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언어에 대한 해석의 문제
홍 성 하*
[한글 요약]
이 논문을 통해 우리가 학문적 언어로서의 논증과 관련하여 종교적 언어로서의 기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종교철학자인 셰플러는 먼저 분석철학적 관점으로부터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사실들의 총체로서 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언어로서의 기도가 무의미한 언어적 진술이라는 의구심이 생겨난다. 오스틴은 이러한 종교적 언어가 무의미하다는 의구심이 언어행위와 그 진술을 혼동한 것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음을 밝힌다. 왜냐하면 진술명제에서는 진리가 문제시된다면, 언어행위에서는 효력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진술명제와 언어행위 사이의 차이는 상이한 방식의 상호주관적인 언어태도에 의존한다. 분석철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언어적인 의사소통에는 상이한 규칙들이 존재한다. 자율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행위가 놀이이며, 자율적 언어놀이는 공적인 사회적 행위가 된다. 자율적 언어놀이의 무정부적 위험에 대해 아펠은 다른 언어의 판단수단으로서 규범적 언어를 분석한다. 규범적 언어는 보편적이고 관념적인 언어공동체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규범적 언어이론과 자율성 이론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선험철학적인 전회를 시도하게 된다. 셰플러는 칸트의 선험적 방법을 철저화한 코헨의 철학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모든 이념의 중심인 신은 동시에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율적이고 도의적인 요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코헨은 기도를 도의적인 개체가 태어나게 되는 언어행위로서 해석하고 있다. 즉 신과 인간의 관계는 죄의 고백이나 면죄를 위한 청원에 있어서 언어행위로서 수행된다.
주제어 : 기도, 논증, 셰플러, 분석철학, 선험철학
1. 들어가는 말
언어철학이 현대철학의 중요한 분과를 이루면서 언어적 표현의 정확성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언어철학적인 전통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상적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거나 아니면 일상언어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찾으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언어의 문제를 철학의 중심주제로 설정하게 된다. 언어의 불명확성으로부터 야기되는 많은 지적인 혼란을 극복함으로써 언어를 통해 표현된 진술의 내용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비단 언어철학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철학 일반의 중요한 과제다. 특히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이해되는 종교적 언어의 객관적 타당성에 대한 문제는 종교철학의 핵심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 논문을 통해 종교철학적인 관점에서 종교언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문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특히 종교적 언어와 이에 상응하는 사태와의 상관관계를 통해 제기되는 타당한 의미에 관련된 물음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종교적 언어가 지시하는 지시체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신앙이라고 하는 고유한 영역에 의해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같은 종교적 언어가 학문적인 틀 속에서 해명될 수 있는가를 탐구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라 본다. 이 논문은 무엇보다 종교적 언어의 문제를 학문적 언어로서의 논증과 연관시켜 다룬 셰플러(R. Schaeffler)의 주요 저서인 『기도와 논증』(Das Gebet und das Argument; G.u.A.로 약칭함)에서 나타난 입장을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셰풀러는 이 저서에서 기도와 논증의 관계가 상호 연관성이 있는지, 아니면 상호간에 엄격하게 분리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언어철학적인 전통으로부터 문제를 제기한다. 예를 들면 전후기 비트겐슈타인과 오스틴의 종교적 언어에 대한 입장을 심도있게 다룸으로써 종교적 언어가 지니는 한계가 무엇이며, 또한 이들 언어철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한계는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특히 종교적 언어가 무의미하다라는 극단적인 언어철학자들의 주장을 논지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험철학적 입장을 수용한다. 특히 칸트의 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아펠과 코헨의 철학이 언어철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셰플러의 논지에 따라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적인 입장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방법론적으로 이 논문은 셰플러의 종교언어에 대한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셰플러가 다룬 언어철학자와 선험철학자의 사상을 해석하는데 주력하였다.
