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책

나뭇잎숨결 2013. 3. 27. 08:24

 

인간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들 가운데 가장 놀랄만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책이다. 다른 것들은 신체의 확장이다. 현미경, 망원경은 시각을 확장한 것이며, 전화는 목소리의 확장이고, 칼과 쟁기는 팔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다시 말해, 책은 기억의 확장이며 상상력의 확장이다.


버나드 쇼우는 희극 「시저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언급하면서 이 도서관은 인류의 기억이라고 했다. 책이란 바로 이런 것이며, 나아가서는 상상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과거란 일련의 꿈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꿈을 기억해내는 것과 과거를 기억해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책의 기능이다.


 나는 언젠가 책에 관한 역사를 쓰려고 한 적이 있었다. 물리적 관점에서 본 책의 역사가 아니다. 내 관심은 방대한 규모의 장서가의 책 같은 물리적인 책 이 아니라 책에 대한 다양한 평가이다. 이 점에서는 슈펭글러가 나보다 선배이다. 그는 『서구의 몰락』에서 책에 대한 귀중한 고찰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슈펭글러가 말한 것을 바탕으로 삼아 몇 가지 내 견해를 덧붙이기로 한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책>中에서

 

 

보르헤스의 말처럼 도서관은 고귀한 책들로 무장한 고독과 비밀의 공간이다. 무엇보다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세상에 종말은 오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는 곳이다.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 진리에 취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그 곳, 내가 존경 혹은 지인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도서관에서 만났다. 책 읽어주는 남자나 여자가 아니라면 책에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고독한 순례가 필수적이다. 세상에 중요한 일들은 결국 혼자하듯, 내가 존경하는 노교수님을 자주 도서관에서 만난다. 우연히. 맞은편 자리에 앉아 누가 더 오래 있나 내기라도 하듯, 내가 펼쳐든 지식의 도판에서, 맞은 편에 앉은 노교수의 안경너머에서- 빛나는 총안과 백발에도 멈추지 않는 지식애- 후배들의 형형한 눈빛에서 풍겨 나오는 기갈과 풍요의 냄새를 동시에 맡는다. 진리에 심취해 있는 이들이 지닌 향기를 이제 나는 맡을 수 있다. 책을 통해 길을 발견한 사람들에게서는 한지 같은 여백의 냄새가 난다. 나에게 소망이 하나 있다면 고향마을에 작은 도서관을 짓는 일이다.

 

이 가을 헌책방이나 도서관 순례는 어떻까? 좋은 책은 영혼에 피를 돌게 한다는 뉴욕 공공도서관 , 영혼의 쉼터, 하늘로 이르는 순례 지인 비블링겐 수도원도서관 , 우주와 하나로 합쳐지는 학자의 집인 규장각 , 지식의 불을 밝히는 등대인 미국 의회도서관 , 위대한 사서 없이 위대한 도서관은 없다는 마자린 도서관 , 사람들은 어디에서 최고의 지식을 얻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독일 국립도서관 , 도서관 없는 수도원은 무기고 없는 요새라는 아드몬트 베네딕트 교단 수도원도서관 , 센 강변에 세운 지식의 탑인 프랑스 국립도서관 , 안나 아말리아를 구하자는  안나 아말리아 공작부인 도서관, 지혜의 여신이 머무는 장엄한 공간인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 지성과 역사가 숨쉬는 대학의 심장인 하이델베르크 대학도서관 , 영혼을 치유하는 요양소인 장크트 갈렌 수도원도서관 , 프라하 중심에 세운 지식의 이정표인 체코 국립도서관 , 미국 역사를 살아 있는 그대로인 부시 대통령도서관 , 자연과 한몸이 되어 세월을 비껴간다는 해인사 장경판전...


