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성체 성혈 대축일; 빵의 나눔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5월 26일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그리스도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 알베르토 피졸리 – AFP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례한 5월 26일 그리스도 성체 성혈 대축일 미사가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봉헌되었다. 교황은 강론을 통해 나눔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임을 언급하였다. 미사 후에는 성모 대성전으로 향하는 성체행렬이 시작되었으며 대성전에 도착한 후 성체강복이 이루어졌다.
라테라노 대성전 앞 광장을 가득 메운 성직자 수도자 및 평신도들과 함께 봉헌한 미사에서 교황은 빵의 나눔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의 상징임을 확인하고 빵을 형제들과 나누는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교회의 전통임을 확인하였다.
선선한 저녁 광장에서의 미사에서 두 가정이 아이들과 함께 봉헌을 하였으며 미사가 끝나며 성모 대성전으로 향하는 성체 행렬이 시작되었다. 성모 대성전까지 이어진 행렬 루에 교황은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자들에게 성체 강복을 하였다.
교황 강론 전문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린도 전서 11.24-25)
바오로 사도가 코린도 공동체에 보내는 서간의 성체성사 제정과 관련된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두 번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언입니다.
‘이를 행하여라.’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고 나누어주며,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고 함께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심으로서 당신 부활의 기억을 세워주셨고, 이를 통해 우리가 ‘나눔의 행동’을 실천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당신의 이 모습은 우리에게로 이어집니다. 성체성사가 봉헌될 때 주인공은 예수님시지만 성령께서 기름 부어주신 우리의 미약한 손으로 봉헌이 이루어집니다.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함으로 분명해진 것을 제자들에게 청하셨습니다. 방금 복음말씀에서 그것을 들었습니다. 배고프고 지친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사실 예수님께서 빵을 축복하시고 쪼개어 주셨으며 모든 이들이 만족한 결과가 생겼지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군중에게 직접 나누어 준 것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군중들을 돌려보내는 대신 작지만 가진 것을 나누셨습니다. 다른 모습도 있습니다. 성스럽고 존경받으시는 주님의 손으로 쪼개진 빵의 조각들은 미약한 제자들의 손으로 전달되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기적은 어느 하루의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려는 기적이 아니라 당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치시어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표징(요한 6.48-58)임이 확실합니다. 늘 이 두 가지 작은 행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미약한 빵과 물고기를 봉헌하고, 예수님의 손으로 나누어주신 빵을 모두와 나누어야 합니다.
나눔. 나눔이라는 단어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는 뜻을 설명해주는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누는 행위를 우리가 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타인들을 위해, 다른 이들을 위해 나눌 수 있도록 주셨습니다. ‘빵의 나눔’이라는 표징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상징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엠마우스를 기억해 봅시다. ‘빵을 떼실 때’(루카 24.35) 그분을 알아봅니다. 예루살렘의 첫 공동체를 기억해 봅시다. ‘가르침을 받고...빵을 떼어 나누었다’(사도 2.42) 시작부터 초기 교회의 중심이고 삶을 이루고 있는 성체성사를 의미합니다. 유명하든 안하든 모든 성인 성녀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스스로를 나눔으로서 ‘가난한 형제들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아버지들이 매일의 빵을 식탁에서 잘라 자녀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있는 시민으로서 모든 이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였습니까. 특히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어디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일까요? 바로 성체성사에서 비롯됩니다. 오늘날에도 빵을 떼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며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라고 하신 부활하신 주님 사랑의 힘에서입니다.
우리가 곧 하게 될 성체행렬 역시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것 입니다. 그분을 기억하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오늘날의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는 행위이며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 사랑의 상징으로서 이 도시와 모든 세상에 ‘나누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성 목요일, 그리고 성체성사 제정이 장엄하게 거행된 주님의 만찬 미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성 목요일 저녁에 우리는 쪼개진 빵과 부어진 포도주로 당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되살리는 반면,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는 이 똑같은 신비를 하느님 백성의 경배와 묵상을 위해 제시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걸으시며 우리를 하늘나라로 이끌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해 도시와 마을의 거리들에서 성체 행렬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은밀히 우리에게 주신 것을 오늘 우리는 널리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몇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성 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에서 저는, 바로 성체성사 안에서 이 지상 예물의 변화, 곧 빵과 포도주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 삶을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의 변화를 이끌기 위함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수난 전날 밤 최후의 만찬에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시며, 곧 맞닥뜨리게 될 죽음의 의미를 당신 사랑의 힘으로 변화시키신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단의 성사가 “감사”를 뜻하는 “에우카리스티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사실이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몸소 주신 선물, 죽음보다 강한 사랑, 죽은 이들 가운데 그분을 살리신 하느님 사랑의 선물의 열매입니다. 성체성사가 영원한 생명의 양식, 생명의 빵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수난 전날 밤의 “감사기도”에서 우주와 인간과 역사의 실재를 변화시키는 역동성이 흘러나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을 통하여 강생하신 전능하신 삼위일체의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배신과 폭력 앞에서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과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이 변화는 분열보다 강한 친교(communion), 하느님의 친교 덕분에 가능합니다. 영성체를 가리킬 때 쓰기도 하는 “친교”라는 말은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선물의 수직적 수평적 차원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빵을 먹는 행위를 가리켜 “성체를 받아 모신다”고 하는 말은 아름답고 매우 웅변적입니다. 실제로 이 행위를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 자체와 이루는 친교 안으로, 우리를 위하여 주어지는 이 생명의 역동성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성체를 통하여 독특한 친교가 전해집니다.
우리는 방금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6-17).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일종의 환시에 관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은 성찬 친교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나는 장성한 자의 음식이로라. 너는 커라. 이에 나를 맛보리라. 네 육체의 음식처럼 나를 네게 동화시키지 말라. 오히려 너를 내게 동화시킬 것이니라”(『고백록』 7,10,18).
