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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철학 : 논리경험론의 철학개념
신 오 현*경북대 철학
우리의 철학연구 경험에 의하면, 학문으로서 철학적 사유는 철학적 전승을 그 구조-역사성에서 해석학적으로 반복·동화하는 지성적·정신적 소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우리가 최종적으로 확인한 것은: 철학은 철학의 자기정체성 확인을 그 목표이념으로 삼아, 인간의 존재-구성적인 보편적·본질적 문제를 자신의 존재-구성적 문제상황으로 반복 재확인하는 방식으로 자기존재 의미를 증득해 가는 과정, 이를테면 자기개명과정과 이 자기개명과정을 인류개명과정에 재-투사하는 변증법적·목적론적 실천행위이며; 인간의 존재-구성적 조건·상황 또는 근본적 문제-상황은 의식(이성·인식)-사회(역사·해석)-언어(논리·진리)의 삼위일체성이고; 그리고 이러한 철학의 목표이념과 주제의식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 것이 20세기 현대철학이라는 것이다. 실로 금세기의 철학은 철학 자체의 정체성에 대한 절박한 위기의식과 이에 대처할 처절한 대안모색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 상황에서 태동된 현대철학이 언어-의식-사회의 삼위일체성의 주제로부터 어느 한 측면을 강조적으로 조명하면서, 1920년대에 이르러, 언어-논리의 철학, 의식-존재의 철학 및 사회-해석의 철학으로 가닥 잡혀 그 三派 鼎立狀을 표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훗설-하이데거-싸르트르의 현상학적 인식-존재론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비판이론을 철학의 자기정체성 확인 문제를 위주로 고찰한 바 있거니와, 이제 여기에서 비엔나 서클의 논리경험론을 역시 그 근본문제인 철학 정체성 확인 문제를 중심으로 고찰함으로써 현대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윤곽적 소묘를 일단 마무리지으려 한다. 이상의 모두 진술에서 명백하듯이, 우리가 해묵은 비엔나 서클의 철학을 총괄적으로 검토하려는 것은, 결코 그들의 논리경험론 그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금세기 철학 전체를 철학-역사적으로 조망하여 미래 철학의 가능성을 전망하는 모종의 철학사관(the philosophical historiography of a philosophical history)에서 발단된 극히 제한적이고도 의도적인 작업의 일환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논리경험론의 역사가 철학의 정체성 확인의 역사임은 분명하지만, 논리경험론자들의 다양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한통속으로 묶어서 하나의 논문 안에 총괄 논의하는 데에는 적지 않는 무리가 따를 것도 또한 명백하다. 바로 이러한 무리를 완화시키고자 우리가 취한 몇 가지 전략은 이러하다: 우선, <논리실증주의>, <논리경험주의>, <논리경험론>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되는 우리의 주제 명칭들을 <논리실증론>과 <논리경험론>으로 개명하고, 그리고 비록 이 두 가지 명칭이 상호교환적이기는 하지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우리는 통상 <논리실증론>대신 <논리경험론>을 사용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논리경험론>의 개념규정을 위하여, 논리경험론자들이 표방하는 철학 자체의 이념과 그 이념 속에 포섭되어 있는 철학적 발상들(ideas)을 비교.추상.선택.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를테면 아도르노(Adorno)의 이른바 콘스텔라쵼(Konstellation)의 방법으로, <논리경험론>의 외연과 내포를 교차·검토하면서, 결과적으로 논리경험론이 어떤 철학사상을 이름하는 것이며, 누구를 그 대표자로 지목할 수 있는 것인지를 나름대로 해명하려 할 것이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의도에 충실하기만 하다면, 가능한 최대한도로 텍스트에 준거하고 또 텍스트가 직접 말하게 함으로써, 우리 논의의 신뢰도를 높이고 일반 독자들의 철학적·철학사적 계몽과 철학 종사자들의 참고용도에 봉사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논의는 사실-기술적(현상학적?)인 것에 제한하고, 일체의 비판적·평가적인 해석을 삼가기로 조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논문의 분량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한 작업은 추후에 별도로 수행되어 마땅할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I. 논리경험론이란?
<논리경험론>이란 용어는 통칭 <논리실증론>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후자는 1931년 블룸버그와 파이글(A. E. Blumberg and Herbert Feigl)이 비엔나 서클에 의해서 제창된 일련의 철학이념들에 부여한 명칭으로서, <과학적 경험론>이나, <논리적 신경험론> 등으로 다양하게 일컬어지는데, 이 서클의 창시자인 슐리크는 이를 <一貫 經驗論>(konsequenter Empirismus)으로 지칭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퍼트남(H. Putnam)을 위시한 현대 경험론자들이 <논리실증론>과 함께 <논리경험론>이라는 용어를 병행 사용하는 것은, 아마도 비엔나 서클의 <논리실증론>이 고전적 영국경험론의 후예임을 적시하고자 함일 것이다. 실증론을 인식론의 한 유형으로 간주할 때, 즉 인식의 적법성이 그 실증성에 있음을 강조하는 인식주장(knowledge claim)으로 이해할 경우, 전통적 실증론이 이 주장의 근거를 인간인식의 사실성에 두는 반면, 논리실증론은 이를 그 논리성에 둔다는 점에서 그 결정적인 차별성을 확보한다. 인식의 실증성이 우선 감각적 경험(가능)성을 의미한다면, 실증성의 불가피성도, 그리고 이와는 대립적인 입장의, 즉 원리적으로 실증초월성을 강조하는 형이상학의, 성립불가능성도, 인식 성립의 논리성에 따른 논리적 주장으로 정당화하려는 기획이 논리실증론 또는 논리경험론인 셈이다. 一言以蔽之하면, 논리경험론은 논리적인 근거에서 정당화되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는 경험론으로 규정될 수 있겠다. 파이글이 <논리실증론>을 "비엔나 서클에 의해서 제시된 일련의 철학이념들에 부여된 명칭"이라고 규정한다 하더라도, 바로 이 <일련의 철학이념들>이 정확하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철학적으로 해명되지 않는 한, 논리경험론의 정체확인은 여전히 불확실한 채 남아있는 셈이다. 그들이 제창한 철학 이념들은 어떤 것들이며,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다름 아닌 철학적 이념들이란 말인가? 그들이 제창한 철학이념들은 다만 그들의 안목에서 포착된 철학이념들, 즉 그들의 철학개념에서 비롯된 철학이념들에 불과하기에, 그들의 것과 다른 철학개념에서 본다면, 그것들은= 전혀 철학이념들이 아닐 수도, 이를테면 과학이념일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문제들이 해명되기 전에는 논리경험론의 개념규정조차 정립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논리경험론의 철학개념을 해명하려는 우리의 과제는 循環論의 고리를 풀지 못한 채 그 출발조차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아니, 도대체 여기에서 <그들>이 정확하게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조차 분명하기나 한 것인가? 1920년대 비엔나 서클을 형성한 모든 자연인들이 일치된 철학이념들을, 다름 아닌 철학이념들을, 제시한 것은 역사적 사실인가? 아니, 도대체 그들은 <철학>에 대해서 그 어떤 것이라도 공통되게 이해하고 있기나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 중의 어느 누가 철학을 그 본래적 이념에 충실하게 이해하고 있어서, 기존 철학을 비판하고 감히 새로운 브랜드의 철학을, 또는 철학이념들을, 제창하려고 한 것인가? 행여, 이 모든 문제와 함께, 루이스(C. I. Lewis)의 이른바 "비엔나 서클의 논리실증론"이라는 개념 자체가 처음부터 무의미한 개념이었던 것은 아닌가?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나 우선 최소한의 정확성으로나마 <논리경험론>을 거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우리는 논리경험론을 자처하는 표본적 철학이념들을, 이를테면 훗설의 이른바 "자유변양을 통한 본질직관"에 유사한 방식으로, 체질하고(sift) 대조해(cross-check) 본 결과, 다음과 같은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을 마련한다. 우선 그 외연부터 살펴본다면, 비엔나 서클의 창립 멤버이자 그 철학운동의 주도자였던 슐리크, 그에 찬동하여 이 서클의 적극 가담자이자 기관지 Erkenntnis의 발행인이었던 카르납, 그의 학문 파트너이면서 철저하게 물리론을 고집하여 카르납의 현상론에 대조를 이룬 노이라트, 그리고 카르납과 럿셀에 가장 큰 영향을 받고 논리실증론의 대변자를 자처한 에어를 논리경험론자로 분류하는 데에는 별다른 이의가 제기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카르납의 <과학의 논리>에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음을 자인하면서도 노이라트의 물리론을 지지하면서, 고전적 논리실증론을 계승·탈피하는 콰인을 한데 묶어, 이들을 표본적 논리경험론자로 지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논리경험론> 개념의 내포, 즉 그 철학이념들에는 통상 (i) 형이상학의 거부, (ii) 검증가능성의 원리, (iii)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엄격한 구분, (iv) 언어분석·비판으로서 철학적 분석이 거론된다. 이 네 가지 이념들이 과연 철학적 이념들인가는 별 문제로 치더라도, 여기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들이 모두 <논리실증론의 철학이념>을 규정하는 일련의 착상들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내포-외연에 상응하는 개념을 <논리경험론>으로 규정하고 이제 논리경험론의 철학개념을 분석·해명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이러한 작업 즉 논리경험론의 철학개념을 해명하는 작업을 통해서 역으로 <논리경험론>의 정체확인 작업도 동시에 이루어질 것임은 물론이다. II. 철학과 형이상학: 형이상학의 제거
논리경험론은 물론이고, 여하한 형태의 <실증주의>도 <형이상학>의, 즉 <형이상적인 것에 관한 학문>의, 可能性·適法性을 원천적으로 부인한다. <형이상적임>과 <실증적임>은 상호모순개념이기 때문에, 실증적인 것만을 학문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실증주의가 <형이상적 학문은 적법한 학문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형이상적인 것은 실증적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에 속한다. 즉 <실증적인 것>과 <형이상적인 것의 부정>은 동일한 것이고, 따라서 <실증주의의 형이상학 부정>은 실증주의 개념 자체에 함의되어 있는 분석적 주장인 셈이다. 여기에 실증주의의 논리적 含意性이 확인되며, 이것이 바로 논리경험론이 전래 실증주의로부터 자신을 차별화하는 방편으로 <일관된 경험론>임을 자처하는 근거이다. 즉 전래 경험론과 실증론의 이념에 일관되게 충실하면, 형이상학의 가능성·적법성은 논리적·원리적으로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바로 이점에 착안하여 형이상학의 불가능성·비적법성을 논리적으로 변증함으로써, 역으로 경험과학의 유일·정당성을 옹호하는 작업에 철학의 중요한 직능을 확보하려는 것이 정통 논리경험론의 근본입장이며, 슐리크, 카르납, 에어가 이러한 입장을 시종일관 견지한다. 이하에서 우선 이들이 어떻게 형이상학을 개념규정하고 철학임무를 정체확인하는가를 살펴보겠다.
