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주님 부활 대축일]2022년 4월 17일

나뭇잎숨결 2022. 4. 16. 16:3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자료1]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주님 부활 대축일 메시지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요한 11,4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부활의 은총과 생명이 온 세상에 함께하기를 빕니다. 특별히 우리와 한 형제인 북한의 형제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이 하루빨리 평화를 되찾아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자연의 생명이 움터 나오는 봄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코로나19로 움츠렸던 우리의 삶이 바야흐로 새로운 생명의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제 팬데믹이 정점을 지나 진정의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으로 움츠려 들었던 우리도 이제 그만 각자의 ‘동굴’에서 나오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해 라자로의 소생을 다시 보면, 이 사건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우리의 부활에 대한 예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약속이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코린 15,13)

 

지난 2년 반 동안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해 우리 모두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 자체가 금지됐던 기간에는 미사도 직접 참례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이 어려운 시간 동안 평화방송 미사나 인터넷 방송 미사가 그나마 많은 위로를 주는 통로의 역할을 고맙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각자의 ‘동굴’에 ‘안전하게’ 또 더러는 ‘안일하게’ 방송 미사에 안주하고 싶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고 불러내시는 듯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고, 방송으로는 미사의 성사성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방송으로 미사를 시청하는 것은 실제로 미사 참례하는 것은 아니기에 완전한 미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만, 다만 몸이 불편하셔서 부득이 성당에 오실 수 없는 분들에게는 여전히 고마운 도구로서 ‘말씀을 묵상하는 기회’로 역할을 계속할 것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죽었던 이를 칭칭 감싸고 있던 천’을 풀어 주어 우리를 자유롭게 걸어가게 해주십니다. 코로나를 겪으며 알게 모르게 더 고착되어 있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기심’이라는 천, 이웃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꺼리는 ‘두려움’의 천, 편안함에 길들여진 ‘안일함’의 천들을 벗어버리고, 하느님 안에서 참 생명의 자유로움으로 나아오라는 초대입니다.

 

새봄, 새싹이 돋는 놀라운 생명의 봄에 우리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초대해 주시는 부르심을 들으며, 자연의 위대함 속에 숨어있는 하느님 선물을 보게 됩니다. 봄의 생명력은 예수님의 부활이 주시는 생명의 선물입니다. 이 생명의 부활절에 저는 세 가지 작은 묵상점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자연의 위대한 생명력과 회복력 안에 담겨있는 생명의 신비에 감탄하고 감동할 수 있는 따뜻한 감수성을 다시 회복해 나갑시다. 뺨을 스치는 봄바람에도 까르르 웃을 수 있었던 그 약동하는 생명의 감수성은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무덤덤과 무표정, 무관심이 우리를 감싸고 있게 내버려 두지 맙시다. 소외된 이웃들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할 수 있는 마음의 따뜻함을 회복하고 그 사랑을 실천해 나갑시다.

 

이 생명의 봄, 부활한 생명의 계절을 통과하며, 참 생명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삶이 팍팍해졌을지라도,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의 생명이 어디로 가는지 하는 궁극의 목적을 잃은 채 의미 없는 분주함에 우리의 삶 전체가 매몰되지는 맙시다. 이 봄의 생명력이 일깨우는, 예수님 부활의 선물인 생명, 그 근원이자 우리가 결국 돌아갈 궁극 목적지인 하느님을 다시금 만나는 시간이 되어 봅시다.

