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백 년 동안의 고독』: 신화에서 역사로, 역사에서 문학으로

나뭇잎숨결 2013. 2. 11. 01:56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 임종의 자리에서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는 첫 아들을 보려고 침실로 들어갔던 7월의 어느 비오는 날 오후를 회상하였다. 비록 그 아이가 힘없이 울기만 하고, 부엔디아 집안의 특성을 하나도 타고 나지 못했어도 그는 아이의 이름을 짓는 데 별 힘이 들지 않았다.

「이 아이는 호세 아르카디오라고 부릅시다.」그는 말했다.
작년에 그와 결혼한 아름다운 여인인 페르난다 델 까르삐오는 그러자고 했다. 그러나 우르슬라만큼은 막연한 회의를 숨기지 못했다. 집안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똑같은 이름들이 자꾸만 되풀이되어 쓰이다 보니 우르슬라는 어떤 단정적인 결론들을 얻게 되었다.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머리는 좀 좋은 편이면서도 성격만은 내성적이었고, 호세 아르카디오라는 이름을 받은 아이들은 충동적이며 모험심을 타고나서 어떤 비극적인 면모를 지녔다. 그 차이점을 얼핏 가려낼 수 없는 경우라고는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와 아울렐리아노 세군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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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으로 자기의 영혼이 그토록 엄청나게 무서운 과거를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기 자신의 향수와 남들의 향수가 찔러대는 필사적인 창 끝에 상처를 입은 그는 말라죽은 장미숲을 얽은 거미줄을 끈질김과, 독보리풀의 참을성과, 찬란한 2월 새벽 하늘의 인내심을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갓난아이를 보았다.

온 세상에서 다 모여든 듯 바글바글한 개미떼가 정원의 돌길을 따라서, 바짝 쿨기가 빠지고 껍질만 자루처럼 붕싯하게 부푼 아기를 끌고 그들의 굴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기막힌 장면을 보는 순간, 그는 공포에 질려 몸이 굳어지는 대신, 멜뀌아데스의 마지막 비밀을 깨달아 그 양피지 원고에서 인간의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가리키는 글귀를 터득하게 되었다. '역사의 시포는 나무와 연결되어 있고, 종말은 개미들에게 먹히울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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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키아데스가 큰소리로 외치곤 했다. 이글이글 타오른느 어느 날 정오, 집시들은 그 거대한 돋보기를 가지고 놀라운 광경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길 한가운데에 마른 풀잎들ㅇ르 쌓아놓고서 태양 광선을 모아 불을 붙였다. 그 자석 건이 실패로 돌아간 것 때문에 아직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있던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그 발명품을 전쟁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멜키아데스는 다시금 그의 생각을 고치려고 애쓴다.

그러나 결국 멜키아데스는 그 돋보기를 그에게 내주고 자석들과 식민지 시대 금화 세닢을 받고 말았다. 우르술라는 속이 상해 울었다. 그 돈은 그녀 아버지가 궁핍하게 살면서 평생에 걸쳐 모은 것으로, 좋은 기회가 오면 투자하기 위해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궤짝에 든 금화들 가운데 일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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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신화에서 역사로, 역사에서 문학으로

- 김 용 호






I. 들어가며

         『백년의 고독』이 출판된 지 올해로 35년이 흘렀으며, 국내에 소개된 지도 어언 25년이 흘렀다. 1967년 초판이 출간된 이래 20여개국 언어로 번역, 소개되면서 이 책만큼 세계 문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도 드물 것이다. 풍성한 내용으로 인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다는 지트릭(Jitrik, 1974, 578)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계열의 작가들에게 다양한 영향을 끼친 이 작품은, 출판 당시부터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선풍을 일으키며 국내 문단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중 특히 김성동, 조성기 등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엔 황석영의 『손님』을 통해 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90년대의 국내 문단이 80년대의 리얼리즘적 억압에서 벗어나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며 현실도피 문학의 한 형태로서 환상문학을 표방하고 있을 때, 황석영은 그의 작품 『손님』을 통해 국내 문단에 리얼리즘과 환상문학의 병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우리들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인 내전과 분단의 문제를 주술사를 등장시켜 화해시키는 황석영의 작품은 리얼리즘 문학 속에 환상이나 주술 등을 삽입시킴으로써 리얼리즘 문학의 확장을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바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 내려지는 평가와 똑같은 것이다.

         콜롬비아의 좌파 게릴라 단체인 M-19라는 단체를 지원했다는 혐의로 정부에 의해 수배를 받고 멕시코로 망명을 떠나 1982년 노벨상을 수상할 때까지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다른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처럼 중남미의 왜곡된 정치, 사회,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이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신념은 노벨상 수상 연설문인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이 글을 통해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 및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으며, 특히 독립 후에는 미국이 후원하는 독재자들의 강압 통치를 겪어야만 하는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고독’을 온 세계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백년의 고독』이 그러한 역사적, 정치적 상황을 직설적으로 고발한 소설은 아니다. 50-60년대에 유행하던 콜롬비아의 다른 리얼리즘 소설들에 비해 그의 소설은 직설적인 고발의 강도가 다소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아픈 현실에 신화, 상징 등을 삽입하는 기법으로 콜롬비아를 벗어나 온 라틴아메리카에 일상화되어 있는 폭력의 역사를 더욱 신랄하게 비판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폭력의 역사를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폭력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어떻게 종결되는지 즉 폭력의 근원들을 이해하고자 했다”는 앙헬 라마(Rama, 1991, 84)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그렇지만 『백년의 고독』이 근본적으로 콜롬비아의 역사를 떠나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엔 콜롬비아의 비극적 역사들이 아주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백년간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승리와 좌절의 역사인 『백년의 고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20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구체적인 시간 개념이 결여된 제1부 신화의 시대와 콜롬비아의 구체적 역사가 기술된 제2부 역사의 시대, 그리고 그 역사적 시대를 주관적으로 재해석, 재발견해 내는 제3부 문학의 시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천일 전쟁’과 ‘바나나 농장의 파업’ 사건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제2부는 말 그대로 콜롬비아의 백년간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보수당이 창당됨으로써 양당제가 고착화되기 시작한 1849년부터 1948년 가이탄(Jorge Eliecer Gaitán)의 암살로 촉발된 ‘보고타 사태’까지 정확히 100년간의 역사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100년이라는 의미가 정확한 역사적 의미보다는 상징적, 신화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엔 필자도 동의한다. 하지만 1849년에서 1948년에 이르는 콜롬비아의 역사와 그 기간 중에 발생했던 두 번의 사회변혁운동의 중요성을 상기한다면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부엔디아 가문의 백년간의 고독이 철저히 콜롬비아의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II. 신화의 시대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 이끌려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떠올려야 했다”는 과거와 미래, 현재가 복합된 문장으로 모호하게 시작하는 『백년의 고독』의 첫 부분은 이 작품 이해의 열쇠들을 암시해주는 역할을 한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시작은 종말에 내재되어 있고, 종말은 시작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순환적, 종말론적 시간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기에 신화의 시대에 대한 이해는 앞으로 전개될 역사의 시대에 대한 전사로서 매우 중요하다. 총 20장으로 이루어진 소설 중에서 1장에서 3장까지를 차지하고 있는 신화의 시대는 신화적 공간인 마콘도의 탄생과 부엔디아 가문의 시작, 그리고 외래 문물인 집시와의 만남 등을 다루고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시간 개념이 모호하고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구체성이 결여된 신화적 원형을 창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작중인물의 이름까지도[주. 신화시대의 주요인물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이름은 고대 그리스의 아카디아, 즉 낙원을 상정하며 작명한 것이다] 신화적 원형을 의식하며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의 시대엔 마콘도에 대한 역사 서술방법과 관련된 세 가지의 중요한 상징코드가 등장한다. 첫째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라는 근친간의 결합으로 인한 부엔디아 가문의 형성과 그로 인한 몰락에 대한 암시, 그리고 마콘도의 건설을 들 수 있다. 이미 조상들에 의해 한번 저질러졌던 원죄와도 같은 근친상간의 죄악은 그로 인해 돼지꼬리 달린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멸망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다. 이러한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는 세계의 여러 신화들 속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신화로 특히 인간의 숙명을 잘 나타내고 있는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신화는 가장 유명하다. 물론 성경 속에서도 아담과 이브의 탄생 또는 노아의 방주 이후에 탄생한 문명들 속에서 근친상간의 사례들이 보이지만, 부엔디아 가문의 멸망할 수밖에 없는 숙명과 관련지어 볼 때 오이디푸스 신화와의 관련성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마치 오이디푸스에게 주어졌던 가혹한 신탁과 운명이 그의 모든 것을 망쳐놓고 평생을 고통 속에 지내게 만들었듯이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근친간에 피할 수 없는 유혹을 느끼고, 이로 인한 심리적 압박과 공포 때문에 고독 속에 평생을 보내는 숙명을 맛보며, 끝내는 근친간의 결합으로 인해 멸망을 맞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마콘도의 건설과 관련해서도 서구 신화와의 연관관계는 두드러져 보인다. 근친간의 결합과 친구의 살해 그리고 마을을 떠나는 부엔디아와 우르술라의 모습은 성서 속의 여러 인물들을 패러디한 것이며[주. 조상들의 땅이요 근친상간의 행위가 이루어지던 곳(리오아차)을 떠나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고 자손을 생산하는 행위는 성서의 창세기를 패러디한 것이다. 낙원을 떠나는 모티브는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원죄(선악과)를 지은 뒤나 형제를 살해한 뒤 그들은 공히 낙원에서 추방되어 새로운 땅을 건설하였다. 또한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이라는 새로운 땅을 건설하는 것으로 모세 5경이 끝남을 상기할 때, 리오아차를 떠나 마콘도를 건설하는 행위는 모세 5경의 완전한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건설된 마콘도의 모습은 마을이면서도 소우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전형적인 신화적 공간인 것이다.