 

 



Sansovino Library, Rome, Italy

 



New York Public Library, New York, USA

 

     고대인들은 우리처럼 책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 사람들은 책을 말(口語)의 대용품으로 보았다. 흔히 인용되는, “글은 남고, 말은 날아간다”(Scripta manner verba volat)라는 구절은 말이 덧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글(文語)은 항구적이고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말은 빠르고 가벼운 것, 플라톤의 말처럼 “빠르고 신성한” 것이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말로 가르쳤다.


     첫 번째 예로 피타고라스를 살펴보자. 우리가 알기로 피타고라스는 일부러 글을 쓰지 않았다. 그가 글을 쓰지 않은 것은 글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피타고라스는 “문자란 그를 죽이는 것이며 영혼(espíritu)은 생명을 불어넣는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는 『성서』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는 글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 학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피타고라스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예컨대, 피타고라스 학파는 영겁회귀라는 믿음 또는 교리를 가르쳤다는 식이다. 이 영겁회귀는 훨씬 후에 니체가 발견하게 된다. 영겁회귀란 순환하는 시간이라는 뜻으로 성 어거틴은 『신국』에서 이를 반박하고 있다. 성 어거스틴의 멋진 비유를 사용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스토아 학파의 순환하는 미로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순환하는 시간이라는 관념은 흄, 블랑키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다루었던 문제이다.


     피타고라스는 의도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 그가 죽은 후에도 제자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기를 바랐다. 여기에서 ―그리스어를 모르기 때문에 라틴어로 얘기하면― “스승이 그렇게 말하셨다”(Magister dixit)라는 구절이 유래한다. 이는 스승이 그렇게 말했으므로 그의 말에 얽매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스승이 제창한 사상에 대해 계속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순환하는 시간이라는 교리를 창시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의 제자들이 이를 가르쳤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피타고라스는 육체적으로는 죽었으나, 그의 제자들은 일종의 ‘윤회’ ―아마도 피타고라스는 이 단어를 좋아할 것이다― 를 통해 그의 사상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말한다고 비난하면 그들은 저 어구, 즉 “스승이 그렇게 말했다”라고 둘러댔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플라톤이 아주 좋은 예이다. 그는 책이란 상(像)과도 같은 것이라고 ―조각이나 그림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했으며, 어떤 사람은 책이 살아 있다고 믿고 있으나 책에게 무엇을 물어보면 아무런 대답도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책이 벙어리가 되지 않도록 플라톤적 대화술을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여러 등장인물이 된다. 그는 소크라테스이고 고르기아스이고 그 밖의 여러 사람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했다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이렇게 하여 아무것도 글로 남기지 않았던 소크라테스는 불멸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 역시 말로 가르친 스승이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책>中에서



