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반 퍼슨의 '문화전략'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적 감상(신상형)

나뭇잎숨결 2015. 1. 2. 10:32

 

 

 

문화의 모형에 대한 고찰*
― 반 퍼슨의 '문화전략'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적 감상

신 상 형**안동대 동양철학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분분할 수 있다. 그러나 종래의 문화 이해가 주로 물질적·구체적 대상에 무게를 둔 것이라면, 이것으로 현대 사회의 문화를 설명하는 데는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현대 사회는 너무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면모를 지니고 있고, 최근에는 그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져 기존의 단어들도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화란 어떤 물질문명을 지칭하기보다는 인간의 활동을 중심으로 논의된 것이라는데 착안, 소프트웨어 개념을 통해 접근해 보려는 '새로운' 시도가 코르넬리우스 반 퍼슨 교수에 의해 기획되었다. 그는 문화란 본디 삶을 살아나가기 위한 "전략"이라고 명명하면서 인간 활동이 이 전략에 따라 얼마든지 개량 가능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다름 아닌 이 전략에 의해 발전의 단계를 거쳐왔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신화적 사고, 존재론적 사고, 기능적 사고의 3단계의 발전 틀을 소개한다.
이 단계들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힘의 관계에 의해 각각으로 나눠지는 특징을 갖는다. 소위 힘의 무게가 자연에서 인간에게로 옮기는 과정을 발전이라고 명명한다. 물론, 이 단계가 모든 나라나 시대에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반 퍼슨의 얘기는 옳다. 그러나 문화 개념 정의를 좀더 완벽하게 보완되지 않는 한 그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그의 한계는 그의 문화 정의의 자기 모순적 언술로부터 비롯된다. 문화의 다양성과 독자성을 얘기하면서 전략과 발전을 얘기하고, 그 단계를 중층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다분히 하드웨어적 발상이다. 따라서 문화는 더 부드럽고도 다양하며 자유로운 틀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관념을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철학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주고, 사태를 설명이 아니라 기술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문화에 적용할 때, 문화의 특성이 그대로 그 진면목을 드러내 보인다. 주어진 것, (자체) 규칙 따르기, 불변의 삶의 양식 등의 모습을 띤다. 달리 표현하면, 전략으로서의 문화는 설명이고, 그것은 또한 자연스런 삶의 모습이 아니라 이념으로서의 어떤 사태가 되며, 규칙보다는 이념적 요청을 따라가는 그 무엇이 되므로, 제대로 된 문화관이 아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따른 문화 설명은 반 퍼슨의 문화관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 주요어 : 문화, 모형, 전략, 삶의 양식, 규칙따르기, 가족유사성
들어가면서

문화를 말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정작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탐구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저술들은 문화 특징의 일부를 말하거나 문화의 특정 현상을 주 대상으로 삼아 논의를 끌어가므로 독자들은 기껏해야 문화에 대한 단편적 시각을 갖게 되거나, 도리어 문화의 올바른 이해를 방해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최근 문화의 심층적 이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고, 문화 관련 철학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본 논문은 문화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가지고 문화전반을 아우르는 관찰을 통해 총체적 문화 이해를 시도하는 철학자 코르넬리스 반 퍼슨의 문화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는 문화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 주는 탁월한 저서에서 예술, 종교, 박물관, 학교 따위의 하드웨어 대치 차원에서 설명하던 기존의 문화 개념을 '흐름'이라는 소프트웨어로서의 새로운 개념으로 바꾸어 내놓는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하는데는 다양하고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인들의 문화적 경향성을 담아내려는 그의 노력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의 이 창의적인 시도는 문화의 설명을 다 담아내기에는 아직 성긴 모습을 띠고 있다. 여기에서 필자는 문화 모형의 이론적 배경이 되는 그의 저서 『문화』의 전반부 1, 2, 3, 4장을 분석하여 개념 사용의 부정확으로 그의 기획이 성공치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이를 해소키 위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자기의 후기 저술을 통해 모든 인간의 삶의 현상을 '말놀이' 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데, 필자는 이런 말놀이야말로 급변하는 현대 문화의 흐름을 정확하게 아우르고 기술할 수 있는 방식이자, 반 퍼슨의 약점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시론적으로 서술하려고 한다. 서술 방식은 문화에 대한 반 퍼슨의 두 토대를 검토하고, 이에 대비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기능 개념을 그 대안적 방법론으로 제시한 다음, 반 퍼슨의 세 가지 사고를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비트겐슈타인적 입장에서 반 퍼슨의 약점을 극복할 대안적 문화 개념들을 제공하는 순서를 밟을 것이다. 우선 반 퍼슨의 문화의 기본 개념들을 살펴보자.
Ⅰ. 문화, 문화의 모형, 문화의 전략

넓은 의미에서, "문화는 인간 활동의 결과이다." 따라서 인간 활동에 관한 수많은 언급들이 곧 문화에 대한 서술일 텐데도 반 퍼슨이 제시하는 이 책의 기록 이유는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 많은 저술들은 한 가지로 현대의 '급변하는' 인간 활동을 죄다 담을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가 담아내는 '급변'의 내용, 즉 문화의 본질 이해에 일어난 두 변화는 의외로 간단 명료하다. 그 하나는 '문화'라는 개념이 '원시'와 대비되어 <문명> 앞에 쓰이던 데서 벗어나 민족의 삶 자체가 곧 문화라는, 문화 개념의 확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문화'가 명사적 의미에서 동사적 의미로 더 역동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현대에는 삶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과, 더 근본적 원인으로는 문화의 생산과 향유의 폭이 그만큼 더 확대되고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한다. 예를 들면, '렘브란트의 <야경>과 같은 역사적 예술품도 문화(재)이지만, 그 앞에서 데모하는 예술가들까지 포함한 것 역시 문화'라는 그의 설명은 쉽고도 설득력이 있다. 말하자면, 종래의 문화 이론가들은 <야경>으로 대표되는 예술품이 문화이지 자신들의 활동은 문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것이다. 이제는 이 실천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이 바로 그들의 관심의 표적이자 사고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볼 때 문화는 역동적이고 변화 가능한 것이고, 그러므로 "아직 다 하지 못한 이야기이고, 따라서 그것은 계속 이야기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반 퍼슨은 문화를 하나의 미래를 위한 전략으로, 문화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화 개념의 도구화를 부르짖고, 발전가능한 문화모형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화의 모형이란 무엇인가? 반 퍼슨은 발전 도식으로 신화적 단계, 존재론적 단계 와 기능적 단계 등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외관상 문화적 발전을 시간적 단계로 구분하고 반드시 그 순서에 따라 이행한다는 실증주의 문화 이해와는 차이가 있다. 즉, 반 퍼슨의 모형에는 그것이 순서를 지키는 것도 아니고, 모형의 존재도 공존하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한다. "문화는 늘 더 나은 상태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단계가 다른 단계보다 더 낫거나 더 못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서로 다른 것뿐이다." 그리고 "문화의 각 발전 단계는 전략상 강조의 차이가 조금 다를 뿐 사실은 우리 개개인 속에 모두 내재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 퍼슨의 이런 주장을 그대로 수용해야 할까?