 

우리가 받은 생명을 감사하며 기쁘게 하느님께 사랑의 열매를 바쳐드리기로 결심해 봅시다. 한때 유행했던 표현으로 ‘까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잡아라’, ‘현재를 즐겨라’)이라는 라틴어 표현이 있습니다. 참으로 ‘현재를 즐기는 모습’은 그저 ‘젊음을 엔조이’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실은 ‘하느님께 깊이 감사할 수 있을 때, 현재를 진정으로 즐기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연의 생명력 안에 지금 우리에게도 선물해 주시는 참 생명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힘찬 발걸음을 시작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당신의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고, 마침내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새 생명을 다시 주십니다. 이 봄의 생동하는 생명력 안에 담긴 하느님 생명의 선물을 감사하며, 우리 각자의 힘든 삶 안에도 속 깊이 담겨있는 생명의 선물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곧 새로운 정부가 출범합니다.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에게 당부를 드립니다. 2년 이상의 코로나 사태로 어려우신 분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잘 챙겨주는 정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다양한 세대, 다양한 지역,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고, 우리가 모두 서로 소통하며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큰 고통을 받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 일상의 삶을 회복하기를 평화의 성모님께 전구해주시기를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 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자료2]주님 부활, 새 생명의 길 열어-주님 부활 사건과 부활하신 주님의 실재

 

 

- 가톨릭평화신문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주님 부활 대축일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토대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라는 선포는 신앙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믿음이 아니다. 주님 부활은 인간 역사 안에서 일어난 유일무이한 실제 사건이다. 신약 성경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았던 이들의 증언과 고백이 담겨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보았다”고 말한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성경 속 주님 부활의 증인들을 통해 주님 부활 사건과 부활하신 주님의 실재를 정리해 보았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5장 내용을 새겨보자. 네 복음서가 쓰이기 훨씬 이전인 서기 52~57년 사이 어느 해 파스카 축제가 가까운 봄에 바오로 사도가 쓴 이 서간에는 ‘주님 부활’에 관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다양한 증언과 고백이 정리돼 있기 때문이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3-14)




주간 첫날에 일어난 파스카 사건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부활하셨다고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사흘 곧 3일은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아브라함은 사흘째 되는 날에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칠 장소를 보게 된다.(창세 22,4) 또 요셉은 사흘 만에 그의 형제들을 옥에서 풀어주었고(창세 42,18), 요나는 사흘 밤낮을 하느님께 기도드린 후에야 물고기 배 속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요나 2,2) 이렇게 구약 성경은 사흗날을 ‘해방’ ‘구원’ ‘죽음으로부터의 승리’를 의미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흗날에 부활하신 것은 그 자체가 ‘구원의 결정적 사건’임을 드러낸다.



빈 무덤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묻히신 지 사흗날 곧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예수님의 시신을 염습하기 위해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빈 무덤이 주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이고 확실한 증거는 될 수 없다. 하지만 빈 무덤은 주님 부활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며 핵심적 징표임은 분명하다. 시신이 남아있는 무덤에서 부활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의 빈 무덤을 목격한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에 주님 부활에 관해 군중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설교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29-36)

빈 무덤은 또한 예수님의 육신이 썩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부패와 부활은 양립할 수 없다. 부활은 주님께서 죽음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그분의 존재 안에서 생명이 죽음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 놓여 있었더라면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목격 증인들

주님 부활의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다. 성경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본 목격 증인들이 나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먼저 케파 곧 베드로 사도에게 발현하셨고, 이어 사도들에게, 또 한 번에 500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에게도 발현하셨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오로 서간 등 신약 성경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갈릴래아, 그리고 엠마오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목격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밝힌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만지게 하시고,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신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이끄시며(루카 24,39 참조),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나타나 부활하신 당신 육신이 수난의 흔적을 아직 지니고 있는,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육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요한 20,20.27 참조)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느 인간과 같은 인간으로서 목격자들 앞에 나타나셨다.

