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
-연중26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를 중심으로
1. 박용하, 「견자見者」
박용하의 「견자見者」를 다시 읽어본다.
누가 자꾸 삶을 뛰어내리는가/누가 자꾸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그렇다면 네 영혼은?/네 손목은? 네 발목은?//누가 자꾸 지구를 뛰어내리는가/누가 자꾸 햇빛과 달빛을 뛰어내리는가/눈물도 심장에서 뛰어내린다//그렇다면 네 슬픔은?/네 진눈깨비는? 네 고통은?//너의 심장은 발바닥에서부터 뛴다/너의 노래는 머리카락에서도 자란다//그렇다면 네 피는?/네 시선은? 네 호흡은?//물에 빠진 사람은 물을 짚고/ 허공에 빠진 사람은 허공을 짚을 때처럼/빠지는 것을 계속 짚을 때처럼//누가 계속 죽음을 뛰어내리는가//누가 계속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
박용하의 「견자見者」는 앞의 두 행과 뒤에 두 행이 대구로 삶과 죽음을 심장과 연결하여 <뛰어내리는가>, <뛰어내린다>가 <뛴다>의 변형으로 반복된다. 그런데, 심장의 시작은 “너의 심장은 발바닥에서부터 뛴다/너의 노래는 머리카락에서도 자란다” 에서 발바닥과 머리카락은 심장이 뛸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는 원인이 된다. 발바닥으로 뛰지 않는다면, 머리카락으로 노래하지 않는다면 심장으로 뛰어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발바닥과 머리카락은 우리 몸에서 생명과 연결하여 심장보다는 하찮다고 여기는 부분이다.
누가 자꾸 삶을 뛰어내리는가/누가 자꾸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누가 계속 죽음을 뛰어내리는가//누가 계속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
박용하의 「견자見者」는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언뜻 삶도 뛰어내리는 것으로, 죽음도 뛰어내리는 같은 것으로 보기에, 종교에서 말하는 “견자見者-깨달은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에 관한 시로 읽게 된다.
그런데 시인이 득도했다는 소문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시인의 운명에 던져진 이들의 메타포로서 「견자見者-보는 자」로 읽을 수도 있다. 그때 견자는 랭보가 바라본 “견자見者와 착란사이”에 가깝다. 전자를 초월에의 의지라고 본다면 후자는 낙차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빛의 경도라면 후자는 빛과 그림자의 리듬(주름)이라고 볼 수 있겠다.
By: Don Paulson 'A Study in Browns'
2. 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라이프니츠)
세상에 나뭇잎을 그냥 나뭇잎이라고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나뭇잎은 곧 우주라고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이 차이를 '주름' '변곡' '모나드' 라는 용어로 바라본 철학자들이 있다. 『반복과 차이』의 그 미세한 결에 주목했던 질 들뢰즈는 그것을 '바로크의 진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뭇잎을 나뭇잎으로 보는 이들은 이 세계를 사물이 만드는 퇴적층, 사물의 주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바라보겠지만, 나뭇잎에서 존재의 생성과 소멸까지 바라보는 이들은 <형상과 담론>의 더 깊은 주름을 통해 영혼은 무엇인가까지 바라본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바라본 것은 동양에서 말하는 음양의 원리와 비슷한 사유로 이 세계의 질서가 '상극에서 생극으로' 운행되고 있음을 바라본 것이다. 빛과 어둠을 대립이나 상극으로 바라본 이들은 사실 빛을 모른다는 것이다.
물질의 주름은 퇴적층처럼 인간을 사물화로 바라볼 수 있다면, 후자의 주름은 현실과 관념의 깊은(패인) 골을 만들어 그 주름을 펴기가 어렵다고 바라본다. 일그러진 진주는 바로 후자의 주름에서 만들어지는 데(빛과 어둠의 크기, 고통의 크기) 그 진주는 그 함몰의 정도가 깊어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고 바라본 것이다.
