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프란츠 카프카, 소수 문학의 글쓰기

나뭇잎숨결 2013. 3. 25. 07:12

 

한 민족의 일기쓰기로서의 소수 문학

프란츠 카프카의 「만리장성 축조 때」와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 분석

 

 

    권세훈(고려대)

 

      . 소수 문학의 개념  카프카는 1911년 12월 25일의 일기에서 바르샤바와 프라하의 유대인 문학과 관련하여 소수민족이 갖는 특징들과 함께 다른 문학과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이것을 토대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개념화시킨 “소수 문학 kleine Literatur”은 “소수 언어의 문학이 아니라 거대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의 문학”을 의미한다. 즉 바르샤바나 프라하의 유대인 작가들이 폴란드어나 체코어 대신에 독일어로 작품을 쓰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카프카는 소수민족의 문학이 특히 “외적인 삶 속에서는 흔히 나타나지 않지만 항상 분열된 민족의식의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도 “뛰어난 재능의 결여” 때문이라고 말한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의 문학에서는 개인의 창조적 성격이 강조되며 개인적 문제와 결부되는 사회적 문제는 기본적으로 개인을 중심으로 한 배경으로 작용하거나 주변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반면에 이러한 작가를 갖지 못한 소수민족에 속한 개별 작가의 글은 공동체 전체의 관심사를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소수민족의 문학의 경우 상대적으로 비좁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개인적인 사건은 단순히 개별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전체와 연관된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의문은 소수민족에 왜 문학적 거장이 존재하지 않느냐는 점이다. 카프카의 판단은 자의적인 것이거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작가적 소질이나 독서시장과도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오히려 문학적 거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작가와 민족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작가와 민족 사이의 잠재적이고 내재적인 일체감이 작가로 하여금 창조적이고 독자적인 개성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카프카가 말한 ‘뛰어난 재능의 결여’는 민족의식의 통합을 가능케 하는 원인인 동시에 민족과 개별 구성원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준다.

 

소수민족의 문학에서 거장의 부재는 다른 한편으로 문학에 더 많은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한 문학의 생동감은 심지어 재능이 풍부하게 나타나는 문학에서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그 재능에 대해 적어도 회의론자들의 대다수가 침묵할 작가가 없기 때문에 문학 논쟁은 가장 커다란 범위 내에서 실질적인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논란의 여지를 주지 않는 작가가 없는 소수민족의 한 문학 논쟁은 뚜렷한 결론 없이 특정한 주장과 이에 대한 반박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소수민족의 문학은 반박하기 어려운 민족적인 모범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공동체 전체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관점을 지닌 카프카에게 “문학은 문학사의 문제라기보다는 민중의 문제”로 이해된다.

 

또한 카프카는 이러한 전통을 지닌 문학이 “한 민족의 일기 쓰기로서 역사 서술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일기’가 다양하고 독립적인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모아놓는 것이라고 한다면 ‘역사’는 각 시대의 대표적인 사건들이 인과법칙에 따라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거대 서사를 가리킨다. 일기와 역사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사건들의 시간적 연쇄 관계에 있다. 거대 서사로서의 역사는 과거에서 미래를 향하여 일직선의 형태로 이어지는 시간의 축선상에서 펼쳐진다. 이러한 거대 서사에 내재하는 유토피아적인 완결성은 역사의 (변증법적) 진보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역사 서술이 개별 사건들을 연속성과 통일성의 원칙하에 종적으로 이어가는 반면에 일기에서는 각각 독립적인 사건들이 전체를 관통하는 아무런 법칙도 없이 횡적으로 연결된다. 동등한 가치를 지닌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병렬적으로 펼쳐지는 공간인 일기 형식은 모든 규범체계를 거부함으로써 탈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대변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수 문학의 언어는 “작품, 작가, 전통 등의 문화적 심급을 비판하고 부분들의 다양성을 내세우는” 작용을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소수 문학의 세 가지 특징으로서 “언어의 탈영토화 Deterritorialisierung der Sprache, 개인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의 결합 Koppelung des Individuellen ans unmittelbar Politische, 집합적인 언표 연쇄 kollektive Aussageverkettung” 등을 지적한다. 이들은 또한 “소수적인 이라는 형용사가 특정한 특수문학이 아니라 소위 거대 (혹은 확고하게 자리잡은) 문학 내에 위치한 모든 문학의 혁명적인 조건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첫 번째의 ‘언어의 탈영토화'는 카프카의 경우 극복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느껴지는 체코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소수의 독일계 상류계급에 속하는 동시에 거기에서 배제된 유대인으로서 다수의 언어집단으로부터 유리된 채 문어체의 ‘프라하 독일어 Pragerdeutsch’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이 프라하 독일어는 체코 본래의 영토성과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다수 언어로서의 독일어로부터도 탈영토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에서 이와 같은 언어의 빈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재영토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나타내는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주인공이 더 이상 인간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쉿쉿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이나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에서 요제피네가 다른 쥐들과 똑같은 소리를 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술로 인정받는 경우가 언어의 탈영토화로 이해할 수 있다.

