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괴테가 그린
<시간 Zeit>의 메타모르포제: 역사적 시간에서 존재론적 시간으로
괴테의 (파우스트> 중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 연구
오 순 희 (서울대)
서론
도대체 괴테의 ?파우스트? 제2부는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연구자들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예컨대 하인츠 슐라퍼에 따르면 ?파우스트? 제2부는 자본주의와 산업화로 인해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해체되는 19세기 사회사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토마스 메춰에 따르면, ?파우스트? 제2부의 시대는 15세기에서 19세기초, 즉 봉건사회가 위기에 처하는 시대부터 자본주의의 상승시기까지 해당된다. 만프레트 비르크에 따르면, 제4막에는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이 반영되고 있다. 나아가 제5막에 나오는 파우스트의 <간척사업> 장면에 주목하는 경우에는 시대적 배경이 훨씬 뒤로 움직이게 되는데, 뤼디거 숄츠에 따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파우스트의 모습에서 “시체라도 밟고 넘어가는 기업가유형 Typ des über Leichen gehenden Unternehmerschöpfers”의 모습이 반영되는 것이고, 메춰에 따르면, 파우스트를 파묻기 위해 동원되는 레무르들의 모습 속에 자본주의를 파묻어야 할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과제에 대한 예감 eine Ahnung der historischen Aufgabe der Arbeiterklasse”까지도 내포되어 있다.
필자가 보기에 ?파우스트? 제2부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연구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제2부의 여러 부분 중에서도 특히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 die Klassische Walpurgisnacht> 장면에 대해 상대적으로 덜 다룬다는 것이다. ?파우스트? 제2부 전체가 약 7500행인데, 그중 약 1500행 가량이 이 장면에 할애되어있는 것을 보면, 이 장면은 부피상으로도 무시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역사적 시대라는 관점에서 제2부를 다루는 많은 연구들에서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장면에는 역사적 시대라는 관점에서 포착하기 힘든 그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본 논문은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하여,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본질과 형태는 어떤 것인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시간>에 해당되는 독일어 <Zeit>가 구체적인 역사적 <시대>를 의미할 수도 있고, 추상적인 <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듯이,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을 둘러싼 시간도 역사적 시간과 탈역사화된 시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제2막의 전반부에 해당하고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을 위한 선행단계라 할 수 있는<궁륭 높고 폭 좁은 고딕식의 방 Hochgewölbtes enges gotisches Zimmer>과 <실험실 Laboratorium> 장면에서는 역사적 시대들의 추이라는 차원에서 줄거리가 진행되다가, 제2막의 후반부가 되는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에 오면 시간은 탈역사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파우스트? 제2부의 제2막에서 시간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두 마리의 뱀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 마리의 뱀은 순차적으로 흐르는 시간, 즉 역사의 시간을 나타낸다. 이 뱀과 얽혀있는 또 다른 한 마리의 뱀은 추보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론적인 시간을 나타낸다.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이 존재론적인 시간은 다양한 형태로 <변신 Metamorphose>하게 되는데, 이러한 변신의 궁극적인 목표는 에로스라는 것, 이것이 본 논문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1. 역사 속의 시간
1.1. 변화하는 시대 - 낡은 중세에서 새로운 근세로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이 들어있는 ?파우스트? 제2부의 <제2막>은 <궁륭은 높고 폭은 비좁은 고딕식의 방>에서 시작된다. 더욱 늘어난 거미줄(V. 6573), 빛 바랜 창유리(V. 6572), 말라붙은 잉크(V. 6574), 누래진 양피지 종이(V. 6574), 파우스트의 낡은 망토(V. 6582), 이 모든 것들 속에는 종소리만 한 번 울려도 쓰러질 듯한 문짝들처럼(nach V. 6619) 몰락하는 중세의 분위기가 담겨있다. 중세적 인식과 신앙의 권위도 “해골의 움푹 들어간 안구 der Hohlaug’ jener Totenköpfe”V. 6613)처럼 이제는 공허해졌다. 제1부의 메피스토가 신학의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했던 공간이 바로 이 공간인데, 지금은 “기도합시다 Oremus”(V. 6635)라는 조교의 말과 “관두자 Das lassen wir”(V. 6636)는 메피스토의 반응이 신학과 관련된 언급의 전부이다. “이처럼 지저분하고 좀이 슨 살림살이에는 In solchem Wust und Moderleben”(V. 6614) “귀뚜라미 같은 벌레들 Grillen”(V. 6615)밖에 살지 않는다. 귀뚜라미 같은 벌레들을 지칭하는 독일어 “Grillen”의 또다른 뜻이 “기이한 생각” 또는 “우울한 기분”이기도 하듯이, 중세적인 사고는 이제 기이한 것으로 되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 빈 공간을 지키고 있는 것은 우울함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파우스트가 떠나버린 중세는 목하 가을로 가는 길목에 있다.