눈여겨볼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본 이들이 하나같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루카 24, 16; 요한 21,4 참조) 심지어 베드로 사도도, 사도들도, 마리아 막달레나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주님께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이가 없었다. 자신들 앞에 계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요한 21,12 참조)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은 돌아가시기 전 수난의 흔적을 당신 육신에 그대로 지니고 계셨는데 왜 부활하신 주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을까? 교회는 이 물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과 같으신 분이시지만 부활을 통해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지셔서 당신의 신성을 더욱 드러내시는 새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 참되고 실제적인 육신은 영광스러운 육신의 새로운 특성들도 함께 지니고 있다. 이 육신은 이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원하는 곳에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나타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인성은 더 이상 지상에 매여 있지 않고 다만 성부의 신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정원지기의 모습이나 제자들에게 친숙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 등 얼마든지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이는 분명 그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45항)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수난 전에 야이로의 딸, 나임의 젊은이, 라자로 등을 다시 살리신 것처럼 지상의 삶으로 돌아오신 것이 아니다. 이들은 주님의 권능으로 지상의 정상적인 삶을 되찾았을 뿐이다. 이들은 다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들의 되살아남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주님의 부활은 지상으로 회귀하는 기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당신의 육신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른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신다. 예수님의 몸은 부활을 통해서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진다. 예수님의 몸은 그 영광스러운 상태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하늘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46항)



주님 부활은 인류 부활의 원천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라고 선포했다. 그러면서 바오로 사도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라고 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과 연결되는 이유는 뭘까?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당신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 부활의 근원이며 원천이다. 이에 교회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첫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은 우리 영혼을 의화시키심으로써, 장차에는 우리 육신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 자신 부활의 근원이 되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658항)라고 고백한다.

이는 주님의 부활이 세상의 종말 곧 그리스도의 재림과 긴밀히 연관돼 있음을 보여 준다. 주님의 재림이 모든 인간의 부활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이끌려 간다. 이는 우리가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2코린 5,15) 이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우리가 깨어 있는 마음으로 증거자들에게 귀 기울이고, 주님께서 당신 자신과 증거자들을 언제나 새롭게 공적으로 증거해 주시는 표징들에 우리 자신을 열 때, 우리는 그분이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강조했다.(「나자렛 예수」 2권 344쪽 참조)



 

 

[자료3]URBI ET ORBI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교황 프란치스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행복한 부활절! 행복하고 거룩하며 고요한 부활절!

오늘날 교회의 선언문은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예수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이아".

 

부활절의 발표는 신기루를 보여주지 않으며, 마법의 공식을 밝히지 않으며, 우리가 겪고있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탈출 경로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전염병은 여전히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회 경제적 위기는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우 심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리고 그것은 스캔들입니다 - 무력 충돌은 멈추지 않고 군사 무기고가 강화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의 스캔들입니다.

 

이 복잡한 현실에 직면하거나 오히려 부활절의 발표는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을 주는 사건을 몇 마디로 담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예수 부활했다". 그분은 천사나 귀신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얼굴과 이름을 가진 사람, 육신을 입은 사람, 즉 예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본디오 빌라도 밑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예수이 성경에 따라 그리고 그분 자신이 제자들에게 예언하신 대로 사흘째에 부활했다고 증거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뜻을 끝까지 이루셨기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을 일으키셨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연약함, 우리 자신의 죽음을 짊어지셨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겪으셨고, 우리의 죄악의 무게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을 높이셨고, 이제 그리스도예수 영원히 사시며,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증인들은 중요한 세부 사항을보고합니다 : 상승 한 예수 곰은 손, 발 및 옆구리의 상처를 각인했습니다. 이 상처들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영원한 인장입니다. 육체와 영으로 가혹한 시련을 겪는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상처 속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고, 그들을 통해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전염병 때문에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이들, 병든 이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을 위한 희망이시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의사와 간호사들의 수고를 지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 특히 가장 연약한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며 필요한 보살핌을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전염병과 싸우도록 부름 받고 백신이이 싸움에 필수적인 도구가되는 시점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따라서 저는 "백신의 국제주의"라는 정신으로 국제 사회 전체가 유통 지연을 극복하고 특히 가장 가난한 국가들과의 공유를 장려하기 위해 공동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은 일자리를 잃어버렸거나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적절한 사회적 보호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됩니다. 주님께서 공공 당국의 행동에 영감을 주셔서 모든 사람, 특히 가장 궁핍한 가정이 적절한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염병은 불행히도 가난한 사람들의 수와 수천 명의 절망을 극적으로 증가 시켰습니다.

