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후기 메를로-뽕띠 철학에서 살의 키아즘에 대하여

나뭇잎숨결 2013. 3. 4. 06:49

 

 

르네 마그리트, The Large Family. 1963. Oil on canvas. 100 x 81 cm. Private collection

 

 

 

 

후기 메를로-뽕띠 철학에서 살의 키아즘에 대하여




장 문 정(고대 철학)




메를로-뽕띠가 죽기 전 9년 간의 철학적 여정은 그의 체계적인 저작들의 부재로 상대적으로 침묵 속에 남아 있다. 그의 파편적인 작업 노트를 통해서 우리가 그나마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현상학적 체계에서 존재론적 체계로의 전환을 꾀하려 했다는 것인데, 본고는 이러한 그의 존재론적 전환을 살의 키아즘을 통해서 모색하는 하나의 존재론적 퍼스펙티브이다. 전기에 그는 익명적 신체를 근원으로 하는 현상학적 체계를 전개시켰던 반면, 후기에 그는 신체의 코기토적 성격을 거세하기 위해 신체라는 용어와 더불어 살이라고 하는 존재론적 상징을 사용하게 된다. 고대 자연 철학의 원소들과 유사한 상징인 살은 다양한 형태와 구조들로 변형될 수 있는 근원적인 유형성을 의미한다. 살은 전기의 철학에서 그가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하나의 존재( tre)를 구현한다. 현상학적 체계에 고유한 선험적 의식 대신 유물론적인 냄새가 나는 이러한 신체나 살을 강조함으로써 그는 전기의 데카르트적 잔재를 완전히 떨어낸다. 그는 전기에서부터 천착했던 이중 감각(allochire)을 발전시켜 나와 타자의 교환적 응시 현상을 언급했는데, 이러한 나와 타자의 교차 배어(키아즘)를 통해서 형태지어지는 일종의 동일성을 살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조 변형은 이러한 살의 키아즘에 의해서 설명 가능하다. 동시에 우리는 신체를 익명적 힘이나 고유 운동성으로 해명했던 전기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그의 살 개념을 니이체의 긍정적 힘과 반동적 힘의 얽힘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재해석은 데카르트의 성찰 이래로 선험적으로 생각되었던 의식을 반동적 힘의 계보학적 생성에 불과한 것으로 해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니이체나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메를로-뽕띠는 의식에 대한 신체의 우위성을 거론함으로써 인간(초월적 의식)의 죽음을 선언한 셈이다.

※ 주요어 : 신체, 존재, 살, 키아즘, 힘, 계보학



Ⅰ. 메를로-뽕띠 후기 철학의 애매성

메를로-뽕띠는 1952년 꼴레쥬 드 프랑스의 취임을 계기로 {지각의 현상학}(1945)을 통해서 천착해 온 지각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넘어서 타인과의 의사 소통과 진리의 발생을 추적하는 문화적 현상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로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자신의 학문적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는 이런 희망을 몇 몇 에세이들을 통해서 구현시키기도 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 철학적 토대가 엄밀하게 다듬어져 있는 일련의 체계적 저서들을 저술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결국 이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1961년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중단되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1952년부터 그의 심경의 변화로 포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학문적 변화를 모색하였음에 틀림없는 이 9년간의 긴 침묵의 기간은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 때문에 더 깊은 침묵의 심연 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 씌어진 파편적인 그의 글들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후기 작업의 성과들은 그의 전기 철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각의 현상학}의 그것과는 다른 방향을 암시하는 것이다.


분명히 우

리는 중단된 기획들이나 특정한 이슈에 편중되어 있는 에세이들에 불과한 그것에서 전기 사상과 같이 그 전체를 일관적으로 꿰뚫는 일정한 기획 의도나 일정한 철학적 체계를 찾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어지는 메를로-뽕띠의 후기 철학은 이러한 침묵이 둘러싸고 있는 모호한 그의 사유의 궤적을 더듬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의 후기 작품으로 부를 수 있는 것들은 이 9년 동안 발표했던 논문들을 묶어 낸 {시이뉴}(1960)의 일부와 그의 최후의 논문인 {눈과 마음}(1964), 그리고 꼴레쥬 드 프랑스의 파편적인 강의록들, 그리고 사후 출판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4)과 {세계의 산문}(1969)이라는 두 권의 저서들이다. 처음의 두 권들은 문화적 현상을 구명하기 위한 기획의 일환으로 주로 언어나 예술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을 시도했던 반면, 강의록은 그 형식의 한계로 말미암아 다양한 철학적 이슈들에 대한 파편적 언급에 그치며, 마지막 두 권들은 앞서 언급되었듯이, {지각의 현상학}의 속편으로 기획되어 {진리의 기원}과 {세계의 산문에 대한 서론}이라는 임시 표제로 쓰여졌다가 생전에 포기된 것이다. 왜 초기의 시도가 포기되었을까? 이러한 포기는 결국 현상학적 체계의 포기를 의미하는가?


그의 후기 사상은 그의 전기 사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침묵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며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의 후기 사상에 시선을 돌려야 할 필요를 느꼈다. 침묵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비사유의 사유)은 결국 그것이 또 다른 침묵을 결과할지라도 메를로-뽕띠 자신이 평생 동안 했고 하고자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기 사상에서 후기 사상으로의 전환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묶여진 작업 노트의 '한' 암시를 발전시키려고 한다. 그는 다른 소품들에서와 달리 전기 사상과의 단절을 분명히 드러내는 '현상학으로부터 존재론으로의 전환'의 필요성을 자주 언급했다. 무엇보다 그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무언의 코기토로 대표되었던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잔재를 떨어내야 할 필요를 역설했다.


이 시기에(구체적으로 노트에서는 1959년 1월로 표시되어 있다.) 그는 필연적으로 선험적 주체에 회귀되는 현상학적 체계의 한계를 새삼스럽게 자각했던 것 같다. 전기 사상을 통해 그는 익명적 신체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현상학을 개진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현상학적 체계라는 형식이 자신의 독창적인 통찰을 데카르트적인 코기토로 환원시킬 지도 모른다는 당혹감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결국 그는 자신의 의미 있는 통찰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존재론적 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후기 작업 노트의 이러한 구절을 주목한다면, 우리는 그의 존재론에서 신체와 살에 대한 언급을 중요하게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서 살은 키아즘을 통해서 내 고유의 신체를 넘어서는 대문자적 존재( tre)가 되는데, '살(chair)'과 '키아즘(chiasme)'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전체 분량에서 비교적 짧은 언급에 불과할지라도, 그의 존재론을 형태짓는 중요한 문턱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후기 구조주의자들과의 일종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데,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는 메를로-뽕띠의 언급들과 그들의 언급들을 교차로 배치시키는 '키아즘적' 기술을 통해서 모색될 것이다.


