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3).
비오 12세의 회칙 "물을 길으리라 HAURIETIS AQUAS"
1956. 5. 15.
비오 12세의 예수 성심 회칙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3).
존경하는 형제들에게
건안을 빌며 사도적 축복을 보냅니다.
머리말
1. 물을 길으리라(Haurietis Aquas).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가 매우 의미심장한 표상을 사용하여 앞으로 그리스도교 시대가 가져올 다양하고 풍성한 하느님의 선물을 예언한 것입니다. 본인의 선임자 비오 9세가 가톨릭 세계 전체의 탄원을 기꺼이 받아들여 보편교회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축일을 거행하도록 명한 이후 100년을 돌아 볼 때, 예언자 이사야의 이 말씀이 자연스럽게 본인의 마음에 떠오릅니다.
교회에 주신 고귀한 선물
2.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신자들의 영혼에 여러 가지 천상 선물을 쏟아 부어줍니다. 신지들을 정화시켜 주며, 그들에게 천상의 힘을 주고, 모든 덕에 이르고자 하는 원의를 불러일으켜 주는 이 천상 선물들을 낱낱이 열거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본인은 “온갖 훌륭한 은혜와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빛들을 만드신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라고 한 야고보 사도의 지혜로운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전세계적으로 날로 더해 가는 열심으로 꽃피고 있는 이 신심 안에서, 육화된 말씀이신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 천상 아버지와 인류 사이의 은총과 진리의 유일한 중개자로서 최근 수세기 동안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던 당신의 신비적 배필인 교회에 너무도 값진 선물을 내려주셨음을 보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3. 이렇듯 헤아릴 수 없이 고귀한 선물을 누리고 있는 교회는 교회의 창립자이신 하느님께 더욱 열절한 사랑을 보여드릴 수 있으며, 또한 성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그리스도 친히 하신 말씀의 초대에 더욱 풍부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응할 수 있습니다. “그 명절의 고비가 되는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서 이렇게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말씀이었다.”
4.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옆구리에서 흘러나올 “생명수”의 샘을 약속하신 위의 말씀을 메시아의 나라를 예언하는 이사야와 에제키엘, 즈가리야의 거룩한 예언의 말들 그리고 모세가 지팡이로 치자 거기에서 기적적으로 물이 터져 나왔다는 상징적인 바위와 어렵지 않게 연관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참된 성격
5. 하느님의 사랑은 먼저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의 품안에 계시는 성부와 성자의 위격적 사랑이신 성령에게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사도는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부어지는 사랑을 바로 이 사랑의 성령께 돌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매우 적절하게 반향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6.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안에 타올라야 할 하느님의 사랑과 명백히 사랑 그 자체이신 성령 사이에 매우 긴밀한 유대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이 유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께 마땅히 드려야 할 그 공경의 내밀한 성격을 우리 모두에게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의 특별한 성격을 고려해 볼 때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차원 높은 신앙 행위임이 분명합니다. 그 신심은 우리에게 구세주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고 봉헌하고자 하는 완전하고 철저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구세주의 상처 입은 성심은 예수 성심의 살아있는 상징이며 표상입니다. 그러나 좀더 높은 차원에서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주 하느님께 보답할 가장 강력한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7. 실상, 인간의 마음은 사랑의 충동에 의해서만 절대자의 법칙에 완전하고 철저하게 복종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사랑의 힘이 우리를 하느님의 의지에 가까이 가게 해 이를테면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의지와 완전히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서의 말씀과 같습니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제 1 부 구약성서에 나타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토대와 예시
가. 이 신심에 관한 잘못된 견해
1) 교회는 이 신심의 수호자입니다
8. 교회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언제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높이 평가해 왔으며, 세계 곳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방법으로 이 신심의 전파를 장려해 왔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이른바 ‘자연주의’와 ‘감상주의’라는 비난에서 이 신심을 보호하고자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과거에도 또 우리 시대에도 지극히 고귀한 이 신심은 일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영예와 존중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가톨릭 신앙과 성덕 추구의 열의에 차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2) 현대의 일부 가톨릭 신자들의 오류
9. “네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은밀한 계획 안에서 구세주 하느님께서 당신 교회에 맡기신 신앙과 신심의 거룩한 보화의 수호자요 관리자로 선출된 본인은 의무감으로써 그들 모두에게 이 말씀을 충고로 드립니다.
10. 그 이유는,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요컨대 사람들의 오류와 무시를 극복하고 그분의 신비체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해도, 우리 자녀들 가운데는 아직도 그릇된 편견에 사로잡혀 이러한 신심을 이 시대의 교회와 인류의 절실한 영성적 요구에 해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승인하고 장려하지만 명령하지는 않는 다른 여러 개별적 형태의 신심과 이 신심의 본래 성격을 혼동하여, 이 역시 각자가 자기 성향에 따라 받아들여도 되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부수적인 신심 행위의 일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11. 또 한편으로, 임금이신 하느님의 군대에서 싸우는 사람들과 가툴릭의 진리를 수호하고 가르치고 전파하며 그리스도교의 사회교리를 주입시키고 또한 오늘날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그러한 신앙 행위와 사업들을 장려하는 일에 주로 자신들의 힘과 재원과 시간을 쏟아 부어 일한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신심이 부담스럽거나 거의 또는 전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12. 또한 이 신심이 개인의 사생활과 가정생활에서 그리스도교 윤리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쇄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마음과 영혼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닌 감각적인 신심 형태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신심이 여성들의 성향에는 어울릴지라도 교육받은 남자들에게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13.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신심을 지나친 참회나 속죄로 여기거나 아무런 의적인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이 ‘소극적’ 이라고 부르는 다른 미덕들과 같은 것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신심이 현대에 신앙심을 다시 불붙게 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신심은 개방적이고 활기차게 행동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가톨릭 신앙의 승리와 그리스도교 윤리를 강력히 수호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윤리는, 모든 이가 알고 있듯이, 어떠한 형태의 종교에도 관심이 없으며 진리와 허위 사이의 모든 구별을 벗어 던지고 생각으로나 실제로나 물질주의적 무신론 또는 이른바 세속주의의 가장 추악한 타락까지도 받아들이는 자들의 궤변에 쉽사리 더럽혀집니다.
나. 이 신심에 대한 로마 교황들의 존중
1) 위와 같은 견해들은 레오 13세, 비오 11세 그리고 본인의 가르침과 어긋납니다
14.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위와 같은 견해들은 본인의 선임자들이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승인하면서 이 진리의 좌(座)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한 가르침들과 전적으로 어긋난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습니까? 영원히 기억될 본인의 선임자 레오 13세가 “가장 훌륭한 신심 형태”라고 선포한 그 신심을 우리 시대에는 쓸모 없고 적합하지 않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레오 13세는 오늘날에도 개인과 전인류에게 분명 더욱 폭넓고 심각한 고통과 불안을 안겨주는 바로 그 악들을 치유하는 강력한 치료제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 안에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모든 이들에게 권하는 이 신심은 모든 이들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조언과 격려를 덧붙였습니다. “…그처럼 오랫동안 뿌리박혀 있던 악의 세력들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도움을 청하려는 강한 충동을 받습니다. 오직 그분의 힘으로서만 그 모든 악들을 몰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말고 누가 그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께 의지해야 합니다.”
