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9월은 순교자 성월] ‘희망을 향한 순례의 여정, 9월愛 동행’

나뭇잎숨결 2023. 8. 26. 09:32

 


[1] 순교자성월 기획전 ‘길-순교자 믿음 본받아’
                                                  - 서울대교구 개포동성당 이냐시오홀

[2] 이름조차 모르지만… 결연했던 순교 의지 반드시 기억해야

[3]
‘희망을 향한 순례의 여정, 9월愛 동행’ 

[4]신유박해와 순교자 신심 -이 석 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5] 103위 순교성인 낳게한 박해시대 상황 - 신유,기해,병오, 병인

 

 

[1] 서울대교구 개포동성당 이냐시오홀에서 기획전 ‘길-순교자 믿음 본받아’

9월 3일~10월31일

 

서울 개포동본당에서 9월 3일부터 열리는 기획전에 전시될 예정인 「기해ㆍ병오 치명 증언록」.
 
 
 

서울대교구 개포동본당(주임 이경상 신부)은 9월 3일부터 성당 이냐시오홀에서 기획전 ‘길-순교자 믿음 본받아’를 시작한다. 기획전은 본당 수호성인 성 김제준(이냐시오, 1814~1839)을 비롯한 초기 한국 교회 신자들의 삶과 신앙을 살펴보도록 꾸며졌다.

이번 기획전에는 아버지 김제준의 신앙과 삶을 풀어낸 아들 김난식(프란치스코, 1827~1873)의 증언이 담긴 길이 5m 41㎝의 「기해ㆍ병오 치명 증언록」(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전체가 처음 공개된다. 증언자 김난식은 아버지 김제준과 형 김대건 신부를 포함해 13명의 순교자에 관해 증언했다.

또 고 김영걸(안드레아, 1938~2013) 감독이 1970년에 촬영한 ‘순교자 유해와 지석 발굴 영상’도 상영, 김수환 추기경과 노기남 대주교가 그해 이 에메렌시아(1801~1839)와 무명 순교자의 묘를 발굴해 주교좌 명동대성당 지하 묘역에 안치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전시는 10월 31일까지.



 

[2] 이름조차 모르지만… 결연했던 순교 의지 반드시 기억해야

 

 

행적 기록 남지 않은 순교자들 낮은 신분이 대부분으로 추정 글 몰라도 교리·기도문 외우고
어린아이도 두려움없이 순교

 

 

사진: 평화와 착함 - ‘진둠벙’. 많은 순교자가 수장됐다고 알려진 곳

 

 

                   대전교구 해미성지 ‘진둠벙’. 많은 순교자가 수장됐다고 알려진 곳이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시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됐다.

이렇게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132명의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이들이 숨져 간 유적지는 현재 깨끗하게 단장돼 있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라 알아듣던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지명으로 전해오고 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 읍성에는 교우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가 있고 그 옆에는 고문대로 쓰던 호야나무가 남아 있다. 이 나무 위에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서문 밖 순교지에는 1956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보존되었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에 원위치를 찾아 보존되다가 2009년 1월에 여숫골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1935년에는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돼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돼 있었는데 최근 1995년 순교자대축일에 원래의 순교 터인 생매장 순교지 순교탑 앞으로 이장됐다.

해미 성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성지는 한티 고개이다. 이 고개는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로 달레의"한국 천주교회사"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외길이지만 압송로 표지 리본이 눈에 잘 띄게 달려 있어 별어려움 없이 순례할 수 있다.
해미 성지는 교통이 사통팔달(四通八達)로 시원스레 뚫려 있어 다소 거리는 멀지만 당일이나 1박 2일로 순례하기는 안성맞춤이다. 인근에는 수덕사로 유명한 덕산 도립 공원과 가야산, 덕산 온천, 태안 해안 국립 공원 그리고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볼 수 있는 안면도 등이 자리하고 있어 주말 가족 순례 코스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인천교구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 ‘무명순교자상’. 순교자가 단두대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죽음의 칼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자신도 모르게 던져버릴 것을 걱정이라도 한듯 등과 가슴을 관통하도록 꽂아둔 익명의 작가 작품이다.사진 염지유 기자


목숨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는 순교자 성월이다.

한국교회의 순교자 수는 1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중 신원이 밝혀진 순교자는 2000명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이름도 행적도 알 수 없는 무명순교자다.

하느님의 구원을 믿고 기쁘게 죽음을 택한 순교자들은 그 이름을 알 수 없을지라도 우리 신앙의 뿌리로서 마땅히 기억돼야 한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이들의 삶을 기억하고 묵상하기 위해 박해 시대 무명순교자들의 흔적을 찾아본다.


 

                                수원교구 손골성지에 있는 무명순교자 묘.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이름 모를 민초들의 신앙생활

무명순교자는 행적이 기록으로 남지 않았기 때문에 사료(史料)에 등장하는 평범한 신앙인들의 모습을 토대로 이들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초기교회 양반 지도층의 전교 활동으로 천주교는 평범한 민중 사이에 점차 뿌리를 내렸다.

특히 하층민과 부녀자들이 ‘만인 평등’을 외치고, ‘내세의 복락’을 약속하는 천주 신앙에 이끌리며 큰 무리를 이뤘다. 교회 안에 여러 신분이 공존했지만, 평민 이하가 대다수였다는 여러 사료를 토대로 무명순교자 중에 신분이 낮은 이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박해자들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내포 홍주에서 천주교인을 색출하던 무관 노상추가 쓴 「노상추 일기」 1801년 2월 13일자에는 “사학에 빠진 이들은 남녀에 차이가 없으며 상놈이 대부분”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노상추는 글을 모르는 수많은 이들이 입으로 교리를 외워 학습하고, 구슬 고리를 지니고 자주 외운다고 밝혔다.

 

문맹 신자들이 교리를 입으로 외우면서 익히고,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쳤다는 증언이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조선왕조실록에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어리석고 우둔한 무리들이 성사나 영세와 여러 가지 의식을 달게 여기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고종실록, 고종 3년 8월 3일)

 

사제를 쉽게 못 만나고, 언제 붙잡혀갈지 모르던 신자들에게 성사와 미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푸르티에 신부는 “신자들은 매우 초라한 오두막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살아있는 신앙과 순박한 마음으로 예배하며 경멸과 모욕과 괴롭힘을 견뎠다”고 전한다.(1865년 11월 20일,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 순교자들이 천주의 가르침을 몸소 살아내려 노력한 모습도 사료 곳곳에 나온다.

 

박해를 피해 깊은 산 속에 숨어 살던 교우촌 신자들은 신분 구분 없이 서로를 섬겼다.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팔며 곤궁히 살면서도 콩 한쪽도 서로 나누고, 과부와 고아까지 거두며 사랑을 실천했다.

 

                        대전교구 신리성지의 무명순교자 묘. 1972년 32기의 유해가 발견됐다.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죽음을 고향 돌아가듯 여기는 마음

“듣건대, 야소(耶蘇·예수)는 가장 참혹하게 죽은 자라고 하는데 이를 보고 징계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는 것을 즐거운 장소로 여기며 칼과 톱을 견디고 혼몽하게 두려움조차 알지 못한 채 취한 듯이 하여 꺼내어 깨우칠 수가 없으니….”(헌종실록, 헌종 5년 10월 18일)

순교자들은 박해로 온갖 잔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죽음 앞에서 결연했다.

 

오히려 죽음을 아버지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처럼 즐겁게 여겼다.

 

노상추는 1801년 4월 7일 일기에서 “사학에 미혹된 이 무리들은 형벌도 겁내지 않고 죽임을 당해도 후회하지 않는다”며 “이 무리들이 장(杖)을 참아내는 것이 지극히 통탄스럽다”고 분개했다.