이러한 후기의 존재론적 기획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결국 미완성으로 끝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미완성은 메를로-뽕띠 자신이 하이데거와 같은 직접적인 존재론을 기획하기를 거부하고 간접적인 존재론에 머무르기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의 죽음이 원인이 아니라 그의 의도였다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러한 간접적 존재론은 현상학적 체계를 해체하기 위해서 현상학적 체계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전기 철학에서 그가 처해 있었던 입장을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다. 그는 후기 구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선험적 주체나 의식을 더욱 더 분명하게 거부했던 셈인데,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상학이나 존재론이라는 체계의 이질성 속에서 나타나는 그의 사유의 동일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살이라는 존재( tre)

메를로-뽕띠의 신체 개념은 {지각의 현상학}에서부터 이미 기존의 해부학적 개념과 상당히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전기 사유의 틀을 빌자면 그것은 '현상학적' 신체인데, 후기의 그는 그 바깥으로 나와서 이러한 체계 순환적인 수식어를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그는 정신과 반정립적 관계에 놓여 있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는 '신체(corps)' 대신 '살(chair)'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철학의 환경을 교체했다는 가장 직접적인 암시가 될 수 있다. 그는 후기에 완전히 반데카르트적 입장에 서 있었고 이런 입장 변화는 데카르트와 근친 관계에 있는 현상학적 반성을 쇄신하는 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살'은 그러한 기계론적인 실체로 생각될 수 없도록 만드는 묘한 표현이다. 그가 직접 말하고 있듯이, 살은 전소크라테스 시기의 철학자들이 변화하는 존재자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물, 불, 흙, 바람과 같은 불변의 요소( l ment)를 거론했던 것과 동일한 근거에서 명명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신체나 살의 개념이 새로운 유물론이나 물활론(hyloz sme)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존재자들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 tre)로서 있지만 '지금, 여기'와 같은 현사실성(facticit )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보편적인 존재( tre)에 대한 구체적인 상징(embl me)"이다. 전소크라테스기의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요소들에 각각의 고유의 성질들이 있듯이, 살에도 고유한 성질이 있을 터인데, 이를테면, 물, 불, 흙, 바람이 그러하듯이 살은 유형적으로 존재하되, 어떤 결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단히 움직이는 것, 다른 것들과 합해지고 분리되는 어떤 익명적 생명을 상징한다. 살에는 정해진 형상 없이 물처럼 흐르는 성질, 불의 따스함, 흙이 주는 안정적 유형성과 점진적 변화 가능성, 멀리 이동할 수 있는 바람의 성질이 있는데, 살을 이러한 자연 철학적 요소들의 종합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따스한 덩어리로서의 살, 율동하는 살의 파동, 다른 살들과 접촉하여 하나로 되는 살, 점점 더 커지는 움직이는 살, 동시에 분열되면서 점점 작아지는 살, 살의 증식과 분열...


살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가장 잘 상징화시킬 수 있는 것은 생물학적인 세포의 아메바 운동일 것이다. 모든 존재( tre), 즉 모든 생명체뿐만 아니라, 모든 사건들과 현상들은 이런 세포들의 이합집산, 증식과 분열의 운동 속에 있다. 여기서 살은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생명체로 인정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데, 무생물적이고 순수하게 사건적인 것, 심지어 환영마저도 살이 됨으로써 이 우주는 살들의 이합집산과 같은 생명의 논리 속에 있게 된다. 멀리서 보는 이러한 존재론의 시각에서 존재( tre)로서의 살은 한시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살의 우주는 어떤 땐 빠르게 움직이기도 하고 어떤 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기도 하는 끝없는 운동 속에 있다. 살이 자기 몸의 표면에 나 있는 촉수(pseudopodes)들을 통해 다른 살들과 접합하여 하나의 살이 되는 융합의 운동과 하나의 살에서 다른 새끼 살들이 분산되는 분열적 운동을 통해서. 그래서 이런 아메바 운동을 하는 살은 하나의 형태로 고정될 수 없는 것이며, 각각의 살들에 한시적 이름을 붙이기 전에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일반적 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의 살은 나의 살로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감각될 수 있지만 감각하는 것은 아니다.―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살이라고 부른다.(예를 들어 양각, 깊이, 미쇼트(Michotte)의 경험에서의 '삶') 그것이 가능적인 것의 프래냥스, 세계 가능성(Weltm glichkeit)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그런 세계의 다양한 가능적 세계들, 단수이건 복수이건 이편의 세계) 그리하여 그것은 절대적으로 대상이 아니며, 순수한 사태로 있는 양식은 단지 그러한 세계에 대한 편중되고 이차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은 물활론(hyloz sme)이 아니다. 거꾸로 물활론은 개념화이다.―설명적인-존재자의 질서, 육적 현전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의 질서 속에 있는 거짓된 주제화― 사람들이 생각 끝에 고유 신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살에 의해서이다.