그러므로 몸을 위한 음식은 우리의 유기체가 동화하여 우리를 키우는 데 이바지하지만, 성찬례의 빵은 다릅니다. 우리가 이 빵을 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자기 안에 동화시킴으로써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일치되어 그분 몸의 지체가 되고 그분과 하나 되게 합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성찬의 친교 안에서 우리를 당신께 변화시키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이 만남 안에서 우리의 개별성이 개방되고 자기중심주의에서 해방되어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인격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일치시킴과 더불어, 우리를 다른 이들에게 열어주어 서로의 지체가 되게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갈리지 않고 그분 안에 하나입니다. 성찬의 친교는 내 옆에 있는 사람, 나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과도 나를 일치시킬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있는 멀리 떨어진 형제와도 일치시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위대한 성찬의 영혼이었던 위대한 사회적 성인들이 보여주듯이 교회의 사회적 현존의 깊은 의미는 성찬례에서 비롯됩니다. 성체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 뵙는 이들은 고통 받는 형제자매나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이들, 낯선 이들, 헐벗고 병들고 갇힌 이들 안에서도 그분을 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돌보며,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일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용기를 주고 정의롭고 형제애가 넘치는 사회를 세워야 할 우리의 책임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선물에서 비롯됩니다. 세계화 때문에 상호 의존도가 더욱 높아지는 우리 시대에는 특히, 하느님 없이, 다시 말해 참된 사랑 없이 이러한 일치가 세워지지 않도록 그리스도교가 보장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과 개인주의와 서로 다른 이들을 억압하려고 하는 폭압에 길을 터주게 됩니다. 복음은 언제나 인류 가족의 일치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한 일치는 밖에서 강요되거나 이념 또는 경제적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하나의 같은 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인식할 수 있도록 상호 책임 의식을 바탕으로 합니다. 제단의 성사에서 우리는 나눔과 사랑은 참된 정의로 가는 길임을 배웠으며, 지금도 계속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행동에 눈을 돌려봅시다.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분께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이는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내 피의 잔이다”하고 말씀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런 몸짓으로 예수님께서는 골고타의 사건에 미리 참여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사랑에서 수난 전체, 그 고난과 폭력과 십자가의 죽음까지 모두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이심으로써 그분은 그것을 봉헌의 행위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자신을 안에서부터 구원하고 하늘나라의 차원에 열려있기 위해 가장 필요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것과 같은 길, 사실 그분 자체인 그런 길로 세상의 쇄신을 가져오기를 언제나 바라십니다. 그리스도교에 마술 같은 것은 없습니다. 지름길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애로운 권능으로 산도 옮기는 믿음의 논리, 생명을 주기 위해 깨지는 밀알이 지닌 겸손과 인내의 논리를 따라갑니다.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변화의 고리를 통해 인간과 역사와 우주를 계속 새롭게 하고자 바라십니다. 성체성사는 이러한 변화의 성사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현존하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당신께 일치시키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 구원 활동에 동참하게 하시고 우리도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그분께, 그분 안에 일치된 밀알로서 그리스도의 자기봉헌의 논리에 따라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 계획에 따라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인 일치와 평화의 씨가 역사의 이랑 안에 뿌려지고 계속 자라납니다.
환상이나 어떤 유토피아적 이념을 버리고, 성모 방문의 신비에서 동정녀 마리아처럼 우리 안에 주님의 몸을 간직하고 세상의 길을 걸읍시다. 우리는 밀알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겸손함을 지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강생한 하느님 사랑은 악과 폭력과 죽음보다 강하다는 굳은 확신을 지켜나갑시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평화와 정의가 다스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마련해 놓으신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참된 본향인 새 세상을 봅니다.
오늘 저녁에도 새롭게 시작합시다. 사랑하는 도시 로마에 태양이 떠 있는 동안 시작합시다. 성찬례 안에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우리 희망을 지켜주시는 당신의 충실하심에 감사합니다! 밤이 오고 있으니 우리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 “참된 음식 착한 목자, 주 예수님 저희에게, 크신 자비 베푸소서. 저희 먹여 기르시고, 생명의 땅 이끄시어, 영생행복 보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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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유룡신부 : ‘면형무아의 삶’ 봉헌하는한국적인 수도 영성에 바친 신앙 열정, 이 땅 교회의 뿌리 되다
초기교회 순교자 신앙 모범 사제로서 실천하기로 다짐 일제 압제와 폭정 이겨내고 민족 정신문화 유산 계발
‘면형무아의 삶’ 봉헌하는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설립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 수난의 역사를 경험했던 방유룡(레오) 신부는 주변국들의 개입으로 중심을 잡기 어려운 한국의 상황을 목도하며 한국교회의 뿌리를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한국교회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가까이에서 접했던 방 신부의 삶은 훗날 순교자들을 본받는 영성을 사는 한국 순교 복자 가족 수도회를 창설하는 기반이 됐다.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주교)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세 성직자 중 세 번째로 한국인에 걸맞은 고유한 수도 영성을 만들어 전파했던 방유룡 신부의 삶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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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 깍쟁이, ‘방 수사’가 되다
방유룡 신부는 1900년 3월 3일 당시 궁내부 주사로 영국 공사관의 통역관을 지내던 아버지 방경희(베드로)와 어머니 손유희(아녜스)의 육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 한학자였던 할아버지 방제원(프란치스코)은 제8대 조선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와 만주 연길교구장이었던 브레허 주교에게 한문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방 신부의 삶에 순교정신이 깊이 새겨질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방제원의 신앙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해시대 수난을 직접 체험하고 순교자들을 직접 지켜 본 조부와 조모는 방 신부에게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방 신부의 누나인 고(故) 방순경(루시아)씨는 훗날 “집안에서 내려오는 박해 시대의 온갖 고초를 겪으며 훌륭하고 지혜롭게 이겨 낸 이야기와 신앙의 모범은 나에게 어떤 보물보다 귀했다”고 고백했다.
1917년,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한 방 신부는 장차 사제로서의 삶을 살고자 굳은 결심과 함께 인생의 전환을 맞게 된다.
신학생 시절, 방 신부의 별명은 ‘종로 깍쟁이’였다. 눈에 띄는 도시 소년이었던 그를 동창 고(故) 임충신(마티아) 신부는 이렇게 기억했다.
“여름방학 때면 그는 빳빳한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빳빳한 맥고모자를 쓰고 금테 안경 쓰고 귀또 구두를 신고 다녔습니다.
이런 차림은 그 시대에 일류 건달이나 했던 차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 레오는 신학교에서 쫓겨 나가거나 아니면 자진해서 나갈 사람이지 신부는 못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자유분방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와중에서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던 방 신부. 두 번째 방학을 보내고 달라진 모습으로 학교로 돌아온 그는 “오늘부터 나는 성인이 된다”고 말했다.
이후로 ‘종로 깍쟁이’에서 ‘방 수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방 신부는 내적 여정을 걸으며 자주 묵상과 관상 생활에 빠져있었다.
1930년 10월 26일 사제품을 받은 방 신부는 사목자의 길을 걷기도 전에 난관에 봉착했다. 일제의 압제와 폭정으로 제대로 사목활동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제의 감시는 종교시설까지 이어졌고 순사들이 모든 미사에 들어오고 신자들의 고해를 듣겠다고 고해실에 들어와 앉아있기도 했다. 사제들도 천황 숭배를 하지 않으면 즉시 경찰서로 불려갔고 자유롭게 외출하기 어려웠다.
방 신부는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 고요히 칩거하거나 기도와 묵상, 명상과 같은 관상생활에 더욱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자유를 빼앗긴 시절을 보내며 방 신부는 자신의 존재를 자아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여정을 걸었다. 돈과 권력, 관계로부터의 자유를 선택한 방 신부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통해 은총의 시간과 만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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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수난 속, 한국적 신앙 지키고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세우다
강원도 춘천본당(현 주교좌죽림동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황해도와 서울의 본당에서 사목했던 방 신부는 해주본당에서 세시리아 성가대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사도신경에 음을 붙인 악보를 직접 만들어 창의 형태로 신자들에게 성가를 가르쳤다.
