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마리안나 수녀님께서, 감사합니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시편19)
연중25주일,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를 중심으로
1. 이수명,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①창을 바라본다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이것이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그 생각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누군가의 생각 속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내가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누군가의 생각을 질료화한다. 나는 그의 생각을 열고 나갈 수가 없다.//나는 한순간,/누군가의 꿈을 뚫고 들어선 것이다.//② 나는 그를 멈춘다.//커튼이 날아가버린다. 나는 내가 가까워서 놀란다. 나는 그의 생각을 돌려보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생각을 잠그고 있다.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로/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 지금 누군가의 생각이 찢어지고 있다.
이수명의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은 생각의 탄생에 관한 시로 읽힌다. 집단무의식화 되어 있는 타인의 생각에서, 다시 말해 타인의 욕망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화자는 “내가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누군가의 생각을 질료화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각은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그 생각을 구체적인 현실로 질료화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드디어 그라는 세상의 생각에서 멈추기로 작정한다. 화자의 삶을 형성했던 지금 누군가의 생각이 찢어지고 있다. 누군가의 생각이 찢어지고 있다는 것은 질료화 했던 삶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했던 모든 욕망이 제로페이스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수명의 시 세계는 지금까지 있었던 시의 문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타인이 주입한 시학의 포기, 혹은 미학의 소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십자가는 미학살인이다?
그런데 인간 그 자체가 이미 미학적이다라고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예컨대, 예술의 기원을 이야기 할 때 거론되는 알타미라동굴의 벽화는 인간의 집단욕망을 드러내는 미학의 시작이었다고 바라보는 시선이다. 존재 자체가 나아가 실존 자체가 이미 미학적이기에 인간은 결코 미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미학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바로 있음의 그 자리가 미학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의 선은 언제나 미학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다.
그런 맥락에서 십자가는 미학살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간이 혐오하는 것을 집약하고, 인간이 욕망하는 미와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십자가는 드러내기 때문이다.
미학은 미와 예술을 대상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미학美學, Aesthetics은 자연·인생·예술에 담긴 아름다움의 현상이나 가치 그리고 체험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본디 ‘미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취하는 어떤 태도의 특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고, ‘예술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무엇을 창조한다 할 때 그 창조활동의 특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미적 경험’이라든가 ‘예술적 창조’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서유럽 미학의 초기단계에서는 미론과 예술론의 문맥이 저마다 달리 발전하고 있다. 곧 미적 경험은 미론의 문맥이고 예술은 창조론의 문맥에 속한다. 오늘날에는 예술이 주된 관심거리이지만 고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미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렇다면 미를 논할 때 예술이라 할 만한 것들은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맨 처음에는 없었던 말과 체제가 성립되었다면 그 성립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하르트만은 이 질문들에 대해 서유럽 미학사상 발전의 중요한 문맥을 파악하여 그만의 방식으로 미학론을 풀어냈다.
미학은 미를 창조하거나 감상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나 그 태도나 자세에 의문을 품고 생각하는 이의 것이다. 사상은 감상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예술가의 마음을 언짢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예술가가 무슨 일을 하며, 또 그들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사상적으로 파악하려 할 때에 더 그렇다. 사상가는 아무리 예술가에게서 놀라움을 발견하고 또 예술가의 관점에 선다 하더라도 그의 환상적 자세를 옳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예술가의 자유는 행동자의 자유와는 다르다. 예술가에게는 아무런 당위성도 책임도 없다. 그 반면에 예술가에게는 실재적 조건의 구속이 없는 무한한 가능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예술적 자유는 도덕적 자유와 다를 뿐 아니라 또한 그보다 훨씬 크다. 예술적 자유는 예술적 행동의 발전 내지 그 존재양상에 조응하는 것이며, 어떠한 형식의 요청도 받지 않는 순수한 자유이다.
그림에 액자를 끼우는 것은 이 그림의 비현실화를 뜻하며, 비예술적인 환상의 방지를 뜻한다. 그것은 현상하는 빛이 실재하는 빛과 구별되듯이, 표현된 도형이나 장면을 실재와 분명히 구별되게 하는 것이다. 그림이 예술작품이 되려면 그 그림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문학에서는 참과 참이 아닌 것과의 대립에 얽매이지 않으며 실재성을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습성을 떠난 말의 뜻이 나온다. 말의 이러한 뜻은 오로지 그 무엇을 나타내거나 꾸며내는 데 있는 것이며, 이것이 본디 창작Dichten인 것이다. 말이나 말소리와 같은 실재적 구성물물론 그 사용만은 자유이다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지만 말의 뜻에는 변동이 있다. 말뜻과 상용어와의 관계는 마치 꿈과 현실과의 관계와 같다.
