정신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한다.
“의식과 무의식 중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의해 억압당하고 상처받을 때, 둘은 하나가 되지 못한다. 만약에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싸워야 한다면, 적어도 양쪽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공정한 싸움을 벌이도록 해 주라. 의식과 무의식은 똑같이 삶의 양상들이다. 의식은 자신의 이성을 지키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며, 무의식의 혼란스런 생명력에게도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는 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줘야 한다. 이것은 곧 공개적인 갈등과 공개적인 협력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틀림없이 그것이 인간의 삶의 길이 되어야 한다.”
“무의식을 ‘무’(無)라고 부르지만, 그럼에도 무의식은 잠재적 현실이다. 우리가 생각할 생각, 우리가 할 행동, 심지어 우리가 내일 한탄할 운명까지 모두 오늘 우리의 무의식에 들어 있다. 격한 감정이 열어젖히는, 우리 안의 미지의 것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으며, 조만간 의식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고려해야 한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들은 아마 성격의 알려지지 않은 버릇일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있을 발달의 가능성도 이런 식으로, 아마 가끔 전체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격한 감정의 폭발로 드러날 수 있다.”
“인간 정신의 모든 것이 밖에서 오고, 인간 정신은 ‘빈 서판’의 상태로 태어난다는 끔찍한 사상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개인이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인다는 그릇된 믿음을 낳았다. … 그 결과, 개인은 전적으로 환경에 좌우된다고 느끼며 내성(內省)에 필요한 능력을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진보와 발달은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이상(理想)이지만, 만약에 인간이 자신의 일부만으로 새로운 상태에 닿는다면 그처럼 중요한 진보와 발달도 의미를 완전히 잃고 만다.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정신의 근본적인 배후지(背後地)를 무의식의 그림자 속에, 원시성의 상태로, 또는 야만의 상태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뿌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의식적 마음은 그 새로운 상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런 마음은 혁신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보다 더 나쁜 상태로 매우 쉽게 다시 돌아간다.”
“원형은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정신적 신체 기관이다. 이 같은 사실을 절대로 망각하지 않도록 하자. 엉터리 설명은 곧 이 정신적 신체 기관을 대하는 태도가 엉터리라는 뜻이며, 따라서 그 신체 기관에 부상을 입힐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은 바로 그릇되게 해석하는 사람 본인이다.”
“매우 큰 집단이라면, 집단적인 정신은 동물의 정신과 비슷하다. 그것이 큰 조직의 윤리적 태도가 언제나 의문스러운 이유이다. 규모가 큰 군중의 심리는 불가피하게 폭도의 심리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만약에 내가 어느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소위 집단적 경험을 하고 있다면, 그 일은 나 홀로 경험하는 때보다 더 낮은 의식 수준에서 일어난다. 그것이 이런 집단적 경험이 개인적 변형 경험보다 훨씬 더 자주 일어나는 이유이다.”
“마음의 풍요는 마음의 수용성에 있지, 소유의 축적에 있지 않다. 밖에서 우리에게로 오는 것은 모두 그때 들어오고 있는 내용물의 크기와 동일한 넓이가 우리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인격의 진정한 증대는 내면의 원천들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확장을 의식하는 것을 말한다. 정신의 깊이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대상의 중요성을 절대로 적절히 파악하지 못한다.”
칼 구스타브 융은 스위스 정신과 의사이며,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일찍이 단어연상 검사 연구로 콤플렉스의 개념을 정립했고, '조발성 치매(정신분열증)'의 심리적 이해와 치료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한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나 그의 성욕 중심설에 이의를 제기하여 독자적인 학설을 내세워 분석심리학이라 불렀다. 융은 인간의 무의식에 억압된 충동뿐 아니라 인간 행동의 가장 원초적이며 보편적인 유형을 갖추고 있으며 모든 정신활동의 원천으로 그 속에는 마음의 분열을 지양하고 통일된 마음을 실현하도록 촉진시키는 자가 조정의 중심핵이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 융은 수많은 사람의 꿈과 환상을 방대한 신화,민담,종교적 표상 등과 비교 연구함으로써 이것을 증명했다.