우리말로 된 성가를 알려주며 방 신부는 신자들이 민족적 혼을 잊지 않도록 이끌었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곧 6·25전쟁이 발발했다.
가회동본당에 부임한 지 1달 만에 전쟁을 맞은 방 신부는 신자들의 안전과 피난을 돕는 일에 몰두했다.
역사적인 수난들로 신자들의 신앙을 하나로 모으기 어려운 상황에서 방 신부가 시급하게 생각한 것은 교육이었다. 따라서 이후로 방 신부는 학교 설립과 수도성소 계발에 힘을 쏟았다.
신학생 초기 시절부터 수도자와 수도원에 대해 오랜 기간 탐구했던 방 신부는 외국에서 들어온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어울리는 수도 체계를 고심했다.
수도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유럽 신학과 수도 정신에 의존하는 양태에서 벗어나 한국 민족의 정신문화의 유산을 살려내길 원했다. 이러한 방 신부의 꿈은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를 통해 구현됐다.
1946년 4월 21일 설립된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는 한국의 순교자요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순교자들을 주보로 모셨다.
수녀회 창립식에서 “목적은 덕이요, 방법은 신덕이요, 도구는 빈주먹으로”라고 말했던 방 신부는 수녀회가 한국의 고유성과 독립적 정치성의 맥을 이어가는 수도회가 되길 염원했다.
방 신부는 면형무아(麵形無我)의 삶을 봉헌하는 영성을 수도회의 영성으로 삼았다. 면형무아는 밀떡의 형상, 즉 면형이 실체를 비우고 성체(聖體)가 되듯이, 성체와 같이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며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면형무아의 삶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점성(點性)과 침묵, 대월(對越)의 영성을 실천할 것을 가르쳤다.
점성은 가장 작으면서도 모든 것의 시작과 마침을 이루는 점처럼 자신을 낮추는 비움과 점처럼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지나치지 않는 겸손함을 말하며, 침묵은 하느님과 하나 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죽이는 순교를 말한다.
대월은 영혼이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의 현존 속에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면형무아를 바탕으로 수도자들에게 한국 민족 문화 발전에 공헌할 것과 한국 고유문화를 보존 연구하는 데 공헌할 것, 그리고 토착화된 한국 그리스도교 정신을 우리 민족에게 전할 것을 천명했다.
그래서 수도자들을 각자의 소질과 취미, 능력에 따라 미술, 음악, 국문학 등 각 부에서 연구시킬 것을 창설 이념에서 명시했다.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로 시작된 방 신부의 수도성소 계발은 이후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1953), 재속 복자회(1957년), 빨마 수녀회(1962)를 설립으로 이어졌고 수도자들은 본당과 해외선교, 사회복지기관, 교육기관 등에서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 성직자가 어두웠던 시대에 어렵게 켜놓은 등불은 지금을 사는 신앙인들이 순교자, 그리고 한국교회의 뿌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길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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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화 기자(가톨릭신문)
[3] 박병규 신부 요한 6,51-58
저 옛날 광야에서 먹던 만나에 대한 기억은 꽤나 강렬했다. 강렬한 만큼 잊혀지지 않았고, 잊혀지지 않는 만큼 세월의 흐름 속에 곱씹고 되새겼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살을 받아먹지 않은 것은 실은 지난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는 기존 삶에 대한 익숙함에서 비롯된다. 익숙해진 삶이 제 삶의 본질과 하나로 인식될 때 새로움은 늘 외면된다.
돌이켜 보건대, 삶의 본질은 먹고 마시는 데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는 대로 먹었고 마셨다. 먹고 마시는 일이 익숙해지기 위해선 타자, 곧 어머니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필요했다. 갓난아이가 의지적으로 신뢰를 가진다는 건 넌센스다. 갓난아이의 신뢰는 의지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본질이다. 예수의 육화도 그렇다.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의 존재론적 본질이 육화 사건으로 가시화된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는 모든 인간이 제 삶의 본질을 깨달을 때 먹고 마실 수 있다. 어머니를 향한 무모한 의탁, 바로 그것이 인간 삶의 본질이다.
하여, 예수의 성체 성혈을 받아먹고 마시기 전, 전제되어야 할 일은 시간의 더께 속에 켜켜이 쌓아 온 세속의 껍질을 벗겨 내는 용기다. 제 신념인 줄 알고 살아온 것들, 제 의지로 착각하며 되새긴 것들, 제 계획이라며 자화자찬한 오만에 대해 찬찬히 사유할 수 있는 여유다. 용기와 여유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은 실제로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가 될 수 있느냐의 화학적, 물리적 질문에 스스로 가둬 놓는 것이며 그로 인해 늘 배고픔에 허덕이는 결과만을 초래한다.
먹고 마시는 것이 있으면 먹고 마시면 그만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바라는 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적당한 품위와 정갈함이 아니라 그저 먹고 마시는 단순함이다. 성체 성혈이라 감히 다가서지 못할 것처럼 칭송하는 우리의 과한 신중함이 입가에 잔뜩 음식물을 묻히며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는 철부지들의 단순함을 막아 세우지 않길, 오늘 하루 어린아이가 되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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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빵과 생명 [구티에레스 신부] 요한 6,51-58
: 예수님의 몸과 피의 축일은 그분의 전적인 순명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 역시 그같은 순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요한 복음의 긴 6장은 빵의 주제에 집중되어 있다. 오늘의 말씀은 다른 이전 구절들에서 그렇게 분명치 않았던 성사적 관점을 보여 준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이처럼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하는 의도가 하느님의 아들의 육화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던 요한 공동체와 가까운 사람들을 이해시키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런지 메시지는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하느님의 선물이 인간의 형태를 통하여 구체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선물이며, 따라서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이 빵은 요한이 복음서 시작에서 말했던 것처럼(1,14) 말씀이 살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말씀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왔다.
청중들의 거부는(6,52)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 준다. 주님은 당신의 전적인 순명을 통하여 당신의 살을 내어 주고,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분이 전해 주는 생명을 통해서 그분 안에 살게 된다.(6,54-56) 이 구절들은 6장 처음 부분에서 발견되는 빵의 나눔에 관한 최종적 해석을 준비하고 있다. 그 마지막 해석은 예수님이 당신을 내어 주고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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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당신을 내어 주고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왔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우리는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바오로는 이 주제로 돌아가면서, 코린토인들을 위협하고 있는 우상숭배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기시키는 만찬의 중요성은 주님과 우리의 일치다. “축복의 잔”과 “우리가 쪼개는 빵”은(1코린 10,16) 우리를 일치로 이끌어 준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메시지,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결단을 나누는데, 이로 인해 예수님은 십자가로 또한 죽음에 대한 승리로 나아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빵과 한 몸”(1코린 10,17)이다. 그분과의 일치는 이처럼 심오한 결합이다.