1. 모리츠 슐리크 (Moritz Schlick: 1882-1936)
그는 "우리 비엔나 실증론," "우리의 새로운 실증론," "우리의 경험론"을 "참된 실증론," "진정한 실증론," "일관된 경험론"으로 자부하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철학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비엔나의 철학" 곧 논리경험론에 의해서 확실하게 마련되었음을 자신만만하게 선언한다. 그가 말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은, 전래 철학의 형이상학적 혼란을 일거에 청산하고, 철학을 논리학의 지위에로, 확실한 학문의 지위에로 바꾸어 놓는 계기를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도정은 논리(학)에서 출발하는데, 라이프니츠(Leibniz)는 그 단초를 어렴풋이 알아차렸고, 럿셀과 프레게(Gottlob Frege)는 지난 10년간에 그 중요한 구간들을 개척했으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논리철학논고』에서) 비로소 그 결정적인 전환점에까지 밀고 나아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논리적 방법 그 자체가 아니라, "논리적인 것의 본성에 대한 통찰," 즉 논리적 형식이 가지는 (또는 비트겐슈타인이 그것에 부여한) 인식론적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의하면, 실재·세계에 관해서 인식·언표할 수 있는 것은 양자가 공유하는 논리적 형식 덕택이다. 모든 인식은 인식내용을 표현(Ausdruck)하고 진술(Darstellung)하는 것이며, 각종 표현·진술 양식은 그 논리적 형식을 공유한다. 바로 여기에 인식의 객관성과 보편성이 성립되며, 학문의 통일가능성(the idea of unified sciences)이 전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표현·진술된 논리적 형식 그 자체는 또 다시 표현·진술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되고 진술된 인식·학문은 자신 편에서 자신을 정당화해야 할 요구를 면제받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전래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문제는 일거에 해소되고 만다. 즉,
인식의 타당성과 한계에 관한 문제는 사라져 버린다.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인식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의미있게 물을 수 있는 것의 전부이다. 따라서 원리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여하한 물음도, 원리적으로 풀 수 없는 하등의 문제도 없다. 지금까지 그러한 물음, 그러한 문제로 간주되어온 것은 모두가 진정한 물음이 아니라, 무의미한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하다. 이러한 단어 나열들이 관습적인 문법규칙을 만족시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물론 외형적으로는 물음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허한 소리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인데, 이는 이들 단어나열이 새로운 분석에 의해서 발견된 논리구문의 심층적·내면적 규칙을 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슐리크는 이 논문과 또 다른 논문들, 특히 「인식, 체험, 형이상학」(1930)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이른바 < 표현할 수 있는 것>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지시할 수 있는 것>의 구별에 근거하여, 과학과 형이상학의 구별을 시도한다. 그는 <한편으로, 언표할 수 있는 것(das Ausdr ckbare)·진술할 수 있는 것(das Darstellbare)·전달할 수 있는 것(das Mitteilbare)·언술할 수 있는 것(das Sagbare)과 다른 편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들의 대립 관계>를 바로 <한편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과(das Erkennbare) 다른 편으로, 인식할 수는 없으나 체험하고(Erleben), 熟知하며(Kennen) 직관함(Intuition)이 가능한 것과의 대립>으로 파악하여, 전자를 과학의 영역에, 그리고 후자를 미학, 예술, 윤리, 형이상학의 영역에 配對한다. 이와 같이 형식-내용 이분법에 따라, 형식만을 언표·진술 가능한 인식으로 간주하고, 내용은 숙지·체험·직관의 대상으로서 이를 인식영역으로부터 배제한다면, '후자의 학문, 예컨대 형이상학이 인식일 수 없는 것'은 분석적 진리가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형이상학적> 직관을 직관적 <인식>으로 간주하려는 모든 시도는 원리적으로 실패하게 마련인 자가당착 이외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의 실현 가능성, 이러한 형이상학적 "인식"의 가능성은 어떠한가? 이제, 직관은 체험이며, 그리고 직관 내용은 바로 일종의 의식 내용이고, 따라서 定義上, 내재적인 어떤 것이라면, "초월자의 직관적 인식"은 하나의 헛소리(Nonsens), 모순에 찬 단어-결합이라는 결론이 된다. 직관은 그 본성상 내재적인 것에 한정되고 (직관은 내재적인 것의 직관이 결코 아니다). 초월적 현실성은 체험될 수 없고, 체험되지 않는 한에서만 초월적이다: 이것이 바로 그 말의 정의이다. 누군가 主意說(Voluntarismus)에 따라 <초월 존재의 형이상학적 본성이 의지>라고 주장한다면―그는 사실 <체험되지 않는 것이 체험된다면, 의지도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며―그리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마찬가지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셈인데, 이는 그 가정이 자기모순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예컨대, 유심론(Spiritualismus)이나 혹은 심리일원론(Psychomonismus)의 경우처럼, <심령적 성격의 초월자는 형이상학적>이라고 말하는 자는 기실 <초월자는 초월적이 아니라 내재적이라면, 그것은 의식내용>이라고 말하는 셈이며―이는 한편으로는 모순이고, 한편으로는 동어반복이다.
게다가 <형이상학적 인식>의 자기모순성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모순을 수반한다.
즉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고, 형이상학자가 직관할 수 없는 것을 직관했다 치고, 형이상학자는 이제 그의 이 체험을 단어와 개념으로 진술할 수 있다고 믿는다[…].―그런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것은 <그가 원리적으로-언표 불가능한 것을 언표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상술한 바에 따르면, 이와 같이 단어와 개념으로 옮김으로 해서 바로 체험 특유의 것은 다시 상실되고, 단지 형식적 관계들만 남게 되어, 오직 기호들에서부터 해독될 수 있을 뿐이다. […] 철학자가 체험을 표현하려고 제 아무리 많은 말들을 찾아본다 하더라도, 그는 단지 체험의 형식적 속성들만 적중할 수 있을 뿐, 그 내용은 항상 그로부터 미끄러져 달아난다. 따라서 철학자의 의미에서 "직관적 인식"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형이상학자에게 남은 것은 침묵하는 것뿐이다.
슐리크가 형이상학의 비적법성을 변증하는 데 사용한 방법에는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형식 이원론> 이외에도 <경험적 의미 유-무성>의 원리가 있다. 그는 <경험적 유의미성>의 기준으로 비트겐슈타인적인 <검증 가능성>을 들고 있는데, 특히 「실증론과 실재론」(1932/33)및「의미와 檢證」(1936)에 명확하게 표명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 <사실적 유의미성의 검증가능성 기준>(the verifiability criterion of factual meaning)을 <한 문장의 의미는 그것을 검증하는 방법이다>라는 식의 악명 높은 슬로건으로 공식화했다"고 비판된 이 검증가능성의 원리는 이렇게 표현된다. 한 문장의 의미를 진술하는 것은 이 문장을 사용하는 데 준거하는 규칙들을 진술하는 것에 상응하며, 그리고 이것은 이 문장이 검증될 수 있는 (혹은 반증될 수 있는) 방법을 진술하는 것과 동일하다. 한 명제의 의미는 그것을 검증하는 방법이다. […] '경험'에의 조회 없이 혹은 '검증 가능성'(possibility of verification) 없이 … 어떠한 의미를 이해하는 방법은 없다. […] 한 명제의 의미는 오직 경험을 통하여 그것을 검증하는 규칙을 제시함으로써만이 주어질 수 있다(30). […] 우리가 검증가능성을 말할 때, 우리는 검증의 논리적 가능성 이외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한 사실이나 한 과정이 기술될 수 있다면, 즉 그것을 기술하는 문장이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위해 약정해 놓은 문법규칙을 따른다면, 나는 이러한 사실이나 과정을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고 부른다. […] 우리가 논리적 불가능성을 말할 때는 언제나, 우리는 우리의 용어 정의와 우리의 용어 사용 방식 사이에 생기는 차질에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36). […] 의미의 충분하고 필요한 조건인 검증가능성은 논리적 질서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용어 정의가 준거하고 있는 규칙에 일치하도록 문장을 구성함으로써 창출된다(37). […] 진정한 질문은 그에 대한 대답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질문이다. 이것은 우리 경험론의 가장 특징적인 결과들 가운데 하나이다(38).
여기에서 우리는 슐리크의 <검증가능성> 개념이 현저하게 <논리적 가능성>, 더욱 구체적으로 <논리적 질서의 가능성> 개념에로 기울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1926년 이후 그의 서클 내에서 점진적으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 카르납의 영향에 따른 미묘한 입장변화를 의미한다. 그는 이미 「실증론과 실재론」에서 명제의 의미기준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하면서, "주장들과 물음들의 의미(Sinn)를 탐색하고 명료화하는 것이 철학의 고유한 업무이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철학을 과학의 논리, 과학언어의 형식적 구조이론, 과학언어의 논리적 구문론"으로 성격지운 카르납의 입장에 근접시키면, <검증가능성>의 개념이 <논리적 질서의 가능성>으로 논리적 전회를 수용한 <논리적 경험론>의 진면목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입장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진리 대응설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검증가능성은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선언되어야 한다. 검증가능성은 여하한 '경험적 진리'에도, 자연의 법칙에나 혹은 어떠한 다른 일반 명제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우리의 정의에 의해서만, 우리의 언어를 위해서 고정되어 있는, 혹은 우리가 어느 순간에도 자의적으로 고정할 수 있는 규칙들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이 모든 규칙들은 종국적으로는…直示的 정의(ostensive definitions)를 지시하고, 이러한 정의를 통하여 검증가능성이…경험에 연결된다. 표현의 어떠한 규칙도 세계 내의 여하한 법칙이나 혹은 규칙성을 전제하지 않지만, […] 명칭들이 적용될 소여(data)와 상황을 전제한다. 언어의 규칙들은 언어의 적용규칙들이며, 이러한 규칙들이 적용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표현가능성과 검증가능성은 동일한 것이다. 논리와 경험 사이에는 하등의 적대관계가 없다. 논리학자는 동시에 경험론자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경험론자이어야 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이른바 <경험적 의미요건>을 강력하게 고집하고, 다른 편으로는 의미와 검증가능성이 여하한 경험적 조건들에도 의존하지 않고, 순전하게 논리적인 가능성들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강조적 주장"(같은곳) 사이에 어떠한 역설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논리적 가능성과 그것의 실현가능성(tats chliche Ausf hrbarkeit) 사이에는 하등의 양립불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은 다만 명제의 의미충족성을 그 검증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논리적으로 해명하고, 그것을 실제로 검증해 보이는 것은 상식과 과학의 책무에 속한다. 그리하여 우선 논리적인 가능성으로서 검증가능성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어떠한 명제도 그 참과 거짓을 실제로 검증하기도 전에 그것의 의미 없음을 논리적·원리적으로 단정할 수 있는 바, 이러한 종류의 무의미한 명제, 사이비 명제로 구성된 학문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또는 의미 유무 판정 기준에서 볼 때, 경험-초월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外在的 실재론은 물론이요, 唯心論-主意論과 같이 의식-초월적 실재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오로지 의식-내재적 실재성만 고집하는 유아론·관념론도 다같이 무의미한 주장을 일삼기는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이다. 유아론적·관념론적 형이상학과 초월론적 형이상학이 주장하는 "실재성"을 부정하고 오로지 경험적 실재성만을 변호하는 논리경험론은 경험적 실재론이다. 슐리크는 「실증론과 실재론」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경험론자는 형이상학자에게 <당신의 말은 거짓된 어떤 것을 주장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은 도대체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형이상학자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우리는 이상에서 논리적 경험론·실증론의 경험성·실증성과 함께 그 논리성·논리적-가능성을 일관되게 주장한 <일관된 경험론자>, <엄격한 실증론자>(strenger Positivist), <경험적 실재론자>(empirischer Realist)를 자처하는 슐리크의 형이상학 부정론을 너무 상세하게 고찰한 감이 없지 않다. 그만큼 우리는 그를 명실상부하게 논리경험론을 새로운 철학, 전환기의 철학으로 창도하고, 일관되게 주창한 주요한 철학자로, 그리고 그의 경험론을 반형이상학의 전형으로 보는 것이다. 게다가 형이상학 부정론은 논리경험론의 핵심에 근본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하에서 우리는 카르납과 에어의 형이상학 배제론을 차례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1891-1979)
그도 먼저 전통적인 철학의 영역으로부터 무의미한 언어나 진술들을 배제함으로써 철학의 학문성을 복원하고자 한다. 그것은 물론 고전 철학의 최소이념인 보편성·필연성·선천성·선험성에 비추어 우선적으로 논리적 분석이라는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도 학문인 이상 의미 있는 명제로 구성되어야 하며, 이러한 유의미성의 요건이 충족되어 있는지 여부는 문제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서 확인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 충족성 여부를 논리적 분석을 통하여 명시한다 함은 곧 논리적인 의미에서 의미 충족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이기에 <엄격한 의미에서 본 의미 충족성 여부>가 문제되어 있다. 그런데 카르납에 의하면 "일련의 단어들이 특정 언어 내에서 하나의 진술(statement)을 구성하지 못하면 무의미하다(meaningless) "는 것이다. 특히 문법적인 외양상으로는 진술처럼 보이면서도 논리적 구문상 의미 없는 진술을 카르납은 <사이비 진술>이라 부른다. 언어는 어휘와 구문, 즉 의미와 문장구성 규칙을 가진 일련의 단어들(a set of words)로 구성된다. […] 따라서 두 종류의 사이비 진술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오인된 단어를 내포하는 경우이거나 또는 그 구성어들은 유의미하지만 구문법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합성되어 유의미한 진술을 산출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 두 종류의 사이비 진술이 형이상학에 발생하며, […] 형이상학은 그 전체에서 이러한 사이비 진술로 구성된다(같은 곳).