이런 믿음은 성인 신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무명순교자 중에 어린이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리델 신부는 병인박해 때 안드레아라는 신자의 집에 잠시 은신하던 중 그의 12살짜리 딸 안나와 어린 두 아들이 “천주를 배반하지 말고, 죽어서 천당에 가자”고 약속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가 천당에 가려면 천주께 기도해야 된다. 우리 머리칼과 이와 손을 뽑고 굵은 몽둥이로 때릴 거야. 기도를 잘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남매는 어린 나이에도 어른 못지않은 굳은 신앙심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1866년 12월 23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

「근세조선정감」에도 “천주교인들은 장을 맞고 피부가 낭자하게 터지는데도 ‘내 몸에서 혈화(血花)가 나니 장차 천당에 오르겠다’고 환호하고, 어린아이들도 부모를 따라 천당에 오르기를 원했다”고 기록돼 있다.


 

                                    인천교구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 ‘무명순교자의 길’ 입구.사진 염지유 기자
 
 
■ 기록 없어도 잊힐 수 없는 이들

단편적인 문자 기록과 달리 땅에는 무명순교자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대전교구 해미국제성지는 병인박해 당시 1000명이 넘는 신자가 희생된 순교터다.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는 132명뿐이다.
 
 
군졸들은 충청도 각지에서 끌려온 신자들을 빠르게 처형하기 위해 깊은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생매장했다.
 
 
팔을 묶어 진둠벙이라는 웅덩이에 수장하고, 자리개질로도 죽였다. 이 처형의 흔적들이 현재 성지에 보존돼 있다.

무명순교자는 보통 머리 없는 유해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고, 썩어 부서진 묵주와 십자가도 함께 출토돼 이들의 존재를 알렸다.
 
대전교구 신리성지에는 1972년 머리 없는 시신으로 발견된 32기 무명순교자의 묘가 있다.
 
목격자들은 “발굴 당시 유골과 함께 나온 묵주의 양이 시골 바가지로 한 바가지였다”고 증언했다.

수원교구 죽산성지도 병인박해로 많은 이가 피 흘린 곳이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25명에 불과하다.
 
이곳은 박해 때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하여 ‘잊은 터’로 불렸다. 지명에 깃든 사연이 순교자의 발자취를 알리기도 한다.

청주교구 배티성지 무명순교자 6인 묘는 살아남은 교우촌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직접 수습해서 만든 묘다.
 
이 밖에도 대전교구 다락골성지와 성거산성지, 원주교구 배론성지, 수원교구 손골성지와 미리내성지, 제주교구 황사평성지 등 많은 성지에서 무명순교자 유해를 모시고 있다.

무명순교자를 포함해 1만 명 순교자의 넋을 기리는 순례지로 인천교구 일만위순교자현양동산이 있다.
 
이곳에 있는 무명순교자 길에는 이들의 삶을 묵상하게 하는 여러 상징이 설치돼 있다.
 
순교자 현양은 이름 모를 무명순교자까지 기억할 때 완성된다는 뜻에서 조성한 길이다.

내포교회사연구소 방상근(석문가롤로) 연구위원은 “무명순교자는 기록이 없다 해도 잊힐 수 없는 존재”라며
 
“유해가 발견된 분뿐만 아니라 어디에 묻혀 계신지 조차 알 수 없는 모든 무명순교자를 우리의 신앙선조로서 기억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라고 강조했다.

                                          수원교구 죽산성지 무명순교자 묘.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염지유 기자(가톨릭신문)

 

 

 

[3] ‘희망을 향한 순례의 여정, 9월愛 동행’ 

 

걷고 기도하고 신앙선조 기리며 순교 영성에 빠지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손희송 주교)는 ‘희망을 향한 순례의 여정, 9월愛 동행’ 행사를 연다. 2019년 시작해 올해 5회째를 맞은 이번 행사는 함께 걷는 여정 안에서 순교자들의 참다운 신앙을 본받고, 순교 영성과 이웃 사랑을 더욱 실천하자는 취지로 기획됐으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순교자 성월을 여는 미사’는 9월 1일 오전 10시 서울 순례길 3개 코스 시작 지점에서 동시에 봉헌된다. 주교좌 명동대성당(1코스-말씀의 길)에서는 교구 총대리 겸 순교자현양위원장 손희송 주교가 미사를 집전한다. 가회동성당(2코스-생명의 길)과 중림동약현성당(3코스-일치의 길)에서는 유경촌ㆍ구요비 주교가 미사를 주례한다.
 
 

 

 
‘순례길 걷고, 기부하기’는 순례자 여권을 들고 서울 순례길 24개 성지ㆍ순례지를 완주하며 스탬프를 찍으면 된다. 여권 세트는 8월 15일부터 지정된 성지ㆍ순례지에서 8000원 이상을 기부하면 받을 수 있다. 이는 전액 이웃사랑 실천기금으로 사용된다. 청소년과 청년은 ‘청소년, 청년 순례길로!’에도 참여할 수 있다. ‘순교자 성월을 닫는 미사’는 9월 24일 오후 3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순교자현양위원장 손희송 주교와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봉헌된다.


서울대교구 새남터성지는 16일 성 김대건 신부 순교일을 맞아 관련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먼저 성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슬라의 생애를 주제로 한 성극을 열고, 이어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장 손희송 주교 주례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 후에는 순교자 현양 칸타타 음악회도 열린다. 이에 앞서 14일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다룬 영화 「탄생」 상영회를 열고, 영화를 연출한 박흥식 감독과의 토크쇼를 진행한다.

 
서울 개포동본당에서 9월 3일부터 열리는 기획전에 전시될 예정인 「기해ㆍ병오 치명 증언록」.

 
서울대교구 개포동본당(주임 이경상 신부)은 9월 3일부터 성당 이냐시오홀에서 기획전 ‘길-순교자 믿음 본받아’를 시작한다. 기획전은 본당 수호성인 성 김제준(이냐시오, 1814~1839)을 비롯한 초기 한국 교회 신자들의 삶과 신앙을 살펴보도록 꾸며졌다.

이번 기획전에는 아버지 김제준의 신앙과 삶을 풀어낸 아들 김난식(프란치스코, 1827~1873)의 증언이 담긴 길이 5m 41㎝의 「기해ㆍ병오 치명 증언록」(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전체가 처음 공개된다. 증언자 김난식은 아버지 김제준과 형 김대건 신부를 포함해 13명의 순교자에 관해 증언했다. 또 고 김영걸(안드레아, 1938~2013) 감독이 1970년에 촬영한 ‘순교자 유해와 지석 발굴 영상’도 상영, 김수환 추기경과 노기남 대주교가 그해 이 에메렌시아(1801~1839)와 무명 순교자의 묘를 발굴해 주교좌 명동대성당 지하 묘역에 안치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전시는 10월 31일까지.

대구대교구는 순교자 성월을 맞아 9월 23일 오전 9시 칠곡군 사기점공소에서 출발해 신나무골 성지까지 걷는 교구 도보 성지 순례를 개최한다.

대구대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와 사단법인 한티가 주관하는 이번 교구 도보 순례는 사기점공소에서 신나무골 성지까지 9.5㎞를 걷는 ‘전체 구간’과 징검다리에서 신나무골 성지까지 5.1㎞를 걷는 ‘중간 구간’, 신나무골 성지-전망 쉼터-신나무골 성지 7㎞를 걷는 ‘쉬운 구간’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신청 마감은 8월 31일 오후 5시까지다. 문의 및 접수 : 053-250-3057, 대구대교구 사목국 평신도 담당.

수원교구는 9월 16일 오전 10시 30분 남한산성성지에서 교구 총대리 이성효 주교 주례로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한다. 9월 23일 오전 11시에는 수리산성지에서 교구장 대리 문희종 주교 주례로 순교자 현양대회를 마련한다.

전주교구는 9월 1일~24일까지 치명자산성지 평화의 전당에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한국 순교복자 초상화 전’을 개최한다.

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를 주제로 마련한 이번 전시는 한국 124위 순교 복자 시성을 기원하며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전시다. 1일 교구장 김선태 주교 주례 개막 미사로 시작하며, 2일에는 가톨릭 사생대회가, 3일과 10일 주일에는 ‘님이시여 사랑이시여’ 문화 공연이 열린다. 15일에는 성음악제가, 16일에는 행복한 동행 도보순례도 예정돼 있다.

