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재물이 주는 네 겹의 충족이유율을 넘어 존재의 충만으로(4)
-연중28주일,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를 중심으로
1. 김남조, 「가난한 이름에게」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쓸모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쓸모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에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 /겨울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사는 /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 중 특별하기론/고독 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 중 특별하기론 고독 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 때문에 /고독도 과해서 못 가진 이름에 /울면서 눈 감고 입술을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김남조 시인의 「가난한 이름에게」는 세상에 외로운 사람은 많지만 고독을 아는 사람은 없다는 명제를 시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다섯 개의 서술어- 나 쓸모없이 살다 갑니다/ 당신도 쓸모없이 살다 갑니까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 당신도 고독이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태를 고독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고독은 가난과 동의어로 쓰인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바라본 만인의 통찰을 수납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남조의 「가난한 이름에게」는 모든 사람이 겪는 고독의 환지통을 노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시에서 가난은 절대 고독으로 넘어가면서 가난의 결이 달라진다. 그 절대 고독은 사람이 없는 상대고독이 아니라 사람이 채워줄 수 없는 존재의 고독을 의미한다. 어떤 명사 앞에 '절대'라는 명사가 덧붙으면 그것은 하늘의 언어가 된다.
봄날 달을 벗하며 홀로 술을 마시며 쓴 이백의 「월하독작 月下獨酌」에 대한 화답시에 해당하는 김남조의 「가난한 이름에게」는 가을 밤 홀로 시를 마시며(쓰며) 쓴 「詩下獨酌시하독작」 이라 할 수 있겠다. 시인에게 절대 고독의 상테를 빼앗는 것은 시인에게 펜을 뺏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 쓸모없이 살다 갑니다' 는 고백은 시인의 충족이유율인 '나는 절대 고독을 보았습니다', 로 읽게 된다.
순애데레사가 탱큐!
2. 생성, 인식, 존재, 행위라는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쇼펜하우어)
인간이 절대고독의 경지를 알 수 있다면, 충족과 향유의 원천을 자기 자신 속에서 더 많이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발견할수록 인간은 더 행복해진다는 명제를 던진 사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에서 인간의 모든 의지는 오직 하나의 의지라는 것을 전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질은 사유나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지에 있다'고 보았다. 우리의 판단은 논리적 사유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식되지 않은 심층부에서 순간적인 착상이나 결단의 형식으로 나타나며, 우리들의 신체적 행동 역시 의지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인간 행동의 실질적인 추진력은 의지이고, 이성은 단지 그 방향을 제시해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는 무한한 데 비해, 그 충족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어떤 욕망이든지 채워지고 나면 즉시 새로운 욕망이 일어나고, 어떤 고통도 그것을 벗어났다 싶으면 곧바로 새로운 불행이 찾아든다. 그러므로 고통이야말로 삶의 본래 모습이며 쾌락이나 행복은 고통이 없어졌을 때 잠깐 찾아오는 소극적인 것, 즉 고통의 부재(不在)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하여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인생은 고통이요, 이 세계는 최악의 세계라는 전제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표상의 세계'와 '의지의 세계',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하지만 사실 '표상의 세계'는 인간이 인식함에 있어서 왜곡된 가상에 불과하므로 사실상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세계'를 세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표상의 세계는 인식론으로 파악한 세계. 인식 과정만으로는 칸트가 말한 '물자체'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그 '물자체'에 관련된 인식 표상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인식 표상은 충분근거율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표상들의 관계를 조건 짓는 충분근거율에는 '시간과 공간', '인과율', '동기', '논리 규칙'이 있다.