살의 존재론은 물활론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철학하기에 충실한 하나의 방식이다. 이는 그의 철학이 전통과 맺는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이, 고대의 자연 철학의 변형적 계승인데, 자고로 자연 철학은 물활론이라기보다는 존재에 대한 구체적 상징을 통해서 사유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메를로-뽕띠의 이러한 존재론을 통해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현상학의 출발점이 되면서도 현상학이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의식이나 정신의 감옥에 그가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는 살의 존재를 통해서 전기 그의 현상학적 체계가 극단까지 이끄는 힘에 의해서 의식이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로 갔던 셈이지만, 이는 단순하게 미처 인간이나 인간의 정신을 다루지 않았던 초기 철학의 발생기에로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이는 인간이 이 엄청나게 거대한 자연과 무구한 우주의 역사에서 극히 작은 점에 불과하며 인간의 의식은 이러한 작은 점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는 당연한 깨달음을 함축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식이 나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는 소박한 직관은 근세 철학이 그렇게 발전되었듯이, 이 장구한 우주의 역사를 무효화하면서 인간의 의식이야말로 세계나 자연의 절대적 토대라고 선언하는 데로 비화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로-뽕띠 자신이 강조했던 바대로 신체가 사물과 세계를 분절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간은 공간의 영점, 혹은 영도로서, 나로부터 출발하고 있"지만, 이런 공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속에 잠겨 있다. 결국 세계는 나룰 둘러싸고 있지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분명하게 표현하자면, 존재의 요소인 살은 나의 살이 아니다. 나의 살이 있다 해도 나의 살은 다른 살들로 둘러싸이게 되고, 나의 살과 남의 살의 경계는 아메바 운동 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살의 존재론은 주체의 내재성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그가 현상학에서 이러한 존재론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가 있다. 그가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다시 현상학적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는 막다른 길, 이것은 현상학적 사유의 모순이기도 하다. 이미 그는 여러 곳에서 '타자의 역설'을 무효화시키는 후설의 현상학적 구성을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역설이 해결되기 전에는 그의 존재론은 바깥의 사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내가 인식의 출발점으로서 나의 신체를 통하지 않고서 세계를 지각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러한 출발점을 벗어나서 내가 나의 바깥을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나를 통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충실하게 지키는 한에서, 가능한 하나의 해결이 있다면, 내 바깥에 있다고 믿는 세계는 사실상 그 보다 상위의 '나'를 통해서 가능한 세계, 즉 상위의 '나'의 안에 있는 세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바깥'은 진짜 바깥이 아니며, 나의 존재 위계를 통해서 안과 밖의 변증법적 운동에 있을 뿐이다. '나'의 존재 위계는 개인적 나에서 객관적인 나, 상호주관적인 나, 객관 정신 등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소박한 유아론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현상학이 취한 해결책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의식의 지향성―의식은 자기를 넘어서는 것을 탐내는 본성을 가지는데, 이 본성이 여전히 의식의 본성인 한에서 자기를 넘어서는 것 역시 의식의 것이다. 전기의 메를로-뽕띠는 세계내존재를 이와 같은 지향성을 통해 설명했다. 이제 그는 이러한 현상학적 지향성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존재론적인 이 모든 것들은 현상학적인 울타리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신체에서 살에로 명칭을 전환했다는 사실, 현상학적 체계에서 존재론적 체계로 외관을 바꿨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의식의 안과 바깥 사이의 '단절의 심연'을 건널 수는 없다는 것인데, 바깥의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용어들의 전환뿐만 아니라 그 단절을 조심스럽게 가로지르는 문턱, 즉 논리적 고리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Ⅲ. 키아즘

그러한 논리적 고리는 그가 이미 {지각의 현상학}에서부터 논의했던 신체의 이중감각―별개의 손으로 느낌(allochirie)―과 관련된다. 이는 그 이전에 후설에게서 시작된 일이었는데, 후설은 "촉각적 영역에 있어서 우리들은 촉각적으로 구성된 '외적 객체'를 가지고 있고 더욱이 제 2의 객체로서 촉각적으로 자기 구성을 하는 어떤 '신체'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만지고 있는 손가락이 그러한데, 그 경우 손가락을 만지고 있는 것은 손가락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이중 감각을 촉각에만 한정함으로써 그 통찰의 중요성을 크게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내 자신을 만지듯이 내 자신, 즉 내 신체를 볼 수 없다. 내가 보게 된 신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만져진 신체로서의 내 신체, 만져진 만지는 것으로 있는 경우와 다르고 보여진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메를로-뽕띠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확실히 비젼에서도 성립되는데, 후설이 해결하지 못했던 타자의 역설을 그는 이를 통해 해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나의 신체는 내 바깥의 타자를 '보는' 존재인 동시에 바깥의 타자에 의해서 '보여지는' 존재이다. 우리가 바깥의 사유에로 이행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모순도 이와 유사한 것이다. : 어떻게 내가 보고 있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내 바깥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치 누군가가 내 바깥에 있어서 내가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있고, 또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듯이 말이다. 메를로-뽕띠는 이러한 기묘한 체험을 다음처럼 묘사하고 있다.

어떤 광경 속에서 나의 응시가 부딪혀서―다른 인간 신체, 확장하자면 동물적 신체들말이다.― 농락 당한 적이 있다. 내가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다고 믿었던 바로 그 때, 나는 그것들에 의해 둘러싸인다. 나는 내 고유 신체의 가능성들을 일깨우고 부르는 형태가 마치 나의 제스춰나 행동들인 것처럼 공간 속에서 그려지는 것을 본다. 모든 것은 마치 지향성과 지향적 대상의 기능들이 역설적으로 뒤바뀌어진 것처럼 일어난다. 광경은 그것의 충분한 구경꾼이 되도록 나를 초대하는데, 마치 나의 정신과는 다른 또 다른 정신이 갑작스럽게 나의 신체에 머물게 되는 것처럼, 혹은 나의 정신이 저쪽으로 이끌려서 나의 정신이 주어지는 동안에 있을 광경 속으로 이주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 바깥에서 제 2의 내 자신에 의해 덥석 물리는데, 나는 타자를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을 지각하는 순간 우리가 겪게 되는 이러한 심리적 경험은 단순히 일회적 농락에 그치지 않는다. 결코 타자는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명백히 내 바깥에 있는 존재로서 겪게 되는 이처럼 간과되기 쉬운 순간의 체험을 놓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메를로-뽕띠는 이러한 경험을 후설처럼 주체의 구성으로 요약해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중화된 표상(repr sentation d doubl e) 자체를 받아들이고 타자의 역설을 해결하려는 하등의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이처럼 우리를 농락하는 진동하는 불안정한 순간이야말로 진정하게 타자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역설의 심연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성(alt rit )을 발견했다. 그는 이러한 발견을 후기 사상을 통해서 더욱 주목하고 발전시켰는데, 우리가 키아즘으로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의 신체가 보는 자인 동시에 보여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수수께끼이다. 모든 사물들을 응시하는 나의 신체는 또한 응시될 수 있으며 나의 신체가 응시하는 것 속에서 그리하여 나의 신체의 보는 힘(puissance)의 '또 다른 면'을 재인식할 수 있다. 보는 자로서 나의 신체는 보여지며 만지는 자로서 나의 신체는 만져지는데, 신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시적이고 감각적이다...―혼연한 자기, 나르시즘적 자기, 보는 자로부터 그가 보는 것에로의, 만지는 자로부터 그가 만지는 것에로의, 지각하는 자로부터 지각되는 것에로의 고유한 자기―그리하여 사물들 가운데서 취해지는 자기, 정면과 뒷면을 가지고 과거와 미래....등을 가지는 자기이다.

