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피폐화를 낳는 빈부격차,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는 사회적 가치의 실종과 비인간화, OECD 최고의 자살률과 점증하는 범죄와 정신질환의 비중, 세월호 사건과 같은 일련의 사회적 위협과 트라우마……
이러한 때에 지젝과 라캉의 논쟁적 지점들을 검토하고 이들의 이론사적 관계를 점검하는 일은 왜 필요한가?
그리고 지식 권력이 된 ‘지젝 현상’에 대한 탐구 지젝과 바디우에 대한 열광과 지적 호기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2013년 9월 24일에서 10월 2일까지 서울에서 ‘멈춰라, 생각하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조금 낯선 철학 축제(?)가 열렸다. 소련과 동구권 붕괴, 신자유주의의 득세 때문에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취지로 마련된 이 컨퍼런스는 런던, 베를린, 뉴욕에 이어 네 번째로는 서울에서 열린 일대 학문적 사건이었다. 이 자리는 이 시대 가장 논쟁적인 사상가이자 유명 스타(?)라 할 수 있는 슬라보예 지젝과 알랭 바디우가 공동으로 주최한 일종의 철학 콘서트 혹은 철학 극장이었다. 이들의 초청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컨퍼런스와 다양한 형태의 강연회 및 모임에는 늘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참여와 문의가 쇄도했고 바디우와 지젝의 일거수일투족에 대중의 시선이 쏠렸으며, 두 철학자의 발언은 마치 한반도를 울리는 예언자의 목소리처럼 대중에게 공명을 남겼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면서 여전히 종북좌파라는 단 하나의 낙인만으로 반대파를 가차 없이 제압할 수 있는 나라 한복판에서 비록 철학적 탐구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공산주의 이념의 유효성과 그 실천 방안을 토론하는 자리가 마련된 것은 정말 생경한 광경 아닌가? 1980년대 마르크시즘,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거친 후 그 동안 뚜렷한 논점과 주류 이론이 없이 다양한 사상에 대한 천착과 학문적 시도가 게릴라전처럼 모색되는 한국적 상황에서 이들이 제시하는 정신분석, 주체철학, 공산주의, 공동선이라는 거대 담론의 주제들이 갑자기 화두가 되는 현상은 정말 바디우의 말처럼 하나의 사건이었다. 1998년 IMF 이후 한국 사회는 정치·경제 지형이 급격하게 바뀌고, 순수 학문과 인문학적 가치가 실종되면서 이윤 추구를 절대시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모범적인 국가 중 하나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민주화가 제도적으로 정착하는 듯했으나 다시 권위주의적 보수 정권이 등장하면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은 위축되고 국가가 무차별로 시민을 감시하는 신공안 시대가 열렸다. 이런 판국에 해방과 투쟁, 게다가 공산주의라니! 이런 까닭에서인지 바디우와 지젝의 강의에는 대중이 넘쳐나고 질문이 쏟아졌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디우와 지젝에 대한 이런 열광과 지적 호기심을 단순히 그들의 유명세나 일상을 벗어나게 해줄 이벤트에 목말라 하는 문화적 갈증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모순된 분단 상황과 이것보다 더 적대적인 남한 내 이념 갈등, 심화되는 빈부격차와 삶의 피폐화, 모두가 한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는 사회적 가치의 실종과 비인간화, OECD 최고의 자살률과 점점 더 늘어나는 범죄와 정신질환 비중, 세월호 사건 같은 일련의 사회적 위협과 트라우마, 정치의 실종과 행정력의 비대화 같은 한국 사회의 제반 악조건들이 대중으로 하여금 이런 콘퍼런스에서 길을 찾도록 내몰지 않았을까? 여전히 이런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사회 상황이 우리를 숨 막히게 하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처럼 현실의 문제를 철학적 지평으로 소환하는 한 ‘지젝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비록 바디우와 지젝은 이 땅을 떠났지만 이들이 남긴 철학적 과제에 대해 우리 스스로 진지한 답을 내려볼 때이다. 이들이 던진 문제와 화두는 여전히 이 땅에 있는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로 오롯이 남겨졌기 때문이다.
