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2023년6월4일

나뭇잎숨결 2023. 5. 28. 11:17

 

 




[강론 1] 프란치스코 교황의 삼위일체대축일 강론

[강론2] 조욱현 토마스 신부의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

[3]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y Rublyov, 1360 -1430)의 <삼위일체>, 1411년:함께 보는 교회 미술



[4] 마이클 호튼, 예루살렘에서 니케아까지 교회사에 나타난 삼위일체론의 발전

 

[강론 1] 프란치스코 교황 삼종 기도, 성 베드로 광장, 삼위일체대축일 강론

 

POPE FRANCIS ANGELUS, Saint Peter's Square, Solemnity of the Holy Trinity, 

 

Dear brothers and sisters, buongiorno and blessed Sunday! Today is the Solemnity of the Holy Trinity, and in the Gospel of the celebration Jesus presents the other two divine Persons, the Father and the Holy Spirit. He says of the Spirit: “He will not speak on his own authority, but whatever he hears he will speak, and he will declare to you the things that are to come”. And then, regarding the Father, he says: “All that the Father has is mine” (Jn 16:14-15). We notice that the Holy Spirit speaks, but not of himself: he announces Jesus and reveals the Father. And we also notice that the Father, who possesses everything because he is the origin of all things, gives to the Son everything he possesses: he keeps nothing for himself and he gives himself fully to the Son. Or rather, the Holy Spirit speaks not of himself; he speaks about Jesus, he speaks about others. And the Father does not give himself, he gives the Son. It is open generosity, one open to the other.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복된 주일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며, 이 축일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다른 두 신성한 위격인 성부와 성령을 소개하십니다. 그분은 성령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요한 16, 14-15) 우리는 성령님이 말씀하시지만 자신의 것을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알리고 아버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신 아버지께서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지니지 않으시고 아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주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자신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을 주지 않으시고 아들을 주십니다. 그것은 열린 관대함으로 한분이 다른 분에게 열려있습니다.

 

And now let us look at ourselves, at what we talk about and what we possess. When we speak, we always want to say something good about ourselves, and often, we only speak about ourselves and what we do. How often! “I have done this and that…”, “I had this problem…”. We always speak like this. How different this is from the Holy Spirit, who speaks by announcing others, and the Father the Son! And, how jealous we are of what we possess. How hard it is for us to share what we possess with others, even those who lack the basic necessities! It is easy to talk about it, but difficult to practice it.

 

이제 우리 자신, 우리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말할 때 항상 우리 자신에 대해 좋은 말을 하고 싶어 하고 종종 우리 자신과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자주 그럴까요?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어요....”, “나는 이 문제가 있었어요....”, 우리는 항상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것은 성령님과 매우 다릅니다. 성령님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성부와 성자를 알리심으로써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소유에 대해 질투를 합니다. 우리의 소유를 다른 사람들, 기본적인 필수품도 갖지 않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조차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This is why celebrating the Most Holy Trinity is not so much a theological exercise, but a revolution in our way of life. God, in whom each Person lives for the other in a continual relationship, in continual rapport, not for himself, provokes us to live with others and for others. Open. Today we can ask ourselves if our life reflects the God we believe in: do I, who profess faith in God the Father and the Son and the Holy Spirit, truly believe that I need others in order to live, I need to give myself to others, I need to serve others? Do I affirm this in words or do I affirm it with my life?

 

이것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를 기념하는 것이 신학적인 실천이기보다는 우리 삶의 방식의 혁명인 이유입니다. 지속적인 관계 안에 그리고 지속적인 조화 속에서 각 위격이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위격을 위해 사는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라고 자극하십니다. 마음을 여십시오. 오늘 우리는 자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반영합니까? 성부성자성령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나는 살기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습니까? 나는 이것을 말로 확인합니까? 또는 나의 삶으로 확인합니까?