참고: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baroque) | http://blog.daum.net/m-deresa/12389919
후자의 대표적인 예술 사조가 바로 '바로크'이며, 그것을 평생 사유한 철학자가 라이프니츠라고 들뢰즈는 바라보고 있다.
바로크의 진주는 단일체이지만, 어떤 불규칙성과 불균질성을 함축하는 단일체이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일그러진 진주인 바로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들뢰즈,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들뢰즈는 물의 소용돌이 원리에서 만들어지는 변곡을 통해, 주름의 원리를 추정한다. 수직선은 나선 모양으로 되접혀 하늘과 땅 사이에 떠 있는 운동 안에서 변곡을 연기하는데, 이 변곡은 곡률의 중심에서 무한정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며, 그리고 어떤 순간 "높이 비상하거나 우리 위로 떨어질 위험을 지닌다." 하지만 수직적인 나선이 변곡을 억제하거나 연기할 때에는 언제나 수평면으로는 변곡을 예고하고 그것은 불가피한 어떤 형태를 만들게 된다.
예컨데, 물결의 소용돌이는 단독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소용돌이의 나선은 프랙탈의 구성 방식을 좇아가는데, 이 방식에 따라 새로운 소용돌이들이 항상 앞선 소용돌이들 사이로 끼어든다. 소용돌이들이 바로 소용돌이들로부터 자라나며, 윤곽을 지우면서 오직 거품 또는 갈기 모양으로 끝맺음된다. 이런 원리로 변곡 자체가 소용돌이가 되며, 동시에 그 변동은 '요동'으로 빠져들고, 흔히 물이 '요동친다'고 말하게 되는 그 상태에 이른다. 사랑도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이다.
들뢰즈는, 변동을 주름으로 만들고, 주름 또는 변동을 무한으로 실어나르는 주름의 원천인 변곡에 주목했다. 들뢰즈는 그 변곡이 쌓인 것을 주름이라 칭하고 변곡을 일으키는 힘을 "거듭제곱"의 역량이라고 불렀다. 역량 자체가 현실태acte이며, 주름의 행위acte가 된다.
들뢰즈는 더 나아가 겹주름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에 주목하여,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한 채 주름에서 포함으로 이행한다고 본다. 이 둘 사이에서는 어떤 간극이 생산되는데, 이것이 겹주름을 만든다. 주름잡혀 있는 것, 이것은 주름에 포함된 것이고, 이미 내속해 있는 것이다. 포함이 이루어지는 곳, 끊임없이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곳, 또는 실현된 현실태의 의미에서 포함하는 것은 자리나 장소도 아니며, 시선점도 아니게 된다. 그것은 시선의 점에 머무르는 것이며, 시선의 점을 차지하는 것이며, 그것이 없다면 시선의 점이 하나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영혼, 주체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빛과 그림자가 어떻게 주름을 만드는지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휘어지기 쉽고 탄력적인 하나의 물체는 또한 하나의 주름을 형성하는 결집된 부분을 갖고 그 결과 그 부분들은 부분의 부분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응집력을 줄곳 유지하는 더욱더 작은 주름으로 무한히 분할된다(라이프니츠, 『단자론』)
수학의 미적분의 상용화에 이바지한 라이프니치는 이 세상에 직선으로 던져져 곡선으로 휘게 되는 이유에 대해, 하나 또는 여럿의 매개변수에 의존하는 일군의 '곡선의 관념'을 제시한다. 이 세계가 직선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다. 그것을 "주어진 하나의 곡선에 속하는 하나의 점에서 접하는 하나의 직선을 찾는 대신에, 무한한 곡선들에 속하는 무한한 점들에서 접하는 곡선을 찾는 데 전념한 것이다. 곡선은 접선에 의해 접해지는 것이 아니라, 곡선들에 의해 접하는 것이다. 접선은 직선, 유일한 것, 접하는 것이 아니라, 곡선, 무한한 군, 접해진 것이 된다."라고 그는 본 것이다.