지젝 현상을 그대로 두고보는 것 지식인의 임무 방기
‘라캉과 지젝’이라는 주제로 기획된 이 책은 한국에서 2000년대 이후 가장 뜨거운 문화 현상의 하나이자 무시하기 힘든 지식권력이 되어버린 슬라보예 지젝 현상에 대해 한국의 소장 연구자들이 전문가적 안목으로 진지한 탐문과 논쟁을 시도하는 첫 집단 작업이다. 여기 글을 쓴 필자들은 모두 ‘한국라깡과현대정신분석학회’에 소속되어 현재 활발하게 학문적 연구를 수행하고 강의나 특강을 통해 대중과 만나면서 정신분석적 이론에 근거해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사회의 문제를 분석하고 있다. 한국라깡과현대정신분석학회는 오래전부터 슬라보예 지젝을 둘러싼 대중의 소문과 학문적 숭배(?) 현상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논의를 하면서 냉정한 평가를 내려 보려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지젝이 우리 연구자들의 주된 논거점인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자기 사상의 주된 자양분이자 원천으로 삼기 때문이다. 지젝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라캉 연구자 입장에서는 솔직히 다양한 맥락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변용하고 활용하면서 헤겔, 칸트, 마르크스를 접목해 현란한 개념 유희를 펼치며 대중을 끌어들이는 지젝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젝을 통해 라캉 이론이 지닌 난점이나 이론사적 의미에 대해 새로운 영감이나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든, 혹은 지젝이 라캉을 비틀거나 왜곡시키는 지점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을 더 정교하고 고집스럽게 다듬는 데 집착하는 연구자들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어떤 의미에서 지젝은 라캉의 또 다른 그림자이자 유령이면서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증상이고, 우리에게 정신분석학이 사회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을 새롭게 환기시키며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보게 만드는 거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2013년에 개최된 철학 콘퍼런스 이후 지젝이 한국 대중과 더 친숙해지고, 일반 독자들도 지젝을 통해 정신분석 이론에 입문하면서 프로이트와 라캉 사상을 이해하려는 상황에서 계속해서 지젝을 아무것도 아닌 양 외면하거나 각 연구자의 개별 평가에만 맡기는 것은 정신분석을 전공하는 학자로서 일종의 의무 방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우리 한국 연구자들이 지젝에 대해 대중이 품고 있는 막연한 기대나 신비화를 깨뜨리면서 정신분석학의 본질에 대해 뭔가를 가르쳐주겠다는 학문적 우월의식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미 지젝이 라캉과 프로이트의 이론을 대중문화의 맥락에서 활용하는 것을 넘어 공동의 선을 향한 문제제기로서 공산주의 이념을 제시하고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새롭게 정치이론화할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상황에서 지젝과 라캉의 관계에 대해 엄밀하게 진단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전공에서 정신분석학에 기대는 연구자마다 정신분석학의 의미나 실천 방향은 물론 지젝 현상을 바라보는 입장에 미묘한 차이들이 있는 터에 지젝의 사상에 대해 비판적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이론적 좌표를 점검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단순히 지젝을 맹목적으로 옹호하거나 혹은 비판하고 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적 상황에서 정신분석의 이론적·실천적 유용성을 새롭게 발굴하면서 정신분석학의 유의미성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와도 맞물려 있다. 위에서 지젝이 아니라 지젝 현상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런 고민의 반영이다.
즉 지젝 자체가 아니라 지젝을 통한 정신분석의 확장 및 대중화 현상을 짚어보려는 것이 우리 의도다. 한국라깡과현대정신분석학회는 이런 비판적 문제의식 아래 2012년 12월 1일 정기 학술대회 주제를 ‘라깡과 지젝: 정신분석의 현재’로 정해 심도 있는 토론을 펼쳤다. 비록 학술대회가 갖는 여러 형식적 한계와 참여자의 제한들로 어떤 새로운 합의점을 찾거나 심층적 분석에 만족스럽게 이르지는 못했지만, ‘라캉과 지젝’을 주제로 삼은 학술대회는 그 자체로 우리 연구자들에게 이후 풀어야 할 과제에 대한 영감을 제공해주었다. 이 책은 그때 논의된 주제를 발표에 참가했거나 그 후 연구를 진행한 사람들이 보완하고 다듬어 새롭게 내놓은 집단 노력의 성과물이다.