불꺼진지 오래인 이 <고딕식 방> 옆에는 밤낮으로 불이 꺼지지 않는 바그너의 <실험실>이 있다. 스승 파우스트의 <고딕식 방>이 중세 스콜라철학의 산실이라면, 제자 바그너의 <실험실>은 근세 과학의 산실이다. 제1부의 파우스트가 그의 <고딕식 방>에서 “세계를 가장 깊숙한 곳에서 떠받치는 것은 무엇인가 was die Welt / im Innersten zusammenhält”(V. 382f.)라는 질문에 좌절했던 반면, 제2부의 바그너는 그의 <실험실>에서 “학문의 세계를 유일하게 떠받치는 자 allein, der sie [=die gelehrte Welt] zusammenhält” (V. 6645)로 부상한 것이다. 파우스트의 고뇌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둘러싼 형이상학적 질문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면, 바그너는 형이상학이건 형이하학이건 전부 오성으로 분석하려든다. 메피스토의 말처럼 과학적 인식을 “[천국과 지옥의 문을 여는] 성베드로의 열쇠처럼 휘두르면서, 위건 아래건 열어제치고 Die Schlüssel übt er wie Sankt Peter, / Das Untre so das Obre schließt er auf”(V. 6650f.) 있는 자가 바그너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인 <위>가 형이하학적인 <아래>에 대해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던 시대가 가고, 억눌려온 형이하학이 이제 모든 형이상학적 현상들을 분석하는 시대가 열렸다. 그러므로 “심지어 파우스트의 이름도 [바그너에 비하면] 빛이 바랜다 Selbst Faustus’ Name wird verdunkelt” (V. 6654). 파우스트의 형이상학적 시대는 가고 철저하게 형이하학적인 잣대로 세계를 분석하는 바그너의 시대가 <실험실>에서 개막된 것이다.
<고딕식 방>에서 <실험실>로 향상된 바그너의 인식능력은 맹아적인 형태로나마 새로운 지식, 즉 <근대과학>의 위력을 선취하고 있다. 작금의 현대과학이 인간의 조건을 <염색체의 조합>으로 설명하듯이 바그너가 몸담았던 근세과학도 인간은 “수백 개의 원소로 aus viel hundert Stoffen” (V. 6849) 이루어졌으므로 이 원소들을 다시 “조합 komponieren”(V. 6851) 하면 자연의 은총에 의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만들어진다 Es wird ein Mensch gemacht”(V. 6835)는 파라첼주스적 발상을 대변하고 있다. 파라첼주스는 주지하다시피 근세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이고, 이러한 맥락에서 이 실험실은 근대 과학의 선두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오로지 <실험실> 안에서 인조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고려한다면, 바그너의 실험실이 현대의 유전과학적 발전을 상상력의 단계에서나마 선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 작업이 <메피스토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현대과학의 무제한적 발전이 가져올 파국 가능성에 대해서도 미리 예견하고 경고하는 괴테의 혜안을 읽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근세적 지식의 산물인 호문쿨루스의 탄생 이후에 기다리는 장면은 고대적인 신화의 세계인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이다. 시간의 방향이 중세에서 시작해서 근세로 - 경우에 따라서는 현대로까지 - 줄기차게 내려오다가 돌연 고대 신화의 세계로 회귀하는 이 시간적인 추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좀더 집중하다보면 제2막의 시대흐름이 외관상으로는 추보식 흐름을 -중세에서 근세로- 보여주고 있지만 그러한 시대들의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대의 새로운 추이에 대한 메피스토의 반어적 주석들은 이러한 사실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메피스토는 성경 출신답게 주요한 대목마다 성경을 인용하는데, 그가 제일 좋아하는 주제는 “태양아래 새 것 없다”라는 것이다.
세상을 오래 살다보면 경험한 일만 해도 참 많아
그러니 이 세상에 어떤 일도 새로운 일이 못 되지.
Wer lange lebt, hat viel erfahren,
Nichts Neues kann für ihn auf dieser Welt geschehn. (V. 6861f.)
여기서 메피스토가 대변하고 있는 역사관의 뿌리는 성경해석과 관련해서 18세기에 정립되었다고 하는 “유형론 Typologie”인데, 괴테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미리 예시되었던 것 týpos”과 “나중에 구체화된 것 antítypos”의 관계가 된다. 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역사해석에 적용시키면 지금의 역사는 이미 과거 속에 원형적인 형태로 선취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메피스토가 바그너의 실험에 대한 원형을 구약에서 찾아내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나는 이미 저 옛날 편력하던 시절에
수정처럼 결정(結晶)된 인간종족을 본 일이 있거든.
Ich habe schon in meinen Wanderjahren
Kristallisiertes Menschenvolk gesehn. (V. 6863f.)
트룬츠의 주석에 따르면 여기서 <수정처럼 조성된 종족>이란 모세 제1권 19장 26절에서 롯의 처가 소금 덩어리로 굳어버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구약에 나오는 롯의 처에 대한 이야기는 <예시되었던 것>이고, 바그너의 인조인간은 <구체화된 것>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괴테의 유형론적 역사인식을 그의 작품 속에서는 파우스트가 아니라 메피스토가 대변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메피스토가 그 존재론적 특성상 파우스트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내려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 파우스트가 자신의 역사적 시대라는 한정된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반해서 악마인 메피스토는 지상이건, 천상이건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 없다. 또한 태초이래 여러 시대를 끊임없이 넘나들면서, 얼핏 이질적으로 보이는 각 시대들의 여러 현상들에서 공통되는 속성들을 간취하고, 그럼으로써 여하한 시대의 새로움에 대해서도 비웃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메피스토인 것이다. 작품전체의 구성을 볼 때 제2부의 시대흐름은 제1막의 중세에서 출발하여 근대로 줄기차게 내려오다가 제2막 후반부를 기점으로 다시 고대로 거세게 역류하고 제3막에 이르면 고대적 속성들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이러한 역류를 주도하는 인물이 파우스트가 아니라 메피스토인 것도 그에게 원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탈역사적 속성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메피스토의 유형론적 역사인식은 그의 존재론적 탈역사성에 기인하고 있다는 역설이 성립하게 된다.