원주교구는 교구 복음화사목국과 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공동 주관으로 ‘2023 순교자 성월 순례대회’를 개최한다.

교구는 먼저 9월 한 달 동안 ‘최해성 요한의 삶을 따라 걷는 스탬프 순례’를 진행한다. 교구 내 순례길 가운데 복자 최해성 요한과 관계된 △최해성 요한 순교길 △최비르짓타 순교길 △서지고개길 △꽃댕이길 등 총 74.1㎞의 여정으로 구성됐다.

9월 23일에는 ‘최해성 요한 길’ 순례대회가 열린다. 최해성 요한이 잡혀갔던 길인 강원감영부터 서지마을까지 총 26㎞를 하루 동안 순례한다. 아울러 이날 오후 3시 30분부터는 서지마을에서 순교자들을 기리는 문화 행사가 열리고, 이어 오후 5시에는 서지마을에서 교구장 조규만 주교 주례 순교자 현양 미사가 봉헌된다.


이상도·리길재·도재진·장현민·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4] 신유박해와 순교자 신심

 

이 석 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Ⅰ. 여는 말

 

신유박해는 1801년(순조 1년, 辛酉年)에 일어난 조선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로서, 1월 10일(음)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순조의 계증조모) 김씨의 금교령(禁敎令)으로 시작되어, 12월22일(음)에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으로 일단락 되었다.

이 박해의 저변에는 영․정조 시대의 당쟁과 탕평책으로 인한 정치적 희생자들간의 암투와 음모가 서려 있었고, 18세기 후반 사회변동을 촉진시킨 천주교 신앙의 유포와 신학문의 파급으로 인한 종교적․사상적 마찰과 투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후기조선왕조의 전근대적 통치체제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상(서학, 실학 등)의 유입, 전통적인 신분체제의 문란, 상업 자본주의의 대두, 농업생산력의 향상, 민중의 의식 변화 등은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시기의 “천주교의 유포(流布)는 조선후기 사회의 내재적 요청이며, 이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당시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고수하려던 이들에게, 천주교 신자들의 봉제사 포기의 태도나 외국 세력 유입 시도, 신분 질서를 초월하는 공동체 형성이나 여성(교우)들의 활약 등은 박해의 좋은 빌미를 제공하였고, 정적(政敵) 제거의 호기회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힘으로 신앙인들을 제거할 수는 있었으나 한 번 전래된 천주교 신앙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Ⅱ. 몸말

 

1. 신유박해의 주요 사건과 과정들

 

박해의 암운은 1800년(정조 24년, 당시 49세) 6월 28일(음)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정책을 펴 왔던 정조 임금이 승하하고, 11세의 어린 임금 순조가 즉위하게 되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면서부터 일기 시작하였다. 노론 벽파에 속했던 그녀는 11월 하순 국상(國喪)이 끝나자마자 천주교 신자들과 남인 시파들을 모조리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 첫 단계로 신유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1월 15일(음)에 금교령을 반포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역률(逆律)로 다스리라 하였고, 아울러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엄히 시행하여 신자들을 철저하게 색출하여 처벌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월 19일(음), 박해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려던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책롱」(冊籠)이 기찰 포교에 의해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박해의 도화선이 되었고, 몇몇 사람들의 상소의 빌미가 되어 서울(漢城)과 기호(畿湖) 지방 외 여러 곳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3월 12일(음) 포도청 자현(自現)으로 인해 더욱 가열되게 되었다. 주 신부의 의도는 박해의 불길을 끄려 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그와 연관된 많은 이들이 순교의 영관(榮冠)을 쓰게 되었다.

박해는 9월 15일(음) 황사영(알렉시오)이 배론(舟論)에서 체포되고 그가 작성한 「백서」(帛書)가 발각됨으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백서」와 연루되었거나 혐의를 받은 이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정부측에서는 청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에 대한 외교문제 해결을 위해 진주사(陳奏使)를 청나라에 파견하여, 토사주문(討邪奏文)을 상주(上奏)하였고, 그 증거물로 ‘가(假)백서’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황사영 백서」 사건 정리 이후 대왕대비 김씨는 미결된 신자들에 대한 신문(訊問)을 연말까지 마치도록 분부하였고, 백성들에게는 박해의 전말과 그 당위성을 알리는 반교문(頒敎文)인 「척사윤음」을 어린 순조의 이름으로 12월 22일(음)에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신유년 세밑에 각 지역에서는 또 다시 많은 신자들이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고, 이 같이 철저한 한 해의 박해로 인해 교회는 대부분의 주요 활동가들을 잃고 말았다.

 

2. 신유박해의 주역 정순왕후와 척사윤음(斥邪綸音)

 

1) 정순왕후 김씨(1745~1805)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인 그녀는 영조의 정비(正妃) 정성왕후가 죽자 1759년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그녀는 소생은 없었고, 영빈 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세자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고 굶어죽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조정이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치죄(治罪)를 당연시했던 벽파로 나누어지자 시파를 미워하고 벽파를 옹호하였다. 이러한 당쟁의 과정 속에 그녀는 오빠 김구주와 일가친척을 잃어 한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으며, 이 때에 벽파인 공서파(攻西派)와 결탁하여 시파의 신서파(信西派) 대신들을 모함하였고, 또한 시파 인사들이 많이 관여했던 천주교에 일대 금압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이가환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약용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과 그의 부인(송 마리아)과 며느리(신 마리아)를 같은 이유로 사사(賜死)시켰다. 그녀는 1805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1801년 1월 10일(음)에 반포된 「금교령」(禁敎令)

“先王(정조)은 바른 도리를 빛나도록 힘쓰면 사악한 도리는 저절로 소멸되리라고 자주 말하였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말에는 상궤(常軌)를 벗어난 도리가 아직도 존재하며 서울에서 시골구석에 이르기까지, 특히 湖中에 날로 더 퍼진다 하니 어찌 떨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은 人倫을 지킬 때에 비로소 참 사람이 되며, 한 나라는 지식과 참 도리에서 비로소 그 생명을 찾아낸다. 그런데 문제의 邪學은 부모도 국왕도 몰라보고 일체의 근본을 배척하여 사람을 오랑캐와 짐승의 지위로 떨어뜨린다. 무식한 백성은 점점 더 그것을 받아들여 그릇된 길을 방황하고 있으니, 강으로 달려가 빠져 죽는 어린아이와 같다. 어찌 마음의 충격을 받지 않겠으며, 어찌 저 가련하고 불행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각 고을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은 저 무식한 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이 새 敎를 믿는 자들은 진심으로 행실을 고치고, 그 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단단히 가르치고 경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선왕이 그렇게도 너그럽게 주려고 힘쓰신 가르침과 빛나게 한 광명을 짓밟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엄한 금령이 내린 뒤에도 아직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으면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 따라서 각 고을 수령들은 각기 자기 관할 지역 전역에 서로 연대 책임을 지는 五家作統을 만들어, 만일 그 다섯 집중에 사학을 따르는 자가 있으면 그 감시를 맡은 통수(統首)는 수령에게 보고하여 改心케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국법이 있으니 그들을 싹도 다시 나지 않도록 뿌리뽑아 버리라. 나의 뜻이 이러하니 서울에서나 지방에서나 그것을 알아 시행하라.”

이 반교문의 반포로 인하여 이후 천주교를 언제라도 박해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따라서 박해 후 교회 재건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3) 1801년 12월 22일(음)에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

역설적이게도 이 윤음에서 표현되고 있는 교우들에 대한 폄하(貶下)된 죄목들은 해당되는 순교자들에 대한 가장 간략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여겨져 요약해 옮겨본다.