2. 종교적 언어에 대한 언어철학적 분석
1) 종교적 언어의 무의미성
세플러는 종교적 언어, 예를 들면 기도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먼저 언어철학적 입장으로부터 출발한다. 언어철학에서는 철학적인 문제의 애매성을 극복하기 위해 사실과 사태에 대한 관계를 인식론적으로 접근하기 보다 오히려 언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올바른 언어에 대한 해석만을 통해 철학이 부딪치고 있는 많은 애매한 문제들을 명확하게 해명할 수 있기 때문에 해석의 문제가 철학자들의 핵심과제로 등장하게 된다. 셰플러는 먼저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대표적 저서인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이후 '논고'로 약칭함)에서 나타난 언어와 지시체의 관계를 고찰한다.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 세계는 경우인 것들의 총체다. 1.1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1.2 세계는 사실들로 나누어진다. 2 경우인 것, 사실은 사태의 현존이다. 2.01 사태는 대상들의 연계이다. 2.02 대상은 단순하다. 2.021 대상들은 세계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 2.0271 대상은 확고하고 현존하는 것이다. 연계는 변하는 것, 고정되지 않는 것이다. 2.0272 대상들의 연계는 사태를 결정한다. 2.04 현존하는 사태의 총체가 세계이다. 2.061 사태는 상호독립적이다." 이처럼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하여 사태와 대상의 구조와 연관성을 밝히게 된다. 이때 실체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실체와는 달리 세계의 불변적 형식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관심은 형이상학적인 실체를 추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언어를 구성하는 명제들이 의미가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했듯이 언어는 사실의 총체로서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언어는 요소명제로 나누어질 수 있는 명제의 전체로 이루어진다. 요소명제는 단순한 상징으로서 이름의 직접적인 연관이다. 이름이 관계하는 것이 바로 대상을 의미하며 대상이 이름의 지시체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요소명제로 이루어진 명제는 요소명제의 진리가능성에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는가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모든 명제는 실재의 그림, 특히 대상들의 직접적인 연관인 사태의 논리적 그림이기 때문이다. "2.222 그림의 의미가 실재와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는가는 그림의 참과 거짓을 결정한다. 2.223 그림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말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림을 실재와 비교해야 한다. 3 사실에 대한 논리적 그림이 사유이다. 3.01 참된 사유의 총체가 세계에 대한 그림이다. 3.202 명제에서 사용된 기호가 이름이다. 3.203 이름은 대상을 지시한다. 대상은 그 지시체다. 4.22 요소명제는 이름으로 구성된다." 이처럼 초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림으로서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명제는 사실의 논리적 그림이며, 사실과 명제에 공통되는 점은 논리적 구조가 된다. 여기서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는 이름, 사태를 지시하는 요소명제 그리고 사태복합과 관련된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로서 분자명제로 이루어져 있다. 요소명제들로 이루어진 복합명제의 진리치는 이를 구성하는 원자명제의 진리치를 밝힘으로써 결정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명제를 분석하여 이를 구성하는 단순명제, 또는 원자명제들로 환원시킨다. 원자명제는 모든 명제들의 최소단위이며 언어의 기본단위이다. 원자명제의 참과 거짓은 세계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세계는 요소명제와 일치하는 원자적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고 더 작은 요소로 분해할 수 없다. 원자론적 세계는 언어에 대한 진리함수적 분석에 의하여 논리적으로 연역된 세계다.
사태는 세계를 드러내는 복합적 사실과 상호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계를 기술하기 위해 언어가 작용하며 언어의 본질이 바로 세계의 본질이 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언어적 진술은 대상에 관계하거나, 또는 이에 상응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야만 한다. 언어가 지시체나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동일화와 검증가능성이라는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언어를 통한 사유의 유혹은 피해야 된다. 이러한 유혹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구조로부터 기인하는데, 즉 말해진 것은 어떠한 대상에도 관계할 수 없고 어떠한 의미내용도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6.522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보여진다. 그것은 신비적인 것이다. 6.44 세계가 어떠하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라는 것이 신비적인 것이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 그러므로『논고』의 주요과제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즉 의미있는 명제와 의미없는 명제를 구분할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의미가 애매한 명제는 참과 거짓의 판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며, 있을 수 있는 사실의 형식을 표현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보여주기는 한다. 이처럼 언어와 사실과의 일치를 전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세계에 대해서 아무런 진술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다. "4.25 원자적 명제가 참이면 사실이 존재하고, 원자적 명제가 거짓이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4.3 원자적 명제의 진리 가능성은 사실의 존재와 비존재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우리의 일상언어는 애매하고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혼란을 야기한다. 이러한 일상언어의 애매성이나 다의성 때문에 참된 논리적 구조를 지닌 인위적 언어가 필요한데 이것이 이상적 언어다. 이상적 언어는 애매성이나 다의성을 배제하여야 하며, 한 언어적 표현의 문법적 형식이 그 논리적 구조와 일치하는 언어체계를 지녀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철학의 과제가 된다. 그러므로 철학은 언어의 명료화 과정이며, 철학의 목표는 사유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다. 이와같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적 입장과 관련하여 기도와 같은 종교적 명제는 참과 거짓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거부되어진다.