칼 융에 따르면 예술과 문학은 심오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집단 무의식의 상징주의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징을 분석하면 예술가와 관객 모두의 잠재의식적 경험과 감정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종교적 또는 신화적 맥락에서 뱀은 변화와 부활을 상징하기도 한다. 칼 융은 창의적 시각화와 내면 탐색을 활용하여 무의식과 소통하는 능동적 상상이라는 기법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개인은 무의식적인 의식에 접근하고 통합할 수 있으며, 이는 개인의 성장과 자기 인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상징(Symbol)원형은 상징을 통해 그 모습을 나타낸다. 요컨대 상징은 무의식의 방대한 정보가 압축된 압축파일인 것이다. 그리고 무의식의 원형적 상징은 절대 인물의 특성이 아니다. 주로 원형을 '영웅', '나이든 현자' 등으로 이해하는데, 원형은 신화적 과정이다. 영웅을 영웅의 과정에서 빼면 그 어떤것도 남지 않는다. 드라마 각본을 연기하는 연기자라고 봐도 좋다. 특히 자기원형은 수학적 도형적 상징을 통하지 않고는 스스로 모습을 나타낼 방도가 없다.
꿈의 상징은 자기 상징들을 꿈에서 만나게 된다. 꿈의 해석은 상징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징 해석은 자기의 메세지를 듣기 위한 필수과정인 셈이다. 꿈은 성욕의 왜곡된 소원성취라는 면도 있지만 예시적인 면이 더 강하다.꿈 분석 이론은 꿈이 무의식적인 마음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꿈속의 상징, 주제, 감정을 조사함으로써 개인은 숨겨진 욕망, 두려움 및 해결되지 않은 갈등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칼 융은 보편적 원형과 상징의 표현으로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 있는 패턴과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종교 상징이 있다. 종교도 상징을 통해 진리를 나타낸다. 태곳적부터 인간의 무의식적 범람과 대극적 활동의 표현을 종교를 통해서 드러냈다고 한다. 종교가 일종의 그릇 역할인 셈이다. 그리고 종교의 신성적 상징들의 변천과 역사를 보면 당시의 인간의 정신 활동을 유추할 수 있으며 앞으로의 진행 방향도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한 상징을 잘 활용할 때 종교의 긍정적인 기능이 발휘되는 법이다.
만다라(Mandala) 상징이 있다. 만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원륜(圓輪)'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힌두교와 탄트라불교에서 종교 의레를 거행하거나 명상할 때 사용하는 상징적인 그림을 가리킨다. 만다라는 기본적으로 통합된 우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통합상징이라고도 한다. 대개 원이나 사각의 형태를 띤다. 만다라 상징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나며, 미술치료를 받는 정신병 환자들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한다. 정신병 환자들의 경우, 만다라는 해체된 정신을 통합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를 담고 있다. 중세 연금술에서도 신, 즉 통합상징을 원이나 구로 나타냈다.
칼 융의 신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개인 무의식, 즉 억압된 생각, 기억, 욕망으로 가득 찬 저수지를 소유하고 있다. 이 숨겨진 영역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종종 꿈이나 말실수를 통해 알려진다. 실제로 이 이론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는 바로 꿈이다. 꿈속의 상징과 주제를 탐구함으로써 개인 무의식에 숨겨진 측면을 밝혀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자기 인식을 촉진하고 보다 효과적인 문제 해결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
집단 무의식의 개념은 칼 융에 의해 도입되었는데, 이는 모든 개인이 공유하는 마음의 더 깊은 층을 의미한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 속에는 다양한 문화와 세대를 거쳐 계승되고 경험되는 보편적인 원형, 즉 근본적인 이미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집단적 지혜와 연결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이 이론을 적용하려면 영웅의 여정이나 어머니 원형과 같은 신화적 내러티브와 상징을 탐구하여 개인의 성장과 변화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3.<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코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전하는 마르코6,1-6은 마태오 13, 54-58/루카4, 16-30/요한7,5에도 예수께서 고향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다는 공통적인 내용을 전한다.