지나간 역사적 시대의 인간생활을 현재적이며 우리가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바로 문학의 위력이다. 우리는 문자로 쓰인 말의 테두리를 통하여 다시 실재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낯선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문학처럼 많은 이념을 발설하는 예술은 없다. 작가는 대체로 사상가가 아니다. 작가는 이념을 가장 깊이 또 가장 완전하게 파악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해서 이념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하게 되는가? 그 까닭은 작가가 이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타나게 하는 데 있다.
위대한 예술은 인생과 실재를 멀리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위대한 예술에는 언제나 모방의 요소가 남아 있다. 위대한 예술은 늘 실재적인 생활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실재적인 생활의 형식이 또한 창작의 형식동기가 된다. 그 반면에 예술은 실재적 생활을 뛰어넘어 먼 앞날을 내다보는 전망을 가질 때에, 다시 말하면 존재하지 않으나 확신되는 것을 창조적으로 관조할 때에 그 시대를 넘어서서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생활에서 그 이상의 무엇을 암시해 주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모방과 창작의 갈등은 실로 진정한 이율배반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정한 희비극 속에서는 비극적인 것이 동시에 희극적인 것이다. 그래서 비극적인 것과 희극적인 것은 서로 상대방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동일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양자는 똑같은 사건의 서로 다른 측면이지만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만일 예술이 이 둘을 깨끗하게 갈라놓으려고 한다면 예술은 두 가지 모두를 그르치고 말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술작품의 역사성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 역사 속에서 위축되는 게 아니며 또 시일이 지나감에 따라서 잊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성장이라는 말은 그 작품이 살아 있는 객관적 정신을 붙들고 놓지 않을 뿐 아니라, 또 충실해지며 두고두고 새롭게 해석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리하여 위대한 예술은 시대가 다르면 언제든지 다른 새로운 작품을 산출한다. 그러므로 위대한 작품은 무궁무진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처럼 작품에 나타나는 위대한 인물들도 성장한다. 고대의 서사시에 나오는 인물들, 유명한 소설과 희극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렇게 성장하며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와 실러가 그려낸 인물들도 그러한 성장을 보여준다.
예술은 생활로부터 받은 것을 이자를 쳐서 갚는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의 시대라 할지라도 극소수의 작품만이 위대한 것이고, 나머지 모든 작품은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극소수의 위대한 작품만으로도 예술이 역사적 생활에 진 빚을 갚기에 충분하다.
하르트만의 『미학이란 무엇인가』 는 영감으로서의 시·음악·춤, 모방으로서의 회화·조각을 시작으로 미학의 한 문제로서 예술이라는 말과 체제와 개념이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을 자신의 독특한 관점에서 서술한다. 그는 인류 삶의 모습을 통틀어 심미작용을 분석하고, 미적 대상의 구조를 밝히며, 자연미와 인간미를 돌아본 뒤에, 예술에서의 계층서열과 미적 형식 그리고 미의 통일성과 진실성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그 속에서 칸트의 미적 만족설을 비롯하여 문학, 미술, 연극, 음악, 건축 등의 실례를 들어 목적과 형식을 알려주며 시공을 넘어서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또한 미의 가치와 종류를 그 특수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구분하여 서술한다. 더불어 숭고미와 우아미, 희극미에 대해 개념과 계층구조를 중심으로 전개하는데, 그 주변의 문제와 인접현상까지 의미를 부여하며 인생과 문학에 있어서의 가치들을 찾아낸다. 그는 미적 대상의 존재론과 예술의 역사성을 이야기하며 ‘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커다란 탐구를 끝맺는다.
하르트만은 미학이론에서 존재론을 주장한다. 그의 사유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존재론’을 바탕으로 한다. 존재이해의 문제로 특징지워지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과는 달리, 자체존재의 해명에 주력하는 하르트만의 존재론은 하나의 큰 체계로서 이루어진다. 그는 미적 대상의 현상관계에서 미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현상관계’라는 것은 미적 대상에 있어서 전경이 후경을 나타내고 후경이 전경에 나타나는 ‘전경과 후경과의 관계’를 말한다. 하르트만은 미적 대상의 측면에서 볼 때 미의 소재는 실재적이고 감성적인 전경만도 아니고, 비실재적이고 비감성적인 후경만도 아니며, 후경이 전경에 나타나는 현상관계로 보고 있으며, 이 점에서 미를 본질적으로 현상미라고 여겼다.
