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자와 개별자의 만남,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Alexander G. Bell)
- 연중30주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를 중심으로
1. 김현승의 「견고한 고독」 , 「절대 고독」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단단하게 마른/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이 마른 떡을 하룻밤/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견고한 칼날 -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더 휘지 않는/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견고한 고독」)
나는 이제여 내가 생각하던/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내가 만지는 손끝에서/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내가 만지는 손끝에서/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따스한 체온을 느낀다.//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낸다.//나는 내게서 끝나는/무한의 눈물겨운 끝을/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詩)는.(「절대 고독」)
김현승의 「견고한 고독」 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의 고독에 대해, 「절대 고독」은 환상과 본질을 바라본 후에 시적사유의 끝을 바라본 시인 자신의 고독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신의 고독과 인간의 고독은 나눠지지 않고, 「견고한 고독」은 「절대 고독」을 낳은 모태가 된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절대 고독」은 「견고한 고독」를 낳는다. 그것이 김현승 시인이 그의 시 전반에 걸쳐 추구한 고독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시인이 추구하는 ‘고독’은 결코 절망적인 것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처럼 신의 견고한 고독에 다가가려는 몸부림으로, 절대 자아를 만나려고 하는 고독이며, 고독의 궁극을 추구하는 자유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 고독」에서 화자는‘영원의 먼 끝’을 만지며 ‘비로소 오랜 잠’에서 깨어난 자신을 만난다. 지상의 삶에서 바라보던 ‘아름다운 별들’은 다만 환상일 뿐이므로 ‘흩어져 빛을 잃’는다. 이제 그는 환상(별) 대신에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진실한 자아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지금까지의 자신의 생이 하나의 환상이요, 무(無)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언어’와 ‘언어의 날개들을’ ‘바람에’ ‘티끌처럼’ 날려보낼 수 있다. 자신에게 시작하여 자신에게서 끝나는 자신의 삶을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끝’에 다다른 ‘절대 고독’의 경지에서 ‘나의 시는’ ‘드디어 입을 다물게’ 된다. 고독의 끝에서 영원을 본 것이다. 영원 앞에서 화자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언어의 길을 본 것이다. 그렇게 「절대 고독」은 「견고한 고독」를 낳는다. 고독은 인간의 점유물이 아니고 사랑의 어떤 차원, 인간의 고독을 이해하면서 신의 고독을 이해한다.
2. 가장 불행한 자의 무덤은 하늘일 것이다.-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키에르케고르)
김현승 시인이 고독을 통해 개별자와 보편자가 만나는 영원의 과정을 시화했다면, 절망이라는 주제로 절망의 문을 연 사람도 있다.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는 명제를 던진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전제에서 절망하지 않는 절망의 포즈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진정으로 신 앞에선 개별자의 절망을 맛보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말한다. 무슨 일에 절망한다는 것은 아직 본디 절망은 아니다.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절망이 나타나고 그다음에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는 것이 뚜렷이 나타나게 된다. 자기에게 절망한다는 것,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모든 절망의 공식이다. 따라서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절망의 제2형태는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려는 제1형태로 환원될 수 있지만, 절망하는 자가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한다면, 그는 본디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기를 바라지 않는 게 아닌가.
그는 ‘머리말’에서도 확실히 말해진 것처럼 절망은 어디까지나 ‘병’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약’으로서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면 자칫 죽을 병, 즉 그것으로 죽어 버리는 병처럼 이해하기 쉬운데 결코 그런 의미의 병이 아니라는 것이다. 좀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그것으로는 결코 죽지 않는 병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죽어서 또는 자살해서 묘지에 안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 절망의 극치라고 할 수 없다.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것, 끊임없이 죽음에 직면하고 죽음에 이르면서도 죽을 수 없는 것, 아니 영원히 죽음을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것이 절망자의 또는 가장 불행한 자의 참모습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절망인 까닭은 절망이란 자기를 있게 한 신과의 관계를 상실하며 나 자신의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지상의 일시적인 고난이나 고통과 병 그 어느 것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니다. ‘절망’이란 일상적인 용어와는 달리 ‘인간의 자아가 신을 떠나서 신을 상실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자기소외인 것이다. 이 상태를 철저히 규명하고 현대인에게 두려움을 주는 병에 대하여 진단을 내리고 각성을 촉구했다는 것에 이 책의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는 본질적인 절망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다고 말한다. 먼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조정한 결과로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자기 자신이기를 바라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 할 뿐인 것이다.
