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분이가 세미원에서, 탱큐!
살아있는 빵, 몸(soma)과 살(sarx)의 키아즘(chiasme)을 지나
-연중19주일, “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를 중심으로
1. 파울 첼란, 「그대도 말하라」
그대도 말하라, / 마지막 사람으로,/그대의 판정을 말하라.//말하라ㅡ/그러나 '아니요'를 '예'와 가르지 마라./그대의 판정에 뜻도 주라./그것에 그림자를 주라.//그것에 그림자를 충분히 주라./그것에 그만큼을,/네 주위 한밤중과 한낮과 한밤중에/두루 나누어 줄 수 있는 만큼 주라.//둘러보라./보라, 사방이 살아나고 있다 ㅡ/죽음 곁에서! 살아나고 있다!/그림자를 말하는 이, 진실을 말하는 것. // 지금 그러나 그대 선 곳이 줄어든다./어디로 이제, 그림자 벗겨진 이여, 어디로?/오르라. 더듬어 오르라. / 그대 점점 가늘어지고, 점점 희미해지고, 점점 섬세해진다!/더욱 섬세해져 이제 한 올 실낱이다,/그가, 별이,/타고 내려오고 싶어 하는 실낱./낮은 곳에서 유영하고자, 낮은 곳,/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곳, / 떠도는 말들의 물살에서.
파울 첼란의 「그대도 말하라」에서 <말하다>는 것은 끊임없이 <사유하디>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자기 생의 빛과 그림자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빛과 그림자가 각각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의 키아즘(chiasme) 이라는 것을 알면 알수록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게되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파울첼란의 시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키아즘Chiasm 구조를 따르는데, 키아즘이란 교차 병행 대구법으로 A와 A`의 교차 병행의 제시와 설명의 내용을 말함으로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간을 제시한다.
‘아니요’와 ‘예’를 가르는 것이 판정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르지 않는 판정을 하라는 것이다. 파울첼란은 “그러나 '아니요'를 '예'와 가르지 마라./그대의 판정에 뜻도 주라.” 판정은 오직 판정할 수 없다는 것에 이르러, 파울첼란이라는 시인이 얼마나 큰 스펙트럼의 삶을 살았는가를 추론해 볼 뿐이다.
2. 나는 바깥에서 나를 만나지 않고, 내 안에서 타자를 발견한다(질 들뢰즈)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사유능력이 없다면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빛 혹은 어둠으로, 가볍게 혹은 무겁게 인식할 수 없다. 생각할 수 있는 지각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세계 내에서 대상을 발견하고 또한 타자와 나를 인식하는 인간의 존재방식이 지각 내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떻게 탄생할까? ‘생각’ 하면? 우리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라틴어 코기토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적인 원리인 로고스와는 달리 인간의 인식 능력을 뜻한다. 중세 유럽에서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스콜라철학의 진리가 붕괴함으로써 인간의 판단 능력은 의지할 곳을 상실하게 된다. 로고스로서의 이성이 절대적 권위로 버티고 있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로고스의 위력이 사라진 곳에서 인간은 어떻게 진리와 참을 판단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이러한 질문 앞에서 일종의 사고 실험을 감행했다.