의지의 세계는 나의 신체로부터 알게되는 세계. 유추해 보면 무생물의 '힘'조차도 일종의 '의지'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의지'는 세상의 본질이므로 칸트의 '물자체'는 바로 '의지'와 다를 바 없다. '의지'는 충분근거율에 의해 조건 지어지지 않으므로, 시간과 공간, 인과율, 동기, 논리 규칙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는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의지다. 그것을 우리가 억지로 인식론의 관점에서 하나하나 구별하여 나누는 것일 따름이다. 이를 개별화의 원리라고 한다. 이 개별화의 과정에서 충분근거율이 개입한다. 충분근거율이란 '시간과 공간', '인과율', '동기', '논리 규칙'을 말하는데, 하나의 의지를 시간과 공간으로 특정짓고, 원인과 결과로 구분하며, 논리적인 규칙을 세우고, 행위에 따른 동기를 찾는 것을 통해서, 개별적인 것으로 나누어져 인식된다는 것이다.
다만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다소 논쟁적인 개념을 도입한다. 그는 의지가 맹목적으로 요동치는 과정에서 수많은 다양한 단계들의 의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의지는 본래 하나의 의지이긴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여러 의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지들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비슷한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데, 이를 '의지의 객관화' 또는 '이념(idee)'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의지의 이념들이 충분근거율에 의해 시간과 공간, 인과율, 동기, 논리 규칙으로 구분되어 인식될 때야 비로소 개체들로 특정되어 개별화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보통 우리는 표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표상의 세계에서 원인, 동기, 이유, 구별 등의 개별화의 논리로 인해 각 개체들로 구분되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행할 뿐이고 그 이후에 자신의 행동을 논리적인 것으로 합리화하는 것일 따름이라는 게 쇼펜하우어의 주장이다. 즉, 구분된 각 개체들의 표상 밑에는 의지가 숨겨져 있어서 의지의 명령대로 행동하고 있지만 각자는 구분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각 개체는 자신이 지닌 의지가 자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의지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서로 싸우게 된다. 이로서 홉스가 말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가 개별적인 것을 뛰어넘어 직관적으로 의지의 이념을 포착해낼 수 있다면, 이 이념에 대한 통찰을 통해 결국 그 의지가 하나의 우주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러한 앎에서 '나'와 '너'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싸울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념에 대한 통찰을 통해 서로가 하나의 의지임을 알게 된다면, 서로는 서로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이로서 서로를 구분함으로써 발생하는 '욕망으로 인한 고통'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광기를 가진 예술가적 천재만이 자신의 관심, 의욕, 목적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순수하게 직관에 몰입하여 이러한 이념을 포착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관중들은 그 천재의 예술 작품을 '관조'함으로써 세계가 하나의 의지임을 깨닫고는 삶의 고통을 잠시나마 완화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조'의 방식은 일시적이다. '관조'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표상의 세계'에 빠져 욕망을 추구하고 욕망에 의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더 본질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에 의하면, 그 방법이란 의지의 방향을 되돌려 의지 상태를 무(無)로 만드는 전략으로서, 개별적인 의지가 일어날 때마다 그 의지를 부정하는 것, 그리하여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욕망을 억제하는 것, 즉 자기-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개별적인 삶 자체가 '표상이라는 가상'이 만들어낸 고통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개체적 의지의 부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의지 전체가 본래 하나임을 깨닫게 되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서 벗어나 욕망이 만들어내는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비극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쇼펜하우어는 고통은 행복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더 이상 소망할 것이 없는 열반의 경지에서 우리들 자신으로서 죽을 것! 세상 것들을 멀리하고 십자가를 질 것! 향유의 원천을 자기 자신 속에서 더 많이 발견할수록 인간은 더 행복해진다. "
소멸과 생성이라는 생의 주기를 <의지와 표상>으로 바라보고 이를 <생성, 인식, 존재, 행위>라는 네 겹의 충족이유율로 바라본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결국 충족이유율 뛰어넘지(통합하지)못하기에 고통 혹은 무(없음)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바라보았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출발점이자 그의 철학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담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왜 인간은 생의 조건인 충족이유율을 뛰어넘지 못하고, 즉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충만>에 이를 수 없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 말은 삶을 살면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②현상은 표상을 의미할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어떤 종류든 모든 표상, 즉 모든 객관은 현상이다. 하지만 의지만이 사물 자체다. ③모든 의욕은 욕구에서, 즉 결핍이나 고뇌에서 생긴다. 이 욕구는 충족되면 끝난다. ④모든 충족, 또는 흔히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원래 본질적으로 언제나 소극적인 것에 불과하며 결코 적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⑤의지의 자유로운 부정이나 포기와 함께 이 모든 현상도 이제 없어진다.