종교적 명제가 의미있는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사실적인 명제이거나 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있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명제는 사실관계와 의미내용에 대한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않고 실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명제의 진리가능성이 사태의 존재와 비존재의 가능성에 있기 때문에 종교적 명제는 분석철학자에게 있어서 참도 거짓도 아닌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러한 종교적 명제는 이를 반증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되어지며 역사적 명제나 경험적 명제로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종교적 명제는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실재를 서술하는 명제와 다른 종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언어는 실재를 그리는 한에 있어서 의미가 있고 실재를 초월한 것은 그릴 수 없다. 그래서 종교적 언어로서의 기도가 무의미한 언어적 진술이라는 의구심이 생겨나게 된다. 단지 종교적인 믿음은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움직일 수 없는 믿음이며, 인간의 삶 전체를 규제할 수 있는 살아있는 힘이다. 이처럼 종교가 과학적 근거를 갖는 것이 아니며 종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종교적 확실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지 종교적 확실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2) 언어행위와 진술
셰플러는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인 종교적 언어가 무의미하다라는 그러한 의구심에 대해서 일상언어철학의 창시자인 오스틴의 비학문적인 언어형식을 분석함으로써 극복하고자 시도한다. 오스틴에 의하면 "모든 문장들이 진술문(statement)이 아니라고 문법학자들이 지적한다. 즉 전통적으로 진술문 외에 의문문과 감탄문이 있으며, 또한 명령이나 기원, 양보를 표현하는 문장도 있다." 그는 상이한 언어사용방식에 대한 입장을 체계화하면서 종교적 언어에 대한 의구심은 언어행위와 그 진술을 혼동한 것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음을 밝힌다. 오스틴은 특히 진술문과 수행문을 분류하는데, 진술과 관련하여 진위적 발화(constative utterance)는 참과 거짓이 문제가 되는 진리와 관련된다. 그러나 언어행위와 관련된 수행적 발화(performative utterance)는 적절함과 부적절함이 문제가 되는 실재와 관련이 된다. "언어행위는 실재적이거나 비실재적이다. 그러므로 그 진리의 조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재의 조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진술은 참이거나 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실재의 조건에 대해서 물을 수 없고 그것이 어떤 것에 관계하고 이러한 대상으로부터 어떤 것을 의미할 수 있다는 조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의미있는 진술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위문과 수행문이 각각 독립된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되어 있다. 진술문이나 진위문은 발화할 때에 어떤 것을 함축하거나 전제해야 하는데, 이러한 함축이나 전제는 진위의 문제가 아니라 적절과 부적절의 문제와 관련된다. 수행문도 때로는 진위의 문제와 관련된다. 예를 들면 황소가 곧 공격할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경고한다. 이는 수행적 발화로서 황소가 공격한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그러나 황소가 공격하지 않으면 그 경고는 부적절한 것이 아니라 거짓이나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오스틴은 진술명제의 문법적 형식으로 나타나는 언어행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수행적 문장, 또는 수행적 발화라 부르는데, 이는 명령문이라는 용어와 같은 계통의 방식과 구문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면서 행동을 수행한다. 이 표현은 사용에 따라 언어행위로서 파악된다. 오스틴은 '내가 너에게 세례를 준다' '내가 너를 자유롭게 한다'와 같은 종교적 의식으로서 성찬식에 통용되는 말을 사태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는 수행적 발화의 좋은 예로서 제시한다.