         두 번째 코드는 마콘도와 외부문명의 만남을 들 수 있다.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늘 새들이 지저귀는 행복한 영생의 마을이었던 마콘도는 점차 현대문명과 그 제도의 침투를 받으면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조정할 것이 하나도 없는 곳에 국가의 공무원인 조정관이 무장한 군인들을 데리고 부임하면서 마콘도의 몰락은 시작된다. 정당과 선거의 도입으로 내전이 발생하고, 미국인들이 건설한 바나나 농장은 대학살을 일으킨다. 이러한 외부문명의 도입과 제국주의의 침탈이 마콘도를 서서히 멸망시켜 나가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 4장에서 16장까지의 중요 내용이다. 하지만 이미 신화의 시대에서 이러한 몰락에 대한 암시들이 등장한다. 마콘도에 처음 등장한 외부 문명은 멜키아데스와 집시들이 소개한 과학문명이었다. 그들은 자석, 망원경, 돋보기, 얼음을 마콘도에 소개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문명은 마콘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긍정적인 영향을 하기보다는 주민들을 타락시키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집시들의 방문 이전엔 가장 “진취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남자였던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23)의 타락은 마콘도의 암울한 미래에 대한 예시이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의 그런 공동체적인 솔선수범 정신은 자석들에 관한 열병, 천문학적 계산, 물질의 변이에 대한 동경, 세상의 경이들을 알고자 하는 열망에 이끌려 이내 사그라들어 버렸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적극적이고 대담하고 깔끔했던 사람에서 아무거나 주워입고,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 우르술라가 부엌칼로 진땀을 빼며 다듬어주어야 했던, 건달 모습을 한 사내로 변해 버렸다.(24)



        진보된 문명의 전파자였던 멜키아데스와는 달리, 뒤에 도착한 집시들은 단순히 “여흥을 전파하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54)에 그친다. 진보된 문명을 받아들여 황금을 찾고 전쟁무기를 개발하려고 삶의 기반인 당나귀와 염소를 주었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이제 유희를 위해 화폐를 지불한다. 외래문물은 그들에게 끊임없는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시대에 도입된 마지막 외래 문물은 불면증이다. 과히라 출신 원주민 비시타시온과 레베카가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콘도는 불면증이라는 전염병에 휩쓸리며 이로 인해 과거의 모든 기억을 상실하고 문자시대, 역사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이외에도 우르술라가 발견한 길을 통해 들어온 외부문물 등 외부와 접촉된 모든 것이 원시적인 마콘도를 점차 근대화, 도시화시켜 먼 미래에는 “마콘도가 부엔디아 가문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은, 유리로 지은 거대한 도시가 될 것”(87)이라는 멜키아데스의 예언에 이르게 된다. “이 질병이 일단 집 안으로 들어오면 아무도 피할 수 없지요”(73)라는 비시타시온의 숙명적 절규에서 드러나는 외래 문명의 폐해는 다음 역사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그렇기에 우르술라는 멜키아데스를 처음 만나자마자 그에게서 “악마의 냄새”(19)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외래 문물이 가져올 폐해를 이성이나 합리적 추론 이전에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세 번째 코드는 프란시스코에 의한 구전설화 이야기이다. 구전설화는 역사시대 이전의 민중들이 “바깥세상에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83) 유일한 수단이다. 온 세상을 유랑하며 노래하는 유랑시인들을 통해 그들은 먼 곳에 있는 아들의 소식을 유추하며, 심지어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83)까지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구전설화는 공식적인 역사는 아니다. 권력을 가진 역사가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재단되지 않은 순수한 민중들의 삶의 흔적이요 기록인 것이다. 후일 바나나 농장에서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부의 공식역사는 이를 부인하고 왜곡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구전설화를 통해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렇듯 구전설화는 공식역사가 왜곡하고 감추는 민중들의 수난의 역사를 복원시키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작품 속의 많은 사건들은 서구의 텍스트들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며, 그로 인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서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구전문화적 전통을 차용함으로써 민중들에게 낯설지 않은, 친근한 환상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하듯이 콜롬비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III. 역사의 시대

        이 작품의 2부를 구성하고 있는 4장부터 17장까지는 콜롬비아의 역사적 사실을 아주 분명히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즉,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콜롬비아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사회변혁운동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천일전쟁(千日戰爭, 1899-1902)과 바나나농장 파업사건(1928)으로 대별된다. 총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역사시대에는 두 명의 중심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와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이다. 작품의 구조는 정확히 대칭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5장에서 9장까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부정선거에 항의해 내전을 일으키는 내용 앞에 신화시대와 역사시대를 연결해주는 4장이 자리 잡고 있으며, 천일전쟁과 바나나농장 파업사건을 연결해주는 10장과 11장을 거쳐 12장에서 15장까지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와 그 동료들이 바나나농장에서 파업을 일으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16, 17장의 고리를 통하여 역사시대와 마지막 문학시대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즉, 정확하게 대칭적인 구도를 통해서 이 작품의 중심 테마가 콜롬비아의 역사적 사실이며 신화시대와 문학시대는 그 비극적 역사의 뿌리와 재해석이란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시대는 외부문물인 행정제도의 도입과 신화적 인물인 멜키아데스의 죽음,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몰락을 통해 시작된다. 조정관이 부임하는 등 행정제도가 도입되면서 마콘도는 원시문명의 자연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들을 점차 상실하고 근대적인 도시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부엔디아 가문의 집도 새롭게 확장되고 자동피아노 등이 수입되면서 마콘도는 근대화되며, 새로운 진리와 질서를 요구하게 된다. 이에 과거 신화시대의 진리와 질서를 담당했던 두 인물인 멜키아데스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사라져야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화시대의 진리를 담당했던 멜키아데스는 마콘도 최초의 사자(死者)가 되어 땅에 묻히고,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신의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신의 형상을 찾는 작업을 중단하고 난”(98) 뒤 광인(狂人)이 되어 나무에 묶인다. 혼돈의 시대에 빛을 전파해주고 바위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도 나무에 묶인 채 인간 역사의 발전과정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반체제 인물, 비밀스런 신의 권능을 훔친 인물, 인류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벌을 받은 인물, 이러한 것들이 프로메테우스라는 거대한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는 신화소들”(뒤랑, 35)이라면 세상의 온갖 미스터리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싸움은 그를 프로메테우스적 신화성으로 부각시키며, 그의 죽음을 맞기 위해 저승에서 찾아오는 프루덴시오, 카타우레의 유령 등과 어울린 신성의 상징 노란색 꽃비의 하강은 그의 몰락을 더욱 신화적으로 만든다.