이처럼 생각하는 내가 어딘가에는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진실을 발견한 바에 따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터무니없는 회의주의적 의심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참이다. 따라서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를 철학의 제1원리로 결정할 수 있다.(『방법서설』(1637년)) hoc pronuntiatum: ego sum, ego existo, quoties a me profertur, vel mente concipitur, necessario esse verum. 나다, 내가 있다.라는 명제를 말하거나 생각할 때 필연적으로 참이 된다. (『제1철학에 관한 성찰』(1641))
우리가 즐길 만한 최소한의 의심까지도 모두 거부하는 동안, 그리고 그것이 거짓이라고 상상하는 동안, 우리는 쉽게 신이나 하늘, 신체까지도 없다고 가정할 수 있으며,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손이나 발, 그리고 마침내 몸 자체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가정할 때 이러한 것들이 진실일까에 대해 의심하는 동안, 매 순간 그러한 의심을 하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이러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지식은 철학에서 주어지는 가장 확실한 제1의 지식이다.(『철학 원리』(1644))
데카르트는 이를테면, 우리의 감각은 때때로 우리를 속이기에, 나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것이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기로 하였다고 말한다. 합리적인 사람도 종종 오류에 빠지기 때문에, 또한 잘못된 논리에 빠지는데 이를테면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 사실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종종 오류를 저지르는 자기로서는 여기에 제시된 모든 합리를 거짓이라고 치부할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깨어있을 때 경험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사상을 꿈속에서 겪는다면 무엇이 진실인지 분간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나란, 내가 깨어있을 때 내 마음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 역시도 내가 꿈속에서 보는 환상과 마찬가지로 진리가 아닐 수 있다고 가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찰에서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모든 것을 거짓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책의 각주에서 위의 문단에 대해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주어진 철학에서 얻는 제1의 지식이다."라고 거듭 부연하고 있다.
데카르트와는 다른 맥락에서 인간의 의식은 오직 몸을 통한 '육화된 의식'이라고 바라본 메를로퐁티가 있다
표현과 표현된 것, 기호와 의미 작용의 관계는 원전과 번역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와 같은 유일한 의미의 관계가 아니다. 신체도 실존도 인간 존재의 원본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각각 상대를 전제하고, 신체는 응결된 또는 일반화된 실존이며, 실존은 끊임없는 육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존이 사람들이 다른 것들로 환원시킬 수 있는 또는 이것들 자체가 환원될 수 있는 ('심적 사실들'과 같은) 사실들의 질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사소통의 모호한 환경, 자신의 한계들이 흐려지는 지점, 또는 그야말로 자신의 공통적 씨실이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1945))
그래서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상호적인 것이 되고 누가 보고 누가 보여지는지 더이상 알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언제나 ‘살chair’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한 가시성, 즉자적인 감각성의 그러한 일반성, 나-자신의 타고난 그러한 익명성이다. 우리는 자연인으로서 일종의 키아즈마(chiasma)에 의해 우리가 다른 것들이 되고 우리가 세계가 되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그리고 사물들에서, 우리에게 그리고 타자에게 놓여진다. 신체를 통과하는 주름들은 안과 밖의 이중성으로 표상된다. (메를로 퐁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4))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몸'은 지각하는 주체이자, 지각당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만질 때, 지각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된 지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를 현상학적으로 보면, '의미'가 드러나는 장소인 동시에 '의미'가 발생하는 장소가 되는 곳이 바로 '몸'인 셈이다. 따라서 '몸'은 '주체와 대상이 순환적으로 엮이어 있는 곳'이다.보통은 '의식'이 '대상'을 지시하고 있지만, '몸'이 지시하는 의미는 '몸'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지각은 의식과 상관없이 그 지각이 이루어지는 '몸' 자체에서 '지각의 변형(보완)'을 일으킬 수 있다. 즉, '의미'가 생성되고 드러나는 '몸'에서, '지각된 요소'는 '구조(형태)'로 파악된다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인간 이해의 대전제이고 그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육화된 의식' 이라는 개념이 도출된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세계야말로 모든 '의미'의 발생기반이고, 그 장소는 몸(신체)이 될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철학을 전개해 나갈 때 '의식'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몸(신체)'의 관점에서 설명해야 된다고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하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후기로 갈수록 전기철학에서 현상학적 시각이 이분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는 데에 스스로 문제의식을 느낀다. 현상학은 '주체(의식)-대상'이 '대상'을 지시하고 그것에서 의미를 찾는데 있기 때문에, '지시하는 것'과 '지시당하는 것'의 이분법적 사유틀을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즉,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몸' 개념을 주관과 객관, 감각과 이성의 구분이 없어지는, 이분법이 사라지는 곳이라고 말했지만, 철학적 사유를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물질적 몸'과 '현상학적 몸' 사이에는 '지시하고 지시당하는' 현상학적 이분법의 틀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파악했던 것이다. 따라서 후기철학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상학' 대신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가져오게 된다.