15. 본인의 선임자 비오 11세는 이 신심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육성하는 데 가장 홀륭하고 적합한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비오 11세는 한 회칙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하나의 신심 안에 우리 신앙 전체의 요약과 더 나아가 더욱 완전한 삶을 위한 길잡이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진정 그것은 주 그리스도를 깊이 알도록 우리 마음을 더욱 확실하게 이끌어주며, 그분을 더욱 열절히 사랑하고 더욱 완벽하게 닮도록 우리 가슴을 더욱 효과적으로 움직여줍니다.
16. 이러한 기본 진리들은 본인의 선임자들 못지않게 저에게도 명백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교황직을 받아들였을 때 본인은 본인의 기도와 열망대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증가되고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승리의 전진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 신심에서 온 교회를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익한 결과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본인은 이를 본인의 첫 번째 회칙에서 기쁘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2) 우리 시대에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에서 얻는 유익한 결과들
17.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위로로 가득 찼던 본인의 재임 기간 동안 그 결과들은 양적으로나 힘에서나 아름다움에서 감소되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였습니다. 실로 다행스럽게도, 이 신심에 다시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될 여러 가지 계획들이 추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과 자선사업의 증진을 위한 문화 단체의 결성,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전반적 주제와 관련한 참된 역사적, 수덕적, 신비적 교리를 담은 출판물의 간행, 경건한 보속 사업들, 특히 ‘기도의 사도직’이 가져온 지극히 열렬한 신앙심의 표현들이 그것입니다. ‘기도의 사도직’ 의 후원과 지도 아래 이루어지는 지역 모임들-가정, 대학, 단체-과 때로는 국가들도 예수 성심께 봉헌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본인은 이 주제에 관한 서한이나 개별 연설을 통하여 또는 라디오 담화를 통하여 여러 기회에 아버지로서 축하를 보냈습니다.
18. 치유의 샘물, 곧 구세주의 성심에서 나오는 하느님 사랑의 천상 선물들이 성령의 고무와 활동으로 가톨릭교회의 수많은 자녀들에게 전파되어 풍요로운 결실을 맺고 있음을 보면서 본인은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에게 그 모든 좋은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께 본인과 함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와 찬미를 드리자고 아버지로서 애정을 가지고 권고합니다. 이방인들의 사도가 하신 다음 말씀으로 본인의 말을 대신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3) 신자들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의 토대를 공부해야 합니다
19. 영원하신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를 드렸으니. 이제 본인은 여러분과 교회의 사랑하는 모든 자녀에게 촉구하고 싶습니다. 성서와,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의 확고한 토대가 되는 그 원리들을 좀더 진지하게 고찰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의 빛의 도움으로 이 신심의 근본적이고 고귀한 성격을 깊이 연구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이 신심의 탁윌성과, 이 신심을 통하여 얻게 되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천상 은총의 풍요로움을 올바로 완전히 깨닫게 되리라고 본인은 확신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신심에서 생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익함들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예수 성심 축일이 보편교회로 확대되어 거행되어 온 지 100주년이 되는 이 해를 뜻있게 경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심의 주요 대상인 하느님의 사랑
1) 성심께 대한 신심의 중요성은 성서와 성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 신자들이 마음에 유익한 양식을 얻고 거기서 자양분을 섭취하여 더욱 쉽게 이 신심의 참된 성격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고 그 풍성한 열매들을 소유할 수 있도록 본인은 (우리가 결코 온전히 깨달을 수 없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제시하고 있는 신,구약 성서의 이에 관한 구절들을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교회 교부들과 학자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주석들의 주요 내용에 대해서도 언급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참된 빛 안에서, 구세주 하느님의 성심께 바쳐진 신심의 형태와 모든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 곧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의 사랑에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할 공경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관계를 밝혀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는, 성서와 성전의 가르침에 비추어 이 탁월한 형태의 신심의 근거가 되는 주요 요소들을 밝히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쉽게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불을 길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하여 신자들은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교회의 전례에서 그리고 교회의 내외적 생활과 활동에서 갖는 특별한 중요성의 비중을 더욱 온전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교회 주교들이 바라는 대로, 저마다 자신의 행동에 건전한 개혁을 가져올 수 있는 구원의 결실들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2) 성심 공경의 이유
21. 구약과 신약성서에서 선택한 본문들이 이 신심에 관해 전해주는 가르침을 모든 사람들이 더욱 정확히 이해하려면, 교회가 왜 구세주 하느님의 성심에 최대의 공경을 드리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거룩한 지체들에도 적용되는 것으로서, 인성 가운데 가장 고귀한 부분인 그분의 성심은 하느님 말씀의 위격에 실체적으로(hypostatice) 결합되어 있다는 원칙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육화된 하느님 아들의 위격에 영광을 드리고자 바치는 공경과 흠숭을 성심께도 바쳐야 할 것입니다. 본인이 여기서 하는 말은 에페소공의회와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에서 엄숙히 규정되었던 신조입니다.
22. 구세주 하느님의 성심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는 또 다른 이유이자 성심께 최고의 공경을 드릴 것을 특별히 요구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분의 성심이야말로 그분 몸의 다른 어떤 지체들보다 더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자연스런 표상이며 상징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본인의 존경하올 선임자 레오 13세가 지적한 것처럼, “예수 성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상징과 명백한 표상이 있으며, 그 사랑은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향하게 합니다.”
3) 구약성서에는 성심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없습니다
23. 물론 성서는 육화된 말씀의 불타는 사랑의 상징인 그분 육체의 심장에 바쳐지는 흠숭과 사랑의 특별한 공경에 대하여 명백히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도, 또 이 신심의 주된 대상인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어떤 식으로든 의심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신,구약 성서에서 우리에게 강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표상들로 선포되고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이 표상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심을 예언하고 있는 성서 대목들 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 곧 구세주 하느님의 지극히 거룩하고 흠숭하올 성심의 가장 고귀한 상징이며 증거의 표시로 여길 수 있습니다.
4) 하느님과 유다인들 사이의 계약은 사랑에 토대를 둔 것이었습니다
24. 오랜 옛날에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진리를 담고 있는 구약성서의 구절들을 길게 인용하는 것이 본인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어지고 평화의 제물로 거룩해진 계약은 -그 계약의 첫 번째 율법은 두 개의 돌판에 새겨져 모세를 통해 알려지고 예언자들을 통해 해석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절대적 지배와 인간의 복종 의무라는 강력한 토대 위에 세워진 협약일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더욱 고귀한 배려 위에 토대를 두고 강화된 협약이었음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 복종하는 궁극적 이유는 시나이산 꼭대기에서 번개와 천둥소리로 그들의 영혼을 떨게 하였던 하느님의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 품고 있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5) 모세,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의 예
25. 성 토마스 데 아퀴노가 선택된 백성의 “원로들”이라고 적절히 일컫고 있는 모세와 예언자들은 율법 전체가 바로 이 사랑의 계명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였으며 또한 하느님과 그분 백성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모든 상황과 관계를 하느님의 절대적 지배에서 파생되는 비유나 두려움으로 말미암은 복종의 의무에서 이끌어낸 거친 비유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와 자식 사이 또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자연스러운 사랑에서 이끌어낸 은유법을 사용하여 묘사했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부른 그 유명한 노래에서 그는 그 일이 하느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다음과 같은 상징적이고 감동적인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독수리(하느님)가 파닥거리며 떨어지는 새끼(이스라엘)를 향해 날아 내려와, 날개를 펼쳐 받아 올리고 그 죽지로 업어 나르듯…”
26. 그러나 거룩한 예언자들 가운데에서, 언제나 당신 백성을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을 호세아만큼 명확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표현한 예언자는 없을 것입니다. 간결한 언어의 극치로 소(小)예언자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이 예언자의 글에서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백성에 대한 당신의 사랑, 정의와 거룩한 근심이 결합된 그 사랑이 마치 자비롭고 애정 넘치는 아버지의 사랑이나 명예를 손상 당한 남편의 사랑과 같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사랑은 그것을 저버린 사람들의 배신 행위나 끔찍한 죄악 앞에서도 감소되거나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죄를 범한 자들에게 공정한 벌을 내리는 경우에도 그것은 그들을 거부하거나 내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부정한 배우자와 배은망덕한 자식들을 회개와 정화로 이끌어 더욱 강해지고 새로워진 사랑의 끈으로 그들을 다시 당신 사랑에 묶고자 하시려는 것입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다시 에집트에서 불러내었다. … 걸음마를 가르쳐주고 팔에 안아 키워주고 죽을 것을 살려주었지만. 에브라임은 나를 몰라본다.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 나는 그 병든 마음을 고쳐주고 사랑하여 주리라. 이제 내 노여움은 다 풀렸다. 내가 이스라엘 위에 이슬처럼 내리면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버드나무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27.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과 선택된 백성의 대화를 문답식으로 소개하면서 이와 비슷한 감정들을 표명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너 시온은 말하였었지.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 하리라.”
