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나뭇잎숨결 2014. 9. 5. 09:01

 

 

 

“내가 당신을 향해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을 인식하기 전에 먼저 당신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나는 인식을 초월한 곳에서, 당신의 인생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레비나스)

 

알렝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역시 레비나스의 타자의 타자성에 의헤 씌여진 글이다. 레비나스를 이해하기 우치다 타츠루의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을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텍스트의 해석은 주관적 독창성에 무한히 열려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해석을 허용받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텍스트의 읽기를 가르치는 ‘스승을 갖는 것’이지, 텍스트에 관한 ‘지식을 갖는 것’은 아니다. 스승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타자’ 안에 무한의 예지가 숨어 있으며, 그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예지의 기호라는 ‘신화’를 수용한 자 앞에 비로소 텍스트는 열려진다. 그것은 ‘스승을 섬긴다’고 하는 행위와 ‘텍스트를 읽는다’고 하는 행위가, 똑같은 하나의 지적 모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승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자는 ‘텍스트를 읽을 수가 없다’, ‘타자’ 안에서 무한을 찾아낸다고 하는 ‘목숨을 건 도약’을 해내지 못하는 자는, 텍스트 안에서 무한에 찾아낸다고 하는 ‘목숨을 건 도약’도 역시 잘 해낼 수 없다.

‘레비나스 효과’는 레비나스가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의 효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레비나스에게 ‘뭔가 대단히 개인적인 소환명령을 받은’ 느낌을 받으며, 자신의 레비나스 이해에 충분한 보편성이 없음을 자각하면서도, 그만 자신의 ‘레비나스 이해’를 말해버린다. 이 ‘개인적으로 소환되는’ 느낌을 레비나스는 ‘영감(inspiration)’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레비나스의 ‘타자’라는 개념이 극히 난해하며, 일의적 정의에 잘 맞지 않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그대로다. 그러나 그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단지 ‘난해한 개념’이라기보다, ‘타자’가 그때그때 ‘나’와 동시에 새롭게 생기한다는 것과 관련돼 있다. ‘나’와 ‘타자’는 미리 독립된 두 항으로서, 자존(自存)적으로 대치하는 게 아니라, 사건 속에서, 사건으로서 동시에 생성한다.

레비나스에게 현상학은 무엇보다도 우선 ‘방법’이었다. ‘방법’인 이상, 그것은 ‘누군가’가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상학은 여러 세대에 걸쳐 한 사람 한 사람의 현상학자가 그때그때 자기에게 고유한 철학적 난문과 씨름하기 위해 그때그때 독특한 방식으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공동으로 개척해야 할 지적 자원 내지 수단(resource)로서의 현상학이라는 구상은 다른 장소에서도 되풀이된다.

레비나스적 타자는 물론 관조적 대상은 아니며, 상호주관성을 매개로 해서 간접적으로 주어지는 타아도 아니다. 그것은 상상도 공감도 초월한 ‘낯선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타자와 나 사이에도 한 줄기 커뮤니케이션의 험로가 있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성차’를 미리, 자연적 경험적으로 차이 나게 존재하는 두 이성 사이에 상정하는 한, 레비나스의 여성론은 이해할 수 없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레비나스에 의하면, ‘A와 B는 다르다’는 것은 A와 B를 동시에 비교해 헤아릴 수 있는 포괄적인 시점이 있다는 것, 즉 ‘전체성’에 양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은 ‘하나의 전체성’의 상보적인 상대편인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전체성’이다. 남녀는 협동적으로 기능하지만, 양자를 동시에 비교해 헤아릴 수 있는 그런 공통의 도량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레비나스의 에로스론은 보봐르의 여성론을 ‘전언철회’한 것이다. 구조주의의 반-주체주의가 절정일 때 ‘주체성의 복권’을 논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레비나스는 ‘여성적 본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봐르의 여성론이 절정일 때, ‘여성적인 것의 복권’을 논했다. 두 개의 몸짓은 구도적으로는 동일하다. 레비나스의 구조주의 비판은 ‘주체’ 개념의 근본적인 재구축을 지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레비나스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은 ‘전-보봐르적 풍토’로의 회귀가 아니라, 보봐르의 여성론을 넘은, 완전히 새로운 ‘여성’개념의 제시가 아닌가 하고 추리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허용되는 것이다.

이리가라이에 의하면 레비나스는 ‘쾌락을 통한 교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모종의 에로스적 경험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그런 문제는 철학적 차원에서 논의해야 할 일은 아닐 것이다. 여하튼간에 그러한 경험을 통해 ‘타자’와 나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숨에 이루어지고, 모든 것이 두루 좋게 성취된다고 하는 그런 이설을, 레비나스가 문제도 삼지 않고 물리쳤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외부에 있어, 나의 지배나 파악을 벗어나 있다. 애당초 내가 지배하고, 파악하고, 통제 가능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결코 나에게 몸을 맡기지 않는 것. 그러한 것만이 나의 욕망에 불을 붙인다. 그러나 나의 사랑은 그런 식으로 ‘타자성’을 구성하는 요건이 갖추어진 후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할 요건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우리의 그런 이성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느닷없이 우리를 휘어잡는다. (……) 가장 격렬한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만남 이전에 이미 숙명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하는 확신을 동반한다. 사랑은 ‘선택된 것이 아닌 선택’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내가 나이기 이전의 사건’, ‘내재의 이전’인 것이다.