후기 철학으로 대표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메를로 퐁티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큰 영향을 받는다. 하이데거 존재론은 존재는 세계라는 한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매번 자신의 선택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며 세계를 확장시킨다. 즉 존재는 '세계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세계에 영향을 주는 존재'이다.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면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는 다시 그 속의 존재를 변화시킨다. 여기서 개별과 전체는 구분되지 않으며 개념은 순환을 이루기 때문에, 지시하고 지시당하는 지향적 개념이 사라진다.
특히 후기철학에서 메를로 퐁티는 '살(chair)의 개념'을 강조한다. '살'은 감각하는 피부 표면과 그 표면 밑에 숨겨진 '살'에서 파생된 개념으로, 메를로퐁티가 사용하는 ‘살'은 지각으로 느껴지는 물질적인 육체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지각 이면에 숨겨져서 보이지 않던 존재 의미가 마치 지각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피부 위로 느껴지는 '지각'보다 둔하고 애매하여 파악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몸'의 체험은 살의 존재론으로 바라볼 때, 단순히 지각된 경험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 '체험'이다. 여기서 '몸의 체험'을 통해 '나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체험하지 않은 장소에서 의미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렇게 한계지어진 존재론적 장소를 말하는 것이 '살(chair)'이며, '살'은 지각함과 동시에 그 지각의 내면에 있는 존재 의미의 다양한 가능성을 체험해주게 하는 요소가 된다. 이 '살'의 세계에서 '주관과 객관', '감각과 이성', ‘타자와 나’의 구분이 사라진다. 이 구분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살’이고 이때 ‘살’은 주체와 대상으로 나뉠 수 없는 ‘익명적’인 ‘신체’가 된다. 이는 들뢰즈의 ‘주름’처럼 피부(지각) 밑,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로 존재한다고 하여 '두께'라고 말하기도 하고, 여러 의미들이 겹쳐져서 느껴진다고 하여 '주름'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바깥에서 나를 만나지 않고, 내 안에서 타자를 발견한다(질 들뢰즈)
르네 데카르트가 육체/정신을 이원론적 존재론을 설정할 때, 세계의 주체는 생각하는 ‘나’가 된다. 그러나 육체와 정신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식은 오직 몸을 통한 '육화된 의식'이라고 바라본 메를로퐁티가 있다. 즉, 데카르트가 생각이 순환되는 자신의 '의식'을 진리로 삼았듯이, 메를로 퐁티는 주체와 대상이 순환적으로 지시하며 스스로를 현상하고 있는 '몸'을 진리로 삼은 것이다.
3.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요한 6,41-51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42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라고 전하는 요한 6,41-51은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마태오13,54-58/마르코6,1-6/루카4,16-30)와 연결하여 진리의 출처와 진리의 내용이 상충될 때, 믿음의 여정이 어떤 과정을 밟게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어지는 52-71절의 성체성사론은 강생의 신비를 믿지 않는 이들-나자렛, 갈릴레아 사람 모두 유다인이라고 지칭되기에 이르면서, 유다인들의 어려움은 성령으로 새로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의 논리로 추론하는 진리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즉 자연 본성에 맡겨진 사람은 결코 육화된 말씀의 차원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출생성분에 대해)수군거리다(유다인끼리)-논쟁하다(유다인끼리-예수를 따르던 제자들 사이에서)-대논쟁하다(유다인과 예수님)-고발하다(유다인과 예수님)는 것은, 불신앙의 필연적 여정에 이르게 되는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군거림의 시작이 믿지 않는 이들과 믿는 이들로 확연히 갈릴 뿐 아니라, 더 무서운 것은 예수를 믿는 이들의 허약한 믿음은 자신을 속이는 신앙의 트릭스터가 되게 만든다는 점에서 유다인들의 논쟁은 결국 제자들의 믿음의 여정 그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이스카이웃의 배신, 베드로의 배신이라는 배신의 아이콘이 싹트기 시작한 원천에 해당한다.