 

소수문학의 두 번째 특징인 ‘개인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의 결합’과 관련해서는 다시 ?변신?을 예로 들 수 있다. 표면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비롯한 개인사적인 문제를 다룬 듯이 보이는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미국의 기술주의 기계, 소련의 관료주의 기계, 파시즘의 전체주의 기계”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해석된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권위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모든 억압체제의 총체이다. 카프카 문학의 위대함은 이처럼 구체적인 모습을 지닌 한 인물이나 대상의 형상화를 통해 전체를 드러냄으로써 의미지평을 한없이 확대시킨다는 점에 있다.

 

소수문학의 세 번째 특징인 ‘집합적인 언표 연쇄’는 카프카의 장편소설 ?소송?이나 ?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 K라는 약자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서술자나 소설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기계적인 연쇄이며 개인이 고독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집합적인 대리인을 나타낸다.” 개인은 주체로 존재할 때에만 전체로부터 분리 가능하지만 카프카 작품에 등장하는 개인에게는 그 어떤 독자적인 영역도 허용되지 않는다. 익명성과 함께 무차별성의 징후를 지닌 개인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변화의 전망을 상실한 채 지배와 복종이라는 영원한 구도 속의 한 축(후자)을 구성할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수문학의 세 가지 특징들이 카프카의 모든 작품에 적용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논리적인 일관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논리적 일관성을 고집한 결과로- 특히 마지막 두 가지 예들은 카프카가 말한 ‘민족의식의 통합’이라는 측면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변신?의 그레고르나 ?성?의 K는 비록 주체적인 개인이 아니며 또 다른 개인과 대치 가능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주변세계와 유리된 개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민족의 통합이라는 테마는 오히려 「만리장성 축조 때」나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에서처럼 개별자가 아니라 민족의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룬 작품들에서 두드러진다. 주변 세계로부터 고립된 인간의 본질에 초점을 맞춘 ?변신?과 비교할 때 이 두 작품은 사회 내지는 공동체의 존재 방식을 조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두 작품에 나타난 공동체가 통일된 하나의 ‘역사’ 대신에 갖고 있는 수많은 ‘전설’과 ‘설화’는 ‘민족의 일기 쓰기’라는 소수문학의 전통과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기와 마찬가지로 전설이나 설화 역시 그 이야기 구조가 불연속적이고 병렬적인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이 작품들에서 전체적인 통일성을 방해하는 듯이 보이는 이러한 구도가 어떻게 민족의 통합에 기여하는지를 실험한다.     . 「만리장성의 축조 때」  카프카의 「만리장성의 축조 때」는 중국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성격을 지닌 만리장성과 함께 황제제도를 다루고 있다. 민족 전체가 참여하여 건설한 만리장성의 성격과 목적은 “비길 데 없는 불명확함”으로 특징지어진다. 장벽은 역사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장벽이 전체적으로 이어지지 못한 상태에서의 수많은 부분 장벽들이 존재할 뿐이며 그 목적 또한 불분명하다. 황제제도 역시 실질적인 통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권위를 지닌 황제는 일반 민중과의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감으로 인하여 전설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음으로 인해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만리장성과 황제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민족의 가장 중요한 통합수단으로 인식된다.