그러면 두 종류의 사이비 진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기 위하여, 무의미한 단어와 무의미한 문장이 어떤 것인가를 보기로 하자. 우선 단어는 그것이 문장 내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되기 때문에, 단어의 의미가 결정되기 위해서는 "그 단어의 구문법 즉 그 단어가 끼어들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문장형식 내에 그것이 끼어드는 양식이 확정되어야 한다"(62). [여기서 가장 단순한 문장형식이란, 이를테면, <요소문장>(elemen- tary sentences), <관찰문장>(observation sentences) 또는 <프로토콜 문장>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되는 것들이다(62∼63 참조)]. 이리하여, 언어의 각개 단어는 다른 단어들에로 환원되고, 終當에는 이른바 "관찰 문장" 혹은 "프로토콜 문장"에로 환원된다. 단어가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환원을 통해서이다. […] 한 단어는, 이 단어가 끼어든 문장들이 프로토콜 문장들에로 환원될 수 있을 때만이, 유의미하다. 한 단어의 의미는 그것의 적용기준에 의해서 규정되기에[…](LP, 63), 그 단어를 위한 하등의 적용 기준이 약정되지 않는다면, 그 단어가 끼어드는 문장들에 의해서는 아무 것도 주장되지 않는 셈이며, [따라서] 이 문장들은 다만 사이비 문장들에 불과하게 된다(LP, 64).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카르납이 例示한 "유별나게 형이상학적인 名辭들"은 "이데아," "절대자," "無制約者," "無限者," "존재자의 존재," "非-存在," "物自體," "절대정신," "객관적 정신," "본질," "즉자존재," "즉자-대자-존재," "流出"(emanation), "現出"(manifestation), "분절"(articulation), "자아", "비-자아" 등등이며(LP, 67), 또 다른 곳에서 推定 對象(supposititious objects)으로 거명된 것에는 "즉자-존재, 절대자, 선험적인 것, 객관적 이념, 세계의 종국 원인, 비-존재 및 가치, 절대규범, 定言命令 등등과 같은 것들이 있다." "[형이상학은] 저러한 단어들을 포함하는 [문장들을 진술들이라 주장하지만] 형이상학의 이러한 추정된 진술들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 사이비 진술이며"(LP, 67), 이러한 추정적 대상들을 포함하는 추정적 문장들은 형이상학 특유의 것들로서 역시 사이비 문장들이다(LS, 278). 무의미한 단어를 포함하는 제일종 사이비 진술에 덧붙여, 제이종 사이비 진술은 유의미한 단어들이, 비록 역사적·문법적인 구문법에는 整合的이더라도, 논리적 구문법에 어긋나게 배합되어, 외양상 바른 정상 진술처럼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내용상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기에, 참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짓인 것도 아닌 진술이 그런 종류의 것들이다. 카르납은 논리적 구문법에 현저하게 위배된 형이상학적 사이비 진술의 표본으로, 당시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형이상학을 지목하고, 후자의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취임 공개강의(1929. 7. 24)인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여기 저기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여 대본으로 제시해놓고, 이들을 비판하는 데 또 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유명한 위대한 형이상학자가 얼마나 황당한 말잔치를 벌리고 있는가를 희화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무>나 <존재>는 명칭도 명사도 아닐뿐더러, 위의 정의에 따른 유의미한 단어도 아니다. 게다가, 설사 이들이 유의미한 단어로 치부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들이 끼어 들어 구성된 문장이 역사적·문법적인 구문법에는 위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논리적 구문법에 저촉됨이 명백함을 분석해 보임으로써, 이러한 문장들이 사이비 진술임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카르납은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는 데 아주 탁월한 솜씨를 발휘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카르납이 그가 인용한 하이데거의 문장들에 대해서 어떻게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그리고 그러한 작업이 형이상학의 학문적 적법성 문제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지니는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히려 카르납의 또 다른 전략, 즉 하이데거 자신의 말을 통하여 하이데거를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에서 수행된 형이상학 진술 일반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하이데거적인 반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전략에 지향되어 있다.
그러나 혹시 우리가 하이데거를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은, 이 논문의 저자가 그의 물음과 진술 및 논리 사이에 개재되어 있는 모순(conflict)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할 때, 이러한 우리의 의심은 완전하게 해소된다. [이를테면 그는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무에 관한 물음과 대답은 마찬가지로 그 자체에서 부조리하다(widersinning). […] 일반적으로 끌어들여지는 사고일반의 근거규칙인 모순기피 규칙(der Satz vom zu vermeidenden Widerspruch), 일반 '논리학'은 이 물음을 파괴한다." [그렇다면] 논리학을 위해서 더 더욱 나쁜 일이다! 우리는 논리학의 통치권을 철폐해야 한다: "그래서 만일 무와 존재에 관한 물음 분야에서 오성의 권력이 파멸된다면, 그와 함께 철학 내에서 '논리학'의 지배권의 운명도 결정된다. '논리학'이라는 이념 자체가 보다 더 근원적인 물음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해소되고 만다." 그러나 제정신인 과학이 반논리학적인 물음의 소용돌이를 묵과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도 卽答이 있다. 즉 "만일 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과학이 주장하는 냉철함과 우월성도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다음과 같은 명제가 훌륭하게 확증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한 형이상학자의 물음과 대답들이 논리학과 과학적 사유 방식에 모순된다는 사실을 그 자신이 여기에서 진술하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더욱 주목해야할 것은 카르납과 하이데거 모두가 <형이상학의 극복>( berwindung der Metaphysik)을 주제로 한 <형이상학의 정체성 해명>을 거론하면서도 서로 극명하게 대립되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카르납의 형이상학 성격규정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일단 마무리해야 하겠다. <형이상학의 극복>이라기 보다는 이 글의 영역 표제가 시사하듯이 오히려 <형이상학의 제거>(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를 지향하는 카르납의 형이상학 비판은 같은 입장에 서 있는 다른 논리실증론자들 보다 더욱 가혹하다.
[형이상학에 반대하는 또는 형이상학의 성격을 규정하는] 우리의 명제와 이전의 반형이상학자들이 제시하는 명제간의 차이가 이제는 분명해야 하겠다. 우리는 형이상학을 "단순한 사변"(mere speculation)이나 혹은 "동화"(fairy tales)로 간주하지 않는다. 어떤 동화의 진술들은 논리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경험과 충돌할 뿐이다; 이들 진술은 비록 거짓일지라도 완벽하게 의미 충족적이다. [그리고 또한] 형이상학은 "미신"이 아니다; 참인 명제나 거짓인 명제를 신앙할 수는 있지만, 무의미한 단어연결들을 신앙할 수는 없는 법이다. 심지어 형이상학적 진술들은 "작업가설들"(working hypotheses)로 받아들일 수조차도 없다; 왜냐하면 어떤 가설은 (참이거나 거짓인) 경험명제들과 연역 가능성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사이비 진술들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형이상학적 진술은 무의미한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러한 무의미한 소리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 물음은 "어떤 全知한 존재라 할지라도 어떤 대답도 제시할 수 없는 것"(LP, 72)이며, 모든 지식은 동일한 종류의 경험 과학적 지식이기에, 원리적으로 경험을 초월한다는 지식은 "어떠한 신도, 그리고 어떠한 악마도 우리에게 제공할 수 없는"(73) 것이다. 이러한 선언은 가히 형이상학의 사망선고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3. 알프레드 에어(Alfred Ayer: 1910-1989)
그의 반형이상학적 입장도 슐리크와 카르납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실상 에어의 명성을 철학자로 만들고, 그리고 논리실증론의 주도적인 영국 대변자로 확립한, 그리고 출간 10년만에 논리실증론 "교과서의 지위"를 성취했다고 저자 스스로 자부한 그의 처녀작『언어·진리·논리』(1936)는 그 초판「서문」에서 신진 기예 철학자의 패기와 열정이 숨김없이 토로되어 있다. 이 논고에서 피력된 견해가 럿셀과 비트겐슈타인의 학설에 유래하며, 후자는 또한 Berkeley-Hume적 경험론의 논리적 귀결임을 천명하는 冒頭 발언으로 자신의 사상적 계보를 명확하게 정체확인하면서, 에어는 곧 바로 Hume의 典例를 따라, 모든 진정한 명제를 선천적·필연적인 논리학·순수수학 명제에 의해서 대변되는 분석 명제와 경험과학의 가설적 지위를 가지는 종합명제의 두 부류로 양분한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부터 추론되는 것은: 분석적인 명제가 아니면서도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도 없는 어떤 추정적 명제가 있다면, 그것은 예외 없이 무의미하고 형이상학적이라고 단언한다. 철학의 명제는 언어적으로 필연적이고 분석적이며, 따라서 철학은 과학의 가설에 비견할 여하한 사변적 진리도 제공할 수 없다. 과거의 철학이 학파를 나누어 부질없는 논쟁에 종사한 것은 모두가 철학의 직능에서 벗어나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명제를 양산해왔기 때문이다. 끝으로,
나는 주장하거니와, 철학의 본성에는 상충하는 철학 "파벌들"의 존재를 보증할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나는 과거에 철학자들간의 주된 논쟁의 근원들이었던 문제들에 확정적인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나의 이러한 주장을 실증하고자 한다(32).
고 당찬 결의를 표명하고 있거니와,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논고』의 서문을 끝내면서 "여기에서 전달된 사상의 진리성은 훼손될 수 없고 확정적이기 때문에, 문제들은 본질적으로 마침내 해답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한 것과 흡사하다. 이 구절뿐만 아니라 서문 전체의 구조와 분량도 {논고}에 매우 유사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에어의 논고가 26세에 쓰여졌다면,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29세에 탈고되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이렇게 전자를 후자와 비교하는 것은, 양자의 공통적인 반형이상학적이고 경험론적인 철학 정신·태도를 강조하기 위함임은 물론이며, 나아가서 에어가 그의 사상적 친근감·귀속감을 표시하는 비엔나 서클 전체에 끼친 비트겐슈타인의 반-형이상학적 철학정신을 상기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논고는 본문으로 들어가면서 우선 전통철학으로부터 형이상학을 消去하고(제1장), 그 여분 가운데서 또 다시 과학을 제외함으로써, 최종적 잔여 학문의 활동이나 명제를 철학으로 확보한 후(제2장), 비로소 <철학적 분석의 성격>(The Nature of Philosophical Analysis)을 해명하는 과제로 나아간다(제3장). 전래철학과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새로운 철학, 실증적·경험적 철학을 정립하는 데 형이상학의 소거가 선결과제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이다. 두 쪽이 안 되는 간결한 서문에서 선언적으로 명시되어 있듯이, 에어의 형이상학 소거는 판단·진술·명제의 논리적 성격에 근거한다. 1932년에 발표된 그의 논문 <논리적 언어분석을 통한 형이상학 소거>에 첨부한 1957년의 비고에서, 카르납은 <형이상학>이라는 용어가 이 문건에서 "경험적으로 정초된 귀납적 과학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으로 주장된 사물 본질에 관한 인식분야"(LP, 80)에 적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바 있거니와, 에어는 "철학이 우리에게 과학과 상식의 세계를 초월하는 실재 인식을 제공한다"는 주장을 "형이상학적 명제(thesis)"로 규정함으로써(LP, 33), 전자의 형이상학 개념규정 자체를 형이상학적 주장으로 규정하는 셈이다. 형이상학에 관한 그러한 주장이, 형이상학자에 의해서이건 또는 반-형이상학자에 의해서이건, 누구에 의해서 주장되더라도, 그것은 명백하게 형이상학적 주장일 터이기에 말이다. "초월적 실재를 믿지 않으면서도 형이상학자일 수 있다"(같은 곳)는 것이 에어의 생각이기에 말이다. 상식과 과학을 넘어서는 실재의 존재나 그 인식에 언급하는 일체 주장을 형이상자나 형이상학이라 함은 <형이상자>나 <형이상학>의 개념을 반복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하등의 경험적 내용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경험주의가 내린 <유의미성>의 개념규정에 불과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대로라면, 초월적 실재에 관한 일체 명제, 즉 형이상학적 명제는, 하등의 경험내용도, 따라서 경험적 의미도, 가지지 않는 사이비 명제일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명제에 관한 일체의 메타-명제도, 이를테면 비트겐슈타인과 형이상학에 관한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논리경험론자들, 예컨대 슐리크, 카르납, 에어 등의 형이상학 시비도,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초월적 실재를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형이상학적일 수 있으며, 역으로 검증가능성의 원리에 따른 경험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어떤 발언이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규정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에어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문장은
진정한 명제를 표현하려고 의도하지만, 사실상 동어반복 명제를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험적 가설을 제시하는 것도 아닌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동어반복 명제와 경험적 가설이 유의미한 명제의 전체 집합을 형성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형이상학적 주장들이 무의미하다>고 결론내림에 있어서 정당성을 확보한다(41)
고 주장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형이상학에 대한 에어의 주장이 <형이상학의 문장들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동어반복 문장과 경험과학 문장을 제외한 모든 무의미한 진술들이 형이상학적이다>는 형이상학의 의미 규정이다.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 이해에 근거하여 에어는 한편으로 "통상 철학으로 간주되는 것의 상당 부분이 이러한 기준에 의하면 [즉 검증 가능성의 원리에 따른 유의미성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도 동어반복적이지도 못한 사이비 명제들은 형이상학적이며, 참도 거짓도 아닌 문자 그대로 무의미하다(senseless)는 기준에 의하면], 형이상학적이라"(31)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대다수(majority)가 본질적으로는 형이상학자들이 아니라"(41)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위대한 철학자, 형이상학자가 아니라 분석가인 철학자들에는 Hobbes, Locke, Berkely, Hume, Bentham, J. S. Mill, G. E. Moore같은 영국 경험론자들은 물론이고, Plato, Aristotle, Kant와 같은 고전철학자들도 포함되어있다(52∼56).