여기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단순히 고향 나사렛에서마저도 배척당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초점일까? 아님 그 배척의 이면, 인간의 집단무의식에 가까운 종교의 원형까지를 바라보았던 것일까? 하는 것이 연중 14주 성찰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신다. 안식일 사건은 1, 21-28/3, 1-6의 연장선에서 세 번째 복음사가가 다루는 사건이다. 예수의 지혜와 기적을 보고 많은 이가 놀라서 발설한 말들과 예수님의 출신성분과 연결하여 그분을 배척하는 사건이 병치되어 나타나는데, 이 이중적인 발화는 나자렛 사람들에게 거의 합의에 이른 것처럼 즉물적으로 튀어나왔다는 점이 놀랍다. 바리사이파의 배척은 시간차의 배척이다. 바리사이파가 나쁜 결론을 도출하였지만, 그 배척에는 시간차가 있다. 그런데 나사렛 고향에서의 배척은 거의 동시적인 배척에 가깝다. 어떤 사건을 목격했을 때 찬반양론이라는 것이 있음직한데, 그것이 생략된 채의 무성찰적인 배척이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마을사람들은 그분의 능력과 근원, 지혜와 기적에 대해 놀라면서 동시에 그들자신의 놀람을 너무나 쉽게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분의 출신계층의 보잘 것 없음을 들어, 그리고 자기 가족도 돌보지 않은 채, 신분을 망각하고 떠돌아다니는 자 정도로 예수를 규정한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외적인 정보들이 진리를 반대하는 순간은 거의 반대를 받지 않는 중론처럼 발화된다. 그들의 배척은 거의 만장일치에 가깝다. 만장일치에 가까운 그들의 배척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의 행태는 예수를 은총의 보고인 메시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걸려넘어지게 하는 걸림돌로 경험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사렛 사람들이야말로 헌 푸대에 새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는 전형적인 예에 해당한다. “그들은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3절)”는 것은 진리보다 그들의 편견에 방점을 찍어 길이요, 진리요, 생명에 걸려넘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너무나 그분을 잘 안다는 익숙한 생각 때문에, 넘어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메시야가 평범한 출신성분을 갖고, 평범한 곳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믿는 메시야는 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격절의 절대적 거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과거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현재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놀랍고 극적인 것에서만 하느님을 찾는 바리사이파들이 표징을 요구한 것과 거의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8, 11) 나사렛 고사향람들의 배척의 즉물성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메시야를 아는 것은 자신을 아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사렛 사람들은 평범한 이들, 평범한 사건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는 눈을 스스로 가리게 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속담,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에제키엘2,1-7)것을 인용하신다.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성공하여 금의환향하는 사람은 인정을 받지만 진리를 전하는 이는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 쯤으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복음사가는 5절 이하에서 분명하게 고향사람들의 불신이 예수의 활동을 축소시키고 위축시키고 약하게 했다고 전한다. 마르코복음사가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엇을 닫고 무엇을 열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전한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 평가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보편화된 정설, 사람의 정신과 삶의 골수를 꿰뚫는 이들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인간은 무의식 속에 어떤 장애를 겪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리사이파즘과는 차원이 다른 배척이기에 그렇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고향과 집안), 루카(고향), 요한(고향 4,44)과는 달리 친척을 삽입시킴으로써 친척과 친구 가족들, 즉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유구한 인간의 집단무의식의 전통을(3, 21,31-35)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6절)고 강조한다. 인간이해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반대에 결코 놀라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님이 전하는 진리에 어떤 대응을 할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 분께서 나사렛 사람들의 배척에 놀라셨다는 것이 놀랍다. 그들의 무엇이 예수님을 놀라게 한 것일까? 인간의 모든 심리를 꿰뚫고 보시는 분께서 당신이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는 메시야가 아님을 아셨을 터인데 말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질투의 심리학은 그들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것에 놀라신 것이 아닐까. 그들이 지닌 메시야관의 상투성에 놀라신 것이 아닐까? 뼛속까지 스며든 하느님상에 놀라신 것일까? 예수님의 메시야성에 대한 질투마저도 그들 고유의 것이 아니라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질투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 카인이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타자윤리학을 만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나사렛에서 있었던 고향사람들의 배척은 단지 나사렛 사건에 국한시킬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의 계례로부터 배척당하시고(요한1,11.로마서 9장-11장) 그 배척의 절정은 당신의 영적인 벗, 제자들로부터 거부당하시기에 이른다. 각각의 경우에 그분에게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실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임에 주목한 것이다. 사랑이 너의 칼이다, 라는 말이 상기될 정도다. 진리의 최측근에서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부처의 적은 부처를 믿는 사람이고, 예수의 적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란 말이 공공하게 회자되는 것인가?