여기서 유다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이라는 진리의 출처에 넘어진 사람들이라면,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제자들은 <살아있는 빵이다>는 진리의 내용에 걸려넘어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요한 6,41-51)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 14)는 강생의 신학은 곧 십자가신학의 모태고, 강생과 십자가 신학이 곧 부활신학의 모태라는 요한복음의 큰 그림을 연중19주의 축복으로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6,41-51 도식해 보자면, Ⓐ문제제기: 저 사람의 출신성분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데,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답이 Ⓑ답1, Ⓒ답2에서 주어지지만, 그 답은 인간의 지적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답이 된다. 답을 알려주신 분이 우리 안에 현존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은총의 상태가 답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42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요한복음 사가는 41절과 42절에서 예수의 자기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유다인이라고 불신앙자로 통칭뒤면서, 그들이 불신앙자로 분류된 이유는 생명의 빵이라는 선언보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라는 구절로 모아졌다는 점에서 집단 무의식의 근원이 생물학적인 유전자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다인들의 수근거림은 육화의 신비앞에 선 인간의 걸림돌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관복음에서 보여준 동정녀잉태에 대한 반감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름, 주소, 족보, 학력 등 사회적 위치로 규정함으로써 유다인들의 선민의식의 허상을 노출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창세기1,26-27) 창조의 사랑을 거스름으로써 인간으로부터 하느님을 제외시키는 자기신앙을 뒤집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나아가 하느님 능력에 대한 거부, 하느님 자유에 대한 제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진리의 출처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망각한 신앙인의 원천오류라고 할 수 있다.
연중 14주일에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서(7,12-15)에서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함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에서
“돌무화나무를 가꾼 경험과 기술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예언자로 부르셨다는 것은 앞으로 그를 통하여 이루어질 하느님 일에 관한 모든 능력은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뜻합니다.”(김재덕 베드로 신부, 대전교구 천안 원성동 성당)라고 전한다.
연중17주간 금요일 제1독서 예레미야26,1-9절에서 “내가 너더러 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모든 말을 한마디로 빼놓지 않고 전하여라.”도 같은 맥락으로
“그들의 잘못은 하느님의 뜻을 자신들이 결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유를, 하느님의 행동 범위를 인간이 제한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나에게 오는 통로는 내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들으려면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어떤 경로로 말씀하시더라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놓아야 합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성 도미니꼬 선교 수녀회, 대전 가톨릭 대학교)
유다인들의 수근거림에 대한 답으로, 진리의 출처는 오직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43-45절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3절~45절은 <온다, 듣다, 배우다, 보았다>라는 동사를 통해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면,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로 모아진다. 여기서,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세례자 요한처럼 미리 하늘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도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를 알아보는 것이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은총이라는 성서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인용구인 이사야54, 13/예레미야3, 33-34에서 그들은, <모두> 즉 <모든 이>는 선민사상이 아닌 보편적 은총의 초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직접 들어서든 혹은 직접 배워서든 모두 내적인 경청을 의미한다. 배운다는 것은 이런 내적 경청이 자기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과정을 통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이끄셨다는 것을 믿게 되고 믿게되면 감사하게 된다.
그런데 46절의 <보았다>는 것은 육안으로의 확인이 아니라, 창조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가 <보았다>라는 동사로 수렴되면서,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결과가 아들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것이라면, 그 역으로 아들 예수를 통해야지만 아버지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 재강조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언제나 하나이며, 동행한다는 선재사상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어지는 47절 이하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진리의 내용이 제시된다.