28. 이에 못지않게 감동적인 것이 아가서 저자의 말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선택된 백성을 서로 결합시키는 상호 사랑의 유대를 부부애에 비교하면서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가씨들 가운데서, 그대, 내 사랑은 가시덤불 속에 핀 나리꽃이라오. …임은 나의 것, 나는 임의 것, 임은 나리꽃밭에서 양을 치시네. …가슴에 달고 있는 인장처럼, 팔에 매고 다니는 인장처럼 이 몸에 달고다녀 다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시샘은 저승처럼 극성스러운 것, 어떤 불길이 그보다 거세리요?”
29. 죄에 죄를 거듭 짓는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지극히 온유하고 관대하며 오래 참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그들을 완전히 내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랑은 강하고 고귀한 듯 보이지만 실은 인류에게 약속된 구세주의 지극히 사랑하올 성심에서 나오는 불타는 사랑의 전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이에게로 열린 우리에 대한 구세주의 사랑의 전형이며 새로운 계약의 기초가 될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30. 성부의 외아들이시며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셨던” 육화된 말씀이신 그분께서 온갖 죄와 불행에 짓눌린 인간들에게 오셨을 때, 메마른 땅을 적셔 비옥하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바꾸어줄 “생명수의 샘”을 인류에게 열어주실 수 있었던 분은 본질적으로 신격(神格)에 결합된 인성을 지니신 그분뿐이셨습니다.
31. 하느님의 자비롭고 영원한 사랑의 결과로 이러한 지극히 놀라운 효력이 발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예레미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어느 정도 예고하는 듯합니다. “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변함없는 자비를 베풀었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주님인 내가 분명히 일러둔다. …그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
제 2 부 신약성서와 전승을 통하여 본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
가. 복음서의 구원 신비에 나타난 하느님 사랑
1) 구약성서에 대한 신약성서의 우위성
32.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계약에 대한 확실하고 명백한 설명이 발견되는 곳은 복음서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에서 모세가 맺었던 그 계약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언한 계약의 상징이며 표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새로운 계약은 하느님 은총의 근원인 육화된 말씀의 작용으로 이루어지고 효력을 갖게 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탁월하고 확고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계약은 과거처럼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그분의 지극히 고귀한 피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성이 없는 무죄한 동물들은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분을 미리 예시한 것입니다.
33. 그리스도의 계약은, 구약보다 훨씬 더 명백하게, 예속이나 두려움에 토대를 둔 협약이 아니라 아버지와 자식들 간에 존재하는 친교로 맺어진 협약으로, 또한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가 더욱 아낌없이 부어져 풍요로워지고 강화된 협약으로 나타납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습니다.”
34.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랑하셨고 또한 만찬때 그분의 가슴에 기대었던” 사도가 위와 같은 말을 통하여 우리를 육화된 말씀의 무한한 사랑의 심오한 신비로 안내하였으니, 잠시라도 이 신비를 즐겨 묵상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구원에 유익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음에서 나오는 빛, 신비 자체를 더욱 명확하게 해주는 그 빛을 받아, 이방인들의 사도가 에페소인들에게 쓴 펀지에서 밝히는 희망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려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2) 구원 신비의 이중적 사랑
35. 하느님의 구원 신비는 무엇보다도 본질상 사랑의 신비, 곧 천상 아버지께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과 순종의 정신으로 바쳐진 십자가의 희생은 인류의 죄에 합당하게 성부께 지극히 풍부하고 무한한 보속을 드립니다. “사랑과 순종으로 참고 견디신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전인류의 배반을 보상하는 데 요구되는 것 이상을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36. 그것은 또한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와 구세주 하느님의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에 합당한 보속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귀한 피로 우리를 위해 쌓아주신 무한한 공로의 보화를 통하여 처음에는 지상 낙원에서 아담의 타락으로 그후에는 선택된 백성의 무수한 죄로 깨어져 버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의 계약을 완전히 희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37. 우리의 합법적이고 완전한 중개자이신 우리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열렬한 사랑으로 인류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하느님의 권리 사이에 완전한 조화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 구원의 숭고한 신비를 구성하는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의 자비 사이에 놀라운 조화가 존재하도록 해주신 분입니다. 이에 관하여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다음과 같이 지혜로운 해석을 합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구원되어야 하는 것은 그분의 자비와 정의에 모두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분의 정의에 일치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수난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셨으므로 인간이 그리스도의 정의에 의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에 일치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인간 본성의 죄를 보속할 수 없었으므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인간에게 주셔서 인간을 위하여 그 죄를 대속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보속 없이 죄를 용서해 주셨을 경우보다 더 큰 자비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
38. 그러나 유한한 인간에게 허용되는 한에서 우리가 천상 아버지께 대한 그리고 죄로 얼룩진 인간들에 대한 육화된 말씀의 감춰진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모든 성인들과 더불어 진실로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고유한 영적인 사랑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분”이시므로 하느님께서 우리 선조들과 히브리인들을 사랑하셨던 그 사랑은 의심할 바 없이 영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이나 예언자들의 글이나 아가서에서 보는 인간적이고 친밀하고 부성적인 사랑의 표현들은 인류를 끊임없이 지탱시켜 주셨던 하느님의 전적으로 영적인 참된 사랑의 표시이며 상징들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의 사랑을 보여주는 복음서와 사도들의 펀지 그리고 요한 묵시록의 구절들에서 숨쉬는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의 감정들까지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사실을 의심없이 받아들입니다.
39.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교 초세기에 일부 이단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실체가 없는 가짜 몸을 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 사도는 준엄한 말로 그들을 단죄한 바 있습니다.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속이는 자이고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그분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동정 마리아의 지극히 정결한 태중에서 잉태되어 참으로 인성을 갖춘 완전무결한 개체로서 당신의 신격에 결합되셨던 것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40.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이 그분 자신과 결합된 인성에는 결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취하신 인성은 영적인 것이나 육적인 것과 관련해서 상태가 덜해지거나 의미가 달라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곧 그분의 인성은 지성과 의지, 기타 내적 외적 지각 능력 그리고 모든 욕구와 자연적 감각 본능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로마 교황들과 모든 공의회에서 엄숙하게 규정하고 인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당신 자신의 것에서 하자 없고 무결하시며 우리의 것에서 하자 없고 무결하십니다.” “당신의 신성에서 완벽하시고 마찬가지로 당신의 인성에서 완벽하십니다.” “완전하신 하느님은 인간이시며, 완전한 인간은 하느님이십니다.”