III. 철학과 철학명제
철학으로부터 형이상학을 소거하려는 슐리크, 카르납, 에어의 형이상학 개념규정을 개략적으로 제시한 지금, 우리가 다음으로 살펴 보아야할 것은, 당연히 형이상학의 소거 후에도 철학에 남을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 학문이며, 그것이 과학적 학문과는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이들의 대답은 무엇인가, 이다.
1. 모리츠 슐리크
우선 그에 의하면 현대철학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은:
우리는 이제 철학에서 어떤 인식체계 대신에 일종의 행동(Akt) 체계를 인지한다; 철학은 말하자면 진술들(Aussage)을 확정하고 발견하는 그러한 활동(T tigkeit)이다. 명제들은 철학을 통해서 명료해지고, 과학을 통해서 검증된다. 후자에서는 진술들의 진리성이 문제되고, 전자에서는 이러한 진술들이 고유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meinen)하는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과학의 내용, 영혼, 정신은 과학 명제들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깃들어 있다; 그래서 의미부여라는 철학 활동은 모든 과학적 인식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사실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명백하게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답습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모든 유의미한 명제들의 전체가 일상생활과 과학의 명제들로 구성된 인식체계라면, 그리고 철학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명제·진리를 산출할 수 없이 다만 상식과 과학명제의 의미를 발견·확정·명료화하는 행위나 활동에 그친다면, 당연히 "철학은 진술들의 체계가 아니며, 과학이 아니다"(LP, 56). 그러나 문제는 명제설정이 아니고 의미부여인 철학의 고유한 행위(Akt, Handlung)나 활동(T tigkeit)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예컨대, 럿셀이나 무어가 철학적인 분석을 예시해 보일 때, 우리는 그러한 행위가 어떤 의미에서 의미명료화 행위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카르납이 논리적 구문법에 의해서 오해-유발적인(misleading) 그의 이른바 <내용적 언변 양식>(formal mode of speech)이나 <대상-문장>(object-sentences) 및 사이비-대상-문장(사이비-구문적 문장)을, <형식적 언변 양식>(formal mode of speech)이나 구문적 문장(syntactical sentences)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이러한 문장들의 숨은 의미를 드러내 보이는 활동을 철학행위로 이해할 때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에어가 문제되는 명제, 특히 전통철학 명제들을 논리적 분석을 통하여 그들과 동치의(equivalent) 문장들로 변형(번역)하는 분석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슐리크가 철학을 명제(가설) 설정이 아니라, 의미부여 행위를 철학의 고유한 활동영역으로 규정할 때, 과연 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그의 설명을 들을수록 알기 어려워진다. 슐리크는 에어와 함께, 그리고 카르납이나 노이라트와는 다르게, 자칭 <경험적 실재론자>이고, 따라서 후자들의 진리 일관설(the coherence theory of truth)을 강력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부인하면서, 진리 대응설을 일관되게 고수한다.
철학의 작업이 명제설정에 존립하지 않는다는 사실, 따라서 진술에 대한 의미부여가 또 다시 진술을 통해서 수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사용하는 말들의 의미(Bedeutung)를 이를테면…새로운 말들의 도움을 받아 제시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동원된 말들의 의미를 또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고, 이렇게 계속적으로 [말을 통해 말의 의미를 제시하는] 과정이 무한히 계속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무한하게 진행될 수 없고, 결국에는 언제나 오직 사실적 지시에만, 의미된 것의 제시에만, 따라서 현실적인 행동에만 그 끝이 발견된다; 이러한 [행위들]만이 더 이상의 설명을 할 수 없고, 또 그러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최종적 의미부여는 항상 행위들을 통해서 일어나며, 이러한 행위들이 철학적 활동을 형성한다.
이 <최종적 의미부여>는 절대 확실한 인식의 최종근거이자 일체 인식의 종국 근원으로서, 그의 이른바 <확증>(Konstatierung)이며, 노이라트에 의해 대변되는 소위 <프로토콜 명제>로부터 엄격하게 구별하는 슐리크 특유의 <관찰명제>(Beobachtungssatz)이다. 후자는 여느 관찰문장과는 다르게 오류가능적(fallible)이고 교정가능적인(corrigible) 가설이 아니라, 절대 확실한 확정적 명제이며, 분석명제에 유비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명제, 그 의미를 아는 것이 곧 그 진리성을 아는 것과 동일한 명제이다. 가설이 아닌 유일한 종합 명제이다.
모든 여타의 종합적 진술인 경우에는 의미의 확정과 진리의 확정이 분리된, 충분히 구분할 수 있는 과정인 반면, 관찰명제의 경우에는, 분석판단의 경우와 똑같이, 이 양자가 합치한다. 따라서 "확증"이 분석명제와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두 경우에 이해와 검증이 동시 발생적이라는 점은 공통적이다: 의미와 함께 나는 그 진리성도 동시에 파악한다. 확증의 경우에 내가 행여 그 진리성에 관해서 기만당하고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은, 동어반복의 경우처럼, 무의미하다. 양자는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차이가 있다면, 다만 관찰명제가 우리에게 진정한 현실 인식의 만족을 주는 반면, 분석적 명제, 동어 반복 명제는 다 같이 무내용적이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슐리크는 바로 이러한 확증, "인식과 현실성의 요지부동한 접촉점"에서부터 "인식의 모든 빛"이 발원하는 바, 바로 이 근원을 묻는 것이 모든 인식의 토대를 모색하는 철학자의 과업이라고 결론짓고 있는 것이다(99).
2. 루돌프 카르납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하여 형이상학을 소거함>으로써 전통적 형이상학의 주류인 실재론과 반-실재론(주관적 관념론, 유아론, 현상론, 실증론) 모두에게 "무의미성의 판결"(the verdict of meaninglessness)을 내린 다음, 카르납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그러나 만일 무엇인가를 주장하는 일체 진술이 경험적 성격을 가지며, 사실과학에 귀속된다면, 그렇다면 철학을 위해서 남겨진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남는 것은 진술들이 아니며, 이론도 아니고, 체계도 아니며, 다만 하나의 방법(method)일 뿐이다: 논리적 분석의 방법 말이다. 앞서 진행된 논의는 이 방법의 부정적 적용을 예를 들어 설명해 온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것은 무의미한 단어들, 무의미한 사이비-진술들을 소거하는 데 소용된다. 이러한 방법의 긍정적 사용을 통하여 그것은 유의미한 개념들과 명제들을 명료화하고, 사실과학과 수학을 위한 논리적 토대를 놓는 데 기여한다. 이 방법의 부정적 적용은 현재 역사적 상황에서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그 현재적 실천에서조차도 긍정적 적용이 더 생산적이다. […] 논리적 분석, 논리적 토대의 탐구는 형이상학에 대비되는 "과학적인 철학"의 의미에 의해서 지시된 업무이다(LP, 77).
여기서 언급된 <논리적 분석 방법>은 그의 두 번째 대작 『언어의 논리구문론』(1934)에서는 <과학의 논리>(the logic of science), 더 구체적으로는 <과학언어의 논리구문론>(the logical syntax of the language of science)으로 지칭된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발표된 논문, 우리의 지금 논의와 연관하여 가장 중요한 논문 「철학 문제의 성격」에서 <과학의 논리>, <과학이론>(the theory of science),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 등이 모두 "과학적 개념.명제.증명.이론의, 그리고 과학적 개념.증명.가설.이론을 구성하는 가능적 방법에 공통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가용적 과학에서 선택하는 과학적 개념.명제.증명.이론의, 논리적 분석"(54∼55)에 종사하는 <과학언어의 구문론>과 상호 교환적인 개념으로서, 전래의 <철학> 개념을 대신한다. 비록 우리가 여기서 문제삼는 것이 카르납의 철학개념에 국한된다 하더라도, 철학과 동일시되는 <논리적 구문론>에 관한 그의 개념규정을 최소한으로나마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철학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우선 그가 말하는 <논리(학)>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보자. 비엔나 서클의 기관지인 {인식}의 창간호에 발표한 논문 {구식논리와 신식논리}에서 카르납은 "새로운, 과학적인 철학연구 방법이…경험과학의 진술과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함에 있는 것으로 특징지우면서," 새로운 논리학 이념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논리학은 더 이상 단순히 여러 철학분과들 가운데 한 분과가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 있 는 것은: 논리학은 철학연구(philosophizing)의 방법이다. 여기에서 논리학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해되어 있다. 그것은 순수 형식논리학과 응용논리학 또는 인식론을 포함한다(LP, 133).
그는 또 응용논리학을 <방법론>으로 파악하고(134), "응용논리학을, 상이한 과학부문의 개념과 문장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순수논리학으로부터 구별한다"(143). {논리구문론}에서도 <과학의 논리>를 <응용논리학>(278) 또는 <논리적 방법론>(7)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과학의, 과학의 문장.용어(terms).개념.이론 등등의, 논리적 분석 문제들이 진정한 과학적 문제들로서, […] 이들 문제 복합체를 과학의 논리로 지칭한다"(279)고 규정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과학의 논리'라는 용어를 통상 순수.응용 논리학, 특수과학의 또는 과학전체의 논리적 분석, 인식론, 토대문제, 등속으로 지칭되는 모든 문제 영역을 의미하는 [이들 문제들이 형이상학으로부터 자유롭고, 규범, 가치, 초월자들(transcendentals), 등등에 전혀 언급하지 않는 한] 매우 넓은 뜻으로 이해할 것을"(280) 제안하기도 한다. 카르납은 대상-문제(object-questions)와 논리적 문제(logical questions)를 구별하고, 후자를 대상을 직접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언급하는 문장(명제), 名辭(개념), 이론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 규정한다(LS, 277). 따라서 논리적 분석은 오직 언어에만 관계하는 것으로서, 사실문제를 다루는 과학과는 일단 논리적으로 구별되는 학문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구문론은 문장의 구성에 관한 이론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논리적 구문론이 언어학적 구문론(linguistic syntax)이나 역사적·문법적 구문론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은, 전자가 그 방법에서 순수한데 반하여 후자는 그렇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정확한 규칙 체계를 세우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뿐만 아니라 논리적 구문론이 판단의 내용, 이를테면 문장의 의미에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그 형식 구조 또는 구조 형식에만 관계한다는 면에서, 문장간의 관계, 즉 문장의 변형구조나 도출관계(derivations)를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도 언어학적·문법적 구문론과 구별될 수 있다. 문장의 형성규칙에만 관계할 때 협의의 구문론이, 그리고 문장간의 변형규칙도 동시에 고려될 때, 특히 논리적 구문론이 문제된다. 그렇다면 결국 논리구문론이란 무엇인가?
어떤 언어의 논리적 구문론이라는 말로써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그 언어의 언어(학)적 형식들에 관한 형식적 이론, 즉 이 언어를 지배하는 형식적 규칙들을 체계적으로 진술하고, 이들 규칙들로부터 따라나오는 귀결들을 전개하는 [그러한 형식적 이론이다]. 어떤 이론.규칙.정의 등속이, 그 안에 기호들(예컨대, 단어들)의 의미(meaning)나 또는 표현들(예컨대, 문장들)의 의미(sense)에 대한 하등의 언급들도 이루어져 있지 않고, 단순히 다만 이들 표현들을 구성하는 기호들의 종류와 차원에만 언급되어 있을 때, 이들을 형식적이라고 불리게 되어 있다(LS, 1).
