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도서관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아니 깨어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도서관 환상을 갖고 있는 이들에 대해 혈육애적인 친연성을 저버릴 수 없다.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눈이 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야말로 도서관 환상의 지존인지도 모른다. 195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쓴 <파스칼의 구체(球體)>(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박병규 옮김)는 그가 지닌 도서관 환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는 보르헤스 문학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벨의 도서관, 도서관 환상이란 세계를 하나의 패턴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이며, 그 텍스트에는 몇 개의 구성원리가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통찰이다. 이것은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불교적사유와 그 맥이 닿아 있기도 하다. 즉 우주 전체를 응축한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 음유시인 크세노파네스는 이 도시 저 도시로 돌아다니며 호머의 시구를 음송하는 데 신물이 났기 때문에 신들에게 인간적 측면을 부여한 시인들을 책망하고, 그리스인들은 하느님 같은 유일신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유일신이란 바로 영원한 구체였다. 플라톤의 ꡔ티마이오스ꡕ를 보면, 구체는 표면의 어느 지점에서나 중심과 등거리이므로 가장 완벽하고 가장 균일한 형체라고 한다. 올로프 지곤 해석에 따르면, 크세노파네스 얘기는 유비이다. 즉 하느님이 회전타원체라고 한 까닭은 이 형태가 신성을 표상하기에 가장 좋은, 적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크세파노스 로부터 40년 후, 파르메니데스도 동일한 이야기를 했다(“존재(the Being)는 아주 둥근 구체와 유사한 것으로, 그 힘은 중심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일정하다”). 칼로헤로(Calogero)와 몬돌포(Mondolfo)는 파르메니데스가 무한한 구체, 다시 말해서 무한히 증가하는 구체를 직관적으로 파악했으며, 내가 괄호 안에 인용한 말은 역동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이탈리아에서 가르쳤다. 그가 죽고 몇 년 후, 시실리아인 엠페도클레스는 정교한 우주발생론을 만들어냈다. 이 우주발생론의 어느 단계에 이르면 흙, 물, 공기, 불의 원소들은 무한한 구체, 즉 “순환의 고독을 즐기는 ‘둥근 구체’(Sphairos redondo)”를 형성한다.
세계사는 계속 진행됐고, 크세노파네스가 공격했던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은 시적 허구나 악마의 위치로 떨어졌다. 그러나 한 신은, 즉 ‘삼중으로 위대한 헤르메스’(Hermes Trismegisto)은 수많은 책을 구술했으며(클레멘트에 의하면 42권, 이암블리쿠스에 따르면 2,000권, 헤르메스의 다른 이름인 토드(Thoth) 신의 사제들에 따르면 36,525권), 그 책 속에는 모든 것이 다 씌어져 있다고 한다. 3세기부터 편찬된 혹은 날조된 이 허황한 도서관의 한 부분이 이른바 헤르메스 총서(Corpus Hermeticum)이다. 12세기 말 프랑스 신학자 알랭 드 릴(Alain de Lille, 또는 Alanus de Insulis)은 이 총서에서, 어떤 사람 얘기로는, ‘삼중으로 위대한 헤르메스’가 썼다고 여기는 ꡔ아스클레피오스ꡕ(Asclepius)에서 후세 사람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발견했다. “하느님은 지적인 구체이며, 그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나 원주(圓週)는 어느 곳에도 없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끝이 없는 구체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알베르텔리 생각에 따르면(전에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랬듯이) 이런 얘기는 주사(subject)와 빈사(predicate)가 서로를 부정하므로 형용모순이다. 이것이 진리이겠지만, 헤르메스 책의 공식에서 우리는 그러한 구체를 어느 정도 직관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8세기에 이르면 상징적인 작품 ꡔ장미 이야기ꡕ에서 다시 나타나고 -이 책에서는 플라톤의 말이라고 한다-, 백과사전 ꡔ삼중의 거울ꡕ(Speculum Triplex)에서도 나타난다. 16세기에 들어서면, ꡔ팡타그뤼엘ꡕ 마지막 권 마지막 장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그 지적인 구체, 그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나 원주는 어느 곳에도 없는 그 구체를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중세의 정신으로 보면 그 의미는 명백하다. 즉, 하느님은 개개의 피조물 내에 있으나 어느 피조물도 ‘주’를 제한하지 못한다. “저 하늘, 저 꼭대기 하늘도 주를 모시지 못할 것이다”고 솔로몬은 말했다. 구체에 대한 기하학적 은유는 이 말의 주석으로 여겼다.