하지만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고, 인간이 실제로 이것을 의식할 때 철학적인 사려 깊음이 생긴다. 이 경우 인간은 태양과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즉 세계는 다른 존재인 인간이라는 표상하는 자와 관계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 그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진다.
의지 그 자체는 결코 표상이 아니고 표상과 전적으로 다르다. 모든 표상, 모든 객관은 의지가 현상으로 나타나 가시화된 것, 즉 의지의 객관성이다. 의지는 모든 개체 및 전체의 가장 심오한 부분이자 핵심이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자연력 속에 현상하고 숙고를 거친 인간의 행동 속에서도 현상한다.
하지만 하나의 소망이 성취되더라도 적어도 열 개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남는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지속되고, 요구는 끝없이 계속된다. 즉, 충족은 짧은 시간 동안 불충분하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심지어 최종적인 충족 자체도 겉보기에만 그럴 뿐, 소망이 하나 성취되면 즉시 새로운 소망이 생긴다. 의욕한 대상을 얻지 못하면 확고하고 지속적인 충족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저절로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소망이 충족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망, 즉 부족이란 모든 향유의 선행 조건이기 때문이다.
『좁은문』을 쓴 앙드레 지드는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자세히 읽어나갔고 자주 읽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나의 주의를 뺏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읽었다. 스피노자나 니체같은 철학자들의 책도 읽었다. 내가 철학에 빠진 계기는 쇼펜하우어 덕분이며 오로지 쇼펜하우어 덕분이었다. 쇼펜하우어보다 헤겔을 더 좋아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를 탈고하기 직전인 1869년 여름에 자신의 친구이자 쇼펜하우어 책을 번역한 아파나시 페트(본명:페트 센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번 여름에 내가 뭘 했는지 알고계십니까? 나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강력한 기쁨을, 여태껏 한 번도 몰랐던 감동을 만끽했습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책을 모조리 구해서 읽었고 자주 읽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강의를 수강한 여느 학생도 내가 이번 여름에 발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우지 못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앞으로 나의 이런 의견이 언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쇼펜하우어야말로 모든 인간들 중에 위대한 천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당신은 쇼펜하우어가 철학적 주제들을 다룬 무언가를 썼다고 말해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그것은 경이롭고도 생생하게 성찰되는 온전한 세계입니다. 나는 벌써부터 쇼펜하우어의 글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함께 번역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쇼펜하우어의 책을 많이 읽는 나는 어째서 아직도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세상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 이유란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토로했듯이 세계에는 하찮은 인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철학자가 된 계기는 쇼펜하우어 때문이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에 니체는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하여 읽고 철학자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쇼펜하우어를 평가한다.