그것의 근원을 찾다보면 우리는 카인을 너머 아담을 만나게 된다. 타자에 대한 질투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카인의 아버지 아담이 있듯, 실은 그들이 믿고 있는 신에 대한 규정 자체에 놀라셨다고 할 수 있다. 종적인 관계가 횡적인 관계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아담이 알고 있는 하느님이, 카인이 알고 있는 형제라는 타자윤리학을 낳고 그것이 거의 집단무의식화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집단 영성의 바탕에는 전능한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이 원죄처럼 대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난 무신론자야, 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조차도 인간은 누구도 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쥐락펴락하는 전능한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신을 좋아하거나 믿지 않을 뿐이다. 무신론자일망정 죽음이 끝이 아니라 산 사람에게 길흉화복의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원초적인 통공에 대한 의식이 그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나사렛의 친척인 그들은 그분을 영영 배척하였는가? 성서는 성모님은 물론이고 주님의 형제라 불리는 야고버 등 예수의 친인척들이 부활이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을 증언한다.(사도1,14/12,17/15,13/21, 18, 갈라디아1,19,2,11-12/야고버1,1,유다1,1)
그렇다면 예수님을 배척했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예수께서는 당신을 배척하는 이들에게 더 놀라운 일을 보여, 그들을 설득하거나, 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더 머무르시지 않고 그들을 떠난다. 그들의 믿음을 강제하지 않고, 당신께서 배척당하심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그분의 일을 하신다.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신다. 당시 그분을 배척한 사람들은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고 유대인들이었지만 오늘은 어떠한가? 그것은 문맥상으로 그분을 배척하고 몰이해하고 배척하는 신앙인들에게 경고이자, 신앙의 도전을 통해 헌푸대에 비유되는 사고방식을 넘어서야지만 새포도주인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초대라고 할 수 있다. 난 하느님을 믿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전해주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느냐가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초대장은 <전능한 하느님을 믿는가?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가?>라는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제1독서에서는 <반항의 집안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에제키엘 2,2-5 2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때 나는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4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하여라. 5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 유명한 바오로의 가시를 통해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한 이유를 은총이라고 전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코린토 2서 12,7ㄴ-10 형제 여러분, 7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전능한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도전에 대해, 위르겐 몰트만은 『인간-인간과 사람의 아들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인간성을 바로 십자가의 수난에서 보았고, 그들의 새로운 인간성을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받아들이셨다. 그들은 그 안에서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을 보았다.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무시를 받았으며 고통과 질병을 찼었다. 그는 배척당하고 멸시 당하여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얼굴을 가릴 정도였다. 그는 실로 우리들의 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고통을 담당하셨다(사도53,3-5)그는 비인간의 질병과 과오 속에서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왕국을 이끌어 왔다. 그의 지배는 왕중왕 혹은 슈퍼스타가 아니라 지배를 봉사에, 권력을 사랑에, 그리고 요구를 대리적 고난에 뒤집는데 존립한다. 예수에 대해 결졍적 질문은 신학적 정치적 도전을 내포한다. 그의 권력은 십자가의 못박힌 자 예수에게서 나온다. 그의 권력은 은총의 무력이요, 화해하는 고난의 힘이고 자기를 부정하는 사랑의 지배이다. 그의 나라는 가난한 자, 죄수, 굶주린 자, 슬퍼하는 자, 죄지은 자의 보이지 않는 우애 속에 존재한다. 그의 축복은 산상설교에 집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계에서 희망없이 희망하는 법, 희망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다. 그 창조적인 화해하고 희망하는 사랑안에는 인간적인 세계에서의 인간적 인간의 가장 위대한 기능성이 존재한다."