지젝과 라캉의 다양한 접점을 총점검
초기 지젝이 라캉의 이론을 독창적으로 활용하면서 그것의 숨은 실천적 의미를 주로 문화 현상과 관련해 보여주는 데 조심스럽게 주력했다면 최근의 지젝은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재해석, 역사유물론과 신학의 결합, 공동선을 위한 정치 투쟁의 필요성, 윤리의 정치화,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의미 등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라캉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독보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 지젝은 라캉의 전도자라기보다 독창적인 사상가로 스스로의 입지를 굳혀가는 듯 보이며 대중 역시 이런 의견에 대개 동감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젝이 최소한 여전히 기대고 활용하는 라캉 정신분석 이론에 대해 그것을 전공한 학자들이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주체적 수용과 관련해서도 기여하는 바가 크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은 단순히 라캉과 지젝을 비교·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 신학, 철학, 영화, 미학, 페미니즘 등 정신분석이 관여하는 다양한 접점에서 지젝과 라캉의 학문적 관계를 살펴보려고 했다.
라캉과 지젝은 둘 다 주체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모순과 정체성 구성의 근원적 불가능성을 주체의 필연적인 구성 조건으로 전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은 물질적 기표와 상상적 이미지가 함께 구성하는 현실에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지만 이 현실은 이미 비일관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언어는 상징화를 벗어나고 저항하는 실재를 완전히 구조화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와 무능력을 드러내기 때문에 말하는 존재인 인간은 근본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 소외와 배제, 결여와 부정성이 주체의 구조와 현실에 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불가능한 욕망의 환유적 반복과 정치적 전복을 향한 몸부림을 반복하게 된다.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것은 인간 운명의 이러한 부조리와 모순들이다. 하지만 이것을 분석하는 데서 라캉과 지젝은 미묘하지만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지젝은 특히 상징계와 실재계의 모순 및 충돌이 네 가지 사회적 적대로 나타난다고 강조하면서 배제를 체화하는 프롤레타리아 주체의 위상과 정치적 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한다. 이 네 가지 적대란 첫째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둘째 ‘지식재산권’과 관련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셋째 유전공학에서 새로운 기술과 과학 발전이 갖는 윤리적 함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네 번째는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분리하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이다. 지젝은 단순히 언어의 한계와 상징계의 비일관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배제의 형태로 체험되는 실재의 힘에 근거해 적극적인 정치적 투쟁과 자유를 주장한다. 한마디로 욕망의 윤리에 대한 충실성을 넘어 실재를 향한 정치적 이론화를 지향하는 것이 지젝의 특징이다. 우리는 이하에서 지젝과 라캉이 만나고 때로 협력하는 논쟁적 지점을 여러 소재와 분석을 통해 조명하면서 필자들 각자의 전공에 따라 라캉과 지젝의 이론사적 관계를 점검해보려고 한다.
김석의 글 「라캉과 지젝: 주체화 윤리와 공동선을 향한 정치혁명」 은 라캉과 지젝의 공통점보다는 이론적 차이점에 대해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분석한 논문이다. 라캉과 지젝은 둘 다 부정성에 주목하는 철학자들이다. 하지만 라캉이 존재 결여와 연관지어 주체의 분열과 무적 본성을 강조하면서 욕망을 중시한다면 지젝은 상징계의 부정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치철학적 사유로 지평을 넓힌다. 부정성에 대한 상이한 강조는 주체의 자기실현을 바라보는 입장에도 반영되는데, 라캉이 비존재의 실현으로서 주체의 궁핍화를 통한 주체화를 주장한다면, 지젝은 비실체화와 배제를 구조적으로 강요받는 정치적 위치인 프롤레타리아적 위치와 공산주의 이념의 실천적 의미에 주목한다. 결국 정신분석의 최종 목표에서 라캉이 증상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진정한 주체의 자리를 발견하는 윤리적 태도를 강조한다면, 지젝은 윤리의 정치화를 더 주장한다. 윤리의 정치화란 공동의 선과 보편성의 실현을 위한 투쟁이자 문제 제기인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충실성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김석은 지젝이 라캉의 핵심 개념을 계승하면서도 자유와 해방의 정치적 가능성을 자의적으로 강조하며 라캉 이론이 원래 지니는 정신분석적 의미를 왜곡시킨다는 점을 비판한다.