우리는 나의 시선이 타자의 시선과 마주할 때를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타자를 보았을 때, 타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면, 내가 보는 것은 나를 보는 타자의 시선이다. 즉 타자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타자를 보는 동시에 타자의 시선이 닿는 내 자신을 간접적으로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신체의 보는 힘의 또 다른 면'이다. 내가 우리 바깥의 사물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내 시선이 나에게서 타자에게로, 타자에게서 나에게로 부메랑처럼 원을 그리며 돌아와야 한다. 이런 우회의 운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데, 내가 타자가 될 수 없고 타자가 내가 될 수 없는 한에서, 타자의 시선과 나의 시선 중 어느 하나로 고정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멀리 있는 타자를 볼 경우에, 나는 타자의 형체만으로도 그 역시 나를 멀리서 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나는 멀리서 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호 응시는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순환을 계속하게 되지만, 내가 타자의 시선을 볼 수 있거나 타자의 신체를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나와 타자 사이의 시선과 접촉의 교환은 완결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의 접촉의 교환, 즉 나의 손이 타자의 손을 잡을 때, 타자의 손의 감촉과 함께 나의 손의 감촉을 느끼게 되는 이 묘한 느낌의 공유를 생각해보라. 그것이 신체로 있는 한에서, 나와 타자 사이의 원환(cercle)은 완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런 우회의 원환들을 돌면서 무익한 공전을 하는 것만은 아닌데, 매 회전마다 '신체의 보는 힘의 다른 면'을 부가적으로 증식하기 때문이다. 그의 윤곽-나의 옷매무새-그의 걸음걸이-나의 걸음걸이-그의 바쁜 듯한 표정-나의 얼굴-그의 시선-나의 눈빛-그의 손-나의 손-그의 생각-나의 생각...


더욱이 이런 교환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나와 타자의 구분은 잊혀지게 된다. 순환 속에서 나의 신체와 타자의 신체 사이에 "엉킴(entrelac)", "침식(empi tement)", "걸치기(enjambement)"가 일어난다. 외부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이러한 일종의 변별적 감수성은 우리에게 전혀 낯선 신체적 경험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심리학적으로 감정이입(Einf hlung)이나 동화 등으로 지칭되는 이러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주의적 선입견에 빠질 염려가 없는, 이러한 신체적 파토스에 대한 가장 근접한 언급은 철학사에서 그동안 배제되어 온 신체에 대해 정당한 위상을 부여한 니이체의 그것일 것이다. 그는 이러한 교환 현상을 두고 신체의 힘(puissance)을 활성화시키는 신체의 감수성(sensibilit ), 거기서 모든 느낌이 파생되는 '원초적인 감정적 형식(la forme affective primitive)'으로서 중요시했다. "힘에의 의지(la volont de puissance)가 명시되기 위해서는 힘에의 의지는 그것이 보는 사물들을 지각할 필요가 있고 그것에 동화가능한 것의 접근을 느낀다."


우리는 신체의 이중 감각(allochirie)이 야기시키는 이러한 "재엇갈림(recroisement)",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이상한 교착(adh rence)"을 통해서 하나의 전체처럼 느껴지는 일종의 동일성(identit )을 획득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메를로-뽕띠가 '신체'나 '살'로 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상호적이 되고 누가 보고 누가 보여지는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언제나 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한 가시성, 즉자적인 감각성의 그러한 일반성, 나-자신의 타고난 그러한 익명성이다." 우리가 그 동안 언급했던 신체의 익명성, 존재( tre)로서의 살은 바로 이런 융합 운동 속에 있는 두 개, 혹은 다수의 부분들을 하나로 총칭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코 그것의 두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종합되어 있다는 의미는 아닌데, 두 부분들은 하나의 살 속에서도 여전히 대립적이고 역설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신체의 "두 개의 패들은 보충되는 것이지 혼동되는 것이 아니다. 두 패들은 전체의 부분들이지만, 겹쳐지지 않는다." 타자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결코 일치되는 법이 없듯이 말이다. 메를로-뽕띠는 이러한 "묘한 교환의 체계"를 지칭하기 위해, 서로 대립되는 두 항을 엇갈려 배치시키는 수사법의 기교인, 키아즈마(chiasma)라는 말을 사용했다. "우리는 자연인으로서, 일종의 키아즘마에 의해 우리가 다른 것들이 되고 우리가 세계가 되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그리고 사물들에서, 우리에게 그리고 타자에게 놓여진다." 그는 키아즘을 인간의 신체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이는 지각 일반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된 것이다.

이러한 첫 번째 역설은 또 다른 역설을 낳지 않을 수 없다. 가시적인 동시에 가동적인 나의 신체는 많은 사물들이며 사물들 가운데 사물이며 세계의 결(tissu) 에 처해 있으며 나의 신체의 응결은 하나의 사물의 응결이다. 그러나 신체가 보고 움직여지는 한에서, 자기 주위에 원환을 그리며 사물들을 붙잡고 있다. 사물들은 신체의 부속이거나 연장이며, 신체의 살 속에 박혀 있고 신체의 충분한 정의의 부분이며 세계는 신체와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진다. 그러한 전복, 그러한 이율배반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다. 비젼은 처해지거나 사물들 가운데서 만들어진다고, 바로 거기서 가시적인 것은 보는 행위로 놓여지며 대자적으로 가시적이 된다고, 그리고 모든 사물들의 비젼에 의해서 크리스탈 속의 모수(l'eau de m re)처럼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의 공유가 지지된다고 말이다.