        과도기를 거친 마콘도는 본격적으로 역사시대에 진입하게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백년의 고독』에서 다뤄지는 콜롬비아의 역사는 두 가지 중요한 사회변혁운동을 다루고 있다. 하나는 이상적인 자유당 시대를 건설하고자 투쟁했던 기간이며, 또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변혁운동을 꾀했던 기간이다. 콜롬비아는 1810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지만 보야카 전투에서 승리한 1819년에 이르러서야 사실상의 독립을 획득한다. 하지만 독립 이후에도 중앙집권을 주장하는 세력과 연방제를 주장하는 세력간에 끊임없는 갈등을 겪게 되며, 이는 1849년 보수당이 창당되면서 더욱 격화된다. 콜롬비아의 역사를 대별해 보면 일반적으로 독립을 선포한 1810년부터 1862년까지는 보수당 또는 보수 이데올로기가 강성했던 시기이고, 이후 약 20년(1863-1885) 동안의 자유당 낙원기(Utopia libera)와 다시 약 50년(1886-1929) 동안의 기나긴 보수당 재집권기, 그리고 15년(1930-1946) 간의 짧은 자유당 통치기를 통해 폭력시대(La Violencia)에 이르게 된다. 한마디로 보수당과 자유당의 끝없는 이데올로기 갈등이 벌어졌던 100년간이었던 것이다.

        윌리암스 교수에 의하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세기 하반기를 “자유당이 진정한 자유당의 모습을 가졌을 때이며, 그렇기에 콜롬비아의 역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기간”(William, 29)이라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작품 속에서 이상적인 자유당 시대를 복원시키고자 노력했던 부분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의 결혼으로 시작해서 그의 자살실패로 끝을 맺는 5장에서 9장까지이다. 그는 처음에 보수당 조정관의 딸과 결혼을 함으로써 보수당적인 색채를 띠지만 그들의 선거부정과 잔혹한 통치에 염증을 느껴 자유당에 가담하고 32차례나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그의 봉기는 모두 실패했고 17명이나 되는 아이들도 산으로 도망친 큰아들 아우렐리아노 아마도르를 제외하곤 모두 살해당했다. 이는 현재 산악지방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좌파 게릴라 단체들의 혁명운동 외에는 콜롬비아에서 시도되었던 수많은 사회변혁운동이 모두 실패했음을 암시한다. 빨간 색으로 표상 되는 자유당의 정치인들은 처음에 “이혼 제도를 도입하고 서자도 적자와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는”(149) 등 정교분리, 노예해방, 토지분배, 언론의 자유, 공공교육의 확충, 자유무역, 연방제 등을 통한 자유로운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혁명의 이상이 퇴색되어 각료 몇 명과 혁명을 교환하기(216)에 이르게 된다. 이로 인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과 그 일행의 “위대한 자유당을 건설하기 위한”(205) 초기의 혁명이상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205) 부질없는 투쟁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제 보수당과 자유당 사이에 남은 차이는 5시 미사에 참석하느냐 8시 미사에 참석하느냐 정도인 것이다. 그들은 “마콘도에 전원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206) 아버지 세대와 똑같은 21명의 장정이 자유당 봉기에 참여했지만 원하던 평화는 얻지 못한 채 직업 정치인들과 군부에 농락만 당한 채 32차례의 전쟁에 모두 패하게 된 것이다.

        100년 동안 콜롬비아 정치의 수장은 수없이 바뀌었다.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자유당에서 다시 보수당으로, 통치권자는 수없이 교체됐지만 민중들의 수탈당하는 삶은 변화가 없었다. 마콘도에도 민중들의 봉기로 자유당 정권이 성립됐지만 아르카디오의 철권통치는 이전 보수당 정권보다 더욱 잔혹했으며, 호세 아르카디오의 착취는 정권에 상관없이 계속되었다.



몇 년이 지난 다음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부동산 소유권에 관한 사항을 검토하다가, 자기 집 마당 언덕에서부터 공동묘지를 포함하여 지평선 끝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이 형 호세 아르까디오 명의로 되어 있으며, 아르까디오는 마꼰도를 통치하던 십일개월 동안 소작료뿐만 아니라 호세 아르까디오 소유지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요금까지도 징수해 착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75)

호세 아르까디오는 몰수한 땅의 소유권을 보수파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계속해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199)


        1954년 하라미요(Ignacio Gómez Jaramillo)가 그린 <분노와 고통>(La furia y el dolor)이라는 그림에는 이와 같은 민중들의 슬픔이 잘 드러나 있다. 대지에 누워있는 흰 옷 입은 민중의 시체를 뒤에 두고 울면서 고향 땅을 쫓겨나는 노란 옷의 두 여인과 발가벗겨진 어린아이의 모습과 대조되는, 파란색과 빨간색의 두 마리 이리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처연하게 만든다. 민중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죽이며 고향 땅에서 쫓아내는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파란색 보수당 권력자요 빨간색 자유당 정치인들인 것이다. 노예해방, 토지분배, 언론의 자유, 공공교육의 확충 등을 통해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자유로운 이상향을 건설하려던 자유당의 이념은 어느새 퇴색한 이데올로기가 되어 그들도 보수당과 똑같이 민중들을 수탈하고 핍박하는 이리떼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 과정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첫 번째로, 자유파 지주들의 지지를 다시 얻으려면 토지 소유권에 관한 재조사를 단념하라고 요청했다. 두 번째로, 카톨릭 교인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성직자들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투쟁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지막으로는, 가정의 고결함을 보존하려면 적자와 서자 사이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해 주는 법안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만 투쟁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사절단이 제안서를 다 읽자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전략적인 수습책이지요. 현재 중요한 것은 전쟁의 대중적 기반을 확대하는 것이니까요. 장차 일은 나중에 재고하기로 하고요.> 사절단 가운데 한 사람이 대꾸했다.(250-251)



        1902년 10월 24일 네에를란디아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자유당의 봉기는 실패로 끝난 채 막을 내렸다. 하지만 비극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휴전협정의 당사자로 이 소설에 나오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모델이 되었던 라파엘 우리베(Rafael Uribe Uribe) 장군이 1914년에 암살되었고, 1948년엔 가이탄이, 그리고 1966년엔 카밀로 토레스(Camilo Torres)가 뒤를 이었다. 콜롬비아에서 변혁운동을 이끌던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암살된 것이다. 『백년의 고독』 후반부의 역사는 이와 같은 20세기 변혁운동의 전개와 그 좌절을 다룬 이야기이다. 작품에서 다뤄지는 20세기 콜롬비아의 변혁운동은 사회주의 변혁운동의 특징을 갖는데,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당이 창설된 1919년부터 가이탄이 암살된 1948년까지를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 콜롬비아에선 1919년 사회당,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20년 공산당이 창설되었으며,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노동자 계급의 계급적 갈등이요, 그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28년 시에나가(Ciénaga)에 있는 미국인 바나나 농장 유나이티드프르트(United Fruit Co.)에서 자행된 노동자 학살 사건이라는 윌리암스 교수의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Williams, 24)