 

"모든 종류의 가난한 사람들은 희망을 되찾아야합니다."라고 아이티 여행에서 세인트 존 폴 II는 말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티 사람들에게 제 생각과 격려가 오늘 계속되어 어려움에 압도되지 않고 자신감과 희망으로 미래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생각이 특히 여러분에게로 간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이티 자매 및 형제 여러분: 저는 여러분과 가까이 있고, 여러분과 가까이 있으며, 문제가 여러분을 위해 결정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이티 형제 자매 여러분, 이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Risen 예수은 또한 학교나 대학에 다니지 않고 친구들과 시간을 공유하지 않고 오랜 시간을 보내야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상의 관계뿐만 아니라 진정한 인간 관계, 특히 성격과 성격이 형성되는 시대에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지난 금요일 어린이 십자가의 길에서 이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전 세계의 젊은이들과 가까우며, 특히 민주주의에 헌신하는 미얀마의 젊은이들과 가깝고, 그들의 목소리를 평화롭게 듣고, 증오는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분의 빛이 전쟁과 비참함을 피해 이주민들을 위한 중생의 원천이 되기를 빕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갈보리로 승천하시는 주님의 훼손되고 고통 받는 얼굴을 인식합니다. 그들이 연대와 인간 형제애의 구체적인 표징, 우리가 오늘 축하하는 죽음에 대한 삶의 승리의 서약이 부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피난처를 찾는 고통받는 나라들, 특히 시리아 분쟁을 피해 도망친 많은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는 레바논과 요르단을 아낌없이 환영하는 나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어려움과 불확실성의 시기를 겪고 있는 레바논 국민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아 만남과 공존과 다원주의의 땅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가 마침내 사랑받고 고통받는 시리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비인간적 인 상황에 처해 있으며, 귀머거리와 추악한 침묵으로 둘러싸인 예멘과 리비아에서 마침내 십 년간의 분쟁과 피 묻은 충돌에서 벗어나는 길을 볼 수있는 무기의 포효를 끝내기를 바랍니다.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은 분쟁을 종식시키고 전쟁에 지친 국민들이 평화롭게 생활하고 각국의 재건을 시작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부활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갑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주님께 평화와 안전을 간청하며(Ps 122 참조), 모든 사람이 형제처럼 느낄 수 있는 만남의 장소가 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대화의 힘을 재발견하여 안정된 해결책에 도달하고, 평화와 번영 속에서 나란히 사는 두 나라를 볼 수 있기를 간청합니다.

이 축제 날에는 지난달 방문하게 되어 기뻤던 이라크로 향하게 되고, 평화의 길로 계속 나아가 모든 자녀들을 향한 친절하시고 환영하시는 인류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꿈이 실현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부활하신 분의 힘이 내부 폭력과 국제 테러리즘, 특히 사헬과 나이지리아, 티그레이와 카보 델가도 지역에서 그들의 미래가 훼손되는 것을 보는 아프리카 국민들을 지탱해 주시기를 빕니다. 인권과 삶의 신성함을 존중하고, 화해와 효과적인 연대의 정신으로 형제적이고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갈등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많은 전쟁과 너무 많은 폭력이 여전히 세상에 있습니다! 우리의 평화이신 주님께서 우리가 전쟁의 정신력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크라이나 동부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분쟁 중인 포로들인 이들에게 안전하게 그들의 가족들에게 돌아가게 하시고, 전 세계 통치자들이 군비 경쟁을 억제하도록 영감을 주소서. 오늘, 4 월 4 일은 매년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고 인류가 "파괴와 죽음의 함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의 길에서 함께 걷는 것"을 막는 미묘하고 끔찍한 장치인 대인 광산에 대한 세계 기념일입니다. [2]이러한 죽음의 도구가 없는 세상은 얼마나 더 나을 것인가!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올해도 여러 곳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을 거행했는데, 큰 한계가 있으며, 때로는 전례 행사에 참석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한계와 세상의 예배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제거되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상처로 치유되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맙시다(벧전 2,24 참조). 부활하신 분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고통은 변형되어 있습니다. 지금 죽음이 있었던 곳에는 생명이 있고, 애통이 있었고, 이제 위로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예수 우리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셨으며, 우리는 이제 이 치유의 유익한 효과가 전 세계로 확대되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고 거룩하며 고요한 부활절!