결합은 가까움과 상호이해를 포함한다. 이것이 오늘 신명기 말씀의 주제다. 이 책은 탈출 사건에 대한 성찰이다. 오늘 말씀에서 매우 중대한 질문이 일어난다. 즉 약속된 땅으로 가는 긴 여정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대답은 이 40년 동안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이 서로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님은 백성들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기 위하여 고통과 궁핍 속에서 그들을 시험했다.(신명 8,2) 한편 그들을 만나로 채워 주며 보살폈던 주님의 살아 있는 현존을 통하여(8,3) 백성들은 하느님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웠다. 이 말씀과 이 빵은 생명을 주는 것들이다.
이런 체험이 있은 뒤,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은 서로를 더 깊이 알게 되었고 바로 이것이 계약의 기반이 된다. 최후의 만찬은 새로운 계약의 기념인데, 십자가에서 죽었고 부활했으며 우리와 함께 있는 예수님과의 우정을 기념하는 것이다. 우정은 요한 복음의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다. ▮[구티에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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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이영헌신부; 생명의 빵인 예수는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고 부활로써 완성되는 영원한 생명을 준다
이 대목은 공관 복음서의 최후 만찬 전승 내용(마르 14,22-24 병행구; 참조 1고린 11,23-25)과 비교될 수 있는 이른바 성체성사론적인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행적 안에 삽입되어 보도된 점이 특이하다. 빵의 기적(1-15절)과 물 위를 걸은 기적(16-21절)에서 예시된 내용에 터를 두고서 자기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으로 계시한 예수가, 이제 성체 안에 현존하여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자신의 살과 피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다”(51ㄷ절). 이 말은 성체성사의 제정을 잘 나타내 주는 핵심 내용이다. 생명의 빵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낸 예수가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자신의 “살”을 양식으로 주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가 사람들로 하여금 먹도록 내어 주는 이 빵은 바로 예수 자신의 몸으로서 세상의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다.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온(3,17) “세상의 구원자”다. 따라서 예수는 하느님과 일치하여 일하고,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에 생명을 주게 된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란 표현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는 피”(마르 14,24 병행구)라는 표현과 함께 예수의 십자가 상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의 이 헌신적인 죽음을 통해서 세상에 생명을 주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이 인간 가운데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참된 음식과 음료로 제공되는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만 한다(53-55절). 살과 피가 별도로 언듭된 것은 십자가 상에서 피 흘린 예수의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사람의 아들” 역시 여기서는 십자가에 들여 높여진 예수, 곧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보내신 당신의 “외아들”을 가리킨다. 예수는 십자가 상 죽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외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쁜만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도록까지 해 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남김없이 헌신한 셈이다. 이리하여 세상에 대한 예수의 사랑도 외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예수는 바로 신적인 생명의 전달자로서 성체 안에 현존한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구원의 원천으로서 예수의 십자가 상 죽음과 육을 취한 인간 가운데 하느님의 외아들 곧 세상의 구원자로서 예수를 증언하고, 십자가 상 제사를 재현한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예수를 믿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 예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체성사를 통해서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해주었다(54-55절). 영원한 생명은 사실상 예수와 함께 친교를 나누는 인격적인 공동체와 동일하다(참조; 17,3). 예수는 자기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뭅니다.”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아들 예수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아들 예수도 자기를 믿고 받아들이는 이에게 자기로 말미암아 살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고 마시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ㅣ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일치를 이루는 내적인 결속 관계가 더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는 포도나무 비유 이야기(15,1-17)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예수를 생명의 빵으로 사람들에게 보내셨고, 또한 사람들을 예수에게로 오도록 이끌어 주신다. 예수는 자기를 보고 믿는 자에게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준다. 따라서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 곧 살아 있는 빵이요, 이 빵은 조상들이 먹은 만나보다 월등하다. 만나는 오로지 지상 생명만을 유지시켰을 뿐이다. 결코 죽음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만나를 먹고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가 주고자 하는 살아 있는 빵도 지상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기여하거나 죽음을 면케 하지는 못한다(않는다?). 예수 자신도 십자가 상에서 죽었고, 들어 높여진 사람의 아들로서 살과 피를 제공한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빵인 예수는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고 부활로써 완성되는 영원한 생명을 준다. 이 생명은 성체 안에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고 일치함으로써 지상에서 얻고 누리게 된다. 바로 이런 신비를 거행하는 것이 성체성사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예수와 영원히 변치 않는 불가분의 결속을 맺고 하느님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양식이요 생명의 원천이라고 믿어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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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말씀과 전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인간은 평범하지 않은 사실들에 자신을 익숙케 하는 존재이며 또 흔히는 그런 사실들로부터 어떤 순간에 받게되는 특별한 느낌을 습관적이면서도 피상적인 일상적 감정 표현의 테두리 안에서 되새기는 존재다. 그러한 인간의 습성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실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즉 인간은 흔히 그러한 실체들을 통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또 마치 그것들이, 그것들을 수식하고 있는 순전히 용어상의 껍데기에 국한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그것들이 본래 지니고 있는 풍부한 내적 의미를 더 이상 근원적으로 파악하여 알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성체성사라는 형언할 수 없는 실체를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서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교황 바오로 6세, 1977.6.12,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강론 중에서).
경탄할 수 있는 능력
바오로 6세께서 하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마련하여주신 성체성사의 선물 앞에서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취하고 있는 묘한 태도를 정확히 꼬집고 있다. 우리에게는 놀라거나 경탄할 수 있는 능력은커녕, 비록 배척하는 태도이긴 하지만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느꼈던 그런 ‘거부감을 느낄 만한’ 능력(“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요한 6,60)조차도 부족하다. 사실 그들은 방금 이용한 구절에서처럼 그 신비를 이성적으로 알아듣기 어렵다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 전에 다음과 같이 놀라움을 드러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그렇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들은 지극히 중대하고 놀라운 어떤 사실을 직면하였을 때 ‘경탄하거나’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은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반면에 우리는 ‘믿기는 하지만’ 더 이상 경탄하지는 않는다. 즉 우리는 놀랍고도 중대한 그런 사실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일상적인 것들이 되어버릴 만큼 그런 사실들에 ‘타성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놀라운 사건도 우리생활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한 가지 자문해 보자. 어리석은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성체성사가 없어지게 된다면 과연 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의 생활이 현재의 생활과 달라지겠는가?
오늘 전례의 독서들은 다같이, 믿기 어렵지만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성체성사의 신비 앞에서 가지게 되는 ‘경탄’(놀라움)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모든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마음과 열정이 한데 어우러져 감동적인 찬미가로 표현되고 있는 ‘시온아, 찬미하라’라는 부속가(성체송가)도 마찬가지다 : “정성다해 찬양하라, 찬양하고 찬양해도, 우리능력 부족하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지 못한다”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의 담화에서 만나게 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는 오늘 제1독서의 내용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다, 비록 많은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힘든 유랑생활을 할 때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에 대해 느꼈던 그 ‘열정적 감격’까지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시려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저 끝없고 두렵던 광야,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고 물이 없어 타던 땅에서 너희 발길을 인도해주시며 차돌 바위에서 물이 터져나오게 해주시지 않았느냐? 또 너희 선조들이 일찍이 먹어보지 못한 만나를 너희에게 먹여 주시지 않았느냐?”(신명 8,2-3.14b-16a).