Ⅱ. 철학적 대상인 문화

우선, 반 퍼슨은 서술의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 한 예로서, <야경> ―고전적 의미의 문화 ― 앞에서 항의하는 예술가들의 모습 ― 반 퍼슨의 문화 ― 이 문화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문화를 가지고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라는 그의 진술은 자신의 주장을 오히려 퇴행시키고 있으며, 인간의 모든 활동 특히 미개 민족이 따로 없이 문화라는 개념 하에 포섭된다고 주장하면서 문화 모형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의 모형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모순적 발언이다. 뿐 만 아니라 문화의 모형으로 제시하는 신화적 사고, 존재론적 사고 및 기능적 사고의 설명에서 보여지는 단선적이고 총체적인 시각의 논리적 한계는 많은 부분에서 이런 자가당착을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따라서 문화 개념의 확대를 통해서, 그리고 정태적이기보다는 동태적으로 해석하려던 그의 문화이론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 같다. 그의 세부적 논의로 들어가기 전에 올바른 문화관으로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을 살펴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 탐구』에서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도 사실상의 언어 용법을 방해하지 않으며, 결국 그것을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토대도 또한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둔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철학의 기능에 대해 두 가지 시사를 받을 수 있다. 하나는 '철학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둔다'는 것과 '철학은 다만 기술한다.'는 것이다. 문화도 철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하다.
철학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두는 것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 철학을 통해 사태를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 다만, 전 후기 철학이 특성상 달랐다면, 그것은 전기는 철학의 역할을 무언가를 동원해서 설명하려는 것이었고, 후기는 철학이 있는 것을 어떻게 '그대로' 보여주는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한 점이었다. 논리화의 작업을 통해 기초를 제공하려던 전기의 입장은 이내 한계에 부딪혀 이론을 위한 이론 양산에 빠져들게 되었다. 모든 언어를 대상화하고 그래서 그것을 각자 독립된 것으로 응고시켜 실제 세계와 일대일로 대응시켜 정지된 그림으로 만든 결과는 세계도 언어도 각질화해 생명력을 잃은, 죽은 이론이었다. 이것은 세계 이해를 도리어 애매하고도 혼돈스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시도한 설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된 이유는 바로 철학을 통해 그가 세계 설명의 '기초를 제공하려는 데' 있었다.
후기에 와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줄 수 있는 기초란 없고, 도리어 그런 기초를 제공하려 할 때 언어의 실제적 용법은 혼돈케 됨을 깨달았다. 어떤 것이라도 [불필요한] 기초로서 제공되는 것은 화자의 사적 정의와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인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사적 언어란 있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도무지 가능하지도 않는 중얼거림일 따름이다. 무엇이건 언어라면 그것은 공적인 형태를 띠는 것이며, 공적인 것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술이며, 이것은 적어도 같은 가치와 규칙을 공유하는 것으로서만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가치와 규칙을 공유한다는 것은 새로운 조작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고, 역사를 갖는 사태를 말한다. 한 단어, 한 문장, 한 사태가 역사를 갖는 것은 어떤 문화를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어떤 방식으로' 소유하는 사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언어의 사용에 대한 고찰은 철학에서 어떤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문화에 기초를 제공한다는 것은 문화의 맥락에 어떤 유형의 형식이 존재하는가를 알기 위해 특정한 ― 조작된 ― 기준이나 모델을 들이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물론 기준이나 모델 제공 자체가 전혀 무의미하다거나 그럴 시도조차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비유컨대, 어린이의 천재성을 확인하기 위해 우주항공의 모델을 다짜고짜 들이대어 알아 맞춰보라는 식의 확인은 아무 소용이 없고, 수학의 이해력을 측정키 위해 예술적 심미감을 달아보는 따위는 그 맥락을 벗어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화적 맥락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에 '이러이러한 도식이 필요하다'는 식의 성급한 주장은 그것을 맹목적으로, 주관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반 퍼슨과 비트겐슈타인이 공감하는 부분으로서,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바로 이렇게 빚어지는 오류를 갖고 있다. 프레이저는 책을 통해 만나는 미개한 나라의 원시인이 어떤 행위 ― 제의적 행사 ― 를 보고 자기의 짐작을 통해 그것을 해석하고 있는데, 그의 자기 짐작 ― 20세기 영국인 식자층의 것 ― 은 바로 자신이 제공하는 '기초'이다.

철학은 설명이 아니라 기술하는 것
한국 사람의 영어 수준 ― 특히 말하기 수준 ― 은 형편없다고 한다. 많은 사람의 지적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구어 영어 교육은 밀쳐 둔 채 문법 교육에만 치중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우리의 언어 교육은 바로 고쳐져야 한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제시된 오늘날의 많은 원어민 영어 교육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구어 영어와 문법 영어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치 못함에 있다. 요컨대 영어를 대상화시켜 말하는 것은 이미 구어 영어가 아니다. 구어 용법의 진위를, 그것도 한국어로 말하는 것이나, 설혹 그것을 영어로 말한다 하더라도 듣는 한국 학생이 그 용법의 진위에만 관심이 있다면, 구어는 살아 있는 구어가 아니라 '구어와 흡사한' 구어에 불과하다. 그런 영어 교육은 성공을 가장한 '죽은 비법'즉 <방해법>이다. 이것은 바로 언어가 설명을 통해서 도리어 실제 용어로부터 멀어지는 한 예이다. 언어 철학이 처음에 모토로 삼았던 것은 바로 언어적 설명이 빚어내는 의미적 오류를 씻어보고자 한 것이 아니었던가? 철학은 모름지기 기술(記述)을 모토로 삼는다.
그렇다면 기술이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문화와 가치}에서 철학 선생으로서 자기의 역할을 거울에 빗대고 있다. [과학적] 설명이 세계를 나름대로 그려서 보여준다면 철학적 기술은 그것을 비취서 보여준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뉴턴의 그림이 한동안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믿게 했다면, 아인슈타인에 의한 그림은 뉴턴의 그림이 틀린 그림임을 보여 준다. 그림은 늘 그린이의 주관이 피할 수 없는 요소로 존재한다. 그러나 거울은 그것을 만든 이의 솜씨가 좋으면 좋을수록 사태를 있는 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거울을 보는 이가 누구이든, 그 거울을 들여다보는 이는 자신의 왜곡된 모습을 바로잡게 된다. 거울이 이러쿵 저렇쿵 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거울의 최대의 역할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그것이다. 철학적 기술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기술을 통해 어떤 오해도 일으킬 설명적 모형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의 기술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기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태의 이해를 사태를 일으키는 장본인들의 주장을 좇아 그대로 기술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의 주장이 일상언어의 문법에서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이해되는가를 살펴본다. 일반언어의 문법을 흩트리며 새로운 정의나 규칙을 '만들어 가면서'하는 기술을 제외하며 따르는 것이다. 문명인의 시각에서 미개인의 삶을 해석해 내는 프레이저는 말할 것도 없고, 미개인-문명인의 구별이 없이 그 둘의 삶 모두를 동일한 문화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반 퍼슨도 신화적 사고라는 개념의 도식화를 통해 문화를 해명함으로써 이들은 진정한 문화의 기술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문화에 대한 기술을 기계적인 물리학의 법칙을 이용해서 소박한 실재론의 형태로 진술하는 것이 바른 진술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사태를 비추기 위해 평면 거울만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의 소박함과 다를 바 없다. 구부러진 길에서 차끼리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는 볼록거울이 사용되는가 하면, 깊숙한 입 속의 충치여부를 점검하는데는 오목거울이 동원되어야 한다. 어떤 거울이든 의식을 제대로 갖추고 현상에 접근하는 사람은 사태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반 퍼슨은 이런 시각을 갖고 문화를 설명하고 있는지 논의해 보자.