 

장벽과 황제제도의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성격은 자연스럽게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와 관련한 사건들이 “비교 민족사”에 관심이 많은 어느 학자의 눈으로 기술된다. 그는 이방인이나 국외자가 아니라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익명의 ‘나 ich’를 종종 ‘우리 wir’로 대치시키기도 한다. 이 보고자는 제 3자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상이한 주장들을 독자에게 중계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서로 모순되는 관점들을 번갈아가며 대변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성찰에서 나온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화자뿐만 아니라 작중 인물 중 그 누구도 상대방보다 더 우월한 권위를 지니지 않는 상태에서 다양한 견해들의 통일은 가능하지 않다. 모든 것을 통합하는 논리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민족이 통일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과 당파성을 지니지 않은 보고자의 태도는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보고자는 개별자인 동시에 민족의 명실상부한 대표자이다.

 

보고자가 전하는 한 전설에 따르면 만리장성에는 곳곳에 빈 공간이 존재한다.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근본적인 원인은 최고 지도부의 결정에 의한 장벽의 축조 방식에 있다. 수많은 소집단이 각각 장벽의 일부를 건설한 다음 다른 곳으로 계속 이동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의식으로는 무한대에 가까운 장벽의 길이와 관련하여 절망감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이다. 그러나 측정하기 불가능한 공간에 세워지는 장벽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수많은 부분 장벽들은 “극복하기 어려운 불연속성” 속에 있으며 이것은 “초월적인 법이 실제로는 단편(斷片)들을 지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만리장성의 축조 때’라는 제목은 단순히 “장벽 건설의 끝없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것의 단편화를 나타낸다.

 

보고자는 이밖에도 만리장성 건설과 관련하여 “수많은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음을 언급한다. 이러한 전설들은 장벽의 거대한 규모로 인하여 물리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는 장벽이 완성되었다는 이야기도 증명할 길이 없다. 여기에서 전설과 역사는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역사와 전설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는 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나타난다. 보고자는 ‘과학적인 조사’를 근거로 만리장성의 건설이 “아마도 태고 이래로 wohl seit jeher” 결정된 것임을 밝혀낸다. 이에 따르면 장벽 건설은 특정한 시공간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추진된 것이다. ‘아마도’라는 부사는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과학적으로 확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결과는 “구체적인 것의 신화화이다.”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대의 구체적 산물로 보였던 만리장성의 기원이 이제는 선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새로운 신화의 생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리장성이라는 대상에 담긴 의미의 “복잡성이 그 어떤 명확한 해독도 거부하기” 때문이다. 만리장성과 관련한 불명확한 이야기들은 오히려 분명하게 인식 가능한 진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모든 신화적 사고방식을 파괴한다.

 

장벽의 목적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원래 이 장벽은 일반적으로 ‘북방 민족’에 대한 보호막으로 계획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체가 아닌 부분들의 건설로 이루어진 장벽은 이러한 목적을 충족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북방 민족’ 또한 광활한 대지를 마치 허공에서처럼 내달릴 뿐, 위협적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설명과는 달리 어느 학자는 널리 알려진 저서를 통해 장벽이 ‘새로운 바벨탑의 안전한 기초’를 위해 건설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 설명 역시 장벽이 기껏해야 반원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밖에도 장벽의 목적과 관련하여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수많은 “애매한 계획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성향과 관계가 있다.  당시에는-이 책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지식인들의 많은 혼란이 있었다. 아마도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목적에 정신을 쏟았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란 근본이 경박스럽고 날아다니는 먼지와 같은 천성을 지닌 탓에 그 어떤 속박도 견뎌내지 못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속박하게 되면 금방 이 속박을 미친 듯이 떨쳐내기 시작하고 장벽과 사슬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온 사방으로 찢어발기고 말 것이다. 