그러므로 이 장면은 광야의 험한 날씨, 배고픔, 목마름, 숱한 죽음의 위험들, 함정, 무기력, 자주 길을 잃고 헤맴, 절망감 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죽음의 구렁텅이인 그런 환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자기 혼자 힘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하느님께서만 생명력이 없는 모래땅에서 열매가 맺고 갈증을 풀어주며 생기를 돋게 하는 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은 기적으로 광야를 비옥하게 만드심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 주셨다. 광야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신명 8,3)이 이루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멀고도 먼 약속의 땅을 향해 기나긴 여행을 하는 중에 겪었던 그 모든 극적 체험의 진짜 주인공은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그 ‘말씀’이 아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배불리 먹였던 ‘만나’도 또 ‘차돌 바위’에서 솟아난 ‘물’도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선물들보다 더 가치가 있고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이시다.
우리가 읽은 대목 전체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 시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베풀어주신 그 선물의 ‘예외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시려는 것이었다”( 3절, 16절 참조).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는 것은 그들의 선조들이 일찍이 알고 있었던 ‘빵’을 주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신다. 즉 하느님은 항상 앞서가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신약시대에 와서 인생의 광야에서 험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 당신 백성들의 배고픔을, ‘만나’의 선물보다 더 신비스럽고 영양분이 있는 음식으로 채워주시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그 무엇도 저항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 진정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요한 1,14) 때문에 그만큼 더 가능하다.
새로운 ‘만나’이신 그리스도
실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고 계시고, 또 이미 ‘만나’와 바위에서 솟아난 ‘물’을 상징적 예표로 제시하셨던 더욱 신비스럽고 영양분이 있는 그 ‘새로운’ 음식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희생되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이다.
그러므로 그 선물은 분명 무한히 더 큰 선물이며, 여기서 하느님의 자비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에 이르고 있다. 또한 그 선물의 목적도 방금 위에서 언급한 구약성서상의 구원적 개입의 차원에 비추어 본다 하더라도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선물은 하느님의 백성 가까이에 있으면서, 섭취되어 소화된 모든 음식이 유기체 안에 발생시키는 힘과 에너지를 그 백성에게 공급하여 원기를 회복시켜주고자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생명 자체에 참여하여 ‘살도록’ 한다.
사실 그리스도를 먹으면서 그리스도로 살지 않을 수는 없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 전혀 생소하지 않은, 이와 같은 복음적인 어리석은 행위 때문에 그리스도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광야에서의 험한 여정 그 자체가 이미 천상 고향에 사는 것이다(필립 3,20 참조).
이제 복음사가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말씀하셨다고 하는(요한 6,59) 소위 ‘성체성사에 관한 담화’의 결론부분을 전해주고 있는 오늘 복음의 놀라운 내용을 짤막하게 분석해보자.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관심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 이 이야기 전체의 구조에 대한 토론이나, 이 이야기가 예수 자신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역사적 증거 외에 놀라운 성체성사에 관한 교리를 자기 독자들에게 제공할 기회로 삼은 복음사가의 저술에 속하는 이야기인지 하는 문제를 다루는 데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지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만약 앞의 대목 전체에서(요한 6,26-50)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33.35.41절), “생명의 빵”(48절)으로서 당신 자신을 제시하셨다면, 그것은 당신 말씀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통하여 더더욱 놀라운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켜주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 그 놀라운 사실이란, 그 ‘빵’은 바로 세상을 구원하러 세상에 ‘보내진’(38-40절 참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으로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베풀어져 그들이 그것을 정말로 먹음으로써 영원한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신적 실체로 변화되어 다시 살아나게 하는 ‘빵’이라는 사실이다. ‘죽음’은 ‘생명의 빵’을 먹는 곳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51절). 여기서는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서(희합어로 ypér)가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 희생제물로서 바쳐질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요한의 작품을 포함해서 신약성서의 저작들에서 ypér라는 전치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구속적 가치를 표현하는 데는 거의 기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마르 14,24 ; 루가 22,19 ; 로마 5,6 ; 1고린 11,24 ; 15,3 ; 요한 10,11.15 ; 11,50-52 ;17,14 ; 18,14 등 참조).
여기서 정말로 놀라운 사실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희생제물이 될 그 ‘살’을 ‘먹도록’ 주겠다(미래형을 쓰고 있음을 주목하라)고 약속하시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 살은 최고의 봉헌의 행위를 통해 표현된 구속과 사랑의 모든 힘이 믿는 이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하기 위해 봉헌된 ‘희생’의 음식이다. 여기서 유다인들은 그런 사실의 가능성 여부를 시비거리로 삼으며 따지고 든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요한의 경우에서처럼 다른 사람들의 몰이해는 예수께 있어서 당신의 생각을 보다 더 확실히 또 더 깊이 있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3-58절).
신비의 베일을 최대한 벗겨주며 사람들을 놀라움에 차게 하는 예수의 이 말씀들 중에는, 만일 우리가 최소한 그 말씀들을 막연하고 애매모호한 것으로 돌려버리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더 정확히 말해 그것들을 다만 그분과의 깊은 일치 아니 신비스러운 일치에 대한 은유적 표현정도로 단정짓지만 않는다면 여러 가지 깊은 내용이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피는 참된 음료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께서는 ‘현실성’입각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우선 그분은 사람들이 당신이 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경감시키지나 않을까 염려하시는 것 같다. 사실 우리는 그 말씀의 첫머리에서 “정말 잘 들어두어라”(53절)라고 말씀하신다. 이 참된(α`ληθη'ς)이라는 형용사는 요한 복음사가의 용법에 있어서 신앙의 관점에서 파악된 사물들의 가장 깊은 실체를 뜻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다음에 여기서 여러 번 나오고 있는 (54.55.58절) ‘먹는다’라는 말은 원래 희랍어로는 ‘게걸스레 먹다’ ‘잘게 부수다’를 뜻하는 동사 Γεω´γει´υ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징적 행위가 아니라 아주 생생한 현실적인 행위를 뜻한다. 또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받았던 극심한 고통에 대한 내용도 언급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여기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몸의 상처에서 넘쳐 흘러나온 ‘피’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다 : 히브리인들은 결코 피를 마시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피에는 오직 하느님만이 주인이 되는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레위 17,11참조).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로 당신의 피를 봉헌제물로 바치신다. 왜냐하면 당신의 ‘생명’ 자체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으신다! ‘몸’과 ‘피’는 형제들에게 선물로 봉헌되신 그분의 위격 ‘전체’를 뜻한다. 고찰해야 할 두 번째 사실은, 예수께서 당신을 먹는 사람들이 얻게 될 ‘생명’에 대해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1.54.58절). 여기서 문맥 전체를 통해 상기되고 있는 ‘죽음’의 행위로부터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그렇지만 사실이 그렇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봉헌은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 사랑은 아주 단절되어버렸거나 또는 단순히 약화된 인간관계를 변화시키고 재생시키는 추진력이요 생명력이다.