김정한의 글 「정신분석의 정치: 라캉과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지젝의 정치철학 사이의 연결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보여준 글이다. 김정한은 자크 알랭 밀레의 해석에 기대어 라캉과 지젝의 차이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라캉이 후기에 ‘증상과의 동일시’로 후퇴하면서 상징적 질서의 규정성을 다시 인정하는 보수주의로 회귀한다면 지젝은 ‘환상 가로지르기’(상징계의 궁극적 변혁)를 통한 정치적 해방에 정신분석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급진적인 입장에 선다. 그 대안이 바로 적대를 해소하는 이념으로서 지젝이 ‘공산주의’를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정한에 따르면 라캉 자신은 어떤 이념이나 대의와도 철저히 거리를 두는 정치적 회의주의를 고수했지만,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담겨 있는 상징계의 변혁이라는 사유를 더 밀고 나가서 반자본주의적인 공산주의 혁명을 역설한다. 이것은 자신이 씨앗이라 닭에게 잡아먹힐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의 우화에서 잘 나타난다. 주체의 믿음은 결국 ‘타자들의 믿음에 대한 믿음’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의 윤리는 ‘닭의 무지’를 비판하고 상징계를 변혁하는 것에 맞춰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지젝이 옳은가 라캉이 옳은가를 따지기보다는 정신분석에 본래 적합한 정치 이론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지닌 전복적 힘의 활용이 중요하다고 필자는 강조한다.
이성민의 글 「한 라캉주의적 헤겔주의자의 충동적 자유」는 충동과 자유 개념에 초점을 맞추면서 지젝에 스며든 라캉과 헤겔의 영향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분석한 글이다. 이성민에 따르면 지젝의 관심사는 궁극적으로 주체의 해체가 아니라 “혁명적 주체성이라는 새로운 형상”의 창조다. 여기에서 주체성의 내용을 채우는 데 충동과 자유 개념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충동은 주체의 상관물인 부분 대상(시차적 대상, 신체 없는 기관)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 대상으로부터 자유를 지닌 주체의 형상으로 이행하기 위해 지젝은 헤겔이 말한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라는 전략을 제시한다. 충동은 전체 속에 편입되지 않은 대상을 가질 뿐 아니라 스스로를 관철시키는 섬뜩한 지속력으로서 죽음 너머에서도 존속하는 완고한 고집=주장insistence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라캉의 주체 개념을 충동과 연결시키는 근거가 된다. 다음으로 헤겔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는 이 충동의 대상으로부터 자유로 향하면서 주체가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전략이다. 이 글은 지젝이 어떻게 라캉 주체에 혁명적(충동) 실천의 가능성(자유)을 부여했는지 개념적 근거를 잘 분석한 글이다.
