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군이 탱큐!
성체성사적인 삶, 시간적 존재인 우리가 어떻게 영원을 살 수 있을까?
-연중20주일,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를 중심으로
1. 이향지의 ⸀소금의 행로」
이향지의 「소금의 행로」를 다시 읽어본다.
바다로 곧장 떨어지는 빗방울은/소금이 되지 못한다 //고기의 내장을 들락거리지 않는 물은/거름이 되지 못한다 //어제도 나는 산을 노래했다/산은 나를 노래하지 않았다 //먼 것이 먼 것을 가리는 날/혓바닥에 얹히는 소금
이향지 시인의 「소금의 행로」는 소금에도, 거름에도 어떤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한 톨의 소금은 어떻게 바다와 염전과 저잣거리를 거쳐 내 식탁에 놓이는가? 이는 소금의 행로를 통해 나의 행로는 무엇인가를 묻는, 경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함부로 이름 붙이지 않겠다는 묵직한 발언에 가깝다. 나에게 오지 않은 것, 내 것이 아닌 것은 노래하지 않겠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비트켄슈타인 버전에 해당하는 목소리다. 내 삶을 통과한 것만 나에게는 꽃이고, 사랑이고, 소금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다로 곧장 떨어진 빗방울, 고기의 내장을 들락거리지 않은 물은 소금이 될 수 없고, 거름이 될 수 없다. 먼 것이 먼 것을 가리는 날, 그 바다를 통과해 내 혀에 놓인 한 톨의 소금! 그 소금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산 가운데 내가 등산한 산만이 산이 되는 것이다. 내가 산을 노래했기 때문에 산은 산이 되는 것이다.
"내 생애를 관통해 지나가는 것만이 내게 의미 있는 어떤 것이 된다. 제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것들도 내 삶에 들어와 부대끼지 않은 것들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 허연 시인은 말한다. "바다로 곧장 떨어진 물방울을 소금이라 하지 않고, 무엇인가의 내장을 거치지 않은 물은 거름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내 삶과 만난 것들만이 내 인생에서 하나의 의미가 된다. 먼 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냥 먼 것일 뿐. 내 것이 아닌 것들을 위해서는 이제 노래하지 않겠다"
먼 것은 내 것이 아니다. 그냥 먼 것일 뿐, 이것은 세계를 먼 것과 가까운 것으로 구획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으로 스며들지 않은 것들에 대해 알 수 없으므로 말할 수 없고 따라서 노래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생을 관통해 지나간 것만이 내게 의미가 있다는 이런 뜨거운 고백은 사실 자신에 대한 준엄한 질문을 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웜홀ⓒ Jurik Peter/Shutterstock.com
2. ‘오늘’이라는 ‘영원’, 그 웜홀 a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 interface(3)
그렇다면, 내가 누구지 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나라는 사람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에 갇혀있는 사람인지, 영원을 살고 있는 사람인지 알 때만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에 갇혀 있다는 것은, 단지 내가 지닌 시간관만을 표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몸과 마음을 가진 이중의 존재로 규정할 때만이 나올 수 있는 시간관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영원을 살고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을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진 삼중의 존재로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원은 시간을 벗어난, 혹은 시간과 무관한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①시간의식의 분석은 기술적 심리학과 인식론의 매우 오래된 교차점이다. 여기에 놓여 있는 극히 곤란한 점들을 깊이 깨닫고 이러한 문제에 필사적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최초의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고백록』 11권 14장에서 28장까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간문제에 몰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부분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에드문트 후설)
②마음은 기대. 지각. 기억이라는 기능을 통하여 기대한 것으로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사실 미래의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미래의 일에 대한 기대를 이미 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시간은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지나가는 것인 까닭에 길이가 없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지각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하는 까닭에 미래의 존재는 그것을 통과하여 과거의 존재로 변천해 가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①에서 후설은 <시간 문제>를 성찰하려면 반드시 아우구스티누스를 우회할 수 없다고 술회한다. 에드문트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에서 전개된 후설의 현상학적 시간론은 객관적 시간(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시간)을 그것이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해명하는 것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사용하여 시간과 시간의식의 상관관계를 해명하고 여러 차원의 시간과 여러 차원의 시간의식을 체계적으로 해명함을 목표로 한다. 다차원적 시간의식과 그를 통해 경험되는 다차원적 시간을 해명하는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현상학의 전개를 위해 꼭 필요한 분야이며, 현상학의 전체 체계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시간의식은 그것과 결부되지 않은 의식이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의식이며,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작동하는 근원적인 의식이기 때문이다.