Ⓒ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47-51은 만나와 대조되는 하늘의 빵이 죽음과 삶이라는 생명유무로 갈라진다. 생명의 빵,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영원히 살게하는 지의 여부로 모아진다. 51절에서 만나와 생명의 빵과의 대조는 미래적인 선물로 언급된다. 이는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자기자신(살)을 제헌할 예수의 죽음이 동시에 언급된 것이다. 이는 생명의 빵에 대한 결론이자 동시에 성체성사에 관한 가르침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이라는 표현은 공관복음(마르코14,24/마태오26,28)과 비교될 수 있는 말로써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릴 피와 연결된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성체성사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살로 시사된 것이다.
그렇다면, 세세대대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칠 예수의 사랑을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살'을 강조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다. 공관복음에서는 <몸>으로, 바오로 사도는 <몸과 살>로, 요한복음은 <살>로 표현한 그 차이점을 무엇인가? 하는 것이 성찰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바오로 사도는 <몸과 살>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바라본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흙으로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고, 썩는 것은 썩지 않을 것을 물려받지 못합니다.”(1코린토 15장, 1-58)
이에 대해 심상태 신부님은 『인간;신학적 인간학 입문』에서 바오로 서간문에서 육신 내지 몸으로 이해될 수 있는 소마라는 단어 이외에 살로 이해될 수 있는 사르크스를 쓰고 있으며, 이는 살이라는 사르크스가 몸이라는 소마와 동일시 될 수 없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바라본다.
“바오로는 살(사르크스)이라는 말로 몸 자체를 나타내기 보다는 육체성에 얶매어서 헤어나지 못하는 부패한 인간 본성을 지칭하였다. 여기서 사르크스는 인간의 육신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생활하는 인간의 존재양식을 표시한다. 이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육신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거슬러 살에 탐닉되어 있는 삶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으로 바오로는 파악하고 있다. 그는 피조물로서의 육신적 인간의 나약성과 하느님의 위대함을 대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 복음 사가는 성체성사론의 도입부분에 해당하는 49-51에서 <몸>대신 <살>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하느님 약속과 계약의 실현-하느님 사랑의 자기구속성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무지개가 글룸 사이에 드러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 위에 사는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악을 기억하겠다.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사는 모든 살덩어리들 사이에 내가 세운 계약의 표징이다(창세기9, 1-17)
하느님 사랑의 자기구속성은 세례사건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그 맥락에서 <살>의 의미를 바라보아야 할 듯하다(마태오3,13-17/마르코1,9-11). 회개할 것이 없으신 분이, 죄의 용서를 받을 부분이 없는, 무죄한 분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분의 강생은 인간과의 차별화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낮은 상태로의 현존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겠다. 그 맥락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몸> 대신 <살>은 인간의 실존 한가운데 계신 그분의 현존을 의미한다.
어떤 현자는 이렇게 말한다. "살은 '거기'(là-bas)로 전환될 수 없는 어떤 '여기', 즉 물리적 공간에 앞서는 절대적 '여기'이다. 이 '여기'라는 용어는 우선 주어질 어떤 존재를 규정짓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살의 본질 자체를 가리킨다. 살은 모든 가시적인 것을 이중화하는 비가시적인 것의 형태 아래에서 전도된 혹은 간접적 방식으로부터 자신의 뿌리의 증거를 이룬다." 즉 세계로 지향된 살의 절대적 현존은 동시적으로 살이 자신을 확립하면서 세계로 열려진 현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살>은 몸이나 육신보다 훨씬 구체적인 인간 실존-낮은 실존을 가리킨다. 여기서 영원이라는 문을 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그분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우리를 위해 내어줄 당신 자신을 <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살>이라 한 은총의 볼텍스(vortex 소용돌이)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성찰할 차례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42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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