다른 한편,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받음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은, 하느님의 아들 성자께서 지금 이 순간 영광중에 살고 계시는 ‘생명’ 그 자체이다 :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삶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57절). 그러므로 그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한 이들’의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힘으로’ 사신다. 이렇게 볼 때 성체성사는 그리스도 신자가 신적 세계에 참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충만한 생명을 자신 안에 간직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수단이 된다.
마지막으로, 어째서 요한 복음사가는 여기서 공관 복음사가들이 사용하고 있는 ‘몸’이라는 말 대신에 ‘살’(sárx)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학자들 간에 의견도 서로 다르다. 요한 복음사가가 ‘인간전체’와 ‘몸’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아라메아어 besár(살, 육신)의 의미를 그대로 잘 살리기 위해서라는 가장 개연성 있는 이유를 차치해놓고 본다면, 아마도 그가 성체성사와 육화의 신비를 의도적으로 결합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복음 서두의 내용을 상기해 보라 : “말씀이 사람(sárx)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1,14). 성체성사를 통하여 육화의 신비가 사람들 가운데 ‘계속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 존재의 충만성과 전체성 안에서 우리 가운데 당신의 사랑과 구원의 현존을 계속하고 계시다.
“빵이 하나이기에 우리는 모두 한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제 2독서가 담고 있는 깊은 내용을 이해하는 데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바울로 사도는 고린토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성체성사의 의미를 koinonia, 즉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과의 일치와 결합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6-17).
그러므로 우리는 성체성사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에게 결합될 뿐만 아니라 우리 서로도 결합되어 비록 여럿이지만 모두 ‘한몸’을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음으로써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다(성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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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조명연 신부; 신만이 완벽할 뿐이다. 인간은 완벽을 소망할 뿐이다(괴테)
지난번에 동창 신부 모임 때에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한 신부가 누군가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좋은 평가가 담긴 말이 아니고 약간의 부정적인 판단이 들어간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대부분 동의를 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동창신부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우리 여기서 판단하지 말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어.”라면서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또 다른 반응은 “이유가 있겠지.”라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반응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할까요?
사실 우리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멈추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바로 이때 우리의 생각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냥 못된 사람으로, 내가 멀리해야만 하는 사람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유를 먼저 생각한다면 조금 더 생각이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동시에 어떠한 해결책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문제점을 찾지 말고 해결책을 찾아라.”
다른 이들의 문제점만 찾으려고 노력하는 우리는 아닐까요? 문제점보다는 해결책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주님과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쓰고 있는 ‘저 사람’이라는 표현은 ‘저 친민 출신’이라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려고 하지 않고 문제점만을 보고 있었으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끔찍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겠다고 하시지 않지요. 오히려 당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십니다. 이 사랑을 보지 않고 문제점만을 보려고 하니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을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의 몸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사랑은 언제나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이 사랑에 집중하면서 살아갈 때 완전하게는 하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인 오늘,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웃들에게 그 사랑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만이 완벽할 뿐이다. 인간은 완벽을 소망할 뿐이다(괴테).
나의 전성기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꿈꿉니다. 그래서 매스컴을 통해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나올 때에 부러움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또한 그들에 비해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왜 이럴까?”라면서 초조해하고 불안해합니다.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그들과의 비교를 하면서 생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진짜로 불행한 사람은 이른 나이에 큰 성공을 이룬 사람, 젊은 시절에 전성기를 맞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보다 더 큰 성공을 이루지 못하면, 항상 부족하고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전성기를 자기 인생의 후반기에 맞이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현재 전성기를 맞이하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니까요. 이제 곧 시작될 나의 전성기를 꿈 꿔 보면 어떨까요? 예전에 유행을 했던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표어를 기억하면서, 내 꿈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꿈은 이루어집니다.▮[빠다킹신부]
가해 성체성혈 대축일 긴 강론: 성체성사의 신비는 그 누구나 그 무엇의 인정도 필요없이 스스로 존엄하고 거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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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최근 팬데믹(세계적 감염병 유행) 이후의 주일 미사 참례 특별히 성체성사에 관한 담론이 발생했습니다. 최근 우리신학연구소의 코로나19 시기의 신앙생활에 관하여 유의미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코로나19가 교회에 가져온 영향들과 그에 대한 대안의 모색에 도움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분석 결과를 단순화 시키면 먼저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가정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의 신앙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당에서의 전례와 성사를 중심으로 신앙살이를 하다가 각자 스스로 알아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보다 진일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목자들이 그동안 그토록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목표가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일상적인 신앙생활이 잘 그대로 유지되도록 사목자와 신자들이 다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관성의 법칙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가정의 성화(聖化)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속화되는 것은 쉽습니다. 대개 좋지 않던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 즉 속(俗)으로의 환원은 더욱 쉽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 시기의 신앙생활에서 걱정스런 측면이 더 크게 부각됩니다. 팬데믹이 강제하는 앞으로의 추세와 신자들의 인식 변화를 고려할 때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 있는 기존의 전통적인 신앙생활이 크게 도전 받고 있습니다. 거칠게 말하면, 사람들은 주일미사에 의무적으로 참례하고자 하는 의식이 약화됐습니다. 성사생활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대중화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신앙의 무게중심이 성당으로부터 가정으로 옮겨짐에 따라 전례생활에 관한 신자들의 인식이 획기적으로 변화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본당의 신자들을 보통 네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주일미사 성체성사에 참례하면서 가정에서의 기도생활을 잘하는 사람, 둘째 성사생활은 하면서 가정 기도 생활은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 셋째 본당 성사 생활은 하지 않으면서 가정 기도생활과 신령성체를 잘하는 사람, 넷째 본당과 집에서 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냉담자 혹은 배교자 등입니다.
이 분류는 요즘 판데믹의 시기에도 어느 정도 적용이 되지만 됩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카테고리 중에 첫째, 둘째 넷째 케이스는 일단 논외로 칩니다. 그러면 관건이 되는 케이스는 셋째 부류의 신앙인입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관건이 되는 신앙인은 ‘본당 성사 생활은 하지 않으면서 가정 기도생활과 신령성체 등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일부 신학자나 사목자는 이 번 기회에 신앙생활의 중심을 제도종교에서 각각의 개인으로 획기적으로 옮겨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당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맞는 주장입니다.
다른 한편, 이번에 방송미사 참례와 신령성체(神領聖體)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본당 공동체 미사 중지 기간에 여러 교구에서 방송 미사 시청과 영적 영성체(신령성체)를 권장하였습니다. 신령성체란 성체를 모시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으로 신령성체 기도를 바치며 마음으로 영성체함을 말합니다. 실제로 성체를 받아 모시진 못해도 하루의 모든 일과를 신앙과 사랑으로써 할 수 있도록 교회는 권장합니다. 그 옛날 박해시대 선조들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미사를 드리지 못하기에 직접 성체를 모시지 못하고 신령성체를 모시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굳건히 했습니다.