절망의 분해는 단순한 분해가 아니고, 그 자신과 관계하는 동시에 타인에 의해 조정되는 관계의 분해이다. 즉 절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우의 자기 상태를 나타내는 정식定式은 자기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할 때 자기(정신)는 자기를 조정한 힘 가운데에 투명하게 근거를 두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이 병에 주의하고 있다는 것이 자연 그대로의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장점이다. 이 병에서 치유되었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인의 더없는 행복인 것이다. 이처럼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은 끝없는 장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요 비참함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파멸이다.
절망이란 종합인 인간 그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불안이다. 바꾸어 말하면 종합 속에는 분열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절망은 종합이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도 인간을 이런 관계가 되게 한 신이 인간을 그 손에서 놓는 것을 통해, 관계가 그 자신과 관계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정신이자 자기이기 때문에 책임이 생기게 되는데, 모든 절망은 이 책임 아래에 있는 것이고, 절망이 있는 한 그 모든 순간은 이 책임 아래에 있는 것이다.
절망의 모든 현실적 순간은 가능성으로 갈음할 수 있는 것이다. 절망하는 이는 절망하는 순간마다 절망을 스스로 계속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절망은 끊임없이 현재라는 시간에서 생겨난다. 거기에는 현실에 남겨질 과거라고 할 그런 것들은 하나도 없다. 현실 속에서 절망할 수 있는 모든 순간에 절망하고 있는 자는 모든 앞서가는 것을 현재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절망하게 된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절망한다는 것이 정신의 규정으로서 인간 속에 있는 영원한 것(영원성을 현재의 시간 속에 표현하는 것)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이 개념은 글자 그대로 풀면 그것은 그 끝, 그 결말이 죽음인 병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치명적인 병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의 죽음은 그 자체가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그 어떤 병도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확실히 병의 마무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끝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말이 죽음이고, 죽음이 결말인 것과 같은 경우의 병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병이야말로 절망이다. 절망의 고뇌는 진실로 죽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절망은 누워서 죽음과 싸우면서도 죽을 수 없는 죽을병에 걸려 앓고 있는 상태와 비슷하다. 따라서 죽음에 이르도록 앓고 있는 것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살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죽음이라는 마지막 희망까지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희망을 잃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죽음을 희망으로 생각하게 될 정도로 위험이 클 때, 그때의 절망이 바로 죽을 수조차도 없다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절망인 것이다. (196~197)
자기 자신에 의한 이 병은 영원히 죽는, 죽으면서도 죽지 않는, 죽음의 고뇌에 찬 모순이다. 그러나 죽음을 죽는다고 말하는 것은 죽음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절망의 죽음은 끊임없이 생으로 진화한다. 절망하는 사람은 죽을 수가 없다. 절망의 밑바탕에 있는 영원한 것, 즉 자기를 녹여 없앨 수는 없다. 절망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를 녹여 없애는 것이다. 그러나 절망 스스로가 원하는 그것은 절망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무력함이 자기를 녹여 없애는 하나의 새로운 형태가 된다. 그러나 이 형태에서의 절망은 그가 하고자 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을 녹여 없애는 욕망 앞에 무력하다. 그것은 절망의 곱절이며 제곱의 법칙이기도 하다. 이것은 절망에 불붙이는 것, 또는 절망 속의 차가운 불길이며, 끊임없이 자신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 점점 더 무기력해지는 자기 소모이다. 절망하는 자는 ‘무슨 일에’ 절망한다. 절망하는 자가 무슨 일에 절망했다는 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절망은 어떤 병보다도 훨씬 변증법적일 뿐만 아니라 절망에 관한 한 온갖 징조가 변증법적이며, 다시 말해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오히려 절망하고 있음을 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또 절망하고 있는 상태로부터 구원되어 있음을 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안심이나 침착함은 절망하고 있음을 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이 안심이나 침착함이야말로 절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절망을 극복하고 평화를 얻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앓고 있지 않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앓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앓고 있다는 것과는 도저히 같을 수 없지만, (현재) 절망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에 대한 불안으로 말미암아) 절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신으로 규정된 것을 자각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절망이다.