오스틴에 의하면 행태발화(pheme)는 언어의 한 단위이다. 이것이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결점은 무의미하다는 것, 즉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발화(rheme)는 언어운용(speech)의 한 단위이며, 그 전형적인 결점은 모호하거나 공허하거나 또는 불명료하다. 어떤 것이든 그것을 말하는 것은 항상 어떤 근원적인 音語(vocables)나 말을 발화하는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어떤 어휘에 속하고 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시 말하면 어떤 억양 등과 함께 어떤 문법에 일치하며 또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리를 의미한다. 이 행위를 행태적(phatic) 행위라고 부르며, 그 발화는 행태를 발화하는 행위이다. 어떤 것이든 그것을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다소 한정된 지시체를 가진 형태나 구성요소를 사용하는 행위를 수행한다. 이 행위를 의미적(rhetic) 행위라고 부르며, 이 발화는 의미를 발화하는 행위라 부를 수 있다.
오스틴의 언어철학적 입장에 영향을 받은 종교철학자와 신학자들은 종교적 언어가 무의미하다라는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 대해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종교적 명제는 진술명제가 아니라 단지 언어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신이 전능하다고 표현한다면, 이러한 표현은 종교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종교비판가들은 먼저 이런 표현을 참과 거짓과 관련된 진술로서 간주하면서 신의 전능함에 대한 진술을 무의미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술은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진술명제의 진리요청에 대한 명백한 기준도 없고, 명백하게 동일시할 수 있는 신의 현현이나 신의 전능함을 인식할 수 있는 기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언어행위, 특히 신에 대한 자신의 의무와 관련하여 다루게 된다면 종교적 언어가 무의미하다라는 의구심은 사라지게 된다.
세플러에 의하면 "나는 도리상 좋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행하고 좋은 행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신뢰해야만 한다. 비록 나 자신이나 이 세상의 다른 힘이 좋은 행위와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내가 통찰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적 언어에서 진술명제의 진리가 요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행위의 효력에 대한 요구가 문제시 된다는 입장에 의존한다. 종교적 언어의 무의미성에 관한 이론은 말해진 것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그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언어의 의미는 진술명제의 진리가 아니라 언어행위의 효력에 있다. 그러므로 종교적 언어인 기도가 무의미하다라는 의구심은 "기도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찾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언어를 일종의 언어행위로 파악함으로써 종교적 언어가 무의미하다라는 의구심은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적 종교학자들과 기독교 신학자들은 종교적 언어에서도 진리가 요구되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요구는 기독교에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요구되어지는 진술을 제거하면, 전체 기독교를 제거하게 되는 것이다 (Tolle assertiones, et totum Christianismum tulisti)"라는 루터의 주장에서 잘 나타나 있다.
언어행위가 진술명제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오스틴의 이론에 대해 세플러는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즉 언어행위에 일련의 진술명제가 내포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회의에서 의장이 '회의가 끝났다'라고 공표한다면, 이러한 언어적 공표는 언어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작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른 편에서 이러한 공표에서 '여기에서 회의가 개최된다', '그는 이 회의의 의장이다' 등등의 진술명제가 내포되어 있다. 세플러는 계속적으로 종교적인 언어를 고찰한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아직 죄 안에 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다' 라는 바오로의 말을 예로 들어 보자. 이러한 언어행위가 인간을 구원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끼쳤다는 종교적 공표는 다음과 같은 진술명제를 포함한다.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 이처럼 진술이나 명제의 사실관계와 의미내용에 대한 물음은 언어행위의 명제적인 내용에로 소급됨으로써 대답되어진다. 종교적 언어가 무의미하다라는 의구심을 검증하기 위하여 "비명제적인 언어적 표현들에서, 특히 언어행위에서 명제적 내용들이 포함될 수 있는가 하는 것, 그러나 내포된 것이 이러한 연관성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더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적 언어에 대한 진리요구는 종교적 기적이나 신의 현현을 통해 검증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종교적 언어행위가 영향력있게 작용한다면 무엇이 참으로서 인정되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면서 이러한 종교적 언어는 보장받게 된다.
