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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카리스테인(εὐχαριστεῖν 감사)’의 원천, 신은 디테일에 있다(미스 반 데어로에)

‘에우카리스테인(εὐχαριστεῖν 감사)’의 원천, 신은 디테일에 있다(미스 반 데어로에)-연중17주,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를 중심으로      1. 나태주, 「오늘도 너를 보았다」   ​오늘도 너를 보았다 / 여적 한 번도 보지 못한 어깨걸이 / 빨강색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너를 보았다 // 무슨 즐거운 일이 있는지 /친구와 웃으며 너는 걸어가고 있었다 / 너를 보았으므로 오늘 하루도 / 나에겐 뜻깊고 보람 있는 하루가 될 것이다 /오늘밤 꿈속에서 나는 또 너를 / 너도 모르게 만날 것이다.   ​나태주의 「오늘도 너를 보았다」는 ‘오늘도 나는 나를 보았다’로 바꿔 읽어도 크게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나태주 현상의 바탕에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감사로..

한낮의 빛이 (밤의)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2)

한낮의 빛이 (밤의)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2)(Wie das Licht des Mittags die Tiefe der Finsternis erfährt)   -연중16주일,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를 중심으로         1. 정지용, 「그의 반」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에 고흔 불/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올라 나래 떠는 금성/쪽빛 하늘에 흰 꽃을 달은 고산식물/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사로 한가로워 항상 머언 이,/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 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나간 시름의 황혼길 위/나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

아포스텔로ἀποστελλω사도 파견,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엇에로의 자유로!

순애 데레사가, 탱큐!  아포스텔로ἀποστελλω 사도, 파견 ,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엇에로의 자유로!-연중15주,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를 중심으로          1. 폴 엘뤼아르, 『자유』     ​나의 노트 위에 / 나의 독서대와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모든 백지위에/돌과 피와 종이 혹은 재위에 /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금빛의 이미지 위에/전쟁의 총칼 위에 제왕의 왕관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정글과 사막 위에/새 둥지 위에, 금작화 위에/내 유년의 메아리 위에/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밤의 경이로움 위에/일상의 흰 빵 위에/약혼시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나의 쪽빛의 옷 조각 위에/..

무능함으로 표현된 사랑, 하느님은 전능하시지만, 사랑이신 하느님은 전능하지 않다!

무능함으로 표현된 사랑, 하느님은 전능하시지만, 사랑이신 하느님은 전능하지 않다!-연중14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1. 이육사,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가 익어가는 계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빛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두렴.(1939년)   7월에 이육사의 「청포도」를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우리는 이육사가 18번이나 옥중생활을 했고, 그렇게 ..

청포도 / 이육사

청포도   - 이육사   내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돚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시(詩)와 詩魂 2024.06.30

길에 관한 독서 /이문재

길에 관한 독서 이문재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 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 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

시(詩)와 詩魂 2024.06.30

오래된 기도 /이문재

오래된 기도 이문재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이 멈추기만 해도 꽃 진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이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 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만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시(詩)와 詩魂 2024.06.30

손의 백서 /이문재

손의 백서 - 이문재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나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가슴이 있는 곳을 찿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머리를 조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으지 않고서는 신이 있는 곳을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아야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손이 손을 잡으면 영혼의 입술이 붉어진다 손이 손을 잡으면 가슴이 환하게 열린다 손이 손을 잡으면 피돌기가 빨라진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기억을 공유한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몸이 몸을 만난다 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 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 나는 손이다 너도 손이다

시(詩)와 詩魂 2024.06.30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황지우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황지우    나, 이번 生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中古品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시계가 오후 2시를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 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괘종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  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膜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 밸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도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

시(詩)와 詩魂 2024.06.30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황지우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황지우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시(詩)와 詩魂 2024.06.30

뼈아픈 후회 / 황지우

뼈아픈 후회             -황지우​​슬프다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다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모두 떠났다.​내 가슴속에 언제나 부우옇게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언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高熱의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