Riggs Library, Georgetown University, USA
우리가 아는 한 그리스도는 단 한 번, 그것도 이내 지워져버릴 땅바닥에 글을 썼을 뿐이다. 다른 글은 쓰지 않았다. 부처 역시 말로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그의 설법은 남아 있다. 성 안셀무스는 “무지한 자의 손에 책을 쥐어주는 것은 어린애의 손에 칼을 쥐어주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책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동양권에서는 책이란 사물의 이치를 밝혀주지 못한다는 관념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책이란 그저 사물의 이치를 깨닫도록 도와줄 뿐이다. 나는 히브리어를 모르지만, 카발라(Cabala)를 조금 공부해 본 적이 있다. 『광휘의 책』과 『창조의 책』을 영어판과 독어판으로 읽었다. 내가 알기로 이 책들은 이해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해석되기 위해, 즉 독자의 사고를 자극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고전시대 사람들은 우리들처럼 책을 존중하지는 않았다. 비록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베개 밑에 『일리아드』와 칼을 넣어두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둘 다 무기였다. 그는 호머를 대단히 존경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 성스러운 작가로 여긴 것은 아니다. 『일리어드』와 『오디세이』는 성전(聖典)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존경받는 책이면서도 공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시인들을 추방했으나 불경한 사람으로 의심을 받지는 않았다. 책에 대한 고대 사람들의 반감 중에서도 세네카의 경우는 매우 흥미롭다. 『루실리오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는 책 백 권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허영이 많은 사람이라고 비판하는 글이 있다. 책을 백 권이나 읽을 만큼 그렇게 시간이 많은 사람이 있겠느냐고 세네카는 반문한다. 이와 반대로 지금은 장서량이 많은 도서관이 대접을 받는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책에 대한 고대의 개념은 우리와 전혀 다른다. 책은 언제나 말의 대용품이었다. 이윽고 동양에서 전혀 새로운 개념, 고전시대에는 완전히 낯선 개념이 들어왔는데, 그것은 성전(聖典)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서 두 가지 예를 들기로 한다. 먼저, 가장 오래 된 이슬람교도들부터 살펴보자. 이들은 『코란』이 천지창조보다 앞선 것이며, 아랍어보다 앞선 것이라고 생각한다. 『코란』은 하느님의 자비나 정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지 하느님이 만든 작품이 아니다. 『코란』을 보면, 그 책의 모체(母體)에 대해 아주 신비롭게 얘기한다. 그 책의 모체는 하늘에서 쓰여진 코란본이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코란의 원형쯤 될 것이다. 『코란』 따르면, 그 책 자체는, 즉 하늘에서 쓰여진 책은 하느님의 속성이며, 천지창조 이전의 것이다. 이슬람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시기적으로 우리와 보다 가까운 예로 『성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토라』, 즉 『모세 오경』을 살펴보자. 이 책들은 성령(聖靈)이 구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진기한 일이다. 다시 말해,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저자가 저술한 책들을 단 하나의 정신(espíritu)이 썼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성서』를 보면, 성령은 자신이 원하면 어느곳에서나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문학작품을 합쳐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 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책의 제목이 『토라』(그리스어로는 Biblia, 책이라는 뜻)이다. 이 모든 책들은 단 사람의 저자, 즉 성령이 썼다고 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버나드 쇼우에게 성령이 『성서』를 썼다는 사실을 믿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시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은 모두 성령이 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책이란 저자의 의도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저자의 의도란,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하찮은 것이다. 책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져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돈키호테』는 기사소설에 대한 풍자 이상이다. 우연적인 요소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책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책>中에서

 



 

Austrian National Library, Vienna, Austria


 

     

     이제 이러한 관념의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예컨대, 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자.





맑은 물 유리 같이 흐르는데,

나무들 들여다 보고 서 있네.

서늘한 그림자로 덮인 초원.



이 세 구절은 각각 11음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것을 성령에 의해 쓰여진 작품과 비교할 수가 있으며, 어떻게 이것을 문학을 만들고 책을 구술한 신성이라는 개념과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성령에 의해 쓰여진 책에는 우연적인 요소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정당화되어야만 하며, 문학도 정당화되어야만 한다. 예컨대, “태초에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Bereshit bara elohim)라는 『성서』의 첫 구절은 B로 시작되는데, 이는 축복(Bendecir)이라는 단어의 머릿글자와 일치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성서』에는 우연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절대로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카발라로, 문학에 대한 연구로, 고대인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책의 개념, 즉 신성이 구술한 성전으로 나아가게 된다.


     고대인들은 뮤즈에 대해서 아주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호머는 『일리아드』 첫머리에서 “뮤즈의 여신이여, 아킬레스의 분노를 노래하라”라고 말했다. 여기서 뮤즈는 영감과 같다. 반면에, 성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강력한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하느님이 문학을 낳고, 하느님이 책을 썼다. 그 책에는 우연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성서』 각 절의 철자 수도 음절 수도 우연이 아니며, 우리가 철자로 언어 유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우리가 철자에서 숫자 상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것이 이미 고려된 것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책>中에서

 


 