 

The One and Triune God, dear brothers and sisters, must be manifested in this way – with deeds rather than words. God, who is the author of life, is transmitted not so much through books as through witness of life. He who, as the evangelist John writes, “is love” (1 Jn 4:16), reveals himself through love. Think about the good, generous, gentle people we have met; recalling their way of thinking and acting, we can have a small reflection of God-Love. And what does it mean to love? Not only to wish them well and to be good to them, but first and foremost, at the root, to welcome others, to be open to others, to make room for others, to make space to others. This is what it means to love, at the root.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한 분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은 이렇게 즉 말보다 행동으로 드러나셔야 합니다. 생명의 저자이신 하느님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증거를 통해서 전해지십니다. 성경저자 요한이 “사랑이시”라고 쓴 (요한 1서 4,16) 그분은 사랑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만났던 선하고, 관대하고, 온화한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의 생각하는 방식과 행동하는 방식을 회상하며, 우리는 하느님-사랑의 작은 반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고 그들에게 잘해주길 바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우선 그리고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환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의미입니다.

 

To understand this better, let us think of the names of the divine Persons, which we pronounce every time we make the Sign of the Cross: each name contains the presence of the other. The Father, for example, would not be such without the Son; likewise, the Son cannot be considered alone, but always as the Son of the Father. And the Holy Spirit, in turn, is the Spirit of the Father and the Son. In short, the Trinity teaches us that one can never be without the other. We are not islands, we are in the world to live in God’s image: open, in need of others and in need of helping others. And so, let us ask ourselves this last question: in everyday life, am I too a reflection of the Trinity? Is the sign of the cross I make every day – the Father and the Son and the Holy Spirit – that Sign of the Cross we make every day, a gesture for its own sake, or does it inspire my way of speaking, of encountering, of responding, of judging, of forgiving?

 

이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십자가 성호를 그을 때마다 부르는 신성한 위격의 이름을 생각해봅시다. 각 이름은 다른 위격의 존재를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성부는 성자 없이 성부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자는 홀로는 생각할 수 없고 항상 아버지의 아들 (Son of Father)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입니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섬이 아니며 우리는, 열려있고,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살기 위해 세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이 마지막 질문을 합시다. 매일의 삶에서, 나도 삼위일체의 반영입니까? 매일 긋는 십자 성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우리가 매일 긋는 그 성호가 그 자체를 위한 표시인가요 아니면 그 성호가 나의 말하는 방식, 만남의 방식, 응답하는 방식, 판단하는 방식, 용서하는 방식에 영감을 줍니까?

 

May Our Lady, daughter of the Father, mother of the Son and spouse of the Spirit, help us to welcome and bear witness in life to the mystery of God-Love.

 

성부의 딸이시며 성자의 어머니이시며 성령의 배필이신 성모님, 저희를 도우셔서 하느님-사랑의 신비를 환영하고 삶으로 증거하게 하소서!

 

 

 

 

 

[강론2] 조욱현 토마스 신부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


우리는 지난주일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며 부활시기를 마쳤는데, 이제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신 모든 업적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업적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미하기 위함이다. 즉 아버지께서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해 이루신 구원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동시에 삼위일체의 신비의 영광에 대해 흠숭의 예를 바쳐드리는 것이다.


복음: 요한 16,12-15: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살아 계신 실체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구원적 업적을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삼위의 신비는 우리가 우리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결코 삼위의 신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는 역사적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어떤 신학적 이론으로 추론되거나 그렇게 정립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일깨워주시면서 당신의 구원 사명을 완성해줄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시는 오늘 복음은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15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위격적 다양성이 나타나지만, 단일성을 말하고 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 하나이다. 성령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며, 아버지의 뜻을 아드님은 성령 안에서 이루신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성령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살 때, 성령께서는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주시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알려주실 것이다(13절).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철학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제물이 되신 나자렛 예수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다. 이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지성이 아니라, 사랑을 동반한 신앙이다. 즉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미 진리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할 말이 많지만, 그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12절). 이 말씀을 하실 때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구원업적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14절) 성령이 오셔야 했다. 성령은 유일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더 깊이 참여케 해주시는 분이시고, 그 진리를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인 실재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성령’은 ‘생활케 하는 성령’이 되신다. 그래서 우리 모든 신자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살도록 노력함으로써 자신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심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1절),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보증해주시는(로마 5,5)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로마 5,2)의 은총을 누린다고 말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충실히 이끌어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차지하시어 우리 행위의 내적 원리가 되고자 하신다. 그분이 우리의 내적 원리가 되신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 8,14) 우리의 삶을 모두 성령의 인도에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에 대한 확고한 기다림 속에서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성령 안에 살려 노력하는 삶이 필요하다. 즉 삼위일체의 신비는 추상적인 앎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성령 안에서가 아니면 성령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한다. 하느님은 사랑의 관계로서 하나이신 분이심을 잊지 말고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그분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닫는 것이 될 것이다.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y Rublyov, 1360 -1430)의 대표작 <삼위일체>, 1411년 作