5) 고통을 겪을 수 있는 심장을 지니시고……
41. 예수 그리스도께서 틀림없는 사람의 몸을 받으셨고 육체의 모든 감정을 지니셨는데 그중에서도 사랑이 다른 모든 감정들을 능가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듯이, 우리와 같은 육체의 심장을 지니셨다는 것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고귀한 이 부분이 없이는 인간생활의 일상적인 감정들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신격에 본질적으로 결합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은 분명 사랑과 그 밖의 여러 가지 감정들로 고동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들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인간적 의지와 성자께서 성부, 성령과 함께 공유하시는 무한한 사랑 자체와도 결합되어 있어서, 이 세 사랑 사이에는 어떠한 마찰도 불화도 없는 완전한 일치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42.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스스로 참되고 완벽한 인성을 취하시고, 또한 당신 자신에게 우리의 심장과 다름없이 고통받고 찔릴 수도 있는 육체의 심장을 부여하셨다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신성과 인성의 본질적이고 실질적인 결합에 비추어 고려하지 않는 한, 또한 그 결합의 완성인 인간 구원이라는 실제에 비추어 고려되지 않는 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인이나 이방인들에게 그러했듯이,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43. 가톨릭 신앙의 공식 가르침들은 성서와 완전히 일치하여 하느님의 외아들이 고통받고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인성을 취하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이는 특히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인류의 구원 사업을 완수하시려고 피의 희생을 바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방인들의 사도는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 또 다시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은 다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비롭고 진실한 대사제로서 하느님을 섬길 수가 있었고 따라서 백성들의 죄를 없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나.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
1) 사랑의 신비는 강생과 구원의 토대이며 정점입니다
44.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교리의 참된 증인들인 교부들은 성 바오로 사도가 아주 분명하게 선포한 사실, 곧 사랑의 신비는 강생과 구원의 토대이며 정점이라는 사실을 훌륭하게 이해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준비하실 목적으로, 그리고 우리에 대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인간적 방식으로 표현하실 수 있다는 것을 가능한 한 가장 명확히 드러내 보이실 목적으로 완벽한 인성과 우리의 약하고 썩어 없어질 육체를 취하셨다는 것을 그들이 남긴 글에서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45. 성 유스티노는 이방인들의 사도의 말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시고 엄위하신 하느님에게서 나신 말씀을 찬미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지심으로써 그 고통의 치료제를 마련해 주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46. 세 명의 카파도키아 지방 교부들 중 첫 번째 교부였던 성 바실리오는 그리스도의 감각과 감정들이 진실한 동시에 거룩하였다고 선언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강생이 가상이 아니라 실제라는 증거로써 자연스러운 감정을 취하셨다는 것과 또한 우리 삶의 순수함을 더럽히는 부정한 감정들을 신성에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거부하셨다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47. 이와 비슷하게 안티오키아교회의 빛이었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구세주 하느님께서 감각과 감정의 지배를 받으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면에서 완전한 인성을 갖추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분께서 만일 우리의 본성을 공유하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몇 번이고 슬픔에 사로잡히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48. 라틴 교부들 가운데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들로 존경받는 분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육화된 하느님의 말씀도 면제받지 못했던 감정의 움직임과 성향이 마치 자연적 원천에서 나오듯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본질적 결합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분께서는 영혼과 영혼의 열정을 가지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서는 교란되실 수도 돌아가실 수도 없으셨기 문입니다.”
49. 성 예로니모는 바로 그러한 감정들에서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인성을 취하셨다는 주된 증거를 이끌어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취하신 인성의 참됨을 증명하시려고 실제로 슬픔을 경험하십니다.”
50.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노는 육화된 말씀의 감정과 그 감정의 목적인 인간 구원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에 특별히 주목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나 죽음 같은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애정을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비심에서 자유로이 취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몸인 교회 -그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어주셨습니다-와 당신의 지체인 신자들과 성인들을 당신 자신을 통하여 변화시킴으로써, 당신을 믿는 이들 가운데 누구라도 인생의 시련 중에 괴로움과 슬픔을 당하게 될 경우 당신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슬픔을 죄가 아니라 인간적 나약함의 표시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울려 퍼지는 조화로운 선율에 맞춰 노래부르는 성가대처럼 그분의 몸도 그 머리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51. 성 요한 다마스체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교회의 가르침을 더욱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설명합니다.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나를 완전히 취하셨고,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실 수 있도록 완전한 인간과 결합되셨습니다. 취해지지 않은 것은 치유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모든 것을 취하셨던 것입니다.”
52. 그런데, 성서의 구절들과 교부들의 글에서 가려 뽑은 이 모든 내용들과 본인이 미처 인용하지 못한 다른 많은 비슷한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애정과 감각적 인식력을 타고나셨으며 우리의 영원한 구원 사업을 위하여 인성을 취하셨음을 명확히 증언하고는 있지만, 그 어느것도 그분의 심장을 그분의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 명확히 지적할 만큼 그 애정을 그분의 육체적 심장과 관련시켜 언급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시고자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53. 복음서의 저자들과 다른 성서의 저자들이 구세주의 심장, 곧 우리의 심장처럼 강력한 느낌으로 두근거리며 당신 영혼의 정서와 애정 그리고 당신의 이중 의지로 불타는 사랑으로 고동치는 살아있는 그 심장을 뚜렷하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분의 신적인 사랑과 그에 따르는 감각적 정서들을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곧 그분의 얼굴과 말씀과 몸짓에서 나타나는 원의, 기쁨, 나약함, 두려움, 분노의 감정들이 그것입니다. 찬미하올 우리 구세주의 얼굴은 특히 당신의 영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움직이고 또 출렁이는 파도처럼 당신의 성심을 어루만져 심장을 고동치게 하였던 그 모든 감정들의 지침이자 일종의 충실한 반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심리학과 그 결과에 들어맞는 것은 여기서도 역시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일상적인 경험에 비추어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로 생긴 정서는 외부외 지체로 전달되는데, 특히 심장의 인상이 더욱 명백하게 반영되는 지체, 곧 눈, 얼굴, 혀 등으로 전달됩니다.”
다. 육화된 말씀의 심장은 그분의 삼중적 사랑의 상징입니다
54. 그러한 이유로, 육화된 말씀의 심장은 당신의 영원하신 성부와 온 인류를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구세주 하느님의 삼중적 사랑의 으뜸가는 표징이며 상징으로 마땅하고 올바르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55. 그 심장은 그분께서 성부, 성령과 공유하시되, 육화된 말씀이신 그분만이 약하고 썩어 없어질 몸을 통해서 드러내신 신적인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56.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혼에 주입되어 그분의 인간적 의지를 강화하고 또한 직접 주입된 지식과 하느님을 뵈옴으로써 얻어진 가장 완전한 지식을 통하여 그 의지의 행위를 밝혀주고 다스리는 불타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57.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욱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면에서 그것은 감각적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실상 다른 어떤 인간의 몸보다 더 완전한 감각과 인식력을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라.결 론
1) 우리 구세주의 성심을 공경할 수 있는 방법들
58. 이와 같이 성서와 가톨릭 신앙의 공식 가르침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영혼 안에서 모든 것이 완전한 조화와 질서를 찾으며, 그분께서는 명백히 우리 구원의 보증을 위해 당신의 삼중적 사랑을 쏟으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세주의 성심을 그분 사랑의 상징적 표상으로, 우리 구원의 증거로, 또한 우리가 “우리 구세주 하느님”의 품안으로 올라가기 위한 일종의 신비적 사다리로 묵상하고 공경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2) 그분께서 하셨던 모든 일은 그분의 삼중적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59.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과 행위, 계명, 기적 그리고 특히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는 일들, 곧 성체성사의 제정, 그분의 극심한 고통과 죽음, 당신의 거룩한 어머니를 우리에게 사랑의 선물로 주심, 우리를 위하여 교회를 세우심, 사도들과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심 등, 이 모든 일은 그분의 삼중적 사랑의 증거로 여겨야 합니다.