지각의 순간, 우리는 우리의 신체와 사물들의 가시적인 표면 사이에서 일어나는 꿈틀거리는 살의 융합 증식 작용에 들어가게 된다. 양자 사이를 진동하는 수많은 상호 교환의 원환들이 그려지면서 우리와 사물들 사이의 상호 내속적인 살이 형태(figure)를 드러내는데, 이는 메를로-뽕띠의 전기 사상에서 '세계-내-존재( tre-au-mond)'로 불리어졌던 것이다. 이런 존재는 바로 우리인 바의 세계를 지칭했지만, 개별적인 우리 자신을 의미하거나 즉자적인 세계를 의미하지 않았다. 이런 세계는 우리와 사물들 '사이에' 있으며, 우리와 사물들의 '접촉을 통해서' 있을 뿐이다. 그렇게 융합된 살이 형태를 갖추게 되듯이 세계는 구조를 갖추게 되는데, 키아즘적 반복의 양상에 따라서 이러한 세계의 구조는 규모와 특성 면에서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쉬나이더(Schneider) 환자의 세계와 정상인의 세계를 신체의 고유 운동성(motricit )을 통해서 비교한 바 있다. 이 환자는 의식을 결핍한 것이 아니라 소뇌를 다쳤을 뿐이다. 즉, 병자이건 정상인이건 그의 세계를 이루는 공간은 의식의 추상적 범주나 투사가 아니라 유동적 형태를 지닌 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뇌가 손상된 병자의 공간에 비해 정상인의 그것은 더 많은 의미의 공간, 즉 상징적 공간을 파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살의 꿈틀거리는 힘, 메를로-뽕띠는 이것을 신체의 고유 운동성으로 부르기도 하고 현상학적으로 각색된 용어로 근원적 지향성(intentionalit originaire)으로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향성'은 현상학적 체계에 등록되어 있으면서도 더 이상 의식의 내재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아이러니한 조어(造語)인 셈인데, 그는 현상학적 지향성(Je peux)을 의식의 본질이 아니라 신체의 본질로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탐험의 계기들, 사물의 측면들, 사물의 한 측면에서 다른 측면에로의 두 개의 계열들을 재연결하는 지향성은 정신적 주체의 연결의 활동성이 아니며 대상의 순수한 연관들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신체로 불리어지는 지각과 운동을 하는 그런 동물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나에게 언제나 가능한, 운동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에로의 육적 주체로서 실제화시키는 전이이다."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라깡이나 들뢰즈와 같은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살의 운동을 욕망(d sir)이라고 부를 것이다. 욕망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세속적 의미의 관능적 성욕이라거나 자기 안에 결핍된 것을 채우려는 자기 충족의 욕구, 그래서 그것이 충족되면 사라지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욕망, 또는 성욕의 실체는 없다. 그것은 살의 증식 분열과 같이 계속되는 생성 생산의 힘을 지칭할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본주의적 공간을 드러내기 위해 살을 '욕망하는 기계'와 '기관 없는 신체'로 상징했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살의 생성과 증식은 다른 신체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러한 관계가 연결적(connective) 종합, 즉 절단적이고 분절적인 이항대립적인 생산의 연쇄일 경우에는 욕망하는 기계가 되며, 그러한 관계가 선언적(disjontive) 종합, 즉 분절점을 무화시키는 무한한 생산의 흐름일 경우에는 기관 없는 신체가 된다. 신체가 욕망하는 기계에서 기관 없는 신체로 되면서 의미의 공간은 끝없이 분산되고 파생적으로 생성된다.


Ⅳ. 힘들의 얽힘

그것을 무어라고 부르건 간에, 신체나 살의 본질은 자기를 넘어서는 익명적 힘(puissance), 즉 변형 생성의 힘을 의미한다. 이러한 힘의 양상은 일정하지 않다. {지각의 현상학}에서 언급된 병리학적 사례를 통해서 보듯이, 정상인의 고유 운동성과 병자의 고유 운동성은 다르게 나타난다. 그는 병자의 생산 공간이 정상인의 그것에 비해 현격히 단조롭고 비좁은 이유가 그러한 공간 범주를 투사시켜 주는 의식의 근본적인 능력을 결핍했기 때문이 아님을 강조한 바 있다. 공간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것은 의식이 아니라, 정상이건, 병자이건―혹은 동물이건―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신체 고유의 힘, 즉 고유 운동성(motricit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산들이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이러한 힘이 다양한 벡터로 실현되는 일종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힘 혹은 신체의 "운동은 형태들이나 성질들의 조직으로 각인되며 그런 형태들이나 성질들로 있게 하는 계시자(r v lateur)로서 있다." 이전에 그는 이를 "고유 운동성의 차별적 기능"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와 같은 계시적 힘, 혹은 운동의 차별적 기능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들뢰즈가 그랬던 것처럼, puissance로서의 힘(니이체의 macht로 보통 권력이나 역능으로 번역되는 것)과 또 다른 의미의 힘인 force(일반적 의미로 통용되는 물리적인 힘)을 구별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후자의 힘(force)은 우리가 물리학적으로 생각하듯이 사물을 점령하고 이용하는 힘으로 그런 사물 안에서 표현된다. 그런데 이런 힘은 물리학에서처럼, 기계적으로 언제나 동일한 힘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즉, 힘들이 서로 부딪힐 때, 이들은 동일한 성질로 양화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서로 만난 두 힘들은 관계를 맺는데, 이를테면 지배를 하는 힘과 지배를 받는 힘과 같이 질적으로 상이한 힘들로서 말이다. 사물에는 '힘(force)'이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들(forces)'이 있는 것이다.


이를 살들의 융합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자. 살이 움직이는 이상, 그것은 힘을 가지고 있다. 살들의 접촉을 통해 힘들은 서로 부딪히게 된다. 우리는 이미 살이라는 통일적 현상이 이루어지는 가운데도 살을 이루는 부분들은 각기 역설적이리 만치 이질적 성질을 고스란히 지닌 채, 서로 얽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살의 융합과 함께 이 힘들 역시 키아즘적으로 얽혀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힘들의 얽힘, 힘들(forces)의 마주침, 작용(action) 대 작용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바로 역능 권력으로서의 힘(puissance), 즉 메를로-뽕띠가 말한 신체의 고유운동성이나 근원적 지향성인 셈이다. "...힘(puissance)-나는 할 수 있음이 문제이다. 변화(Ver nderung)와 무변화(Unver nderung)―그런 현상들에 대한 부정적인 교리를 만드는 것.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은 존재( tre)의 두 개의 '측면'들이다.; 수직적(vertical) 세계 속에서 모든 존재( tre)는 그런 구조를 갖는다." 메를로-뽕띠의 경우, 니이체에게서 긍정적 반동적인 힘의 관계로 표현되었던 것이 긍정적 부정적인 힘의 관계로 명명되지만, 니이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것이 변화를 일으키는 반면 부정적인 것은 변화에 저항한다. 그의 파편적 언급에 비해서, 들뢰즈는 니이체를 계승하면서 이를 잘 요약하고 있다.

모든 힘(force)은 복종하건 명령하건 간에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있다. 한 신체를 정의하는 것은 지배하는 힘들(forces)과 지배받는 힘들(forces) 사이의 그러한 관계를 이르는 것이다. 모든 힘들의 관계는 신체를 구성한다: 화학적 신체, 생물학적 신체, 사회적 신체, 정치적 신체. 불균등하게 있는 어떠한 두 힘은 그것들이 관계 속에 들어가자마자 하나의 신체를 구성한다.....신체는 환원 불가능한 힘들의 복수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수적 현상이다. 그것의 통일은 다수적 현상의 통일, '지배의 통일'이다. 하나의 신체 속에서는 우위에 있거나 지배적인 힘들은 능동적(active)으로 말해지고 열등하거나 지배되는 힘들은 반동적(r active)인 것으로 말해진다. 능동적인 것과 반동적인 것은 정확히 말해서 힘과 힘의 관계를 표현하는 최초의 성질들이다.