 

[3]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y Rublyov, 1360 -1430)의 대표작 <삼위일체>, 1411년

 

평화방송 – 함께 보는 교회미술

 

 14세기 러시아의 성인이자 수사이며 화가인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yov; 1360-1427)가 1400년에 완성한 삼위일체(The Trinity)는 크기 142 x 114 cm의 목판에 템페라로 그려진 이콘으로 현재 모스크바의 트레챠코프 화랑에 전시되어 있으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를 묘사한 작품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유대교의 영향으로 성화나 성상을 제작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 그러나 점차 주님을 직접 뵈었던 사람들이 죽고 또 여러 이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면서 주님의 복음 말씀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고 그들의 믿음을 더욱더 굳게 하고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그림을 통해서 교리나 성서를 가르치기 위해서 성화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습은 그분이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묘사가 가능했지만 하느님을 묘사함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뵌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성서에도 그분을 모습을 보게 되면 죽으리라는 말씀이 있었기에 하느님을 눈으로 보는 어떤 형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다만 삼각형, 하늘에서 굽어보시는 눈 또는 손으로만 묘사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구약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세 천사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가시적인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고 이후로 이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형상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 널리 퍼져있는 하얗게 수염이 늘어진 할아버지 형상으로 하느님을 그리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초기 교회에서는 상수리 나무 아래 나타나신 삼위일체의 모습을 다양하게 묘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1400년경에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그린 위 그림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표준 모델로 규정하였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작품은 중세 러시아 이콘의 커다란 변혁을 의미하였고 그의 작품에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생활에 대한 동경, 그리고 기나긴 폭풍우 후에 평온한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꿈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산 그 당시 러시아는 몽골의 침략으로 피폐해져 많은 이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았기 때문이다. 몽골이 군대가 물러가고 러시아 전역에서의 정의와 자유의 확립이라는 그의 꿈이 이 작품에 깊이 스며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남긴 작품들은 러시아 민족주의 문화적 통일과 자각에 큰 도움을 주어 그 작품이 소장된 수도원과 성당들은 중세 러시아 화가들의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이 이콘은 고요함을 느끼게 해준다. 복잡하고 번잡함이 없이 조용히 삼위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듯 하다. 단순한 감상용이 아닌 그 분들의 친밀한 대화에 동참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듯하다. 화면을 보면 맨 왼쪽이 성부이고 가운데가 성자, 오른쪽이 성령이다. 그런데 세 분의 옷에서 푸른 색이 공통적으로 눈에 띤다. 이 푸른색은 하늘나라을 상징하는 색으로 세 분 모두 하나의 하느님으로서 천주성을 나타내며 각기 들고 있는 지팡이도 역시 한 분이시며 같은 권한을 가진 하느님이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옷에서 보면 붉은색을 공통적으로 또한 볼 수 있다. 이는 고대로부터 황제를 나타내는 황제의 색깔로서 왕권을 상징하고 있다. 성령은 녹색 겉 옷을 입고 있는데 이는 생명과 희망을 나타내주고 있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령강림대축일에 붉은 색 제의를 입는데 러시아에서는 성당에 푸른 가지로 장식하고 녹색 제의를 입는 것이 특징이다.

 

성부는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 고향으로서 성부 위에는 집을 묘사했고, 성자의 뒤에는 아브라함의 집 앞에 서있던 상수리나무를 묘사했으며 장차 주님이 달리실 십자가의 나무를 예표하고 있다. 성령 뒤에는 바위가 늘 묘사되는데 이 바위는 성령은 우리 신앙의 굳건한 토대이심을 알려주고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무릎 선을 연결해보면 하나의 커다란 잔의 형상을 나타내주고 있는데 동방교회의 이콘에 보면 잔의 형상 속에 예수님께서 서 계신 모습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성자께서 구원 희생제사의 제물이 되셨음을 나타내 준다. 그림의 식탁 위에는 잔의 모양의 그릇 속에 구약의 희생 제사의 제물인 황소의 머리가 놓여져 있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강복하고 계시고, 성자는 천주 제2 위이심을 손으로 형상화하고 계시며, 성령께서는 식탁 아래에 열려져 있는 공간 즉 세상을 향해 강복하고 계신다.