절망은 완전히 변증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병이기도 하지만, 그 병에 걸려 본 적이 없다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고, 그 병에 걸리는 것이 진정한 신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음직한 병이다. 만일 사람이 이 병에서 낫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 병은 무엇보다도 위험한 병이 된다. 절망을 희귀한 것으로 생각하는 통속적인 고찰은 잘못이다. 절망은 완전히 보편적인 것 또 자기가 절망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사람은 실제로도 절망하고 있지 않고, 자기는 절망하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만이 절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통속적인 고찰도 잘못이다. 변증법의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는 절망하고 있다고 아무런 가장도 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는 사람 쪽이 자신은 절망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보다도 한 걸음 더 구원에 가까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지 실제로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개인의 절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은,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이 병과 비참함을 더욱 무서운 것으로 만드는 이유가 된다. 그것은 이 병에 걸려 있는 당사자 자신까지도 모를 수 있도록 인간 내부에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한성의 절망은 유한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절망은 단지 그 반대되는 것으로서만 규정할 수 있다. 무한한 것이 되려고 생각하고 있는, 또는 단순히 무한이고자 하는 순간순간은 절망이다. 무한성의 절망은 공상적인 것이고 한계가 없는 것으로서 유한성(현실성)의 절망은 무한성(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무한성의 결핍이란 절망적인 편협함과 고루함을 말한다.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와 같은 것인데 그것도 무한한 것 속에서 희박하게 되기 때문이 아니고, 정적으로 유한하게 되는 것으로 해서, 다시 말해 하나의 자기가 되는 대신 하나의 숫자와도 같은 인간이 되어 이 영원한 일률적인 것에 가해지는 또 하나의 인간, 또 하나의 도돌이표가 되어버리는 것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믿는 자는 인간적으로 말하면(자기 몸에 들이닥친 것 속에 또는 자기가 굳이 행한 것 속에) 자기가 파멸할 것임을 알아챈다. 그러나 그는 믿는다. 그 때문에 그는 파멸하지 않는다. 믿는 자는 어떻게 해서 자기가 구원될 것이냐 하는 것을 완전히 신에게 맡긴다. 그리고 신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자신의 파멸을 ‘믿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 인간적으로는 그것이 자기의 파멸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계속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 이것이 곧 ‘믿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 또한 그를 구원해준다.
믿는 자는 절망을 영원하고 확실하게 없앨 수 있는 약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가능성인데, 이것이 신앙이 주는 건강이요, 이 건강이 모든 모순을 푸는 것이다. 이런 경우 모순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파멸이 확실하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건강이란 일반적으로 말하면 모순을 풀 수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모든 것이 필연이 되었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모든 것이 일상의 흔한 일로 되었다는 의미이다. 결정론자나 숙명론자는 절망하고 있고, 절망하는 이로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필연이기 때문이다(가능성이 결핍된 필연적 현실 속의). 인격이란 가능성과 필연성의 종합이다. 한편 숙명론자 또한 절망하고 있고, 신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 신을 두고 있지 않은 자는 자기 또한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여기에서는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 숙명론자의 신은 필연성이다.
자기가 절망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절망 또는 자신이 자기라는 것을, 영원한 자기를 가지고 있음을 모르는 절망의 무지/이 상태가 절망이고, 또 절망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당함은, ‘좋은 의미에서의 진리의 독선’이라고 불려도 좋은 하나의 사례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기가 절망하고 있음을 모르는 절망한 사람은,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절망한 사람에 비하면 진리의 구제로부터 한걸음의 부정만큼 동떨어져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자신은 하나의 부정성이고 절망에 대한 무지는 또 하나의 새로운 부정성이다. 그런데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온갖 부정성을 뽑아나가야 한다. 무지는 절망의 가장 위험한 형태일 수 있다. 무지하기 때문에 절망 속에 머무는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그 스스로의 파멸이지만, 절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어떤 작용으로 말미암아 지켜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절망의 손안에 몸을 맡긴 채 아주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절망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을 때, 인간은 자기를 정신으로 의식하는 상태에서 가장 많이 멀어져 있다. 그런데 자기를 정신으로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정녕 절망이요, 무정신성으로서, 이 상태는 완전한 무기력 상태,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활일 수도 있겠고, 또는 활기가 흘러넘치는 생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그 어느 쪽에 있든 간에 그 비밀은 결국 절망이다.