수많은 지식인들은 각자 독자적인 방식으로 장벽의 성격을 규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그 어떤 통합적인 사고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참을 수 없는 ‘속박’으로 여긴다. 그러한 속박은 심지어 자기 파괴적인 경향 속에서 장벽 자체를 날려버릴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장벽의 목적에 관한 다양하고 이질적인 견해들로 인한 ‘혼란’은 오히려 장벽 건설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장벽의 목적을 설명하는 한 이야기는 결국 실제 목적과 부합되지 않음으로 인해서 탈영토화되고 다른 이야기를 통해 재영토화가 시도되지만 다시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계기를 제공하면서 탈영토화된다. 장벽 건설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끊임없이 자극을 받으며 계속 이어진다.

 

민족의 삶은 만리장성 건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이 공사를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행동이 곧 민족 통합의 과정이다.

 

단합! 단합! 가슴에 가슴을 맞대고, 잇닿은 가슴과 가슴, 민족의 윤무, 피. 이젠 더 이상 육신의 보잘 것 없는 순환에 갇혀 있지 말고 달콤하게 구르고 다시 돌아오며 무한한 중국을 두루 섭렵하라.

 

‘민족의 윤무’로 이해되는 장벽 건설은 단순히 힘드는 노동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행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개별자는 공동체 속에 통합된다. 다시 말해서 장벽 건설은 민족의 통합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매개체인 것이다. 고립에 맞선 개인의 자기 극복은 일회적이 아니라 장벽이 건설되는 한 반복된다. 따라서 장벽의 미완성은 인간의 소망이 충족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시간적인 전설의 영원한 반복을 나타낸다. 이처럼 불연속적인 반복구조는 시작과 끝, 혹은 떠남과 도착이라는 역사의 시간구조를 무력화시킨다.

 

전설이 삶을 꾸려나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 세계에서 황제가 절대적 지배자라는 일반적인 전제 역시 현실과 모순된다. 민중에게 황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황제의 밀명을 받은 칙사가 궁정을 떠나는 장면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칙사는 곧 길을 떠났다. [...] 그는 여전히 가장 안쪽 궁궐의 방들을 헤쳐 나가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 방들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설령 궁궐을 벗어나는데 성공할지라도 아무런 득도 없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와 싸워야 할 것이고, 설령 그것이 성공할지라도 아무런 득도 없을 것이다. 궁궐의 정원은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정원을 지나면 두 번 째로 에워싸는 궁궐, 또 다시 계단과 정원, 또 다시 궁궐, 그렇게 천 년의 세월이 계속될 것이다.

  칙사는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첫 번째 궁궐조차 벗어날 수 없다. 한없이 이어지는 공간 속에서 그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다. 이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끝이 없는 여행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칙사의 행보는 그 어떤 진전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제 자리 걷기 운동”을 반복할 뿐이다. 황제와 민중 사이의 엄청난 거리는 진정한 의사소통에 필수적인 동시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황제의 사신이 한 개인에게 도착할 때에는 이미 그 황제는 이미 죽은 과거의 인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개인은 여전히 “희망도 없이 그리고 희망에 부풀어” 황제의 전갈을 기다린다. 그는 황제와의 교류에 대한 꿈을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희망에 부풀어 있는 동시에 평생 동안 이 꿈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 절대 권력과의 극복하기 어려운 거리 때문에 생겨난 단점은 하지만 바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장점이다. 개인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절대자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실제로 어느 왕조의 어떤 황제가 지배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과거의 황제를 현재의 지배자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태는 “개인이 역사적 시간과의 일치 속에서 사는 것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절대적 힘이 한 개인에게 미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다른 한편으로 “황제와 연관된 모든 정보와 판단이 살아 있는 황제의 반대세력으로서 그것을 전달하는 집단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나 이러한 조작 가능성도 민중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민중은 언제든지 “현재를 소멸시킬 자세를 갖추고 있다. 그 결과는 “어느 정도 자유롭고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이다. 세계의 중심축인 황제의 지배는 실질적 기능을 상실함으로 인해서 억압적 성격이 퇴색하고 민중에게는 제한적이지만 어느 정도의 자유가 가능해진다. 황제는 근본적으로 민족의 삶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법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용도 없고 대상도 알 수 없는 순수한 텅 빈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법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할 뿐 그 내용은 최소한 현재를 구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중은 이 법을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예를 들어 한 마을을 방문한 궁정 관리가 황제의 경고문을 발표하자 이 황제가 이미 죽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관리의 태도를 우스꽝스럽게 여기며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민중은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그 어떤 연관성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법은 원래의 구속력을 상실하면서 탈영토화된다.