이리하여 새로운 논리학의 냉혹한 심판 앞에서(LP, 134), 철학은 이제 더 이상 실재에 관여할 수 없고, 그 자신이 순수 형식논리학으로 자족하거나, 아니면 특수과학의 언어적 표현에 대한 논리적 분석 즉 논리구문론일 수밖에 없다. 이제 만일 "철학이 과학의 논리학에 의해서 대체되어야 한다"(LS, xiii)면, 그리고 "소위 철학적 문제들(problems)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유일한 문제들(questions)이 과학의 논리의 문제들뿐"(op. cit., 8)이라면, 그렇다면 "철학적 문제의 성격에 관한 질문"은 당연히 "과학의 논리에 관한 질문과 대답은 어떠한 성격, 어떠한 논리적 성격을 가지는가를 묻는 것"(LT, 55-L)이며, 그것은 곧 "과학의 논리[에 의해서 형성되는] 문장이 [어떠한] 성격을 [가지는가]"(LS, 280), 하는 문제에 다름 아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과학언어의 논리적 분석, 과학의 논리, 과학언어의 형식적 구조이론, 과학언어의 논리구문론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될 수 있는 철학활동에 의해서 형성되는, 또는 저들 분석.논리.이론.구문론을 구성하는, 문장은 구문론적 문장이며, 그것은 일부는 분석적이고 일부는 경험적·종합적이라는 것이다(LP, 77). 이러한 입장은 슐리크의 견해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며, 또한 슐리크는 물론 카르납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제시된 입장과도 크게 배치되는 것이다. 실로 카르납은 이 결정적인 점에서, 즉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개념에는 원칙적으로 찬동하면서도 철학명제의 가능성과 그 성격규정에 관해서는 그와 정면대립하지 않을 수 없는 이 결정적인 문제에서, 상당히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같은 시기에 발표된 {논리구문론}과 [철학문제의 성격]에서 이 문제와 연관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문장을 길게 인용하고 이를 치밀하게 검토.반박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철저하게 부정적인 대답대신 과학논리의, 따라서 철학명제의 성격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LT, 56). 첫째로,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세계와 공유하는 명제의 논리형식은 명제의 구조형식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또 다시 명제로 표현될 수 없다. 환언하면,
문장형식에 관한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 가능한 구문론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반대해서, 우리의 구문론 구성이 증시한 바에 의하면, 그것은 올바르게 형식화될 수 있으며, 구문론적 문장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하학적 구조의 기하학적 형식에 관한 문장 구성이 가능한 것과 같이, 언어적 표현 형식에 관한 문장 구성도 가능하다. 우선은, 언어표현의 형식들과 형식의 관계들에 적용될 수 있는 순수 구문론의 분석적 문장이 있고…; 둘째로는 물리 구조로서 언어표현 형식들에 관여하는 기술구문론의 종합적 물리학적 문장이 있다(LS, 282∼83).
즉 문장형식에 관한 문장, 즉 구문론적 문장이 구성될 수 있으며, 순수 구문론적 문장은 분석적·필연적이고, 기술 구문론적 문장은 종합적·경험적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철학은 언어비판 활동이며, 이러한 활동은 이론 즉 명제 체계를 산출하지 않는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부정적 견해에 정면으로 반대해서 카르납은 "과학의 논리는…완벽하게 올바른 문장으로 형식화될 수 있다"(283)고 주장한다. 그리고 " [내용적 언변양식의] 형식적 언변양식에로의, 즉 구문론적 문장에로의 번역가능성이 과학논리의 고유문장을 여타 철학문장―우리는 그러한 문장을 형이상학적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으로부터 분리하는 기준"(284)으로 제시하고,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해명해 보이고자 시도한다. 이와같은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카르납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동의하는 것은:
과학논리 (혹은 철학) 특유의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논리의 문장은 과학언어에 관한 구문론적 문장으로 형식화된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과학 자체의 영역에 첨가되는 하등의 새로운 영역도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구문론의 문장은, 일부는 산술의 문장이며, 그리고 일부는 물리학의 문장인데, 이 문장들이 <구문론적>이라 불리어지는 것은 다만 이것들이 언어적 구성에, 또는 더 명확하게 말하여, 그것들의 형식적 구조에 관여하기 때문일 뿐이다. 구문론이란, 순수하든 기술적이든, 언어의 수학.물리학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284).
는 점이다. 새로운 논리학의 법정에서 새롭게 거듭난 새로운 철학은 전통철학으로부터 형이상학을 소거한 잔여를 <과학의 논리>로 파악하여 이를 여전히 <철학>의 명칭 아래 두지만, <과학의 논리>는 <과학언어의 논리적 분석>으로서 <구문론>일 뿐, 과학과 별개의 독자적 탐구영역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 도대체 철학은 어떠한 사실영역에도 관여할 수 없고, 사실영역에 관계하면서도 과학이 아닌 것은, 또는 소위 비-경험적인 사실과학이라는 것은 비-적법적인 학문 곧 형이상학으로 낙인찍히고 말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과 과학의 관계는 결국 어떻게 규정되어야 할 것인가? {구문론}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과학논리의 문제를 탐구하기 원하는 사람은 특수과학 위에 군림하는 철학의 존엄한 권리 주장을 포기해야 하며, 과학 전문가와 꼭같은 분야에서 작업하되, 다만 다소 상이한 강조를 가지고 일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상이한 강조점이란] 철학자의 주의는 좀 더 논리적, 형식적, 구문론적 연관들에 지향된다는 점을 말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논리가 구문론이라는 우리의 논제는, 과학논리의 임무가 경험과학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그리고 경험과학의 경험적 결과를 고려하지 않은 채 수행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지 말아야 하겠다(LS 332)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 될 것은: "모든 철학의 정리들은, 과학언어 구문론의 주장(assertions) 또는 제안(proposals)으로 형식화될 때에만, 정확하고 논의가능한 형식을 획득한다"(LT, 61-L)는 카르납의 주장이다.
3. 알프레드 에어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에어의 견해를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논리실증론의 교과서가 된 {언어.진리.논리}의 서문에서 에어는, "내가 가장 근접하게 동의하는 철학자들은 비엔나 서클 구성원들이고…, 이들 가운데 내가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사람은 루돌프 카르납"이라고 공언하듯이, 이 책을 통해서 표명된 에어의 견해, 즉 철학의 기능과 철학명제의 성격에 관한 그의 견해는 지금까지 서술된 카르납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에 의하면, "철학자는 분석가로서 직접적으로 사물의 물리적 성질들에 관여할 수 없고, 다만 이들에 관해서 우리가 말하는 방식에만 관여할 수 있을 뿐이다."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실재인식, 소위 사변적 세계인식의 적법성을 철저하게 부정한 에어는 "철학의 기능은 전적으로 비판적"이라고 단언하고, 그렇다면 "철학의 비판적 활동은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가?"(48) 하고 묻는다. 철학적 비판은 말할 것도 없이 논리적 비판이며, 후자는 곧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하여 그 의미를 명료하게 하는 일이다. 이런 의미의 논리적 분석을 <철학적 분석>으로도 확인하거니와, 에어는 철학적 분석의 주업을 "정의 제공과 그 형식적 귀결의 연구"(57)로 규정한다. 여기서 정의는 <정의되어야 할 기호>(definiendum)를 그에 상응하는 동의어(synonym)로써 <정의하는 기호>(definiens)를 만들어 전자를 대체하는 사전적 정의, <명시적 정의>가 아니라, 철학적 의미를 가지는, 즉 기호나 기호적 표현의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나게 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실용적 정의>(definition in use)이다. "우리가 어떤 기호를 실용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 기호가 어떤 다른 기호와 동의적임을 지적함으로서가 아니라, 그 기호가 의미 있게 끼어 들어 있는 문장들을 어떻게 그 기호 자체나 그와 동의어를 포함하지 않으면서도 저 문장들과 同値的인 문장들로 번역될 수 있는가를 보임으로써, 실현된다"(60). 에어는 그 좋은 사례로 럿셀의 <규정적 기술 이론>( the theory of definite descriptions)을 들고 있거니와, Mill이나 Berkeley의 현상론적인 사물 정의 또는 <현상론>의 개념 정의도 이런 부류의 정의, 에어의 이른바 <철학적 정의>의 훌륭한 본보기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 개념과 연관하여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에어가 "의미를 언급하지 않고 문장들간의 동치 관계를 정의한다"(68)는 점이며, 이점에서 에어는 카르납의 {구문론}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더 나아가서, 에어가 <철학의 방법>(60)으로, 그리고 <철학적 분석의 과정>(68)으로, 철학적 정의를 문제삼는 것은, 게다가 <철학>의 정의를 <정의>의 철학으로 만드는 것도, 철학이 과학에 상당하는 "인식의 참된 지체"(a genuine branch of knowledge; 47), "인식의 특수 지체"(a special branch of knowledge; 51, 52)로서 자리매김하고, 따라서 철학의 결과에도 과학의 산물과 동등한 명제적 성격을 부여하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점에서도 에어는 카르납을 근접하게 뒤따르고 있다고 하겠다. 에어는 {언어.진리.논리}의 서문에서 철학이 과학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즉 과학과의 연관성에서 확인된 철학의 기능은 "과학 명제를 명료화하는 것이며, 이는 과학명제들 간의 논리적 관계를 드러내고, 과학명제들에 등장하는 기호들을 정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32)는 점을 명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장은 전편을 통한 논증을 거친 다음 결론에서 다시 재확인되어 있다(152). 외견상으로 물질적 사물의 명칭이나 경험적 사실의 기록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기호의 명칭이나 기호들의 관계에 불과한 카르납의 이른바 사이비 개념, 사이비 문장들을 구문론적으로 정의하고 동치적인 문장으로 번역·변형하여 그 논리적 구조를 명확히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상식과 과학 명제의 의미를 명료하게 해명하는 데 기여한다. 문장 내의 단어를 정의하는 것은 이를테면 일차적 정의요, 문장간의 논리적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은 이차적 정의, 카르납의 이른바 "구성적 정의"인 셈이다({구성}, 6). 이러한 정의는 명시적 정의, 사전적 정의, 의미론적 정의와는 종류를 달리하는 "특이한 종류의 정의"(59), 이를테면 <실용적 정의>(definition in use) 또는 제레미 벤담(J. Bentham)의 이른바 <맥락적 정의>(contextual definition)에 유비될 수 있는 철학적 정의이며, 이러한 정의의 산물이 바로 철학명제에 해당되는 것이다. 문제의 [서문](1936)에서 에어는 "철학의 명제들로 말하자면, 이들은 언어적으로 필연적인, 그래서 분석적인 명제로 간주된다"고 주장하고,
바꾸어 말하면, 철학의 명제들은 성격상 사실적이 아니라 언어적이다―즉 그들은 물리적 대상의, 혹은 심지어는 정신적 대상의 행태(behaviour)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정의들을, 또는 정의들의 형식적 귀결들을 표현한다(57)
고 변증한 다음, "철학의 명제들은 순전히 언어적 명제들"(152)이라고 결론적으로 확인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제2판 [서론]에서도 이점이 이렇게 강조되어 있다.
비엔나 학파의 실증론자들이 통상적으로 말해온 바에 따르면, 철학의 기능은 특수하게 만들어진 "철학적" 명제들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타의 명제들을 명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술은 적어도 철학이 사변적 진리의 출처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장점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명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지금의 나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참이든 거짓이든 간에, 이것과 같은 책에서 표현되어 있는 명제들은 특별한 범주에 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긍정되거나 혹은 부정되는 그러한 종류의 명제들인 만큼, 왜 이들이 명제라고 불리어져서는 안 되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어법에 관한 명제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으로 믿어지지만, 또한 부적절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확실히 어법에 관한 모든 진술이 철학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 편집자도 어법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려 애쓰지만, 철학자는…특정 표현의 사용이 아니라, 표현 집합(classes of expressions)의 사용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전자의 경우와 다르다; 사전 편집자의 명제는 경험적인 반면에, 철학적인 명제는, 만약 참이라면, 통상 분석적이다.