자기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절망. 이 절망은 인간 자신이 어떤 영원한 것을 간직하는 자신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고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가, 아니면 절망하고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가의 어느 한쪽이다. 여기서는 물론 자기의 절망을 의식하는 이가 절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올바른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가 구별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의식된 절망에는 한편으로는 절망에 대한 참된 보편적 관념이 요구된다. 그리고 명료성과 절망을 관련시켜 생각을 하는 경우에 한해서 자기 자신에 관한 명료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세속과 관련된 것에 관한 절망, 또는 세속과 관련된 어떤 것에 관한 절망은 가장 일반적인 종류의 절망이다. 특히 어느 정도의 부분적 자기 반성만을 동반한 제2형태의 직접적 절망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절망이 반성된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런 절망을 차츰 드물게밖에 볼 수 없고, 또 그런 절망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도 점점 드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인간은 특히 깊은 절망에 빠져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들이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조금이라도 정신의 규정 아래에 살고 있는 인간은 아주 조금밖에 없다.
영원한 것에 대한 절망,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세속과 관련된 것에 대한 절망, 또는 세속과 관련된 어떤 특정의 것에 대한 절망이 절망인 한, 사실 그런 절망들은 또한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기도 하다는 것은, 이것이 모든 절망의 정식定式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한 사람은 (…) 그의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모르고 있다. 절망한 사람은 세속과 관련된 어떤 것(개인적인 것)에 절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자신이 그것에만 절망하고 있다고 언제나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 그는 영원한 것을 절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영원한 것에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뚜렷하게 진보한 것이다. 지금까지 절망은 약한 절망이었지만, 이것은 자기의 약함에 절망한 진보된 절망이다. 그러나 이 절망 또한 약한 절망이라는 본질 규정 안에 머무는 것으로, (반항)와는 다르다. 따라서 거기에는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전자의 형태(약함의 절망)가 약한 의식을 마지막 의식으로 가지고 있는 데 비해, 이 경우의 의식(영원성에 의해 진보된 절망)은 그 의식에 근거한 관점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의 약함을 의식한다는 새로운 의식으로 강화되고 있다. 절망한 사람 자신은 세속과 관련된 것을 그렇게까지 괴롭게 생각한다는 것이 약한 것이고, 또한 절망하는 것이 약한 것임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약한데도, 거기에서 방향을 절망에서 벗어나 신앙으로 빠르게 바꿔 신 앞에 무릎을 꿇으려고는 하지 않아 더욱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자기의 약함에 절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승이 있다. 먼저 자기의식의 상승이 있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는 영원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또는 자기는 자신 내부에 영원한 어떤 것이 있다는 자기 관념이 없다면, 영원한 것에 절망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물론 사람이 자기 내부에 자기가 있음을 의식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또한 여기에 절망에 관한 좀 더 큰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의 절망은 가장 진실한 절망으로서, 영원한 것과 자기 자신을 잃는 절망은 사람의 절망적 상태가 절망이라는 점에 보다 큰 의미가 있다. 이럴 경우 절망이란 단순한 수난이 아니고 진보하는 행위의 동기이다. 마지막으로 또 여기에는 다른 의미에서이긴 하지만, 또 하나의 진보가 있다. 이 절망은 좀 더 강도가 있는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선 구원에 더욱 가까이 가 있다.