제2막의 전반부에서 바그너의 <실험실>을 통해 강하게 부각되던 <역사의 일직선적 발전양상>들이 메피스토의 탈역사적 유형론에 부딪침에 따라 시간의 역사적 차원은 둔화된다. 각 시대는 그 자체로 일회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시간적으로 뒤로 갈수록 시대는 발전해오는 것이라는 역사관이 제2막 전반부에서 등장인물들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들의 본질은 어느 시대나 똑같다는 괴테의 역사관이 메피스토의 마스크를 통해 희화적인 형태로 도출됨으로써, 지금까지 중요시되던 역사적 차원의 시간의 문제는 다시 뒤로 빠지고, 이어지는 장면인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에서는 탈역사적, 존재론적인 관점에서의 시간의 문제가 형상화된다.
2. 존재론적인 시간 -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
2.1. 시간의 탈역사화 - <파루잘루스의 벌판>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와 시이저의 역사적 결전이 있었다는 <파루잘루스의 벌판 Phrsalische Felder>에서 이 역사적인 싸움의 결과를 예견했다는 전설적인 마녀 에리히토의 독백으로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은 시작된다. 에리히토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마녀였듯이 사라진 역사의 기억들도 되살아난다. 그러나 길게 이어지는 에리히토의 독백과 더불어 시간은 그 역사성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데, 일회적이어야만 하는 역사가 이곳에서는 매년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얼마나 자주 되풀이되었던가.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되풀이될 것이다.
Wie oft schon wiederholt’ sich’s! wird sich immerfort
Ins Ewige wiederholen... (V. 7012f.)
<이미 자주 되풀이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될> 이야기를 시간의 개념으로 치환해본다면 <현재에 도래하고, 미래에도 도래할 과거>의 이야기가 된다. 파루잘루스 벌판의 시간은 결국 흘러 가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되돌아오는 시간>인 셈이다. 되돌아오는 시간과 더불어, 그 동안 중세의 비좁은 <방>에 갇혀서 잊혀지고 있었던 고대의 꿈들도 다시 살아난다. 파우스트가 이 벌판에 도착하자마자 “안테우스 Antäus” (V. 7077)처럼 힘을 얻는다는 것은 중세에 갇혀있던 인간의 상상력이 중세를 거슬러 고대로 올라가면서 느꼈을 환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탁 트인 <벌판> 위로 퍼져나가는 상상력은 대기속에 떠도는 과거의 언어를 감지해낸다. 과거의 언어가 신화화된 기억처럼 여전히 대기를 떠돌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저 영원한 신화의 고장 그리스인 것이다.
헬레나는 어디 있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으련다...
이 흙덩이가 그녀가 밟고 있었던 그 흙덩이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 파도가 그녀를 향해 몰려오던 그 파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래도 이 대기는 그녀의 언어를 말했던 그 대기이거늘.
나 여기 왔노라. 그야말로 기적 아닌가! 여기 그리스 땅에 오다니 말이다!
Wo ist sie? - Frage jetzt nicht weiter nach...
Wär’s nicht die Scholle, die sie trug,
Die Welle nicht, die ihr entgegenschlug,
So ist’s die Luft, die ihre Sprache sprach.
Hier! durch ein Wunder, hier in Griechenland! (V. 7070ff.)
<벌판> 위를 드리우는 대기처럼 인간의 영혼 위에 항구적으로 드리워온 저 신화의 원형적인 기억들과, 그 기억들을 다채롭게 변형시키는 불꽃같은 상상력으로 구성된 언어의 세계가 바로 파우스트, 메피스토, 그리고 호문쿨루스가 이제부터 “탐색하게 durchforsch’” 될 “불꽃들의 미로 Labyrinth der Flammen” (V. 7079), 즉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인 것이다.