그리하여 접하는 곡선의 "단 하나의 유일한 가변성"으로 변수들을 환원하는 '주름'이 만들어 진다. 대상은 더 이상 본질적인 형상을 통해 정의되지 않고도 순수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만일 대상의 상태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면, 주체 또한 마찬가지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점이 아니며, 선에서 태어난 선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들뢰즈는 이것을 시선의 점이라 부른다. 이것이 바로크 예술, 원근법의 토대가 된다. 이것은 미리 정의된 주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대로 주체는 시선의 점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차라리 시선의 점에 머물러 있다고 본 것이다.
자신의 시선점으로부터 붙잡는 것, 변곡을 포함하는 것은 언제나 영혼이라고 말한다. 변곡은 자신을 포괄하는 영혼 안에서만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이상이 되거나 또는 잠재성이 된다. 이렇게, 이것은 주름들을 갖는, 주름들로 가득 찬 영혼이 만들어진다. 주름들이 영혼 안에 있으며, 그리고 영혼 안에서만 현실적으로 주름은 실존하게 된다. 이것은 물리적인 점이나 수학적인 점이 아닌 형이상학적인 점인데, 라이프니츠는 이 형이상학적인 점인 영혼 또는 주체에 "모나드"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이것은 모든 것을 "접어ㅡ아우르는" 세계가 <영혼>이다. 안으로 <접힘ㅡ밖으로 펼침ㅡ한데 접어 아우름>을 통해 주름의 삼위일체를 형성한다.
모나드는 "어떤 것이 드나들 수 있는 창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구멍도 입구도" 갖지 않는다. 모나드의 본질적인 면은, 이것이 '어두운 바탕'을 갖는다는 것이다. 혼돈에서 어떤 질서가 만들어지듯, 모나드는 모든 것을 이것으로부터 끌어내며, 어떤 것도 밖에서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보아야 할 것이 안쪽에 있는 장소들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데, 독방, 제의실, 지하 납골당, 교회, 극장, 열람실 또는 판화실. 이것들은 바로크의 역량과 영광을 끌어내기 위해 권위를 부여한 상징적 장소들이다. 빛은 단지 구멍에 의해서만 스며 들어오고, 이 구멍은 아주 굽어 있어서 외부의 어떤 것도 보이지 않지만, 순수 내부의 장식물들을 밝게 비추고 색칠한다.
라이프니츠가 바라본 “빛은 어둠 한가운데 있는 균열을 통해서인 듯 미끄러져 들어온다”. 들뢰즌 그런 맥락에서 라이프니츠의 사유는 바로 바로크적 사유와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본 것이다. 바로크의 대표적 건물인 베르사이유 궁전이나 베드로대성당의 모든 내부는 작은 거울들을 통해 빛을 통해 흰색을 산출하고 휜색은 그림자는 만든다. “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 그것은 흰색을 만들고, 그 흰색은 모나드의 밝혀진 구역과 뒤섞이지만, 어두운 바탕, 즉 ‘어두운 것’을 향해 어두워지거나 또는 엷어지는데, 거기서부터 “다소 강하면서 신중하게 다루어진 그늘과 색조를 통해 사물들이 밖으로 나온다.” 원근법을 역전시키거나 “눈 대신 빛들을, 대상 대신 불투명한 것들을, 그리고 투사 대신 그림자를” 놓는 것으로 빛과 그림자는 주름을 만든다. 그림자는 빛과 어둠을 동시에 지닌 인간의 실존과 그렇게 닿아있다.