Library of the Benedictine Monastery of Admont, Austria

되풀이 말하지만, 책에 대한 두 번째 위대한 개념은 책이 신의 작품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러한 개념은 책이 말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여겼던 고대인의 생각보다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에 더 가깝다. 그러나 성전이라는 믿음은 이내 퇴조했다. 다른 믿음, 예컨대 한 권의 책이 각국을 대표한다는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우리가 알기로, 회교도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책의 사람들”이라고 했고, 하인리히 하이네(H. Heine)는 책을 조국으로 삼았던 이슬라엘 민족을 가리켜 “성서는 유대인들”이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개념, 즉 각국은 한 권의 책에 의해서, 수많은 책을 쓴 한 사람의 작가에 의해서 대표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것은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각국은 자기 나라의 특성과 너무 동떨어진 사람을 대표자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영국을 대표하는 사람은 사무엘 존슨 박사일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영국은 세익스피어를 든다. 하지만 세익스피어는 영국 작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영국인답지 않은 작가이다. 영국인의 전형적인 특징은 ‘줄잡아 말하기’(understatement), 즉 조금 삼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세익스피어는 비유법을 사용하여 과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이탈리아인이나 유대인이었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다른 예는 독일의 경우이다. 너무도 쉽게 광신적으로 되어버리는 이 나라는 광신적인 사람이 아니라 인내심이 많은 사람, 그리고 조국이라는 개념을 조금도 중요시하지 않았던 사람을 든다. 그는 괴테이다. 괴테가 독일을 대표한다. 프랑스의 경우, 특정 작가를 선택한 적은 없으나 위고(Hugo)를 꼽는 경향이 있다. 물론 나는 위고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지만, 위고는 전형적인 프랑스인이 아니다. 위고는 프랑스에서는 이방인이다. 수식어와 비유법을 사용하는 위고가 프랑스인의 전형은 아니다. 더 흥미로운 예는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로페 데 베가나 칼데론이나 케베도가 대표할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가 스페인를 대표한다. 세르반테스는 종교재판이 열렸던 시대의 사람이지만 종교적 자유를 믿었으며, 스페인인의 장점도 단점도 갖지 않은 사람이다.


     이는 마치 각국이 자기 나라와는 상이한 특성을 사람, 즉 자신들의 결점을 얼마간 해독하고, 완화하고,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대표자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 아르헨티나 인들은 사르미엔토의 『파쿤도』가 우리를 대표하는 책이라고 꼽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전쟁의 역사, 칼의 역사를 가진 아르헨티나인들은 탈주병의 일대기를, 다시 말해서 『마르틴 피에로』를 꼽는다. 비록 이 작품이 그런 책으로 꼽힐만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아르헨티나의 역사가 사막을 정복한 도망자에 의해서 대표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사실이 그렇다. 마치 각국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고 있듯이 말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책>中에서

 

 




Biblioteca Geral University of Coimbra, Coimbra, Portugal

책에 대해 수많은 작가들이 재치 있는 얘기를 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언급하려고 한다. 첫 째로 언급할 사람은 몽테뉴이다. 그의 수필집에는 책에 관한 글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 “나는 즐겁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몽테뉴는 의무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책에서 어려운 구절을 발견하면 손에서 책을 놓았다고 한다. 독서란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년 전에 그림이 무엇이냐는 앙케이트가 실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누이동생 노라는 이 질문을 받고 그림이란 색채와 형태를 통해서 즐거움을 주는 예술이라고 대답했다. 나라면 문학 역시 즐거움의 한 형태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가 읽는 책이 어렵다면 그 작가는 실패한 것이다. 따라서 제임스 조이스 같은 작가는 본질적으로 실패한 작가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읽기 어렵기 때문이다.


     책은 읽기 힘들어서는 안 되며, 행복도 노력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나는 몽테뉴가 옳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는 자기 마음에 드는 여러 작가들을 열거한다. 버질을 인용하면서 『에네이다』보다는 『고르기아스』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에네이다』를 더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몽테뉴는 열정적으로 책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는 책이 행복을 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신명나는 즐거움은 아니라고 한다.