2.2. 역사적 <선악(善惡) 이분법>의 해체
- <페나이오스 강의 상류에서 >
두 번에 걸쳐 나오는 <페나이오스 강의 상류에서 Am oberen Peneios> 전개되는 메피스토의 행로는 외관상 대단히 복잡하게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두 개의 변신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기존에 유지되어 왔던 그의 중세적 본질이 “온통 낯설게 되는 ganz und gar entfremdet”(V. 7081) 과정이고 또 하나는 중세적인 의미의 악(惡)이 고대적인 의미의 추(醜)로 변신하는 과정이다. 말하자면 중세의 악마가 <자기소외>를 거쳐 새로운 본질로 <메타모르포제>를 겪는 과정이 메피스토의 관점에서 바라본 제2막의 시간여행이다. 메피스토의 메타모르포제는 <악>이라는 개념의 역사성이 드러나고, 기존에 당연한 진리처럼 되어왔던 <절대 악>의 개념이 상대화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상대화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인물이 스핑크스인데, 스핑크스의 존재가 일차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빌헬름 엠리히에 따르면 괴테에게 있어서 <가장 오래 된 것>은 <진실된 것>과 동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근원적인 진실은 역사적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신 Metamorphose>을 겪으면서도 항상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장 오래된 것, 선사시대의 것들이 “영원히 현재적인 것으로 zum ewig Gegenwärtigen” 되는 것이다. 스핑크스도 이 영원히 현재적인 것처럼 역사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구적인 진리의 수호자처럼 남아있으면서, 모든 역사적 진리라고 간주되어온 것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메피스토의 본질에 대한 중세적 규정들의 타당성이 우선적으로 의문시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많은 이름들을 붙이면서 Mit vielen Namen”(V. 7117) 악마의 본질을 규정해왔지만 이러한 규정들은 악마의 존재를 더더욱 “수수께끼 Rätsel”(V. 7132)로 만드는데 기여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고대에서는 악한 존재가 “선인이건 악인이건 누구에게나 필요한 Dem frommen Manne nötig wie dem bösen”(V. 7134) 것이었다. 이렇듯 <악의 절대성에 대한 상대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메피스토는 더 이상 중세의 <바로 그 악마>가 아니라, 고대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는 다양한 악한 현상 중의 하나로 된다. 고대를 낯설어 하던 이 중세의 악마가 고대에서 그의 존재론적 동료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여기서는 전혀 모르는 존재들만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근친들만 보이네 그려
옛날 책을 한번 뒤져봐야겠어.
하르츠에서 헬라스까지 온통 사촌들뿐이라니!
Hier dacht’ ich lauter Unbekannte
Und finde ich leider Nahverwandte;
Es ist ein altes Buch zu blättern;
Vom Harz bis Hellas immer Vettern! (V. 7740ff.)
풍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중세 서양에서 <악마>는 주로 <유혹자>의 형태로 등장한다. 사실 제1부에 나타나는 메피스토의 본질도 <유혹하는 악>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에서는 <유혹자 = 악마>라는 항구적인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메피스토는 <유혹하는 자>에서 <유혹당하는 자>로의 존재론적 변신마저 겪는다. 그리고 <메피스토를 유혹하는 자>의 입장에 선 <라미에 Lamie>들도 끊임없이 <변신 Metamor- phosen>(V. 7759) 하는데, 그녀들이 쓰고 있는 <마스크 Masken>(V. 7767)는 이러한 변신을 알레고리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메피스토가 라미에들과의 희롱을 끝내고 고대의 신화에 나오는 포르키아스들의 동굴로 가서 그들의 마스크를 빌어 쓰는 장면에 이르면 이러한 <악(惡)의 존재론적 메타모르포제>라는 차원이 보다 강화된다. 메피스토가 스스로를 “카오스의 사랑 받는 아들 Des Chaos vielgeliebter Sohn”(V. 8027)이라고 소개하자, 포르키아스들은 “카오스의 딸들 Des Chaos Töchter” (V. 8028)은 자신들이라고 응수하는데, 전자의 카오스가 주로 <악>의 문제와 결부된다면, 후자의 카오스는 <오래됨>과 우선적으로 결부된다. 그러나 스핑크스의 경우에 <오래된 것>이 <진실된 것>과 결부되었던 반면, 포르키아스에게 있어서는 <오래된 것>과 <추한 것>이 결부된다. 이로써 <오래된 것>의 개념도 상대화된다.
포르키아스의 가면을 쓴 메피스토는 “지옥에 있는 악마들도 경악시킬 정도로 Im Höllenpfuhl die Teufel zu erschrecken”(V. 8033) 추한 모습으로 변한다. <악>이라는 개념의 무게중심이 기존의 <악한 것 Das Böse>(V. 1343)에서 <오래된 것>을 거쳐 <추한 것>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추한 것>(포르키아스의 속성)이 <악한 것>(메피스토의 속성)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것>(메피스토의 속성)이 <추한 것>(포르키아스의 속성)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메피스토를 둘러싼 시간의 무대가 <선악 이분법>을 특징으로 하는 중세에서 <美(헬레나)와 醜(메피스토-포르키아스)가 경합>하는 고대적 무대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피스토는 이러한 변신을 통해 <헬레나의 막>인 제3막 전체의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연출자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제3막의 말미에 있는 지문에서도 분명해진다.
막이 내린다. 무대 전경에 서있는 포르키아스는 거인처럼 일어서다가, 코투룬을 벗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마스크와 베일도 뒤로 젖힌다. 그리고 메피스토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필요하다면 에필로그에서 작품에 대한 보충설명을 하기 위해서다.
Der Vorhang fällt. Phorkyas im Proszenium richtet sich riesenhaft auf, tritt aber von den Kothurnen herunter, lehnt Maske und Schleier zurück und zeigt sich als Mephistopheles, um, insofern es nötig wäre, im Epilog das Stück zu kommentieren. (nach V. 10038)
2.3. 원형적인 시간들의 조우
- <페나이오스 강의 하류에서>
<페나이오스 강의 하류에서 Am untern Peneios> 님프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깨어나는 파우스트의 눈앞에서 제우스와 레다의 신화, 즉 헬레나의 잉태장면이 전개된다. <美(헬레나)>의 본질은 <신적인 요소(제우스)>와 <인간적인 요소(레다)>의 통일이기도 하고, <자연적인 요소(백조)>와 <인간적인 요소(레다)>의 결합이기도 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이 장면은 이미 제2막의 전반부에서도 꿈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중세의 <좁은 방>에서는 한갓 꿈이었던 것이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에 이르러 현실로 전개되고 있는 셈인데, 이 현실의 무대라는 것도 결국은 <상상력에 의한 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파우스트가 현실로 보고 있는 것도 결국은 그가 <밤>에 꾸고 있는 <꿈>이거나, 아니면 <상상>의 산물이 아닐까.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꿈>과 <상상>은 <순차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법칙이 무너지는 곳>이다. 상상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중복되어 나타나는 시간,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인의 시간>이다. 히론의 이야기처럼 헬레나의 영원한 아름다움은 철저히 시인들의 시간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그 신화 속의 여인은 참 독특한 데가 있어.