바로크 미술은 인간의 실존처럼 빛과 색들의 새로운 체계와 분리될 수 없다. 사람들은 우선 빛과 어둠을 1과 0처럼, 가느다란 분수선으로 분리된 세계의 두 층처럼 간주할 수 있다. “행복한 자들”과 “저주받은 자들”. 그럼에도 그 대립은 중요하지 않다. 위층도 아래층과 마찬가지다. 밝은 것에도, 흰 것에서도 “어둡고 거무스름하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것이 바로크의 공헌이다. 완전히 흰색도 완전히 검은 색도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형상의 존재와 질료의 무한정자와 같은 대비는 이미 신화에서 제우스의 신들과 거인족들 사이에 관계와 같다고 보았다.. 왜 상층에 훌륭함, 착함, 행복 등의 도덕적 관념을 불어넣었느냐는 것은 전쟁시대에 승자에 대한 찬미와 아부가 겉으로 드러나 있다고 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오만과 무모함이 그 속에 내포적 성질로 들어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는 우리는 “빛이 있으라”고 말했던 신과 그와 더불어 거울-흰색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받아들인 광선들을 더 이상 반사하지 않는 무한히 많은 구멍들에 있는 어둠들, 또는 절대적인 검정을, 즉 궁극적으로 이 모든 구멍들로 만들어져 있는 스폰지같이 무한히 구멍 뚫린 물질을 갖는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것은 완전체지만 그것은 “완전성의 정도에서 차이나는 같은 사물일 뿐이다.” 즉 인류는 하나하나 이미 완벽함을 가진 그러나 아직 완벽하지 않는 특이자들이다. 여기서 바로크의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주름에서 '일그러진 진주'가 만들어진다.
들뢰즈와 라이프니츠 논의를 종합해 실재론자라 불리는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끌어낸다.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점이 아니라 선이다. 인간은 어둠으로 몽땅 덮혀있는 그 죽음의 순간조차도 위로(빛, 신 혹은 진리로) 향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과 신의 필연적인 관계를 무의식으로도 알기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 두려워 한다는 것,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 분노한다는 것, 숨어버린다는 것, 절규한다는 것...그 부정의 실존 속에 이미 그 반대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과정중의 실재이기에 완전한 빛일 수도 완전한 어둠일 수도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주체는 '아래로' 던져진 것이 아니라 '위로' 상승하는 자이다. 변동과 시간의 점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주체에 따른 진리의 변동이 아니라 '변동의 진리'가 주체에 나타나는 조건이다(화이트 헤드, 『과정과 실재』)
화이트헤드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If, 만약, 신이 '사랑'이라면 인간이 끊었다고, 혹은 끊는다고, 혹은 끊겠다고 그 관계가 끊어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끊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면 이미 끊어진 사랑이라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어둠과 죽음을 뚫고 출애급한 그런 사랑을 했기에 신이 부활하여 인간에게 나타나도 인간은 신을 결코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3.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마르코 9,38-43.45.47-48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라고 전하는 마르코 9,38-43.45.47-48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태오10, 42/루카9,49-50)와 <죄의 원인이 되지 말고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마태오18,6-9, 5,29-30/루카17,1-2)라는 다른 맥락의 두 부분을 연결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은 어떤 희망을 갖고 사는가?라는 성찰의 주제를 던진다.
마르코 9,38-43.45.47-48은 두번의 수난예고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는 선취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되어진 모습이 아니라 언젠가 그들이 완성할 모습을 이미 바라본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38-40절)--->Ⓑ그리스도의 사람(41절)--->Ⓒ죄의 회개(42-48절)를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이 사랑은 바로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38절에서 40절은 교회는 독점적이 되어서도 안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된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리스도인의 범위를 무한으로 확장해야한다는 마르코 복음사가의 그리스도관이 피력된다. 마르코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애제자로 일컬어지는 요한의 말을 거론하여,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에서 우리는 교회의 지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어떤 카테고리로 재단하지 말고 범주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에 요구하는 겸손은 바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덕복이기도 하다. 이는 교회가 지닐 수 있는 오만에 대한 경고와 함께, 무한한 하느님 사랑을 인간의 카테고리로 재단하지 말라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전서12, 3에서 “성령에 힘입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전한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민수기 11,25-29) 라고 전한다.
이어지는 41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인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을 포함한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통칭에서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한가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비전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한다.