단테의 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담고 있다. 이 우주론은 천 사백년 동안 인간의 상상력을 지배했던 것으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었다. 지구는 부동의 구체이며, 그 주위로 9개의 구체가 동심원을 이루며 회전한다. 그 중 처음 7개는 행성의 하늘이다(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의 하늘). 여덟번째는 붙박이 별들의 하늘이고, 아홉번째는 ‘원동자’라고 부르는 크리스탈 하늘이다. 이 하늘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빛으로 된 엠피리우스(Empyrius)이다. 텅비고, 투명하며, 회전하는 구체들로(어떤 체계에 의하면 55개이다) 이루어진 이 정교한 조직은 정신적 필수품이 되기에 이르렀다. ꡔ천체의 운동에 관한 가설ꡕ은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을 부정했던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저술에 붙인 소심한 제목이었는데, 이제 우리들의 우주관이 되었다. 어떤 사람, 즉 지오다르노 브루노같은 사람이 보기에 창공에 균열이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해방이었다. 브루노는 ꡔ성회 수요일 만찬ꡕ에서 세계는 무한한 원인의 무한한 결과이며, 하느님(divinity)은 가까이에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우리들 가운데 있다는 것보다 더욱 우리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브루노는 사람들에게 코페르니쿠스적 공간을 설명해 줄 말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널리 알려진 어느 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이제 우리는 우주가 만물의 중심이라고, 다시 말해서 우주의 중심은 도처에 있으며, 원주는 어느 곳에도 없다고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다.”
의기양양한 이 글은 1584년, 그러니까 아직도 르네상스가 빛을 발하던 시기에 씌어진 것이다. 이로부터 70년 후에는 그와 같은 열정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꼈다. 과거와 미래가 무한하다면 사실 ‘언제’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시간 속에서 길을 잃었고, 각 존재가 무한한 것으로부터 그리고 무한소로부터 균등한 거리에 있다면 ‘어느 곳’이란 없기 때문에 공간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어떤 날, 어떤 장소에 있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랐다. 르네상스기에 인류는 청년기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으며, 브루노, 캄파넬라, 베이컨의 입을 통해서 이를 천명했다. 17세기에 인류는 노쇠했다는 느낌에 풀이 죽었다. 이를 합리화하려는 시도에서 모든 피조물은 아담의 죄과 때문에 숙명적으로 완만하게 타락한다는 믿음이 생겨났다.(창세기 5장에는 “므두세라는 모두 구백 육십구년을 살고 죽었다”고 하며, 6장에는 “그 때 세상에는 느빌림이라는 거인족이 있었다”고 한다.) 존 단(John Donne)은 비가 ꡔ세계의 해부ꡕ 출판 1주년에 즈음하여 요즘 사람들은 요정이나 피그미 족처럼 키가 작고 수명이 너무 짧다고 한탄했다. 존슨(Johnson)이 쓴 전기에 따르면, 밀턴은 이제 지상에서 서사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글랜빌(Glanvill)은 “하느님의 훈장”, 아담은 망원경과 현미경에 재미를 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로버트 사우스(Robert South)는 유명한 글을 썼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이라도 아담의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으며, 아테네도 천국의 초보 상태에 불과하다.” 풀 죽은 이 17세기에 이르면, 루크레티우스의 6운각 시에 영감을 주었던 절대공간, 그리고 브루노에게 하나의 해방이었던 절대공간은 파스칼에게는 미로이고 심연이었다. 파스칼은 우주를 증오했으며, 하느님을 숭배하고 싶었으나 하느님보다는 증오스러운 우주가 더 현실적이었다. 하늘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탄식했으며, 우리의 삶을 무인도에 도착한 난파자의 삶에 비교했다. 물리적 세계의 중압감을 끊임없이 느꼈고, 현기증과 두려움과 고독을 느꼈다. 그는 이런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연은 무한한 구체로, 그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나 원주는 어느 곳에도 없다.” 브룽스비(Brunschvicg)판에는 이렇게 되어 있으나, 원고에서 망설이고 지워진 곳까지 재생해낸 투르네(Tourneur)의 원전 비평 연구판(Paris, 1941)을 보면 파스칼이 ‘소름끼치는’(effaroyable)이라는 단어로부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소름끼치는 구체, 그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나 원주는 어느 곳에도 없다.”
어쩌면 세계사는 몇 가지 비유에 대한 다양한 억양의 역사이다.◇
그는 직선적인 시간과 전혀 다른 종류의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가령 어떤 살인사건이 있을 때, 그것은 그 이전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에 따라 그 성격이 전혀 달라진다. 그중 “어떤 것은 상징적, 어떤 것은 초자연적, 어떤 것은 탐정소설적, 어떤 것은 심리적, 어떤 것은 공산주의적, 어떤 것은 반공산주의적 등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허버트 쾌인…>) 시간이란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처럼 어떤 사건들, 어떤 요소들이 만나면서 다르게 분기하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 그는 시간이 모든 반복에 차이를 새겨넣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그는 세르반테스의 소설과 단어 하나, 쉼표 하나 다르지 않은 동일한 문장이 20세기 프랑스에서 씌어졌을 때 내용이나 문체에서 모두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을 능청스런 말투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시간은 그 안에 새로이 차이가 끼어들 수 있는 수많은 공백을 포함하고 있다. <비밀의 기적>에서 체포되어 총살당하기 직전의 작가는 총알이 날아오는 사이에 자신의 작품을 완성할 시간을 얻어 작품을 완성하고 그 직후 날아온 총알에 죽는다. 총알이 나는 사이, 1년의 시간이 끼어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총을 쏜 사람에게는 지각되지 않는 시간이다. 빠르게 날아가는 우주선 안에서 자신이 느끼는 시간과 그것을 밖에서 보는 사람에게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안다면, 이런 상상을 그저 황당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심지어 그는 1946년의 열망에 의해 1904년의 죽음을 고쳐 죽는 사람을 통해 현재를 통해 과거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가 질문한다(<또 다른 죽음>). 이러한 시간의 사유를 통해 시간이란 동일한 속도로 한 방향으로 흐르는 죽음의 신이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의 차이와 변화에 열린 생성의 지대임을 보여준다.