 

 

"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이 이콘을 그린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자기가 묵상한 것을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불안한 가운데 살면서도 늘 마음을 하느님 안에 모으고 사는 길을 동료 수도자들에게 제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거룩한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볼수록 장식품이나 교리의 보조해설을 위해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 머물기 위한 거룩한 장소로 그렸다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 이콘 앞에 앉아 기도하다 보면, 우리도 거룩한 세 천사가 나누고 있는 친밀한 대화에 동참하라고, 식탁에 더불어 앉으라고 부드럽게 초대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자께서 몸을 기울이신 성부의 움직임과 성부께로 몸을 기울이신 성자와 성령 두 분의 움직임은 통일된 움직임을 이루고 있으며 기도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마음이 드높아지고 든든해집니다." (헨리 나웬신부의 <삼위일체>에 관한 묵상 중에서)

 

 

 

 

[4] 예루살렘에서 니케아까지 교회사에 나타난 삼위일체론의 발전

 

마이클 호튼

 

 

 

초기의 기독교회는 복음을 예루살렘과 유대에 전하는 사명을 맡은 유대인 분파였다. 그러나 곧 기독교회는 이방세계로 들어갔는데, 일차적으로 로마제국에 널리 퍼져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하여 들어갔다. 이런 과정에서 복음은 다양한 반대와 도전에 직면하였다. 대중적인 수준에서는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그들의 만신전에 새로운 신을 추가하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다신교를 반대했다. 그런데 기독교가 회심자들을 얻고 또한 문화 엘리트들의 비판을 받으면서 기독교는 철학적 도전에 더욱 직면하게 되었다.

 

불신자들의 전제와 타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옹호할 것인가? 기독교의 사명과 관련된 이런 반복되는 질문은 고대 교회의 생각을 압박했다. 삼위일체 교리는 결코 기독교과 이교도의 사상을 합성하여 나온 것은 아니다. 반대로 삼위일체 이론의 초기 선구자들은 자신들이 계승한 언어와 철학적 개념을 매우 능숙하게 이용하여 계시를 해석하였다.

 

 

초기 삼위일체 논쟁

 

수세기 동안 그리스적 사고는 “하나와 여럿”이라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단일성과 복수성을 동시에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질문이다. 실체는 하나의 본질로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여러 다양한 것들로 이루어진 것인가? 고대 세계에서 (파메니데스, 스토익스 심지어 플라톤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같은 대부분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실체는 하나의 순수한 본질 혹은 존재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조금씩 다르게 경험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단일함을 인식하기보다는, 하나의 순수한 원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여러 복사물이나 그림자들의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일성과 복수성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실재는 진리와 순수 그리고 단일성으로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복수성과 다양성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단일성이 우선적으로 주장되고 선호된 반면에 복수성은 다만 인정되고 용인되었다.

 

이러한 지적세계에서 살았던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숙고하기 시작했다. 초기 기독교 사상가중 한사람인 오리겐(주후 185-254)은 알렉산드리아에 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성경을 번역하면서 성경의 교훈을 플라톤적 범주로 전환시켰다.(위에서 언급한 그리스 세계관을 참고하라) 오리겐은 성경을 플라톤과 결합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선호하는 “단일성”이란 용어를 선호하므로 포기할 수 없었기에, 오리겐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에 종속된 피조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하느님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복수성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리겐의 이런 생각은 아들은 유일하시고 한분이신 아버지보다 못한 신적 존재라는 말로 들린다.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장로로 일했던 아리우스는 한 발자국 더나가서 아들은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길 셋이 존재하지만 그 셋이 동등한 영광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오직 성부만이 하나님이고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세미 아리안주의는 중도노선을 택하여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 본질은 아니고 유사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당시에 동방교회는 호모우시오스(동일 본질의)와 호모이우시오스(유사 본질의)라는 동사의 차이에 흥미를 가졌다.