②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며 ‘기대-지각-기억’, 즉 마음이라는 체에 걸러진 것만을 시간으로 인식한다고 보았다. 과거는 현재의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의 현재이며, 미래는 현재의 미래라는 관점이다. 그는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경우, 어느 그윽한 곳에서 오고, 현재에서 과거로 갈 경우 어느 그윽한 대로 흘러, 미래인 어디로부터 현재인 어디로 해서, 과거인 어디로 흐르며, 현재인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통하여 지나가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③우리들을 현실 자체에 직면시켜야 한다.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물질계의 모든 역사에 걸쳐 적용되는 수학적인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그 시간은 나의 조바심, 다시 말하면 마음대로 더 늘일 수도 없고 더 줄일 수도 없는 나에게 속하는 지속의 어떤 부분과 합치하고 있다. 그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것이다. 모든 행동은 미래를 조금씩 잠식하는 것이다. 이미 더 이상 없는 것을 붙잡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예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의식의 첫 번째 기능이다. 의식에게 있어서 현재란 없다.(앙리 베르그손)
④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다. 미래의 외재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론들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다.(레비나스)
⑤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이다. 타인의 지배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유한하고 고독하고 불안으로 가득찬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래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사유하는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므로 유일하고 변하지 않으며 모든 시대의 문화에 통용되는 존재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부름에 각자의 방법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 응답이 감사이며 반향이다.(하이데거)
⑥현재는 과거로부터 파생한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를 조건 짓고 있으며 미래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에 들어있는 냉혹한 하나의 사실이다. 미래는 현재가 그 자신의 본질 속에 그것이 미래에 대해서 가지게 될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현재 속에 내재(內在)한다. 현재가 미래에 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현재 속으로 선취(先取) 되어 내재한다. 현재는 자신을 부단히 넘어섬으로써 과거를 만들고 그것을 자신 속에 지양, 보존하면서 세계 속으로 나아간다(화이트헤드)
③에서 ‘창조적 진화’를 주장했던 베르그손은 우리가 체험된 시간(질적)과 시계의 시간(양적)을 동시에 살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인 질적인 시간만 ‘실재적인 지속’ 이므로, 그 시간만 미래적인 의미라고 보았다. 베르그손과 같은 맥락에서 사르트르 역시 인간의 미래란 인간의 자유, 즉 미래에 기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미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④에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시간의 주인으로서 주체적 시간관과는 달리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홀로있는 주체라는 사르트르의 관점이나 베르그손이 바라본 ‘순수한 지속의 의미인 시간이 아닌, 나치의 수용소에서 『시간과 타자』를 쓴 레비나스에게 시간에 대한 기대나 예측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타자라고 보았던 것은 당연하다. 타자는 항상 나의 기대나 예측을 배반하고 예측불허의 시간 속에 출현하는 존재이므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시간을 바라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⑤에서 하이데거는 레비나스와 다른 시간관을 통해 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로 보았다. 시간 앞에서의 ‘나’의 유아론적 주관주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있음’ 속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있음’에 주목하고 관여할 때만이 존재자에 속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그 자신의 존재에 속한다는 특권이 나오므로 비로소 존재자에 떠맡겨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시간 속에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긍정하는 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⑥에서 화이트헤드는 시간이란 현실적 존재가 객체화되는 과정이라고 바라보았다. 나라는 주체는 어떤 시간을 경험하고 그로써 주체로서의 존립을 끝내고 술어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하나의 우주질서의 과정을 살아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실재로 오늘은 “히틀러는 무엇이다”처럼 주어였지만, 내일은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이다”로 서술어가 된다고 보았다. 물질이라는 우주의 시간은 ‘나’를 지우는 냉혹함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⑦시간이 멈추면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문제란 어느 시점의 지각이 빚어낸 인공물에 불과합니다. 평화의 상태는 공간이며 모든 것이 공간 속에서 공간에 의해 존재와 경험을 갖습니다. 이때 시간은 더 이상 경험하지 않으므로 미래를 우려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지난일로 고통받거나 다가올 일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시작도 결말도 없기에 상실이나 비탄이나 욕망이 없습니다. 순수한 지각만이 모든 세상과 모든 우주를 넘어 시작도 끝도 없는 빛으로 ‘나’를 비춥니다. 그때 ‘나’는 몸이라기 보다 ‘그것’인 것같이 됩니다. 보편의 체험입니다.(데이비드호킨스)