“오늘날 문화가 이토록 천박하지고 황폐해지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기운찬 줄기와 가지를 내뻗을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뿌리 하나라도, 비옥하고 건강한 토양 한 줌이라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쓴다. 그러나 도처에는 먼지와 모래뿐이니 모든 것은 마비되고 탈진해서 죽어간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한 자락 둘데 없이 고독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상징은 뒤러가 그려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죽음과 악마와 동행하는 무장 기사'이다. 무쇠처럼 굳센 눈빛과 철갑옷으로 무장한 이 기사는 자신의 끔찍한 동행자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희망도 품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르는 개와 함께 험난한 길을 혼자서 고독하게 걸을 줄 안다. 뒤러(미술가)가 묘사한 이 기사가 바로 우리의 쇼펜하우어와 같다.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도 진리를 추구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표상을 이끌어가는 견인으로 보았다. 목표도 휴식도 없는 계속된 소동과 혼잡이 없어지고, 단계적으로 이어지는 여러 형식의 다양성이 없어지며, 의지와 더불어 그 전체 현상이 없어지고, 최종적으로 이 현상의 일반적 형식인 시간과 공간도, 그 현상의 궁극적인 기본 형식인 주관과 객관도 없어진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다. 그런데, 표상된 세계로서만 알 뿐, 세계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는 개별화의 원리다. 인간은 무지로부터 고통 받는다. 특히 생성과 존재율이 개별화의 원리가 되어, 인간의 삶에 고통으로 작용한다. 세계(의지의 세계)는 맹목적으로 움직인다. 즉, 이유나 원인 같은 게 없다. 인간은 살아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계속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이러한 삶에의 맹목적 애착은, 의지의 맹목성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나타난다. 본래 세계는 하나지만, 너와 나의 세계는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으로 파악하게 되는 서로 다른 세계라는 것. 이것이 바로 개별화의 원리다. 각자는 고립되고 외로운 낯선 존재가 되어, 본질적으로 하나인 의지의 세계를 모르는 채, 개체적 존재로서의 자기 입장과 자기 욕심을 관철시키려는 개별화의 원리가 결핍의 원리라고 보았다. 이렇게 '무지'로부터 인간의 모든 고통이 시작된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생의 주기를 고통으로 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는데 인간의 의지는 신이 제시한 그런 영원의 충만으로 넘어가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하나의 선의지를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마르코 10,17-30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연중28주일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라고 전하는 마르코 10,17-30은 Ⓐ부자청년이 따름(추종)을 거부하다(마태오19, 16-22/루카18, 18-23), Ⓑ부자는 구원받기 어렵다.(마태오19,23-26/루카18,24-27), Ⓒ온전한 따름과 보상(마태오19,27-30/루카18,28-30/22,28-30)이라는 세 주제를 연결하여 그리스도교는 자력종교가 아니라 타력종교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얻게되는 박해와 충만에 대한 역설의 은총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부자청년은 영생을 원하면서 왜 재물의 포기 앞에서 슬퍼하면서 떠났을까?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7-22절에는 부자청년과 예수의 담화를 통해 물신주의가 예수를 따르는데 얼마나 큰 장애가 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부자청년은 행하기(계명지키기)와 재물의 소유하기를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17절에서, 부자청년이 진정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이 있는지 질문하였다고 보기보다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공개적인 어떤 인증을 예수께 받고 싶었을 것이다. 흔히 아브라함이나 솔로몬의 경우를 본다면, 구약에서는 재물이 축복의 상급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는 답에서, 부자청년을 슬프게한 위의 말씀에서 우리 역시 아주 오랫동안 멈춰서야 한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1차적으로 재물은 타자의 생존과 연결되므로 분배정의를 실현하라는 말로 들을 수도 있겠지만, 재물의 포기를 통해 특별한 초대를 그분이 하고 있다는 것에 초점이 놓이기 때문이다.
부자청년이 재물의 포기를 특별한 초대로 알아들었다면 <오 복된 가난이여!> 라고 외쳐야 했을 것이다. 또한 우리 역시 적극적으로 가난을 세상의 시선과는 다른 차원으로 바라보아야 하리라. 계명의 준수만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이 난관은 무엇일까?를 질문하면서 말이다.
부자청년을 통해, 행하기나 소유하기가 아니라 존재하기가 진정한 따름이라는 것에서 따름은 포기가 아니라 충만이 그 초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렇다면, 재물의 포기는 왜 그분을 따르는데 결정적인 결절점이 되는가? 이는 부자청년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자본을 절대신으로 간주하는 이 시대에- 반드시 정립해야할 성찰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의 조건을 분명히 제시했다는 점에서 유대인들과는 다른 이유로, 그러나 결국엔 같은 이유로 예수를 따르지 못하는 장애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시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계명의 철저한 준수가 영생의 조건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계명의 철저한 준수는 믿음의 중심에 여전히 내가 주인이라는 점을 교묘하게 은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중심에 그분이 있느냐의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가 재물의 포기라는 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엇인가? 재물이 주는 포만감은(혹은 재물에 버금가는 현세의 매력적인 힘들) 그분의 현존을 무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일 것이다.