에어는 문제의 논리실증론 교과서가 럿셀과 비트겐슈타인의 교설로부터 유래한다고 그 모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양자의 철학관에 충실하게 철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언어비판에서 찾고 있다. 럿셀은 J. H. Muirhead가 편집한 {현대영국철학}(Contemporay Britisch Philosophy)에 기고한 [논리원자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이해하는 바 철학의 업무는 본질적으로 먼저 논리적 분석 후에 논리적 종합을 수행하는 일이다. 철학은, 어떠한 전문과학에 보다도 더, 상이한 과학들간의 관계들과 저들간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들에 관여한다. 철학은 포괄적이어야 하고, 그리고 과학이 아직은 확증하거나 반박할 위치에 있지 않는, 우주에 관한 가설을 시사하는 데 대담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항상 가설의 [자격]으로서 제시되어야지, (너무나 자주 있듯이) 종교교리 같은 불변하는 확실성으로서 제시되어서는 아니 된다. 더욱이나 포괄적인 구성이 비록 철학업무의 일부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되면서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될 소지가 있는 관념들(notions)을 비판하고 명료하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기에서 철학의 명제를 분석적 명제에 국한하지 않고, 과학의 경우와 같이 종합적 명제인 가설의 지위에 두는 점에서 에어는 럿셀과 견해를 달리하여 카르납에 동조하면서도, "철학의 기능은 전적으로 비판적이라"(48)고 선언할 정도로 비트겐슈타인과 럿셀의 입장에 동조한다. 그리하여 에어는 철학의 기능을 <정의 제공>(provision of definition)에서 찾으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철학을 분석에로 환원함은 그 기능을 '과학의 전제들'을 명료하게 함으로 간주하는 견해와 반드시 상충되는 것은 아니라"(25)고 양보하는 가하면, 심지어는 "철학의 업무가 진리발견보다 '퍼즐풀이'로 보는" 라일(Gilbert Ryle)의 견해에 동조하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철학의 기능이나 직무에 대한 에어의 애매한 입장은 {언어.진리.논리}의 결구에서 극명하게 표출되어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철학과 과학 사이에 첨예한 구분을 긋는 것은 실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과학의 사변적 측면과 논리적 측면을 구획짓고, 철학은 과학의 논리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이다. 환언하면, 우리는 가설들을 성안하는 활동을 이 가설들간의 논리 관계를 표명하고 가설들 안에 등장하는 기호들을 정의하는 활동으로부터 구별한다. 후자의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철학자로 부르든 또는 과학자로 부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철학자가 인간 인식의 성장에 대한 실질적 공헌을 하려면, 철학자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IV. 철학과 과학의 연속성: 노이라트와 콰인
철학의 기능에 관한 탐구를 수행하면서 에어가 모색해온 것은 철학의 정의를 成案하되, "통칭 철학자들의 실천과 어느 정도 부합하고, 동시에 철학이 특수 인식분야라는 통상적 가정과도 일관되는"(51), 그러한 정의를 내리는 일이었다. 그는 두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형이상학을 철학 영역으로부터 추방하고, 첫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영국 경험론을 전형으로 하여 철학사를 분석가의 관점에서 재조명함(51∼56)으로써, "판명한 인식분야에 대한 명칭으로서 '철학'이라는 용어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우리가 철학함의 활동으로 부르기를 유념한바 있는 활동에 대한 어떤 새로운 記述 고안"(52)을 거부하고, "'철학'이라는 단어의 보유가 오해 사기 쉽다는 비난에 맞서 우리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전통철학'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표준에 의하여 진정하게 철학적임을 주장해 왔다"(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어는 형이상학을 철학으로부터 배제하는 데는 성공했을는지 몰라도, 철학을 과학으로부터 판명하게 차별하는 데는 끝내 성공하지 못한 채, 결국에는 철학을 과학의 논리적 측면 또는 과학의 논리로 규정하는 데까지 후퇴함으로써, 과학으로부터 철학의 완전 독립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이점에서도 에어는 자신의 선구자 카르납을 따르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슐리크는 철학을 과학으로부터 엄격하게 구분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엄격하게 구분하기 때문에, 철학적 명제를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철학의 과학성도 부정한다. 철학은 형이상학으로부터 분리되는 동시에 과학으로부터도 분리되어, "과학 구조물에 토대와 정점을 제공함"으로써, "일체 과학적 인식의 알파와 오메가" 역할을 감당하는 특이한 지위를 가진다. 실로
일상생활의 진술을 포함하는 과학의 총체는 인식체계이다. 여기에 첨가될 하등의 "철학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은 진술의 체계가 아니다;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철학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여튼 과학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의미심장하고 대단한 그 무엇이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만학 [여러과학들]의 여왕으로 예우되어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학의 여왕 자신도 또 하나의 학문 [과학]이어야 한다는 것은 어디에도 명기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에 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에어와 카르납은 철학을 형이상학으로부터 엄밀하게 구별하면서도 그대로 과학 안에 귀속시키는 데는 여전히 주저하는 애매한 입장을 보인다. {구문론}의 결론(332)은: 철학과 과학이 정확하게 동일한 영역에 종사하면서도 다만 다소 강조점이 다를 뿐, 즉 철학의 주의는 논리적, 형식적, 구문론적 연관에 더 치중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고, {언어.진리.논리}의 결론(153)은: 과학이 사변적인 측면에 치중하는 반면에, 철학은 논리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는 것으로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아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표명하는 사람이 비엔나 서클의 급진파 오토 노이라트이다. 그는 마하, 포앙카레, 프레게, 비트겐슈타인의 과업 계승을 목표하는 "과학적 세계관 보급을 위한 비엔나 서클"을 "물리주의를 위한 비엔나 서클"로 표방하기를 제안하면서 이렇게 선언한다:
이 서클의 모든 대변자들은 다음 사실에 동의한다: 즉 "철학"은 과학에 比肩하고, 그 자신의 명제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리고 과학명제의 총체가 모든 유의미한 진술들의 총합을 망라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러한 입장 표명은 위에 언급된 에어와 카르납의 입장표명에 앞서 있었던 것인 만큼, 후자의 입장은 명백히 노이라트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이라트는
비엔나 서클의 어떤 대변자들은, 이 그룹의 모든 동료들과 같이, 하등의 특이하게 "철학적인 진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철학"이라는 단어를 때때로 사용하고 있다. 이 "철학"이라는 말로 그들이 의도하는 것은, 개념들을 명료화하는 조작으로서 "철학함"(Philoso- phieren)을 지칭하는 것이다. 전통적 언어사용에 대한 이러한 양보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이해할 수 있기는 하지만, 쉽사리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함"이란 표현에 대한 이의 제기는 단순하게 용어사용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개념 의미 명료화"는 "과학적 방법"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데, 전자도 이 과학적 방법에 속하는 것이라서, 양자는 불가분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라(283) 고 경고한다. 이러한 경고는, 방금 언급되었듯이, 그 후의 카르납과 에어의 입장표명을 예고하고 있는 셈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해명>, <해명성 잠정명제>와 같은 철학이념도 형이상학적 잔재라고 단호히 거부하고(284∼285, 208), 철두철미한 물리주의 일원론을 표방한다. 一言以蔽之하면, 통일과학이 있을 뿐 철학 같은 특이학문은 존재하지 않으며, 물리론적 통일언어가 있을 뿐 철학 명제 같은 것은 존립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노이라트는 [프로토콜 문장]에서 논리경험론자들에게 회자되는 그 유명한 <항해사 비유>를 들어 과학보수주의를 피력한다.
결론적으로-확립된-순수한 프로토콜 문장들을 과학의 출발점으로 삼을 방법은 없다. 지워진 書板(tabula rasa)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유컨대] 우리는 마치 항해사들이 그들의 선박을 公海에서 개축해야지, 결코 그것을 乾-독에서 해체한 후 최선의 재료들을 써서 재건축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처지에 있다. 오직 형이상학적 요소들만이 흔적 없이 사라지게 내버려둬질 수 있을 뿐이다. 모호한 언어 集塊들은 항상 이런 저런 방식으로 선박 구성물로 잔류하게 마련이다. 모호성이 한 지점에서 감소되면, 다른 지점에서 증가되기 십상일 것이다.
이 비유가 함의하는 寓意(morals)는 간단하다: 첫째, 형이상학적 언어를 제외한 여하한 언어도 언어체계로부터 흔적 없이 사라지도록 처리할 수 없고, 언제나 어느 정도의 모호성이 체계의 어느 지점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프로토콜 문장을 포함하는 일체의 유의미한 문장은 개변과 검증에 종속된다는 것 ["여하한 문장도 <접촉금지>(the noli me tangere)의 특전을 향유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언어는 그 자체로 상호-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콰인은 노이라트의 철저한 물리론을 계승하여 카르납의 현상론적 잔재를 말끔하게 청산해 버린 사람이다. 그는 개념도식(conceptual schemes), 이론구축(theory building), 언어구조의 문제와 연관하여 자신의 물리주의, 자연주의 견해를 피력할 때 자주 이 노이라트 비유(Neurath figure)를 인용하곤 한다. 상징적으로는, 그의 대표작 {단어와 대상}의 題辭(epigraph)로 인용된 독일어 원문을 들 수 있다. 콰인은 카르납의 현상론을 거부하는 노이라트의 견해를 지지할 뿐 아니라, 후자를 포함한 논리경험론자들의 철학방법론인 <논리적 분석>이라는 개념 자체도 부정한다: 언어·이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순수 직접적인 경험 언어나 원시적 원초적 언어의 이념이나, 역으로 사실문제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순수언어, 순수논리, 언어분석같은 이념도 한갓 환상이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언어와 실재, 약정과 사실, 분석과 종합, 선천성과 후천성, 논리적 진리와 사실적 진리의 엄격한 구분이 모호해지면, 논리경험론은 그 근저에서 해체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형이상학의 소거를 통하여 정체 확립된 철학의 개념도, 그리고 <형이상학 없는 철학>과 <경험과학>의 구분도 사라진다. 카르납이 철학적·형이상학적 질문을 개념·이론·체계 구도설정의 문제, 외재적 질문으로 지칭하고, 이를 체계내적 문제인 내재적 질문에 대비시켰으나, 콰인에 의하면
우리가 어떤 존재론을 수용하는 것은…우리가 어떤 과학이론을 수용하는 것과 원리적으로 유사하다. […] 어떤 과학이론 체계의 채택이 언어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정도로, 더도 말고 바로 그 정도를 존재론 채택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 이러한 견지에서는 존재론적 문제가 자연과학의 문제와 마찬가지이다. […] 자연과학 내에서, 관찰보고 진술들에서부터 이를테면 양자이론이나 상대성이론의 기본 특징들을 반성하는 진술들에 이르기까지, 정도차이의 연속성이 존재한다. […] 존재론의 진술들이나 또는 심지어 수학·논리학의 진술들도 이러한 연속성의 계속이다. […] 여기서 차이는 정도의 차이지 종류의 차이는 아니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과학은 하나의 통일적인 구조이며, 원리적으로 그것은 하나의 전체로서 구조이다.
콰인에게는 철학과 과학 사이에 하등의 본질적인 구별이 없을 뿐만 아니라, 논리학, 수학, 자연-인문-사회과학 사이에도 다만 정도의 차이가 확인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퍼트남은 노이라트의 선박비유를 논평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의 상황에 대한 나의 상징은 유명한 노이라트의 상징, 즉 과학을 공해상에 떠 있는 채로 배를 개축하는 기획에 비유한 상징이 아니라, 그것을 변경한 것이다. 나는 노이라트의 상징을 두 가지 방식으로 변경하겠다. 우선 나는 단지 '과학'만이 아니라, 윤리학, 철학, 사실상 전체 문화를 선박 안에 넣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의 모든 부분은 상호의존적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둘째로, 나의 상징은 단 한 척의 선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일개 함대의 선박들에 관한 것이다. 각 선박에 있는 사람들은, 노이라트의 상징에서처럼, 배가 침몰할 정도로 단번에 그 배를 개변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배들을 개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보급품과 도구들을 한 배로부터 다른 배로 전달하면서 서로에게 충고와 격려(또는 낙담)를 보낸다. 끝으로, 사람들은 가끔 그들이 타고 있는 배를 좋아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전혀 다른 배로 옮겨간다. (그리고 때로는 보트가 침몰하거나 또는 내버려진다.) 모두가 조금은 혼란스럽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개 함대이기에, 누구도 모든 다른 배들로부터 통신거리 밖으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결코 없다. 요컨대, 집단책임과 개별책임이 다함께 건재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이상을 희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저 옛날의 만족 모르는 절대자 동경이 아니겠는가?
기실, 콰인은 퍼트남의 이러한 노이라트 비유의 확대해석을 수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멀리 나아가고 있음을 본다. 경험론이 환원주의와 논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사변적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의 경계가 흐려지고, 실용주의에로의 전향이 야기되어"(LPV, 20), "철학자와 과학자가 同舟"(WO, 3)일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자와 과학자도 同舟 身世가 된다. 저 노이라트 비유에 상응하는 콰인의 인식론적 비유 <직물 비유>나, <세력장 비유>가 말해 주듯이, 모든 이론·체계는 우리가 최초 감각경험을 다루는 데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날조해낸(fabricated) 織物(fabric)에 불과하고, 체계구축에 동원된 모든 언어재료는 편의 위주로 채택된 가정체에 다름 아니다. "대-소 물리적 대상만이 가정체가 아니라, 힘, […] 추상체들도 가정체들이다. 이들은 인식론적으로 물리 대상들과 신들과 동일한 지위상의 신화들이다"(LPV, 45). 이러한 이론들은 사회·역사적으로 전승되는 것이며,
우리 선조들의 지식은 문장으로 짜여진 하나의 천이다. 다소간은 우리 자신들의 인위적이고 고의적인 개량이나 보탬을 통해서이기도 하고, 다소간은 우리 감관의 계속적인 자극에 의해서 직접 생긴 것도 있겠지만, 우리 손에서 그 천은 발전되고 변경된다. 그것은 사실로 검어지고 약정으로 희게 된 창백한 회색 빛 지식이다. 그러나 나는 그 천 안에 어디에도 온통 검정 올들이나 혹은 온통 흰 올들이 있다고 결론 내릴 만한 하등의 내실 있는 이유도 발견하지 못했었다(WP, 125).