⑧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도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 미래가 당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의 의식 상태에 달려 있다. 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과 화해함으로써 가능하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깨닫는다.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삶은 춤추는 자이다. 당신은 춤이다. 마음은 언제나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를 가정한다. 그 마음을 넘어야 현존의 의식이 깨어나고 그때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 이 모든 실체를 하나의 전체로 연결한다. 현존이란 바로 오늘을 사는 지혜, 오늘 이 순간을 맛보는 집중력, 그러니 현재에 머물라, 그때 세계는 이원성을 뛰어넘는 완전한 하나Oneness가 된다(에크하르트 톨레)
⑦에서 데이비드 호킨스 ⑧에서 에크하르트 톨레가 바라본 시간은 시간이 사라진 상태, ‘오늘’을 사는 존재론적 시간에 대한 통찰이다. 두 사람은 물질의 우주에서 영혼의 우주를 통합하고 넘어선 시간을 사는 현대 영성가들이다. 두 사람이 바라본 ‘오늘’이라는 시간도 우리가 말하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분절된 의미로써의 ‘오늘’이 아니라 ‘평화’라는 어떤 상태로, 영혼의 현주소를 의미한다. 이때, 시간이 사라진 상태에서의 평화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J의 언명이 적시하는 바로 무시간의 시간체험과 같은 맥락이다.
위의 7명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바라본 시간은 단선적으로 실존적 시간관(후설, 베르그손, 레비나스, 하이데거)과 존재론적 시간관(아우구스티누스, 데이비드 호킨스, 에크하르트 톨레)으로 나뉘어 바라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실존과 존재론은 확연히 구획되는 영역이 아닌 바, 과거-현재-미래 역시 분절적 시간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물질의 우주와 영혼의 우주를 넘나들며, 시간 앞에 호명된 자로서 그들이 지닌 의식의 층위에서 어떤 내적 지평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을 문제 삼거나 고찰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을 상정하지 않을지라고 신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의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시간의 주인이 신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섭리>와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이해 너머에 있다. 마치 ‘웜홀 a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 interface’가 이종(異種)의 경계면에서 발생하는 이치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가장 힘든 시간들은 곧잘 가장 큰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⑨ 웜홀wormhole은 우주 공간에서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연결하는 통로라는 의미로 제안된 이론상의 개념으로, 사과 표면에 있는 벌레가 사과의 정 반대편으로 가려면 표면을 따라가기보다 중심을 지나가는 게 빠르다. 이때 사과에 중심을 관통하는 웜홀이 생기는데, 이 웜홀은 사과의 표면보다 고차원적이면서 서로 다른 사과의 표면을 잇는 최단 경로가 된다. 이와 유사하게 시공간의 다른 지점을 연결하는 고차원 구멍이라는 의미에서 웜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찰스 리우) 인터페이스 interface는 좁게는 컴퓨터 및 소프트웨어 조작 방식을 말하며 넓게는 서로 다른 두 물체 사이에서 상호간 대화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인터페이스는 이종(異種)의 경계면이라는 의미에서 '계면(界面)'이라고 번역해 쓰기도 한다.(도널드 노먼)
인류는, 웜홀, 인테페이스라는 개념과 이론이 만들어지고 그로 인해 우주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거나 상용하는데 ‘빛이 중력장을 넘어선 어떤 공간에서는 휘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물리학자들의 축적된 연구 성과물이자 4차혁명을 가능케 한 베이스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이거나 더 나아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불가지론자들이었다.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가 삶의 편리를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
이 글 서두에서 바라보았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바라본 실존과 존재론의 상이한 시간을 문제 삼았던 그들의 고찰은 절대적인 사랑을 체험하고 싶어했던 우회적인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그토록 시간을 이해하려고 했던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 맥락에서 자신을 불가지론자 혹은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이들 조차도 절대적인 사랑을 체험하고 싶다는 외침을 하는 것이고, 시간에 갇히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다는 역설적인 몸부림 속에 그들 스스로 인류를 위해 이미 사랑의 인터페이스가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요한6,51-58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 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 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연중20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라고 전하는 요한6,51-58은 핵심 키워드인 <먹는다>라는 동사를 통해 <영원히 산다>는 영생으로 수렴된다. 