 

모두의 안녕을 물어야 할만큼 아픈 세상,사랑의 철학자 레비나스, 타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말하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철학의 정의를 ‘지혜에 대한 사랑Love of wisdom’이라기보다 ‘사랑에 대한 지혜Wisdom of love’로 바꾸어 놓았다.”―하비 콕스(신학자,『세속도시』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가 스승 레비나스의 예지가 담긴 ‘사랑의 현상학’을 밝혀준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 책에서 자신이 스승으로 삼은 레비나스의 ‘사제론’, ‘타자론’, ‘에로스론’에 대한 저자 자신의 개인적 고찰을 레비나스의 논리전개를 따라 담아낸다. 또 레비나스의 예지를 칭송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서두에서 밝힌다.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은 타인의 존재가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밝혀내는 데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기존 서양 철학의 자기중심적 존재론을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윤리학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타자성의 철학’을 정립한다. 이 책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더욱 수월하고 명쾌하게 풀어낸다.

「1장 타자와 주체」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를 ‘완벽한 스승’이며 그의 텍스트는 ‘완전기호’라며 ‘스승을 섬기는 것이란 어떤 일인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레비나스와 그의 스승인 슈샤니 옹과의 관계를 통해 유대교적 탈무적 전통의 스승상을 추적해간다. 아울러 사제관계란 ‘타자’와의 만남에서 가장 기본적 양태임을 밝히면서, 스승은 ‘최초의 타자’라는 점을 거론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처럼 스승의 문제에서 시작해 레비나스의 타자론을 전개한다. 레비나스의 타자론에서 ‘나’와 ‘타자’는 미리 독립된 두 항으로서 자존적으로 대치하는 게 아니라, 사건 안에서 동시에 생성한다는 점을 이끌어낸다.


「2장 비-관조적 현상학」에서는 레비나스가 후설 현상학을 어떻게 읽어들이고, 후설적 ‘타아’와 모습을 달리하는 색다른 ‘타자’개념을 이끌어냈는가를 철학사적 맥락 안에서 다루고 있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이력은 1930년대 후설 현상학과 하이데거 존재론의 비판적 진술로부터 시작된다. 레비나스는 후설적 ‘타아’를 물리치고 상호주관적 기층에서 서로 통하지 않는 절대적 타자를 ‘자아’에 대면시켰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비-관조적 현상학’은 의미에 초점을 둠으로써 현상학의 쇄신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3장 사랑의 현상학」: “Ⅰ.집과 여성”에서는 집의 현상학적 의미를 읽어나간다. 레비나스는 ‘집’은 ‘격리된 존재자’ 다시 말해 ‘에고이스터적인 자아’가 ‘타인 자’라는 양식을 향유하기 위해 만들어낸 ‘피난처’라고 말한다. 레비나스가 ‘여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경험적 의미가 아니라 현상학적 차원을 다룬다. 세계를 창시하거나 대지의 찬탈이 정지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빛으로부터 벗어나’ 장소를 비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그 창조적 증여자를 경험적 성별과 다른 차원에서 ‘여성’이라 부른다. “Ⅱ.여성과 주체”에서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가 시도한 ‘여성적인 것의 복권’은 이전으로 회귀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여성’ 개념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와 관련해 이리가라이가 레비나스를 부권론자로 몰아붙이는 것에 강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Ⅲ.찢어진 인간”에서는 궁극적으로 정의와 자애, ‘말하는 것’과 ‘말해지는 것’, 전체성과 무한, 초월과 내재, 남성과 인간 등 인간성의 조건은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것’, 찢어져 있음으로써 지성과 자유를 확보하는 곤란한 선택 안에 존재한다는 점을 적시한다.

사랑의 현상학, 존재와 의식을 뛰어넘어 타자를 향한 현상학의 진화. 레비나스는 독일 프라이부르 대학에 머물며 당시 현상학의 대표자인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지도를 받는다. 초기에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프랑스에 처음 소개한 독일 현상학 연구의 권위자로서 활동하였다. 프랑스 현상학을 대표하는 사르트르 역시 후설에 관한 레비나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고 처음 현상학에 입문했다. 이후 레비나스는 기존의 현상학과 입장을 달리하여 ‘타자성의 철학’이라는 독창적인 철학을 전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또 기존의 서양철학을 자기중심적 지배를 확장하려 한 존재론이라고 비판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윤리학을 제1철학으로 내세운다.