그러나 팬데믹이 강요하는 신령성체는 파르미콘과 같아서 약인 동시에 독이 됩니다. 먼 안목에서 어떻게 보면 방송미사 참례와 신령성체는 득이 되기보다 독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령성체의 의의를 아무리 강조한다해도 실질적인 영성체와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평화 방송 미사 중계를 아무리 열심히 본다고 해도 그것이 미사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성체는 보거나 마음으로 영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먹는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중심에는 초대 그리스도교의 기억이 중심에 있습니다. 기억은 히브리인들의 신앙생활의 핵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하신 일들을 기억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는 과거의 기억을 단순히 재기억하거나 회상하거나 중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화(l’Actualisation)하는 행위입니다. 현재화는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이며 하느님과 함께 미래(prolepsis, l’advenir)를 열어가는 것입니다. 성체를 먹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을 현재화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현재가 우리의 미래로 쳐들어오게 하는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우리 교구 사제 중 김경식 신부와 노광수 신부 사이에 있었던 성체논쟁의 대화가 있습니다. 노광수 신부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노신부의 발화를 근간으로 하여 재구성하면 이렇습니다. 김경식 신부님은 신학원 원장이었고 노광수 신부는 양성자 신부였습니다.
김경식 신부 : 니 요즘 와 성체조배 안 하노? 신학생들한테 모범을 보이야지?
노광수 신부 : 신부님 성체는 보는 것이 아니고 묵는 겁니다.
김경식 신부 : .......
젊은 시절의 들개 노광수 신부의 예지가 번쩍인 대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늙은 더러운 들개는... 내 기억이 정확하다는 전제에서 노광수 신부의 말에 의하면 김경식 신부가 이 사건 이후 자기를 신학교에서 내쫓았다고 합니다. 두 신부 사이에 있었던 짧은 대화는 나름대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성체는 ‘보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라는 주장이 분명히 더 신학적입니다. 성체조배 백 번 하는 것보다 그리고 성체강복 백 번 받는 것보다 영성체 한 번 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습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고 성령께서 컨펌하는 것이지만,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가방 크다고 공부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먹는 행위는 보는 행위와는 다릅니다. 보는 행위는 시각에만 의지하지만 먹는 행위는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 몸의 모든 틀이 작동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오감과 육감(肉感)을 뛰어넘어 인간이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사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성사는 그 은총을 실재적으로 이루어줍니다.
성체성사는 개신교와는 차별되는 가톨릭교회의 구심력입니다. 특별히 성체성사는 가톨릭교회가 어떤 경우에도 약화하거나 폐기할 수 없는 정체성의 핵심이며 원천입니다. 중세기에 있었던 페스트의 팬데믹의 결과 르네상스 운동과 교회분열 혹은 소위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도주거리두기의 와중에 개신교에서는 컨택트를 피할 수 없는 성찬의 전례를 포기하고 말씀만을 강조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티즘과의 대립시기에 오히려 성체성사의 가치를 더 강조하였습니다. 성체성사 없이 교회의 지체는 주인의식은 없이 주인행세만 하려 합니다. 그 후 성체성사는 가톨릭교회의 신원을 구성하는 유전자로 인정되었고 전승되고 있습니다. 영성체는 예수님의 몸과 나의 몸이 완전한 밀접접촉을 이루면서 그것을 뛰어 넘어 두 몸 사이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전 제로인 상태입니다. 더욱이 성체를 영함으로써 예수님의 몸과 인간의 몸은 완전한 화학적 결합을 이루고 영성적인 일치를 이룹니다. 그래서 성체성사의 신비는 그 누구나 그 무엇의 인정도 필요없이 스스로 존엄하고 거룩합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전례와 성사, 성당과 교회 울타리 안을 중심으로 한 신앙 의식을 강화하고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면 다시 리셋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원심력적인 비대면 촉진으로 인한 충격을 복원하는 데에 지역교회는 역량을 집중하여 위기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회복탄력성과 복원력의 강도를 높여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 코로나 이후 문명과 시대의 변화를 간과하는 시대착오(時代錯誤)가 아니라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신앙감이며 시대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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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나를 먹는 사람은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도전을 합니다. “나의 살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셈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시에 유다인들이 던진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요한복음이 씌어지던 1세기 말 경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었던 고민을 대변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살을 먹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알아듣기 힘들어서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지고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이가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우리더러 식인종이 되란 말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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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옛날 로마 시대에 천주교가 여러 세기에 걸쳐서 큰 박해를 받고 많은 치명자들이 나왔는데 이때 우리 교회가 박해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어이없게도 신자들이 은밀하게 모여서 어린이들을 잡아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대단히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비티니아 속주의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 2세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낸 바 있습니다. "그들은 일정한 날 밝기 전에 모여 서로 번갈아 가며 마치 신과 같은 그리스도를 위해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입니다…그런 일이 끝나면 그들은 관습에 따라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음식을 드는데 이는 해롭지 않은 보통 음식입니다"(플리니우스 편지 2장 7항). 틀림없이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서 오고 갔던 말들이 문제가 되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어주면서 '이는 나의 몸이다',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이는 나의 피다'라고 하신 일, 곧 최후의 만찬을 매주 재연(再演)했으니,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먹는다는 소문이 났을 법합니다. 그러니 플리니우스가 확인을 해본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제1336조)에서도 “수난 예고가 제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듯이, 성체 성사에 대한 첫 번째 예고도 제자들을 분열시켰다. . . 성체와 십자가는 걸림돌이다. 그것은 동일한 신비이며 끊임없이 분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요한 6장 67절), 주님의 이 질문은 오랜 세월을 통해 울려퍼지고 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살과 피」라는 말은 인간의 생명 혹은 인간 전체를 나타내는 통상적인 히브리적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인격 전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유학생활 초창기에 파리에 가끔 갈 때 해야될 볼일도 잘 계획을 세워서 가지만 먹고 싶은 것을 먹으러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한 번은 고속철도 떼제베 안에서 함께 올라가던 신부님과 먹고 싶은 음식의 목록을 작성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 목록은 회, 김밥, 오뎅, 짜장면, 소고기 덮밥과 모밀면, 마파두부, 켄트키 치킨, 순두부 찌개 그리고 코리안 바비큐라고 하는 불고기 등이 그 목록이었습니다. 파리에 있는 신부님들이 저보고 박신부는 먹는 것에 너무 민감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늘 이야기합니다. 인생살이에서 그러면 먹는 것 빼 놓고 뭐 특별한 것 있나 예수님 평생에서도 먹는 이야기 빼면 뭐 남는게 있나 하고 제 계속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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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마갈리스버그에서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부통령이 새로 발견된 고대 인류 '호모 나레디'의 화석 복원본에 입을 맞추고 있다. 이 고대 인류는 최고 300만년 전 살았을 것으로 추정돼 진화의 역사를 새로 쓰는 계기가 될 지 주목된다. 새로 발견된 인류는 화석이 발견된 동굴의 이름인 '떠오르는 별'에서 따 '호모 나레디'로 명명했다. 나레디란 남아공 세소토어로 '별'을 뜻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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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매일신문DB
인류의 경쟁 상대였던 대형 유인원은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지고 있어서 암컷이나 먹을 것을 두고 서로 다툴 때 무기로 사용했다. 그러나 인류의 송곳니는 작아지는 쪽으로 진화했으며, 이는 인류가 송곳니를 사용하지 않게 된 탓이다. 인류는 일부일처 문화를 정착시켜 암컷을 두고 수컷끼리 싸울 일을 만들지 않았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 무기 대신 평화를 택한 결과다.
