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그리크 뒤라스, 김용주 옮김, <고독한 글쓰기>, 창작시대, 1997
나는 글을 쓰지 않을 때도 그가 선물로 주고간 ‘펠리컨(Pelikan)’과 ‘파버카스텔(Faber Castell)’을 자주 만지막 거린다. 플로베르가 말한 일물일어설의 언어를 찾고 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내가 쓴 언어는 늘 나를 배신한다. 과장되거나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마르그리크 뒤라스, 김용주 옮김, <고독한 글쓰기>는 품절된 책이다. 그는 "우리가 혼자 있게 되는 곳은 집이다. 집을 벗어나면 혼자가 아니지만, 집안으로 들어오면 혼자이다. 공원에는 새들도 있고 고양이들도 있다. 또 어느 때는 다람쥐도 있고, 흰족제비도 있다." 완벽한 혼자를 좋아했던 사람인 듯하다.
우리는 가끔 집안에서 짙은 외로움으로 서성이곤 한다. 나는 문득 이 집에 10년이나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나 홀로 말이다. 그리고 내가 과거에도 작가였고 현재도 작가라는 사실을 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일깨워주려는 책을 쓰기 위하여. 그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일은 제대로 이루어졌나? 우리는 그 일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노플 르 샤토에서 겪은 고독은 나 자신으로 인하여 생겼다는 사실이다.
나를 위하여. 내가 혼자인 것은 이 집에서 뿐이다. 글을 쓰기 위하여. 내가 지금까지 써 온 것처럼 쓰지 않기 위하여. 그러나 나 자신도 모르고, 아직 결정하지도 못하고, 결코 누구에 의해서도 결정될 수 없는 책을 쓰기 위하여. 나는 그곳에서 '롤 발레리 스탱의 활홀경'과 '부영사'를 썼으며, 그 이후에는 다른 책도 여러 권 썼다. 나는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내 방식만의 글쓰기가 있는 유일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아마 십 년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나는 쓰는 데 걸렸던 시간도 좀처럼 계산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아주 짧은 시간조차도 쉽사리 계산하지 못했다. (중략)
나는 초기 작품들에 나타나는 그런 고독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다녔다. 어디에 가든 항상 내 글쓰기는 나를 따라 다녔다. 파리에도. 트루빌에도, 또 뉴욕에도. 내가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롤라 발레리 스탱의 변전을 중단했던 곳은 트루빌이다. 얀 앙드레아 스테너란 이름이 나에게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연상된 곳도 역시 트루빌이다.
글쓰기의 고독도 일종의 고독이다. 고독하지 않으면 글쓰기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니면 쓰기는 아직도 무엇인가 쓸거리를 찾는 것에 다 닳아져 버린다. 핏기가 없는 쓰기는 저자에 의해서도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비서가 아무리 유능하다 하더라도 결코 그에게 받아 쓰도록 해서도 안 되고, 그 단계에서 결코 출판업자에게 읽어 보라고 주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책을 쓰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가 항상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고독이다. 그것은 저자의 고독이고, 쓰기의 고독이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위하여 우리는 자기 주변에 무엇인가 그런 침묵이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실제로 집안에서 우리는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든, 낮에도 켜놓은 램프의 불빛이든 온종일 빛이 있을 곳에서 작업을 한다. 육체의 실제적인 고독은 침범할 수 없는, 쓰기의 고독이다. 나는 그것에 관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고독을 느끼던 그 시기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바로 글을 쓰는 것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레이몽 크노를 통해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레이몽 크노의 유일한 판단은 "쓰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삶을 충만하게 만들고 매혹시키는 유일한 일이었다. 나는 글을 썼다. 글쓰기는 나의 뇌리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다.