        5장에서 9장까지 다뤄진 변혁운동이 이상적인 자유당 시대의 복원노력과 그 좌절이었다면, 12장에서 15장까지는 사회주의 변혁운동과 그 좌절을 다룬 부분이다. 전자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라는 중심인물을 중심으로 서술되기에 그의 결혼으로 시작해서 그의 자살실패로 끝을 맺는 반면에, 후자는 철저히 사회와 문명의 변화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새로운 문명인 영화, 축음기, 전화의 도입으로 혼란을 느끼는 마콘도 주민들에서 시작해서 제국주의자들의 도래와 바나나농장의 건설 그리고 이어지는 파업과 대량학살이 그려진다. 천일 전쟁이 끝난 뒤 콜롬비아는 더욱 보수화되며 제국주의의 침탈 또한 가속화된다. 내전이 시작되던 1899년 콜롬비아랜드(Colombia Land Co.)와 보스턴 프루트(Boston Fruit Co.)의 합병으로 탄생한 유나이티드프르트의 침탈은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그들은 콜롬비아의 해안지방에 수많은 바나나 농장을 건설하고 민중들을 착취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928년 시에나가에서 자행된 학살사건으로 이미 사무디오(Cepeda Samudio) 등 많은 작가들이 소설화한 사건이다. “바나나 농장의 착취 시스템은 단순한 착취 시스템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발전과정에 적합하도록 모든 민중들을 규정하고 조건지으며 변형시킨 시스템”(Rama, 64)이었다는 앙헬 라마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라이그넬렛(Victor Laignelet)의 그림 <소나>(Zona, 1988)에서 볼 수 있듯이 삶을 원조하던 바나나가 죽음의 상징으로 변화된 것이다.


        마콘도에 바나나 농장이 건설되면서 마콘도는 죽음의 도시로 변한다. 미녀 레메디오스와 얽힌 네 명의 남자들이 차례차례 죽음을 맞이하고 그녀 또한 하늘로 승천한다. 마그니피코 비스발 대령의 형제와 그의 손자가 실수로 음료수를 쏟았다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며, 부엔디아 대령의 열여섯 명의 아들들이 하나하나 살해당한다. 부엔디아 대령과 아마란타를 거쳐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에 이르기까지 마콘도는 죽음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인 죽음들은 장차 광장에서 자행될 학살사건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

        19세기의 역사적 중심인물이 부엔디아 대령이라면 20세기의 인물은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이다. 처음엔 보수당과 가까웠다가 자유당 봉기의 중심인물이 된 부엔디아 대령처럼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도 제국주의자들의 십장 노릇을 하다가 노무자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시위의 주동자가 된다. 노무자들이 요구한 것은 일요일 휴무 단 하나였고 이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의 첫 번째 봉기처럼 성공을 거둔다. 그의 역사는 철저히 부엔디아 대령의 길을 답습하며 이는 이번의 변혁운동 또한 숙명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암시이다. 첫 번째 시위가 성공을 거둔 뒤 그들은 두 번째 시위에 들어간다. “이번에 노무자들의 불만은 노무자 숙소의 비위생성과, 의료서비스의 기만성, 그리고 작업조건의 악랄함에 기초하고 있었다.”(II, 144) 하지만 바나나 회사와 마콘도 당국 및 상급 재판소는 노무자들의 요구를 꾸며낸 이야기로 일축하고 노동자들은 대규모 파업을 전개한다. 결국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대가 공공질서유지를 담당하지만 애초부터 그들은 쟁의를 중재할 생각이 없었으며 화해를 도모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다. 결국 “상황이 처절한 내란으로 번질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정부는 노무자들에게 마콘도로 집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소집령에 따르면, 도의 민․군 총책임자가 쟁의를 조정하기 위해 돌아오는 금요일에 마콘도에 도착할 거라는 것이었다”(II, 148). 하지만 금요일이 되어도 총책임자는 오지 않고 마콘도의 역 앞 광장은 살육의 도가니로 변한다. 정부는 일방적으로 “파업에 가담한 노무자들을 <불량배 패거리>로 규정하고, 그들을 사살할 권한을 군대에 부여하고”(II, 149)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제국주의의 착취를 정부가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두시가 가까워오자, 노무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이 섞인 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역 앞 공터를 넘쳐 흘러, 군대가 기관총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가로막고 있는 옆길들로 밀려나왔다.(II, 148)

대위가 사격 개시 명령을 내렸고, 열네 개의 기관총좌들이 동시에 그의 명령에 응답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희극처럼 보였다. 숨가쁘게 울리는 총성이 들리고,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지만, 순간적으로 살아 있는 화석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밀집한 군중들 사이에서는 최소한의 가벼운 반응도, 말소리 하나도, 한숨소리조차도 감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기관총들에는 폭죽탄들이 장착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역 한쪽에서 죽음의 비명소리 하나가 그 마법의 정적을 깨뜨렸다. <아아아악, 어머니!> 지진과 같은 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숨소리, 하늘을 무너뜨리고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포효가 엄청난 폭발력과 더불어 군중 한가운데서 터져나왔다.(II, 150-151)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는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삼천 명은 되었을 겁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뭐가요?>
<죽은 사람들 말이에요. 역 앞에 모였던 사람은 다 죽었을 겁니다> 그가 확실하다는 투로 말했다.(II, 154-155)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희생당했음에도 마콘도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학살이 자행된 뒤에 나온 정부의 공식 발표 어디에서도 마콘도에 대한 애도나 죄책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사실을 왜곡하고 감추기에 급급했다. “정부가 사용 가능한 모든 매스컴을 총 동원해 전국적으로 수천 번이나 되풀이해 유포한 공식 발표는 결국,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고, 만족한 노무자들은 모두 가족을 찾아 돌아갔으며 바나나 회사는 비가 그칠 때까지 작업을 중단한다는 내용을 믿게”(II, 157) 만드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들은 아무런 의미 없는 희생자들이요 잊혀진 존재들이었다. 정부의 공식발표에 의하면 “마콘도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현재도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긴 살기 좋은 마을”(II, 157)이니까.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1914년엔 라파엘 우리베 장군이, 1948년엔 가이탄이, 그리고 1966년엔 카밀로 토레스 신부가 암살당하는 등 콜롬비아의 변혁운동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계속 죽어나갔다.

        사실 시에나가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인 1928년만 해도 이 사건은 대단히 중요했다. 야당 정치인인 가이탄이 현장을 방문, 조사해서 그 만행을 국회에서 고발했고, 이로 인해 정부는 매우 난처해졌으며, 가이탄은 민중들의 정치지도자로 부상했다. 시에나가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에서 살해당한 사망자 숫자가 13명에 불과함에도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굳이 3,000명으로 과장한 것은 이 사건과 48년 ‘보고타 사태’의 연관관계를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정확히 20년 뒤에 또 다른 대량학살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12장에서부터 17장까지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는 바나나 농장의 학살사건은 단순한 한 지역의 비극이 아니라 20세기 전반기 내내 콜롬비아 전 지역에서 벌어진 사회주의 변혁운동들의 시도와 그 좌절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작품 속에서 마콘도의 상처를 씻어내는 데는 4년 11개월 이틀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 상처는 아물고 핏빛 기억들은 순화될 테니까. 그리고 시간은 사건 자체가 아닌 사건 속에 내재되어 있는 원인과 결과들을 고민해보게 도와줄 테니까. 그러나 현실 속에선 이 사건들을 작품화하는데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작품화는 역사의 당사자가 아닌 제 삼자의 관점과 해석이 필요했다. 18장에서 20장까지 이어지는 『백년의 고독』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한 작품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IV. 문학의 시대

        신화의 시대 중심인물이 호세 아르카디오이며, 천일 전쟁의 중심인물이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고, 바나나 농장의 중심인물이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라면, 마지막 문학의 시대 담당자는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다. 그는 부엔디아 가문의 딸과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라는 바나나 농장 노동자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엄밀한 의미에서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은 아니다. 그는 조그마한 방에 틀어박혀 멜키아데스가 남긴 양피지를 해석하는데 한평생을 바치는 전형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양피지 문서를 해석하기 위해선 조그만 방을 벗어나서 거리로 나가 세상과 접촉해야만 한다. 이러한 세상과의 접촉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바로 카탈루냐 출신의 현인이 있는 서점이다.