레비나스의 키워드로서 알려져 있는 수많은 술어―‘타자,’, ‘얼굴,’, ‘일리아,’, ‘유책성’, ‘무관심성(desinteressement)’, ‘제3자’, ‘그임(illeity)’(‘그’라는 성격―역자) 등―는 모두 다 하나의 정의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이처럼 레비나스의 개념은 무척 난해하기 때문에 레비나스가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레비나스 효과’가 발생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레비나스에게 뭔가 개인적인 소환명령을 받은 듯한 느낌을 갖게 되고, 그만 자신이 이해한 레비나스를 말해버린다는 것이다. 이 개인적으로 소환되는 느낌을 레비나스는 ‘영감(inspiration)’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가 현상학을 무엇보다도 결코 회의론에 빠지지 않는 방식으로 지성의 불능을 성찰하게끔 하는 방법으로 간주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레비나스의 현상학은 무엇보다도 ‘방법’이었기에 ‘누군가’가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상학은 여러 세대에 걸쳐 한 사람 한 사람의 현상학자가 그때그때 자기에게 고유한 철학적 난문과 씨름하기 위해 그때그때 독특한 방식으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으로 개척해야 할 지적 자원 내지 수단으로서의 현상학이라는 구상은 다른 곳에서도 되풀이된다.


레비나스는 ‘표상’ 혹은 ‘재현전화(representation)’의 선행성, 이것이 후설에게 고유한 경향이라고 파악했는데, 그는 현상학의 본래 대상은 결코 ‘표상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의식이 지향하는 것은 ‘관조된 대상(objet contemple)’만이 아니다. 지향성이라는 작용은 단순히 ‘표상하는 사유’와 ‘관조된 대상’ 사이에만 생기는 사황이 아니다. ‘표상하지 않는 사유’와 ‘비-관조적 대상’ 사이에 발생하는 지향성의 경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후설이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하게 음미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에서 레비나스의 ‘비-관조적 현상학’이 태동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의 ‘비-관조적 현상학’은 의미에 초점을 둠으로써 현상학의 쇄신을 시도했다고 평가한다. 레비나스적 타자는 관조적 대상도 아니며, 상호주관성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주어지는 타아도 아니다. 그것은 상상도 공감도 초월한 낯선 사람이다. 그러한 타자와 나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의 험로가 있는데 어떻게 그런 타자와 비-관조적 만남이 가능해지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무한한 타자를 향한 끊임없는 탐색, 그 타자를 꼭 끌어안는 ‘사랑의 철학’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는 철학사에서 걸출한 ‘완벽한 스승’이며 그 텍스는 ‘완전기호’라는 점을 밝힌다. 그는 레비나스를 읽는 방법 그 자체를 레비나스로부터 배운 것이며, ‘레비나스로부터 배운 독법에 기초해서 레비나스의 텍스트를 읽는 사람’, ‘연구자’라는 것은 이미 적절한 호칭이 아니기에 ‘제자’라는 호칭을 참칭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스승을 개인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만나는 타자라고 한다. 따라서 사사(師事)한다는 것은 ‘타자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학습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처럼 스승의 문제에서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을 이끌어낸다.


사실 레비나스가 현대철학에 불어넣은 활력은 매우 인상적이다. 현상학적 전통의 관점에서 후설과 사르트르가 ‘의식’에, 하이데거가 ‘존재’에 몰두하며 현상학을 발전시켰다면, 레비나스는 ‘타자’라는 개념을 현상학의 중심에 끌어들였다. 이 타자 개념에 대한 사유로부터 서구 문화 전반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대한 반성에 가속도가 붙었다. 레비나스의 사상은 현대 종교 철학에도 영감을 불어넣었는데, 고통 받는 타자와의 마주침이 어떤 것인가를 진지한 철학적 사유 속에서 살펴본 사상가인 것이다.


게다가 그의 윤리학은 단순히 ‘머리’에서 나온 사상이 아니라 ‘몸’에서 나온 사상이라는 점에서 다른 윤리적 철학과 차별화된다. 레비나스의 다음 구절은 타자를 향한 그의 철학적 태도를 응축해 보여준다. “내가 당신을 향해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을 인식하기 전에 먼저 당신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나는 인식을 초월한 곳에서, 당신의 인생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인식에 앞서서, 인식을 초월해서, 나는 ‘당신’에게 축복을 보낸다. 이때 축복을 보내는 자인 나는, 말하자면 ‘무로부터의 창조’로서 커뮤니케이션의 장 그 자체를 열고 있다. 여기에 ‘당신’을 향해 말거는 한 사람의 인간이 있다. ‘당신’에게 축복을 보내고, ‘당신’과의 대화를 진심으로 바라는 한 사람의 인간이 있다. 그것을 전하는 것에 ‘인사’의 본질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특히 이리가라이는 ‘레비나스가 여성의 타자성에 적절한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권주의자’라고 단정한다. 이에 우치다 타츠루는 ‘타자의 타자성?미지성을 훼손하는 일 없이, 타자와 관련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계속해온 철학자가 ‘여성의 타자성을 과소평가했다’는 비판에 강하게 반발한다.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레비나스가 말하는 ‘여성적인 것의 복권’은 이전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여성’ 개념의 제시였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에 기반한 윤리에는 특유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풍겨난다. 그것은 이 ‘세상’을 위해, ‘인간’을 위해, 그리고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지금 우리 시대의 고통은 그것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레비나스를 읽음으로써 스스로에 갇힌 자신을 넘어 타자를 향한 따듯한 시선을 갖게 되고 그 시름에 잠겨 있는 타자를 향해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