시인들이 필요한 대로 그녀의 모습을 만들어 보여주기 때문이야.
그녀는 성숙해지는 법도 없고, 늙는 법도 없어.
그 모습은 언제 봐도 자극적이고
어려서 유괴된 여잔데 나이가 들어도 구애를 받는 것으로 나와.
요컨대, 시인들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게야.
Der Dichter bringt sie, wie er’s braucht, zur Schau:
Nie wird sie mündig, wird nicht alt,
Stets appetitlicher Gestalt,
Wird jung entführt, im Alter noch umfreit;
Gnug, den Poeten bindet keine Zeit. (V. 7428ff.)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간>도 시간에 얽매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아킬레스가 죽은 후에 헬레나를 만나게 되는 것도 살아 생전 헬레나에 대한 열렬한 사랑 때문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의 시간적인 경계도 모호해진다.
파우스트: 그렇다면 헬레나도 어떤 시간에 얽매이지 말기를!
아킬레우스도 페레에서 그녀를 만나지 않았던가요.
모든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곳에서 말이죠! 정말 드문 행운입니다.
운명까지 거스르면서 원하던 사랑을 획득한다는 것은요!
FAUST. So sei auch sie durch keine Zeit gebunden!
Hat doch Achill auf Pherä sie gefunden,
Selbst außer aller Zeit. Welch seltenes Glück:
Errungen Liebe gegen das Geschick! (V. 7434ff.)
과거에 헬레나를 등에 태우고 직접 건넜다는 히론의 이미지가 현재 히론의 등에 타고 있는 파우스트의 모습과 겹쳐지고 미래에는 파우스트가 헬레나와 함께 있게 되리라는 것도 암시됨으로써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현실 속의 시간>, 현재에서 과거로 흐르는 <기억 속의 시간>, 그리고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상상 속의 시간>이 서로 중첩되기 시작한다.
당신은 과거의 헬레나를 보았지만 나는 오늘 헬레나를 보았죠.
자극적인 만큼이나 아름답고, 아름다운 만큼이나 탐이 나더군요.
나의 생각, 나의 본질이 온통 그녀에게 사로잡혔지요.
그녀를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Du sahst sie einst; heute hab’ ich sie gesehn,
Nun ist mein Sinn, mein Wesen streng umfangen;
Ich lebe nicht, kann ich sie nicht erlangen. (V. 7442ff.)
결국에는 시인처럼 <탈시간>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는 파우스트를 등에 태우고 달리는 히론도 문자그대로 <쉬지 않고 달리는 시간>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파우스트의 길 안내 역할을 하는 주요인물들 - <스핑크스>, <히론>, 그리고 <만토> - 은 전부 시간의 알레고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히론이 <쉬지 않고 달리는 시간>이라면, 스핑크스는 <태곳적 시간>이 되고, 만토는 <머무르는 시간>이 된다. 헬레나를 찾아가는 파우스트의 행로는 <태곳적 시간>(스핑크스)에서 출발하여 <쉬지 않고 달리는 시간>(히론)을 만나 <머무르는 시간>(만토)에 이르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시간과 머무르는 시간이 공존하는 희유한 밤이 바로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이기도 하다. 시간의 법칙을 거스르겠다는 파우스트의 욕망은 히론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친 verrückt> (V. 7447) 것이나 다름없겠지만, 만토처럼 시간이 멈추어설 수도 있다고 본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토: 여전히 지칠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십니까?
히론: 여전히 고요한 평화 속에 정주하고 있는가?
그 주변을 돌아다니는 게 내겐 기쁨이다.
만토: 저는 머무릅니다. 제 주변을 시간이 돌고 있지요.
그런데 이자는요?
히론: 저 요란하게 소문난 밤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단다.
헬레네를 말이지, 그것도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글쎄 헬레네를 갖고 싶다는 게야.
그러면서도 어디서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
먼저 아스클레피오스의 치료부터 받아야 될 거다.
만토: 저는 그런 자가 좋습디다. 불가능한 것을 하겠다고 덤벼드는 자가요.
MANTO. Streifst du noch immer unermüdet?
CHIRON. Wohnst du doch immer still umfriedet,
Indes zu kreisen mich erfreut.
MANTO. Ich harre, mich umkreist die Zeit.
Und dieser?
CHIRON. Die verrufene Nacht
Hat strudelnd ihn hierher gebracht.
Helenen, mit verrückten Sinnen,
Helenen, will er sich gewinnen
Und weiß nicht, wie und wo beginnen;
Asklepischer Kur vor andern wert.