3) 자율적 언어놀이 이론
셰플러는 진술명제와 언어행위 사이의 차이를 상호주관적인 언어태도와 관련하여 분석한다. 분석적 언어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모든 언어적인 의사소통에는 상이한 규칙들이 있다. 언어 일반의 사용을 의미하는 소위 자율적 언어놀이는 이러한 규칙을 따르게 된다. 자율적 언어놀이 이론은 무엇보다도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저서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이후 '탐구'로 약칭함)와 연관되어 있다. 전기 저서인『논고』가 논리실증주의에 의해 대표되는 분석철학적 전통을 규정한다면, 『탐구』는 일상언어분석으로 대표되는 분석철학적 경향을 띠고 있다. 『탐구』도 『논고』처럼 언어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해명이다. 세계는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세계의 구조를 기술하기 위하여 일상언어의 구조를 분석해야만 한다. 특히 언어적인 표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탐구』의 중심과제라 할 수 있다. 언어적 행위는 구체적인 삶의 형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삶의 형식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서 언어적 표현의 의미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언어의 문제는 삶의 형식과 관계되며 삶 자체의 문제가 된다. 언어에 대한 철학적 해명은 언어와 언어가 사용되는 문화적 맥락의 관계, 어떤 목적을 위해 언어가 사용되는 구체적 맥락을 언어놀이라 부른다. "언어와 그것이 얽혀있는 행동들로 이루어진 것 전체가 언어놀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놀이라는 개념은 "언어를 말함이 하나의 활동이나 삶의 형식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놀이를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훈련이며, 놀이는 규칙을 따르는 행위이다. 언어를 지배하는 규칙은 구문론적, 의미론적, 논리적 문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규칙을 따르는 것은 관습(풍습, 제도)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규칙에 따라 놀이를 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러한 놀이가 따르는 규칙, 즉 언어행위가 따르는 자연법과 같은 규칙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미장이와 조수의 관계에서 '벽돌'이라는 낱말이 쓰이는 법을 알아야 언어놀이가 가능하다. 그래서 미장이가 '벽돌'이라고 외치면 조수는 벽돌을 미장이에게 날라 줄 수 있다.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임의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문화로부터 자연스레 습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의 실행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과 규칙을 따르는 것은 다르다. 따라서 사적으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규칙을 따르는 것이 똑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 상호간의 언어놀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규칙을 따르는 행위는 공적인 사회적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언어규칙체계의 구조는 객관성, 주관성 그리고 상호주관성이라는 상이한 방식들로 정의내릴 수 있다. 즉 다양한 태도방식은 언어적 표현들이 형성되는 다양한 규칙체계의 구조에 상응하게 된다.
셰플러는 이러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근거하여 언어놀이의 자율성에 의해 종교적 언어도 고유한 규칙을 지니게 된다고 믿는다. 바로 이러한 규칙에 따라 종교적 대상들, 종교적 의식의 주관성 그리고 종교적 공동체의 상호주관성이 형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행위의 자율성은 상이한 언어들 사이에서 무정부적 관계를 산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상호주관적인 언어태도들의 상이한 형식들을 비판적으로 상호 비교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공통적인 규칙들이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종교적 언어로서의 기도와 학문적 언어로서의 논증 사이의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언어가 고유한 규칙을 따르기 때문에 학문적인 종교비판도 종교적인 학문비판도 인정할 수 없다. 셰플러에 의하면 한 주체가 학자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동시에 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3. 종교적 언어에 대한 선험철학적 입장
1) 관념적인 규범적 언어이론
자율적 언어놀이의 무정부적 위험을 극복하기 위하여 세플러는 아펠에 의해 심도있게 다루어진 규범적 언어를 분석한다. 아펠에 의하면 "심지어는 젊은 비트겐슈타인도 우리가 자연적 과정을 기술하는 식으로 의미나 의도적 의미 또는 이해같은 것을 기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것들은 언어 속에서 혹은 이에 역행해서 자연적 과정을 얼마나 기술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전제조건이 되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기본이 되는 분석적 접근은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에서도 유지되었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언어의 기능이 세계묘사의 선험적 논리에 의해서 더 이상 좌우되지도 않고, 오히려 삶의 형태나 습관의 구성요소인 실제적 언어놀이의 무한한 다양성 속에 용해되어 버린다." 전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적인 입장 차이를 지적하면서 아펠은 칸트의 선험철학과 관계하여 두 가지 주제를 설정하고 있다. "첫째, 오늘날 지배적인 학문논리에 반대하여 나는 모든 철학적 학문이론이 칸트에 의해 설정된 학문의 가능성과 타당성의 선험적인 조건에 대한 물음에 대답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정통적인 칸트주의의 대표자들에 반대하여 칸트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한 대답이 오늘날 선험적 의식 일반의 칸트철학에로 소급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학문의 선험적 주체에 대한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언어와 언어공동체의 선험적 입장 차이를 통찰함으로서 매개되어져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인식의 상호주관적인 타당성이 칸트의 관념론에서처럼 주체나 의식 일반의 실체화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이해를 위한 전제로부터 나오게 된다. 이처럼 아펠은 경험 가능성의 조건을 추구하는 칸트의 선험철학에 대한 변형을 시도하면서 윤리학적 규범의 정초문제를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로 간주하게 된다.