내 침실은 침대도 아니고, 이곳 파리도, 트루빌도 아니다. 그곳은 어떤 창이고, 검은 색 잉크로 쓰는 습관과 희미한 잉크의 흔적들이 있는 그런 탁자이고, 그런 의자이다. 그것은 어디에 가든, 어디에 있든, 글을 쓰지 않는 장소에서도 내가 항상 되찾게 되는 어떤 습관, 예를 들면 호텔 방에서처럼 불면증으로 시달릴 때나 갑작스런 절망을 느낄 때를 대비해 여행용 가방 속에 항상 위스키를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다. 그럴 때면 언제나 나에게는 연인들이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연인이 한 명도 없었던 적은 거의 없다. 연인들은 노플에서 고독을 느낄 때 생겼다. 그리고 나는 그 매력적인 연인들에게 차례로 여러 권의 책을 쓰리라고 종종 약속하였다. 나는 좀처럼 그 연인들에게 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자기가 쓴 책들을 연인들에게 읽어보라고 해서는 안된다. 나는 한 장을 끝내면 그것을 감추고 그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그 일은 사람들이 아내가 있을 때나 남편이나 연인이 있을 때와 다르게 다른 곳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자문해 볼 만큼 사실적이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연인들에게 남편의 사랑을 감출 수밖에 없다. 나의 사랑은 겨로 대체되지 않았다. 나는 살아가면서 매일 그런 사실을 느낀다.
우리는 고독을 느끼지 못하면서 고독해 한다. 고독은 그 자체로 이루어진다. 나는 고독했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 있지 않으면 안 되고, 책을 쓰려면 혼자 있게 될 곳도 바로 그 곳이라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는 그 집에 혼자 있었다. 나는 그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물론 나 역시 무서웠다. 그 뒤 나는 그곳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집은 글쓰기의 장소가 되었다. 나의 책들은 그 집에서 잉태된 셈이다. 그런 빛에서, 그 공원에서, 연못에 비친 반사광에서 잉태된 셈이다. 내가 방금 전에 말한 그것을 쓰는 데 20년이 걸렸다.
트루빌에는 해변도 있고, 바다도 있고, 광활한 하늘과 모래 사장도 있다. 맞아. 그곳에는 고독이 있다. 내가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았던 곳도 바로 트루빌이다. 트루빌은 바로 내 일생의 고독이다. 내 주위에는 아직도 떨쳐버릴 수 없는 고독이 있다. 이따금 나는 문이란 문을 모두 닫고, 전화도 끊고,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왜 쓰는지, 왜 쓰지 않는지는 결코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고독이란 또한 죽음이나 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알코올을 뜻한다는 게 보다 더 적실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위스키를 의미한다. 나는 그때까지 결코 책을 시작할 수 없었다. 진짜 결코. 그게 아니라면, 나는 멀리에서 책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쓰기 시작한 책을 끝내지 않으면 다른 책을 시작할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그 책이 쓰여지는 동안 이미 존재할 이유가 없는 그런 책은 결코 만들지 않았다. 어디서든 계절마다. 나는 그런 열정을 이곳 이블린에서, 그 집에서 발견하였다. 마침내 나는 책을 쓰기 위해 내 몸을 숨길 만 한 집 한 채를 갖게 되었다. 나는 그 집에 살고 싶었다.
구멍 속에서 거의 완전한 고독에 빠져 있는 것은 오로지 글스기만이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떤 주제도 없는 책, 어떤 이념도 없는 책이라는 것은 책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며 책과 다시 마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청난 공허. 불확실한 책.무에 직면해서, 뛰어넘기 아주 어려운 글쓰기와 같은 생생하고 꾸밈이 없는 글쓰기에 직면해서 글쓰는 사라은 책에 대한 이념도 없고, 빈 손이고, 머리도 비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사람은 책의 운명에 대해 미래도 없고 멀리 반향도 없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규칙, 말하자면 철자나 의미를 갖는, 무미건조하고 꾸밈이 없는 글쓰기만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살다보면 때가 온다. 나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여기서 모든 것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혼, 친구들, 특히 부부의 친구들 모두 의심스럽다. 아이는 그렇지 않다. 아이는 결코 의심스럽지 않다. 그런 의심은 그 주위에서 커질 따름이다. 의심은 고독에서 연유한다. 우리는 이미 그 단어을 말할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곳에서 이야기한 것을 참을 수 없어서 달아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모두 작가가 되지 못하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 차이다. 그것이 바로 진실이다.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의심은 바로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역시 작가이다. 작가와 더불어 사람들은 모두 글을 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글쓰기를 지향하는 행위에 대한 회의가 없다면 고독도 없다. 결코 어느 누구도 두 목소리로 쓸 수 없다. 이중창으로 노래할 수도 있고, 또 작곡도 할 수 있고, 복식 테니스도 칠 수 있지만, 글쓰는 것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중략)
