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248

데자뷔(deja ve) 안에 자메뷔(jamais ve)

데자뷔(deja ve) 안에 자메뷔(jamais ve)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혹은 ‘가벼움’ 참 고 1.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http://blog.daum.net/m-deresa/12386058 2.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역, 민음사, 2009. 1. ‘데자뷔’는 20세기초 프랑스의 의학자인 플로랑스 아르노(Flornce Arnaud)가 하나의 현상으로 규정하면서 떠오른 용어다. 이를 초능력 현상에 크게 관심을 가졌던 심리철학자 에밀 부아라크(Emile B0irac)가 ‘데자뷔’란 단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모든 예술, 의학, 심리학 영역에서 ‘기억과 망각’에 관한 가설로 차용된 용어다. “뇌가 스치듯이 본 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저장하기 때문..

어디에도 없는 님, 어디에나 있는 님

어디에도 없는 님, 어디에나 있는 님 -시와 복음 연결해 읽어보기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6절)....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오늘 복음을 한용운 시인의 「알 수 없어요」와 연결하여 읽어보기로 한다. ①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②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③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④근원을 ..

모든 경계에는 사랑이 필까?

나의 도라지밭, 나의 잡초밭 모든 경계에는 ‘사랑’이 필까? - ‘모든 희망을 거스른 희망, 희망이 없이도 희망하여’ 참 고 1. 부활6주 요한복음 14. 15-21/ 15.26-16 2. 폴 틸리히, 『경계선 위에서』, 김흥규역, 동연, 2018 3. 레베카 코스타, 『지금 경계선에서』 , 장세현역, 쌤앤파커스, 2011 4.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비평사, 1996 5.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정영목역, 청미래, 2013 1. 수첩에 2020년 5월 계획에 중간고사 끝나면 도라지밭에 야생화 뽑기, 라고 적혀 있다. 4일은 도시, 3일은 시골, 도시인도 아니고 시골사람도 아닌 공간적 경계에 서 있는 사람에게 작년에 농지담당자는 절대농지(반드시 농사를 지어야 ..

책과 램프 사이에서

책과 램프 사이에서 [부활 제4주일(가해) 2020.5.3. 요한10, 1~18] 1. 이 세상엔 수없이 많은 들이 있다. 우리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도 누군가가 열어준 을 통해서, 또 누군가에게 이 되면서 여기까지 걸어 왔다. 모든 은 결국 한 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을 두드리고 통과할 것이다. 시행착오만큼의 을 열고, 닫고, 갇히고...,다시 열고... 생은 단 한 번이지만, 생의 비의를 알려줄 은 단 한 번에 알게되거나 열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절대적인 이 지닌 역설이다. 수없이 많은 문을 두드리고 열었다, 닫고, 갇히면서 아! 이것이 내 생을 끌어가는 이었구나! 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기까지 우리는 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다. 개인적으로 내 생의 을 열어..

예수님은 좌절을 모르는 현실!

‘예수님은 좌절을 모르는 현실!’ -세 번 쓰는 고백록 [부 활 제 3 주 일 (가 해) 2020. 4, 26 Luc. 24,13-35] 1.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무엇 때문에 계속 살아야 하는가?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이 아니면 자신에게 되돌리지 않는 질문들이다. 우리는 지금도 세상을 향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던질 수는 있겠지만, 자신을 향해 ‘마땅한’ 질문을 던지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내가 바뀌어야 한다고 쉽게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죄인이고, 내가 참 부족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순간조차도 어떤 우월의식으로 무장돼 있기 일쑤다. 만약 상대가 “그래 맞아 네가..

나를 만지지 마라-나를 만져 보아라

"나를 만지지 마라-나를 만져 보아라" -‘보고 믿는 신앙’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의 여정에서 [부 활 제 2 주 일 (가 해) 2020. 4. 19. Jean. 20,19-31] 1. 이 글은 ‘보고 믿는 신앙’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의 여정에서, 어떻게 ‘육신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 또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나의 부활’일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려는 글이다.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에만 환호하는 예수님의 팬클럽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 부활을 축하합니다!’ 속에는 분명히 ‘나의 부활도 축하합니다!’라는 의미가 중첩되어야 했을 것이다. 요한복음(20장11-29), 루가복음(1장26-38), 요한네스 로쯔의 『사랑의 세 단계』(서광사, 1991), 장 뤽 낭시..

사랑의 세 단계, 한 인격이 한 인격에게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요한네스 로쯔, 사랑의 세 단계, 심상태역, 서광사, 2005 - 한 인격이 한 인격에게 사랑의 본질은 우리의 파악능력으로부터 벗어난 아무리 해도 결코 완전히 규명할 수 없는 감추인 신비로 나타난다...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래서 달변이 아니라 눌변이다. 플라톤은 에서 "인간 속에서 홀연히 정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불가항력적인 운명으로 인간을 엄습하는 힘"으로 묘사한다. 논리나 이성이나 의지로 제어하지 못하는, 통제할 수 없는, 무모한 것이 사랑이다. "당신의 부활, 그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은 인간이 지닌 모든 에너지들을 움직이고 활성화시키거나 마비시키는 기본적인 힘이요, 이 에너지들을 선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거나 파괴적인 방향으로 이끌수 있는 ..

길위의 미사, 마니피캇(Magnificat)을 노래하는 것!

Magnificat anima mea Dominum, Et exsultavit spiritus meus in Deo salutari meo, quia respexit humilitatem ancillae suae; ecce enim ex hoc beatam me dicent omnes generationes, quia fecit mihi magna qui potens est et sanctum nomen eius; et misericordia eius a progenie in progenies timentibus eum. Fecit potentiam in brachio suo; dispersit superbos mente cordis sui. Deposuit potentes de sede, et ex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