메를로-뽕띠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신체의 고유 운동성과 동일한 의미로 신체 도식을 거론했는데, 결국 이것은 각기 개별적인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다르게 운동하면서도 통일적으로 역할하는 힘들의 관계를 의미한다. 각 부분들의 상이한 힘들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면 '신체'의 형상(forme)은 불가능하게 된다. "신체는 매순간 일주되는 도정(trajet)에서 총체적으로(global) 계시된 것(relev )이며 우리가 향하게 되는 위치 속에 미리 우리를 설치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신체나 살(의 형태나 조직)은 이러한 힘들의 관계를 통해서, 이러한 힘들의 계시를 통해서, 이러한 힘들의 키아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손으로 매우 힘들게 물건을 들어올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 물건을 들기 위해 나는 등과 배에 힘을 주고 손을 통해 물건을 장악하려는 '능동적' 힘을 행사할 것이다. 이 때 등, 배, 손과 같은 신체의 부분들에 작용하는 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로 다른 양으로 서로 다른 성격으로 화합하고 있다. 또한 또 다른 신체의 부분인 '들어올려지는 물건'도 들어올리는 이러한 행위 전체의 힘의 관계에 참여하는데, 들어올리는 힘에 대해서 부정적·반동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말이다. 내 손이 그 물건을 들어올리는가 아니면 그 물건이 내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가? 이 두 역설적 부분들이 순환적으로 반복되면서 '물건 들어올리기'로 형태지워진 살 전체가 형성(계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힘들이 얽혀 있는 살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니이체가 사용한 의미의 계보학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힘(puissance)은 직접적으로 서로 마주치는 힘들(forces)의 요소(element), 아니 차라리 이질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이러한 관계는 '긍정'과 '부정'과 같은 유형들의 역동적인 특성들 속에서 그 자체를 표현한다....-인 바의 것은 하나의 명제나 혹은 현상에서의 그것들의 다양한 관계 속에 있는 힘들(forces)에 대한 언급이며, 이러한 힘들을 결정하는 발생적(genetic)인 관계에 대한 언급인 것이다." 메를로-뽕띠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고유 운동성, 즉 힘이 정상인의 행동과 병자의 행동의 차이화의 내적 조건으로 작용함을 강조하면서 차별화의 기능을 거론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 가능하다. 즉 그가 정상인의 행동과 병자의 행동의 비교를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행동을 결정짓는 신체(권력)의 발생학적인 관계, 즉 일종의 신체의 계보학(G n alogie) 을 기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술의 태도는 특히 푸코의 계보학에서 현저한 힘의 미시물리학적 기술과 들뢰즈의 철학사의 해석, 즉 극화의 방법에서 본격적으로 실현되는데, 의미와 가치의 복수성, 이러한 파생적 관계들을 계열화하고 다양하게 배치함으로써 그러한 차이의 변별적 요소들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전기의 메를로-뽕띠는 사물이나 세계 속에서 언제나 이러한 힘의 미분적 기능, 즉 차이화의 기능을 고려하는 현상학을 했고, 후기의 그는 이러한 힘들의 차이나 거리를 통해서 존재로 계시되는 "수직적 세계"나 차별적 가치나 의미가 탄생하는 시끄러운 "야만적(brut) 존재"를 다루는 존재론을 기획하였던 것이다.


Ⅴ. 주체의 계보학적 위치

신체는 힘들의 관계가 계시되는 바탕인 동시에 그것이 형태나 조직으로 계시되는 실현체로서 메를로-뽕띠의 초기에서 후기 사상까지 일관되게 견지되고 있다. 현상학에서는 현상이 자리하는 바탕으로, 존재론에서는 존재가 계시되는 바탕으로서, 신체의 역할과 중요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그가 의식이 아니라 신체를 다루는 한에서 그가 다른 반성 철학자들처럼 의식의 내재성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의식이 현상학적 체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고려해 보건데, 그가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이행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식이 신체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관련되는 것이다. 의식은 신체의 키아즘 현상을 통해서 생산될 수 있다. 이를테면 정상인의 운동은 쉬나이더 병자의 그것에 비교하여 차별적으로 의식을 생산해냈던 셈인데, 그러한 차이 때문에 주지주의자들은 바로 의식이 정상인의 상징적 운동을 가능하게 한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체이다. 그러나 어떻게 비가시적인 의식이 가시적인 신체에서 파생될 수 있는가?
메를로-뽕띠는 니이체나 푸코가 기획했던 것 같은 그러한 주체의 계보학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미 {지각의 현상학}에서 신체에서 의식이 파생되는 과정을 검토했다. 신체의 힘은 본능적으로 자기의 바깥을 향하고 있으며 이 때 신체는 익명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향적 신체가 부메랑처럼 자기의 '안'으로 돌아오는 운동을 할 경우―이를 테면 데카르트적 의심(반성)을 실행하는 경우― 비로소 신체의 각 부분들의 위치, 즉 힘들의 관계를 느끼게 되면서 인칭적인 의식(데카르트적 코기토)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신체의 부분들의 통일에 대한 자각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신체 도식'이며 신체의 운동을 신체 속에 각인시키는 일이 바로 신체의 '지향적 호'였다. 알튀세가 말한 대로, 바로 이 때가 내부 운동의 '실천'을 통해 주체의 이데올로기가 확인되는 순간인 것이다. 데카르트적 성찰은 의식의 기원에 대한 심리학적 기술이 되는 동시에 그것을 고정시키는 의식(儀式)으로 작용했던 셈인데, 메를로-뽕띠는 이러한 의식의 기원을 신체의 기술을 통해 호의적 재해석하면서도 의식의 초월적 고정화는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체의 안으로의 운동, 신체적 각인과 같은 메를로-뽕띠의 언급을 니이체의 계보학을 통해서 좀 더 구체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신체의 각 부분들의 위치를 아는 것만을 의식이라고 하기에 의식은 너무나 무겁고 번잡한 의미들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신체의 힘은 바깥으로 발산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발산이 차단될 경우, 그 본능적 힘은 안으로 향해지고 '내적으로' 쌓이게 마련이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서로 다른 힘들의 충돌을 통해 더 이상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른 힘에 지배당하게 되는데, 이러한 반동적 힘이 바로 의식이라는 것이다. 충돌을 통해서 좌절된 힘들의 내적 축적. 내부에서 억압되고 있는 힘은 가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반동적 힘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의식은 명석 판명한 초월적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니이체는 힘들의 충돌을 죄로 구체화시키고, 그 죄의 대가로 신체적 형벌이 가해지는 상황을 분석했다. 이러한 형벌을 통해서 죄인은 죄를 자기의 신체에 각인하고 기억하게 되는데, 이러한 기억이 의식인 셈이다. 바깥으로 향하는 충동을 느끼게 될 때마다 그는 이러한 신체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 충동을 더 이상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고 내부에 축적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공포심과 다를 바 없는 도덕적 의식이라는 것이다. 신체는 의식보다 상위에 있다. 의식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신체이며, 신체의 능동적 힘에 비해 의식을 이루는 힘은 반동적.부정적 힘에 불과하다.