 

사벨리우스는 하느님의 단일성 그리고 아들과 성령의 신성을 보존하는 좀 다른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는 주장하길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하나의 신적 인격이 가면들을 쓴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은 어떤 복수성도 없는 한분이시지만 무대 위의 배우처럼 어떤 때는 아버지로, 어떤 때는 아들로 또 어떤 때는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배우가 실제 세 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3세기 로마의 장로는(사벨리우스) 주후 220년에 파문되었지만, 일반적으로 양태론으로 알려진 사벨리안주의는 교회사를 통하여 거듭되는 도전으로 남아있다.

 

요약하자면 이런 모든 초기의 도전들은 순수한 단일 존재로부터 떨어져 나오거나 갈라져 나오지 않은 복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적 사고 때문이었다. 셋(복수성)이 하느님의 본질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개념적 도구가 없었던 것이 문제의 한 부분이었다.

 

 

용어들의 발견

 

이런 관점에 대한 실제적인 돌파구가 4세기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에게서 나타났는데 그들은 니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그리고 가이사랴의 바실이었다. “본체”과 “개체”라는 혼란을 주는 그리스 용어 대신에 그들은 한 분 하나님의 단일성을 확인하면서도 삼위의 인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하이포스타시스( 고유한 특성을 가진 개별적 실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단일한 “본질”을 가지신 동시에 고유한 특성을 가진 세 개별적 인격 혹은 실체임을 주장하였다. 단일성과 복수성, 즉 하나님은 한 본질을 가진 세 인격이시라는 것이다. 복수성은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라 인격이라는 것이다.

 

동방교회의 이 신학자들은 주장하길, 세 인격의 각각은 단일한 신적 본질을 공유하며(오리겐과 아리우스의 존재론적 종속주의를 배제하여),아들과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인격적 존재를 수여받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단일성과 복수성은 동등하게 인정하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한 분 하나님을 인식하자마자, 즉시 세분의 영광의 빛을 보게 되며 세 분을 구별하자마자 즉시 한 분 하나님에게로 이끌린다.” 고 말했다.

 

세 인격들 간의 상호관계는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세 인격들 각각의 상호내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상호내주가 요한복음에서 강조되었는데 거기서 아들은 아버지 품속에 혹은 아버지 옆에 계신다.(1:18)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 나아오지 못하며 사실 아들을 아는 것은 곧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14:6-7)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느냐?” (14:10) 예수님은 성령이 자신을 영화롭게 한다고 선포하면서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니 그러므로 내가 말하길 그가 나의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6:14-15) 그리고 기도 중에 말씀하시길,”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17:5) 예수님은 자기를 믿을 모든 자들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다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17:21,23)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이 논리적 모순이라는 비판에 반대하지만 그 반대를 표현할 정확한 어휘를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철학적으로는 대단히 복잡하지만,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이 사용한 용어는 교회의 신학을 말할 수 없이 풍요롭게 만들었다.

 

 

동서방 교회의 긴장

 

동서 교회들 간의 차이점은 종종 과장되어왔다. 서방교회에서 처음에 일어난 그리스 용어에 대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동서방 교회의 교부들은 모두 본질이 하나이고 인격이 셋이라는 삼위일체 형식에 대해 일치하였다. 사실 이런 표현을 새로 만들어낸 사람은 라틴 교부인 터툴리안이었다.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뤄진 (나중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성문화된) 보편교회적인 합의는 괄목할만한 것이었고 오늘날까지 교회의 고백으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차이점들로 인하여 결국 서방교회가 일방적으로 니케아 신조를 수정했을 때 1054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원래의 라틴어로는 “성령이 성부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었는데, 로마교회가 “또한 아들로부터”(에 필리오)라는 구절을 덧붙였다. 그래서 이것을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부른다. 이 일로 동방교회는 서방교회가 삼위일체 대신에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려 한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방교회가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은 스페인에서 다시 일어나려는 아리안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도(1215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은 해결되지 못했다.