 

민족은 황제의 지배를 부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황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황제와 관련한 민족의 “상상력 및 믿음의 허약함”이 오히려 민족의 통합을 보장한다. 민족이 현재의 살아 있는 황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 한 상상력의 허약함이 만리장성의 건설에 모두가 매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하지만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한다. 허약함이 민족적 삶의 토대를 위태롭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위험성을 인식한 보고자가 자신의 연구를 중단하는 것과 함께 작품 역시 도중에서 중단된다.

 

만리장성과 황제 제도는 기본적으로 중국, 즉 통일적이고 한정된 영토에 적용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공간은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넘어서는 광활함으로 인해 비동시적인 것의 공존을 만들어내면서 단일하고 보편적인 역사 대신 불연속적이고 단편화된 수많은 작은 역사들이 전설의 형태로 생겨난다. 이러한 전설의 세계는 비록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완전히 해소시켜주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카프카의 작품에 흔히 나타나는 출구 없는 상황이 아니라 문학의 세계에서 그려볼 수 있는 하나의 출구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 

「만리장성의 축조 때」에서 전설은 불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다양하고 새로운 힘의 충전을 통해 통합의 길로 나아가거나(만리장성 건설) 위와 아래 사이의 수직관계를 실질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만드는(황제 제도) 역할을 한다. 반면에 카프카는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에서는 민족의 모든 구성원이 동질적이고 동등한 위치에 있는 쥐의 종족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한 측면에서 모두가 일상적으로 내는 소리를 독자적인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자신의 음악이 심지어 민족을 구원하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내세우며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는 요제피네의 주장을 종족의 다른 구성원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개인과 전체 사이의 이러한 갈등은 「만리장성의 축조 때」에서와 마찬가지로 제 3자적 입장을 지닌 서술자의 시각의 통해 전달된다.

 

카프카가 공동체적 삶을 표현하기 위해 쥐의 종족을 선택한 데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도가 담겨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에서 동물은 ?변신?의 경우에서 보듯이 “‘악마적 세력들’의 비인간성 Unmenschlichkeit에 대해 무인간성 Nichtmenschlickeit이 응수하는” 것처럼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격하된 상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 사회를 나타낸다. 요제피네가 주장하듯이 특별한 찍찍거림은 쥐라는 동물의 표식임과 동시에 인간의 문화에 속하는 예술성에 관한 논쟁의 초점에 해당한다. 동물의 세계가 직접 인간의 세계로 들어오는 방식은 순수한 동물의 세계를 통하여 인간 세계를 비유적으로 풍자하는 전통적인 우화와는 달리 장르의 경계를 해체시킨다.

 

쥐의 종족은 세대간의 차이 내지는 구성원들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실제 사회현실과 대조되는 세계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아이와 어른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두 가지 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들의 삶은 아이가 조금이나마 달릴 줄 알고 주변세계를 약간 구별할 수 있게 되자마자 어른처럼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가 경제적인 고려에서 흩어져 살아야만 하는 지역은 너무 넓고 우리들의 적은 너무 많으며 도처에서 우리가 각오해야 하는 위험은 예측하기가 너무 어렵다. 우리는 생존투쟁에서 아이들을 제외시킬 수 없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너무 이른 종말이 될 것이다.