그는 작용분석이 아닌 ‘대상분석’의 관점을 취하고 있으며 ‘관계의 미학’을 구축하였다. 관계의 미학이란 ‘현상관계’와 ‘성층관계’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양자의 상호관계에서 미가 성립한다는 것을 뜻한다. 현상관계와 성층관계는 하르트만 미학이론을 이루는 두 개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다. 하르트만에 있어서, 성층관계가 미적 대상이 가지는 구조적 본질이라면 현상관계는 그 자체가 미의 본질이 된다. 양자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하면 성층 없는 현상이 있을 수 없고, 현상 없는 성층은 의미를 상실한다. 물론 이러한 명제는 미적 대상과 관조주관이 실존적으로 마주해 있고 관조주관이 미적 대상을 구체적으로 대상화할 때 성립하는 명제이다.
인류의 미학은 진화하며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역사 속에서 위축되는 게 아니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반대로 진화하였다. 마찬가지로 작품에 나타나는 위대한 인물들도 성장한다. 이러한 인물들은 여러 시대를 거친 경력으로 언제나 새로운 멋을 가지고 무대 위에 등장한다. 이 인물들은 이미 작가와 그 시대를 넘어서 진화하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두고두고 새로운 무엇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예술은 생활 속에서 나와서 생활 속으로 되돌아간다. 예술작품은 늘 완성시켜야 할 또는 보충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기도 한데, 이는 예술이 진화한다는 의미이다. 참된 아름다움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용기를 북돋워주고 감동을 주며 나아갈 길을 가르쳐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초월한 그 무엇을 능동적으로 창조하며 종합적이고 조형적으로 관조하게 해주는 것이다. 예술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모든 예술은 현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생활과 인간 존재 자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술은 밖으로 드러난 현상을 직관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 현상을 통해서 거짓으로 꾸며지고 은폐된 뭔가를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보고 듣고 체험하는 마음과 정신은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존재층에 매개된 것이며, 오직 이 존재층만이 감각을 통해서 우리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예술은 인간의 감각에 호소하기 때문에 존재적으로 보다 높은 계층일수록 미학적으로 보다 깊은 계층일 수밖에 없다. 인간적인 운명은 어디서나 재현되며 전혀 다른 형태로 재인식되기도 한다. 모든 예술에는 형이상학적인 인간 자신의 운명이 엿보인다. 이때 최대의 합치는 숭고에 대한 합치이다. 완전한 형식-심오한 이념이 공존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자기 작품의 이념을 추상적-상상적으로, 다시 말해 개념적으로 구상하는 게 아니라 내적으로 관조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술 일반의 본질과 미적 경험을 포함한 제반 현상의 특성 및 여러 예술 분야의 성격을 이해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여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존재 자체가 이미 미학적이라고 전하는 하르트만의 존재론! 그런 맥락에서 십자가는 미학살인이라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예수를 처형할 수많은 도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십자가형을 강행했느냐는 것이다.
3.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전하는 마르코 9,30-37은 예수께서 길 위에서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마태오17, 22-23/루카9, 43-45)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누구냐?(마태오18,1-5/루카 9,46-48)는 제자들의 논쟁을 연결하여 그리스도의 운명과 제자들의 운명이 어떻게 넘겨지다(paradidomi)는 단어 속에 필연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31절이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길이라면 Ⓑ35절과 Ⓒ37절은 그분을 주님으로 따르는 제자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야의 길이 죽음을 통한 영원한 삶(부활)의 길이라면, 제자에게 요구한 길은 섬김과 받아들임의 길을 통한 복음의 길이다.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수난예고 첫 번째 자기 버림(8,31-34)에 대한 지침과 같은 맥락의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길이 수난과 죽음을 통한 죽음의 길이라면 제자의 길은 삶을 통한 죽음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두 번째 수난예고에서 사람의 아들을 넘겨받아 죽게하는 이들은 익명의 ‘사람들’로 등장한다. 수난 에고 첫 번째에서는 예수의 죽음에 직접 가담하는 이들이 당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란 사실을 분명히 했다면 수난예고 두 번째에서는 그 가담자의 폭이 훨씬 넓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특정 다수가 예수의 죽음에 가담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는다는 것은, 그들의 손이란 세상을 끌어가는 힘, 권력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란 유대의 종교지도자뿐 아니라 인류 역사를 끌어가는 모든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전체가 그분의 죽음에 가담하고 있다는 이 함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마르코 복음사가가 예수를 <사람의 아들>이라 부른 의미가 보다 분명해 진다. 십자가의 수난은 사람이란 대체 누구인가? 하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라고 초점화 한 것이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은 짐승과 초인사에서 처한 과도기의 존재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이다. 하나의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위험천만한 돌아봄이며, 위험천만한 도상에 있는 것이며, 위험천만한 전율이며, 정지함이다. 인간에게서 위대한 것은 그가 다리일 뿐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에게서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가 과도(過度) 이며 쇠퇴한다는 점이다”
라칭거추기경은 『사도신경강해』에서 십자가는 인간인 누구인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자, 동시에 사랑의 심연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사건으로 그것은 곧 신을 계시한 사건이라고 전한다.
