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에우카리스테인(εὐχαριστεῖν 감사)’의 원천, 신은 디테일에 있다(미스 반 데어로에)

나뭇잎숨결 2024. 7. 27. 07:37

 

 
 

 

 

‘에우카리스테인(εὐχαριστεῖν 감사)’의 원천, 신은 디테일에 있다(미스 반 데어로에)

-연중17주,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를 중심으로

 

 

 

 

1. 나태주, 「오늘도 너를 보았다」

 

오늘도 너를 보았다 / 여적 한 번도 보지 못한 어깨걸이 / 빨강색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너를 보았다 // 무슨 즐거운 일이 있는지 /친구와 웃으며 너는 걸어가고 있었다 / 너를 보았으므로 오늘 하루도 / 나에겐 뜻깊고 보람 있는 하루가 될 것이다 /오늘밤 꿈속에서 나는 또 너를 / 너도 모르게 만날 것이다.

 

나태주의 「오늘도 너를 보았다」는 ‘오늘도 나는 나를 보았다’로 바꿔 읽어도 크게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나태주 현상의 바탕에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감사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빨강색 가방을 메고 친구와 웃으며 걸어가는 너는 화자가 아는 너일 수도 있고, 익명의 명랑성에 끌린 것일 수도 있다. 화자에게 중요한 것은 너를 보았으므로 오늘 하루가 뜻깊고 보람 있는 하루가 될 것이란 사실이 전부다.

 

「오늘도 너를 보았다」의 화자처럼 그렇게 사소한 일상의 갈피를 볼 수 있다면, 모든 날들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와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은 누가봐도 참 기분좋은 그림이듯 말이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미스 반 데어로에)

 

 

 

 

 

2. "인간과 존재는 서로 서로에게 내맡겨져 있다."(하이데거)

 

 

 

자신이 달리는 운동장의 트랙이 너무 커서, 즉 시선이 너무 광대해서 자신조차 자신을 감당하기 버거웠던 이들이 역사상 가끔 있었다. 아마도 하이데거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 생의 운동장이 광대하다는 것은 1차적으로 고독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자신이 본 것은 동시대의 타인과는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깊은 이해는 그는 창조의 디테일을 목격한 사람이기에 신의 심장을 본 사람 특유의 말문이 막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러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도달하려다 보니 인간의 언어로 그 상황을 표현할 길이 없어 언어의 절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돌출하기도 한다. 하이데거의 글을 읽고 모국어독자들이 독일어를 독일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냉소를 던진 것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달리는 운동장이 크다는 것은 스펙터클한 사건만 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물, 모든 사건, 모든 인류 안에 창조의 사랑이 알알이 박힌, 그 디테일을 볼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렇다. 광대무변한 신이 아주 작은 것에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신비를 흘깃 엿본 것이기에 그렇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규명하느라 아마 외로운 줄도 모르고 그 넓은 운동장을 바톤터치할 누군가를 기다리며 혼자 달렸을 수도 있다. <존재와 시간>은 창세기의 철학적 버전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너무나 큰 틀을 가진 철학자라 하이데거와 같은 시대를 통과한 그 누구도 하이데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사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대신, 하이데거와 히틀러를 역사적 맥락으로 묶어 하이데거 철학을 평가, 재단, 폄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유>하면 떠오르는 철학자는 하이데거다.

 

하이데거에게 사유는 근원의식에서 바라본 감사였다. <에우카리스티아; Eucharistia; 감사>가 어떻게 사유일 수 있는가? 하이데거의 사유는 일반적인 사유가 아니다. 사유자체가 현현이라 할 정도로 하이데거는 사유로 하늘과 땅을 연결했다.

 

하이데거의 『사유란 무엇인가?』와 「하이데거에서 '사유'의 문제」(문동규)에서 인용했다. 하이데거는 사유를 통해 <발현, 현현>의 의미를 신학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바라보았다. 현현, 에피파니를 하이데거처럼 분명하게 설득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사유의 어떠한 길도 인간 본질로부터 출발하여 존재에로 이행하지 못하며, 혹은 거꾸로 존재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에게 되돌아가지도 못한다. 오히려 사유의 모든 길은 언제나 이미 존재와 인간 본질의 완전한 관계 안에서 진행될 뿐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사유가 아니다"

 

 

 

하이데거에서 '사유'는 '존재의 사유'다. 그런데 이 존재의 사유는 전통 형이상학적 사유인 '표상적 사유'에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존재는 표상적이고 계산적인 사유에 의해 처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있어 사유는 그러한 사유가 아닌 다른 사유, 즉 '사유'의 유래, 다시 말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그것'을 묻는 사유가 되는데, 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존재'다.

