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성화의 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에 오는 금요일을 예수 성심 대축일로 기념하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 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입니다. |
전국 교구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인 16일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미사와 행사를 개최하며, 사제 사명을 되새겼다.
서울대교구 사제 성화의 날에 교구 사제들이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제공
서울대교구는 16일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사제 성화의 날 행사를 열고, 교구 사제들이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제 사명과 직무를 묵상하고,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행사는 교구 사목 사제포럼 소개와 성체 조배와 기도, 교구장과의 시간, 사제서품 은경축 축하식 순으로 진행됐다.
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사제란 누구인가?’라는 주제 미사 강론에서 “사제는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맡겨주신, 성사를 집행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다시금 일깨웠다. 이어 “사제들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는 사제들을 통해 교회와 신자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신다”며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소중한 소명을 다시 한 번 음미하고, 부르심을 받들어 가슴 벅차오르게 응답했던 그 체험과 열정을 기억하자”고 당부했다.
서울대교구 사제 성화의 날 미사에서 교구장 정순택 주교와 주교단이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제공
미사 후에는 올해 사제수품 25주년을 맞은 사제 17명을 위한 축하식도 열렸다. 대표로 소감을 밝힌 신희준(제18 양천지구장 겸 양천본당 주임) 신부는 “사제생활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을 비롯해 사제, 수도자, 신자들의 기도와 격려 덕분”이라고 말했다.
수원교구도 이날 남양성모성지에서 2023 사제 성화의 날 행사를 마련했다. 교구 사제단은 형제적 친교로 서로 섬기고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가 성체성사 안에서 주님을 흠숭하며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성체신비 공경예식을 거행하고 있다. 수원교구 제공
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오늘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한자리에 모인 것은 사제들의 형제적 마음과 사랑을 나누기 위함”이라면서 “오늘 복되고 의미 있는 하루를 지내면서 예수님 마음을 닮아 사목 현장에서 교우들에게 풍성한 은총과 사랑을 주는 사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용훈 주교를 비롯해 총대리 이성효 주교, 교구장대리 문희종 주교, 전임 교구장 최덕기 주교와 사제 400여 명이 참여했다.
인천교구 또한 16일 교구장 정신철 주교 주례로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대성당에서 사제 성화의 날 미사를 봉헌했다. 정 주교는 강론에서 “우리가 사제직 본래 모습에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모두가 신앙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됨은 자명한 사실”이라며 “진실한 사제직의 모습만이 점차 신앙에 무감각해지는 이 세상에 복음의 귀함을 알려주는 징표”라고 강조했다.
정 주교는 또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묵상하지 않아도 강론하거나 사제 생활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유혹처럼 다가올 때, 사제직의 본질은 무너진다”며 “사목자가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가 하는 사목은 사목일 수도 없고 성직 수행도 아닐 것”이라고 전했다.
금경축 행사를 치른 인천교구 (왼쪽부)노동한·조성교·이준희 신부가 교구장 정신철 주교와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변훈 인천교구 홍보기자
인천교구는 미사 후 사제수품 50주년을 맞은 이준희·조성교·노동한 신부의 금경축 행사도 열었다. 세 원로 사제는 “남은 삶도 주님을 위해 봉헌해 오롯이 사제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전주교구도 같은 날 치명자산성지 평화의 전당에서 사제 성화의 날 행사를 열었다. 교구 사제들은 사제로서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충실히 수행하고 성덕을 쌓고자 다짐했다.
전주교구 사제 성화의 날 행사에서 김선태 주교 주례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교구장 김선태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하느님께서 부족한 나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우리의 우선적 사명이며, 직무 수행의 우선적 과제”라며 “모든 사제가 하느님의 주도권과 권위를 언제나 인정하고, 하느님의 선택에 늘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하자”고 당부했다.
미사 후에는 사제수품 25주년을 맞은 사제 3명의 축하식이 열렸다. 김병희(둔율동본당 주임) 신부는 “죄 많은 저희를 끊임없이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또 앞으로 저희에게 다가올 수많은 미래의 일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드리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고 했다.