41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환대하는 이들에 대한 상급은 그들이 마땅히 받을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에 방점이 놓인다. 이미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리스도의 사람을 알아보는 이들이란 이미 그들 역시도 그리스도인일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미 그러나 아직의 여정 중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젊은 날의 사도 요한이 예수 사후 100년이 지난 후, 요한복음에서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를 쓰게된 것이자,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1서, 4,7-8)를 알고 쓰고 살게된 완성의 도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1절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이 초점이다. 하느님나라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위대함과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비전이 제시된다. 이미 그러나 아직인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비전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시선의 배타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성령의 임재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을 알아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길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철부지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그 자체로 그의 시선을 갖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은 오늘 이미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완성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사람일 수도 있다는 하느님 나라의 무한함을 바라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결국 그리스도가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요한이 아니라 익고 익어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1서4,7-21)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그 어느 날의 요한일 것이기 때문이다. 익명의 그리스도인까지 포함한 무한한 사랑 안에서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42절에서 48절까지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의 궁극적인 성취자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아무리 하느님 나라일지라도 그것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자유가 있다. 그 어떤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죄를 피하라는 것은 너의 의지가 곧 하느님의 의지가 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스도의 사람이 무엇인지 진정 알 것이라는 선취의 여정에서 요구되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버려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2절에서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는 누구를 지칭하는가? 당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과 사람들이자 오늘 우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언제나 작은 이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걸려넘어지게 하지 말라는 경고이자, 그 경고는 43절 이후에 다시 그들에게 돌아가 스스로 죄의 원인이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렇기에 42-48절은 스스로 죄의 원인이 되지 말라는 경고를 이중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단락의 핵심어는 ‘걸려넘어지다’(skandalizo)와 연결된다. 생명과 자유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길에 죄의 원인이 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는 그리스도 강생의 이유가 애주애인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을 걸려넘어지게 하지도 말고, 또 스스로 걸려넘어지지도 말라는 이 이중의 경고는,
죄의 도구인 손과 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빼버리라는 강조어법으로, 육체의 훼손이 아니라 죄를 강력히 끊어버리라는 요구이다. 죄에서 구원은 생명의 나라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기에 이런 셈족의 강조어법이 쓰인 것이다. 이사야66,24를 연결하여 지옥을 선택하지 말라는 것은 죄를 짓게하는 거짓 자아를 버리라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도 자신이 죄인이고 싶지 않으면서 죄를 짓게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톨릭교리서에서는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구분하고 자범죄는 다시 대죄와 소죄로 분류한다, 신학적으로 대죄는 은총의 삶을 파기하고 지옥 영벌을 야기할 정도로 하느님과의 영원한 분리로 규정한다. 대죄는 우리 안에서 생명의 원리인 사랑을 해치는 것인 만큼 하느님 자비의 주도적인 간여와 인간의 회개를 요구한다.
가톨릭교리서 1866항에서는 그 자체가 죄이며 동시에 ‘사람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지은 모든 죄(peccatum proprlum)의 근원이 되는 죄악을 칠죄종(septem peccata capitales)'이라고 규정한다. 카이아누스 성인과 그레고리오교황 1세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으로 식별되어 죄종이라 부르고 죄를 지을 수 있는 경향들이 다른 죄들과 악습을 낳기 때문으로 규정한 것이다.