정혁현의 글 「라캉과 지젝의 신 개념」은 뒤에 이어지는 강응섭의 논문과 비슷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신에 대해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정신분석이 신학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갖는다면 신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증상)이기 때문이다. 라캉에게 대타자는 신의 또 다른 이름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신은 진리의 보증자로 상징적 보편성을 지시하는 존재다. 하지만 정혁현에 따르면 신은 단순히 상징계의 창시자만이 아니라 그러한 창조를 통해 상징계 이전의 원초적 향유를 지시하는 자이기도 하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신은 인간이 잉여와 관계하기 위한 방식으로 요청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학의 맥락에서 볼 때 라캉이 반기독교적 입장에 가깝다면 지젝은 정신분석학을 신학과 적극적으로 접목시킨다. 지젝에게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 개념은 합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불가능한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 지젝에게 신은 무엇보다 실재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언제나 성육신과 죽음이라는 부정의 제스처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다가오는 초월적 존재다. 결국 라캉이 말한 것처럼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의 비밀스러운 핵심은 ‘무’라는 사실을 수용하기 위해서라도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 정혁현은 신에 대한 강조점에서 라캉이 신을 상징계의 범주에서 사유하고 있는 데 반해 지젝은 실재의 범주에서 사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 실재는 결국 궁극적 대안으로서 중요한데, 결론 부분에 나와 있듯이 실재를 환영이라고 냉소하는 태도를 뒤집어 환영의 실재적 힘을 주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강응섭의 글 「정신분석의 신학적 해석: ‘기의 없는 기표’와 성서 읽기」는 ‘기의 없는 기표’ 개념을 매개로 새로운 성서 읽기를 제안함으로써 정신분석과 신학의 유대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논문이다. ‘기의 없는 기표’란 지젝이 라캉의 대타자 개념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서 강조하는 용어다. 지젝에 따르면 라캉의 대타자 개념은 대략 두 번에 걸쳐 변화한다. 지젝은 라캉의 대타자가 기본적으로 진리의 절대 담지자라기보다는 기의 없는 기표인 S()로 표기되는 데 주목한다. 첫 번째 시기에 주로 대타자 부재를 통해 인간 주체의 해방의 가능성을 조명했다면(인간이 신을 죽인다) 두 번째 시기에 라캉은 깨지고 파편화된 보편, 약한 대타자를 더 강조하면서 신을 새로운 자리로 올려놓는다(인간이 신을 죽음에서 불러내 상처난 부분을 어루만진다). 신(대타자) 개념이 이처럼 바뀌는 것은 시대마다 증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기의 없는 기표’(S())는 시대의 새로운 증상을 전면화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강응섭에 따르면 이것이 신학자 바울이 유대 신의 개념을 새롭게 개념화한 작업의 중요한 내용이다. 결국 ‘기의 없는 기표’를 통한 신의 재개념화는 우리 시대에 새로운 신학적 해석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열어주는 유용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신명아의 글 「지젝의 정치신학 연구: 사도 바울 읽기를 중심으로」는 사도 바울의 새로운 신학적 입장의 주축을 이루는 개념인 ‘신의 약함’이 지니는 개념적 유의미성을 조명한다. 지젝은 단순히 정신분석 이론을 신학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신학의 밀접한 연관성과 신학을 통해 정신분석학의 메시아적 함의를 드러낼 필요성이 있음을 보여준 사상가다. 지젝에 따르면 종교적인 것은 미학과 윤리적인 것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시차적 틈(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사이의 심연, 공통된 기준의 결여, 역설)의 급진적 확산이다. 지젝은 바울의 신학에서 급진적 해방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끌어내는데, ‘비움의 존재론’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가 비움(케노시스), 즉 신이라는 초월적 위치에서 내려와 인간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비우고 아무런 저항 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빛과 사랑을 전파했고, 세상의 약한 자를 들어올려 강한 사람을 약화시키겠다는 가르침을 실제로 육화했다는 사실을 바울의 신학은 잘 보여준다. 신명아에 따르면 지젝은 비움의 존재론에 근거해 정치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지젝의 분석을 통해 라캉 사상이 기독교와 유사성을 지닌다는 점이 잘 드러나는데, 라캉의 죽음충동과 사도 바울의 약한 신(텅 빈 신) 개념의 상관성이 그것이다. 신명아는 바울의 비움의 존재론을 주체가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으면서 환상을 가로지르고 이를 통해 주체적 궁핍을 견디면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김소연의 글 「라캉의 이미지론에서 지젝의 영화론으로: 미혹의 스크린, 혹은 베일과 가면의 은유에 관한 고찰」에서는 특히 시선look과 응시gaze 사이에서 분열된 근대적 시각성을 주체와 연관해 분석한 라캉의 이미지론을 지젝이 어떻게 인터페이스 스크린 이론을 통해 발전시키며 현대 영화 이론에 영감을 주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라캉은 세미나 11 ‘그림이란 무엇인가’에서 응시를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는 베일과 같은 기능을 하는 스크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지젝이 라캉을 계승하면서 발전시키는 지점이 바로 여기로, 지젝은 분열의 봉합에 근거한 지각적 현실을 계속해서 파열내면서 부재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는 곳인 인터페이스에 주목한다. 지젝은 인터페이스가 결국 실재에 속하는 응시를 가시화한다는 점을 자신의 특기인 영화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아울러 단순히 영화 이론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기존의 비정치적 해석을 경계하면서 시선에서 응시로의 관점 전환, 즉 개별자에서 보편자로 직접적인 도약을 강조한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지젝의 영화 이론이 갖는 정치 이론적 함의를 결론적으로 제시한다. 지젝에게 영화는 해방의 가능 근거인 실재를 보여주고 다루는 적극적인 예술인 것이다.