이상도 기자 raelly1@cpbc.co.kr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2]최양업 신부 이후의 사제들
구한말 궁핍했던 조선인들 살림과 교육 돕고 교회 토대 일궈
주민들과 나눔의 삶 살아가고
기도와 애덕 실천으로 이끌어
힘든 상황에도 성당 건축 돕고
성경으로 힘 얻도록 번역 힘써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걷고 걷다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한 최양업 신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지난 1886년 6월 4일, 한불조약이 체결됐고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찾을 수 있게 됐다.
모진 박해가 끝나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했을 거라 짐작했던 1800년대 후반. 하지만 구한말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신자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윽고 일본이 침략하면서 식민통치의 칼날이 교회까지 위협을 가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 최양업 신부 이후의 사제들은 이 시기, 모진 고난을 견디며 신앙을 지키고자 애썼다. 사제 성화의 날(6월 16일)을 맞아 최양업 신부가 남긴 거룩한 모범을 따르고자 노력했던 그 이후 사제들의 흔적을 소개한다.
■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진 고난
1873년 병인박해를 일으킨 대원군이 물러나고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1886년 6월 4일 한불조약이 체결된 이후,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찾게 된 교회는 지하교회로부터 자유교회로 발전하게 됐다.
박해기간 중 산중에 은거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천주교 신자들은 점차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이주했다.
대부분 신자들은 집단으로 이주해 토기굴을 짓고 교우촌을 형성, 옹기를 만들며 생활했다. 오랫동안 산중 생활을 하다 나온 이들의 생활이 넉넉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구한말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조선에서는 신자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도 곤궁을 면하기 어려웠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선교의 자유를 맞은 한국교회는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애썼다.
최양업 신부가 세상을 떠난 뒤 조선인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신자들을 위해 사제 양성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신학생들을 선발해 페낭 신학교로 보냈다. 유학에서 돌아온 신학생들은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최양업 신부 이후 처음 사제품을 받은 사제는 강도영(마르코)·정규하(아우구스티노)·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다.
세 명의 사제는 1895년 12월 21일 부제품을 받았고, 이듬해 4월 26일 서울 약현 성요셉성당(현 중림동성당)에서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1897년 12월 18일 이내수(아우구스티노)·한기근(바오로)·김성학(알렉스) 신부가, 1899년 3월 18일 김원영(아우구스티노)·홍병철(루카)·이종국(바오로) 신부가 사제품을 받았다.
1800년대 말에 서품을 받은 사제들은 무법천지였던 구한말의 시대상, 일본의 침략으로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과 맞닥뜨리며 신자들의 삶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10년 일본이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주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 자유를 찾을 수 없었고, 교회까지 위협이 불어닥쳤다.
1915년 8월 일제는 소위 ‘포교규칙’을 제정·공포함으로써 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선교할 수 없도록 했다. 본당 신설 역시 사전에 총독부 허가를 얻어야 했다. 일본군이 성당 건물을 군대 숙영지로 사용할 것을 요구해 사제와 충돌한 사건도 있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9년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신자 수 연평균 증가율은 2.10%로서, 개화기의 증가율 6.98%에 비해 현격하게 둔화됐다.
조선조의 몰락과 일제에 의한 식민지 지배하의 혼란 속에서 사제들은 신앙을 지켜내고 본당 공동체의 기초를 닦는 도전에 직면했다.
■ 가난한 신자들과 함께 걷다
장정의 하루 품삯이 좁쌀 한두 되였던 구한말. 어려운 경제 사정에 신자들의 생활도 궁핍하긴 마찬가지였다.
1906년 5월 20일 옥천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홍병철 신부는 자신의 생활을 극도로 절약해 주민들과 함께 가난을 나누는 삶을 실천했다.
실제로 그는 성당 주변에 호박을 심어 매일 호박죽만 먹었고 쌀 한 톨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손님이 올 때는 보리방아를 직접 찧어 대접했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홍 신부는 1만여 평의 전답을 구입해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신자들에게 위안이 되고자 어려운 여건이지만 성당을 짓기로 한 홍 신부는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을 줄이고 손수 목재를 다듬고 흙일을 하며 1909년 봄, 72㎡ 규모의 아담한 성당을 완성했다.