Ⅲ. 세 가지 사고

1. 신화적 사고

반 퍼슨은 그의 저서 『문화』에서 인간의 세계이해의 방식 즉 문화의 한 방식으로 신화적 사고를 말하고 있다. 신화적 사고는 그 자체로 인간의 가진 삶의 형식 중 가장 오랜, 원시인의 그것이다. 원시인의 것이라 해서 미개한 것으로 폄하하거나 반대로 무조건 찬양하는 낭만적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에서 저자의 균형 잡힌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신화를 통해 발견하려는 것은 문명과 기술로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 산 원래 모습으로서의 인간의 합리성을 찾아보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합리성은 신화적 표현을 고정된 시각 ― 현대적 입장 ― 에서 직설적으로 바라 볼 경우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고대 원시인들의 기우제 의식이나 부족의 제사의식 혹은 출산에 관련된 그림이나 기호를 보면서 하나 하나에 어떤 주술적 해석을 첨가할 때 그것들은 유치한 아이들의 그림 그리기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말하자면 이런 입장에 선 사람은 신화적 삶을 수행하는 사람을 유치한 사고를 가진 '논리 이전의 사람들'로 폄하하게 되는 데 이것은 도리어 미숙한 어린아이(부정적 의미에서)의 시각이다.
신화적 (시대의) 세계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늘 귀신이 출몰하는 영적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같은 세계이며 단지 물질 생활의 차이로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대처하는 방식이 약간 다른 ― 이 다름은 오늘날 사회에서조차도 저마다 있을 수 있다 ― 세계일 따름이다. 따라서 "그들이 행하는 의식도 모두 귀신몰이가 아니라, 질병이나 기근 등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잘 대비할 수 있도록 미리 용기를 북돋아 주는 합리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신화적 사고나 현대의 사고는 인간의 모든 언어와 사회적 양식에는 동일한 논리적 구조가 내재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신화란 인간을 에워싼 힘과 인간의 관계를 어떤 특정한 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의 기능은 무엇인가?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듯이, 신화는 이야기로서 상징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 경험을 표현하는데, 예를 들면, 선·악, 생·사, 죄·속죄, 결혼·출산, 낙원·내세, 따위이다. 반 퍼슨에 따르면, "인간은 신화를 통해 주변 세계에 참여하고 자연의 힘과 겨룬다." 따라서 신화적 세계관을 갖는다는 것은 한 주체인 인간이 대상인 세계에 '참여하여' 영향을 받으며, 이때 개인은 구별되는 개별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그는 신화의 기능을 세 가지 열거한다.
첫째, 신화는 압도적 힘을 나타낸다. 우선 신화의 세계에는 성속의 처소가 뚜렷이 구별된다. 할례나 문신 등의 의식은 거룩한 곳에서 일어나고 일상사는 세속에서 일어난다. 그런 것을 해 가는 중에 신화는 성소에서는 낯선 압도적 힘을 보여 그 힘을 알고 체험케 하는 일에 관계한다. 이런 의식 속에서 자연과 초자연은 일치된다. 이 양질서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성속의 완전한 분리는 일어날 수 없다. 다만, 이런 미분리된 체계 속에서도 성의 탁월성으로 인해 그것이 속된 일보다 더 우선되는 구도를 갖게 되며, 신화를 통해 인간은 그 힘이 나타나는 주변세계의 힘에 참여하게 된다.
둘째, 신화는 현재(現在)를 보증하는 기능이 있다. 예컨대 농지를 새로 경작하는 경우, 옛날 그 땅에 있던 신들의 풍작에 관한 얘기를 한다거나, 춤을 통해 과거 사건을 재현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과거 사건을 재연함으로써 현재 일의 성공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화의 재연은 현재에도 계속되어지는데, 민속무나 놀이로 형식적으로 남은 경우도 있고 실제적으로 신적인 힘이 사람을 사로잡아 입신의 경지에 드는 경우도 있다. 도처에서 전승되는 사례들은 연행 방법, 표현, 효과, 목적 등이 달라 한 가지로 말해질 수 없으나, 그것이 현재에서 어떤 효과를 기대케 한다는 데는 공통적이다.
셋째, 신화는 세계 인식을 제공한다. 여기에서의 인식이란 과학과 철학이 제공하는 그런 지식을 뜻한다. 말하자면, 신화는 악의 기원, 천지의 생성과 신들의 관계 따위를 설명하고 이야기 해 준다. 작은 가족 이야기에서 큰 민족이나 국가를 정립하는 어떤 <근거>를 알려주기도 한다. 때로는 그런 얘기 중에 너무 비현실적 요소가 있어서 사변적 지식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도리어 신화의 성격을 퇴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전체를 뭉뚱그리면 신화적 체험은 "무엇인가 있다(dat iets is)"에 대한 체험이다. 이 있다는 관념을 반 퍼슨은 신화적 세계 안에서 인간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밖의 어떤 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침투 받는 존재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사건을 객관적 관찰이나 기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생각의 투영물로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힘에 의해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하는 유형의 삶을 살면서 자신의 존재 이면의 무엇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반 퍼슨은 인간과 주변 세계가 서로 침투해 있다는 신화적 사고 방식의 옆면에 부정적 측면으로서의 주술 설명을 통해 신화적 단계의 맹목성을 우회적으로 기술한다. 신화는 우선, 주술과 대비되는 측면이 있다. '전자가 고차원의 왕국을 추구한다면, 주술은 이 세상으로 향해 있다. 신화는 초월적인 것을 지향하고, 주술은 내재적인 것을 지향한다. 신화는 종교적 숭배의 성격을 띠고 있고, 주술은 정교한 지배의 성격을 띠고 있다.' 종교는 섬기는 것인데 주술은 지배하는 것이다. 종교가 인간과 인간 바깥의 힘 사이의 관계를 바르고 의미 있게 유지하려는 노력인데 반해, 주술은 힘을 장악하려는 노력이다. 이리하여 주술사들은 악랄한 독재자로 군림하여 사람들을 악마에 대한 공포로 떨게 만들어 종족의 권력을 거머쥐고 마침내 독재자로 군림하게 된다. 그래서 심지어 전체를 포괄하는 신적 질서의 한 부분인 노동을 사회적 질서로 적용하지 않고, 주술사들에 의해 억압적 사회 의무로 정착시켜 버렸다.