MANTO. Den lieb’ ich, der Unmögliches begehrt. (V. 7478ff.)
불가능을 꿈꾸는 파우스트는 달리는 시간을 멈추게 해서라도 그 꿈을 좇으려 한다. 그러나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시간 속에 있는 인간으로서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 있는 파우스트가 <머무르는 시간>인 만토의 도움을 받아 내려가는 페르제포네이아의 세계는 <죽음>의 지하세계이다.
만토: 들어가라, 대담하기 짝이 없는 친구여, 기쁨이 있기를!
저 어두운 통로를 따라가면 페르제포네이아에게 이르게 되.
MANTO. Tritt ein, Verwegner, sollst dich freuen!
Der dunkle Gang führt zu Persephoneien. (V. 7489f.)
신화에 따르면 페르제포네이아는 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로 들판에서 꽃을 따며 놀다가 명부의 신 하데스에게 붙잡혀 하계의 여왕으로 되었고, 그녀를 찾아 헤매던 어머니 데메테르와 하데스의 합의에 따라 한 해의 절반은 지상에 살고 한해의 절반은 지하에 살게 되었는데, 이러한 신화 속에는 자연의 이치, 즉 곡식의 씨앗[=페르제포네이아]이 겨우내 땅속[=명부冥府]에 머물렀다가 다시 봄에 새순이 되어 땅밖[=지상]으로 나오는 현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땅속의 씨앗이 새봄을 그리워하듯이 지하의 페르제포네이아도 지상의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녀는 올림포스산 아래 휑하니 뚫린 발치에서
남편이 금지한 바깥소식에 남몰래 귀 기울이고 있지.
In des Olympus hohlem Fuß
Lauscht sie geheim verbotnem Gruß. (V. 7491f.)
인간의 영혼이 자신의 원초적 근원에 대해 끊임없이 가져온 그리움이 페르제포네이아의 신화에 스며들어있는 것이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서 명부의 세계로까지 내려갔다는 오르페우스의 신화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의 표징처럼 페르제포네이아의 신화 위로 겹쳐진다. 그러나 아내를 찾아냈지만 뒤돌아보면 안된다는 조건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아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저 불후의 예술가 오르페우스의 비극이었고, 이 비극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소명이 파우스트에게 덧붙여진다.
이곳은 예전에 내가 오르페우스도 몰래 들여보내 주었던 곳이야.
그 친구보다는 좀 잘해보게나. 어서 내려가라. 용감하게!
Hier hab’ ich einst den Orpheus eingeschwärzt;
Benutzt es besser! frisch! beherzt! (V. 7493f.)
신화를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아름다움을 향한 그리움은 근본적으로 동질적이다. 괴테의 작품들에서도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몰입과 예술에 대한 몰입이 서로 얽혀있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사랑하는 대상 (아름다움)>을 향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자세야말로 예술가가 지녀야할 존재론적 소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니체의 표현대로 “이미 저 저승세계에서 모든 표피적인 것들을 넘어선 가운데 한번 손님으로 있어보면서 페르제포네이아의 탁자에서 그녀와 직접 주사위도 던져보고 내기도 해보았음 schon in der Unterwelt und jenseits aller Oberflächen zu Gaste gewesen sein und am Tische der Persephone mit ihr selber gewürfelt und gewettet haben”을 전제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2.4. 에로스의 찬가
- <에게해(海)의 기슭>
호문쿨루스는 태생상 본질이 “사유하는 존재 Denker”(V. 6870)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은 없다.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파우스트의 꿈을 읽어낸 것도 호문쿨루스였다. 그러나 이처럼 호문쿨루스가 무한한 사유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체적 존재는 플라스크라는 공간 안에 제한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 호문쿨루스 스스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게 사물들의 속성이라는 건데,
자연적인 것은 우주 전체라도 공간이 부족할 정도지만,
인위적인 것들은 제한된 공간 안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죠.
Das ist die Eigenschaft der Dinge:
Natürlichem genügt das Weltall kaum,
Was künstlich ist, verlangt geschloßnen Raum. (V. 6882ff.)
줄거리의 추이와 관련시켜 보자면, 호문쿨루스의 발언에는 근대적 자연과학의 인식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그너의 진리는 실험실에서의 진리이지 바깥세상에서의 진리는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문쿨루스는 자신을 만들어준 “아빠 Väterchen” (V. 6879) 바그너에게 작별을 고하고, 세상 속으로 떠난다.
나는 세상을 좀 돌아다니면서
내 존재의 화룡점정을 이루어볼까 해요.
Indessen ich ein Stückchen Welt wandre,
Entdeck’ ich wohl das Tüpfchen auf das i. (6993f.)
<육체>가 없는 호문쿨루스에게 존재의 근거는 사유하는 <정신> 뿐이다. 인간이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점에서 <육체>는 정신의 또다른 절반이 되는데, 호문쿨루스는 이 절반이 없다. 그러므로 호문쿨루스에게 <존재의 화룡점정이 되는 것>이란 다름 아닌 육체적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되며,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호문쿨루스가 겪게 될 과정은 <육체적인 것과 결합하는 과정>인 것이다.
탈레스: 저 녀석이 조언을 구하고 있어요, 생성하고 싶다고 말이죠.
저 녀석이 내게 해준 말에 의하면,
희한하게도 저 녀석은 절반만 세상에 나왔어요.