시(詩)와 詩魂 2024.06.30

시에게/황지우

시에게       -황지우                                             한때시에 피가 돌고,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지;그땐 내가 시에 촌충처럼 빌붙고피를 빨고 앙상해질 때까지 시를학대하면서도, 딴에는 시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세상 살기가 폭폭하다고만 투덜거렸던 거라.이젠 시에게 돌려주고 싶어.피를 갚고환한 화색을 찾아주고모시고 섬겨야 할 터인데언젠가 목포의 없어진 섬 앞, 김현 선생 문학비세워두고 오던 날이었던가?영암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에천연 동백숲이 한 壯觀을 보여주는디이따아만한(나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인다) 고목이허공에 정지시켜놓았던 꽃들을 고스란히땅 우에, 제 슬하 둘레에 내려놓았드라고!産달이 가까운 여자후배 하나가뚱게뚱게 걸어서 만삭의 손으로그 동백꽃..

시(詩)와 詩魂 2024.06.30

7월의 바다/황금찬

7월의 바다 -황금찬   아침 바다엔밤새 물새가 그려 놓고 간발자국이 바다 이슬에 젖어 있다.   나는 그 발자국 소리를 밟으며싸늘한 소라껍질을 주워손바닥 위에 놓아 본다.   소라의 천 년바다의 꿈이호수처럼 고독하다.   돛을 달고, 두세 척만선의 꿈이 떠 있을 바다는뱃머리를 열고 있다.   물을 떠난 배는문득 나비가 되어바다 위를 날고 있다.   푸른 잔디밭을 마구 달려나비를 쫓아간다.어느새 나는 물새가 되어 있었다.

시(詩)와 詩魂 2024.06.30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이해인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이해인   7월은 나에게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하얗게 피었다가질 때는 고요히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   꽃은 지면서도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사실은 아무도 모르게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나는 모든 사람들을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그가 지닌 향기를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레일 수 있다면어쩌면 마지막으로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우리의 삶 자체가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하얀 치자꽃 한 송이당신께 보내는 오늘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시(詩)와 詩魂 2024.06.30

7월/목필균

7월  -목필균   한 해의 허리가 접힌 채돌아선 반환점에무리 지어 핀 개망초   한 해의 궤도를 순환하는레일에 깔린 절반의 날들시간의 음소까지 조각난 눈물장대비로 내린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폭염 속으로 무성하게피어난 잎새도 기울면중년의 머리카락처럼단풍 들겠지   무성한 잎새로도견딜 수 없는 햇살굵게 접힌 마음 한 자락폭우 속으로 쓸려간다

시(詩)와 詩魂 2024.06.30

7 월 / 허 연

백련지   칠 월 / 허 연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 붙이고 서 있던 여름날 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 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여름 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시(詩)와 詩魂 2024.06.30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parvenir a soi)과 자신에게 현존하는 것(presence a soi)

사진작가 분이가 태풍이 몰려오기 전, 탱큐!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parvenir a soi)과 자신에게 현존하는 것(presence a soi)- 연중13주,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를 중심으로   ​ 1. 서정주,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머리에 석남꽃 꽂고 / 네가 죽으면 / 머리에 석남꽃 꽂고 / 나도 죽어서 // 나 죽는 바람에 네가 놀래 깨어나면/ 너 깨는 서슬에 / 나도 깨어나서//한 서른 해만 더 살아볼거나/죽어서도 살아나서/머리에 석남꽃 꽂고 / 서른 해만 더 한번 살아볼꺼나​ 서정주,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는 '수삽석남(首揷石枏)'이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이 신라의 설화는 고려 때 박인량이 지은 설화집 에 수록된 것이다. 신라 최항(崔伉)은 자를 석남(石枏)..

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에서 일엽편주를 타고 바다 건너가기

본성과 인격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에서 일엽편주를 타고 바다 건너가기 연중12주,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를 중심으로       1. 오규원, 「고요」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창 앞의 장미 한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고요로 지고 있다   오규원 시인의 「고요」는 우리 내면의 고요와 접촉하는 방법을 보여준 사물시에 해당한다. 고요하면 떠오르는 내적평점심이라는 관념을 지우고 오직 잠잠하고 고요한 상태란 무엇인가를 드러낸 시이다. 모든 사물은 고요하다는 명제를 던진 셈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