  한 세대가 - 각 세대는 그 수가 엄청 많다 - 다른 세대를 밀어내며 아이들은 아이로 남아 있을 시간이 없다. [...] 아이는 태어나기가 무섭게 더 이상이 아이가 아니다. 벌써 그 뒤에는 다수와 성급함에 있어서 구별이 안되는 새로운 아이들이 행복감에 불그스레한 얼굴을 하고 밀려든다.  쥐의 생존 방식은 아이를 어른과 구별하면서 특별한 대우를 해줄 수 있을 만한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적나라한 생존투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두는 각자 개별적인 삶을 추구해야 할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아이와 어른이 구별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민족의 다산성에 있다. 왕성한 번식력으로 여러 세대가 공존하기 때문에 한 세대는 그 앞 뒤 세대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카프카가 다른 동물이 아닌 쥐를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종족에서는 인간 세계에서와 같은 가부장적 권위나 내부적인 억압구조는 찾아볼 수 없다. 각 개인은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반면 서열이나 위계질서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 특정한 통치권력이 없는 이 사회에서 한 개인은 다른 개인들에 비해 결코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으며 개인은 개별자인 동시에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 나타난 쥐의 종족은 동물로 변한 인간(?변신?)이나 인간으로 변한 동물(「학술원에 드리는 보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개별자로서 굴파기에 열중하는 동물(「굴」)과도 구별된다. 카프카는 쥐의 종족을 통해 인간 세계에서 (아직은) 불가능해 보이는 공동체적 삶의 근거를 우회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카프카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이 단편소설은 “고립된 개인에서 사회 혹은 집단의 생활공동체로의 중점 이동”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종족이 생존을 위해 뿔뿔이 헤어져 살아야 한다면 실질적인 공동체적 삶은 기대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바로 이 부분에서 가수로 자처하는 요제피네의 역할이 강조된다. 실제로 그녀의 노래는 여느 찍찍거림과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흉내내지 못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다른 모두에게 침묵이 강요된 순간에 시작되는 이 찍찍거림은 개인에게 마치 민족의 전갈처럼 다가온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한가운데에서 요제피네의 가느다란 찍찍거림은 마치 적대적인 세계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서 있는 우리 민족의 가련한 존재와 같다. 요제피네는 스스로를 주장한다. 목소리에 담긴 아무 것도 아닌 것, 성과의 측면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스스로를 주장하며 우리를 향한 길을 연다.

  요제피네의 목소리가 예술로 평가받는 순간은 어려운 정치적 결단을 앞두고 무엇보다도 종족으로서의 일체감을 느끼게 될 때이다. 여기에서 예술은 “아름다움의 모방이나 삶의 모방이 아닐 뿐더러 삶 자체의 순수한 표현도 아니라” 극단적인 삶의 상황 속에서의 순간적인 자기 확인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종족의 보편적 언어가 동시에 예술의 언어가 되는 이율배반에 대한 해답은 음악이 종족으로 하여금 스스로에 이르도록 하는 통로라는 점에 있다. 요제피네의 목소리는 최대 한도의 “무가치함 Nichtigkeit”을 발휘할 때, 즉 찍찍거릴 때 비로소 다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예술이 되며 그 곳에 모인 청중들에게 종족의 동질성을 확인시켜준다. 요제피네의 목소리가 예술로 인식되는 것은 “평상적인 찍찍거림을 탈영토화시켜” “일상적인 삶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요제피네의 행위는 독자적인 개인으로서의 노래부르기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중의 집합적 언어표현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예술이 되는 것이다.

 

이 종족에게 요제피네의 노래는 또한 현재 단절 상태에 있는 음악적 전통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데 기여한다. 이에 관한 근거는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이 종족은 역사 연구를 등한시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역사도 쓰지 않는다-‘설화들’에서 찾을 수 있다. 

비음악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래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우리 민족의 옛 시절에는 노래가 있었다. 설화들이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물론 그 누구도 더 이상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는 가요들이 남아 있다.

  음악의 상실은 어떤 근원적인 것으로부터의 차단을 의미한다. 음악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요제피네는 음악의 중계자로 나타난다. 그녀를 통해 종족은 잃어버린 과거의 행복을 체험하는 것이다. 종족의 근원에 대한 흔적을 보여주는 설화에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노래에 대한 여러 가지 변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때 한 설화는 다른 설화보다 더 확실하지 않지만 더 불확실한 것도 아니다.