이런 불합리한 사고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 불명료한 세상에 대한 지식 ― 자신과 대상을 분화시키지 못하는 인식 체계 ― 인 신화적 사고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대상에서 분리시키는 존재론적 사고로 넘어가는 것이다.

2. 존재론적 사고

인간은 존재론적 사고에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과 좀 더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방관자로서 보며, 인간과 자연 속에 작용하는 힘의 정체를 파악하게 되는데, 반 퍼슨은 이런 예로서 보이는 세계인 물리학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것으로 형이상학을 들고 있다. 여기서 좀 더 확대된 과학과 철학의 목적은 사실 불가사의한 힘인 생사화복 및 죄와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 신화적 세계의 주술적 지배에서 해방 받는 것이었다. 이런 해방은 삶의 주변에서 거리를 두어 관찰하고, 관찰한 것을 목록으로 작성하여 그 안에 들어 있는 '로고스'를 발견하는 일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런 태도를 존재론적 태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자-타의 구별이 없던 신화론적 사고와는 달리, 타를 자와 구별되는 그 무엇 ― 대상 ― 으로, 돌려서 말하면, 자를 일어나고 있는 일 바깥에, 그것과 마주 선 위치에 세우는 긴장된 작업을 하는 태도를 말한다. 존재론적 사고는 주변 세계에 거리를 둠으로써 신화적 금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고이다. 이 사고의 기능을 반 퍼슨은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존재론적 반성은 초월적인 것을 지도에 옮겨놓는 기능을 갖는다. 철학은 본래 초월적인 것의 언표를 시도했다. 세계를 하나로 꿰뚫어 보기 위해 '세계의 원질'을 기술한다거나 플라톤처럼 '이데아'를 말하는 것은 곧 신적 힘에 대한 신화적 체험을 개념으로 담아내어 그 존재를 증명하는 지식 체계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주체가 대상과 거리를 두고 마주 서, 대상 바깥에 위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주체(사람)는 "모든 방향을 향해 열려 있거나 주변 세계의 힘이 스며들어 오는 존재가 아니라 사물과 맞서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하는 그런 존재로 탈바꿈한 것을 말한다. 물론 이 경우 주체의 거리 두기는 합리적 설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눌리는 힘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전략적 계산이라고 반 퍼슨은 본다.
둘째, 존재론적 사고는 신화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현재를 보증하는 기능을 갖는다. 다만 신화적 사고와 다른 점은 영원한 법칙을 통해 인간의 삶과 자연의 과정을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존재론적 사고는 과학 이야기를 만들었다.
셋째, 존재론적 사고의 기능은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신화론적 사고와 존재론적 사고의 차이는, 후자가 주는 지식이 모든 사람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체계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의 지식을 찾는 태도인데, 예를 들면 많은 그리스의 신화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각 개물의 원인을 찾아, 궁극원인에 도달한 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존재론적 사고에 해당한다.
존재론적 사고에 관련된 물음(이데아, 원인, 논리적 설명 따위)은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려는 노력으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사물의 '무엇'(wat)에 도달하는 태도이다. 이 태도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dat)에 대한 체험인 신화적 방식과는 현격히 구별되는 것이다.
존재론적 사고 단계는 신들의 본질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시도하는 이른바 신학적 이론들 ― 그리스도의 본성이나, 삼위일체설 따위 ― 도 등장하여 철학적 추론을 통한 해결도 이루어졌다. 이런 사변적 신론은 실천적 의미를 가지고 규범과 가치에 확고한 객관적 지위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 존재론적 사고에 부정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실체주의이다. 실체주의는 상호의존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서 사물들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고 고립시키는 입장이다. 말하자면 인간, 사물, 세계, 가치, 신 등을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하는 것 곧 실체로 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원근법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실제 세계와는 상관없이 작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림은 그려지며, 화폭 속에 담긴 세계는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주체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때때로 인간, 신, 가치 따위의 대상은 시야에서 전부가 사라질 위험도 있다.
이런 실체주의는 모든 것을 경직되게 만든다. 인간과 세계는 당시 수준의 과학 공식에 의해 고정되며, 기존 해법에 어긋난 일은 허용되지 않고 창조적 진보를 모색해 보는 일도 억제 당한다. 한 번 발견된 진리에 노예처럼 복종한다. 사물의 본질은 독립적인 것으로 실체화되고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된다. 자기 테두리 밖으로 또는 초월하려는 몸부림은 사라져 버리고, 내재의 벽 속에 갇힌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어떤 대안이나 인간을 초월한 것에 대한 전망은 사라지고 초월은 차단되며, 가치가 실체화되고 신마저 실체화되면 이것들은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신존재를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고, 따라서 논리적 이성의 능력 안에 신이 들어오게 되면서 신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이런 근대의 산물인 '분리적 사고'는 현대의 기능적 사고를 만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3. 기능적 사고