아우렐리아노는 매일 오후,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가 된 네 토론자들과 계속해서 모였는데, 그들 이름은 각각 알바로, 헤르만, 알폰소, 가브리엘이었다. 책 속의 현실에 틀어박혀 있던 그와 같은 남자에게, 오후 여섯시에 책가게에서 시작되어 동틀 무렵 사창가에서 끝나고 했던 그 시끌벅적한 모임은 하나의 계시였다.(II, 265)



        그런데 서점에서 토론하는 아우렐리아노의 모습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자전적인 모습과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바로 젊은 날 함께 문학토론을 즐겨했던 ‘바랑키야 그룹’이 그것으로, 이 그룹엔 약 10여 명의 청년들이 참여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알폰소 푸엔마요르(Alfonso Fuenmayor)와 알바로 세페다 사무디오(Álvaro Cepeda Samudio), 헤르만 바르가스(Germán Vargas), 그리고 가르시아 마르케스 본인이다. 바로 『백년의 고독』 19장에 등장하는 알바로와 헤르만, 알폰소, 가브리엘이 그들인 것이다. 이 그룹의 리더는 스페인 내전 이후에 콜롬비아에 정착했던 카탈란 출신의 라몬 비니예스(Ramón Vinyes)로 소설 속에서도 정확히 카탈란 출신의 현인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사실들과 연관지어 보면 마콘도는 어느새 바랑키야로 변화되며, 아우렐리아노의 역사에 대한 해석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개인적 경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18장에서 20장까지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의 중심인물인 아우렐리아노가 수행하는 행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멜키아데스에 의해 남겨진 양피지 문서를 해석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의 이모인 아마란타 우르술라와의 사랑이다. 양피지 문서에 대한 해석 행위는 『백년의 고독』에 대한 해석과 똑같은 행위이며, 그에 대한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해석은 가문의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인해 근친상간이 이루어지며, 이로 인해 마콘도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비극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데 드로스(Tulia de Dross)의 생각은 다르다. 그녀에 의하면 『백년의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선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상징 코드인 ‘근친상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작품 속에선 항상 ‘사랑에 대한 욕망’과 ‘근친상간’에 대한 공포가 함께 드러나 있는데, 그와 연관된 상징이 바로 물고기와 이구아나이다. 물고기는 부엔디아 대령이 끊임없이 작업하는 수동적인 에로틱 행위이며, 이구아나는 여성들이 두려워하는 근친상간의 징표이다. 즉, 물고기와 이구아나는 근친상간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두려움,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만들어내는 신화소들인 것이다.

        우르술라가 죽고 아마란타 우르술라가 마콘도에 돌아오면서 근친상간의 신화는 완성된다. 아우렐리아노와 아마란타 우르술라는 사랑을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II, 288)가 되고, 그러한 완성된 사랑의 결실로 돼지꼬리를 달고 있는 아우렐리아노를 출산한다.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아이는 새로운 신화의 시작이요 새로운 문화의 시작인 것이다. 오토 랑크(Otto Rank)에 의하면 근친상간의 신화는 창조적 충동의 신화이다.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고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창조적 충동이 있었기에 인류는 생존할 수 있었고 항상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다. 부엔디아 대령이 서른 두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도, 삼천 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당한 것도, 그래서 결국 백년동안 콜롬비아의 역사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도 모두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란따 우르술라는, 몸집이 크다는 점에서는 부엔디아 가문의 자손이며, 호세 아르까디오처럼 튼튼한 데다 고집이 세고, 아우렐리아노의 똑바로 뜬, 통찰력 있는 눈을 지니고 있으며, 한 세기 만에 사랑에 의해 잉태되었던 유일한 아이였기 때문에 가문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그 해로운 악습과 숙명적인 고독으로부터 가문을 정화시키기로 예정되어 있는 그 아이를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완전히 식인종을 닮았네요. 이름은 로드리고라 할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오. 아우렐리아노라 부를 건데, 그러면 서른두 번의 전투를 이길 거요> 남편이 반대하고 나섰다.(II, 298-299)



        백년 만에 사랑에 의해 태어났기에 그는 “가문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그 해로운 악습과 숙명적인 고독으로부터 가문을 정화시키기로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부엔디아 가문의 숙명적인 이름인 아우렐리아노를 다시 사용할 지라도 그는 서른 두 번의 전투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픈 건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가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는”(II, 288) 것이다.



V. 나가며

        지금까지 우리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신화의 시대, 역사의 시대, 문학의 시대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았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비롯한 붐세대 작가들의 가장 큰 공헌은 그들이 그들의 신화를 재발견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신화는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잉카문명의 변방지역이요 정복기 스페인의 부왕청이 있었던 콜롬비아에서 그들의 신화를 재현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해 냈다. 신화소는 서구의 신화들에서 차용해 오는 대신 그것들을 기술하는 방법으로 구술 문화적 전통을 사용함으로써 그들 나름의 정체성을 비교적 잘 표현해 낸 것이다. 어차피 신화란 제한된 수의 카드를 가지고 하는 놀이가 아니던가? 질베르 뒤랑에 의하면 신화는 항상 재귀하는 것이다. 새로운 신화가 있다고 믿는 것은 피상적인 환상일 뿐이다(뒤랑, 63). 서구의 편협한 합리주의 사상과 감수성의 지평에 신화를 되돌려 놓음으로써 고갈위기에 빠진 서구문학에 새로운 가능성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또한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는 방법에서도 직접적인 고발의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보편적인 상징과 과장, 신화들을 차용해서 그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원인과 결과 등을 천착함으로써, 콜롬비아만의 지엽적인 문제가 아닌 온 인류의 보편적 문제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합리주의 시대에서는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의 공존 등과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에 섞어 넣음으로써 리얼리즘 문학과 환상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린 점 또한 주목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문학의 시대에서는 자신의 경험을 작품 속에 투영함으로써 자신의 시각과 의도를 분명히 밝히려 한 점 또한 주목된다. 돼지꼬리 달린 아이의 탄생을 마콘도의 숙명적 멸망과 결부시키기보다는 새로운 신화, 새로운 문명의 탄생에 대한 작가의 갈망으로 이해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참고문헌