“…승훈은 북경 사신 일행을 따라가서 타락된 책들을 사가지고 왔고, 서양인들의 교당에 가서 그 외국 민족의 제자가 되었으며, 약종은 온 집안과 형과 아우와 함께 이 敎에 물들었으며, 철신의 1향(鄕)과 역적 희(禧)의 사생아 창현은 거기에서 학식과 박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하던 낙민(홍 루가)은 그 무리들의 대장이 되어 국왕의 은혜를 배반하고 끝까지 자기의 사악한 사상을 바꾸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창현과 필공보다도 한층 더 부패하여 조상들의 사당을 헐고 인륜을 파괴하여 지충과 상연의 고질이 된 악의를 능가하였다.”

“…사악한 책을 연구하여 이마를 문지르게 한(세례 때) 건순(健淳), …부끄럽고 점잖지 못한 소책자를 내놓은 말벌눈과 늑대 목소리를 지닌 가환(家煥) … 진짜 두목은 그의 생질인 역적 李承薰이니, 그는 그 악을 전하고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그 친구 檗과 힘을 합하였다. … 가환의 무서운 계획을 비밀히 두둔한 李存昌, … 바로 그 때 주문모가 나타나 서양인들의 교리를 뒷받침하게 되었다.…그것은 소매 속에 독을 품은 말벌 한 마리가 들어온 것과 같았다. 璜(池사바)과 一(윤유일) 같은 인물들이 앞에서 그를 도와 주고, 뒤에서는 沁(황 토마스)과 禧(옥천희)가 심부름꾼이었으며, 천성이 교활하고 문란한 여자인 완숙(강 골롬바)은 그가 머물러 있는 집의 주인이 되었으며, 그들은 仁吉(최 마티아)을 매수하여 邪敎의 두목 대신에 죽음을 당하였다. …마음이 호랑이 같고 얼굴과 눈이 산개와 담비 같은 사영(황 알렉시오)은 마술과 요술에 이름이 알려져 있음을 기화로 감히 도망을 하였고, …감히 비단 조각에 세 가지 무서운 계략을 상세히 기록할 생각을 먹었다. …어떻게 8만리나 떨어진 곳에서 서양 배를 불러다가 … 외국과의 관계는 황심과 합의하여 이루어졌으며, 현계흠은 전라도에서 소란을 일으켰고, 항검은 준비를 하여 수천냥의 돈을 뿌렸으며, … 역적 裀 왕자의 妃와 며느리가 賜藥으로 죽었으며, 가환과 철신은 매를 맞아 죽고, 주문모는 군문효수를 하여 뭇사람을 경계하였으며, 승훈, 약종 등등, 어리석은 두목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되었다. 8월에는 사영이 잡혀 항검, 지헌, 황심, 천희 및 그 공버자들과 함께 법에 의하여 처단되었다. 백성을 미혹케 한 자들은 각기 출신 도로 압송되어 거기서 처형되었다. …이 악을 없애려면 그 밑둥과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거듭 주장… 蔡 大臣을 추탈관직(追奪官職)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 오늘 12월 22일부터 우레와 비가 백성 위에 그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큰 평화가 하늘과 땅에 돌아오니, 이는 옛날부터 일찍이 보지 못한 다행한 일이다. 가장 위대한 속성은 생명을 주고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용서하였어야 할 것이나, 사실에 있어서 이 사교는 그 추종자들의 마음을 변하게 할 아무런 방법도 발견할 수 없으니, 그 狂信의 싹을 잘라 버리기 위하여는 그들을 사형으로 벌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 내가 내리는 지시의 목적이 이러하니, 각 사람이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3. 신유박해의 순교자들

 

1) 신유년에 순교한 이들의 일자(日字)별 목록

신유년에 순교한 이들을 달레의 자료와 김옥희 수녀의 자료 및 기타 자료들(글 말미의 참고자료 참조)을 참조하여 일자별로 정리해 보았다. 표로 만들다보니 한 면 전체를 차지하기에 면 조절상 뒷부분으로 배치하게 되었다. ☞ [표] 참조

 

2) 순교자들의 지역별․사건별 목록

① 서울에서 순교한 이들

1800년(경신년) 12월 17일(음) 中人 최필공(崔必恭, 토마스)이 체포되었고, 12월 19일(음) 새벽에는 그의 사촌 동생인 최필제(崔必悌, 베드로)가 몇몇 신자들과 함께 서울의 큰길 옆에 있는 약국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오현달(吳玄達, 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이 무렵 두 양반 신자들이 양근(陽根)과 충주 읍내에서 잡혔는데, 한 사람은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이기연(李箕延)이었다. 1801년(신유년) 1월 9일(음)에는 배교자 김여삼(金汝三)의 밀고로 서울의 회장 최창현(崔昌顯, 요한)이 체포되었다.

대왕대비의 금교령이 내려진 이후 체포된 이는 주인의 책롱을 옮기다 적발된 임대인(任大仁, 토마스)이 있다(음력 1월 19일). 이 책 궤짝 사건이 있었으나, 채제공의 외조카인 포도 대장 이유경(李儒慶)의 무보고로 10여일 간은 별다른 일이 없었고, 2월 2일(음) 새로 부임한 포도대장 신대현(申大顯)은 오히려 옥에 가득 차 있는 배교자들을 모두 석방하고, 최필공․최필제․최창현․임대인 등 주역 신자 4명만 남겨 놓았다. 그러나 벽파들의 잇단 상소로 인하여 신자들을 가볍게 처리한 신대현이 잡혀 들어갔고, 포도청에 갇혀 있던 네 사람도 의금부(義禁府)로 옮겨져 반역죄로 처리되었다. 아울러 2월 9일(음)에는 이가환․정약용․이승훈․홍낙민(洪樂敏, 루가) 등을 잡아다가 국문(鞠問)하기 시작하였고, 11일(음)에는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정약종을, 14일(음)에는 정약전(丁若銓)을, 16일(음)에는 이기양(李基讓)을 잡아다가 의금부에 가두었다. 남인의 중요한 지도자들과 천주교 지도급 인물들인 이들의 국문은 2월 10일(음)에 시작하여 26일(음)까지 계속되었다. 이들 가운데 정약종․홍낙민․최창현․최필공․이승훈 등 5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하였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정약용과 정약전은 장기현(長鬐縣)과 신지도(薪智島)로 각각 유배되었다.

 

② 경기․충청 지역에서 순교한 이들

박해는 지방에서도 일어나 지도층 신자들이 대거 순교하였다. 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 지방의 사도(使徒)’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이 2월 5일(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2월 26일(음)에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다시 공주(公州)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다. 또 이 무렵 청주(淸州)에서 체포된 이종국도 공주에서 처형되었다.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아들 홍인(洪鏔, 레오)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그도 2월 26일(음)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여주와 양근에서는 1800년에 이미 잡혀 온 신자들이 서울로 압송되어 결안(結案)이 확정된 뒤 각기 고향으로 이송되어 참수되었는데, 신유(1801)년 3월 13일(음) 여주 성문 밖에서 원경도(元景道, 요한)․임희영(任喜永)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정종호(鄭宗浩) 등 5명이 처형되었고, 이 때 같이 체포된 조용삼(베드로)은 옥사하였다. 또한 양근에서 같은 무렵 유한숙(兪汗淑)과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尹有一의 동생) 등 13명이 처형되었고, 4월 2일(음)에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丁哲祥, 가롤로)과 최필공의 사촌인 최필제, 中人 정인혁(鄭仁赫), 정광수(鄭光受)의 처 윤운혜(尹雲惠), 정복혜(鄭福惠, 칸디다), 이합규(李鴿逵) 등 6명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③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자수와 박해의 확산

1794년말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이래 주로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에 거처하면서 활동하였는데, 포졸들이 그의 거처를 탐지하고 덮쳤으나 이를 미리 알아차리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서도 주 신부는 북경에 오래 전부터 세워져 있는 모임의 본을 떠 ‘명도회’ 즉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회’를 세웠다. 명도회 설립 목적은 우선 회원들이 천주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그 다음 그것을 교우와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와줌에 있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이 회의 초대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 다음 주 신부는 시내에서 회합을 가져야 하는 장소를 정하고 집회를 주관하여야 할 지도자들을 임명하였다. 주 신부의 열성에 감화되어, 모든 회원은 지도자들이 매달 각 회원에게 나누어주는 표지를 받으러 서둘러 모여들었다. 그 표지에는 교회에서 공경하는 성인들 중의 하나를 주보(主保)로 지정하였는데, 그것이 주보의 표지라는 것이었다. 이런 실천은 차차 전국에 퍼져서 신기한 결과를 냈다.