신앙을 향한 통로인 절망도 영원한 것의 힘에 의한 절망으로서, 거기서 자기는 영원한 것의 힘에 의한 자기 자신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용기를 가지는 것이지만, 그와는 반대로 반항에서의 자기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에서 시작하려 하지 않고 세속과 관련된 자기 자신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을 바란다면 무한한 자기라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무한한 자기란 본디 자기의 가장 추상적인 형태, 가장 추상적인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다. 더구나 그가 절망해서 그것으로 남는 것을 바라는 것은 정녕 이런 추상적 자기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조정한 힘에 대한 모든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가려 하기도 하고, 또는 그런 힘이 현재 존재하고 있다는 관념과 거리를 두려고도 하는 것이다. 이 무한한 형태의 힘 때문에 자기는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려 들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창조하며, 자신의 자기를 그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대로의 자기로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구체적인 자기 속에 가지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우리가 부나 명예와 같은 세간적인 가치들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삶이 성공적이라고 희희낙락해 있는 상태야말로 가장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상태라고 본다. 세간적인 가치들이야말로 언제든 쉽게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취약한 것이고 죽음과 함께 궁극적으로는 헛된 것이 된다. 따라서 세간적인 가치들의 허망함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성공에 희희낙락하는 것이야말로 무방비 상태로 절망에 내맡겨져 있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모든 절망이 결국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인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믿음에 입각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극단에 이르기까지 밀고 나간 것이 바로 신에게 반항하는 절망이라고 본다. 이 점에서 키르케고르는 모든 종류의 절망은 남성적(힘에의 의지)인 절망으로 환원될 수 있고 소급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세속의 힘에 절밍하거나 스스로의 힘으로 그 절망을 넘어서려는 주체가 되려는 노력의 좌절에서 느끼는 좌절은 절망이 아니라고 본다. 신과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진정한 절망을 통과해야지만 우리는 신을 만날 수 있고 영원을 알 수 있다고 전한다.
3.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르코 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전하는 마르코 10,46ㄴ-52은 마태오20,29-34/루카18,35-43, 공관복음에 동시에 전해지는 치유이적사화를 통해 꼴찌가 첫째되고 첫째가 꼴찌 된다는 소명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소명의 메시지 하면, 자칫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소명의 메시지는 우리의 갈망이 이루어지는 기도의 과정이라고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다. 개별자인 우리가 보편자인 그분을 만나는 과정이 우리의 유일한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 10,46ㄴ-52는 보편적인 기도에서 구체적인 기도로 넘어가 보편적인 사랑을 전하게 되는 과정을 길가의 사람, 절망의 상징인 바르토매오를 통해 보여준다. 이천년을 건너온 바르토매오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어떤 은총을 선물로 주고 있는지 묵상해야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성서 한문장 한 문장을 백번, 천번, 만번 곱씹어 읽어 본다.
(1)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그 때는, 언제이며, 예리코(46절)는 어떤 의미인가? 제자들, 그리고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보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11장을 앞에둔 시점, 예수님 공생활의 최절정기였음을 알 수 있다.
예리코는 예루살렘 동남쪽 24킬로미터 떨어진 저지대로 날씨가 따뜻한 휴양도시로 알려져 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의 마지막 휴식처여서 순례객들에게 자비는 구하는 걸인들이 많았다.
그 걸인 중에 후천적으로 눈이 먼 걸인 바르티매오가 있었다. 복음사가는 예외적으로 이 걸인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이 얼마나 구체적인 것인가를 보여준다. 바르티매오는 이천년을 걸어와 우리에게 당도한 구체적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2)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대부분의 치유이적사화에서는 병인의 이름이 익명으로 거론 되는데 비해 마르코 복음사가는 구체적으로 바르티매오라는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바르티매오(Bartimacus)는 히브리 남자이름의 그리스어 표현으로 ‘~누구의 아들’, 혹은 ‘부정한 자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불린다. 익명으로 처리되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은 소외된 자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든 그는 하나의 이름을 가진 분명한 인격이라는 점에 초점이 놓인다.
바르티매오는 생존을 위해 길가에 앉아 누군가에게 의존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앞을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과 함께 예수님이 지나가고 계셨다.
(3)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 바르티매오 앞에 수많은 순례객들이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곁을 지나가는 사람 가운데서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소리를 그가 듣은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 가운데 들린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는 그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오랜 갈망을 강하게 건드린다. 그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심연에서 자신도 제어하지 못하는 소리가 마구 튀어나온 것이다.