가르시아 마르케스, 가브리엘. 『백년의 고독』 (I, II), 조구호 역, 민음사, 2000
뒤랑, 질베르. 『신화비평과 신화분석』, 유평근 역, 살림, 1998.
모레티, 프랑코. 『근대의 서사시』, 조형준 역, 새물결, 2001.
박철 외, 『노벨문학상과 한국문학』, 월인, 2001.
ANTONIO ARANGO, Manuel. Gabriel García Márquez y la novela de la violencia en Colombia, México, F.C.E. 1985.
DE DROSS, Tulia A. "El mito y el incesto en ", Rev. ECO, Colombia, junio de 1969.
HERNÁNDEZ, Manuel. "Los muertos. Un abordaje a Cien años de soledad", Rev. ECO, Colombia, mayo de 1969.
INÉS MENA, Lucila. La función de la historia en , España, P & J, 1979
JITRIK, Noe. "La perifrastica productiva en ", Rev. ECO, Colombia, oct. de 1974.
RAMA, Ángel. La narrativa de G. G. Márquez: Edificación de un arte nacional y popular, Colombia, Colcultura, 1991.
RUFFINELLI, Jorge. "G.G. Márquez y el grupo de Barranquilla", Rev. ECO, Colombia, oct. de 1974.
WILLIAMS, Raymond L. Novela y poder en Colombia 1844-1987, Colombia, Tercer Mundo, 1991.
ZAMORA, Lois Parkinson & FARIS, Wendy B. 마술적 사실주의, 우석균 외 공역, 한국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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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시아 마르케스: 소설적 삶과 삶 속의 소설

송 병 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우리에게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1928 - )는 작품의 대중화를 꾀하면서 폭 넓게 일반 독자들을 확보하면서도 동시에 비평가들에게는 소설의 새로운 서술 방법 등을 통한 미학을 제공한 몇 안되는 현대 작가 중의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서구 문학사에서 극단적 실험성으로 인해 ‘소설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던 서구 문학계에 ‘소설의 소생’이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그의 소설 세계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말이 보여주고 있듯이 사실주의란 말이 내포하고 있는 재현성· 역사성과 ‘마술적’이란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글쓰기의 실험성을 포함한다. 즉, 이는 단순한 기록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중남미 현실을 보여주는 다양성을 융합, 통합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보르헤스와 더불어 금세기 후반의 세계 문학사를 바꾼 인물이다. 특히 그의 대표작 『백년 동안의 고독』 이후 세계 문학은 탈바꿈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 세계는 그의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계를 띠고 있다. 그의 삶은 소설적이고 그는 삶 속에서 소설을 창조한다. 이것은 왜 우리가 그의 삶과 소설을 살피고 연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된다.


1. 유년 시절: 미래의 소설을 향한 꿈의 세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전기를 다루고 있는 많은 잡지와 책은 그가 1928년 3월 6일에 콜롬비아의 대서양변에 위치한 아라카타카라는 마을에서 아버지인 가브리엘 엘리히오 가르시아와 어머니인 루이사 산티아가 마르케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이 지역은 후에 끊이지 않는 폭우로 인해 홍수가 나며, 무더운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카리브해의 열대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그의 모든 작품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의 작품 세계는 민중과의 유대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도 이 카리브해의 세계에 대한 매혹을 보여주는데, 이는 보고타가 위치한 콜롬비아의 안데스 지역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측면이기도 하다. 그는 이 도시를 “오후 여섯 시의 분위기처럼 회색 빛이고 차가운 도시”라고 부르고 있다. 이 무더운 마을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귀신 이야기를 해 주면서 그를 전율에 떨게 했으며 미신을 신봉하는 외할머니인 트랑킬리나 이과란 코테스와 그를 서커스에 데려가고 끊임없이 시민 전쟁 이야기를 해주던 외할아버지인 니콜라스 마르케스 이과란 사이에서 성장했다.

그가 태어난 후 얼마 안되어 그의 부모는 리오아차의 전신국으로 발령을 받아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외할아버지 집에 맡기고 이사를 간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926년까지 살게 될 이 기간 동안 아라카타카는 “가난하고 더러우며 따분한 일상생활”로 가득 찬 분위기로 표현된다. 또한 후에 마콘도라는 상상적 모델이 되는 이 작은 마을은 신화적 과거와 기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외할아버지는 천일 전쟁(1899~1902)후에 아라카타카에 도착하여 정착한다. 그 당시 그 집은 거대하고 온갖 기억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든 구석구석마다 신비스런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집이 후에 그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요소이다. 이런 점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쓰려고 했지만 끝을 맺지 못했던 첫 번째 소설을 ‘집’으로 이름 붙이려 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라 보여진다. 게다가 1950년 7월 3일에 발표된 「부엔디아의 집」이라는 글에서 볼 수 있듯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오랜 동안 『백년 동안의 고독』의 무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콘도란 상상적 마을로 형상화될 아라카타카와 풍성하고 신비스런 외할아버지의 집을 통해 『백년 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부엔디아 가계를 소설화하는 소재를 발견한다. 또한 그의 외할아버지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 세계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대령들의 가계(家系)를 형성하는 일화를 이야기해 준다. 이것은 손자의 기억 속에서 『낙엽』에 등장하는 대령,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의 대령,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과 심지어는 유령과 같은 족장 등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자기의 남편과 사촌이었던 외할머니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그 지역의 옛 영화를 회상하는 이야기와 전설 등을 말해 준다. 이는 후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환상적으로조차 보이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서술하게 하는 방식을 통해 재구성된다. 이 시기를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멋진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외조부모들에게는) 환영으로 가득 차 커다란 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풍부한 상상력과 미신을 신봉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석구석마다 죽은 사람들과 그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오후 6시 이후에는 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공포로 가득 찬 멋진 세계였지요.



1936년에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와 같이 멋진 시기는 끝이 난다. 그리고 여덟살 때 대서양변에 위치한 바랑키야에 있는 예수회 계통의 학교에 입학한다. 또한 보고타 근교 도시인 시파키라의 국립 중등학교에서 장학생으로 고등학교 교육을 마치게 된다. 당시의 보고타는 그의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은 질식할 것같은 슬픈 이미지를 남긴다. 그는 “보고타 사람들은 어둡고 나는 그 도시가 내뿜는 분위기 속에서 질식할 것만 같았습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시파키라 중등학교의 기숙사에서 ‘돌과 하늘파’풍의 시를 쓰면서 처음으로 문학을 경험한다. 이러한 시에 대한 관심은 특히 『순박한 에렌디라와 포악한 할머니의 믿을 수 없이 슬픈 이야기』의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는 대다수의 단편에서 정교하고 선명한 필체로 서술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며, 또한 『족장의 가을』에서도 실험적인 풍부한 언어의 형식으로도 표출된다. 그는 방학 때마다 그의 부모와 형제들이 살고 있던 수크레 지방으로 여행을 한다. 보고타에서 수크레로 가기 위해서는 막달레나 강으로 여행을 해야 하는데, 이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메메 부엔디아가 아버지와 같이 여행하는 장면의 주요 소재로 처음으로 사용되며,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여행에서도 나타나고 그의 가장 최근작인 『미로 속의 장군』에서도 볼리바르를 통해 현시화된다.


2. 기자 생활과 『백년 동안의 고독』 이전의 소설: 절박한 사회 현실의 체험

1947년에 그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콜롬비아 국립대학에 입학한다. 그 해에 그는 「세 번째 체념」이라는 단편을 쓰고 그의 단편을 읽어 본 에두아르도 살라메아가 자신이 관여하고 있던 콜롬비아 양대 일간지 중의 하나인 《엘 에스펙타도르》에 게재한다. 이 단편 이후 계속하여 이 신문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열 편의 단편을 더 출판하는데 이 열 편의 단편은 후에 작가가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유명해 진 다음에 『푸른개의 눈』이란 이름의 단편집으로 출간된다.