 

 

 

그러나 이 '존재의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 할 수 있는 그것인 '존재'와 그 존재의 말 건넴에 응답하는 '인간'이 '함께 속해 있다'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유는 하나의 '감사'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유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표상적 사유가 아닐 것임은 분명하다. 사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사유는 역시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답변하는 사유'이기보다는 차라리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사유'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묻는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하는 그것이 말 건네는 것에 '귀기울이는 사유', 즉 '응답함'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에서 사유는 존재의 말 건넴에 '응답하는, 대답하는 사유'인 것이다.

 

 

 

이를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 응답함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사유는 철저히 '존재에 대한 인간의 응답'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존재는 사유의 근본요소이며, 사유의 사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존재가 사유의 근본요소이자 사유의 사태라면, 존재의 사유는 사유의 본질적인 변화와 사유의 시선 변경 없이는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존재를 대상으로 취급하는 사유가 아니라 존재와 인간이 함께 속해 있는 가운데 존재의 말 건넴에 응답하는 사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와 인간의 '함께 속해 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것은 존재와 인간의 '함께 속해 있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어떤 두 가지가 '근원적으로' '서로 서로 속해 있음', '각자가 각자에게 서로 서로 속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두 가지가 각각 분리된 요소로 따로 존재한 후 서로 '결합'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서로 서로 속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와 인간이 함께 속해 있다고 할 때, 존재와 인간의 '함께 속해 있음'에서 '속해 있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함께 속해 있음'이 '서로 서로 속해 있는' 것이라면, 이 '속해 있음'은 단지 '존재에 귀기울이는 인간이 그 존재에 '속해 있다'는 사태뿐만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자기의 고유한 진리를 훤히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 '현-존재'의 열린 '그곳'을 '필요로 한다'라는 사태 관계도 지시하고 있다.

 

 

 

"인간의 탁월성은, 인간이 사유하는 본질존재로서 존재에게 개방된 채 존재 앞에 세워지고, 그리하여 존재와 관련된 채로 머무르면서 존재에 응답한다는 점에 고이 깃들어 있고, 존재는 오직 자신의 요구(말 건넴)에 의해서 인간에게 다가와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본래적으로 존재하며 존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속해 있음'은 인간이 존재에 '속해 있음'과 '동시에' 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진리를 훤히 드러내기 위해 현-존재의 '그곳'을 필요로 함으로써 인간에게 '속해 있다'는, 즉 '내맡겨져 있다'는 이중적 사태 관계를 지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속해 있음'은 존재와 인간이 '서로 서로 속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과 존재는 서로 서로에게 내맡겨져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로 서로 속해 있음'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함께'는 무엇인가? 이것은 존재와 인간이라는 분리된 두 개의 요소가 결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속해 있음' 안에 내재하는 두 가지 '본질 연관'을 의미한다.

 

 

 

'존재가 인간을 필요로 한다'고 할 때, 이 '필요로 함'이란 '존재가 스스로 탈은폐하며 던져옴', 즉 '발현함(Ereignen)'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존재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존재자체가 자신의 고유한 진리의 열린 장 안에서 인간에게 스스로를 알려오고 던져온다(다가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뿐만 아니라 존재자체는 인간을 무엇보다 먼저 존재자의 개방됨에서 존재의 진리를 지켜나가는 그러한 '현-존재'로 열어 놓으면서, 즉 인간을 존재의 고유한 진리의 열린 장 안에 탈자적으로 내존하도록 하면서, 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사유'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존재와 인간이 항상 '함께 속해 있다'는, 그것도 근원적으로 '서로 서로 속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이 발현의 필연성이다. '그것', 즉 '사유해야 할 사태'에 응답할 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유가 말 건넴을 받고 있는 바로 '그것'에 응답할 때, 우리는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진정으로 대답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응답함' 내지는 '대답함'의 전형적인 어떤 상태다.