기능적 사고는 실체적 사고와 정확히 반대되는 사고이다. 그 까닭은 기능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자연과 미분화된 자아를 서로 떼어놓으려던 근대적 노력으로서의 실체주의는 자아를 마주한 많은 독립적 존재물을 밝혀 산업화에는 성공했으나 그 많은 생산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켰다. 인간은 자신의 기술과 낯익은 가치로부터, 신존재와의 교제로부터 소외되었다. 자신을 에워싼 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너무 세련되어 거기서 독립되었고, 확실성에로부터 마저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확실성의 위기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기능적 사고인 것이다.
신화적 사고는 인간과 세계를 서로 참여한 관계로 보고, 존재론적 사고는 서로를 초연한 관계로 인식하는데 비해, 기능적 사고는 인간과 세계의 상호관계가 전면에 나타난다. 즉, 단어나 행동 또는 사물의 의미를 그와 같은 맥락 속에서 그것이 맡고 있는 역할을 통해서 본다는 특성이 있다. 이제 대상은 주체를 향하고, 주체는 대상을 향하고 있다.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다른 것과 관계할 때 의미는 비로소 주어진다. 말하자면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을 파고 들어가 보편적인 것을 얻어내자는 사고가 바로 기능적 사고인데, 철학에서 이런 기능적 특징을 가진 사조에는 실존주의와 실용주의가 그 예가 될 수 있으며, 분석철학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기능적 사고는 닫힌 체계와 사변적 관찰을 싫어하는데, 그것의 특징을 반 퍼슨은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기능적 사고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것 사이에 직접적 관계가 있음을 보임으로써 그 힘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표현 방식을 요구한다. 즉 존재나 본질을 묻기보다 그 의미를 물어야 한다. 기능적 사고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사물이나 사건, 혹은 인간 공동체의 존재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 혹은 그것을 의미 있게 다룰 수 있는 방식이다. 이 의미는 인간을 통해 체험되고 처리되는 방식이다. 예컨대 어떤 것이 유용하고 성공적인 것으로 체험되었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이렇게 의미 있는 것으로 체험될 때 비로소 그것이 진정한 것인가 또는 수용할 수 있는 것인가 따위를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육은 밖에서부터 주어진 규칙을 주입하고 그것을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으로는 그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 도리어 인간의 일상적 경험에서 시작하여 그 경험을 좀 더 의미 있게 해보려고 노력한다. 존재론적 사고의 닫혔던 원은 이제 세계로 향해 열린 것이 된다. 인간은 자연과 역사가 진행되어 갈수록 더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그것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되었다.
둘째, 기능적 태도의 두 번째 특징은 현재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과거의 초자연적 힘이 현재 행위들의 성공을 보증해 주는 것으로 이해된 신화적 사고 방식이나 경험과 합리성만이 보증의 기초가 되는 존재론적 사고와는 달리, 주어진 상황을 살 수 있는(leefbaar) 상황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현재의 의미가 확보된다고 기능적 사고는 말하고 있다. 과학 기술, 심리 치료, 예술, 신학, 도시 개발 등이 구체적 상황과 관련이 맺어질 때 이것들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기능적 연관성이 있게 된다. 고층 아파트는 훌륭한 가구 설비를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도시의 미관을 해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단순한 효용성의 차원을 벗어나 건물의 기능을 더 높일 수 있다.
셋째, 기능적 태도는 지식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물론 존재론적 사고도 지식을 제공해 주지만, 그것이 이론적인 것인데 반해, 기능적 태도는 실천적인 것이다. 존재론적 사고의 특징은 지식이란 이미 절대적으로 지식의 체계가 있다고 전제하고 교육이란 그것을 전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반해, 기능적 사고는 지식이란 최소한의 알고 있는 것을 주어진 문맥에서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해 준다. 기능적 태도는 사실 자체에 관심을 두는 신화적 태도, 사물의 본질에 관심을 두는 존재론적 태도와는 다른 방식에 관심이 있는 그런 태도이다.
인간은 신화적 세계 속에서는 아직 완결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했고, 존재론적 세계 속에서는 주체와 대상이 마주서서 긴장된 상태이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비해, 기능적 세계 속에서는 관계를 중시하므로 주체의 자기 정체성은 흐릿해지게 된 것 같다. 이제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같은 위치에 있어서 관찰자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관찰 대상이 떠오르는 순간 관찰자는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건과 사물을 지시함으로써 자신이 인간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완전히 고립된 사적 세계는 어디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무의식조차도 외부 세계, 특히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결정된다고 현대 심리학/정신 의학은 말한다.
이런 관계에 대한 설명은 여태껏 맹목적 실체 중심의 사고를 통해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문화의 맥락을 많이 드러내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유신론과 무신론은 그 자체로서 기능하는 바가 없으므로 전혀 문제외적 문제로 기능적 사고에서는 여겨져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연결이 될 때 그 '신'은 의미를 갖는다. 이때의 의미는 초자연적 존재의 의미가 아니라, 삶의 한 차원을 이루는 기능적 의미이다. '무엇'에 관한 질문으로 혼란스러워진 현대의 모든 신을 둘러싼 서구의 논의들은 '어떻게'라는 물음을 통해 그 혼란을 다소 진정시킬 기미를 보이게 되었는데, 이런 연유로 기독교 신학은 교의학에서 성서학으로 그 연구 중심을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기능적 사고가 빚어내는 오류는 한 대상의 존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보는 방법에 중점을 두어 진정한 사태와는 상관없이 <조작한다>는 데 있다. 조작주의(operationalism)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조작주의란 행위의 방식, 행위의 운용 자체를 절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사람들이 모여 앉아 게임을 한다. 사람마다 빈 성냥갑을 하나씩 들고 있고, 그 속에 작은 풍뎅이 한 마리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옆 사람에게 풍뎅이의 생김새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아무도 상대방의 성냥갑을 열어 볼 수 없다. 따라서 성냥갑이 실제로 텅 비었다 하더라도 이 게임은 계속 진행될 수 있다. 왜냐하면 각자가 하는 이야기의 참, 거짓을 알아낼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조작주의적으로 <신>에 관해 논문을 쓰고 <인간>에 관해서도 학문적으로 이야기한다. 종합 병원의 의사도 간호사들의 챠트만을 보고 환자를 만나지 않은 채 처방을 하고, 이러다 보면, 사실은 퇴원한 환자의 처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일어난다.
그런데 조작주의의 한 예는, 사람의 인체를 전혀 그리지 않은 채 내분비선의 구조만을 도식화한 그림이나, 직능 중심의 기업체 인력 배치도에서 만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뇌하수체가 제대로 흐르는 상태에 있는가의 실험 대상 '동물'로 존재하거나, 기업체의 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직의 한 '점'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은 계량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 <환원>된다. 이 환원은 인간을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며, 이것은 곧 현대 관료주의의 지배를 가능케 하는 요소이다. 예컨대 후자의 경우, 기업에서는 한 개인의 노동을 존재론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조작주의적으로 접근하여 최대의 생산성을 뽑아내는 인사행위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현대에 있어서 개인의 노동력이 단순한 인력 배치로 썩 달라지지 않는 애매성이 있기는 하지만, 소위 삶의 질을 높인다는 의미에서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등 노동자의 질적 삶을 고려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기업의 목표가 생산성 향상에 있는 한 '은폐된' 조작주의의 위험은 여전히 일어날 수 있으며, 이는 기능적 사고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타인과 떨어진 자기 정체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 퍼슨은 주장한다.