     에머슨은 이와 반대이다. 그가 책에 대해 한 말은 어느 사람의 글 못지 않게 훌륭하다. 에머슨은 어느 강연에서 도서관은 일종의 마술상자라고 했다. 이 상자 속에는 인류의 훌륭한 여러 정신이 마술에 걸려 있다. 하지만 그들이 벙어리 상태를 면하려면 우리들의 말이 필요하다. 우리들이 책장을 펼치면 그들은 마술에서 깨어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우리가 훌륭한 사람들을 동반자로 삼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들을 찾지 않고 주석이나 비평을 읽으려 들면 그들이 말한 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책>中에서

 

 





Klementium Library, Prague, Czech Republic

 

 나는 지난 20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의 문과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참고 문헌은 몇 권만 볼 것이며, 비평은 읽지 말고 직접 작품을 읽으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그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항상 즐거움을 맛볼 것이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했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조(語調)이며,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목소리, 우리들 귀에 들리는 작가의 목소리이다.


     나는 삶의 일부를 문학연구와 창작에 바쳐왔지만, 독서는 행복을 얻는 한 방식이며, 이보다 못한 행복은 시를 쓰는 것, 다시 말해서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창작은 우리가 읽었던 것을 망각하고 상기함으로써 생겨나는 혼합물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만을 읽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책은 행복을 얻는 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에머슨과 몽테뉴는 일치한다. 우리는 문학에서 많은 행복을 느낀다. 나는 읽기보다는 다시 읽기에 치중해왔다. 다시 읽기 위해 읽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읽기보다는 다시 읽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책을 숭배하는 방식이다. 이런 얘기가 여러분에게는 감상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상적인 얘기는 아니다. 나는 여러분 각자가 실현할 수 있는 믿음이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 전체가 아니라 개개인이 그러기를 바란다. 전체는 하나의 추상이며, 개인만이 진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장님이 아닌 척, 아직도 책을 사서 서재를 채우고 있다. 일전에 1966년판 브록하우스 백과사전을 선물 받았다. 우리 집에 그 책이 있다고 느낌, 그것은 하나의 행복이었다. 저기에 20여권의 책이 있다는 느낌, 비록 고딕체 글씨를 읽을 수 없고, 거기에 실린 삽화와 지도는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저기에 책이 있으며, 그 책이 나에게 다정스럽게 손짓하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생각하기에 책이란 우리 인간들이 맛볼 수 있는 여러 행복 가운데 하나이다.


     책이 사라질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책과 신문이나 음반 사이에 무슨 차이점이 있느냐고 할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 신문이란 읽고 망각하며, 음반도 마찬가지로 듣고는 망각한다. 그리고 음반은 기계적이라 경박스럽다. 아무튼 책은 읽으면 기억에 남는다.


     『코란』이나 『성서』나 『베다』 ―여기에도 『베다』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쓰여 있다― 와 같이 성전이라는 개념은 옛 것일 수도 있으나, 책은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될 모종의 신성함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펼쳐보면 우리는 미적 체험을 할 수 있다. 책에 가로 누워 있는 단어들은 무엇인가? 저 죽은 기호들은 무엇인가? 결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책을 펼쳐보지 않는다면 책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그저 종이와 가죽으로 된 입방체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책을 읽으면 색다른 무언가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은 읽을 때마다 매번 달라진다.


     내가 누차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강물이 흘러가기 때문에 두 번 다시는 같은 강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우리들도 강물 못지 않게 흘러간다는 점이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책은 달라지고 단어들이 함축하고 있는 뜻도 달라진다. 게다가, 책에는 과거가 담겨 있다.