요한복음에서 <먹는다>는 동사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먹다(phago파고/ phagin파게인)와 씹어먹다(trogo트로고)는 동사가 그것이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라면, 후자는 <살을 먹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을 먹다>는 것으로 씹어먹다(trogo트로고)는 영적인 의미로 쓰인다. 나는 지금 무엇을 먹는지를 규정하는 <먹는다>는 향방은 다음주 복음에서 예수를 따를 것인지? 예수를 떠날 것인지?를 가늠하는 분기점이 된다는 점에서 카파르나움 담화의 향방을 가른 <먹는다>는 동사는 21세기 종교의 향방까지 좌우했음을 알 수 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라고 전하는 요한6,51-58은 Ⓐ문제제기--->Ⓑ답1, Ⓒ답2를 통해 영원한 삶, 성체성사적 삶을 살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 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런데 축복의 메시지는 많은 이들에게 축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42절)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라는 문제제기는 다분히 예수님의 출생성분 때문이었던 것일까?
예수님의 출생성분 때문에 수군거리던 유다인인들은 이제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을 먹으라는 것 때문에 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진다. 지난주에도 언급한 거처럼 유다인이란 호칭는 이제 믿지 않은 이들의 이름이 되었다. 그것은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처럼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요한3, 21)에서 전제하듯, 성체성사의 신비를 알 수 없고, 성체성사의 신비를 알 수 없기에 성체성사적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에 이른다.
여기서 요한복음에서 <먹는다>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 먹다(phago파고/ phagin파게인)와 씹어먹다(trogo트로고)의 파장-, 파고나 파게인은 육체적인 먹음이라면, 트로고는 영적인 영함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복음사가는 몸(soma)이라 칭하지 않고 살(sarx)이라 칭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먹는다-트로고>는 왜 그들을 걸려넘어지게 한 것일까?
그들이 수군거림과 다툼은 표면적으로는 예수의 출생과 강생의 신비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지만, 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뿌리깊은 신적 개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세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전능한 신을 믿는 그들은 애초에 영생을 갈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에 갇혀 있는 신을 믿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영생을 믿을 수 없었고, 갈망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파의 원형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그럼에도, 53절-56절에는 연쇄적인 구조로 영생에 이르기 위한 길을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예수의 살을 먹는 것과 예수를 피를 마셔야하는 당위에 대해 네 번에 걸쳐 반복 제시하였다는 것은 단순 반복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선택과 결정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영생의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살과 피는 인간전체를 가리킨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다는 것은 예수 전체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예수의 살과 피- 에수의 인격과 위격 전체,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왔기에 예수의 인성과 신성 전부를 받아들이는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성체를 영한다는 것과 성체성사적인 삶을 받아들인 행위의 차이가 <머무른다>를 것으로 표현된다. ‘머무르다(μενειν, menein)’는 ‘머물다, 살다, 묵다, 함께하다, 일치하다, 소통하다, 깨닫다, 보다, 듣다, 감화되다, 교감하다, 섬기다, 충만하다, 채우다, (사랑을)느끼다’ 등으로 해석되며, 요한복음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에 해당한다. 그분을 영하고 그분안에 머무른 이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머무르다>는 표현을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입다>라는 표현으로 강조한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디아3,27)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13,14)"에서 우리를 위해 죽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일치를 옷처럼 입을 것을 권한 것이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는 그리스도와 인격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기에 그렇다. (안토니오 피타, 『그리스도를 입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7-58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참된 양식, 참된 음료, 영원한 양식 등으로 표현된 살과 피는 <나를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산다>로 모아진다. <나를 먹는다>는 것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나에게 오는 이들의 관계를 설정한다. 예수와 우리의 관계는 예수와 아버지와의 관계로 대응된다. 아버지는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갖고 계시기에 살아계신 분이시며, 또한 아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여 그 안에 생명을 갖도록 하셨기에 아들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영원히 산다. 