바르티매오가 외친 “다윗의 자손 예수님” (47절)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 자비와 치유는 어떤 관계인가?
그는 예수를 나자렛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 중에선 나온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소망의 예언을 그도 들었을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이어지는 예루살렘 입성 후 11장,9-10, 12장,35-37에서 다윗의 나라, 다윗의 아들로 메시야 논쟁의 불을 당기는 호칭으로 예수의 구세사의 연속성과 정체를 의미한다.
눈먼 걸인의 입에서 발화되는 이 외침은 많은 성서연구가들이 이 호칭을 11장 이후에 펼쳐지는 십자가 사건의 포석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길가의 사람 바르토매오는 사람들의 꾸짖음을 유발할 정도로 끈질기게 외치고 있었다는 것이 초점이다. 그의 외침의 강도는 지금 그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벗어나기를 갈망하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보편적인 기도가 어떻게 개별적인 기도일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시사한다.
그런데, 그는 왜 나를 낫게 해달라고 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였을까?(47절)에서 우리가 멈춰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어떤 갈망을 가질 때, 그 갈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 신학적으로 분명 자비이자 은총에 해당한다. 우리가 어떤 전례에서의 기도는 언제나 보편적인 기도를 지향한다. 그 보편적인 기도 안에 우리의 개별적인 갈망의 자리를 찾아가는 길을 바르토매오는 <듣고- 외치다>는 것으로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보편을 추구하되 보편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4)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8절에서는 우리가 진리를 듣게 되는 아니 진리를 발설하게 되는 상황을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다- 더욱 큰 소리로 계속 외치다’는 상반된 행위로 들려준다. 보편자의 지향이 개별자의 지향을 어떻게 담고 있는가?
여기서, '외치다'는 것은 ‘듣다’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무엇을 듣는가? 우리는 매순간 듣는 수많은 소리들은 무엇인가? 우리의 입에서 발화되는 말들은 우리가 들은 말이다. 우리의 길위의 여정에서 수많은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들이 우리의 갈망을 재단한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소리가 무엇인지 혼란을 가중시킨다.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하지만 수많은 갈망이 수없이 그럴듯한 명분을 갖고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소리 때문에 가려진다.
우리는 죽을때까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른다. 갈망마저 우리는 재단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체적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기도를 드리게 된다. 보편적인 기도를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는 우리에게 베르토매오가 그 길을 알려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루카19,40)
바르토매오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이 청원과 사람들은 잠자고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의 상황에서 그는 더욱 외친다. 그는 자신의 심장 속에서 단발마처럼 솟구친 언어로 기도를 한다. 꾸짖는 사람들과 더 크게 외치는 그는 세상 속의 두 소리에 해당하기도 하지만, 실은 우리 안의 두 목소리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갈망 옆에는 언제나 세상의 꾸짖음- 단죄가 있다. 집단무의식이 우리의 갈망자저도 검열하는 것이다. 내 기도를 과연 들어줄까? 하면서.
(5)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단죄받지 않은, 자신에게 마저 재단되지 않은 투명한 갈망은 언제나 예수께 전달된다. 그 어떤 분심도 끼어들지 않은 집중된, 순수한 갈망이 기도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그분께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내 갈망의 심연을 넘어 나에게 도달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내 기도가 나에게 전달되었을 때, 그 기도는 이루어진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는 것이 기도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갈망을 내가 품고 내가 갈망을 낳은 과정을 예수님과 바르토메오의 만남에서 만날 수 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것은 그를 불러오너라, 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계속 외치자 그의 소리는 예수의 가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를 불러 오너라(49)” 우리의 기도가 그분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예에 해당한다. 예수의 말에 사람들의 태도가 바뀐다. 그를 꾸짖던 목소리들은 이제 그에게 용기를 내라고 격려한다.
예수께 간다는 것은 우리의 현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다. 상식을 뒤집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그분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6, 50절)라고 격려하듯이, 그를 꾸짖던 사람들이 그를 격려한다. 그에게 격려를 보내는 이들은 보편적인 기도에서 구체적인 기도를 발견한 사람들이다.