체온 유지와 피부 보호에 중요한 체모가 인류에게서 사라진 점도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체모가 많으면 땀이 쉽게 증발하지 않아 체온을 낮출 수 없어 오랫동안 걷거나 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직립 이족 보행을 한 인류는 멀리 이동할 수 있었기에 먹을 것을 더 많이 구할 수 있었고, 경쟁자보다 먼저 먹이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인류 진화의 최신 이론 중에 ‘음식물 운반 가설’이 있습니다.
“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이는 인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 생존에 필요한 능력을 온전히 갖추지 못하는 종(種)은 인간뿐이다. 이렇듯 유약하고 불완전한 존재가 만물의 영장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신간 '절멸의 인류사'를 집필한 분자고생물학자 사라시나 이사오는 인류가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유약함에서 찾는다.,, 진화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들 뛰어난 것이 이기고 살아남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는 약한 것이 살아남는다. 이 모순적인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생존을 위한 지난한 진화의 과정에서 인류는 무기를 버려서, 털이 없어서, 신체적으로 불리해서, 가난해서 살아남았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골격이 크고 단단한 체격을 갖고 있었지만 멸종되고 말았다. 호모 사피엔스는 힘은 약했지만 행동 범위가 넓었고, 사냥 기술도 더 뛰어났다. 또한 네안데르탈인보다 기초 대사량이 20% 적었고 더 많은 자식을 낳았다. 몸이 가벼운 호모 사피엔스는 싸우기도 전에 멀찍이 달아났으며 사냥감을 선점하는 방식으로 네안데르탈인의 생활 영역을 줄여 나갔다...인류 진화의 역사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700만년 전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인류와 침팬지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침팬지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만, 인류는 혁신을 거듭하며 다양한 인류종으로 뻗어나갔다. 인류 계통의 종으로 분류된 25종 가운데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것이 현존하는 우리다. 침팬지류와 본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인류의 가장 큰 특징은 직립 이족 보행이다. 생존에 불리한 점이 많은 직립 이족 보행이 오직 인류에게만 발현된 것은 큰 수수께끼다. 이를 둘러싼 많은 가설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는 '음식물 운반 가설'인데, 손으로 음식을 날라 가족과 나누어 먹으며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도록 진화됐다는 설이다.”(매일신문 이혜진 기자)
미사 안에서 우리도 주님의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매일 거행합니다. 초대 가톨릭 교회는 매일 손으로 음식을 날라 가족, 신자들, 약자들과 나누어 먹으며 생존하고 복음을 선포하고 진화하였습니다. 강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미사 때 사제는 두 발로 직립해서 성체를 손으로 높이 들고 외칩니다. 그리고 성체를 바라볼 뿐만이 아니라 모인 모든 회중이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체를 영적 양식으로 삼아 생존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키워나가고 점점 진화해 왔습니다.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하느님께 배고파하는 사람들이 모여 성체를 나누어 먹음으로써 영적인 생명을 키웁니다.
성만찬의 근본 의미는 오늘 제2독서인 고린토 전서(10,16-17)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성체의 신비는 그리스도와의 친교요 그리스도인 서로간의 친교의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이 성만찬을 "빵 나눔"(루가 24,35; 사도 2,42)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최후 만찬 때 예수께서 "주는 몸", "쏟는 피"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눔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성만찬의 핵심은 바로 나눔에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성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성체는 바로 나를 지탱해 주는 음식이기에 성체 없이는 나의 봉헌생활은 하루 한 시간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돌보는 가난한 이들은 바로 예수님의 성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성체 안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 당하는 자 안에도 계십니다. 영성체를 할 때 마다 나눔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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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연약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먹거리로 내놓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이 말씀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생명의 빵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처럼 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 오셔서 결국 빵이 되신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이세상의 존재자들은 무생물계 식물계 동물계 인간세계 천사세계 그리고 하느님의 순서로 질서지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무기물은 식물에게 영양을 제공하여 유기물이 되고 식물은 동물에게 먹힘으로써 상승하게 되고 식물들과 동물들은 인간에게 먹힘으로써 상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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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릴 때 첫영성체 교리를 할 때 수녀님께서 성체성사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먹는 밥이 우리의 육체를 자라게 하고 육신에게 힘을 주는 육신의 양식이라면 우리가 미사 때 영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우리의 영혼이 자리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을 주는 영혼의 양식이다. 성체를 많이 영해야 영혼이 건강할 수 있고 또 착한 일도 많이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영한 성체는 영혼이 천국에 가서 먹을 식량이니까 가능한 한 영성체를 많이 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설명에는 너무 인간적이고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많지만 그래서 지금도 미사 후에 성체가 남았는데 모실 감실이 없으면 저 혼자서 남은 성체를 다 영합니다.
먹는 행위는 하나가 되게 하고 일치되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인간의 먹는 행위를 통해 먹거리와 인간은 서로 하나가 되게 합니다. 먹거리는 먹힘을 통해서 인간의 살과 피가 되고 활력을 줌으로써 인간의 물질적 차원의 구성적인 요인이 되며 인간화됩니다. 예를 들면 밥이나 빵 혹은 물고기나 소고기는 저에게 먹힘으로써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의 한 부분이 됩니다. 맛있게 조리된 음식은 우리 몸에 들어가 살이 되고 피가 되며 또 에너지가 됩니다. 먹거리가 우리 몸에 흡수되어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 우리 생명을 유지하듯,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의 삶과 정신이 우리 안에 흡수되어 나의 몸과 분리 될 수 없는 나의 영적 생명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체를 모심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먹음으로써가 아니라 인간에게 먹힘으로써 우리 역시 먹히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밥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의 밥이 되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서로서로가 밥이 되어 줄 때 우리는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도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미사때 마다 하느님을 밥으로 먹음으로써 하느님처럼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밥이 되기를 다짐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자신을 밥으로 내어 주는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신비입니다. 성체성사는 희생의 성사이며 사랑의 성사이고 나눔의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만찬에 참여하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서로간의 일치를 위해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성체 송가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17번과 18번입니다. 이 중에서 18번이 더 우리를 깨어있게 합니다. “17. 선인악인 모시지만 운명만은 서로달라 삶과죽음 갈라진다. 18. 악인죽고 선인사니 함께먹은 사람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성체송가 십팔번에서 ‘함께먹은 사람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라고 노래합니다. 함께 영성체를 똑같이 하지만 그 운명은 서로 달라서 악인은 죽고 선인은 산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운명 중에 나의 운명은 어느 운명입니까? 사는 운명입니까? 죽는 운명입니까?
아무쪼록 이 번 한 주간도 죽는 운명이 아니라 사는 운명이 되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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