3) 우리는 그분 성심의 고동소리를 묵상해야 합니다
60.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분 심장의 고동소리를 지극한 사랑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복음사가들이 증언하듯이 그분께서는, “‘이제 다 이루었다.’고 큰소리를 지르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던”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 심장의 고동소리로 당신께서 지상에 머무르시는 시간을 재려고 하시는 듯하였습니다. 그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까지, 그분의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고 그분의 감각적 사랑은 중단되었습니다.
4) 그분의 심장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분의 삼중적 사랑을 상징할 것입니다
61. 그러나 영광을 받으신 그분의 몸이 죽음을 이기신 구세주 하느님의 영흔에 다시 결합된 후에도,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심장은 고요하고 잔잔한 맥박으로 계속해서 고동쳤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심장은 앞으로도 그분을 당신의 천상 아버지와 그리고 당신께서 그 신비적 머리가 되시는 전인류와 묶어놓는 삼중적 사랑을 계속 상징할 것입니다.
[2] 예수 성심 공경 어제와 오늘- 심상태신부
무한한 사랑에 기도ㆍ희생ㆍ보속 등으로 보답해야
제2차「바티깐」공의회 이후 신심열도 냉각 - 현대인에 비합리적으로 보여진 탓
소멸위험-과감한 신학적 고찰·신심형식 바꿀때
인간향한 그리스도의 인간적·신인적 사랑 함께 공경
예수 聖心月論壇
예수성심에 대한 신심은 이미 교부 시대에도 사적인 규모와 형태로 존속하고 있었다. 이 당시 예수의 마음 곧 심장은 생명의 샘、생명의 원천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늑백의 상처로부터 출생하였다는 가르침이 유래하며、성사의 풍요로움은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흐르는 생명수의 원천 속에 그 연원을 둔다는 통찰이 널리 퍼져 있었다.
예수성심 공경이 공적으로 전례축제화 한 것은 중세 이래의 일이었다. 예수 성심 공경이 오늘날 전개되는 권장되기까지는 성녀 마르가리따 마리아 알라꼭(1647~1690)에게 발생했던 사제 계시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고 분수 있다.
프랑스의 한 수도회인 「방문회」에 속했던 수녀 마르가리따 마리아 알라꼭에게 1673년 성요한사도축일부터 일련의 예수의 발현이 있었다. 발현한 예수는 자신의 마음 즉 심장이 인간들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편、매월 첫 금요일 당신의 마음을 공경하는 날로 정하고 이러한 지향으로 성시간을 바칠 것을 요청하였다. 이 예수 발현의 절정은 1675년 성체축일 8부후 금요일에 일어났다.
이때 예수는 마르가리따 성녀에게 역시 자신의 심장을 열어 보이면서 인간들로부터 배신당하는 당신 사랑의 마음을 위로하는 기도와 보속을 바치며 예수성심 축일을 제정하여 모든 교회에서 성대하게 기념하라는 위탁을 발했다고 한다.
18세기초 프랑스의 민중들 사이에서는 예수성심 공경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공식 교회는 이 축일과 신심행사에 관련된 전례상의 문제를 취급하는데 극히 신중을 기하였다. 1765년에 교황 클레멘스 8세는 폴란드 주교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제한된 지역 안에서 예수성심 공경 지향의 미사와 기도문을 바칠 것을 허용하였다. 1856년에야 교황 삐오 9세가 예수성심을 전 세계 교회에서 공경할 것을 지시하고 예수성심 축일을 제정하였다.
예수 성심 공경은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1백50여 년간 가톨릭 교회 안에서 열렬하게 이루어졌다.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지향으로 봉헌되는 미사와 성시간을 비롯한 신심행사가 세계 도처에서 거행되었으며, 예수성심을 주보로 하는 수많은 남녀 수도회와 성직자、그리고 평신도 신심 단체들이 창설되어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에는 일반 평신도들은 물론 성직자나 수도자들도 예수 성심성월의 의미와 중요성을 별로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오늘도 매월 첫 금요일이면 본당에서나 수도원에서는「첫첨례 6」을 지내는 의미로 예수 성심 공경 지향의 미사가 봉헌되고, 이 미사에는 평일보다는 다소 많은 신자들이 참여하고 있기는 하다.
우리는 오늘날 과학과 기계 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산업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과학과 기계 기술의 발달 이면에는 합리주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도 이 시대를 지배하는 실증적이며 타산적인 합리주의의 심성에 젖어 들고 있다. 이런 상황 조건 하에서<태양보다 빛나고 수정같이 투명하며 눈에 띄는 상처를 지니고 가시로 둘러싸인 가운데 불꽃이 이는>모습을 한 예수의 심장을 특별히 공경한다는 이 신심이 현대인들에게 한마디 비합리적이고 전시대적인 신심 행위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과거에 있었던 것처럼 열렬한 성심 상본 공경과 같은 전통적인 신심 형식이 더 이상 신자들에게서 발견될 것으로는 기대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예수성심 공경은 오늘날 전례와 교리면 에서 위기에 봉착해 있는 셈이다.
이렇게 소멸의 위험을 안고 있는 이 신심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과감한 신학적 성찰과 이에 입각한 신심 형식의 방향전환이 요청된다고 믿는다.
앞으로는 예수성심 공경을 한 개인의 사적 발현(이를테면 성녀 마르가리따의 발현 체험) 내용과 지나치게 긴밀히 연결시키지 말고 일반적인 교리 전통속에서 그 타당성을 찾을 필요가 있다. 보편적인 교회의 신심 행위를 특정 시대에 살았던 한 개인에게 있었던 발현 사건에 지나치게 의존시킬 때, 판이하게 변화된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신앙인들로부터 보편적인 호응을 얻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예수성심 공경이 인격체로서의 전인(全人)인 예수로부터 분리된 신체 기관의 일부인 심장을 따로 공경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전통적 예수성심 공경이 고립된 신체 기관의 일부인 심장이 아니라、살아 있으며 천주 성자 위격과 일치된 심장을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신자들의 관심을 인격 존재로서의 예수에게 보다. 신체 기관의 일부로서의 심장에로 집중시키는 인상을 자아내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공경 입장은 심장과 인격적 사랑의 본원적 단일성에 주목하지 않고, 심장이 사랑을 시사한다는 점을 후에 추가하는데에 머문다. 이러한 유형의 예수성심 공경은 사람들에게서 반발을 받을 것이다. 신체 기관으로서의 심장은 단순히 신체적 개념이 아니라 정신과 육신 모두를 포옹하는 전인적 개념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 곧 심장은 신체 기관으로서의 심장 근육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전인적 행위에 그 나름의 고유한 성격을 부여하고 이 전인적 행위의 원천이 되는 중심을 의미한다.