포기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노예의 포기이거나 힘의 논리에 굴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께서 무엇이 필요해 인간에게 재물의 봉헌을 요구하겠는가? 우리가 드리는 것은 그분이 갖지 못할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드림으로써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의 절대적인 경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물은 윤리적인 문제뿐 아니라 더 나아가 존재의 문제, 더 나아가 신앙의 문제와 직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이 주는 힘-명예, 권력, 쾌락, 재물 가운데 재물에 방점을 찍고 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재물이 던지는 올무가 무엇인가를 잘 아는 잠언의 저자는 재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시면 재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신명기 저자는 재물이 재앙과 축복의 양면의 칼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주님께서 명령하시어 너희의 곳간과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이 넘칠 것이다. (신명기28,8)모든 것이 풍부한데도 너희는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지 않은 까닭에 너희는 굶주림과 목마름과 헐벗음과 온갖 궁핍 속에서 주님께서 너희를 치라고 보내시는 너희의 원수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신명기 28,47-48)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는 가난과 풍요 그 어느것에도 얶매이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서간문 곳곳에서 전한다.
“우리는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거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2코린토6,10)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어주어 나중에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는다(2코린토8,14-15)여러분은 모든 매우 부유해져 매우 후한 임심을 베풀게 되고 우리를 통하여 그 인심은 하느님에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2코리토9,11-10-13)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나 내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립비4,12-13)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17,19-31)를 통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연민을 복음 전면에 내세웠던 루카복음 사가는 재물이 어떻게 영생을 좌우하는가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분께서는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1,53)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5,11 )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15,31-32)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16,21)
이렇듯, 재물은 단지 한 사람이 가진 부의 크기가 가난의 깊이가 아니라 이 세상의 순례에 재물이 주는 포만감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인이 되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생을 원한다면 그 영생은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부자에게 계명의 준수에 머물지 말고, 재물이 주는 포만감에 젖지 말고, 진정한 충만, 진정한 따름을 이 지상에서부터 실천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재물이라는 소유에서 자유로워진 다음에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것. 이것은 또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 즉 실존의 올무에 묶여 있는 이들을 자유롭게 해 준 다음에 넌 비로소 존재의 자유를 알 것이다, 라는 말이기도 하다.
부자청년를 통해 전해준 영생의 메시지 다음에 23-27절에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이 자유의 폭을 확장하신다. 재물을 하늘의 축복으로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계명의 철저한 준수가 영생의 조건이라고 믿고 있는 제자들에게 재물을 많이 가진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말씀은 제자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23-27절에서 부자청년의 신앙포기에 결정적 장애가 되었던 재물과 따름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제 제자교육을 분명히 하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주제는 어린아이처럼 되면 쉽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지난주의 주제와 충돌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이 아이들의 속성이 아니라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이 아니고서는 이라는 의미로 바라본다면 하늘나라는 인간의 소유나 행위로 얻을 수 없고 오직 존재하기를 통해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자력종교가 아니라 타력종교라는 것을 27절에서 분명히 제시한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부자청년의 구체적 예화를 통해 영생 혹은 구원이라는 보편론이 우리에게 주는 은총은 부자청년뿐 아니라 인간의 구원은 인간 스스로 자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일 것이다. 그분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유한한 것에서 그 충족을 채우려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질문, 28절에서 30절의 <따름과 보상>에서 재차 이를 우리에게 확인시킨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28-30절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이들에게 영생의 의미를 이미 여기서 구체화되었음을 전한다. 