1948년 4월 9일 보고타에서 ‘보고타소’라고 불리는 자유당과 보수당간의 정치 투쟁인 ‘콜롬비아 폭력 사태’가 일어났을 때,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보고타에 있었고 그는 자기가 살고 있던 거리가 불타는 것을 목격한다. 이 폭력 사태는 그의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며, 또한 ‘콜롬비아 폭력 사태의 소설’에 관한 이론적 성찰을 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이 보고타소는 즉각적으로 그에게 피해를 끼친다. 그는 다니고 있던 콜롬비아 국립대학이 휴교가 됨으로써 그 당시 그의 가족이 살고 있던 카르타헤나로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공부를 하면서 의사이자 작가인 마누엘 사파타 올리베야의 소개로 《세계》(El Universal)란 신문의 기자로 일을 하게 된다.

1950년에 바랑키야에서는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미 보고타에서 안면이 있던 플리니오 아풀레요 멘도사와 함께 평생 동안의 친구가 될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알폰소 푸엔마요르, 알바로 세페다 사무디오와 헤르만 바르가스였다. 또한 그들과 함께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로부터 도망나온 스페인 대학의 교수였던 라몬 비녜스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카탈루냐의 현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들로 구성된 단체는 소위 ‘바랑키야 그룹’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들에 의해 당시 주변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대서양변 해안 문학이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선구》(El Heraldo)란 신문에 「기린」이란 칼럼에 글을 쓰게 된다. 이 시기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낙엽』을 탈고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로사다 출판사에 보내지만, 그 출판사는 이 작품을 출판하기를 거부한다.

이 당시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수크레에서 알게 된 한 여인을 카르타헤나에서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여인은 약사의 딸로 수차에 걸쳐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메르세데스 바르차였다. 후에 이 여인은 그의 아내가 되어 평생을 그와 함께 한다. 그때 그와 그의 친구들은 이 여인에게 ‘성(聖)스러운 악어’란 별명을 지어 주며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나일강 뱀의 은밀한 미를 소유한 소녀“로 표현된다. 또한 그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아라카타카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집을 팔기 위해 아라카타카로 여행을 한다. 이 여행에서 그는 유년 시절에 보았던 멋지고 황홀한 세계였던 아라카타카와는 달리 이제는 황폐하고 가난에 찌들린 세계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후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에덴 동산과 같은 마콘도가 폐허화되는 과정을 그리게 하는데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1954년에 카르타헤나에서 알게 된 후,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가 되었던 알바로 무티스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보고타로 돌아가서 《엘 에스펙타도르》에서 다시 일하라고 설득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신문기자로서의 활동은 후에 그가 작가로 변신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는 그에게 주로 저널리즘적인 문체와 수사법을 배우게 하는 동기가 된다. 그는 《엘 에스펙타도르》에 1955년 2월부터 4월까지 칼다스란 구축함의 표류와 생존자인 루이스 알레한드로 벨라스코의 인생의 변천사에 대해 글을 쓰는데 후에 이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뗏목에서 열흘간 표류하고, 조국의 영웅으로 추앙 받으며 미의 여왕들에게 키스를 받고 널리 알려져 갑부가 되었으나 그 후 정부의 미움을 받아 영원히 잊혀진 표류자의 이야기』로 출판된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보고타에서 그의 첫 번째 소설이자 포크너의 영향이 다분히 보이는 『낙엽』이 출판된다. 출판 직후 그는 《엘 에스펙타도르》지의 유럽 특파원으로 로마로 간다. 이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로하스 피니야 독재 정권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헤어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로마 영화 실험 센터’에 등록한다. 그의 영화에 대한 관심 역시 그의 작품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가 파리에 있을 때 로하스 피나야 정권은 《엘 에스펙타도르》신문을 폐간시키며, 이로 인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일자리를 잃게 된다. 파리에서의 가난에 찌들린 힘든 기간동안 그는 중편이지만 대작으로 꼽히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집필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쓰기 전에 그의 머리 속에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수크레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다른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출처를 밝히지 않는 삐라가 중상 모략과 험담을 일삼으면서 주민들 사이에 많은 재앙을 일으키면서 이 마을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이 소설은 1962년에 『불행한 시간』으로 출판된다. 이 소설의 집필 과정에서 한 작중인물이 강력히 부상한다. 그는 다름 아닌 대령이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대령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먼저 쓰게 되고, 이 작품은 2년후인 1958년에 《신화》라는 잡지에 게재된다.

그후 그는 친구인 아풀레요 멘도사와 함께 사회주의 국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1957년 말에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로 돌아와서 페레스 히메네스 독재의 몰락을 목격하게 되며, 이 당시의 이미지는 『족장의 가을』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1958년 3월에 그는 메르세데스 바르차와 결혼하기 위해 바랑키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그녀와 함께 《순간》지에 일하기 위해 베네수엘라로 간다. 이 당시에 쓴 그의 기사들은 『행복한 무명 시절』이란 제목으로 1973년에 출판된다. 그리고 1962년도에 출판될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들을 쓰기 시작한다. 1958년 말에 특정한 정치적 성향을 띠지 않았던 그를 좌익으로 활동하게 만든 쿠바 혁명이 일어난다. ‘에베르토 파디야’ 사건으로 말미암아 1970년 이후 대부분의 중남미 작가들이 쿠바에 등을 돌린 것과는 반대로, 그의 쿠바와 카스트로 체제에 대한 충성은 점점 더해 간다. 또한 1959년 2월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그의 친구인 아풀레요 멘도사는 보고타에 ‘중남미 통신’이라는 사무실을 열고 쿠바에 콜롬비아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뉴스를 보내는데 전념하고 또한 콜롬비아에서 다른 외국 통신사들이 보내는 쿠바에 대한 무절제한 뉴스 대신 쿠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잡지를 출판하려고 노력한다.

1960년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로 건너가 그 곳에서 1년간 머무른다. 그리고 부지국장의 신분으로 뉴욕에 있는 ‘중남미 통신’ 사무실에서 근무한다. 미국에 있으면서 그는 포크너 소설의 소재가 된 미국 남부 지역을 여행한다. 그리고 이 지역이 콜롬비아의 해안 지역과 매우 흡사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비평가들이 마콘도와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를 연구하면서, 그의 작품에서 포크너의 영향을 강조하게 된다.

하지만 관료주의적 사고 방식에 식상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일에 사표를 내고 자기 가족과 함께 멕시코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에 전념하고 싶어한다. 그곳에서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함께 동시대의 멕시코 작가인 환 룰포의 단편에 기초한 첫 번째 시나리오를 쓴다. 이 작품은 『황금닭』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또한 후안 룰포(Juan Rulfo)의 소설 『페드로 파라모』의 시나리오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라는 단편 이외에는 소설창작에 그리 큰 활동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3. 『백년 동안의 고독』과 『족장의 가을』

이와 같이 1962년 이후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아무 작품도 출판하지 않는다. 그는 당시까지 썼던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 침묵의 기간을 작가로서 성숙하기 위한 시간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이런 자아 성찰을 통해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다. 그는 인터뷰에서 어떻게 이런 기적을 이룰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아카풀코로 가족과 함께 운전하면서 가는 동안 갑자기 자신이 청년기 때부터 쓰고자 했던 대하소설의 구조가 떠올랐다. 그는 당시의 장면을 이렇게 말한다. “너무 완전히 생각이 나서 거기에서 타자수에게 첫 장의 단어 하나 하나를 구술했었으면 했습니다”. 그의 아내인 메르세데스에 의하면, 그는 이러한 욕망을 억제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글을 쓰기 위해 틀어 박혔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6개월 정도면 이 소설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소설을 끝내고 보니 18개월이란 세월이 흘러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간동안 메르세데스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의 자동차를 팔았지만, 그래도 돈이 모자라 그에게 말하지 않은 채 빚을 지고 있던 상태였다.