어느 정도 본당의 기반을 닦아놓은 홍 신부는 1913년 부활 판공을 위해 북부 지역(청주, 청원, 괴산, 청천, 보은군 일원) 공소를 순회하는 도중 열병으로 1913년 3월 6일 갑자기 선종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미리내본당 초대 주임 강도영 신부도 성당 옆에 해성학원을 지어 교리교육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농법 개량을 위해 힘썼을 뿐 아니라 1923년 이후에는 신자뿐 아니라 지역 주민에게 담배 농사 대신 양잠업을 장려하기도 했다. 가난의 근본을 해결하기 위해 이 같은 노력을 한 것이다.
■ 신자들 삶과 신앙 지키다
정규하 신부는 한국인 신부로서 처음으로 강원도 최초 본당인 풍수원에 파견됐다. 1896년 부임한 그가 가장 처음 한 일은 성당 건축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직접 산에서 나무를 베고, 신자들과 벽돌을 굽고 나르며 1910년 2월 완공한 풍수원성당은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자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서 근대 건축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신심단체 설립에도 힘썼다. 기도와 교리공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에 힘쓰는 성부안나회는 신자들의 기도와 애덕실천을 위해 만든 것이다. 또한 1920년 풍수원성체현양대회를 시작, 신자들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교회 일치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최양업 신부 이후 일곱 번째 서품자인 한기근 신부는 한국인 성직자로서 신자들을 위해 무엇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고민의 결과 그가 실천한 것은 성경 번역이다.
당시 제대로 된 성경 번역이나 간행이 이뤄지지 않았던 한국교회 상황에서 한 신부는 신자들이 성경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성경을 번역했다.
또한 그는 1925년 7월 로마에서 열린 한국 순교자 첫 시복식에 참여한 유일한 한국인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첫 번째 한국인 성직자인 김대건 신부에 대해 집중적으로 언급했다.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작은 나라의 교회지만 보편교회 안에서 한국교회가 잊히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또한 그가 한국어로 쓴 「로마 여행일기」는 한국의 가톨릭 성직자가 기록한 첫 그리스도교 성지순례기다. 한국인 신자들이 견문을 넓히면서 신앙생활에 도움을 얻기를 바라며 여행기를 적어 내려간 한 신부는 여행기의 마지막에 이렇게 전하고 있다.
“7개월간 여행 중 보고 들은 것 중에 무엇이 제일 좋고 부럽더냐 하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성당이 많은 것이 제일 좋고 부럽다 하노라. … 우리 조선에도 교우가 많고 열심하여 각처에 성당이 연면하기를 기구하고 바라나이다.”
민경화 기자(가톨릭신문)
[3] 사제에게 들어보는 ‘사제 성화’(聖化)
“세속화와 성직자 중심주의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다. 대답이 명료함은 자의식에 대한 이해가 투명하고 성찰과 번뇌의 시간이 농익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속화와 권위주의는 사제의 생활과 교회 운영 방식의 문제에 이른다. 오늘날처럼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추락되고 시민사회로부터 빈정거림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위로부터의 개량적 분위기건 아래로부터의 개혁이건 결국 ‘나로부터의 혁명!’ 외에 대안은 없다. 출발점을 찾는 것은, 신학교 입학 면접 때나 서품면담 때에 받던 원천적 질문, 즉 사제로서의 삶의 목표 앞에 자신을 세워야 가능하다.
“사제, 수도자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체 게바라’는 혁명가의 덕목에 대해 “사랑이지요. 혁명의 목표가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투쟁과 혁명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답을 얻는다. ‘사제, 수도자의 덕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역시 사제로서의 삶의 이유와 목표가 뚜렷하면 대답 또한 명료할 것이다.
개신교 젊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동시성’(同時性, Synchroneity)이라 한다. “진실로 예수를 믿는다 함은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온전히 결합된 모습”이라는 의미다. 여성신학자 이은선 교수는 수행에 대해 ‘聖-誠-性’ 이라는 표음 언어로 말하길, “육신적 욕망의 인간 본성(性)에서 출발하여 지극한 의지(誠)를 통하여 ‘거룩함’(聖化)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목표 정향이 분명한 의지의 삶이 ‘성화에의 길’이다.