주 신부는 많은 신자들이 자기로 인하여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현실의 상황을 타개해보기 위하여 많은 고뇌 끝에 포도청에 자수하게 된다. 주 신부의 초사(招辭)에 따르면 2월 20일(음) 폐궁(廢宮 = 良娣宮)으로 피신했다가 2일 후 황해도 황주(黃州)로 북행, 거기서 서울로 되돌아와 自現하였다고 했다. 주 신부는 4월 19일(음)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하였다. 주 신부의 유해가 땅에 묻혔을 때 신자들은 그 유해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자리를 보아 두었으나 파수꾼들이 몰래 유해를 다른 곳으로 이장했기 때문에 그의 유해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박해는 주 신부와 관계했던 인물들로 확대되었다. 우선 주 신부를 한 때 궁 안으로 피신시킨 사실과 세례 받은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의 처 송 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申) 마리아가 3월 17일(음) 사사(賜死)되었고, 그 여파로 강화(江華)에 유배 갔던 은언군도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또 주 신부의 진술로 입교 사실이 밝혀진 노론인 양반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종형 김백순(金伯淳)과 많은 종교화를 그린 이희영(李喜英, 루가)이 3월 29일(음)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김건순도 4월 20일(음) 같은 장소에서 참수되었다. 5월 22일(음)에는 주문모 신부를 6년 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여성 회장 강완숙과 궁녀 강경복(姜景福, 수산나), 前 궁녀 문영인(文榮仁, 비비안나),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동생 최인철(崔仁喆, 마티아), 김범우(金範禹)의 일곱째 동생 김현우(金顯禹, 마태오), 이희영의 조카 이현(李鉉), 홍필주(洪弼周, 필립보)와 가까운 친척인 홍정호(洪正浩), 김연이(金連伊, 율리안나), 한신애(韓新愛, 아가다) 등 9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으며, 김범우의 셋째 동생 김이우(金履禹, 바르나바)도 이때 포청에서 고문을 받다 죽었다. 또 이날 정광수의 누이 정순매(鄭順每), 윤유일의 사촌누이 윤점혜(尹占惠, 아가다), 평산(平山) 출신의 고광성(高光晟), 음성(陰城) 출신의 이국승(李國昇), 봉산(鳳山) 출신의 황(黃) 포수 등도 사형 언도를 받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여주․양근․평산․봉산․공주로 각각 이송되어 처형되었다. 이들 외에도 이 시기에 공주에서 문윤진이라는 여종이, 양근에서는 배석골 전주 이씨 양반 집 이재몽과 이괘몽, 그리고 이들 중 한 사람의 두 딸, 지여울 사는 양반 집안 출신 김원성,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의 먼 친척이자 이동지(李同知)의 딸인 이 아가다 등 많은 사람이 참수를 당하였다. 양근에서 순교자가 특별히 많았던 것은 군수 정주성(鄭周誠)이 잔인하게 신자들을 박해했기 때문이었다.

 

④ 전라도에서의 박해

전주에서는 3월(음)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은 박해 초에 체포되어 즉시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그의 동생 유관검(柳觀儉)과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의 동생 윤지헌(尹持憲), 유항검의 집안과 인척간인 이우집(李宇集) 등도 체포되어 3월 28일(음)부터 전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았고, 중인 김유산(金有山)도 유관검의 고발로 붙잡혀 4월 26일(음) 문초를 받았다. 또한 이들의 고발로 전주․금산․고산․영광․무장(茂長)․김제 등 여러 고을에서 2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때 이우집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서양 선박을 불러들이려는 계획이 탄로되었고, 이 계획에 유항검․유관검․윤지헌․이우집 등이 관련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배교자들은 석방하거나 귀양보내고 중요한 인물들만을 의금부로 압송하여 판결을 받게 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서양 선박을 불러들이려는 계획과 무관한 양반 집안 출신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오), 유항검 집의 종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 최여겸(崔汝謙, 마티아) 등은 7월 13일(음) 사형 선고를 받고 고향인 김제․전주․무장으로 각각 이송되어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서양선박을 불러들이려는 계획과 관련된 유항검․유관검․윤지헌․이우집 등은 9월 11일(음) 사형 선고를 받고 전주로 압송되어 처형당하였다.

 

⑤ 「황사영 백서」 사건과 황사영과 연루된 순교자들

황사영은 정약용의 고발로 2월 11일(음) 체포령이 내려졌으나, 7개월이 넘도록 붙잡히지 않고 도피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는 피신 중 김한빈(金漢彬, 베드로)을 따라 충청도 배론으로 가 김귀동(金貴同)의 집에 은거한 뒤, 그곳에서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등을 통해 수집한 박해 과정을 기록하면서 교회의 재건 방안을 구상하였다. 이때 황심(黃沁, 토마스)이 김한빈을 만나기 위하여 제천(堤川)으로 찾아왔다. 황사영은 8월 26일(음) 황심을 만나자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 교회의 실정과 조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 군함의 파견 등을 요청하는 내용의 「백서」를 작성하여 북경 주교에게 발송하려고 하였다. 황심은 중국을 여러 번 왕래한 옥천희(玉千禧)와 함께 「백서」를 북경에 가져가기로 결정하였으나, 옥천희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책문에서 체포되고 옥천희의 고발로 황심이 9월 15일(음) 체포됨에 따라 발각되고 말았다. 이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크게 일어났는데, 황심의 고발로 황사영과 김한빈이 9월 29일(음) 제천에서 체포되었고, 동래(東萊) 앞바다에 정박한 외국배에 올라가 본 적이 있는 역관 집안 출신 현계흠(玄啓欽)도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아울러 정약용․약전 등도 황사영과의 공모 여부를 캐기 위하여 다시 체포되었다. 백서사건 관련자들 가운데 김한빈과 황심은 10월 24일(음) 판결을 받고 이튿날 참수되었으며, 황사영․옥천희․현계흠은 11월 5일(음)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정약용․약전 등은 공모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진(康津)과 흑산도(黑山島)로 각각 유배되었다.

대왕대비 김 씨는 청에 진주사를 파견하여 「백서」 사건을 마무리하고, 천주교를 박해한 일을 종묘(宗廟)에 고유(告由)하게 하고, 아울러 아직도 죄상을 추궁하지 못한 사학 죄인에 대한 신문을 연말까지 끝내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박해의 전말과 그 당위성을 알리는 반교문(頒敎文)을 12월 22일(음) 반포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22일(음) 귀양가 있다 다시 체포된 유항검의 처 신희(申喜),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와 유관검의 처 이육희(李六喜), 아들 유중성(柳重誠, 마태오) 등이 모두 출신지인 전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12월 26일(음) 16명에 대한 사형 선고도 있었는데, 이윤하(李潤夏)의 아들 이경도(李景陶, 가롤로)․손경윤(孫敬允)․김계완(金啓完,시몬)․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최설애(崔雪愛)․김의호(金義浩)․송재기(宋再紀)․장덕유(張德裕)․변득중(邊得中) 등 9명은 서울에서 처형되었고, 정광수는 여주에서, 김귀동과 황일광(黃日光)은 홍주(洪州)에서, 김일호(金日浩)와 권철신의 양자인 권상문(權相問)은 양근에서, 한덕운(韓德運)은 광주에서, 홍교만의 아들 홍인은 포천에서 각각 처형되었다. 이렇게 해서 가혹하고 잔인했던 신유박해는 막을 내렸다.