한 권의 책을 일상적인 삶을 다루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한 권의 책으로 누군가의 독서 방향을 이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에 내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는 불치의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이 곧 더 이상 쓸 능력이 없으면 재능을 잃게 되는 실상일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마시게 된다. 가진 것을 모두 잃고, 쓸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글을 쓴다. 그 책이 존재하고, 그 책을 끝내야 된닥 외치는 동안 우리는 쓴다. 우리는 그 대열에 끼어야만 한다. 한 권의 책이 탈고되기 전에, 다시 말해 그것을 쓴 당신의 손을 떠나 자유로워지기 전에 그 책을 영원히 던져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범죄와 마찬가지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 육필원고를 찢어서 모두 버렸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쓰여진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느지, 그것은 한 권의 책이 아니었다든지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
작가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것은 모순이고, 또한 넌센스이다.쓴다는 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소리없이 울부짖는 것?. 그것은 작가를 쉬게 하는 것이고, 작가로 하여금 많이 듣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말이 필요없다. 왜냐하면 이미 써놓은 책에 대해서, 특히 쓰고 있는 책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영화나 연극과 상반되며 다른 흥행물과도 상반되는 것이다. 모든 독서와도 상반된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또 가장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한 권의 책은 미지의 것이고, 밤이며, 닫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진전이 있어 커지고, 탐구했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나아가 그 고유의 숙명과 출판으로 무화되는 저자의 운명으로 향하는 것은 바로 책이다. 출판은 늘 가장 사랑받는 막내로 태어난 아이처럼 꿈꾸었던 그 책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펼쳐진 책은 역시 밤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방금 전에 한 몇 마디 말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렇지만 절망을 무릅쓰고 쓴다. 아니다. 절망을 느끼며 쓴다. 무슨 절망인가, 나는 그 명칭은 모른다. 쓰기를 선행하는 것에 비해 쓴다는 것은 항상 그것을 망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긍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실패를 극복한다는 것은 다른 책으로, 같은 책의 다른 가능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집안에서 자아의 타락은 전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연중 매일여기에 갇혀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것은 거짓일것이다. 나는 일을 보러 가기도 했고, 키페에 가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곳에 있었다. 마을과 집은 유사한 것이다. 연못 앞에 놓여진 탁자도, 검은 잉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백지도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책의 경우는 다르다. 결코 같지 않다.
(중략)
아직 다 쓰여지지도 않은 그 책만 끼고 있는 것은 바로 아직도 인류 태초의 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또한 아직도 황무지 상태의 글쓰기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글쓰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것은 전쟁 중에 혼자 참호 속에만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기도도 하지 않고, 신도 없고, 마지막 나치당원을 처단할 때까지 독일 국민을 죽이겠다는 강한 욕구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중략)
책 속에 고독이 있다. 책 속의 고독은 전세계의 고독이다. 고독은 도처에 산재해 있다. 고독은 모든 것을 침범한다. 나는 항상 그런 침범을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생각을 한다. 고독,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이제 아무 것도 바라볼수 없다. 고독은 생각하고 추론하는 방법이다. 쓰는 기능에도 고독이 존재한다. 아마 우리는 매일 자살할 수 있는만큼 매일 자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책의 글쓰기이지 고독이 아니다. 나는 고독에 대해서 말을 하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분명히 만족할 만한 결과는 낳는 작업, 고된 일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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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가 중 한사람인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1914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1932년 프랑스로 귀국하였고 1943년 아시아에서의 유년기 체험과 가족애를 소재로 한 첫 소설 '철면피들'을 발표하여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태평양 방파제', '모데라토 칸타빌레', '부영사' 등 50여 년에 걸쳐 70편에 달하는 작품을 발표하여 20세기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알랭 그네 감독이 연출한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와 연을 맺게 된 뒤라스는 1966년 '라 뮤지카'를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영화로까지 확장시킨다. 국내에는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연인'을 통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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