 

 

 

사유란 본질의 보호 아래에 내맡기는 것이고,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명하는가?를 물을 때, 사유는 일종의 기억이자 감사다. 그런데 '감사한다'는 것은 자신이 은혜 입은 것에 대해 감사 입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감사하는가? 그것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끔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깊이 사유를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우리들에게 명령하는 것은 아직까지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던 '존재의 이중성', 즉 '존재하고 있는 존재자'와 '존재자의 존재하기'의 이중성인 것이다.

 

 

 

결국 하이데거는 「사유란 무엇인가?」에서 '사유'란 '감사'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즉 우리의 최고의 감사는 바로 사유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감사는 '사유해야할 것', '사유되어야 할 것', 즉 '가장 깊이 사유를 요구하는 것'을 회상하는 사유다. 말하자면 우리가 '가장 깊이 사유를 요구하는 것'을 사유하는 한에서, 우리는 본래적으로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장 깊이 사유를 요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존재자의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본래적인 사유, 또는 시원적인 사유, 본질적인 사유, 근원적인 사유는 "존재의 은총에 대한 반향"인 셈이다.

 

 

 

그렇기에 하이데거는 '존재는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를 준다"라고 말한다. "존재, 그것에 의해서 모든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소묘되는 그런 존재는 곧 현존을 뜻한다." "현존을, 즉 존재를 주는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존재는 자신을 열린 장으로 이끌어오면서 이러한 현존을 허용해 주는 '현존하게 함'으로, 즉 '주고 있는 그것'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서 그 '줌'에 속해 있는 것으로 사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존재를 현존으로서 주는 그러한 줌'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그것이 존재를 준다'에서 그 '줌'을 "보냄"이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주는 것', 즉 '그것'에 의해 '보내진 것이며, 역사상의 시기마다 '주는 것'에 의해 보내진 '운명적인 것으로 보내진 것들'이다. 그래서 "존재의 역사"는 곧 "존재의 보내져 옴"을 의미한다.

 

 

 

그런데 존재를 주는 '그것(Es)'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그것이 존재를 준다'에서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발현'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존재를 준다'는 것은 '발현이 존재를 준다'라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존재자의 존재에 응답하며 다가가는 그런 응답 속에 체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발현(Ereignis)' 혹은 ‘현존(Anwesen)’은 자기 존재를 줄 수밖에 없는 상태를 칭한다고 할 수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존재자와 존재는 '함께 서로에게 내맡겨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기에 사유의 끝에 이르러 인간은 <에우카리스티아; Eucharistia; 감사>를 할 수 밖에 없다.

 

 

 

 

 

페드로 오렌테,  <빵과 물고기의 기적>

 

 

 

 

3.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요한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연중 17주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라고 전하는 요한 6,1-15은 마태오14, 13-21/마르코6, 3—44/루카9,10-17에 실려있는 오병이어의 기적 혹은 표징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뿐 아니라 믿음조차 없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감사와 찬미, 축복의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가 우리 인생 전체를 봉헌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은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표징을 이루는 <감사를 드리시다>는 말씀이 우리의 존재이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주 복음인 마태오복음 사가가 전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기적을 여는 문을 찬미로, 마르코 복음 사가도 찬미로, 루카 복음 사가는 축복으로, 그런데, 이번주 요한 복음 사가는 감사를 드리신 다음(11절)으로 오천명이 먹고도 열두광주리에 남을 스펙터클한 기적이 있어나는 그 모멘트를 감사라고 전한다. 네 복음서에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이 작은 봉헌이 궁극적인 맥락에서는 존재자체라는 것에서는 같다.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이 배부르게 먹었다>는 풍요의 원천이고,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사중 독서를 들은 다음에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복음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라고 응답을 한다.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그리스도께 드리는 찬미는 "에울로게인'(eulogein: 찬미)과 "에우카리스테인"(eucharistein; 감사)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찬양(찬미)과 감사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고 봄이 마땅하다.

 

그것을 엘리사와 바오로 사도는 같은 맥락의 다른 표현으로 풍요의 원천이 말씀으로 인한 하나(Oneness)임을 바라보는 것에 초점을 놓는다. 하나라는 것은 풍요의 원천이다. 