황사영은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한 이들과 옥사한 이들을 300여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이들까지 포함할 경우 신유박해 때 희생된 신자들의 숫자는 300여명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표] 辛酉(1801)年 순교자들과 순교 일지

양 력 음 력 순 교 자 들 과 순 교 내 용 및 기 타 일 지
1월    
2월 21일
22일
1월 9일
10일
최창현(요한, 초대 총회장) 밀고자 김여삼에 의해 체포
김 대왕대비(정순왕후, 순조의 계증조모) 공식 박해령인 ‘척사윤음’ 선포, 오가작통법 실시
3월 3일
 
22일
24일
27일
1월 19일
 
2월 9일
11일
14일
책롱사건 발생(임대인 토마스가 포천 홍교만의 집에 있던 책롱을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려다 발각된 사건, 천주교 서적과 주문모 신부 서한, 정약용 집안의 서한이 들어 있었다.)
이가환, 정약용(요한), 이승훈(베드로),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체포, 의금부로 이송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명도회 초대회장, ‘주교요지’의 저자), 권철신(암브로시오) 체포
조용삼(베드로) 여주에서 순교(옥중 杖死)
4월 3일
7일
8일
10일
24일
25일
27일


29일
2월 21일
25일
26일
28일
3월 12일
13일
15일


17일
권철신 포청에서 매맞아 장독으로 치명
이가환 포청에서 매맞아 장독으로 치명
최창현,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 등 서소문에서 순교
이존창(루도비코, 충청도 교회 사도) 공주에서 순교, 충청도와 전라도로 박해확산
주문모(야고보) 신부 의금부에 자수
이종국 공주에서 참수
최창주(마르셀리노),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정종호, 임희영 여주에서 참수
윤유오(야고보, 윤유일의 동생), 유한숙 양근에서 순교
은언군 인의 처 송 마리아, 며느리 신 마리아 사사(賜死)
5월 11일
14일
 
30일
31일
3월 29일
4월 2일
 
18일
19일
이희영(루가, 종교화 화가), 김백순(예비신자) 서소문에서 순교
정철상(가롤로, 정약종의 장남), 최필제(베드로, 최필공의 종제), 윤운혜(마르타, 정광수의 처)
정복혜(간디다), 정인혁(다두), 이합규(세례명 미상) 서소문에서 순교
경기 광주 출신 박중환(세례명 미상) 옥중 장사(杖死)
주문모 신부 새남터에서 순교(50세 때에)
6월 1일 4월 20일 김건순(요사팟) 서소문에서 순교
7월 2일
 
 
4일
7일경
5월 22일
 
 
24일
27일경
강완숙(골롬바, 초대 여회장), 최인철(이냐시오, 최인길의 동생), 김현우(마태오, 김범우의 일곱째 동생), 김연이(율리안나), 강경복(수산나, 폐궁나인), 문영인(비비안나), 이현(순교자 이희영의 조카), 홍정호(홍필주의 가까운 친척), 한신애(아가다) 서소문에서 순교
윤점혜(아가다, 윤유일의 사촌) 정순매(발바라, 정광수의 누이) 여주에서 순교
고광성(聖 고 바르바라의 부친), 황 씨(포수) 평산에서 순교, 이국승(베드로) 공주에서 순교
8월 25일
26일
27일
27/28일
7월 17일
18일
19일
19/20일
김광옥(안드레아) 예산에서 참수, 김정득(베드로) 대흥에서 참수
한정흠(스타니슬라오) 김제에서 순교
최여겸(마티아) 무장에서 순교
김천애(안드레아, 유항검의 종)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
9월    
10월 4일
 
24일
29일
8월 27일
 
9월 17일
22일
홍필주(필립보, 강완숙 아들), 김종교(프란치스코) 서소문에서 순교/ 이부춘․이기연․
李阿只連 충주에서 참수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유관검, 윤지헌(프란치스코), 김유산(토마스), 이우집 전주에서 순교
황사영 백서 완성
11월14일
19일
10월 9일
14일
유중철(요한, 유항검의 아들, 이순이와 동정부부), 유문석(요한, 유항검의 2남) 전주에서 순교
황심(토마스, 밀사), 김한빈(베드로) 서소문에서 순교
12월 2일
10일
10월27일
11월 5일
동지사 조윤대 주문모 신부 처형과 신유박해 결과 적은 토사주문과 가백서 갖고 북경행
황사영(알렉시오), 옥천희(요한), 현계흠(베드로) 서소문에서 순교
1월25일
29일


30일
31일
 
2월 2일
12월22일
12월26일
 
12월27일
12월28일
 
12월30일
김사집(프란치스코) 청주에서 장사(杖死), 덕산 이씨의 아내 골롬바 순교
이경도(가롤로) 서소문밖 참수/ 정광수(바르나바) 여주 正法/
손경윤(제르바시오), 김백심(시몬), 홍익만(안토니오) 최설애 참수
권상문(세바스티아노) 양근에서 참수/ 홍인(레오) 포천에서 참수/ 이석중 충주에서 참수
이육희(유관검의 처), 신희(유항검의 처), 이순이(루갈다), 유중성(마태오, 유항검의 형인
유익검의 아들)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 경기 광주의 우덕운 참수
김귀동, 황일광(알렉시스, 白丁집안 출신) 홍주에서 참수/ 한덕원(토마스) 참수
1801년
순교일
미상
1801년
순교일
미상
김이우(바르나바, 김범우의 셋째 동생) 포청 장폐(杖斃)/ 배 마티아 순교/ 홍익만의 처 순교
이명호(요한) 3월 이전 부친에 의한 독약순교 / 4월초 : 심아기(발바라) 옥중 장사(杖死)
5월(음) : 양근 배석골의 이재몽․이괘몽, 그들 중의 두 딸, 지여울 사는 양반 김원성 순교/ 문윤진(여종) 공주읍에서 처형/ 조 토마스(조동섬의 아들) 10월초 옥사
이 화백, 吳씨 등 영광에서 순교, 최일안 전주에서 형벌사, 금산 元씨 전주에서 참수
연말 경, 변득중․김경서(염색업자)․박명관의 부친 순교
여주의 이씨 과부, 벽정의 최씨, 덕산의 김 토마스(주 신부 순회시 마부 역할)․윤 바오로, 면천의 한 토마스, 공주의 원씨 집안 남녀 각 1명, 전주 신광서․이국 참수

 

4. 본받아야 할 신유년 순교자들의 신심

 

1) 교리서 저술 활동과 순교에 관한 기록을 하려 했다

주문모 신부는 󰡔사순절과 부활시기를 위한 안내서󰡕를 발간하여 신자들의 성사생활을 도왔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하여 서민들과 부녀자들의 교리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

최창현(요한)은 「성경직해」를 저술하여 신자들의 성서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

황사영(알렉시오)는 「백서」 기록을 통해 신유년 순교자들에 대한 정보를 교회 공동체에 남겼다.

김건순(요사팟)은 「천당지옥편」을 저술하였다.

이순이(루갈다)는 옥중에서 어머니와 언니․올케에게 두 통의 편지를 썼다.

이순이의 오라버니 이경도(가롤로)도 순교하기 전날 그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강완숙(골롬바)은 옥에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기 옷자락을 찢어서 거기에 선교사의 사도적 업적을 썼다. 한 성인을 그렇게도 잘 알던 성녀에 의하여 옥에서 쓰여진 그 성인의 이 행적은 그 비단 조각을 맡았던 여교우의 소홀로 불행히도 없어지고 말았다.

순교자에 관한 한국교회의 최초의 기록은 북경 교구의 구베아(de Gouvea) 주교가 1797년 8월 15일 중국 사천(四川) 교구장에게 보낸 서한일 것이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편지와 조선 교우들의 편지를 참조하여 이 편지를 저술하여 후대에 ‘조선 교회의 기원’과 ‘조선교회 초기 순교자들’에 대해 알게 해주었다.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기해(1839)년 박해가 일어나자 곧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순교를 예상하여 정하상과 현석문 남매 그리고 이문우, 최희원 등에게 순교자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록하도록 위임하였다.