의식에 대한 신체나 살의 우위성은 살의 키아즘을 통해서 데카르트적 성찰을 해석하게 될 때, 아이러니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세계와 타자를 응시하는 데카르트적 의심을 실행하는 순간, 세계와 타자의 존재 대신 인칭적 자의식(코기토)을 발견하게 되는데, 분명히 의심의 실행 전에는 타자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응시의 시험은 한결같이 이러한 코기토의 직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는 마침표를 찍었지만, 메를로-뽕띠는 신체를 통해서 이를 다시 의심하는 성찰의 첫 부분으로 되돌아갔다. 3인칭에서 1인칭으로의 인칭적 전이(데카르트적 성찰 자체)는 다시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전이된다. 성찰은 교차로 배치되면서 순환한다. 지각된 신체는 의식이 되며 지각하는 신체는 타자를 발견한다. "만일 사람들이 은유를 원한다면, 지각된 신체와 지각하는 신체는 안과 밖으로서, 하나의 순환적인 일주의 두 부분들로서 있으며 이것은 높은 데에서는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가고 낮은 데에서는 오른 쪽에서 왼 쪽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국 의식은 신체 옆에서 초월적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키아즘적 순환에 의해 신체 속에서 생성으로서 긍정된다. 신체의 힘들이 언제나 능동적 힘과 반동적 힘으로 얽혀있는 한에서, 이러한 생성과 전이의 순간, 가시화되지 않은 반동적 힘은 기존의 능동적인 힘을 전복시키고 스스로 가시화된 능동적 힘이 된다. 이렇게 코기토는 언제라도 생성될 수 있지만, 다시 타자 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키아즘적 신체를 통해서는 의식과 타자, 세계를 다 긍정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살은 안과 바깥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우리의 살의 심장에 있다. 신체-세계의 관계가 재인식된다면, 나의 신체라는 가지(ramification), 세계라는 가지가 있고, 세계의 안과 나의 바깥의 일치, 나의 안과 세계의 바깥의 일치가 있다"


이러한 키아즘의 이중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형학적인(topologique) 습곡(plissements)을 상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살의 움직임을 동일한 높이를 따라 땅의 모양을 그리는 식으로 지형학적 선을 통해 그려본다고 생각해 보자. 살의 운동은 언제나 바깥으로 향하게 되어 있는데, 지향학적 선에 의해 바깥으로 돌출한 모양의 습곡이 그려지고 나면, 일단 우리는 그러한 습곡의 주름 안을 주체로 그러한 주름 바깥을 세계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주체와 세계 자체가 그려진 것은 아닌데, 이러한 습곡을 통해서 안과 바깥의 경계만 획정되었을 뿐이다. 지형학적 실체는 오히려 살의 운동을 따라 습곡으로 그려지는 선 자체, 즉 바깥을 드러내는 동시에 안을 드러내는 경계선이 될 것이다. 이러한 습곡이 바로 안과 바깥, 즉 의식과 세계, 나와 타자를 만나게 하지만 결코 겹쳐질 수 없게 만드는 살의 키아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과 타자는 덩어리가 아니라 주름에 불과한데, 서로 화해 불가능한 반대짝을 접촉하게 하는 짝패(double)로서 말이다. 들뢰즈는 키아즘의 이중화(doublement)와 짝패에 대해서 다음처럼 언급하고 있다.

짝패(double)는 내부의 투사가 결코 아니며 반대로 바깥의 내재화이다. 그것은 일자의 나누기(d doublement)가 아니라 타자의 이중화(redoublement)이다. 그것은 동일자의 재생산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다. 그것은 나(Je)의 발산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언제나 타자, 나-아님(non-moi)을 놓는 것이다. 이중화 속에서 이중체는 타자가 아니라 타자의 이중체로서 나를 겪는 나인 것이다. 나는 바깥에서 나를 만나지 않고, 내 안에서 타자를 발견한다.

신체를 통과하는 주름들(plis)은 안과 바깥의 이중성(doublement)으로 표상된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나 살의 주름들을 의식이라고 칭하기도 타자나 사물이라고 칭하기도 했지만, 이것들은 주름의 안과 바깥이 그러하듯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들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주체(나, 너, 우리, 그들)란 들뢰즈가 말하고 있듯이, "...오래된 내재성을 부활시키기는커녕 이러한 바깥의 새로운 안을 구성하는 깊은 습곡을 신체에 끌어들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1인칭에서 3인칭으로, 3인칭에서 1인칭으로 전이하고 진동하는 객관적 사유의 역설은 동일한 살―신체, 말, 텍스트― 속에서 이러한 안이 바깥으로 되고 바깥은 안이 되는 의사소통적 순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자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의사소통하는 한에서, 우리는 매번 이러한 역설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키아즘은 앞에서 우리가 해결해야만 했던 모순, 즉 안의 사유에서 바깥의 사유로 이행하기 위해 해결해야할 장애물을 ―해결이 아니라― 그대로 반복하고 있을 따름임을 깨달아야 한다. 역설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역설을 마주 대하는 것이다. "존재의 역설...우리 신체의 두가지 측면,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신체와 느낄 수 있는 것으로서의 신체 사이의....막다른 길" 투명한 의식은 볼 수 있지만 보여질 수 없는데 반하여 신체는 이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면서 타자의 역설을 거리낌없이 겪고 반복함으로써 역설을 해소시킨다. 푸코가 말했던 바깥의 사유는 결코 세계나 타자 자체―이를 테면 즉자적인 것―에 설치되어 있는 하나의 철학을 여는 것이 아니다. 이중체로 있지 않은 바깥에서 우리의 경험을 논리적 규준의 이름으로 재단하는 실증주의는 독단이지만, 이중체로 있지 않은 내부에서 우리의 경험을 내재적 초월성의 이름으로 반복하는 현상학적 사유는 답답한 자기의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그동안 인식론이 취해왔던 이런 양자 택일적 방식은 나와 타자, 안과 밖의 역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도외시하는 것이었다. 비록 후설의 현상학적 지향성이 이러한 이중체를 가능하게 한다하더라도―이를 테면 노에시스-노에마의 짝패― 그는 다시 그것을 선험적 의식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이중화 자체를 무효화시켰기 때문이다. 메를로-뽕띠가 말하는 지향성은 언제나 이러한 환원이 없는 지향성, 즉 주름을 앞에 두고서 안에서 바깥으로, 바깥에서 안으로 향하는 힘이다. 푸코가 말하는 바깥의 사유는 이처럼 안과 바깥의 이중화를 일으키는 습곡들, 그러나 바깥을 향해 있는 지형학적 습곡들을 다루는 것이다. 자기 바깥으로 향하는 살의 운동, 살의 증식은 살의 다양한 형태 변이들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Ⅵ. 맺음말