Ⅳ. 비판적 재구성

지금까지 우리는 반 퍼슨의 문화 이해의 모형을 살펴보았다. 그에게서 눈에 띄는 몇 가지 한계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문화의 다양한 맥락을 반 퍼슨처럼 분절적으로 볼 수 있을까? 더구나 신화적 사고, 존재론적 사고, 기능적 사고로 분해하고 그것을 시간과 공간으로 달리 총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에 있던 신화적 사고가 현존할 수 있고, 아프리카에서 이천 년전 유행하는 옷문화가 현대 유럽의 한복판을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문화는 단선적일 수도 있으나 중첩적이고 다양하게, 그리고 전체가 아니라 부분적 닮은꼴로 드러날 수 있고 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둘째, 문화를 전략적으로 보는 반 퍼슨의 입장은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문화를 정책으로 보는가 하면 조종 가능한 대상으로 본다는 말은 문화를 동적으로 본다는 그의 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문화가 동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문화가 인간을 포섭하는 주체의 모습을 띠지만, 전략적으로 조종하는 경우 그것은 대상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런데 어떤 경우라도 문화는 그 자체로 한 사람/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 주어지는 것으로 삶의 양식이 아닐는지?
셋째, 문화란 인간의 외부환경에 대한 힘의 긴장 관계라고 보는 시각 역시 의심이 가기는 마찬가지이다. 토인비가 그랬듯이, 만일 문명이 이런 결과라고 한다면 이해가 가지만, 문화가 그렇다면 그것은 그 긴장의 사태인지 아니면 그 결과인지가 불명료하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지 문화는 힘의 역동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므로 힘을 상실한 후의 사태는 드러나지 않는 특징을 갖는다. 그런데 문화란 종종 역사에 있어서 힘의 약세로 배후에 존재하나 큰 영향을 미치는 사조가 있어왔다. 이런 것을 동양의 노자 같은 사상가는 <도>라는 개념에 담았고,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예수의 인간적 실패가 그러하다.
신화 이해나 존재론 이해의 수준, 세 사고의 중첩되는 설명, 그것의 동일한 구조화는 반 퍼슨이 문화 이해의 수준을 현상적 차별화의 유형 판별 정도로 고착시키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을 통해 문화에 대한 다른 해석을 시도를 해 보자.

우선, 비트겐슈타인은 말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며, 특히 그의 후기 철학에서는 '말놀이'를 통해 인간 삶의 운행 기제를 드러내 보여주는 시도를 한다. 그런데 인간을 사이에 두고 문화와 말놀이는 도대체 어떤 특징을 공유하거나 그것을 차별화 하는가?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과 반 퍼슨은 그 둘 사이에 상당한 공통성이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첫째, 말과 문화는 인간의 삶과 더불어 시작한다.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한 개인이 출생하면 기존 사회에 편입되는 수단으로 말하기를 배운다. '말놀이'라는 용어는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활동의 일부이거나 삶의 형식의 일부라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삶의 양식으로서의 말놀이는 다양하며, 거의 모든 인간 활동을 말놀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모이면 또한 문화가 시작된다. 문화는 인간 활동의 결과이다. 말하자면 거의 모든 삶의 활동을 우리는 말놀이 내지 문화라는 말로 통칭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전통도 역동적으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모든 인간에게 말과 문화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적이라 함은 말이 두 사람 이상 사이에서 동일한 상징을 만들어 내고, 그 상징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이 상징의 공유는 삶으로 이어지고, 또 삶은 표현되어진다. 그런데 말이 보편적이라고 해서 그 표현이 모두 한결같은 것은 아니다. 자연 언어의 차별성은 언어마다의 독특한 무늬와 색깔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쌓아 가는데 이것이 각 민족의 삶의 표현이고 문화이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단어 사용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정당화가 필요하다. 물론 특수한 자연언어의 의미가 하도 독특해서 전혀 옮길 수 없는 경우가 있지만 ― 이런 예외적인 경우는 심지어 한 민족 언어 안에서도 방언의 형태로 존재한다 ― 대개의 경우 우리가 '번역'이라는 절차를 통해 의미를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언어와 문화는 각각의 특징을 가지면서도 서로 통용되는 보편성을 갖는다.
셋째, 문화나 언어는 그 형태/형식에 있어서 언제나 미완성이다. 예컨대 한국문화는 한국인이 살아가는 한, 언제나 변화하는 형태로 존재한다. 이미 완성된 것으로의 한국문화는 어느 한 장소 혹은 시대를 대변하는 부분으로의 한국문화이다. 구성원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일부 계층이나 일부 장소의 사람들이 구성원이 되어 이루는 문화는 부분으로서의 한국문화의 특색을 드러내 준다. 결국 현재 문화는 인간 발전사의 계속 이어질 한 부분이다. 물론 이것은 문화의 진행이 반드시 발전이나 확장으로 이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한편, 언어도 똑같은 의미에서 미완성적이다. 그것은 마치 '골목길이 늘 이어지는 것' 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서도 드러난다. 한 골목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초창기 어떤 시점이다. 그러나 그 골목은 집을 계속해서 지어 가면 길어지고, 있던 건물들을 부수고 전혀 다른 건물을 지으면 그 골목의 특징은 전혀 달라지고 골목의 정의도 달라질 것이나, 골목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언어와 문화는 동일하다.
넷째, 언어와 더불어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다.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듯이, 문화나 언어는 각자의 삶으로부터 출발된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각자의 삶은 문화적이고, 그 고유한 역사와 문법을 갖는다. 따라서 그것의 참이나 거짓 혹은 의미나 무의미는 다른 것을 통해서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떤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인 기준을 가질 여지 또한 없다. 언어의 의미는 객관적인 기준을 통해 유의미성을 가진다는 입장 ― 전기 언어 철학의 입장 ― 이 한계를 갖는 것은 그런데 바로 이 보편적 기준을 갖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말 ― 혹은 한 단어 ― 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그 대상과의 관계를, 인공언어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다르게 갖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자기 규율성을 갖는다.
이런 것을 기초로 하여 우리는 문화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으로 대치시켜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문화를 몇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문화는 변치 않는 삶의 양식
반 퍼슨은 문화를 '놀이와 같이 조작할 수 있는' 전략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반 퍼슨의 놀이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소박하다. 마치 어린이들은 놀이를 놀이라는 것으로 알고 짐짓 '....체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소꿉놀이를 실생활과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른이지 소꿉놀이의 당사자인 어린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 하며 놀자!"라는 언술을 하는 것을 제외하면 사뭇 진지할 뿐만 아니라, 놀이 중에 그들이 보여주는 심각성은 다른 생활 중에 보여주는 심각성과 전혀 다르지 않다. 소꿉놀이 중의 엄마 아빠는 곧 엄마 아빠이지, 장난으로의 엄마 아빠가 아니다. 만일 장난으로서의 엄마 아빠라면 그것은 재미를 상실하게 되며, 실제로 그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물론 방관자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소꿉놀이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어른에게 그 놀이는 장난이지 놀이가 아니다. 그들이 쓰는 말들도 그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그는 실제로 이 놀이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놀이가 어린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른에게도 있다.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은 말놀이라 부른다.
말놀이에는 가지각색이 있고, 제각각은 고유한 맥락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를 넘나들 수 없고, 따라서 바꿀 수 없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하나의 놀이에 어떤 변화를 주면 그것은 더 이상 그 놀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복싱놀이에 주먹만 사용하는 것이 재미가 적어서 차는 동작까지를 가미하면 이것은 더 이상 복싱이 아니고, 킥복싱이 된다. 그런데 킥복싱은 더 이상 복싱이 아니므로, 복싱 선수는 더 이상 킥복싱 선수가 아니고 반대로도 이 공식은 성립된다. 복싱 선수의 체급별 차이와 그것의 킥복싱과의 차이는 전혀 다르다. 장기를 두는데 누군가가 장기판의 모양과 색깔을 문제 삼거나 장기 알의 크기로 시비를 삼는다면 그는 장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놀이는 이미 있는 사태를 수용하는 것으로서, 전혀 조작의 대상이나 전략적 이용을 위한 변화는 불가능한 그런 것이다.
문화에 있어서도 사태는 동일하다. 한 문화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때 그것은 바뀐 것으로의 문화이지, 문화의 변형이 아니다. 한 문화의 생성이 다른 문화의 형성에 도움을 주거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변화를 겪어 거듭나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 문화를 변화시킨다거나, 그것을 수단으로 문화의 창출을 시도하는 작업이란 불가능하다. 변치 않음은 의미의 불변성, 사고의 불변성, 체계의 일관성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고대 문물의 발굴로 고대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사실이 새 사실로 태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고대에 있었던 사실이 발굴된 문물을 통해 인간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활자화해서 편입되었다는 뜻이다. 이때의 편입은 새로운 것의 구태에로의 유입이 아니라, 당연히 들어가야 할 것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인식 체계 내로 아로새겨졌다는, 묵은 사실이다. 문화란 바로 이런 묵은 사실의 일관성을 그 속성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문화란 주어진 것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삶의 형식은 주어진 것 ― 혹은 주어지는 것이다. 주어졌다는 것은 말놀이의 문법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시차를 갖는다는 뜻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어거스틴 언어관 비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언어는 <새로운 지시>의 실수 없는 수행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시의 <숙련>에 근거해 있다. 이때 숙련이란 이미 있는 것의 거듭되는 수행을 통한 무실패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는 모조리 이런 과정을 통해 획득되어졌고, 확장되고 성장해 가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받아들이는 것은 본디 불가능하다. 창조적 언어사용이란 따라서 애초부터 불가능한, 실패된 미래일 따름이다.
반 퍼슨의 문화 이해의 주춧돌 ― 문화는 본질적 이해에서 벗어나 역동적인 모습에서 그 특징을 찾아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 ― 은 사실상 그의 주장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전통적 해석에 근거해 있다. 그 해석이란 문화의 본질은 명사적인 것이고, 그 현상은 동사적인 것을 억지로 연결하려는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어의 의미를 주어지는 대로 우리가 익혀서 쓰지 않으면, 단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숫제 해석 자체가 엉뚱한 데로 달아나 버리는 심각한 사태를 불러 올 수 있다. 여기서 숙련이란 붉은 색을 파란 색으로 부르지 않고 붉은 색으로 부르는 방법 즉, 기술을 말한다. 이때 이것은 완벽한 동의나 완벽한 판단을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예를 들어, '2+2=4'와 '2+2=4'라고 믿는 것은 엄격히 다르다. 전자는 수학적 명제이고, 후자는 수학적 진리에 도달했다는 일반 명제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각 명제의 의미를 그 각각의 기술 technique을 통해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문화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문화를 읽는 것은 그것의 기술을 가지고서, 그리고 중국 문화는 그것의 기술을 숙련한 후에라야 읽혀지고 이해되며 표현 가능하다. 이 주어지는 기술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은 철학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감성의 문제로서 심리학적 토대를 가질 수도 있고, 언어의 문제로서 음성학적 역할과 기능적 요소가 그 기술/기법의 내용을 이룰 수도 있다. 다만 결과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메커니즘은 결국 철학적 이해 논리의 그물에 포착되는 것이다. 그것은 진위의 문제가 아니라, 전후좌우의 해석 문제이다. 문화를 주어진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과거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이미 있어 온 설명을 고루하게 답습하는 동어반복의 기술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주어져 있는 언어의 체계 속에서 배워진 문법을 통해 전달되는 가치를 그대로 담아낸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조작이나 전략적 제휴의 대상인 [현상적] 내용이 아니라 그런 내용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 무엇/체계이다.