 

요제피네가 음악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하는 한 그녀 자신이 미래에 이야기될 설화의 주인공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술자는 “그녀가 죽게 되면 음악은 -그것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사라질 것이다”고 말한다. 실제로 요제피네는 자신의 노래가 예술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며 “영원한 역사 속에서의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며 그녀는 종족의 “수많은 영웅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종족의 역사는 진보나 발전의 원칙에 따르는 거대서사가 아니라 동일한 것이 변용의 형태로 불연속적으로 반복되는 구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만약에 요제피네가 예술가라는 주장이 맞다면 이것은 종족의 모든 구성원이 동일하다는 원칙에 위배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 동등함의 개념속에는 모두가 영웅 혹은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잠재적인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개별자와 공동체 사이의 관계는 이미 이 작품의 제목에 암시되어 있다. ‘혹은’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에 대해 카프카 자신이 그 “제목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에서는 아마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균형에 관한 것을 나타낸다”고 밝히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는 대립적이거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상호 교환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카프카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공동체적 삶에 대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 맺음말 

카프카가 초기 작품들에서는 주로 개인과 전체의 문제를 다루면서 개인의 피할 수 없는 패배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반면에 중기와 후기에서는 특히 단편소설을 통해 개인과 민족 사이의 통합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만리장성의 축조 때」와 「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에 나타나는 민족 구성원들 사이의 통합은 결코 통일적인 단일체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는 이미 현실화된 것이 아니라 중국과 쥐의 종족의 세계라는 문학적 공간에서 모색되고 있다. 공동체적 삶에 대한 가능성은 통일적이고 규범화된 역사 대신 전설과 설화를 통해 제시된다. 무한한 공간(「만리장성의 축조 때」)이나 그 어떤 헤게모니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 속에서 불연속적이고 병렬적인 방식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바로 카프카가 소수문학의 특징으로 말한 ‘한 민족의 일기 쓰기’를 연상시킨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이야기가 이어지는 ‘한 민족의 일기 쓰기’로서의 소수 문학은 거대 서사를 가능케 하는 ‘간주관적인 합일 intersubjektive Vereinigung’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총체성 Totalität’과 ‘합의 Konsens’의 원칙 대신 ‘이질성 Heterogenität’과 ‘불일치 Dissens’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수 문학 역시 대립적인 부분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공존할 수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말하는 중심축의 해체는 카프카의 작품에서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그 어느 것도 배타적인 우월성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대등한 관계에 있는 다양한 작은 이야기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이 가능한 또 다른 이유는 작중 인물들 뿐만 아니라 서술자도 대립적 입장들을 합의로 이끌어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보고 형식은 시간적인 발전의 원칙에 따르거나 갈등이 해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고전적인 ‘서사 Erzählung’ 구조의 해체를 의미한다. 통일적 전체의 해체를 통한 다양성의 부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 볼 때 상실감이나 비관적 세계관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탈중심화된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참고 문헌

 

1. 1차 문헌

Kafka, Franz: Tagebücher, Textband, hg. von Hans-Gerd Koch, Michael Müller und Malcolm Pasley, Frankfurt a. M.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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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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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zzel, Chris: Mythisierung und poetische Textform bei Franz Kafka. In: Karl Erich Grözinger(Hg.): Kafka und das Judentum, Frankfurt a. M. 1987, S. 19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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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sdorf, Klaus: Kafka. Weltbild und Roman, 3. Auflage, Berlin 1978.

Nicolai, Ralf R.: Kafkas Beim Bau der Chinisischen Mauer im Lichte themenverwandter Texte, Würzburg 1991.Sattler, Emil E.: Erzählperspektive in Kafkas Josefine... In: Maria Luise Caputo-Mayr(Hg.): Franz Kafka. Eine Aufsatzsammlung nach einem Symposium in Philadelphia, Berlin 1978, S. 235-242.

Vogel, Joseph: Ort der Gewalt. Kafkas literarische Ethik, München 1990.