     나는 비평을 폄하하는 얘기를 했는데, 이제 그 말을 취소하려고 한다. 뭐, 취소해서 안될 이유도 없지 않은가. 『햄릿』은 17세기 초에 세익스피어가 생각했던 바로 그 햄릿이 아니다. 햄릿은 코울리지의 햄릿이고, 괴테의 햄릿이며, 브래들리의 햄릿이다. 햄릿은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돈키호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루고네스와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가 읽은 『마르틴 피에로』도 동일하지 않다. 루고네스(Leopold Lugones, 1874~1938)는 아르헨티나의 ‘모데르니스모’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마르티네스 에스트라다(Ezequiel Martínez Estrada, 1895~1964)는 아르헨티나의 영향력 있는 수필가이다. 두 사람 모두 『마르틴 피에로』에 관한 훌륭한 글을 썼다.

독자들이 책을 풍요롭게 만들어왔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 책이 쓰여진 이래 지금까지 흘러왔던 전시간을 읽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책을 숭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책은 오자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고, 우리는 작가와 견해를 달리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책은 ―미신적인 관점이 아니라 지혜를 얻고 행복을 맛보려는 열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신성한 것, 성스러운 것을 지니고 있다.


     이상으로 오늘 얘기를 마치려고 한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책>中에서

 



 



Trinity College LIbrary, AKA, The Long Room, Dublin, Ireland





Queen’s College Library Oxford





Abbey Library St. Gallen, Switzerland

 


도서관은 인류문명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공간이지만, 지금 우리에겐 단순히 '자료를 보관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공공기관이란 이미지가 우선한다. 왜 우리는 도서관 하면 우중충한 회색빛 건물 안에 거대한 열람실과 조락한 서가, 퇴색된 책들이 잠들어 있는 있는 풍경을 먼저 떠올리는 것일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지식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서 도서관에 간다.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한평생 도서관학과 문헌정보학을 연구해온 지은이 최정태는 사람들이 도서관의 가치와 숭고한 이념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도 안타깝지만, 주위에 아름다운 도서관이 없다는 것이 늘 의문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강단에서 '도서관 건축론' 등을 강의하면서부터는, 본래의 기능에 숨겨진 아름다움조차 구현하지 못하는 우리 주위의 도서관에서 시선을 돌려 '진짜 도서관'을 느끼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마침내, 2005년 여름 평생 꿈꾸어오던 도서관 여행길에 오른 그는 중세 유럽의 순례자들이 도서관을 찾았던 마음가짐 그대로, 오로지 도서관만을 향해 달렸다. 넉넉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여행하는 기간 동안 루브르 박물관이나 퐁피두 센터 등을 지척에 두고도 못본 척, 다음 도서관을 향한 여정만을 재촉해 모두 6개국 15곳의 도서관을 방문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도서관은 책의 무덤이 아니라, 책을 위한 궁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만난 도서관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희망의 기록을 보존하는 곳이었다.


좋은 책은 영혼에 피를 돌게 한다 - 뉴욕 공공도서관 , 영혼의 쉼터, 하늘로 이르는 순례 - 비블링겐 수도원도서관 , 우주와 하나로 합쳐지는 학자의 집 - 규장각 , 지식의 불을 밝히는 등대 - 미국 의회도서관 , 위대한 사서 없이 위대한 도서관은 없다 - 마자린 도서관 , 사람들은 어디에서 최고의 지식을 얻는가 - 독일 국립도서관 , 도서관 없는 수도원은 무기고 없는 요새 - 아드몬트 베네딕트 교단 수도원도서관 , 센 강변에 세운 지식의 탑 - 프랑스 국립도서관 , 안나 아말리아를 구하자 - 안나 아말리아 공작부인 도서관
지혜의 여신이 머무는 장엄한 공간 -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 지성과 역사가 숨쉬는 대학의 심장 - 하이델베르크 대학도서관 , 영혼을 치유하는 요양소 - 장크트 갈렌 수도원도서관 , 프라하 중심에 세운 지식의 이정표 - 체코 국립도서관 , 미국 역사를 살아 있는 그대로 - 부시 대통령도서관 , 자연과 한몸이 되어 세월을 비껴가다 - 해인사 장경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