이를 기스펠트 그레사케는 『은총- 선사된 자유』에서 그 언젠가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 은총이 주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왜 우리는 오늘의 은총이 아니라 은총을 미래적인 것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염원하고 있는 바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미 작용하고 있다는 것에 희망을 둔다. 그는 염원하는 자유가 아직 닥치지 않은 거이 아니라 지금 이미 작용하고 있다는 것에 희망을 건다. 그는 염원한 자유가 아직 닥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앙의 힘 속에서, 희망의 용기 속에서, 사랑의 행위 속에서, 단편적이나마 지금, 이미 성취되고 있으며, 진정한 자유가 지금 이미 선사된 자유, 즉 은총으로 시작한다고 믿고 있다.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어두움 속에서도 이 은총을 체험한다. 그래서 이런 고백이 가능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디서 자유와 우리 인간의 생명을 충만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반항의 집안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에제키엘 2,2-5 2),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코린토 2서 12,7ㄴ-10), 위르겐 몰트만, 그리고 기스펠트 그레사케는 모두 전능한 하느님과 전능한 사랑이 어떻게 다른지 우리에게 전한 것이다.
그것을 [무능함으로 표현된 사랑, 하느님은 전능하시지만, 사랑이신 하느님은 전능하지 않다!](오승원이냐시오 신부님, 2021년 3월 21, 『완성해가는 주일 강론』에서) 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랑이 전능하다면 그것은, 그 사랑은 힘이 되고 능력이 된다. 사랑이 권력이 될 때도 있다. 힘이요, 능력이요, 권력이 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힘이요, 능력이요, 권력일 뿐이다. 그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다. 힘이요 능력이요 권력이 된 사랑은 사람을 무릎 꿇게 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사랑은 희생으로 표현되고 희생으로 나타난다. 하느님도 희생 없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희생까지 받아들인 전능함이다.”
하느님은 전능하시지만, 사랑이신 하느님은 전능하지 않다는 명제는 연중14주 복음의 성찰의 포인트인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코6,1-60)는 것이 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구에 회자되는 집단무의식이 되었는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약함, 인간의 약함을 수없이 경험한다. 그 약함을 절대자에 의탁하여 벗어나고 싶어하는 종교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신은 전능하다는 명제가 믿는 이들 이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내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은 전능한 것은 맞지만 그 전능은 인간이 기획하는, 세상의 기준에 부응하는 왕중왕 혹은 슈퍼스타의 전능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이 인간이 되는 전능이고 신이 십자가에 죽을 수 있는 사랑과 용서의 전능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딜레마는 이 전능에 대한 역설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사가가 전하는 나사렛에서의 배척은 십자가의 길에서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제자들의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낸 예형, 전능으로 응답되지 않는 오늘 우리의 믿음에 대한 성찰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연중14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는 명제가 전하는 메시지는, 집단 무의식에 가까운 전능한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충돌은,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먼저 우리 자신에게 정립해야할 신자 정체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좋아한다. 이해불가능한 사건 앞에서, 하느님 맙소사! 하늘도 무심하시지! 라고 즉물적인 발언을 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에서 전능하지 않은 하느님을 믿지는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한 순간에 해결하지 않는 신을 믿지는 않는다.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에 못박혀 산산히 부서진 하느님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느님도 때론 자주 외로우실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 믿음을 내가 배신하지 않도록 하느님을 바라보는 나의 프레임이 헌 푸대인가? 새 푸대인가를 성찰하는 것이 연중14주의 은총의 초대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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