마음은 육신과 영혼이 하나로 결합된 인격체의 중심기관이므로 예수성심 공경의 차원에서의 이 예수의 성심은 구세사적 의미에서의 중심 기관으로 파악되고 있다.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실재 상징으로서의 신체적 마음을 보면서 그분의 인격을 공경하는 것이 예수성심 공경의 취지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의 심장을 공경하는 것은 이 신심 행위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이라는 장점을 지니기는 한다.
예수의 심장은 우리를 강생의 실재에로 이끈다. 살아 있으며 신체적인 심장은 강생의 신비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신심에서 공경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간적 사랑뿐만 아니라 신인적(神人的) 사랑이다. 그리고 이 신인적 사랑은 인간들에 의해 배척당하고 수모를 입어 상처받는다는 사실도 아울러 강조된다.
신앙인들은 예수의 사랑에 참여토록 자신을 주께 봉헌하고 주께서 세계의 구원을 위해 성부께 바치는 속죄에 참여하는 보속의 정신을 지니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뒤따르려는 결의를 예수성심 공경을 통해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생활의 쇄신 내지 심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예수 성신 공경 신심이 쇠퇴한 것은 유감이다.
십자가에 처형되어 참으로 심장이 찔리기까지 아낌없이 자신을 바친 그리스도를 뒤따라야 할 신앙인 모두가 전통적인 예수성심 공경 형식의 답습이 아니라 이 신심의 올바른 의미와 그 중요성을 바로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심상태 신부ㆍ신학박사ㆍ가톨릭대 교수
[3]예수성심 성월을 맞아-주호식 신부
▣ 예수성심 성월의 의미와 성심 신심의 목적
교회는 "예수성심 대축일"이 있는 6월을 예수성심 성월로 제정해 예수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달로 삼고 있다. 그래서 예수성심 성월에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무한한 신적.인간적 사랑을 묵상하고, 그 사랑에 합당한 기도와 희생 그리고 보속을 통해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다짐하는 달이다.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예수의 성심에서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생수가 흘러 내리고, 성신과 함께 예수의 마음을 초자연적 은총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리고 아담의 늑방에서 하와가 탄생했듯이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늑방(심장)에서 새 하와인 교회가 탄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성심에서 나온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 성심과 더욱 일치시키기 위해 특별히 성시간을 자주 드리고, 성월기도로는 '예수 성심께 천하만민을 바치는 기도'를 바친다.
예수성심 신심의 목적은 한마디로 인간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예수성심과 함께 또 예수성심을 통해 사랑으로 보답함으로써 첫째 계명(신명 6,5; 마태 22,37-38; 마르 12,29-30; 루가 10,27)을 더욱 효과적이고 온전하게 이행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성심 신심은 단순히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증거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무한한 사랑, 목숨까지 바친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예수성심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확실한 응답은 사랑의 실천이요 사랑의 보답이다.
▣ 예수성심 신심의 기원과 발전
예수성심 신심의 기원은 대략 11세기 경으로 본다. 하느님이시요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성심을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상징(Symbol)으로 보고 공경해 오던 일종의 신심이 중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많은 성인성녀들이 예수성심을 증거하였고, 특히 17세기 얀세니즘(Jansenism)같은 이단적 사상이 나타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성체성사를 멀리하게 했을 때 성심께 대한 공경이 공적으로 시작되었고, 특히 성 요한 유드(St. John Eudes, 1601-1680)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예수성심 공경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세계적으로 보급된 계기가 된 것은 프랑스 방문회(The Visitation Order) 수녀인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콕(St. Margaret Mary Alacoque, 1647-1690)에게 내리신 예수성심의 메시지였다. 예수께서는 성녀에게 70여 회 발현하시어 메시지를 전하셨는데, 그중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예수성심은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며 모든 이가 이 사랑으로 동화되기를 바라신다.
2) 예수성심을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보답적 사랑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또 갈망하신다.
3) 세상의 죄악을 배상하는 탁월한 방법으로 영성체와 성시간 기도를 바치기를 바라신다.
4)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특별한 축일을 제정하여 교회가 보편적(세계적)으로 당신께 영광을 드림으로써 죄악이 배상되고 성삼의 천상 은총을 풍성히 받기를 원하신다(이 때 예수께서는 성체축일 8부 첫금요일을 성심축일로 정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키고 있다.)
그후 교회는 말가리다 수녀의 시복에 즈음하여 세밀한 조사를 거쳐 말가리다 수녀가 받은 사적 계시가 교회의 신앙이나 윤리에 어긋남이 없음을 인정하였다. 17세기 이후 역대 교황들은 성심 신심에 관한 교회의 공식문서들을 통해 이 신심을 공인하고 널리 보급 권장하였다. 1856년 비오 9세는 성심축일을 전세계 교회축일로 확대했고, 1899년 레오 13세는 전인류를 성심께 봉헌하였다. 1969년 전례개혁에서는 예수성심축일을 대축일로 정하고 성신강림 후 둘째 주일(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지난 금요일에 지키도록 함으로써 성체의 신비와 예수 성심의 불가분의 관계를 더욱 깊이 천명하였다.
▣ 예수성심 성월을 맞는 신앙인의 자세
예수성심 성월은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하신 예수성심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 사랑에 합당한 응답의 생활을 할 것을 다짐하며 보속과 희생의 생활을 실천할 것을 요청한다. 그럼으로써 첫째 계명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생명경시 풍조와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하는 현실에서 예수성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고통을 받고 계시기에 예수성심성월을 맞아 나의 삶 안에서 예수성심께 다시금 가시관을 씌우고 있는 점은 없는지 반성하고, 동시에 우리 모두의 죄 때문에 고통받으시는 예수성심을 위로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묵상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이 세상은 예수성심의 뜻대로 사랑이 흘러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될 것이다.
<주호식 신부>
[4] 예수성심기도
예수성심 호칭기도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3] 예수성심 호칭기도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하늘에 계신 천주 성부님 ● 자비를 베푸소서. (다음은 같은 후렴) ○ 세상을 구원하신 천주 성자님 천주 성령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영원하신 성부의 아들이신 예수 성심 동정 마리아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 성심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성심 영광과 위엄이 가득하신 예수 성심 하느님의 성전이신 예수 성심 지존하신 이의 장막이신 예수 성심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신 예수 성심 사랑의 불가마이신 예수 성심 나눔과 베풂의 그릇이신 예수 성심 자비와 인정이 넘치시는 예수 성심 모든 덕행의 원천이신 예수 성심 지극한 찬미를 받으실 예수 성심 모든 마음의 중심이요 임금이신 예수 성심 온갖 지혜와 지식의 보고이신 예수 성심 천주성이 충만하신 예수 성심 성부의 기쁨이신 예수 성심 풍부한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 성심 죽은 이들의 희망이신 예수 성심 지극히 자비로우시고 인내하시는 예수 성심 모든 이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예수 성심 생명과 성덕의 샘이신 예수 성심 저희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성심 극도의 모욕을 당하신 예수 성심 저희 죄로 찢기신 예수 성심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 성심 창에 찔리신 예수 성심 모든 위로의 샘이신 예수 성심 생명이요 부활이신 예수 성심 평화요 화해이신 예수 성심 죄인들의 제물이 되신 예수 성심 주님께 바라는 이들의 구원이신 예수 성심 주님을 믿으며 죽는 이들의 희망이신 예수 성심 모든 성인의 즐거움이신 예수 성심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를 용서하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자비를 베푸소서. ○ 마음이 어질고 겸손하신 예수님 ●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 ╋ 기도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자의 성심을 보시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바친 성자의 찬미와 보속으로 마음을 푸시어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저희를 용서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 아멘. |
[5]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을 통한 예수성심의 메시지
축일: 10월 16일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 동정
St.Margaret Mary Alacoque
St.Margarita Alacoque, V
22 July 1647 at L’Hautecourt, Burgundy, France
- 17 October 1690; body incorrupt
Canonized:1920 by Pope Benedict XV
Margherita = perla, dal greco e latino
1647년 프랑스의 오탱 교구에서 태어났다
1671년, 파라이-러-모니알의 방문 수도원에 들어갔고, 그 이듬 해에 서약하였다.