■ 생태계적 토대 위에 사는 사제직
우리 모두는 좋은 사제들이다. 부모님의 사랑으로 태어나고 성장한 가정의 자녀이며, 교양인이자 민주시민이고, 지성인이고 종교인이며, 예수의 제자인 그리스도교 신자다.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선발된 사제다.
사제는 위로 올라갈수록 소수인 계단형의 위쪽에서 살아간다. 이건 계급이 아니라 ‘생태계적 토대’다. 토대의 위에 있는 자는 죽어도 먼저 죽고, 도망가도 마지막에 뛰게 되는 관계성을 이룬다. 멍에는 가볍지만 두려움은 크고 의무감은 무겁다. 맨 위쪽이 그리스도라면 사제는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토대를 위해 헌신하는 섬김의 자리에 위치한다. “신부이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은 토대 위에 존재하는 생태적 관계성을 지적하는 말이다.
■ ‘공감능력’과 ‘자기성찰능력’
덕행의 본질과 핵심은 공감 능력이다. 공감은 다른 개체가 ‘하나의 몸’으로 느껴지는 ‘동시성’의 감정이다. 공감은 최고의 영적 정화의 상태다. 공감의 힘이 있어서 사랑, 사람이 된다. 성찬례는 최후 만찬의 기억과 회상으로 주님 현존을 만나게 하는 ‘공감의 성사’다.
공감은 마음과 영(靈)의 형상 활동이다. 공감 순간에 하느님의 영이 임재한다. 딸은 어머니의 김장김치에서 부모의 노동, 땀과 수고를 공감한다. 영성체는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의 눈물을 먹고 마시는 공감과 현존의 순간이다. 미사예물을 받은 사제가 눈앞의 제물에서 영적 공감을 못한다면 제병과 포도주가 어떻게 2000년 전 주님의 성체성혈이라 선포할 수 있는가? 그건 기만이다.
사제는 자기 삶의 태도에 대해 살필 줄 아는 양심과 도덕의 담지자다. 넘어질 수 있지만 무엇에 걸렸는지 보고 다시 일어나는 것은 중요하다. 자기 삶의 궤적을 돌아보는 성찰 능력은 신앙의 수행, 성장과 성화를 가늠하는 척도이자 용서와 화해의 힘이다.
※ 박기호 신부는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로, 1991년 사제품을 받고 1998년 ‘예수살이 공동체’를 설립했으며, 2006년부터 충북 단양 ‘산 위의 마을’에서 기도와 노동, 공생의 삶을 살고 있다.
어느 월요일 이른 아침, 너덧 명의 사내들이 사무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이닥쳤습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예상대로 도청 감사과에서 조사 나온 30·40대의 공무원들이었습니다. 몇몇 직원이 그들 앞을 가로막고 항의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제가 나서야 했습니다. 로만칼라를 앞세우고 고함을 쳤습니다.
“뭐 하는 짓입니까! 사전에 연락도 없이 이렇게 막해도 되는 겁니까! 돌아들 가세요. 우리는 감사 거부합니다!”
완강한 저항에 당황한 도청 공무원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아마도 로만칼라를 찬 신부를 보고 당황한 것 같습니다) 낯익은 시청 공무원이 저에게 다가와 작지만 단호한 소리로 “신부님, 죄송하지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저는 그 공무원을 끌고 가다시피 저만치 가서 말했습니다.