아펠은 윤리적 규범들을 증명하기 위해 언어화용론적인 입장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규범적 의미를 지닌 관념적 언어놀이라 불리워지는 선험적 언어놀이를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규범적 언어는 "보편적이고 동시에 관념적 언어공동체를 가능케 할 것이다. 이 언어는 그 보편성에 의해서 단지 있을 수 있는 모든 화자와 청자를 유일한 의사공동체와 상호작용 공동체에로 소급시킬 뿐만 아니라, 언젠가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사실과 사태들을 유일한 언어에서 표현하는 것을 동시에 그 관념성에 따라서 인정하게 된다." 이처럼 규범적 언어는 보편적이며 동시에 관념적인 화자공동체에 이미 주어져 있다. 여기서 언어행위의 규범적 언어이론과 자율성 이론 사이의 모순이 생겨난다. 이러한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칸트의 선험철학은 언어철학자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이 셰플러의 입장이다. 칸트 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또다른 이유는 모리스의 『기호론의 기초』(Foundations of the Theory of Signs)라는 저서 이래로 통용되는 기호학의 세 부류, 통사론, 의미론 그리고 화용론으로부터 유래한다. 이때 의미론은 기호와 지시된 것 사이의 관계와 관련되며, 통사론은 상이한 언어적 표현들이 어떻게 상호 관계하는가를 다룬다. 반면에 화용론은 화자와 청자가 일정한 언어형식을 사용한다면 이들이 무엇을 하게 되는가를 묻게 된다. 다시 말하면 언어표현, 지시체, 언어표현의 사용자나 사용되는 문맥간의 관계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와 같은 기호체계에 대한 고찰방식들이 어떻게 하나의 적합한 이론에 관계하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언어분석론자들은 이러한 세 차원의 언어들에 대한 통일적이고 포괄적인 언어, 즉 이상언어를 세우고자 한다. "이상언어의 문법이 상호주관성과 같이 객관성의 이상적 형식을 가능케 한다." 언어의 이상적 문법에서 보편적인 의사소통 공동체가 구성된다. 그러나 언어의 실천적 보편성은 문법적이고 의미론적인 특수성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므로 언어의 실천적인 보편성과 언어의 의미론과 문법의 특수성 사이의 관계는 학문적 언어와 종교적 언어의 관계와는 상이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기도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도 학문적으로 논증할 수 있다. 학문적인 논증언어는 이러한 영역에서 자율적일 뿐만 아니라 자족적이다. 예를 들면 "학문적 언어로 말하는 언어공동체는 과제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시에 종교적 언어로 말하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공동체에서 종교적인 화자와 청자를 교류시키기 위해서 신학의 논증언어를 도입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언어는 자족적이지 않고 단지 자율적이다. 종교적 언어는 학문적인 논증언어 형식에 관계해야만 하고 학문적인 논증언어로 번역되어져야만 한다.