 

제1독서에서 엘리사는 <먹고도 남을 것이다.> (열왕기 하권 4,42-44)

 

그 무렵 42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다. 43 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44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에페소서 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고 임언기 안드레아 신부는 「미사는 "에우카리스테인"(eucharistein; 감사)」라는 강론에서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천주 성자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모님의 살과 피를 취하고 육화되었듯이, 성찬의 전례 안에서 신품권을 가진 사제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할 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두번째의 육화가 이루어진다. 참으로 말씀의 위력이다. 특히 미리 믿음으로 드린 감사의 위력이다. 우리도 일상 생활에서 감사의 단어를 자주 발함으로써 <마음의 웃음과 기쁨>인 감사가 가진 말의 위력을 체험하자. 감사는, 15초 크게, 길게, 소리내어 배로 웃을 때 나오는 200만원 어치의 엔돌핀의 4,000배인 다이돌핀이 나와 암세포까지 제거해 주어 망가진 생명을 다시 돌려준다고 한다. 그래서 미사 <감사송>에 보면, 인간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인간의 도리요 구원의 길이라고 한다.

 

 

대구가톨릭대 교수인 정래곤 안드레아 신부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나누어 주시기 전에 먼저 감사의 기도와 함께 축복하셨다고 요한 복음사가는 강조합니다(11절 참조).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는 ‘에우카리스테인(εὐχαριστεῖν)’이라는 동사인데, 예수님의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질문에 오늘 복음에는 무명의 한 아이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도 역시 사도들처럼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오늘 복음의 사도들처럼 “제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수많은 부족함을 지닌 제가 감히 어떻게 예수님의 사명 안에서 그분을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주님께서 하시지요. 얼마 되지는 않지만 있는 그대로, 있는 그만큼의 빵과 물고기를 거룩하신 당신 손에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 모두도 부족한 우리 자신을 내어놓을 때 세상의 많은 이들을 위해서,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위의 엘리사, 바오로, 임언기 신부, 정래곤 신부의 전언을 종합하면, ‘에우카리스테인(εὐχαριστεῖν) 감사’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 진다.

 

감사는 비교우위에서 주어진 생존의 상황에서 바치는 일회적인 안도감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신학의 중심축인,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9,30)”라는 인식,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통찰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소서 4,1-6)”는 광의의 의미속에서, 감사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임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아,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를 인식이 감사의 어령, 기적과 표징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가 준 생존의 모든 것을 축복하시며 선물로 받으신다. 여기서 보리빵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과부의 헌금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린 가장 완벽한 봉헌은 우리 존재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분리는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아니라면 그것은 감사가 아닐 것이다. 감사는 선택적이지 않고 종합적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원수조차도 사랑해야 하는, 일곱 번씩 일흔일곱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은 하나로 가는 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를 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평화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평화를 알 수 없다면 어떻게 하늘을 우러러 감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분이 우리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푸는 이유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겠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는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기에, 모든 사물의 존재이유까지 창조의 사랑인 하나에 포섭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여정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배우는 여정이고 그것이 기적과 표징을 낳는 감사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감사는 상황논리에 죄우되지 않는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매사에 감사하십시오!라고 전한다. 이래서 감사하고 저래서 감사한 것이 아니고, 그냥 존재자체가 감사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일어나는 빵의 기적은 바로 그런 하나라는 것을 표징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배불리 먹었다>는 의미는 <하나>라는 것에는 어떤 세속의 잣대나 평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또한 내포되어 있다. 사랑에서 오는 포만감(충만함)은 그 무엇도 강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코11, 24)

 

오천명을 먹이신 표징의 서막인 감사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두려움도 죽음도 없다는 것을 또한 전한다. 감사는 희망의 원리이기에 그렇다. 감사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영적 감수성에서 촉발된다. 이는 창조의 디테일을 볼 수 있는 감수성이다. 그 영적감수성 어디에 두려움과 죽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그리스도의 자아에 예외적인 상황, 예외적인 인류는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임을 감사할 수 있는 자아를 만들 수 있는 통로는 매일 매 순간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감사를 받는대로 주라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감사하기를 그친 적이 결코 없다는 것을 잊지말라는 말로 바꾸어 바라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그 어떤 사건 그 어떤 사물 그 어떤 사람도 배제하지 않은 존재함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희망과 충만의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