콰인의 인식론은 진화론적·실용론적·자연론적이다. 퍼트남이 말하듯이, 집단책임과 개인책임의 공조 이상을 요구한다면, 그러한 인식 기도는 전시대의 유산인 절대론적 동경, 인식론적 유토피아니즘에 다름 아니겠다. "각인은 과학적 유산과 함께 [개인의] 계속적인 감각 자극을 부여받고 있으며, 이 양자를 조율하는 데 각자를 인도하는 고려사항들은 합리적인 경우에 실용적이다"(LPV, 46).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의식-사회-언어(의미)를 변증법적 관계로 보는 자연론적 입장이기도 하다. 게다가, 콰인은 과학·이론·체계를 극히 미미한 경험과 편의 위주의 가정을 토대로 구축된 신화·허구로 이해하며, 이러한 합리적 구성활동을 사변·반성·추측·상상·관조·그림 등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전형적인 典據가 The Roots of Reference이다. 이 강의에 부친 굳먼(Nelson Goodman)의 간결한 서론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指示의 뿌리를 찾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충분히 지저분한 것으로 주지되어 있는 지시의 경우보다, 일층 더 지저분한 작업임에 틀림 없음에도," 콰인은 저러한 사변적 방법을 통해서 지시의 정체를 드러내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다. "사변적 심리학"(LPV, 74), "사변적 신경학"(WO, 79)을 거명한 바 있는 그는 이제 "심리발생적 사변"(RR, 92), "발생적 사변"(110), "인과적 사변"(138)을 통하여, 아동 학습과정, 지시발생, 집합이론의 언어학적 기원, 언어학습의 인과연쇄 등등의 문제들을 성찰하려 한다. 이와 같은 사변적 탐구는 명백히 철학적 성찰이며, 동시에 통일과학의 일부이다.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포괄적인 세계체계를 모색하며"(TT, 9), "철학은 자기 훈련된 자연과학"(85)이고, "인식론은 자신에게 적용된 과학일 뿐"이다. 자연과학의 일부가 된 인식론, "자연화된 인식론"은 과학의 이론이며, 과학의 철학적 성찰이고, "존재론의 방법론"(TT, 21)이다. 과학적 가설을 성안하거나, 과학이론의 기본특징을 성찰할 때(WP, 134) 동원되는 합리적인 추측에서 합리적 재구성이 끼어 들게 되는 바, 과학의 이러한 측면을 강조적으로 표현하여 철학적 성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과학 자체의 일부이다." "개인과 종족이 외부 세계에 관한 책임 있는 이론을 실행적으로 취득하는 일"(SS, 16)은 모두가 합리적 구성에 의존하며, "우리의 바로 그 인식론적 기획, 인식론을 자신의 한 장으로 내포하는 심리학, 그리고 심리학을 그 구성적 一篇으로 포함하는 전체 자연과학, 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구성이거나 또는 자극으로부터의 투사이다"(TT, 21). 카르납이 의미론·존재론·경험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대립하는 콰인의 입장을 주석 하듯이, 만일 "논리적 진리와 사실적 진리, 의미의 문제와 사실의 문제, 언어 구조의 수용과 그 언어로 성안된 어떤 주장의 수용간에 하등의 첨예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LT, 79, note 5)면, 게다가 사실과 약정, 실재와 허구, 허구와 과학, 내용과 형식, 내재와 초월, 사실과 언어,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관찰문장과 이론문장 사이를 구분할 하등의 <사실문제>(matter of fact) 또는 <문제 사실>(fact of matter)도 확인할 수 없다면, 그리하여 사변적 형이상학과 자연과학간에 경계선이 흐려지고, 따라서 논리학·수학·과학·인식론·철학·존재론이 동일한 자연·경험과학의 계속적·진화적인 하나의 연속체(continuum )라면, 그리고 도대체 "가정과 사변 외에 우리가 가질 것은 현재 감각-소여(present sense data)와 과거 감각-소여에 대한 현재 기억뿐일 것"(WO, 3)이라면, 이러한 언어·이론 내재론자, 의미론적 물리론자, 언어적 관념론자, 준-허구적 철학자를 어떤 의미에서 논리경험론자로 거론할 수 있다는 말인가? 퍼트남이 이 문제성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콰인은 분석적-종합적 구분을 거부하고, 그리고 철학을 순수 논리에 보다는 자연과학에 비김으로써 자주 논리실증론을 파괴해 버린 사람으로 생각되어지곤 한다. 그리고 실로 젊은 "과학적 실재론자" 철학자들의 한 세대가 그에게 영향을 받아 논리실증론을 철저하게 탄핵해 왔다.
그러면서도 퍼트남은 곧 이어서 "그러나 이들 시론들을 읽으면서 나는 콰인이 그 운동[논리실증론]을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마지막 위대한 논리실증론자로 분류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 근거로 그가 제시한 것은 주로 콰인의 현대논리학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그의 실증론적 세계상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콰인의 카르납에 대한 친숙성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카르납과 콰인의 철학적 친숙성과 차이성이 가장 대조적으로 표현된 곳은 존재론에 관한 것으로서, 전자의 [경험론·의미론·존재론](1950)과 이에 대한 반론인 후자의 [존재론에 관한 카르납의 견해](1951)라는 두 논문일 것이다. 콰인은 카르납의 존재론 이해를 비판하는 이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도 카르납 이상으로 나의 철학사상에 영향을 끼쳐온 사람은 없지만, 존재론과 분석성의 문제를 둘러싼 하나의 논점이 우리 사이에 수년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다. 이들 문제들은 상호 관계된 것이며, 그 상호관계들이 특히 분명하게 노출된 장소가 카르납의 논문 [경험론·의미론·존재론]이다(WP, 126).
이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후 콰인은 그의 이른바 경험론의 최후 단계에 해당된다는 자연주의를 표방하면서, 그의 최후 입장을 카르납의 <합리적 재구성>에 빗대어, <카르납 현상론의 물리론적 유비>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방침과 목표에 있어서 이처럼 급격한 전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카르납의 {구성}이 제시한 현상론적 기본원리(groundwork)를 우리의 새로운 방향 설정(setting)에서 모방할 수 있다. 그의 토대 요소들은 그의 요소 경험들이다; 각개 요소 경험은 주체가 일정 순간 또는 가상적 현재 중에 수용하는 전체적 감각 경험이다. 우리는 무엇을 [현상적 경험에 대한] 물리적 유사물로 취할 수 있는가? 단순하게, 그것은 그 순간에 격발된 모든 감각적 수용체들의 집합이다; 혹은, 더 잘 표현하여, 그 가상적 현재 중에 격발된 수용체들이 시간적으로 배열된 집합이다. 그 입력은 두뇌 속에서 처리되지만, 그러나 하나의 꾸며지지 않은 입력을 다른 입력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바로 무슨 수용체들이 격발되었고, 그리고 어떤 식으로 배열되었는가이다. 여기에 한 순간의 전체-감각-경험(the global sensory experience)의 적합한 물리적 상관자가 있다. 나는 그것을 하나의 전체 자극(global stimulus)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전체 자극들―수용체들의 배열된 수신장치들(ordered sets of receptors)―이 내가 카르납의 요소경험들의 물리적 유사체로서 제안하는 것들이다(SS, 16f).
바로 이러한 유사성에서 퍼트남은 콰인을 "마지막 위대한 논리경험론자"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 같다. 슐리크가 "현실성과 인식의 확고부동한 접착점"을 "확증"(Konstatierungen) 또는 "관찰명제"(Beobachtungss tze)로(1934), 노이라트는 관찰기록문장을 오류-가능하고 검증-필수적인 프로토콜 문장으로(1932/33), 에어는 "참된 사실적 명제의 징표"(the mark of a genuine factual propositions)를 "경험 명제"(an experiential proposition)로(1936), 그리고 카르납이 세계구성의 기초요소로서 요소경험 즉 "단위들로서 자아의 경험들"을 분석불가능하고 원시적이며 총체적인 주관적 경험으로 이해한 것을, 이제 콰인은 관찰명제로 이해한다. "외계로부터 직접적인 입력은 오히려 우리의 감각 수용체들의 격발"(PT, 2)이라 할 것이고, 이제 관찰이라는 것은 자극 예측으로 대체될 수 있는 바, "<주어진 경우에 한 주체에 의해서 겪게 된 자극>을 나는 다름 아닌 <바로 그 경우에 격발된 그의 외계 수용체들이 시간적으로 배열된 전체 수신 장치>로 이해한다"(같은 곳). 그리고 낡은 <관찰> 개념 대신에 이제 "의미론적 상승" 또는 "언어적 전회"의 형식으로 <관찰 문장> 개념을 사용하여 과학이론구축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콰인은 관찰문장에 관해서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개념규정을 시도하고 있지만, 최근의 입장을 다음 인용문에서 보자:
우리는 과학의 증거에 의한 지지를 검토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 증거는, 명칭이야 어떠하든, 이제 자극의 과학 이론에 대한 관계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이론은 문장들로 구성되거나 또는 문장들 안에 깃들인다; 그리고 논리가 문장들을 문장들에 연결한다. 그렇다면 저들 연결고리들(connecting chains)에서 최초의 고리들(initial links)로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자극들과 직접적이고도 확고하게 연합되어 있는 어떤 문장들이다. 각개 문장들은 자신의 자극들의 어떤 범위와는 긍정적으로 연합되어야하고 어떤 범위의 자극과는 부정적으로 연합되어야 한다. 그 문장은, 그 주체가 적정 범위의 자극을 맞이하여서는 더 이상의 조사 없이, 그리고 그때에 그가 무엇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그의 동의나 이의를 즉각 얻어내야 한다. 하나 더 요구되는 것은 상호주관성이다: 어떤 감정 보고와는 다르게, 그 문장은 그 경우를 목도한 모든 言語-適格的 증인들로부터 동일한 판결을 얻어내야 한다. 나는 그러한 문장들을 관찰문장이라 부른다(PT, 2∼3).
실로 콰인에게 있어서 관찰문장은 언어와 인식의 모든 것이다. 우선 관찰 문장은 언어의 원시 또는 원시언어이다:
내가 관찰문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는, 새들의 부름과 원숭이의 울음의 인간적 대조물이다. […] 우리의 관찰문장들은 저들 前人間的인 言語先驅의 인간적인 對照物일 뿐 아니라 언어의 발단이기도하다. 그들은 비단 前歷史的으로 뿐 아니라…, 또한 현재적으로도 각개 신생 아동을 언어 공동체에 신규 회원 모집하는 일과도 병행하는 의미에서도 언어의 발단이다. 그들은 아동이 認識的 언어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쐐기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관찰문장들은 선행하는 언어의 도움 없이도 전체 자극들에 조건지어질 수 있는 표현들이기 때문이다(SS, 22∼23).