종말론적인 따름과 보상에 대한 담화를 베드로의 질문을 통해 분명히 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이미 여기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충만이 무엇인가를 제시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충만은 죽은 후에 주어지는 사후보상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 순례에서 주어지는 은총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충만의 역설이 위치한다. 그리스도인의 포기는 오직 박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충만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따름과 보상>은 십자가에서 부활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역설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는 가난의 총체적인 모습이자 이 세상 것들에 대한 포기의 상징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박해는 밖에서의 박해 뿐 아니라 안에서 박해(몰아의 사랑에 방해되는 것들)도 포함된다. 순교는 육체적인 박해를 능가할만한 충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죽음을 넘을 수 있을 만큼의 충만은 순교자가 아니면 알 수 없다. 순교는 은총이 아니면 주어지지 않는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런 맥락에서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라고 전하는 마르코 10,17-30은 포기에 초점이 놓인 것이 아니라 충만에 초점이 놓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기1--->Ⓑ포기2--->Ⓒ보상(충만)
그렇기에 부자청년이 슬퍼하며 떠난 것이나 제자들이 놀란 것이나 베드로의 확인질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계명의 준수나 단순포기에 초점이 놓이면 안된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기한 사람에게는 사실 포기가 문제가 아니다. 충만이 크기 때문이다. 언제나 포기가 문제인 것은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두려운 시선이 겹층을 이루기 때문이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이냐시오 성인, 안토니오 성인 같은 분들은 모두 엄청난 부를 가진 분들이었다. 포기의 대가로 충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충만하기 때문에 포기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체험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충만을 경험하는 것이 왜 어려운가를 성찰해야 하는 이유다. 엄청난 충만을 경험하였기에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포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들의 경우를 보면 찰라적 충만이 포기를 가능하게 했지만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기 전까지 충만과 갈등을 수없이 경험하게 된다. 또 부를 포기한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현세적인 쾌락을 포기할 수 있는 터닝포인트는 언제나 특별한 은총의 경험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현존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완전한 충만은 오직 그분의 특별한 은총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 할 수 있다. 생명 자체가 이미 빈 손이 아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진부한 표현은 그리스도인의 충만을 모를 때의 세상 담화의 편승이다.
우리는 충만(있음)에서 비롯되어 그 있음을 충만하게 살다 온전한 충만(있음)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도 없고,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받을게 없을 정도로 부자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기도밖에 할 것이 없다는 것은 사실 겸손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가치관에 위축된 자괴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부와 가난에 대한 영성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지라고 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재물이 주는 네가지 충족이유율에서 벗어날 수 있다.
①재물은 이 세계를 형상의 세계로 규정한다. 즉 몸이 콘트럴 타워라고 부추긴다. ② 재물은 이 세계를 분리의 원칙에 복무하게 유혹한다. 너와 나는 하나가 아니게 된다. ③ 재물은 인간과 세계를 비교우위로 재단한다. 인간의 허영심을 자극하여 이미지의 세계로 만든다. ④ 재물이라는 물신주의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견인하는 바탕이 된다.
그렇다면 누가 이 재물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 때문이다. 그리고 재물을 포기한 이들에게 다시 백배의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재물의 올바른 자리를 그들이 알기 때문이다. 그 역시 은총지위에 있을 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오 복된 가난이여! 라고 가난을 예찬할 수 있었고,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가난과 풍요의 영성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내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립비4,12-13)
연중28주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교회의 재물을 가장 확실하게 지켰던 성라우렌시오에게 기도하면 좋겠다. 재물에 버금가는 엄청난 영적 은사를 지닌 우리 하나하나는 교회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성 라우렌시오여! 우리가 받은 영적 재산인 은사를 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올바로 사용하고 안배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빌어주소서! 아멘!
글을 마치며,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편자와 개별자의 만남,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0) | 2024.10.25 |
---|---|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이사야52,7) (0) | 2024.10.18 |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서정주) (0) | 2024.10.04 |
빛은 흰색을 만들지만 그림자 또한 만든다(라이프니츠) (0) | 2024.09.28 |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시편19) (0) | 2024.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