따라서 아들도 이제 성체성사 안에서 당신을 먹는 신앙인들, 자신을 믿고, 받아들이고 머무르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고 당신으로 인해 영원히 살도록 해 주신다. 성사적으로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결속관계를 맺으며, 인격적인 일치를 이루는 특별한 방식으로 시사된 것으로 이는 <영원히 산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그렇다면 카파르나움 담화의 메시지 <영생을 얻으려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인 나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축복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날, 성체를 영한다는 것과 성체성시적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다니지 않았다”(요한6,66)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42절)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5절)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분을 따라다니던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먹고 마시라>는 것 때문에 떠났다. 카파르나움의 파장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놓겠다는 축복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갖고 있는 신적 개념, 율법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배운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현세적인 삶에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따라서 그들은 영생을 알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먹는다>동사에 걸려 넘어져 그분을 떠난 이들은 현세의 길흉화복을 위해 하느님을 불렀지만 영원한 생명을 살기 위해 하느님을 찾지 않은 이들에 대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생은 단어가 아니라 갈망이다. 갈망이기에 결정이고 선택이다. 결정이고 선택이기에 은총이다. 영생을 갈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은 여전히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살고있는 종의 신분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생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영생, 영원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나 미래의 두려움에 자신의 삶을 묶어두지 않는다. 즉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없는 이유를 종과 자유인의 개념으로 전한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루가1,37-38) 상속자는 모든 것의 주인이면서도 어린아이일 때는 종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가차자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였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안에 보내주셨습니다.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디아4,1-7)
Ⓓ와 Ⓔ는 표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하지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7)는 측면에서 신앙안에서의 그 어떤 길도 아버지께 가는 길로 수렴된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를 부정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요, 예수를 받아들였지만 성체를 영하면서 성체성사적 삶을 살기가 어려운 이유는 자기 마음이 어떤 땅인지에 따라 좌우된다.(마르코4,1-9) 어떤 씨는 길바닥에, 어떤 씨는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뿌려진다는 씨앗의 비유는-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은 시간에 갇혀있는 삶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영원에 열려 있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삶을 갈망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기 위해 영원에 주파수를 맞춘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베네딕또16세교황)은 『사도신경강해』에서 어떻게 시간적 존재인 우리가 영원에 접할 수 있는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영원이란 시간 이전부터 있었던 태고가 아니라 전혀 다른 현실로 모든 지나가는 시대에 그 시대의 <오늘>로 관계를 맺고 참으로 그 시대인 오늘인 현실이다. 그리고 영원은 또 그 자체가 이전 이후에 막혀있지 않고 오히려 모든 시간에서의 현재의 힘이다. 영원은 시간 곁에 무관하게 존립하지 않고 모든 흐르는 시간을 자체의 현재로써 포괄하며 시간의 존립을 가능케 해주는 모든 시간의 창조적 근거가 되어주는 힘이다. 영원은 무시간성이 아니라 시간권능이다. 영원한 신과 시간적 인간을 한 위격안에 일치시킨 예수는 신의 시간권능의 궁극적 구체화이다. 하느님은 예수의 인간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포착하여 당신 자신 안으로 끌어들였다. 우리와 함께 시간이 된 그에게서 우리는 동시에 영원자에 접한다. 예수는 우리와 함께 시간이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한다면 성체를 영하는 삶에서 성체성사적 삶을 살기를 동시에 갈망하게 된다. 그렇기에 성체를 영하는 삶과 성체성사적 삶은 성체를 영하는 모든 이들이 깊이 깊이 묵상할 메시지이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한계에 갇혀 있는 자신이 영원이라는 시간권능의 은총을 선사받은 것이기에 그렇다. 그때 “예수는 우리와 함께 시간이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 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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