“하루만 시간을 늦춰 주십시오. 그러면 모든 걸 받아들일 테니까요!” 빠르고 찌르는 듯한 말투에 공무원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잠시 후 도청 공무원들은 시청 공무원을 따라 사라졌습니다.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사건은 단순하지만 풀기가 어려웠습니다. 교구에서 위탁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에서 평신도 시설장과 몇몇 직원에 의한 횡령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직원들은 관례라고 생각하며 행해 오던 일들이,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고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꽤 규모가 큰 횡령 사건이 됐습니다. 저는 다른 복지기관장으로 일하던 중 사건이 터지자 수습 차원에서 파견됐던 것입니다. 결국 시설장 이하 몇 명의 직원이 사표를 쓰고, 횡령액을 전액 교구에서 메꾸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저는 1992년에 서품받고 꼬박 30년 사제 생활을 했습니다. 그중에서 17년 간 사회복지 일을 했습니다. 사회복지사 1급, 저의 은근한 자부심입니다. 사회복지를 통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이나, 정신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은총이며 보람입니다. 하지만 이 생활이 너무 오래되다 보니 사목자인 신부가 경영자로 변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해야 할 사제가 자기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자식들을 위해서 소중한 한 끼 식사를 마련하던 어머니가, 자식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으니 식사를 대충 하게 된다는 광고를 봤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혼자 미사를 하게 되니 강론이 없어졌습니다. 강론하지 않으니 그날 복음을 묵상하지 않게 됐습니다. 말씀의 성찬이 초라한 ‘혼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사회복지 일을 마무리하고 본당으로 돌아온 지 3년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영적 자녀인 신자들을 위해서 말씀을 정성껏 요리하고, 한상 푸짐하게 차려내기 위해서 많은 묵상을 합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뿐 아니라 사제 자신에게도 큰 은총이며, 성체의 성찬에 버금가는 영적 양식입니다.
사회복지 일을 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어려움에 부닥친 수많은 사람들에게 눈에 드러나는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스스로 넓어짐을 체험했습니다. 스스로 ‘소영웅’이 된 듯한 교만을 체험했습니다. 그 속에서 한계에 부딪힌 제 영혼을 만났습니다. 이제 본당에서 신자들과 나누는 푸짐한 말씀의 식탁에서 제 영혼이 깊어지도록 은총을 구합니다.
※ 백남해 신부는 1992년 사제품을 받고 마산교구의 장애인복지관장과 사회복지국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마산교구 창원 대방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하고 있다.
[4]유흥식 라자로 추기경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유로워진다는 것”
Roberto Cetera, Francesco Cosentino / 번역 이정숙
봄의 온기로 따뜻해진 성 베드로 광장이 소란스럽지만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에 자기 자신을 반영하고 세상으로부터 그러한 반영을 받아들이는 교회의 이미지가 잘 드러나는 듯하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은 벌써 그런 자세로 이 같은 반영을 표현하고 있다. 소파 끝에 앉아 상대방 쪽으로 몸을 기울인 그는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와의 인터뷰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기쁨만이 줄 수 있는 열정으로 넘쳐흐르는 강물처럼 대답했다.
이하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과의 일문일답:
추기경님, (...)
“추기경님이라뇨, 아니, 아닙니다. 저는 라자로, 불쌍한 라자로 신부입니다. 저 역시 예수님의 친구 라자로처럼 다시 살아나고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불쌍한 라자로입니다.”
무슨 뜻으로 라자로 신부라고 하시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저는 16살에 세례를 받고 새 삶을 얻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신자가 아니었고, 저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톨릭 학교가 최고의 학교 중 하나라는 이유로 가톨릭 학교에 등록했습니다. 여러분의 편집장님이 고등학교 종교 교사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음, 그분께 종교 수업이 제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주세요! 종교 교사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추기경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많은 빚을 지고 있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수녀님들입니다. 가톨릭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수녀님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를 그리스도교로 이끌어준 이들이 바로 수녀님들입니다. 무엇보다도 한 인간으로, 여전히 다소 방황하며 인생의 길을 찾아나서는 아이였던 저를 돌봐줬습니다. 그분들은 큰 사랑으로, 매번 식별하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지난 1966년 세례를 받은 직후 신학교의 길로 이끌어준 이들도 바로 수녀님들이었습니다. 제가 성소를 발견하기 전에 그분들이 먼저 제 성소를 본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수녀님들을 만날 때마다 너무 감사하고 또 애정을 느낍니다. 저는 수녀님들을 아낍니다.”
그러다 사제가 되셨군요. (...)