 


[1] 2021년 3월 6일 우르에서 열린 종교 간 모임 참조.

[2] 성 요한 바오로 II, 안젤루스, 1999년 2월 28일.

 

 

 

[자료4] 육신의 부활resurrection of the body

 

세상 종말에 “모든 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육신과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부활할 것”(제4차 라테란 공의회)이라는 믿음. 그리스도 교인은 사도신경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고 고백한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다. “하느님은 죽음을 창조하지 않았으나”(지혜 1:13) 인간이 범죄하여 하느님을 저버리게 되자 인간은 “먼지이므로 먼지로 돌아가게”(창세 3:19) 되었다. 죽음의 원인인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그리스도는 죄없는 분이면서도 우리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정죄받고(2고린 5:21) 죄의 벌인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부활함으로 죽음을 극복하였다(로마 6:9-). “죽음아, 네 가시가 어디 있느냐?”(1고린 15:55). 우리가 죽음의 가시를 없이 할 수 있다면 죽음은 명목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는 죄많고 죽어야 할 인간을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장 진지하고 의미있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2고린 5:14). 우리는 성세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의 죽음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로마 6:3). 그래서 우리가 살아 있을지라도 죽은 자로 헤아려지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로 3:3). 이는 신비로운 죽음 즉 죄와 육신과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 세상과 육신은 악마의 권세에 이용되는 도구이다. 세상의 군주인 악마는 이미 심판을 받았으나 세상과 육신은 그리스도 안에 부활할 희망이 있다. 이들은 하느님의 창조하신 것이요 선한 것이다. 육신과 결합하여 세상에 태어난 영혼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으로써 육신과 세상을 구원하여 본래의 선을 회복하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영혼을 살리는 신비로운 죽음을 체험한 그리스도교인도 다른 사람들처럼 죽음을 겪어야 한다. “우리는 육으로는 죽음에 내어준 바 되었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1베드 3:18). 그러나 구원은 전인적(全人的) 구원 즉 영혼과 육신이 함께 구원되어 부활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육화된 영이요, 영성화된 육이다. 영육의 합일체이다.

 

육신부활을 성서는 명시하고 있다. “망자들은 살아 나리라”(이사 26:19). “땅의 먼지 속에 있는 많은 자들이 깨어나리니…”(다니 12:2). 마케베오 시대에는 육신부활에 대한 믿음이 더욱 명확해졌다(2마카 3:9). 그리스도 시대에는 육신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가이들이 이단자로 간주되었다(마태 22:29-32). “때가 올 터인데 그 때에는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다 그의 소리를 듣고 나올 것이며,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에 이르고 약한 일을 행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에 이를 것이다”(요한 5:28). 부활한 육신은 영혼과 육신의 합일체가 되어 다시는 분리되지 않으며, 본래 세상에 태어났던 바로 그 육신이다. 그러면서도 부활한 육신은 고통, 질병, 죽음 등이 없고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켜 그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양이 되게 하실 것”이며(필립 3:20-21), “죽음이 결코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로마 6:9-11). “그래서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묵시 21:3-4). 부활한 육신의 또 다른 특성은 부활한 그리스도처럼 영적인 육신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계약을 벗어나게 된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 때처럼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태 13:43). 그리스도 교인은 이미 이루어진 영적인 죽음이 장차 올 육신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새생명을 얻는 일련의 단계 중 마지막 단계임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