문화는 규칙 따르기이다
일관적이고 역사적인 문화는 언어의 문법 마냥 규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구성원에 의해 언제부터 시작해 보자는 그런 규약론적 공식으로서의 규칙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실천/실행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수행의 공식화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이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그의 행동이 거의 동일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행동에서 이뤄지는 공통된 행위 방식과 동일한 것이 아닌 한 그의 행동들은 하나의 규칙을 따른다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도로 표지판에서 나팔 주위를 붉은 선으로 빙둘러 쳐 놓은 그림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과는 달리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몰면서 경적을 울린다면 그는 교통신호 체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경찰의 제재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태가 이렇게 선명하게 이해되는 맥락을 갖는 것은 아니다. "2×4, 둘!"이라는 외침을 들을 때 공사판에서 일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전혀 어리둥절하여 무슨 말을 노동자 두 사람이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규칙 따르기는 공적인 것이며, 규칙 따른다는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규칙 따르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개념을 포괄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규칙은 사적으로 따를 수 없고, 규칙을 따르는 것과 규칙을 따른다고 믿는 것은 차이가 난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구별이 곧 단일한 개인의 행동이 한 규칙의 의미를 고정시킬 수 있음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 전에 그가 했듯이, 어떻게 하든지 규칙은 드러나며, 그가 결과적으로 동일한 행동을 하면서 규칙을 지켜 가리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규칙 따르기는 한 사람이 그 사람이 속한 사회의 다중들이 한 사태에 대해 그들이 드러낼 방식과 일치되는 행동을 수행할 때 비로소 그는 규칙을 따른다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정통 해석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다. 말하자면 결과로서 다중들과의 일치와 규칙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문화 해석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신화적 사고, 존재론적 사고 및 기능적 사고의 모델이 역사적으로나 심지어 현재에 있어서 그것이 현실과 일치된다 하더라도, 반 퍼슨의 해석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문화를 말해주는 것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규칙의 이해가 제대로 되려면 그 규칙이 마치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이해에서처럼 진리표를 이용해서 진리치를 확인할 수 있다거나, 언어란 더 낫게 될 수 있는 그 무엇이라거나 엄정하게 정의하거나 계산할 수 있는 그 무엇, 이를테면 반 퍼슨의 해석에서 존재론적 사고라고 해석되는 그런 문화 해석은 지양되어야 한다. 대단히 애매하나 '얼추 이러이러하다'는 식의 표현이 되는 삶의 양식을 문화의 유형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해석보다 더 포용력 있는,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더 정확한 의미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빗자루'란 단어는 '비와 자루 부분을 가진 청소 용구'하는 표현보다, '방이나 마당을 쓰는 용구'하는 것이 훨씬 분명히 다가오는 표현이다. 문화 분류도 반드시 한 인간을 주체로 두는 힘의 긴장 방식과는 다른 형식, 예를 들어 한 집단에 있어서 여성과 가정의 기능 이해 따위로 광범위하게 넓혀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문화는 가족유사성을 갖고 있다.
반 퍼슨은 문화를 매우 분절적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대로 문화가 곧 인간 활동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하나 하나를 떼어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체를 한 가지 기준으로 꿰어낼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를 들어 '놀이'[게임]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장기놀이, 공놀이, 물놀이, 말놀이.... 그러나 놀이라고 해서 같은 것은 아니다. 장기놀이는 장기판과 말을 이용해서 노는 것인데 비해, 공놀이는 공을 가지고 노는 놀이이다. 공놀이라고 해서 또한 동일한 것은 아니다. 공을 접촉하는 부위가 손인가 발인가에 따라 그 놀이의 내용이나 재미 혹은 목적이 전혀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한편, 놀이 사이에 다름만 있지 않고 같음/닮음도 있다. 이 닮음은 놀이에 따라 중첩되고 어긋나는 관계로 전체로 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마치 형제자매인 가족의 유사성과 같다고 해서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유사성이라고 부른다. 가족유사성은 놀이가 가족을 이룬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사용된 개념이다. 하나의 '수'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수에 관한 것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렇다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름'에 관한 것과는 간접적인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어떤 수는 '이름' 뿐 아니라 '법칙'이나 '정의'와 같은 개념과도 관계를 갖는 한편, '경건'이나 '연합'과는 전혀 무관하게 쓰여진다. 대신, 어떤 수는 뒤의 개념들과 두꺼운 관계를 갖는가 하면 앞의 개념 몇 몇 과는 엷은 관계를 갖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개념의 표면적 이해로서는 수용되기 힘들다. 따라서 개념들을 정확히 아는데는 그것의 맥락과 함께 이해되어야 하는 <심층 문법>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단어의 살아 있는 사용은 표층 문법을 통해서는 소박하거나 기계적인 이해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것의 심층 문법의 이해는 문장의 구성 즉 그 용법의 일부에서 그 단어가 사용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문화에 있어서 가족유사성의 개념은 진정한 문화의 이해를 위해, 말하자면 표층적 이해를 통한 오류를 벗어나기 위해 매우 필요한 것이다. 하나의 심벌을 모든 문화에서 한 가지로 꿰어 설명하려는 시도가 문화인류학이나 심리학을 비롯한 많은 학문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으나 이것은 피상적인 이해이다. 예를 들어 제사에서 피를 보는 것이 한 종족에서는 증오를 상징하나, 다른 종족에서는 우의나 구제를 상징할 수 있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한 종족의 출산의 예를 들어 그것을 그 당시 사람들의 습속 내지는 같은 수준의 미개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유치하고도 미개한 비과학적 태도라고 보고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프레이저의 이런 인식을 도리어 유치하면서 미개한 것이라고 공박하고 있다. 이 미개함은 실지로 현지를 방문해 보지도 않은 채 책상에서 가진 그의 '설명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심층적 실사를 그칠 때, 부족마다 심지어 그 보다 더 소단위의 사람들이 거하는 곳에서 엄청나게 다양하고도 독자적인, 그러면서도 동시에 중첩되는 생생한 문화의 모습들을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나오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문화에 대한 반 퍼슨의 역동적 해석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비트겐슈타인의 말놀이 개념에 담겨있는 몇 가지 속성을 풀어서 문화 이해의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 모두는 문화의 개념을 반 퍼슨과 비트겐슈타인이 공유한다는 전제하에, 후자가 전자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각도에서 제기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전자의 전적 실패나 후자의 절대적인 역할을 주장하는 점에서 말해진 것이 아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제기된 문화의 관념들 중 어느 것 하나를 파고들어 갈 때 더 적절한 해결책을 만날 지 모르겠다.
동시에, 이런 시도를 해갈 때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이 단골로 만나는 상대주의 문제를 만날지도 모른다. 즉 말놀이의 규칙이 미치는 범위가 그것의 각 맥락에 한정되는 것이라면 문화의 다양성을 아우르는 우리가 제시한 기준 역시 애매한 것이 되지는 않았는지? 또 문화가 문화 자체로 다른 문화와 구분되면서도 그것을 구분 짓는 내재율 ― 규칙 ― 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은 또 드러나는 현상과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 등등의 문제는 또 다른 『철학 탐구』의 문제들 ― 예를 들어 '사적언어의 가능성'과 같은 ― 로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만든다.