“예. 신학교 경험은 교리적 관점 이전에 인간적 관점에서 훨씬 더 흥미로웠습니다. 제 시야가 넓어졌고, 동시에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습니다. 바로 그 아름다운 경험 때문에 나중에 신학교 총장이 되었을 때 저는 아주 행복했고, 이제는 전 세계 사제 양성을 담당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 불쌍한 라자로의 삶에 대해 누군가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물론이죠. 한 사람의 역사가 그 사람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니까요. (...)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제 이야기가 대한민국 천주교 확산을 어느 정도 정형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셔서 강조하셨듯이,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외국에서 온 선교사를 통해 전래된 것이 아니라 토착적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지적 호기심과 진리 탐구에 목마른 한국인의 마음과 정신이 만들어낸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이야기는 제가 젊었을 때부터 영감을 줬습니다. 지금까지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복음과 교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저는 항상 그분을 부활한 삶의 본보기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만날 기회가 있었던 모든 교황님들에게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돼 있습니다’라는 그분의 말씀을 되풀이하며 제 것으로 삼았습니다.”
라자로 신부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시게 됐나요?
“그것은 교황님에게 여쭤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300명의 한국 청년들과 함께한 ‘아시아 청년대회’에서 교황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불쌍한 라자로’가 그분께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자로 “신부” 추기경님은 전형적인 동양적 온화함으로 입증된 강력한 공감능력과 뚜렷한 의사결정 태도를 독특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겸비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한국 문화에는 강한 위계질서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는 유교에서 물려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가톨릭 문화에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예컨대 순명 서약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나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돌아가자면, ‘미닫이 문’이 저의 일평생을 인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문을 통해 은총이 신비하고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가톨릭 학교 입학, 세례, 제가 말씀드린 수녀님들, 총장이 되어 돌아간 신학교, 주교직,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주형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이 창문 앞에 서게 됐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대화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예측불허’의 순간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것은 말씀과의 만남입니다. 어느 날 저는 제가 익숙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 말씀을 저에게 소개한 포콜라레 소속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복음을 아름다움과 도덕적 측면에서 바라봤지만, 멀리서 그렇게 바라봤을 뿐 제 일상에 구체적으로 육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신부님은 복음이 자신을 완강히 반대하는 사람들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라고 가르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말씀은 읽는 게 아니라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저에게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복음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오늘날 훌륭한 모범으로 봅니다. 교황님은 복음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곧, 그리스도교는 우리가 세상에서 우리 존재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것을 요구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대답은 바로 이것, 곧 복음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 자신이 하시는 것처럼요. ‘밖으로 나가는 교회’, ‘야전병원’, ‘세상의 변방’, ‘자비를 입었기에 자비로운 이’ 등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모든 말씀은 ‘복음으로의 회귀’를 선언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황님을 이해하고 싶으세요? 그러면 복음을 읽으세요!’ 교황님은 강론하실 때 일상의 작은 일에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을 담으면 그 사랑이 사랑을 낳고, 우리의 외로움을 깨뜨리며, 좋은 관계를 맺게 하고, 우리의 삶을 좋은 삶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위대해진다는 것을 항상 보여주십니다.”
라자로 신부님, 지금 신부님은 전 세계 약 50만 명의 사제를 이끄는 부서의 수장이십니다. 오늘날 사제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다섯 대륙에서 가톨릭 토착화 과정이 단순하지 않고, 이로 인해 종종 국가마다 매우 다른 프로필이 결정되기 때문에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밑바닥에는 예수님께 속한 사제직의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직무의 성사성이 남아 있지만, 그 역할에 대한 감수성과 해석은 매우 다양합니다. 제가 성사성에 대해 말할 때, 배타적인 지위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 부름받은 사람의 삶에서 사랑의 율법이 육화되는 것을 일컫습니다. 그가 세상 어디에서 살고 일하든 착한 사제의 패러다임은 다른 어떤 도덕적 규범이나 교회법적 규범을 넘어서는 법, 곧 사랑의 율법입니다. 사제는 사랑을 향하도록 부름받았으며, 그 자신이 사랑으로 살아갈 때만 효과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인간의 한계에 가로막힌 완벽함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한계를 자비로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복음대로 산다는 것은 도덕적인 율법을 성문화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을 하느님의 무한하고 자비로운 사랑과 만나게 함으로써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제에게도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요?