달레 신부가 「조선천주교회사」를 저술할 때에 조선 파견 선교사들의 편지나 보고서 등을 참조하여 저술하였는데, 특별히 조선에 전교 신부가 들어오지 않았던 시기(1592~1835)에 관해서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 개인이 수집한 자료를 참조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허약한 건강에다 바쁜 사목생활로 직접 교회사 편찬을 하지 못하게되자, 1862년 그간 수집한 모든 수기(手記)와 문헌들을 그대로 빠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던 것이다.

 

2) 순교자들은 신앙서적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였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친하게 알았던 황사영(알렉시오)은 그의 사람됨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 “그는 세속 사정을 조금도 돌보지 않고 특히 철학과 종교 연구를 즐겨 하였다. 교리의 어떤 점이 분명치 않게 생각될 때에는 그것을 연구하느라고 침식을 잊고, 그것을 밝혀내기까지는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가거나 집에 있거나 말을 타거나 배를 타거나 깊은 묵상을 그치지 않았다. 무식한 사람들을 만나면 온갖 정성을 들여 그들을 가르쳤으며,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그 일을 게을리 하고 귀찮아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무리 우둔하더라도 그들에게 자기의 말을 이해시키는 데 신기하리만큼 능숙하였다. 그는 조선말로 「주교요지」라는 책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거기에는 그가 천주교 서적에서 본 것을 모아 놓고 거기에 자기의 생각을 덧붙였으며, 무엇보다도 명백히 설명하는 데 힘썼다. 이 책은 이 나라의 새 교우들에게 귀중한 책이며 신부도 그것을 인정하였다. 정 아우구스티노가 교우들을 만나면 관례적인 첫인사를 나눈 후 곧 교리 이야기를 하며 하루 종일 사람들은 쓸데없는 말을 끼울 수 없었다. 그가 통달하지 못하였던 어떤 어려운 점을 누가 풀어 주면 그는 마음에 기쁨이 넘쳐흘러 그 대화자에게 뜨겁게 감사하였다. 냉담자나 우둔한 사람이 구원의 진리를 기꺼이 듣지 않으면 그는 근심과 걱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별 문제를 다 질문하였는데, 그 머리의 기막힌 정확성과 단순하고 명백한 그이 말 덕택으로 그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신앙을 굳게 하고 애덕을 더하게 하였다. 그의 덕이 총회장 최창현(요한)의 덕보다 덜할지도 모르고, 그의 명성도 최 요한의 명성보다 덜 빛날지는 모르나, 자질과 지식으로는 그보다 더 우수하였다.”(황사영 백서 36~38행)

황사영은 「백서」를 작성할 때에 떼르툴리안의 말을 인용하였고, 이웃 나라 일본의 교회 소식을 인용하였다(백서 87줄).

 

3) 순교자들은 순교하기까지 기쁨을 잃지 않았다.

황일광(알렉시스)은 포졸들에게 체포되는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었다. 그는 체포될 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리들은 나를 남원(南原) 고을에서 살기 좋은 옥천(沃川) 고을로 옮겨가게 하시니, 이 큰 은혜 대단히 감사합니다.” 조선말에 ‘나문’은 나무를 가리키고 ‘옥’은 獄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모시던 그는 땔나무를 사러 나갔다가 포졸들을 만나 잡혀서 옥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4) 여성 순교자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초기 조선천주교회 여성 신자들은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 선교활동, 여성신자들의 공동생활(오늘날의 수도회 공동체처럼), 자선사업, 동정녀들의 수정생활(守貞生活) 등 많은 모범을 보였다. 대표적인 여성은 강완숙(골롬바, 1760~1801) 순교자라 할 수 있는데, 그녀의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여성단체를 조직

불행하고 의지할 데 없는 여자들을 거두어 그의 집에서 살게 하며 敎理를 가르침

㉡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활동을 시작

* 權化全家 旁及隣里(황사영백서에서)→ 媤母와 전처 아들 홍필주와 친정부모 입교시킴

* 지체 높은 양반집 여러 부녀자들이 그녀로부터 신앙을 전해 받아 입교함

* 왕가의 부녀들과 궁내의 나인(內人)들에게도 전교함(은언군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

당시의 국법에 역적이 아니한 양반의 부녀자들은 형벌로부터 제외되었기에 그들은 禁敎令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주문모 신부→이 점 감안해 여교우들 厚待 여성의 활약이 컸다

㉢ 신입교우들 위해 교리강습회․강연회 등을 자주 개최함

㉣ 童貞女들이나 寡女들을 모아 교육 활동까지 지도함

교육과정이 끝나면 그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방문케 해 천주를 믿도록 권유하게 하고 자기 자신도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남을 권유해서 감화시킴/ 修道會적인 성격의 단체를 처음으로 조직함

㉤ 明道會의 女會長職 수행

남인 兩班과 中人들로 구성된 남교우들과 더불어 다양한 선교 활동을 펼침/ 선교와 자선적인 교회사업에 참여하면서 한국천주교회의 성장과 확장에 공헌

㉥ 1791년 신해박해 시 음식을 만들어 옥에 갇힌 교우들을 방문

㉦ 교회 지도자와 회장인 남녀 교우들과의 잦은 교류

 

Ⅲ. 맺는 말

 

신유박해는 조선의 교회나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교회가 받은 타격도 컸지만 정치적인 충격도 컸었다. 교회는 중요한 역할을 하던 대부분의 교역자들을 잃었고, 목자 없는 교회가 되어 30여 년을 다시 더 목자를 기다리는 인고의 삶을 살아야 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 반포는 종교의 유입을 차단하는 도구가 되었지만 아울러 서구 문명의 이기조차 유입되지 못하게 만들어 나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녀의 의도된 박해는 많은 순교자들을 낳았는데, 순교자들의 피는 오히려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 전국 각 지역으로 교회가 확장되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의 지도층 인물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순교나 배교로 떠나갔지만 중인 이하 신분의 교우들이 등장하여 그 맥을 이어가게 되었고, 또 다시 성장하여 오늘의 교회 모습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이제 이들 순교자들의 후손인 우리는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아 교회를 쇄신하고, 활발했던 초기 평신도들의 교회 모습을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103위 성인들이,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자들에 대한 철저한 자료 수집과 기록에 의해 가능했듯이 다시 또 신유박해와 그 이전 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수집과 기록 및 기도의 몫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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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 김영수 역, 한국천주교회고전총서 5, 성 황석두루가서원(1998)

󰡔邪學懲義󰡕, 한국교회사연구자료 제7집, 불함문화사(1977).

최석우, 「󰡔사학징의󰡕를 통해서 본 초기천주교회」,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이기경 편, 󰡔闢衛編󰡕, 한국교회사연구자료 제9집, 서광사(1978)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75~619쪽

김옥희, 󰡔시복시성을 기다리는 무명의 순교자와 증거자󰡕, 도서출판 세훈(1996)

김옥희, 󰡔한국천주교여성사(I)󰡕, 도서출판 한국인문과학원(1983)

서종태, 「신유박해」, 󰡔교회와 역사󰡕 제308호(2001년 1월호), 한국교회사연구소.

조광, 「신유박해의 분석적 고찰」, 󰡔교회사연구󰡕 제1집, 한국교회사연구소(1977), 41~74쪽

「누갈다 초남이 일기 남매」,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1983), 71~93쪽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I󰡕, 천주교 전주교구, 1998, 92~216쪽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제1집, 최석우 감수, 차기진 역주,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 시성 추진 위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5] 103위 순교성인 낳게한 박해시대 상황 - 신유,기해,병오, 병인

 

 

박해의 배경, 신유박해

 

박해는 교회를 정화하고 신앙을 담금질하는 '용광로'다. 103위 한국 성인들은 모두 박해로 치명한 순교자들이다. 1784년 조선에 첫 가톨릭 신앙공동체가 탄생한 이후 약 100년 가까운 박해로 1만명 이상이 순교했고, 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골과 외딴 오지에서 신앙의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박해가 혹독할수록 대지를 적신 순교자들의 보혈은 더 많은 신앙의 싹을 꽃피었다. 순교자들의 거룩한 죽음 위에 뿌리내린 한국 천주교회는 이제 세계교회가 주목할 만큼 성장했다.