메를로-뽕띠의 신체 주체는 그 술어적 상관성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자리에 신체나 살을 양위시키는 유물론적인 주체 개념이 아니다. 이는 그가 현상학적 체계를 통해서 신체의 근원적 역할을 기술했던 전기 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체나 살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힘들의 얽힘과 키아즘의 순환 운동 그 자체, 즉 그가 대문자로 표기했던 존재( tre)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존재론적 전환이나 계보학적이고 지형학적인 통찰을 통해서 의식을 허구라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데카르트가 애쓴 바와 같이 의식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의식은 데카르트가 말한 바의 그런 초월적인 위치에 있지 않는데, 혹자는 이러한 위치의 강등을 인간의 죽음이나 주체의 죽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즉 메를로-뽕띠와 같은 계보학자나 니이체나 푸코와 같은 계보학자들이 허용한 의식은 그동안 데카르트주의자가 비존재로 배제시켰던 것을 정당하게 복권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복을 통해서 우리의 자존심이 망가질 이유가 있는가? 오히려 우리는 타자와 세계 속에서 어울려 살고 그것들과 화해하고 그것들과 의사소통하는 삶의 방법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는가?

참 고 문 헌


M. Merleau-Ponty, Ph nom nologie de la perception, Gallimard, 1945.
_________________, Signes, Gallimard, 1960.
_________________, Le visible et l'invisible, Gallimard, 1964.
_________________, L'oeil et l'esprit, Gallimard, 1964.
_________________, R sum s de cours, Gallimard, 1968.
Louis Althusser,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s, Monthly Feview Press, 1971, 이진수 역, 백의, 1991.
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U.F., 1962.
_____________, Nietzsche and philosophy, Hugh Tomlinson trs., The Athlone Press, London, 1983.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dipe, Minuit, 1972.
Gilles Deleuze, Foucault, Minuit, 1986.
Michel Foucault, La pens e du dehors, fata morgana, 1986.
E. Husserl, Husserliana Ⅳ, Den Haag u. Dordrecht, seit 1950.
E. Husserl, Cartesianische Meditationen und Pariser Vortr ge, Haag Martinus Niijhoff, 1973.
F. Nietzsche, Zur Genealogie der Moral,Ⅱ, Kritische Gesamtausgabe, Bd.Ⅳ-2.
Herbert Spiegelberg, the Phinomenological Movement, The Hague:Martinus Nijhoff, 1984, {현상학적 운동1}, 최경호 역, 이론과 실천, 1992,
장문정, {메를로-뽕띠의 데카르트적 성찰}, 철학연구 제21집,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1998.



Du chiasme de la chair dans la philosophie derni r de Merleau-Ponty

- Jang, Moon Jeong -

La philosophie derni r de Merleau-Ponty demeure tacite relativement en comparaison de la philosophie premi re. on dit que il a travaill convertir le syst me ph nom nogique en le syst me ontologique il y a quelque ans avant sa mort. on peut savoir par quelque phrases dans sa note travail en 1959 que il a d couvu la limit du syst me ph nom nologique, que il a travaill chapper la prison de la conscience. Mais ce projet ontologique de Merleau-Ponty n'etait pas r alis en ses travaux syst matique la fin cause de sa mort soudaine en 1961. Au minimum Je veux donc montrer cette conversion ontologique par le chiasme de la chair qui joue le role du seuil dans sa ontologie. L'id e de la chair est un symbol concret que il a pris d passer la dichotomie de sujet-objet depuit la philosophie cart sienne. Malgr que Merleau-Ponty a la mentionn comme l' l ment originaire dans la philosophie de nature pr socratuque, elle n'est pas l'id e du hyloz sme mais est signif comme la corpor it originaire en sens que la chair peut tre transform en les fugures et les structures vari es. Ces transformations de la chair ne sont r alisables que par mouvement du chiasme. Le mot du chiasme est venu de l'emploi de la rh torique dont il signifie l'arrangement entrecrois de deux phrases. Merleau-Ponty a pris l'id e de l'allochire de Husserl et a tendr eclaircir le paradoxe du alt rit , c'est dire le ph nom ne de l'echange instable du regard entre le Je et l'autre. iI s'appelle une identit qui se figuire en chair. En plus Merleau-Ponty a dit que le corps ou la chair a t la puissance anonyme depuit sa pens e premi re de m me cause que Nietzsche a dit que le corps a consist de l'entrelac de forces positives et r actives. Le vecteur de ces forces est la puissance que Merleau-Ponty a mentionn comme l'essence du corps. Cette homologie entre la puissance de Merleau-Ponty et de Nietzsche signifie que Merleau-Ponty aussi a recherch la g n alogie du sujet de m me que Nietzsche a fait. En concluson, il a d pass la limit du syst me ph nom nologique par sa g n alogie ontologique et a enfin d clar la mort du humain, que l' sprit du humain n'est plus de cogito cart sien, de conscience transcendentale, mais des plis topologiques dans le corps.

※ Mots cl s : corps, tre, chair, chiame, puissance, G n alogie

 


'사유(思惟)'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책  (0) 2013.03.27
프란츠 카프카, 소수 문학의 글쓰기  (0) 2013.03.25
허윤진, 5시57분  (0) 2013.03.04
문학평론가 신형철,  (0) 2013.02.19
時間의 方向에 관한 小考*  (0) 2013.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