’진주’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마르가리타는 수녀원 입회후 완덕의 길에서 놀랍게 진보하였으며,
특히 예수 성심께 대한 신비적 계시를 받아 교회 내에서 성심께 대한 신심을 전파하는 데 공헌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경배하는 예수 성심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반대와 시련에 부딪혔지만, 후에 시복된 그녀의 고백신부 끌로드 라 콩롱비에르에 의해
예수성심 공경의 진실성을 인정 받게 되었고 이 신심을 교회안에 널리 전파한 후 1690년 선종했다.
*성 끌로드 라 콜롱비에르 축일: 2월15일
Canonized :31 May 1992 by Pope John Paul II in Rome
마르가리타 마리아 수녀는 그리스도의 환시를 4번이나 경험하였다. 이러한 환시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당신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는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알렸고,
9번의 금요일과 성 시간으로 알려지게 된 신심을 그녀에게 교육시켰으며, 성심 축일의 제정을 요구하였다.
마르가리타는 성체를 사랑하며 영성체를 자주하고 특히 매월 첫 금요일 을 꼭 지킴으로써 세상의 배은 망덕과 냉담을 보상해야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고통과 고독을 기억하며 매주 목요일 밤에는 한 시간 동안 성시간 기도를 바쳤다.
예수께서는 또한 속죄의 날을 정하도록 명하시기도 했다.
잔세니즘,엄격주의에 대항하여 마르가리타는
강생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사랑으로 가득찬 진정한 복음적 신앙과 그리고 성사에 의한 삶으로 겸손되이 증거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행위는 전 교회를 위한 성령의 섭리이었습니다.
마르가리타 마리아는,교회는 바로 예수 성심이 상징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내세우신 선택받은 사람이다.
또한"나의 십자가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어머니의 십자가 고통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녀는 질병과 고통스런 가정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의 십자가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어머니의 십자가 고통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동안 그녀는 결혼을 생각했으나 24세에 방문 수녀회에 들어갔다.
그녀는 모범적인 수녀였으나, "평범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출한 것이 아무것도"없었다. 그러나 이 젊은 수녀는 이와 같은 익명성을 누리지 않았다.
동료수녀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한 수녀)는 그녀가 겸손하고 단순하며 솔직했지만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비판이나 꾸중에도 친절하고 인내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단순한 기도’를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기대하는 것처럼 묵상을 할수가 없었다.
조용하고 느리며 솜씨가 서투른 그녀는 활발한 양노원 수녀를 도와 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수녀가 된 지 3년 되던 해인 1674년 12월 27일, 그녀는 첫번째 계시를 받았다.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에 싸인 것 같은 환상에 속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녀는 그러한 하느님의 현존에 ’싸여 있다’고 느꼈다.
그리스도의 요구는 인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마르가리타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엇다.
그 후 13개월 동안 예수께서는 마르가리타에게 때때로 나타나셨다.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을 향한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마르가리타는 성체를 사랑하며 영성체를 자주하고
특히 매월 첫 금요일을 꼭 지킴으로써 세상의 배은 망덕과 냉담을 보상해야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고통과 고독을 기억하며
매주 목요일 밤에는 한 시간 동안 성시간 기도를 바쳤다.
예수께서는 또한 속죄의 날을 정하도록 명하시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환시 중에 받은 교육을 따르려는 노력 중에 장상으로부터
수많은 퇴짜를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온갖 장애를 극복하였으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발현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모든 성인들처럼 마르가리타도 그녀의 성덕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녀의 친형제 중에는 그녀를 미워한 사람도 있었다.
그녀에 대해 조사를 한 신학자들은 그녀가 본 발현은 환상이라고 선언했으며, 그녀가 좀더 배불리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는 그녀가 가르친 어린이들의 부모들까지 그녀를 사기꾼이며 이단적인 선동자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신의 수녀회원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당시 수도원의 고해신부였던 복자 끌로드 라 콩롱비에르 신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콩롱비에르 신부는 예수회원이었는데, 그는 마르가리따의 환시는 올바르다고 선언하였다.
1638년, 마더 멜랭이 장상으로 선출되었을 때 수도원 내의 반대도 종식되었으며, 후일 그녀는 수련장이 되었다.
1686년 초에는 수도원에서 예수 성심 축일을 거행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2년 후에는 성심께 봉헌된 성당이 파라이-러-모니알에 세워졌고,
곧이어 성심 축일을 지내는 관습이 방문 수녀회의 다른 수도원으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마르가리따 마리아는 1690년 10월 17일에 파라이-러-모니알에서 선종하여,1920년에 시성되었다.
"나는 하느님밖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으며 예수님의 마음 속에 나 자신을 숨기고자 합니다."
마르가리따와 성 요한 에우데스 그리고 복자 끌로드 라 콩롱비에르는 "성심의 성인들"로 불린다.
성심에 대한 신심을 1765년, 교황 끌레멘스 13세에 의하여 선포되었으니, 그녀의 사후 75년 만의 거사였다.
과학적이고 유물론적인 우리 시대는 사적 계시를 ’입증’할 수가 없다. 신학자들은 그것이 공개되었더라도 ’믿어야’할 필요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가리타 마리아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주장한 메시지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녀의 보속과 기도에 대한 강조, 그리고 마지막 심판에 대한 상기는 예수 성심 공경의 그리스도교적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한, 예수 성심 공경이 미신에 빠지거나 피상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 주는 데 충분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번째 발현에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아끼지 않고 마음이 지치고 녹아내릴 정도로 인간을 사랑한 성심을 보라.
그런데 나는 대부분 이 사랑의 성사에서 그들로부터 배은 망덕과 냉담과 경멸을 받을 뿐이다.…나는 성체 성사에서 나를 부끄럽게 하는 미지근하고 나태한 마음이 나에게 끼친 손상을 너의 열성으로 보상하도록 내가 너에게 준 마음으로 되돌아왔다."
성녀 마르가리따 마리아 알라꼭 동정의 편지에서
(Vie et CEuvres 2, Paris 1915,321.336. 493,554)
우리는 온갖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께서 당신의 성심이 특별한 공경을 받기를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시는 이유는
우리 영혼에서 당신이 얻어 주신 속량의 효과를 새롭게 하시는 데 있다고 봅니다.
성심은 겸손한 이들의 마음을 채우려고만 하시는 고갈됨이 없으신 샘으로서 영혼들이 기꺼이 당신의 선의에 따라 살도록 준비시켜 주십니다.
이 성심에서 세 가닥의 물줄기가 중단 없이 흘러 나옵니다.