남인숙의 글 「여성, 사랑의 주체와 내면의 발견: 시린 네샤트의 비디오 삼부작을 중심으로」는 부정성과 연관이 있는 여성의 기호 S()를 적용해 이란의 여류 예술가 시린 네샤트의 작품세계를 미학적으로 분석한 글이다. 라캉은 여성 주체를 드러내는 유일한 길이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사랑은 여성이 주체로 구성되는 과정에서 체화하는 불가능성, 즉 ‘부재’를 보충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인숙은 여성에 대한 라캉 이론의 예술적 예를 네샤트의 작품을 가지고 보여주는데 비디오 삼부작 「환희Rapture」 「격동Turbulent」 「열정Fervor」이 그것이다. 네샤트는 여성을 보여주는 서사가 특히 ‘전체 아님not-all’의 논리로 기표적 대표성에서 벗어나지만 그것을 통해 개별성을 확증하는 양상임을 비디오 아트를 통해 잘 묘사하고 있다. 비록 여성의 개별성은 공백, 지워짐, 목소리, 균열로 존재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방식의 열린 존재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네샤트의 ‘이미지 서사’는 여성이 문화에서 명시적으로 늘 ‘추방된 언어’를 말하는 자, 즉 말이 아닌 목소리로 존재하는 자임을 잘 보여준다. 이 글은 라캉 여성 이론의 예술적 적용이라 할 만하다.
이상의 글을 통해 우리는 라캉과 지젝을 적대적 관계로만 보거나 지젝이 단순히 라캉주의를 반복하면서 적당히 변질시키는 속류 에피고네라고 평가절하하기보다는 더 생산적인 차원에서 이를 보완할 연구가 필요함을 느낄 수 있다. 독자들이 라캉의 새로운 주체 이론이 지젝의 신학과 유물론에 어떤 실천적 영감을 주었고, 지젝이 이를 어떻게 정치철학적 맥락에서 발전시키면서 라캉주의를 새롭게 변모시켰는지 살펴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정신분석이 감당할 수 있는 역할과 시대적 사명에 대해 영감을 얻기를 기대한다. 막상 책을 내려다보니 라캉과 지젝을 적대적으로 날카롭게 대면시키거나 각각의 이론이 기대는 이론적 토대를 더 치밀하게 분석한 글을 좀더 실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이 기획은 완결이 아니라 라캉과 지젝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일종의 문제 제기에 가깝다. 독자들도 맹목적으로 라캉의 편을 들거나 지젝을 추종하기보다는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필자들이 제기한 문제 제기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 자리를 빌려 바쁜 가운데도 그간 함께 원고 작업에 참여해주신 필자 분들과, 함께 기획안을 검토하고 독자 입장에서 충고를 아끼지 않은 글항아리 출판사 강성민 대표님과 편집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정신분석학은 완결할 수 없고 또다시 실패를 반복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커다란 돌을 굴리고 또 굴리면서 험한 산을 힘겹게 오르는 시시포스에 가깝다. 최종 목표가 아니라 그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교보문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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