(6)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걸인에게 겉옷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금품을 받고 담는 도구다. 그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갔다는 것은 과거의 자기 모습을 청산한 것과 같다. 마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 일행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 나섰던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재베데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 나섰다”(1,16-20)
나는 어떻게 너인 예수을 만나는가?
(7)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마르코 10,46ㄴ-52에서 치유기적사화의 핵심 포인트는 바로 48절과 51절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일 것이다. 우리는 많은 순간 우리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분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그분의 뜻, 따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기도와 행위에 추상과 희생이 끼어든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며, 그분과 우리의 관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단적인 예에 해당할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녀에게 뱀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의 깊은 갈망이 무엇인지를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은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은총의 물음이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너에게 말한다. 네가 나에게 외치다, 이 두 문장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길 위의 사람에게 보편적인 기도에서 구체적인 기도의 체험이 일어난 것이다.
(8)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복음사가는 바르토매오를 그 눈먼 이라고 삼인칭으로 표현한다. 개별적인 사건이 어떻게 보편적인 사건인지를 보여줌으로써 보편과 구체적인 사건이 하나임을 보여준다. 바르티매오는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서슴없이 자신의 갈망을 말한다. 인류에게 평화를 주십시오라는 추상적인 기도가 아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그분의 현존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복음사가는 전한다.
51절에서 바르트매오가 예수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진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시여!라는 보편적 메시야의 호칭에서 라뿌니(스승님)라고 예수를 부른 것이다. 이미 그는 그분의 제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소경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순수하게 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에게 육체적인 시력을 치유하기 전에 영적인 시력을 먼저 회복시켜 주신다. 이미 그가 청하기도 전에 (그의 호칭에서) 그것을 들어 주셨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성령은 (로마서8장) 우리가 청하는 그 이상을 그분께 청한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동시에 우리 안에서 살아계신다는 징표다.
(9)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52절의 극적인 장면은 눈이 멀었다는 상황인식-간청- 치유-따름이라는 이 구조를 통해 치유기적사화이기도 하지만 한 개인의 소명사화이기도 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어떤 소명이든 치유받았음을 아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모든 소명사화는 치유가 선행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치유의 기적이 가능한 것이 바로 나라는 길위의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믿음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매오의 치유는 8,22-26에서 맹인치유이적사화와 비슷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따름이라는 소명사화로부터 제자들과의 차이, 그리고 부자청년과의 차이를 다시금 바라볼 수 있다. 제자들은 버리기는 버렸지만 그들은 아직 영적인 시력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면, 부자청년은 버림이 결여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제자들과 부자청년의 예가 아니라 보편적인 사랑과 구체적인 사랑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진정한 갈망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연중30주일,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전하는 마르코 10,46ㄴ-52은 길위의 사람, 바르토매오를 통해, <보편과 구체의 여정,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Alexander G. Bell)>는 것을 보여준 은총과 자비에 그 초점이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는 내 아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시편시편2,7/2사무7,14)에서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는 것은 오늘 내가 나를 낳았다는 말이기도 하다.(히브리서1,5/5,5)이는 예수가 나를 낳았고 나는 에수를 낳았다는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개별자의 체험이 보편자의 전교로 넘어간다.
우리 각자의 처해진 상황, 상황 들 속에서(문이 닫힌 상황) 우리가 목마르고 배고프다면 우리는 아직도 외치고 있는 상황, 예수를 낳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외침은 집단무의식처럼 사회적으로 형성된 인격이라는 심연을 넘어(난산의 고통) 우리 영혼에 도달하는 여정(또 다른 문을 연)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을 넘어 구체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길 위의 사람인 모든 이의 신앙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토매오라는 한 개별자의 체험은 그래서 보편적인 체험이 되고 그분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표징이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이들이 고독의 심연을 넘어 신의 견고한 고독을 만나고, 절망의 끝을 넘어 절망의 문을 열고 절망을 모르는 신을 만나라고 권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전례 가운데 미사참례가 가장 어렵다는 고백은 개별자의 체험과 보편자가 만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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