“제가 말했듯이 상황은 매우 다릅니다. 여러분은 실제로 탈그리스도교화되지는 않았더라도 세속화된 서양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사제가 되는 일과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도처에서 사랑의 율법이 쇠퇴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돼야 하고 또 종종 적용되곤 하는 몇 가지 특정 관행이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의 중심성을 생각합니다. 말씀이 마음을 열어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말씀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 문화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자기중심주의 문화에 흡수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는 사제는 결국 메말라버립니다. 그렇게 종교인의 고용인이 됩니다. 자신의 영을 제대로 기르지 않고는 다른 이의 영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저는 이를 장상의 권위로 말하는 게 아니라 제 개인적 경험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매일 바티칸 정원에 있는 루르드 성모님(성모상)이 계신 곳까지 걸어가면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지금의 제가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동체 생활입니다. 고독하게 살거나 고독을 갈망하는 사제는 제대로 양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공동체 생활이 종종 어렵고, 장애나 서로 간의 오해가 많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어려움이 좋은 사제의 성품을 형성합니다. 곧, 세상이 주는 많은 다른 것들을 잘 이해하는 역량,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역량, 겸손하고 마음을 열 수 있는 역량이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공동체 생활은 또 세상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제는 평신도, 특히 가정들과 친밀해야 하고, 깊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현실적인 감각을 잃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늘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중심주의라는 위험에 대한 진정한 해독제입니다.”
라자로 신부님, 오늘날에도 여전히 널리 퍼져 있는 사제의 존재론적 우월성에 대한 생각을 극복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저는 단순한 사람이고, 사제입니다. 저는 종종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논쟁처럼 보이는 신학적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여러분과 제가 평등하다는 것, 성품을 부여하는 성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세례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중재’에 기초한 우리 같은 종교에서 사제의 모습이 하늘과 땅을 중재하는 제사장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을 여는 것이 직무인 사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 참조). 다른 한편으로 사제의 직무는 굳건한 평신도적 교회로 입증됩니다. 사제는 보편 사제직이 있는 한 직무 사제직이 존재한다는 것,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합니다.”
세례에 따른 보편 사제직과 교회의 성직에 대한 가치 평가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를 의미하기도 하는데요. (...)
“사실 저는 이것이 여전히 예외로 간주된다는 사실에 놀랄 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삶에 잠겨 이제 그분의 제자가 된 이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데서 오는 친교를 체험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거기에는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으며, 자유인도 노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성도 여성도 없습니다. 때때로 교회는 여전히 남성우월주의적 세계라는 인상을 줍니다. 이런 이유로 사회가 종종 우리를 잘못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덕분에,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사목적 여정,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추진력과 선택 덕분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좋은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통치와 책임의 역할에 관한 일부 교회법적 측면을 극복하고 무엇보다도 교회 생활에서 여성의 정상적인 참여에 관한 사목적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하고 타당한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책에서 언급했듯이 교황청 주요 부서 직책에 여성을 기용하고, 여성 독서직과 여성 시종직을 임명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진전이 이뤄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학교 양성팀에 여성을 포함시켰고, 이런 유형의 선택을 장려합니다.”
추기경님의 한국에서의 경험을 이 새로운 임무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요?
“제 마음에 와 닿는 대목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한국에서 천주교가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엄격한 사회계층 구조와 문화 속에서 천주교가 내포하고 있는 자유에 대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한국 사회는 매우 위계적인 사회, 배타적인 계급주의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교의 특징인 형제애는 해방감을 선사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환영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 이유도 젊은이들이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곳 서양에서는 교회가 도덕적으로 선과 악을 가르는 규범적 제도, 곧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구조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초대하시는 새로운 사목은 이러한 자유에 대한 갈망을 회복하고 복음을 진정한 자유의 참된 원천으로 기쁘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쁜 소식은 허가 및 금지 목록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 곧 우리가 더 이상 죽지 않는다는 것을 선포하는 빈무덤입니다.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요? 복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 곧 우리 부활의 첫 열매이신 분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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