참 고 문 헌

C. A. 반 퍼슨, 『급변하는 흐름 속의 문화』, 강영안 역, 서광사, 1994; 『문화의 전략』, 오영환 역, 법문사, 1979, 1981, 본문에서『문화』로 약칭.
루스 베네딕트, 『문화의 패턴』, 김열규 역, 까치, 1993.
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김성곤·정정호 역, 도서출판 창, 1995.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안정남 역, 한길사, 1996.
------, 『슬픈 열대』, 박옥출 역, 삼성출판사, 1988.
엘리아데, 『종교형태론』, 이은봉 역, 한길사, 1996.
Wittgenstein, Ludwig,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 G.E.M. Anscombe, Basil Blackwell, Oxford 1958, 1978, 본문에서 『탐구』로 개칭.
------, Culture and Value, trans. Peter Winch, Basil Blackwell, Oxford 1980.
------,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rans. D.F. Pears & B.F. McGuinness, Routledge, London 1961, 1989.
------, on Certainty, trans. D. Paul & G.E.M. Anscombe, Basil Blackwell, Oxford 1979.
Griffiths, A. Phillips(ed.), Wittgenstein Centenary Essays, Cambridge Univer- sity Press, Cambridge 1991.
Winch, Peter, The Idea of a Social Science and its Relation to Philosophy, Routledge, London 1958, 1978.
Brown, Stuart, C.(ed.), Reason and Religion, Cornell University Press, Ithaca 1977.
Flew, A. and MacIntyre, A.(ed), New Essays in Philosophical Theology, SCM Press, London 1955.
Kripke, Saul A., 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 An Elementary Exposition, Basil Blackwell, Oxford 1982.
Budd, Malcolm, Wittgenstein's Philosophy of Psychology, Routledge, London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