Zusammenfassung

 

Die kleine Literatur als das Tagebuchführen einer Nation

Analyse über Beim Bau der Chinesischen Mauer und Josefine, die Sängerin oder das Volk der Mäuse von Franz Kafka  Kwon, Se-Hoon(Korea Uni.)   

Franz Kafka erklärt in seinem Tagebuch die jüdische Literatur in Warschau oder in Prag mit dem Begriff der „kleinen Literatur„. Die kleine Literatur ist nicht die Literatur einer kleinen Sprache, sondern die einer Minderheit, die sich einer großen Sprache bedient. Nach Deleuze und Guattari hat die kleine Literatur drei Merkmale, “Deterritorialisierung der Sprache”, “Koppelung des Individuellen ans unmittelbar Politische”, und “kollektive Aussageverkettung”. Diese Merkmale dienen zum einheitlichen Zusammenhalten des nationalen Bewußtseins. Das wird nicht etwa durch die einheitliche Geschichte oder durch die intersubjektive Vereinigung erreicht. Die kleine Literatur versteht Kafka vielmehr als „Tagebuchführen einer Nation, das etwas ganz anderes ist als Geschichtsschreibung„. Damit betont Kafka die Vielfalt der Teile statt eines einheitlichen Ganzen.

Dieser Entwurf kommt in Kafkas späteren Erzählungen zum Ausdruck, Beim Bau der Chinesischen Mauer und Josefine, die Sängerin oder das Volk der Mäuse, in denen Legenden oder Sagen eine große Rolle spielen. Diese Erzählformen wird durch ein diskontinuierliches Nebeneinander der Teile gekennzeichnet, wie das Tagebuch.In Beim Bau der Chinesischen Mauer thematisiert Kafka das gewaltige Mauerwerk Chinas und das Kaisertum. Die Mauer, die durch das System des Teilbaus wegen des unermesslich großen Raums gebaut wird, produziert immer wieder eine neue Legende. Der Inhalt der Legende ist weder nachprüfbar noch feststellbar. Trotzdem haben die mannigfaltigen kleinen Erzählungen über den Mauerbau die Funktion, die Selbstüberwindung des Einzelnen zu ermöglichen und das Volk zur Einheitlichkeit zu führen. Der Kaiser existiert auch nur in der Legende, in der die Hierarchie zwischen Oben und Unten praktisch nicht funktioniert. Die Folge ist ein gewissermaßen freies, unbeherrschtes Leben.In Josefine, die Sängerin oder das Volk der Mäuse entwirft Kafka eine Sagenwelt, in der alle Mitglieder des Volkes ranggleich sind. Die Erzählung konzentriert sich auf die Frage, wie das einzelne Pfeifen, das jeder als eine charakteristische Lebensäußerung hervorbringt, denn als eine eigenständige Kunst, wie Josefine es behauptet, aufzunehmen sei. Josefines Behauptung widerspricht anscheinend dem Umstand, daß alle gleich sind. Aber die Gleichheit impliziert, daß jeder die potentielle Möglichkeit hat, ein Held oder ein Künstler zu sein. Im Bewußtsein des Volkes ist Josefines Musik auf die größte mögliche Nichtigkeit, das Pfeifen, reduziert. Obwohl Josefine die Einzigartigkeit ihrer Stimme behauptet, liegt ihre Leistung vielmehr in der Allgemeingültigkeit ihres Pfeifens. Selbst wenn Josefine als das Zeichen eines Protestes verschwindet, ist ihre Musik weder einmalig noch letztmalig. Sie ist nur eine kleine Episode in der ewigen Geschichte, die einem der zahllosen Helden gehört.  

주제어: 소수문학, 프란츠 카프카, 한 민족의 일기 쓰기, ‘서사’ 구조의 해체

Schlüsselbegriffe: Die kleine Literatur, Franz Kafka, Tagebuchführen einer Nation, Dekonstruktion der ‘Erzählung’

E-Mail: maskentanz@hanmail.net

투고일: 2003.03.30 / 심사일: 2003.04.17 / 심사완료일: 2003.04.23

 

출전: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20호 (2003년 5월)

학회URL: http://buechner.germa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