또 그는 <죽지 않는 사람>을 빌어 불사에 대해 말한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이 불사의 존재임을 확인한 수, “불락에서 <천일야화>를 필사하기도 하고, 사마르칸드의 감옥에서 장기도 두고, 보헤미아에서 점성학을 연구하기도” 하며 수많은 삶을 산다. 불사의 존재란 이처럼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따라서 불사의 존재란 끊임없이 죽는 존재고, 그 모든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삶 안에 담을 수 있는 존재다. 죽음을 거부하고 기존의 동일한 삶을 지속하려는 집착을 던진다면, 사실은 우리 모두가 불사의 존재임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자 했고, 세상의 모든 삶의 살고자 했던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 알려줄 말을 찾는다. 세상의 모든 말들을 응축한 하나의 말, 신의 말을 찾아나선다. 가령 집합론에서 말하는 실수의 ‘농도’(쉽게 말하면 ‘갯수’)인 알렙이 그것이다. 모든 실수를 포함하는 하나의 수. 그것을 통해 우주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존재자를 본다. 먼지 하나에 시방삼세의 우주 전체가 담겨 있음을 보았던 의상대사처럼. 그리고 모든 존재자가 그렇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인간의 언어들에서조차 우주 전체를 암시하지 않는 발화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즉 ‘호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를 낳은 호랑이, 그가 삼켜버린 사슴들과 거북이들, 사슴들이 뜯어먹은 목초, 목초의 어머니인 대지, 대지를 낳은 하늘을 말하는 것이다.”(<신의 글>)
그가 말해준 것을 그저 ‘패스티쉬’나 진실의 허구성에 대한 것으로 밖에는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덕분에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말해준 것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들도 있었다. 푸코나 들뢰즈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들은 것이 보르헤스의 비밀의 전부가 아닌 한, 다시 그의 말에 귀기울이고, 그가 알려준 비밀을 다시 말하는 사람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 틀림없다
세상사를 경험하는 사람은 바로 다른 나(el otro), 보르헤스이다.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를 걸으면서 철문과 현관 아치를 눈여겨보려고 별 생각 없이 발길을 멈추기도 한다. 우편물을 통해 보르헤스의 소식을 듣고, 교수 명단이나 인명 사전에서 그의 이름을 본다. 또한 모래시계, 지도, 18세기의 활판 인쇄, 어원학, 커피 맛, 그리고 스티븐슨의 산문을 좋아한다. 다른 나도 역시 이런 것을 애호하지만, 허세를 부려 한 배우의 특성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들 관계가 적대적이라고 한다면 과장이리라. 왜냐하면 내가 살아야, 그냥 이렇게 살아가야 보르헤스는 문학을 만들 수 있고, 나아가서 그 문학은 나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나는 보르헤스가 가치 있는 글을 몇 편 썼다는 사실은 별 어려움 없이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이 나를 구원할 수는 없다. 좋은 글은 다른 나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라 언어나 전통에 속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내 자신은 틀림없이 소멸될 운명이며, 단지 나의 삶의 어떤 순간만이 다른 나에게서 살아 남을 것이다. 나는 과장하고 거짓을 꾸미는 보르헤스의 못된 습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조금씩 모든 것을 양보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만물이 제 모습으로 존속하기를 바란다고 얘기했다. 돌은 영원히 돌이고자 하며, 호랑이는 영원히 호랑이이고자 한다. 나는 내가 아니라(나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다) 보르헤스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책에서보다는 다른 일에서, 예컨대 힘들게 연주하는 기타 소리에서 내 자신을 더 잘 인식한다. 몇 년 전, 나는 보르헤스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도시 변두리에서 떠도는 전설적인 얘기를 다루기도 했고 시간과 무한을 가지고 놀이하기도 했으나 이제 그러한 놀이는 보르헤스의 것이 되어버려 나는 다른 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처럼 나의 인생은 덧없이 사라지고, 나는 모든 것을 잃고 있다. 그 모두는 망각 속으로 사라지거나 혹은 다른 나의 것이다.
나는 둘 중 누가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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