정신적인 속성으로는 부족한 점이 없어요
눈에 띨 정도로 부지런하죠.
지금까지는 저 유리병의 무게가 전부예요.
그런데 우선 육체를 가지고 싶다는 거예요.
THALES. Es fragt um Rat und möchte gern entstehn.
Er ist, wie ich von ihm vernommen,
Gar wundersam nur halb zur Welt gekommen.
Ihm fehlt es nicht an geistigen Eigenschaften,
Doch gar zu sehr am greiflich Tüchtighaften.
Bis jetzt gibt ihm das Glas allein Gewicht,
Doch wär’ er gern zunächst verkörperlicht. (V. 8246ff.)
서구정신사적 관점에서 볼 때 <정신이 육체를 가지는 과정>은 주로 태초에 만물이 생성되는 과정과 결부된다. 괴테가 중요시하는 신플라톤주의에 있어서도 만물이 창조되는 과정은 태초의 영원한 빛과 같은 정신이 스스로 차고 넘쳐 흐르다가 멈추어서면서 굳어지는 과정처럼 설명된다. 만물이 생성되는 원칙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원형적인 이론은 탈레스의 수성론과 아낙사고라스의 화성론인데, 이 두 학자가 호문쿨루스를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도 호문쿨루스의 육체화에는 만물의 생성과 관련된 서구의 정신사적 전통이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성론자 탈레스는 호문쿨루스를 <에게해(海)의 기슭>으로 데리고 간다. 그런데 이 바다에는 축제준비가 한창이다. 신화 속에서 바다의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지혜로운 네레우스가 그의 딸들을 일년에 한번씩 만나는 날이 이 날인 것이다. 탈레스로부터 호문쿨루스를 넘겨받은 프로테우스는 호문쿨루스를 등에 태우고 바다속으로 들어간다. 호문쿨루스를 <바다와 결혼>시키기(V. 8320) 위해서다. 이어서 네레우스의 딸들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딸이며, 비너스 다음으로 숭앙을 받는 미인이고, 오늘의 주인공이기도 한 갈라테아가 “조개 마차 Muschelwagen”(nach V. 8423)를 타고 나타난다. 서양의 비너스 신화나 동양에서의 <음(陰)>에 관한 신화에서 보듯이 <조개>는 신화적인 여성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이 축제의 <바다>에는 <여성적인 것> 또는 <생성의 모태>라는 이미지가 부여되고 있다는 것이다. 호문쿨루스의 소재를 제공했던 파라첼주스에게서도 물[=바다]은 태초의 생명의 원천이었다.
물[=바다]은 모태적인 질료였다. 그리고 하늘과 땅은 바로 이 물에서 창조된 것이며 [...] 그리고 그 안에 신의 정신이 담겨 있었고, [...] 따라서 세계는 물에 다름 아니며, 신의 정신은 물위에 있었고, 그래서 물이 세계로 되었던 것이다.
das wasser war matrix; dan in dem wasser ward beschaffen himel und erden [...]. in deren ward der geist gottes tragen, [...] da nun also die welt nichts war sondern ein wasser und der geist des herrn war auf dem wasser, so ward das wasser zu der welt.
이 바다에서 벌어지게 될 축제를 위해서 모셔와야 할 신상(神像)의 주인공들은 <카비로이들 Kabiren>인데 이들의 본질이 “욕구Sucht”이기도 하고, “동경 Sehnsucht”이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오늘 축제의 본질은 <존재의 생성을 위한 에로스>라는 것이 암시된다. 그렇다면 이 에로스의 방식은 어떤 것일까. 우선 바다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프로테우스의 조언에 따르면, 작은 미생물에서 출발해서 고등생물까지 나타나는 바다 속 생물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된다.
넓은 바다에서 시작해야 되.
거기서 우선은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가장 작은 것들을 삼키면서 기뻐하는 거지
그렇게 차츰차츰 커져가다가
보다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거야.
Im weiten Meere mußt du anbeginnen!
Da fängt man erst im kleinen an
Und freut sich, Kleinste zu verschlingen,
Man wächst so nach und nach heran
Und bildet sich zu höherem Vollbringen. (V. 8260ff.)
자연철학자 탈레스의 주문에 따르면 호문쿨루스가 겪게 될 에로스는 생물학적인 관점에서의 생명의 기원과정, 즉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저 알려진 생성방식이 된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창조를 시작하는 것 Von vorn die Schöpfung anzufangen”(V. 8322)이 좋고, “영원한 규범에 따라 nach ewigen Normen”(V. 8324) 움직이면서 “수천가지의 형식들을 거치고 Durch tausend, abertausend Formen”(V. 8325), “인간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bis zum Menschen”(V. 8326)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될 거라는 것이 탈레스가 호문쿨루스에게 추천하는 생성과정이기 때문이다.