칠죄종은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를 죄의 원인으로 규정한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서는 특히 사치와 쾌락이 살육으로 연결되는 재물에 대한 인색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습니다.>(야고보서 5,1-6)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야고보사도가 죄의 경향 중 가장 문제 삼은 것은 두 주인을 섬기는 재물의 인색이다. 그것은 공간복음에서 부자청년이 하느님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와 비슷한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마르코10,17-27/마태오19,16-26/루카18,18-27)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구약에서 부는 하느님의 축복의 상징이었다. 그럼 신약에 와서 부는 재앙의 상징인가? 풍요로운 하느님 안에서 부는 그 자체로 선의 도구이다. 그러나 재물뿐 아니라 모든 물질은 한계효용의 법칙이 적용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하지만 재물 혹은 물질은 유한하다. 유한한 것은 언제나 무한의 도구이자 수단이다. 재물을 포함한 물질은 누군가 갖으면 누군가는 갖지 못하는 엔트로피 법칙이 적용된다. 재물은 누구에게는 쾌락의 도구이고 누구에게는 생존의 수단이다. 재물은 누군가의 생존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생존무기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재물에 대한 소유욕에 대한 경고는 하느님이 창조한 타인의 생명을 바라보라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는데 왜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가? 이런 불합리하고 살인적인 세계질서는 어떠한 사정에서 등장하는 것일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유엔 식량 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그렇다면 타인의 생존에 무관심을 유발하는 죄란 무엇인가? 죄는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는 것, 혹은 표적에서 빗나간 것을 의미한다. 그 표적은 무엇인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인 애주애인에서 빗나감이다.
성서에는 아담(애주)과 카인(애인)의 죄로부터 원죄를 소급한다.
창세기3,1-4,16/창세기6,5-8/ 탈출기20, 3-11/ 레위기24, 16/ 민수기21,7/ 신명기12,1-8/ 스바나1,12/전도서5,4 /시편14,1/시편130/ 예레미야7,24/욥기15,25/ 마태오12,31/ 루카15,18-21/ 요한8,34-35/요한16,19/ 사도행전1,20/ 데살로니카전서5,19/로마서1:21-28/로마서4,20/로마서14,23/고린토전12,3/코린토후서9,7/히브리서10,29 /골로사이4,17....
그럼에도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고 성서는 전한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130(129),3)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로마서4, 7-8/시편32,1)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코3,2-30/마태오12,22-32/루카11, 14-23/12,10)
Ⓕ와 Ⓖ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용서받은 죄에 대해 전한다면 Ⓗ는 용서받지 못한 죄에 대해 전한다. 즉 성령을 모독한 죄,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죄는 용서받지 못한 죄에 해당한다. Ⓕ와 Ⓖ처럼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용서할 수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상황 속에 자신을 위치시킨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영원하듯, 그 용서의 결과 역시 영원하다고 전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렇게 영원한 생명에서는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죄는 허상을 실재화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죄는 비실재이기에 칠죄종의 경향 그 어떤 것으로 드러나든 그 심층에는 두려움이 있다. 애주애인은 두려움과 함께 있을 수 없다.
(나는 완전히 두려움에서 자유로운가? 애주애인이 유일한 목표라는 것을 아는데도 어떤 두려움에 휩쓸릴 때가 있다. 나는 지금까지 하느님의 사랑에 의탁해 살아왔다는 것을 고백하서도 마치 내 능력으로 산 것처럼 어떤 두려움을 수시로 경험한다. 그래서 기도하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상태 때문에 울기도 한다. 두려움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세상의 순례란 사랑과 두려움의 주름을 접었다 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젊은 날의 사도 요한과 요한복음을 완성할 때의 사도 요한
요한1서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거듭해서 우리에게 전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쫒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요한1서4,18-19)
두려움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치유받아야 할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신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실재는 애주애인, 하느님의 사랑이기에 두려움이 없다. 하느님의 치유하는 음성은 창조된 모든 만물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음성은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고, 그리스도와 떨어져서는 들을 수 없다.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아니면 우리는 실존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하느님과 하나다(요한9,30)라는 고백으로서의 믿음과 태도로서의 믿음의 간극을 극복하고자 하는 믿음의 여정에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무엇인가를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바오로가 말하듯이 희망하는 사람이다(1데살로니카4, 13/에페소2,12)희망하는 사람은 지금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양식에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정지의 상태가 아니라 마중나가는 약동적인 과정을 불러일으킨다(심상태, 「신앙의 원리로서의 희망」)
연중26주일, 마르코 9,38-43.45.47-48은 빛과 어둠을 수시로 경험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람 됨의 근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비전을 갖고,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무한함을 살기위해 죄와 죽음으로부터 진실로 자유로워지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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