첫 번째의 물줄기는 죄인들에 대한 자비의 물줄기로서 그들에게 회개와 참회의 영을 흘려 내보내십니다.
두번째의 물줄기는 온갖 고통을 받는 이와 특히 완덕을 지향하는 이들을 위로해 주는 사랑의 물줄기로서 그들에게 어려움을 이겨낼 도움을 주십니다.
세 번째 물줄기는 주님이 당신과 합일되기를 원하시는 가장 완전한 벗들을 위한 사랑과 빛의 줄기로서
그들에게 당신의 지혜와 욕망을 전달하시어 각자의 고유한 실정에 따라 당신의 영광을 증대시키는 데 그들이 완전히 헌신하게 하십니다.
이 성심은 온갖 선을 담고 있는 심연이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거기에 던져 넣어야 합니다.
이 성심은 우리의 모든 슬픔들을 잠기게 할 수 있는 기쁨의 심연이시고 우리의 공허를 채워 주는 겸손의 심연이십니다.
불행 가운데 있는 이들을 위한 자비의 심연이시고 우리의 온갖 가난을 잠기게 할 수 있는 사랑의 심연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성심과 연합되어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회개로써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지만 결국에는 거기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기 위함입니다.
기도에서 아무 진전이 없음을 봅니까? 그때에는 제단의 성사에서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해 바치신 기도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미지근한 신앙을 기워 갚기 위해 그분의 열성을 바치고 무슨 일을 하는 동안에건 다음의 기도를 바치십시오.
“나의 하느님이시여, 나는 당신 아드님의 성심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뜻에 따라 이 일을 하거나 또는 이 고통을 견디어 냅니다.
내 모든 일 가운데 존재하는 불완전함과 악을 기워 갚기 위해 바칩니다.” 그리고 생활의 각 상황에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활에서 고통스럽고 듣기 거북하며 모욕적인 일이 생길 때마다 여러분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이 너를 그분과 합일시키기 위해 보내시는 것을 받아들여라.”
그러나 모든 보화보다 더 고귀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십시오.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성심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주님은 당신의 영광에 보탬이 되는 것을 우리를 위해 해주시고 우리는 신뢰심을 다 바쳐 주님의 뜻에 기꺼이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각기 하느님께 받은 사명이 있다. 툭히 성인들의 사명은 더욱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신분이 귀하다고 더 큰 사명이 부여되거나, 또는 천하다고 더 작은 사명이 맡겨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1고린 1, 27)하신 성 바오로의 말씀 같이 세속에서 어리석게 보이는 이가 대 사명을 띠고 혁혁한 공적을 남긴 일이 적지 않다.
예컨대, 예수 성심 공경의 제창자로 최근에 성녀가 된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도 지금은 가톨릭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이 유명하지만, 그 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개 수도자에 불과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중대한 사명을 맡기셨다.
마르가리타는 1647년, 프랑스의 불고뉴 주 로트쿠르 성에 사는 알라코크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녀의 출생 후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네명의 자녀를 거느린 어머니는 가세가 기울고 생활이 곤란해지자 마르가리타를 샤를르에 있는 성 클라라 수녀원에 맡겨 교육을 받게 했다.
마르가리타는 수녀원에서 2년간을 행복하게 지냈는데, 하느님의 뜻이었는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신병에 걸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4년간을 침상에 누워지냈다. 의사의 진단으로는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본인은 물론 부모 형제들 까지 치유의 유일한 희망은 병자의 나음이신 성모 마리아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만약 마르가리타가 완쾌되면 꼭 수도자로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서원 하에 열렬한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난치병이 순식간에 완쾌되었는데, 속담에 "목구명만 넘기면 뜨거운 줄 모른다"는 식으로 병을 고친 마르가리타는 다시금 세속의 쾌락에 마음이 끌려 그녀가 했던 서원을 이행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큰 죄악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기도하기를 즐겼으며, 어떤 때에는 성체 앞에 꿇어 오랜 시간 동안 관상했다.
그동안 집안 살림은 더욱 궁색해졌다. 그래서 마르가리타는 가끔 이웃집에서 식량을 얻어서 조금이라도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드리도록 햇다.
외출복이 한 벌 밖에 없어 남의 옷을 빌려 입고 주일 미사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혼기가 가까워지자 마르가리타에게 혼담이 들어왔다.
그 중에는 집안의 곤궁을 넉넉히 메워 줄만한 재산가도 있었으므로, 어머니며 형제들은 "예전에 발한 서원은 무효다"라든가 또는 "그러한 서원을 풀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하며 결혼하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주님을 두려워한 마르가리타는 그 서원을 깨뜨릴 만한 용기가 없어 마침내 모든 혼담을 물리치고 1671년 5월 25일, 24세의 나이로 방문수녀최에 들어갔다.
수녀가 된 마르가리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배필로 정하고 주님께 대한 것만을 생각하며 하나에서 끝까지 그의 마음에 들도록 온 힘을 다했다.
그랬기에 주님께서도 그녀를 직접 인도해 주시며, 더욱이 당신의 성심 공경을 마르가리타를 통해 전파시키고자, 어느 날 기도에 몰두하고 있던 그녀에게 나타나시어, 위에는 십자가가 있고 주위에 가시관이 둘러있는, 사랑의 불에 타는 당신의 심장을 내 보이시며 "보라!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는 이 마음을! 나는 여기에 대해 감사를 받아야 될 것이거늘 그 보답으로 받는 것은 오직 예수 성심 축일을 정할 것과 매달 첫 금요일에 고해, 영성체 할 것,매 목요일에 성시간을 지킬 것과, 가정을 예수 성심께 봉헌할 것을 가르쳐 주셨으며 그 후에도 가끔 발현하시어 여러 가지를 계시해 주셨다.
마르가리타는 주님의 발현과 계시 일체를 장상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쉽사리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녀에 대한 여러 가지의 조사로 시련이 시작되어 고통을 받게 되었다. 맨 처음 그녀의 말을 믿은 사람은 그녀의 고해 신부인 클라우디오 드 라 콜롬비에르였다.
그녀는 수련장이 되어 수련 수녀들에게 주님의 성심을 열애할 것과 올바른 신심을 갖도록 가르쳐 주었다.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그 당시는 매우 새로운 것이었으므로 교회 당국의 여러 가지 심사를 받아야 했는데, 1688년 7월 2에서야 지당한 신심 행사임이 인정되어, 그 수녀원의 주보인 성모마리아 축일에 비로소 그 수녀원에서 예수께서 원하시던 성심 공경 신심 행사가 이루어졌을 때, 그녀의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르가리타는 자기의 사명이 성취되었음에 너무 안도감을 느껴서인지, 혹은 긴장된 마음이 풀려서인지 얼마 후 병에 걸려 1690년 10월 17일에 43세를 일기로 그 공로의 보수를 받기위해 천국으로 향했다.
그녀의 사후 그녀가 제안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순식간에 온 세상에 전파되었고, 1920년 5월 13일에는 교황 베테딕토 15세에 의해 시성식이 거행되었으며, 그녀의 분묘가 있는 파레 르 모리아르 성당에는 매년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인다.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로,
성체성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첫 금요일에 지낸다.
이 축일은 중세에 이르러 일반화되기 시작했으며, 1856년 교황 비오 9세는 예수 성심을 공경할 것을 권장하면서 예수 성심 축일을 라틴 교회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1995년 한국 천구교 주교회의는 사제들이 복음 선포의 직무를 되새기고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예수 성심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하였다. 우리는 사제들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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