“십자가는 인간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도 드러낸다. 인간적 실패의 심연에서 그보다 훨씬 더 그지없는 사랑의 심연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는 계시의 중심이고 그 계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어떤 말들을 밝혀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를 하느님 앞에 그리고 하느님을 우리 가운데 계시함으로써 사람이 누구인지 자신을 드러낸다.”
위르겐 몰트만은 『인간』에서 십자가 사건은 신학적 정치적으로 도전에 해당하는 사건이며, 인간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낳았다고 전한다.
“기독교는 예수의 인간성을 바로 그의 수난에서 보았고 그가 보여준 새로운 인간성을 그의 수난과 죽음으로부터 받아들였다. 인류는 그 안에서 고난 받는 하느님의 종(leidenden Gottes-Knecht)을 보았다. 따라서 기독교적 유토피아는 외양간과 십자가 외에는 머리를 둘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하였던 사람들의 미래이자, 축복(산성설교-마태오5,3-12)이며,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서4, 17-18) 사는 인간을 제시한다.”
사람의 아들이란 무엇인가?는 33~35절에서 <모든 이의 종>이 된 이를 의미하며 이는 스승 예수의 길이자, 그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길임을 전한다.
Pax Tibi Marce Evangelista Meus(평화가 당신에게 있기를, 나의 복음사가 마르코여)
Ⓑ33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3절에서 35절까지는 동의적 병행문에 해당하는 문장으로 첫째와 말째(마르코9,35) 다스리는 사람과 섬기는 사람(루카22,26) 주인과 종, 큰 사람과 작은 사람(루카9,48)등과 대구를 이루는 문장을 통해 33절에서 고난받는 야훼의 종(이사야50,5-9-leidenden Gottes-Knecht))의 의미가 분명해 진다.
여기서 종은 섬기다는 동사에서 파생된 파생명사에 해당한다.
<섬기다Abad>는 동사가 <종>이라는 명사로 호환될 수 있는 의미에 대해, <섬기다>는 <예배하다>(신명기6,5-9), <노동하다>(창세기2,19), <노예 혹은 종>(탈출기21,1-11), <(흙을) 일구다.(창세기2,5)라는 의미가 있는데, <섬기다>는 동사보다는 <종>이라는 명사를 쓴 것은 두 번째 수난 예고와 연결하여 <사람의 아들의 정체성>과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종>은 성서에서 어떤 의미로 쓰였나?
마리아는 마니피캇에서 마리아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부른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그분께서는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48절)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54절)
성서에서는 종을 아들, 메시야, 겸손, 순종, 어린아이, 고난받는 자, 기름부음을 받은 거룩한 종 등으로 나타난다. 사도행전3,13/3, 26/4,27/마태오2,6/루카2,43 이사야49,3/이사야50, 5-9/이사야52,13 등에서 이 종은 하느님 앞에선 가장 낮은 인간을 의미한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비서2, 6-11에서 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이 종이란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1코린토9, 22/1코린토 15,28)
이렇듯, 인류구원을 위해 스승 예수는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을 예고하는데,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논쟁을 하고 있다. 스승과 제자의 이 상황판단의 낙차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하느님나라가 철부지 아이들 같은 이들에게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인류구원은 자비가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은총임을 바라볼 수 있다.
제자들의 선택적 침묵과 발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자들의 두려움과 욕망, 무지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32절)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35절)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자칭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알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때만이 37절에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두 번째의 수난예고와 어떤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바라보게 된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11,25)
지혜와 슬기는 모든 인간, 특히 신앙인들이 추구하는 덕목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것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수난예고가 품고 있는 절대적인 진리는 사랑, 겸손, 자비라고 할 수 있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쇄적인 집성문에 해당하는 37절은 “이~ 가운데”라는 표현을 쓸 때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는 누구를 보고 하신 말씀일까? 어린아이는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이들을 상징한다. 무엇보다 현실적인 상황판단, 실패를 밥먹듯이 하는 현실감각이 둔한 철부지들을 의미한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11,25)
여기서 <내 이름으로> 라는 구절로 미루어 보아 당신 제자들도 어린아이에 포함되어 있음을 수 있다.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스승과 동행하면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의 논쟁을 하는 철부지 어린아이 같은 제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언명! 여기서 두 번째 수난예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던 철부지 제자들에게(오늘 우리들에게) 준 위로와 격려, 용기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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