셰플러의 관점에 따르면 종교적인 언어와 학문적인 언어와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이상적인 규범언어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종교적 언어에 대한 의구심에로 소급되어진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칸트의 선험적인 물음에 대한 언어철학적인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스틴이 언급하고 있듯이 "윤리적 명제들은 감정을 나타내거나 행위를 처방하거나 행위에 특별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을 의도한다. 칸트가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러한 경향은 "언어형식(문법), 언어공동체에 대한 관계(활용론) 그리고 대상관계를 가능케 하는 기능(의미론)에 대한 분석에 응용시키는 선험적인 반성의 수행방식과 결과를" 칸트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선험철학의 선험적 전회가 언어적 전회를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선험철학에 언어적 의미를, 언어철학에 선험적 의미를 부과시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분석철학자들은 언어철학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관의 형식과 오성개념에 대한 칸트의 해석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들은 언어적 형식과 의도된 내용 사이의 관계를 새로이 규정하고자 시도했다.
2) 선험적 논제
셰플러는 어떻게 언어철학이 선험철학적 지평에로 전회하게 되었는가를 고찰한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신칸트주의자인 캇시러의 언어에 대한 견해를 분석한다. 상이한 인간의 언어를 제시하고자 시도하는 캇시러는 아펠과는 달리 언어의 객관화 기능을 주제로 삼으면서 언어를 보편적 객관화 형식으로 파악한다. 특히 언어적인 지시를 통해서 사유와 말함의 대상관계가 가능해진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캇시러에 의하면 칸트에게 있어서 대상은 "단지 모든 객관성이 아니라 학문의 근본개념들에서 파악되고 묘사되는 객관적인 법칙성의 모든 형식이다." 그는 대상과 대상관계의 구축을 위한 조직을 상징적 형식이라 부른다. 캇시러의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상징이다. 인간도 역시 "상징적 동물(animal symbolicum)"로서 상징의 세계 속에서 살아 가면서 자기와 세계의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이처럼 현실세계는 상징적 형식으로 파악되며, 이 형식의 구조를 결정지워 주는 정신의 기능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적 형식은 선학문적인 언어와 종교적 언어, 그리고 학문과 그 언어가 유래하는 논리적 규칙체계라는 세가지 구조적으로 다른 방식을 이룬다. 이와 같은 상징적인 형식체계는 주관적인 표상으로부터 대상세계를 구성하며 동일한 객체로서 세계에 관계한다. 그러나 세플러는 "캇시러가 상징적 형식의 다원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언어행위이론이 얼마나 중요하고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깨닫지 못했다"고 비판적으로 술회하고 있다.
셰플러는 특별히 마부르크 신칸트주의자인 코헨의 견해를 다루고 있다. 코헨은 칸트의 선험적 방법을 철저화하면서 칸트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시도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순수이성의 변증법을 실천적인 사용과 연관지워 다루는데, "이러한 개념 (자아, 세계)이 의미하는 것을 인식의 대상, 특히 실천의 목적에로 만들고자 시도하는 한에 있어서" 이성은 변증법적이다. 자아의 통일성과 세계의 전체를 기술하는 개념들은 칸트에게 있어서 범주가 아니라 이념으로서 목표에 대한 표상이다. 사유와 행위에서 대상관계에 대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이념을 통해서 현상의 세계와 목적의 세계가 구성된다. "이론적 이성 사용을 통해 현상의 세계를 만들고 실천적 이성 사용을 통해 목적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이념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의 인식과 행위의 대상은 칸트에 의하면 주체의 활동, 즉 직관과 사유를 통해 구성된다. 그러나 코헨은 모든 것을 인식 주관에 포섭하여 감각을 설명하기 위해 개념과 범주를 생산하는 순수사유를 주장한다. 즉 사유형식이 순수한 것이라는 사유일원론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유대교적인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는 코헨은 종교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특히 믿음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서 위안의 문제가 되므로 더 이상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에 관련된 문제라고 본다. 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철학적 체계에 의해 정당화 되지 않고 예언이나 찬송에 의해 나타나기 때문에 전적으로 개인의 확신에 달려 있다. 코헨에 의하면 이러한 신이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율적이고 도의적인 요구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한다. 신은 모든 이념의 중심이며 진리의 이념으로서 신의 의미는 그의 명령의 도의성이 게시된다는 점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므로 도의적인 이상은 신의 이념을 통해 지지된다. 칸트의 대상 구성과 달리 코헨은 직관하고 사유하며 의욕하는 자아를 의미하는 도의성에서의 주체의 구성을 도입하였다. 도의적 주체는 행위 이전에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안에서, 즉 언어행위 안에서 탄생한다.