갈라테아가 <비너스 신화>의 산물이고, 호문쿨루스가 <파라첼주스적 존재론의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에게해의 에로스에는 성애적 차원의 에로스와 창조론적인 차원의 에로스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에로스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는 플라톤의 ?향연 Symposion?에 따르면, 에로스는 비너스의 아들로서 남녀간의 사랑을 가능케 하는 신일 수도 있지만, 창조신화에서의 카오스 다음으로 오래된 신일 수도 있다. 플라톤이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고, 그 다음으로 있었던 것이 대지와 에로스라는 것이다. 호문쿨루스의 출처가 되는 파라첼주스에 의하면 이러한 태초의 카오스가 창조주에 의해서 네 개의 원소 <水 Wasser, 風 Luft, 地 Erde, 火 Feur>로 나뉘어지는 과정에서 세계창조가 시작되었다. 결국 다양한 형태의 에로스가 서로 뒤얽히고 있는 곳이 바로 <에게해의 기슭>이다. 이런 까닭으로 에로스에 대한 찬양이 이 축제의 대단원을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 에로스여 이 세상을 지배하시라!
[...]
물이여 만세! 불이여 만세!
[...]
그대들 4원소여! 이 바다의 모든 곳에서
그대들에게 바치는 잔치를 받으시라!
So herrsche denn Eros, der alles begonnen!
[...]
Heil dem Wasser! Heil dem Feuer!
[...]
Hochgefeiert seid allhier,
Element’ ihr all vier! (V. 8479ff.)
에로스에 대한 찬양으로 인해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은 작품말미에 나타나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예찬과 구조적으로 결부된다. 다양한 형태의 시간 속에 나타나는 에로스의 찬가, 이것이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의 본질이다.
결론
본 논문은 드라마 ?파우스트?의 제2부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형태는 어떤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했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문제를 논구하려면 역사적 시대의 문제와 추상적 시간의 문제를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사실 ?파우스트?, 특히 제2부의 난해성은 이러한 시간의 두 얼굴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2부에서 흐르는 시간을 역사적 시대라는 관점에서 좇아가다 보면, ?파우스트?는 사회사적 작품으로 보이고, 추상적인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줄거리를 분석해보면, 이 작품의 주제는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것이 된다. 작품 전체에 해당되는 시간의 두 양상은 작품의 각부분에도 그대로 해당되는데, 제2막의 경우에 적용시켜보면, 전반부는 역사적 지평에서 전개되다가, 후반부인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에 이르면 추상적, 또는 존재론적 지평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2막의 주제도 처음에 시대사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다가 뒤로 갈수록 시대사적 성격이 희석되면서 에로스를 둘러싼 존재론으로 변모해간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에로스를 둘러싼 존재론 때문에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은 ?파우스트? 작품전체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저 <영원히 여성적인 것>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 <천상에서 시작해서 온갖 세상사를 거쳐 지옥까지라도 가보자>던 드라마가 결국 지옥으로 가지는 않고 천상으로 다시 올라가게 되는 것은 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의 본질에 힘입고 있거니와, 이 여성적인 것의 본질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파우스트? 전체가 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향해 가는 과정이듯이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도 저 영원한 에로스를 향해 가는 다양한 형태의 시간 여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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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Metamorphose der Zeit von Geschichte zu ontologie
in der Klassischen Walpurgisnacht
Soon-Hee Oh (Seoul National Univ.)
Die Zeit im 2. Akt des zweiten Teils des Faust hat zwei Dimensionen, nämlich die historische in den Szenen Hochgewölbtes enges gotisches Zimmer und Laboratorium, und die ontologisch enthistorisierte in der Klassischen Walpurgisnacht. Als Übergang von der historischen zur ontologischen Dimension der Zeit fungiert die paradoxerweise von Mephisto vertretene Typologie als Geschichts- betrachtung, die auf die Bibelexegese im 18. Jh. zurückgeht, wobei das Verhältnis zwischen dem Alten und dem Neuen Testament als Korrelation zwischen týpos und antítypos im Sinne von Vorprägung und Ausprägung angesehen wird. In der Maske des Mephisto ist sozusagen Goethes typologische Distanzierung von der geschichtlichen Zeit verborgen, denn: Nichts Neues unter der Sonne.
Die Metamorphose der Zeit in der Klassischen Walpurgisnacht beginnt mit der typologischen Enthistorisierung der geschichtllichen Ereignisseder in der ersten Szene Pharsalische Felder, wo sich die Urgeschichte, die eigentlich einmalig sein sollte, ins Ewige wiederholt. Am oberen Peneios wird die geschichtliche Identität des Mephisto entfremdet und der historische Dualismus von Gut und Böse wandelt sich in ein ontologisches Zusammenspiel von Schönheit und Häßlichkeit um. Am untern Peneios findet man das Zusammentreffen von allen Urformen der Zeit, die vor allem von Sphinx, Chiron und Manto allegorisch veranschaulicht werden. In der letzten Szene Felsbuchten des Ägäischen Meers rücken die ursprünglichen Vorstellungen über Zeit, wo das Sein begonnen hat, in den Vordergrund und im Prozeß der Verkörperung des Homunculus wiederspiegelt sich die Seinsgeschichte von der kosmogonischen Schöpfung der Welt zur menschlichen Vereinigung.
Die Durchforschung des Labyrinthes der Flammen in der Klassischen Walpurgisnacht kann als eine Reise in die verschiedenen Dimensionen der Zeit verstanden werden, die sich um den ontologischen Eros dreht, wobei die Klassische Walpurgisnacht zu einer Station zu dem Ewig-Weiblichen des ganzen Dramas wird, dessen Wesen nichts anderes als die ewige Liebe ist, die wiederum im Laufe der ganzen Handlung eine Metamorphose von Geschichte zu ontologie durchma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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