게다가 관찰문장은 통상 "한 단어 길이로 된 최초의 平敍文"(PT, 39)이기 때문에(예컨대, "개"), 설사 거기에 修飾語가 첨가되든(예컨대, "검은 개"), 또는 敍述語가 첨가되든(예컨대, "개는 검다"), 敍述(predication)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관찰문장에 포함되어 있는 "名辭들은 아직은 외연을 나타내는(denoting) 것으로 인지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원시적인 문법적 구성(primitive grammatical construction)을 관찰 서술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서술이 진화하여 성숙한 서술로 발전할 것을 예기할 수 있다"(SS, 24). 이리하여 관찰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곧 언어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이며(WB, 23, 28), 관찰문장이 의미 학습의 토대가 된다는 의미에서, "관찰문장은 의미론의 礎石이다"(OR, 89). 관찰문장은 감각소여가 아니라 물리적 대상, 특히 물체에 관한 보고이기 때문에, "관찰문장 전체와 적정 자극패턴의 연합을 지시에 의해서 학습하는 것은 물리적 이론 학습을 향한 최초의 필요 불가결한 단계이다"(WB, 26). 그 이상의 고차적 물리이론들은 오직 관찰문장을 기초로 하여 합리적으로 구성된 인간적 고안물에 불과하고, 오직 그 바닥에서, 그 언저리에서, 그 발단에서 감각경험과 마주칠 수 있을 뿐이다. "체계의 가장자리는 경험과 일치되어야하지만, 나머지는, 그 모든 상세한 신화들이나 또는 허구들과 함께, 법칙들의 단순성을 그 목표로 삼을 뿐이다"(LPV, 45). 이리하여, 관찰문장은 "과학적 가설들의 상호주관적인 법정"(OR, 87)이자, "과학적 가설들에 대한 증거의 저장고"(88)이며, "감각적 증거의 법정"(89)이라는 인식론적 지위를 확보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땅히 제기되어야할 문제는: 과연 콰인의 관찰문장은 슐리크의 관찰문장, 카르납의 요소경험 및 에어의 관찰명제처럼 전-언어적, 전-서술적, 전-이론적인 <직접소여의 직접경험>, "착오일 수 없는"(infallible), 그리고 "교정함이 무의미한"(incorrigible) 절대 확실한 인식토대(das Fundament der Erkenntnis)로 간주되어야 할 성질의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그리고 만약 이 물음이 긍정적으로 대답된다면, 콰인의 그 유명한 <지시.이론.번역의 상대성> 이론은 이 문제와 연관하여 도대체 어떻게 이해되어야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사실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지금까지 개진한 콰인의 관찰문장 개념에 이미 함의되어 있다. 예컨대, "고양이"라는 관찰문장이 그러하듯이, "관찰문장이 통상 한 단어 길이"(PT, 39)라는 개념에는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는 [관찰문장도] 가능적인 景觀의 일정 범위와의 聯合中에 있는 하나의 단일한 일련의 음절로서 直示的으로 학습될 수 있다"(WB, 25f)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관찰문장을 구성하는 名辭들(terms)을 각개의 외연에 관계함이 없이 전체를 단일한 외연을 지시하는 것으로 단번에 이해하는 방식을 콰인은 <一語文的> 또는 <全文的>(holophrastic)이라는 術語를 사용하여, 이를 名辭들을 일일이 그 외연에 따라 이해하는 <분석적>(analytic) 또는 <회고적>(retrospective)에 대비하여 사용한다. 그 典據로 몇 구절 인용해보기로 하겠다.
<이론을 감각자극에 관계시키는 문제>가 이제는 덜 꺼림칙하게 <理論 成案을 관찰문장에 관계시키는 문제>로 설명될 수 있겠다. 이 문제에서, 우리가 관찰문장을 理論-束縛的(theory-laden)인 것으로 인식하는 데서, 우리는 한발 앞서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관찰문장들 안에 자리하고 있는 名辭들이 이론 성안들 안에 다시 등장한다는 것이다. 어떤 문장이 관찰적인 것으로 자격 부여되는 것은, 그러한 명사들의 결여가 아니라,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전체로서 간주된 문장이, 동일한 전체 감각 자극이 반복될 경우, 일관되게 동의나 또는 이의를 구사한다는 단지 그 뿐이다. 반면에, 관찰문장을 이론에 관계시키는 것은 [문장 안에] 자리잡고 있는 명사들을 공유함이다(TT, 25∼26).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문장의 이론-속박적임이나 理論-獨立的임(theory-free)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의 정의는 관찰문장들을 이론-독립성에 상관없이, 특수 공동체들에 상대적이거나 또는 일반 공동체에 상대적이거나, 다른 문장들로부터 구별짓는다. 이제야 우리가 알게될 것이지만, 관찰문장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심지어는 가장 원시적인 것들까지도, 이론-속박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어떠한 관찰문장들도, 심지어는 가장 전문적인 것들까지도, 이론-속박적이 아니다. […] 자극적 상황에 조건지어진 것으로서 全文的으로 간주되면, 그 문장은 이론-독립적이고; 단어별로 분석적이게 간주되면, 그것은 이론-속박적이다. 관찰문장들이 증거와 시험을 제공하면서 도대체 과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한에서, 원시적인(pristine) 全文的 이론-독립성과 함께 回顧的인 이론-속박성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관찰문장들의 관찰성을 회고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퍼쓰(Firth)의 이른바 개념적 逆投射(retrojection)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전문화된 과학 공동체들의 관찰문장들을 포함하여 보다 더 기교적인 관찰문장들은, 심지어 직접 조건화에 의해서 보다는 오히려 조합에 의해서 학습된 것들일지라도, 비슷하게 양면적이다. 그들을 관찰문장으로 자격 부여하는 것은 여전히 그들이 고정된 감각자극 범위와 全文的으로 연합되어 있음이다. 그 연합이 어떻게 획득될지라도 말이다. … 비록 단어별로 회고적이게 간주되면 동일한 문장들이 이론-속박적일지라도, 전문적으로는 여전히 이론-독립적으로 기능한다(PT, 7∼8). 관찰문장들은 증거의 관점으로부터는 全文的이게 취급되고…, 그리고 이론의 회고적 관점으로부터는 단어별로 분석적이게 취급된다(PT, 26). 문장을 하나의 봉합 없는 전체로 全文的이게 취함과 그것을 名辭別로 분석적이게 취함 사이의 차이는 … 번역에 결정적이다. 분석적이게 취하면, 번역 불확정성은 사소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다(PT, 50).
이상에서 우리는 다소 긴 인용문을 통해서 관찰문장의 이론-속박-독립성의 문제 및 언어-상대성의 문제를 텍스트 자신이 드러내게 하였다. 이제 남은 문제는 관찰문장에 대하여 오류가능성·교정가능성 문제를 의미 있게 거론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콰인 자신의 말을 통해서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 관찰문장들의 오류 불가능성(infallibility)에 관한 철학적 교설은 우리의 해석(version) 아래서도 유지된다. 왜냐하면 [문장들과 이들] 문장들을 평가하는 수단인 경험과의 연결들이 잡다하고 간접적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상충하는 방식으로 이론에 의해서 매개되는 오직 그러한 정도에서, 관찰문장에도 오류와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문장에 대한 판정이 현재 자극에 직접 조율되어 있는 한에서는 하등의 오류 여지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 면역성(immunity)은, 관찰성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정도의 문제이다.) (WO, 44). 관찰문장들은 오류 불가능한가? 만일 우리가 부정직하게 제시된 것들과 언어를 채 학습하지 못한 화자들에 의하여 발언된 것들을 제쳐놓는다면, 거의 그러하다. 그러한 문장들에서, 알아볼 수 있는 어떠한 오류 가능성을 가정하는 것은 말들의 의미 자체를 곡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들 자체가 이들을 발언하는 관찰 가능한 상황과 관찰문장들과의 연합을 통하여 획득되기 때문이다(WB, 29). 관찰문장들은, 협의로 해석하면, 비교적으로 실패 여지없는 것(foolproof)이다. 그것이 바로 이들을 과학의 법정으로 만드는 것이다(WB, 51).
퍼트남이 지적하듯이, 관찰문장의 인식론적으로-특전적인 지위에 관한 콰인의 이와 같은 집념은 "어떤 수준의 토대제공적 '사실'을 발견하려고 안간힘을 쓰려는 엄청난 의지를 증언한다"(RHF, 276). 퍼트남은 콰인의 이러한 집념을 자신의 <논리경험론 해체>로부터 벗어나려는 "퇴행적 몸짓"(retrograde motion)으로 평가한다.
V. 결어
이상에서 우리는 논리경험론의 철학개념을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서 정리해 보았다. 논리경험론은 우선, 경험과학을 초월하는 또 하나의 실재이론을 자처하는 전통 형이상학의 명제들이 과학의 논리를, 명제의 형성 및 그 변형에 관한 구문 규칙에 위배되는, 즉 사이비 개념들이 논리 구문론에 위배되게 구성된, 사이비 명제들임을 논증하는 방식으로 형이상학의 불가능성·불법성을 證示함으로써, 형이상학을 철학으로부터 완전하게 소거하는 데 일치된 전략을 구사한다. 그러나 전통철학에서 초월적 형이상학을 소거한 후 그 잔여부분에 대한 이해에는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인다. 슐리크는 그 잔여부분을 획기적인 철학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이해하고,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 충실하게 새로운 철학을 진리발견으로서가 아니라 언어비판을 통한 "의미부여 활동"으로서 자리 매김 한다: 과학은 명제를 산출하지만 철학은 다만 산출된 명제의 의미를 명료하게 할뿐이라는 주장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카르납과 에어는 과학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하여 철학 고유의 명제를 성안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철학의 독자적 직능을, 비록 전체과학 범위 내에서이기는 하지만, 인정하는 쪽으로 기운다. 이 두 사람의 현상론적 인식론을 단호하게 배격하고 극단적 물리론을 제창하는 노이라트는 <철학>이라는 용어 자체를 파기하여 철학을 통일과학 이념 안에 남김없이 포섭해 버린다. 노이라트의 물리론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카르납식 현상론을 자기식 물리론으로 개변한 콰인은, 그의 이른바 "독단 없는 경험론", 경험론의 최후 국면인 자연주의 경험론, 슐리크식으로 말하면, 진정하게 "일관된 경험론"을 제창하면서, 철학과 과학을 상호 포괄적인 동일한 학문의 두 측면으로 파악한다: 이론의 개념도식, 개념구도, 기본특징, 존재론적 개입과 같은 보다 보편적·포괄적·논리적인 성찰과 사변을 구태여 강조하여 <철학적>인 활동으로 부를 수 있지만, 이것 역시 과학 내에서 일어나는 과학 활동의 한 측면이외 별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분은 다만 단순성·보수성·설명력·예측력과 같은 "가설의 덕목"(The virtues of hypotheses: WB, 66, 68f, 73, 79, 97f)을 고려하여 실용성 위주로 결정되어야 할 임시방편적 구분에 불과하다: 양자간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이지 결코 종류의 차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경험론자 들간의 이와 같은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를 여전히 논리적 경험론으로 통칭할 수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현대 논리학과 자연과학을 학문의 전형으로 신봉하고, 고전적 영국 경험론의 공통된 신조, 즉 <경험>을 학문의 최초 통로이자 최종 법정이라는 신조를 충실하게 신봉하는 <경험론자>들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 용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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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and Philosophy : the Logical Empiricist Concept of Philosophy
- Shin, Oh-Hyun -
The aim of the present essay is to make an accurate presentation of the logical empiricist conceptions of philosophy in light of its relation to science, fashioned by the major philosophers of the Vienna Circle, notably by Moritz Schlick, Rudolf Carnap, Otto Neurath and Alfred Ayer, including Williard Quine who can be said to have inherited, deconstructed and ended the logical positivism, after all: the emphasis is to be given to the accuracy of the presentation of their positions without any viable interpretation and criticism. Despite a wide variety of their philosophical doctrines, they share, more or less, the following tenets: the rejection of metaphysics, the verification theory of meaning, the view of philosophy as logical analysis of language and a high regard for empirical science and modern mathematical logic. Their philosophy can be characterized as logical and scientific, putting together as logical empiricism: what they call "scientific philosophy" constitutes one continuum of "the logic of science," "the philosophy of science," "the theory of science" et cetera with a sort of family resemblance in Wittgenstein's term. For them philosophy is regarded both as an activity of logico-linguistic analysis of science and common sense and as a discipline working within the domain of science and on the foundation of sciences. To parody Kant, Ayer says that "if science may be to be blind without philosophy, it is true also that philosophy is virtually empty without science." It is shown in the essay that though science and philosophy are in the same boat our logical empiricists defend slightly different versions regarding the nature of philosophy and its relation to science in their own ways. To borrow terminologies favoured by the philosophers of mind in reference to the problem of mind- body relation, Schlick argues for a methodological dualism of science and philosophy: "philosophy is not a system of statement; it is not a science." Carnap and Ayer defend a sort of double aspects theory: science and philosophy are two aspects of one unified science in its comprehensive sense with a different emphasis. And thus they claim, with Russell and against Schlick, that there are philosophical propositions. A radical physicalist, Neurath, however, denies philosophy any claim to a discipline, a proposition and a truth, proposing that the term "philosophy" should be eliminated once and for all: if there is such a thing as philosophy, it is to be absorbed altogether within a scientific conception of the world. Above all, Quine enjoys a most tolerant and comprehensive conception of philosophy and science: for him mathematics, logic, ontology, natural and social science are all on a par with one another, forming one strand of the fabric of science," a unified structure as a whole with a continuum of gradations: if there are differences among them, they are differences only in degree and not in kind. Philosophy is contained in science and vice ver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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