코헨에 의하면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의 자기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인간이 자신의 과오를 신에 대한 과오로서 파악하는 점에 있다. "인간이 자신의 과오를 신에 대한 과오로서 이해하면서 신을 통해 회심할 수 있다고 희망할 수 있다." 신과 인간 사이의 상관관계는 상호간의 변증법적인 교류에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신의 명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코헨은 기도를 도의적인 개인이 탄생하는 언어행위로서 해석한다. 이 언어행위는 의식언어에서 그 기반을 지니며 종교적 공동체의 의사소통 공동체와 긴밀한 연관을 맺게 된다. 코헨은 공동체를 언어행위가 가능한 화자와 청자의 공동체로 규정짓는다. 이러한 해석의 언어철학적인 의미는 언어철학적인 방법에 기여하는 선험철학이 주체 구성을 주제화한다는 점에 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죄의 고백이나 면죄를 위한 청원에 있어서 언어행위로서 수행된다. "인간은 자신의 범죄가능성에 의거하여 자신의 약점과 무력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욕구로부터 신에 대한 요구가 생긴다. 신 자체가 개인과 연결되기 때문에 도의성의 신이 종교의 신이 된다. 죄로부터 구원은 기도의 본래적인 목표이며 내용이다." 게다가 기도는 종교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특별한 수단으로서 인정된다. 그러므로 언어행위 없이는 인간과 신의 상관관계는 단순한 이론에 불과하다. 코헨은 무엇보다 의지와 사유의 수단에 있어서 효력을 확립하는데, 이러한 것을 통해 언어행위에 대한 효력이 진술진리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 대답하게 된다. 코헨의 윤리학은 그 방법이 선험적인 순수의지에서 기인한다. 순수의지는 행위에서 수행되며 도의적인 의지는 의욕과 행동에서 주체의 통일성에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도의적인 주체는 그 통일성에서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4. 맺음말
우리는 종교철학자인 셰플러의 관점으로 종교적 언어로서의 기도와 학문적 언어로서의 논증의 관계를 논하였다. 셰플러는 언어문제를 무엇보다도 언어철학적인 입장과 선험철학적인 입장으로 나누어 주제화시키고 있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종교적 언어의 무의미성으로부터 문제를 제기한 셰플러는 오스틴의 언어행위이론에서 그 해답을 일단 찾게 된다. 진위적 발화와 수행적 발화의 구분을 통해 종교적 언어를 단순히 진술명제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행위를 수반하는 종교적 언어도 고유한 놀이의 규칙이 있다는 입장을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이론으로부터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놀이의 규칙이 지니는 특수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셰플러는 선험철학적 전회를 시도한다. 보편적 도덕적 규범을 정초시키려는 아펠의 입장을 통하여 상호주관적 세계에 대한 물음이 셰플러의 중심과제로 대두되었다. 특히 종교적 공동체에서 상호의사소통의 가능성을 해명하기 위하여 제시되는 것이 종교적 언어의 학문적 논증 형식이다. 셰플러의 연구는 코헨의 철학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르게 되면서 신과 인간에 대한 연구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믿는다. 코헨에게 있어서 도의적인 주체라는 개념에 근거하여 신과 인간의 관계가 새로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셰플러는 코헨이 주체를 구성하는 언어행위이론이 자아구성과 대상계의 구축을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케 한다는 귀결에 이르러야만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고 비판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셰플러는 종교적 언어의 무의미성을 극복하기 위한 해답을 선험철학적 틀 속에서 찾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이 논문에서 종교적 언어에 대한 문제를 분석하기 위하여 여러 중요한 철학자들의 방대한 사상을 너무 간단하게 다룸으로써 많은 비판의 소지가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한 것은 세플러의 종교언어에 대한 입장이다. 이는 많은 종교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이나 명제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이며 이러한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지침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셰플러가 시도하고 있는 종교언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바로 종교철학의 목표이며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될 과제라 생각한다.
[출처] 종교적 언어에 대한 해석의 문제-홍성하|작성자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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