 

새천년을 맞아 첫번째 맞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며 103위 순교 성인을 낳게 한 박해시대의 상황을 재조명한다. <자료 제공 한국교회사연구소>

 

우리나라 최초의 박해는 1785년 을사년에 추조 곧 형조의 관리들이 명례방(지금의 명동)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신자들을 체포, 김범우를 단양으로 유배시킨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그러나 조정의 지시에 의한 최초의 박해는 이른바 진산사건으로 불리는 1791년의 신해박해다. 진산 땅의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 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파묻은 것이 드러나 사형을 당한 것이다.

 

이후 1879년 파리외방전교회의 드케트 신부가 중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약 100년간 크고 작은 박해가 이 땅을 순교자의 피로 물들였다. 이중 1801년의 신유박해와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를 4대 박해라고 부르며, 이 4대 박해로 순교한 분들 가운데서 103위 성인이 탄생한 것이다.

 

▲ 박해의 배경

 

박해의 원인과 배경은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상적으로 당시 조선은 유교를 문화적 지주로 삼고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정학(正學)인 유학에 배치되는 서학(천주교 교리)은 사학(邪學)으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조상제사를 금하고 만인 평등을 내세우는 천주교는 당시의 사회 윤리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악한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정치적 배경도 박해의 주요한 원인이 됐다. 초창기에 천주교를 신봉했던 사람들은 남인계열의 소장학자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남인 사이에서도 천주교에 우호적인 친서계와 비판적인 공서계로 나뉘어졌다. 공서계 인물들은 노론 벽파와 함께 친서계 인물들이나 이에 동조하는 노론 시파 세력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밖에 외국 선교사 영입을 위한 신자들의 활동이 서양 오랑캐의 앞잡이 역할을 한 반역행위로 인식된 것이나 또는 밀고자나 배교자들의 고발도 박해의 한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작용해 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 신유박해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첨정을 시작하면서 노론 벽파의 주도로 이루어진 박해. 대왕대비는 신유년인 1801년 1월10일(양력 2월22일) 박해령을 내리면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도록 했다. 이에 따라 기호 남인의 거두인 권철신(암브로시오)을 비롯해 이가환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 등 지도층 신자들이 체포돼 참수 또는 유배형을 받았다. 또 충청도에서는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이 붙잡혀 참수됐다.

 

박해는 3월12일 주문모 신부가 의금부에 자수하면서 더욱 가열됐으며 그 해 9월에는 이미 체포령이 내려졌던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그가 지니고 있던 '백서'가 발각됨으로써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신유박해는 12월2일 이미 내린 사형선고는 속히 집행하고 판결을 내리지 않은 죄인들에 대한 신문도 속히 끝내고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말라는 '토사교문'이 반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끝났다.

 

신유박해로 인해 약 100명이 순교했고 400명 정도가 유배되었으나, 이들 순교자들은 아무도 시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할 때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부터 그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기해박해

 

'기해박해'는 1839년(헌종 5년) 3월에서 10월까지 약 8개월여간 전국을 휩쓴 박해로 103위 한국 천주교 순교성인 중 70명이 이때 순교했다. <표 참조>

 

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은 노론 시파와 벽파 간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었다. 노론 벽파가 당시 권세를 잡고 있으면서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타파하고 권력을 재창출하기 위해 박해를 일으킨 것이다.

 

박해는 1839년 4월18일(음3월5일) 순원왕후가 내린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으로 공식화 됐고, 배교자 김순성(일명 김여상)이 등장하면서 더욱 확산됐다. 김순성의 밀고로 조신철(가롤로),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과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 등이 체포돼 순교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는 김순성이 갖은 악랄한 수단을 동원해 신자들을 현혹시켜 자신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우들의 재난을 그치게 하기 위해 자수해 순교했다.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에 비해 체포된 신자 수는 적으나 그 지역이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직자들을 모두 잃어 침체기로 다시 빠지게 됐고 가난한 서민층이 교회 구성원의 주류가 됐다. 또 조정에서 국경 감시를 강화했고,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깊은 산중으로 피신해 교우촌을 이루거나 신분을 속이며 살아야 했다.

 

기해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많은 순교 성인을 탄생시켜 103위 한국 천주교 순교성인 중 선교사 3명, 남자 24명, 여자 43명 등 총 70명에 이른다.

 

 

병오박해

 

'병오박해'는 병오년인 1846년 6월5일(음5월12일) 김대건(안드레아)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돼 9월20일 종결됐다. 병오박해 순교자는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 현석문, 이간난, 김임이, 정철염, 우술임, 임치백, 남경문, 한이영 등 병오박해 순교자들은 모두 김대건 신부와 관련이 있었다.

 

박해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기해박해를 경험했던 신자들은 박해 소문을 듣자 대부분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잠시 몸을 숨겼다가 몇 달 후 다시 교우촌 순방을 시작했을 정도다.

 

병오박해가 이전 박해와 다른 점은 '프랑스 함대'의 출현이다.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이 옥에 갇혀있는 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 함장이 이끄는 군함 3척이 충청도 외연도에 1846년 8월9일 나타나 조정에 기해박해 때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한 데 대한 항의 서신을 전했다.

 

조정에서는 헌종과 대신들이 9월5일 묘당회의를, 9월15일 어전회의를 열어 회신 여부와 김대건 신부의 처형문제를 서로 연관지어 논의했다. 그 결과 헌종은 김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군대를 불러들인 역적으로 간주해 효수 판결을 내렸다.

 

결국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은 김 신부와 신자들의 처형만 앞당기는 결과만 낳았다. 하지만 이때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이 20년 후 병인박해에 대한 프랑스의 대항으로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의 서막일 줄은 그 누구도 내다보지 못했다.

 

 

병인박해

 

1866년(고종3년)초에 시작하여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8년간 지속된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됐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대박해였다. 박해는 10여년간 지속됐는데 크게 △ 1866년 봄 박해 △ 병인양요 이후인 1866년 가을부터 이듬 해까지 계속된 박해 △ 덕산 굴총 사건으로 인한 1868년 박해(무진박해) △ 신미양요로 인한 1871년 이후 박해 등 네 단계로 나누어 진행됐다.

 

병인박해의 직접 원인은 위정자들의 '외세를 배척하는 사상' 때문. 1860년 10월 영·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자 조선 위정자들은 프랑스 함대를 비롯한 서양 세력의 침략을 경계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펴자 대원군은 남종삼(요한·성인)의 제안으로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내세워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가 러시아의 남아를 막아준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러시아의 월경행위가 잠잠해지고, 반대파들의 정치적 공세가 강화되며, 서양인들이 중국인을 살육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마음을 바꿔 '박해령'을 내렸다. 박해가 시작되자 전국 각처 교우촌은 유린됐고 선교사와 신자들이 체포돼 순교했다.

 

그 와중에 1866년 9월 제너널 셔먼호 사건과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절두산)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토가 서양 오랑캐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며 박해를 더욱 강화했다.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노로 매도해 처형함으로써 집권의 한 방편을 이용했고, 정당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박해가 누그러질 줄 모르는 상황에서 1868년 5월 독일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묘를 도굴한 '덕산 굴총 사건'이 터지자 박해는 불더미에 기름을 붇듯 번져갔다. 오페르트 굴총 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감정이 악화돼 조정에서는 '참수형'을 명했으나 지방에서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는데 있어 교수형, 장살, 생매장, 백지사형 등 극형들이 남발했다.

 

조선 천주교회는 병인박해로 인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이후 세번째 침체기를 겪었다. 전국의 교우촌은 철저히 유린됐고,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함으로써 교회를 이끌어갈 사람이 없게 됐다. 조선 천주교회는 그 후 병인박해 이전의 2만여명에 달하던 교세를 회복하는데 20여년이 걸렸다.

 

이 기간동안 순교한 신자들은 대략 8000명에서 1만명.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들이다. 이들 중 이름을 알 수 있는 24명만이 성인품에 올랐다.

 

[평화신문, 2000년 9월 24일,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