 

 

가톨릭의 합의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종교개혁의 공헌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보편교회의 신조들과 가톨릭교회의 합의된 교리를 확인한 것 외에 종교개혁자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기여한 것은 거의 없다고 왜곡한다. 그러나 존 칼빈은 동서방 교회의 이 오랜 논쟁에 통찰력 있게 기여하였다. 16세기에는 많은 고대의 이단들이(예를 들면, 신 아리안주의, 나중에 유니테리언주의로 불린 소시안주의) 다시 등장했기 때문에 칼빈은 자신의 목회에서 이에 대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칼빈은 주장하길,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하면서,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헛되고 공허한 생각이 머리에 떠돌 뿐이며 결국 참된 하나님이 배제될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한편으로는 종속론의 오류를 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태론의 오류를 피하려고 예민하게 조심하면서 하나님의 단일성과 동등성을 확증하였다. 그러면서 칼빈은 각 인격이 엄격하게 동일한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라는 서방교회의 의견을 강조하면서 또한 각 인격이 서로 구별되며 이 인격성은 단순한 관계적 개념이 아니라 구별된 실체, 즉 고유한 인격적 특성을 가진 구별된 존재라는 동방교회의 입장도 강조했다. 칼빈은 말하길, 각 인격은 각각 고유한 특질을 가진 완전한 신성으로 이해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질적이나 양적인 차이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본질의 단일성 자체는 인격성이 아니고 말하자면 제4의 요소인 삼위일체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그들이 하시는 일을 떠나서는 결코 신적 본질에 직면하지 않는다.

 

나아가, 각 인격이 동일한 방법과 동일한 정도로 공유하는 한 본질 외에, 각 인격은 자신을 다른 인격과 구별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어거스틴 이후 서방교회가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는데 부족한 점인 것 같다. 칼빈은, 각 인격들을 구별하는 인격적 특성과 함께 세 인격들이 동일하게 공유하는 본질적 특성에 동일한 비중을 두는 이런 관점으로 고대 (동서방교회)의 서로 다소간 충돌하는 의견들이 조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로부터 신적 속성을 받지는 않지만 인격적 존재를 받는다. 성부로부터 성자는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영원히 나오신다. 어떤 경우에도 본질은 나거나 나오지 않고 단지 인격이 그러하다. 성자는 아들이라 불리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신적 본질을 가진 실체적 존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외적인 사역으로 보아서도 분명하다.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난 (삼위)의 구별을 무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말하자면, 성부는 모든 사역의 시작이시며, 만물의 원천이시고, 아들은 지혜와 모략 그리고 만물의 질서 잡힌 성향이시며, 성령은 그런 모든 사역

의 권능과 효력이시다.

 

이런 식으로, 칼빈은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말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예를 들면 니사의 그레고리는 말하길, 하나님의 모든 외적인 사역은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들을 통하여 나타나고 성령 안에서 완성된다고 하였다.

 

 

결론 삼위일체 교리의 실제적인 유익

 

이 주제에 관한 “모던 리포메이션” 의 다른 논문들은 삼위일체 교리는 실제적인 함의를 풍성하게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옹호한다. 그러나 이전 역사의 기술적인 복잡함을 고려하면 이런 적절한 결론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시대에나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과 실천이 삼위일체 신앙으로 전적으로 정의되고 집중되어 있는가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단지 우리가 동의하기 어려운 정통 교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구속 역사의 한 가운데를 건너서 삼위간의 영원한 협약으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성자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 경배하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탄식하며 찬송한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으며 축복을 받는다. 성령의 권능 안에서 성자에 대한 성부의 말씀으로 쓸모없는 황무지가 아름다운 정원으로 꽃피우며 세상에 퍼져나간다.

 

우리는 단일 인격의 하나님이 아닌 성부의 자녀로 입양되었으며, 중보자이신 성자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었고 성령으로 그 성자와 그의 교회에 연합되었다. 로마서 11장 36절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바울의 송영은 이제 새로운 중요성을 가진다. 이 말이 의미는 모든 좋은 선물이 성부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성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부 못지않게 성자와 성령도 창조주이며 섭리주이시다. 성자 못지않게 성부와 성령도 우리의 구주이시며 주이시다. 성부와 성자 못지않게 성령은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