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현자에게는 만물이 친구이고 그에게 바쳐진 것이며, 모든 체험이 유익하고, 매일매일이 신성하며, 모든 인간이 신과 같은 존재이다.
- 토마스 에머슨
존재의 목적을 가르치는 교사
- 내가 좋은 시선으로 인간들을 보건 나쁜 시선으로 인간들을 보건, 나는 인간 전체이건 특별히 각 개개인이건 간에 그들이 하나의 과제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 종의 보전에 도움이 되는 것을 행하는 것. 더군다나, 실제로는 이 종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에게 저 [보존] 본능보다 더 오래되고 더 강하고 더 무자비하고 더 이기기 어려운 것이 없기 때문에, - 이 본능이 정말로 우리 종과 우리네 무리의 본질 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는 아주 재빠르게, 습관적인 근시안을 가지고, 다섯 걸음 떨어져서 우리의 이웃을 이로운 인간과 해로운 인간,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으로 분명하게 분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고려를 하고 전체[적인 작용]에 대해 더 긴 숙고를 하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분명한 구분과 분리 행위를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고, 끝내는 그것을 단념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해로운 인간 역시도 종의 보전이라는 관점에서는 언제나 가장 이로운 인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그의 작용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충동들을 유지시켜 주었기 때문인데, 그 충동들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오래 전에 쇠약해지거나 부패해버렸을 것이다. 증오,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것, 약탈욕과 지배욕, 그리고 지금까지 악하다고 불려왔던 모든 것, 그것은 종의 보전을 위한 놀라운 경제에 속한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비용이 많이 들고 낭비적이며 전체적으로 가장 어리석은 경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 하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 종을 보전해왔다는 것은 증명될 수 있다 . 나는 아직 모르겠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요 이웃이여, 네가 도대체 종에게 불리하게, 즉 "비이성적"이고 "나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종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수천 년 이래로 이미 사멸해버려서 이제는 신조차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너의 가장 좋은 욕구와 가장 나쁜 욕구에 몰두하고, 무엇보다도 땅으로 내려가라 geh's zu Grunde ! - 그 두 가지 일 속에서 어쨌든 너는 언제나 인류의 촉진자요 은인일 수가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해 너를 칭송하는 자 - 그리고 너를 조롱하는 자 역시도, 너에게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너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철저하게] 너의 가장 좋은 점 안에서까지도 개별자인 너를 조롱할 수 있는 자를, 파리와 개구리 같은 너의 가장 큰 비참함을 그것이 마치 진리인 양 너에게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는 자를! 모든 진리에서 [나오는 웃음으로] 웃기 위해서 한껏 자기 자신을 비웃는 것, 그것을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가장 좋은 자들도 충분한 진리 감각을 갖고 있지 못했고 가장 재능 있는 자들도 너무 적은 천재성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웃음에게도 아직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 때에는, "종은 모든 것이요 개인은 항상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명제가 인간 자체 Menschheit 에 결합되어, 각자에게 매순간 이 마지막 해방과 무책임성에 이르는 문이 열려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되면 웃음은 지혜와 결합되게 될 것이고, 이제는 단지 "즐거운 앎"만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기까지 당분간은 사정이 완전히 다를 것이고, 그러기까지 당분간은 실존의 희극 그 자체는 아직 "의식되지" 않을 것이고, 그러기까지 당분간은 비극의 시대, 도덕의 시대, 종교의 시대가 계속될 것이다. 저 도덕과 종교의 창설자들, 저 도덕적 가치 평가를 둘러싼 투쟁의 창시자들, 저 양심의 가책과 종교 전쟁을 가르치는 자들이 항상 새롭게 출현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무대 위의 이 영웅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이 동일한 무대의 영웅들이 있었으며, 나머지 모든 것들,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너무나 순간적일 뿐인 것들은, 기계 장치나 무대 배경으로서 아니면 심복과 시종의 역할을 하면서 언제나 이 영웅들을 준비하기 위한 역할을 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시인은 언제나 어쨌건 간에 어떤 도덕의 시녀였다.) - 이들 비극 배우들 역시도, 그들이 신의 이익을 위해 아니면 신의 사자로서 일을 한다고 믿었을는지는 모르지만, 종 에게 이익이 되도록 일을 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또한 그들은 삶에 대한 믿음을 촉진시킨다는 점에서 종의 삶을 촉진시키고 있다. "사는 것은 가치가 있다 - 그들 각각은 이렇게 외친다 - 이 삶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삶은 그 뒤에, 그 아래에 뭔가 의미심장한 것을 갖고 있다, 주의 깊게 처신하라!" 최고의 인간과 최하의 인간에게서 한결같이 군림하는 저 충동, 즉 종의 보전이라는 충동은, 이따금 정신의 이성이나 정신의 열정으로서 분출한다. 그 때에 그것은 자기 주변에 빛나는 이유들을 수행하게 되어 , 온 힘을 다해서 그것이 밑바닥에서는 충동이고 본능이고 어리석음이며 무근거라는 것을 잊게 만들고자 한다. 삶은 사랑 받아 야만 한다 , 뭐라해도 !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이웃을 촉진시켜 야만 한다 , 뭐라해도 ! 또한 이 모든 <해야만 한다>와 이 모든 <뭐라해도>는 무어라 불리며, 미래에는 또 무어라 불릴 수 있겠는가! 그것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항상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런 목적 없이 일어나던 것이 지금부터는 어떤 목적을 향해 행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 이성으로서 그리고 마지막 목적으로 이해된다는 것, - 그것을 위해서 윤리 교사가 실존의 목적을 가르치는 자로서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그는 두 번째의 다른 실존을 발명하고, 그의 새로운 기법을 써서 이 오래된 최하의 실존을 그의 오래된 최하의 낚시바늘로부터 빼낸다. 그렇다! 그는 우리가 실존을 비웃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으며, 또한 우리 자신을 비웃는 것을, 또한 그를 비웃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 그에게 개인은 항상 개인이며, 최초이고 최후인 엄청난 그 무엇이다. 그에게는 어떤 종도 어떤 총합도 어떤 영(零)도 없다. 그의 발명과 가치 평가 역시도 얼마나 어리석고 공상적인 것일 수 있는가. 그는 얼마나 자연의 행보를 오해하고 있으며 그의 조건을 부인하고 있는가. - 또한 지금까지 모든 윤리들은 그것이 인류를 장악했을 경우에 그 하나 하나의 윤리로 인해 인류가 땅으로 내려가게 될 정도로, 얼마나 어리석고 반자연적이었는가. - 하지만! "영웅"이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올 때마다 새로운 무언가가 성취된다. 웃음의 전율스런 대립물이, "그렇다, 사는 것은 가치가 있다! 그렇다, 나는 살 가치가 있다!"라는 생각으로 많은 개별자에게 저 깊은 떨림이 성취되는 것이다. - 삶과 나와 너와 우리 모두가 서로 다시 얼마간 흥미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 시간이 지나면서 그 때까지 이들 위대한 목적의 교사들 각각을 웃음과 이성과 자연이 지배하게 되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마침내 짧은 비극은 언제나 실존의 영원한 희극을 넘어가고 또 그리로 되돌아가며, 그리고 "무수한 홍소의 물결" - 아이스킬로스와 더불어 말한다면 - 은 끝내는 이 가장 위대한 비극 시인들 위로도 내리쳐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수정을 필요로 하는 이 모든 웃음에도 불구하고, 저 실존의 목적을 가르치는 자가 언제나 새로이 출현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 본성은 변하게 될 것이다. 인간 본성은 지금 하나의 욕구를 더 갖게 되었는데, 그 욕구는 저 "목적"의 교사와 "목적"의 가르침이 항상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욕구이다. 인간은 점차로, 다른 모든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의 실존-조건을 더 성취해야만 하는, 환상적인 동물이 되어갔다. [그 실존 조건이란,] 인간은 그가 왜 존재하는지 알기 위해서, 그의 종은 삶에 대한 정기적인 신뢰 없이는 번성할 수 없다는 것을 믿어 야만 한다 [는 것]! 그리고 삶 속에 이성이 있다 는 믿음 없이는 [번성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나 반복해서 인간 종은 때때로 이렇게 선포할 것이다: "절대로 더 이상은 조롱되어서는 안 되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신중한 친구는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웃음과 즐거운 지혜뿐 아니라 그 모든 숭고한 비이성을 갖고 있는 비극적인 것 역시도 종의 보존의 수단과 필연성에 속한다!" -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오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해하는가? 이 새로운 밀물과 썰물의 법칙을 이해하는가? 우리에게도 역시 우리의 때가 있다!
- 니체, <즐거운 학문>, 책세상, 2005, pp 65~69.
1.
가끔 젊은 친구들의 실패한 사랑이야기의 카운슬러가 될 때가 있다. 예전같았으면 무조건 좋았던 시간을 생각해서 힘들지만 빨리 잊거나 아님 용서해, 라고 말했을 것을, 요즘은 그리우면 그리워 해, 그러나 증오스러우면 그 증오에서 빨리 벗어나려 하지 말고 증오해, 라고 말해 준다. 물론 증오해!, 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행동화 하라는 말이 아니다. 알아 듣는 친구도 있고 대부분 이해 안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움과 증오는 같은 얼굴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감정마져도 취사선택 하는데 익슥해져 있다. 칠정에도 등급을 매긴다. 혹은 평정심만을 인간다움이라고 교육받았다. 그럼 묻는다. 여행할 때 바리바리 한국음식 싸갖고 가는 게 좋을까, 그 곳의 음식을 맛보는 것이 좋을까? 여행할 때 눈과 다리만 갖고 가야할까? 아님 혀도 갖고 가야 할까? 여행을 할 때는 그 지방, 그 나라의 음식을 필히 맛봐야 한다. 사랑을 할 때와 이별을 할 때를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안될까? 이별의 맛은 쓰다. 어떤 미사여구를 끌어대도 쓰다. 몰핀이 없다. 지금은 증오와 혐오의 념을 발하는 어제의 연인이 한때는 얼마나 달콤한 애무를 주고받았던 가를 경악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증오라는 거친 포옹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역시 사랑의 다른 얼굴이고, 인생이며, 이별의 진액이라고, 이름이 떠오르는데도 어떤 느낌도 일지 않는 망각이야말로 두 사람은 식물의 관계로 접어든 것이니 그 상태를 앞당기려 하지 말라고... 이별은 인생에서 낯설고 톡쏘는 향신료를 넣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이별다운 이별을 하면 된다고 말해준다. 가장 처절하게. 아프지 않고 그럭저럭 살다가려면 아예 사랑 같은 것을 하지 않으면 된다. 우리는 육체를 갖고 인간이란 이름으로 이 별에 여행 왔다. 그러니 이 땅이 주는 음식, 生이 주는 낯선 음식들을 낱낱이 맛봐야 한다. 모든 것을 맛보는 것이 행복이다. 사람들이 규정한 행복론에서 발을 빼라, 감정의 식물인간으로 무료하게 살다 가는 것이 소원이라면 모를까.
2.
어제는 도서관에 가다 보니, 내 소지품 모두 빨간색인 거다. 지갑, 시계줄, 노트표지, 장갑... 빨간색을 좋아하면 나이가 든 징조라 하더니 그런가 보다. 빨간색 간판은 왜 그리 눈에 들어오는지. 빨간 코트를 입고 앞에서 걸어 오는 젊은 친구가 왜 그리 이쁜지... 한때는 초록색이 날 사로잡았다. 매일 산에 다녔다. 초록에 취해. 나뭇잎숨결이란 닉도 그 때 진 거 같다. 빨간색을 보면 기분이 그냥 좋다. 지금은 빨간색의 아름다움에 취할 때인가 보다고 생각한다.
3.
지식이 지혜의 걸림돌이라 생각해서인가, 그동안 <즐거운 지식>으로 번역되던 제목이 <즐거운 학문>으로 바뀌었다. 지혜는 지식의 걸림돌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지식은 지혜로 가는 이정표일 수 있다. 어찌되었건 <즐거운 학문>에서는 생에 대한 긍정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니체 특유의 신랄한 어조로 '인간이여, 땅으로 내려오라'고 외치고 있다. 선과악이라는 이분법, 착함 컴플렉스에 대한 경계다. 니체의 어조는 누가 번역하든 통쾌하다. 이 역시 연구의 대상이 아닐까 싶다. 니체가 땅으로 내려오라고 하는 것이 하늘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말해진 것과 말하지 않음으로 이미 말하고 있는 것을 종합해 읽어야 한다. 땅과 하늘은 결코 이분될 수 없다. 니체가 말하는 지식 혹은 학문은 삶의 이분법을 극복한 생의 어떤 체험에 대해서도 긍정하라, 를 의미한다. 악인마져도 인간이라는 종의 보존에 기여했다고 역설한다. 붓다에게 상한 음식을 올린 제자에게 열반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보시었다고 위로한 부처와 십자가에서 우도뿐 아니라 좌도, 원수를 향해 축복을 빌어준 예수가 생각난다. 빛은 어둠을 배제하지 않는다. 빛은 어둠과 공존한다. 그러니까 빛이다. 부분긍정이 아니라 대긍정이다. 행복뿐 아니라 고통까지도 찬미하는 삶, 고통을 찬미할 때 이미 그 것은 고통이 아니겠다. 고통에서 도피한 것과 초월한 것은 분명 다르다. 이 시대에 니체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 니체가 말하는 학문이나 지식은 상아탑의 전유뮬이 아니라 우리가 디딘 이 땅에서 맛보는 생의 모든 것이리니. 생이 어찌 맛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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