1967년 6월에 드디어 『백년 동안의 고독』이 출판된다. 이 소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수드아메리카나 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었을 때, 이미 독자들은 이 소설을 상당히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문학잡지는 이미 이 소설의 일부분을 게재한 상태였고,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읽어보라고 건네준 제 1장을 읽고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아무런 주저함 없이 이 소설을 극찬하고 있었다. 이 소설의 성공은 문학 비평가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즉시 그 반응이 일어났다. 재판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이 소설을 번역· 출판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이탈리아에서 키안치아노 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에서는 최고의 외국 소설로 결정되었다. 미국 비평은 이 소설을 1970년의 최고 소설로 선정했으며, 1971년에 콜럼비아 대학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1972년에는 중남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베네수엘라의 로물로 가예고스상을 수상하는데, 여기에서 받은 상금을 ‘사회주의 운동’(MAS)이라는 좌익 단체에 기증한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 출판되고 한달 후 카라카스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페루의 소설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알게 된다. 이후 급격히 발전된 그들간의 우정은 몇 년 후에 아무런 뚜렷한 이유 없이 급속도로 냉각된다. 그 당시 바르가스 요사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관한 가장 자세하고 심도 있는 연구서인 『살신(殺神)의 역사』를 쓰지만, 그들간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이 책의 재판을 허락하지 않는다.

1967년과 1975년 사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살게 된다. 이 기간에 그는 『순박한 에렌디라와 포악한 할머니의 믿을 수 없이 슬픈 이야기』와 베네수엘라에서 쓴 기사를 모아 『행복한 무명 시절』이란 책을 출판한다. 그러면서 오래 전부터 쓰고자 했던 또 다른 소설을 쓰는데 전념한다. 이는 바로 중남미 독재자에 관한 소설이었다. 『족장의 가을』이란 소설은 마침내 1975년에 출판된다. 이 소설은 구체적인 독재자를 소재로 다룬 것이 아니라, 19세기부터 존재해 왔던 여러 독재자들의 이미지를 종합하여 독재자의 원형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는 그의 모든 작품을 다시 출간하며, 그 동안 썼던 모든 단편들을 한 권에 수록한 『단편 모음집』을 출판한다.

『족장의 가을』은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즉각적으로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한 비평가가 있었는가 하면, 이 소설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내 놓은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비평가는 이 소설을 너무 내용적으로 축소하여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작품은 독재자의 신화뿐만 아니라, 언어 형식적 측면에서도 1970년대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4. 정치 기자의 생활과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족장의 가을』을 출판한 후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다시 멕시코에 자신의 거처를 정한다. 또한 1976년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칠레의 피노체트가 권좌에 있는 한 더 이상 소설을 출판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그는 이미 1973년에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피노체트에 의해 붕괴되었을 때, “칠레 민중은 미제국주의의 하수인인 당신들과 같은 범죄자 집단이 통치하게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쓴 전문을 칠레 군부에게 보낸다. 이러한 사실은 작가의 명성이란 책임감을 의미하고 더욱 더 사회 참여를 의미한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작가는 무기로서 단지 펜만을 갖고 있으며, 글은 계속 쓰지만 출판을 하지는 않겠다는 이 의지는 칠레의 군사 독재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투쟁 방법이기 때문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렇게 선언한 것이었다. 그후 수년간 그는 정치 활동에만 전념한다. 가령 브뤼셀에서 열린 중남미의 다국적 기업에 관한 러셀 심판소(1976년), 자유와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람들의 인권 회복을 위한 아베아스(Habeas)재단의 창설(1979년)뿐만 아니라, 콜롬비아에서 정치적 이유로 구속된 수감자와 고문에 대해 고발하고 아르헨티나에서 실종된 사람들과 쿠바의 정치범들을 위해 수많은 활동을 벌인다. 출판 거부를 선언한 이후, 그는 정치와 관계된 많은 글을 쓴다. 맥브라이드 보고서인 「세계 정보의 새로운 체제」를 작성하고, 1981년 5월 21일에는 사회주의 대통령인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다. 또한 1984년 8월 26일에는 콜롬비아 정부와 게릴라 그룹이 조인한 평화 협정을 기념하기 위해 예술인들의 모임을 주도한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직업이었던 저널리즘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는 콜롬비아에서 출판된 정치 잡지인 《대안(代案)》(Alternativa, 1974~1980)의 편집 고문을 맡으면서 33편의 글을 쓴다. 또한 앙골라, 베트남, 모잠비크와 중남미 여러 국가에 관한 르포를 쓰며, 쿠바에 관한 책도 준비하고 중남미와 유럽의 여러 간행물에도 기사를 쓴다.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문학은 저널리즘과의 사랑 행위’라는 개념에 입각한 글쓰기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이 기간동안 “현실과의 접촉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정치적인 기사를 쓰면서 이 5년(1976년~1981년)을 보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1979년부터 유럽 속의 중남미 인들을 소재로 한 단편을 쓰게 되는데 이 단편들은 1992년에 『이방의 순례자들』이란 제목으로 출판된다.

1980년까지만 해도 피노체트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 한 소설을 출판하지 않겠다고 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결정은 지켜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1981년 4월에 이 약속을 깨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출판한다. 이 책은 스페인, 아르헨티나, 멕시코, 콜롬비아에서 모두 백만부가 출판됨으로써 중남미 출판사에 또 다른 기록을 세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칠레인들은 내가 이러한 결정을 했을 때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용했으며 그 결과도 그러했지만 이를 계속하여 유지한다는 것은 이제 정치적으로 볼 때 부정적인 면이 더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견이 나보다 그들의 상황을 더 잘 아는 사람들의 말이고 나는 칠레인들보다 더 칠레적이 될 수는 없읍니다. 여하튼 나는 피노체트는 오랜 기간동안 권좌에 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내 책이 그보다 훨씬 더 오래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또한 그는 “비평가들은 내가 중남미 마술적 사실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나는 내가 현실감각을 갖고 있는 유일한 시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내 사실주의는 피노체트가 몰락하지 않았고 그리고 지금 몰락하지도 않으며 언제 몰락할지는 모른다고 말하기 때문에 내 책을 출판합니다. 그 당시 이와 같은 약속을 했던 것은 정치적으로 유용했읍니다. 하지만 지금은 출판이 더 정치적으로 유용합니다. 중남미 좌익은 사실주의의 미덕이 결여되어 있읍니다. 피노체트는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변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는 아직 살아있는 존재이지만 그는 아닙니다”라고 지적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러한 결정은 번복될 수 있으며, 그런 결정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큰 활자로 200페이지가 채 넘지 않는 이 조그마한 책은 이와 같은 상황으로 인해 출판 당시부터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논란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소설은 산티아고 나사르라는 청년을 소재로 전개되는데, 그만을 제외한 모든 마을 사람들은 그가 살해당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죽음이 정말로 실현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을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략 1979년경이라 추정된다. 이 소설은 카리브해의 열대지방을 소재로 한 그리스 비극이며, 종래의 탐정 소설과는 정반대의 형식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은 “거짓된 르포이며 동시에 거짓으로 가득 찬 소설이다. 이는 정말로 일어난 범죄 사건을 다룬 거짓된 이야기이다”라고 이 작품을 평하고 있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초기에 구사한 깨끗하고 선명한 필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기의 단순한 구조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최고의 작품은 이 작품과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 두 작품은 사실상 그의 소설 세계 속에서 가장 강도 높은 극적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 작품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두 소설은 대령의 좌절과 산티아고 나사르의 죽음을 통해 거짓된 ‘긴장 상태’를 나타내는데, 이들의 운명은 『숙명론자 자크』처럼 이미 쓰여져 있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 숙명론은 『백년 동안의 고독』과 『족장의 가을』등 대부분의 그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가 보고타에서 출판되기 전날에 보고타 주재 멕시코 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한다. 이것은 당시 콜롬비아의 투르바이 정권이 쿠바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면서, 사상적 이유로 그를 체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다시 멕시코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예를 한껏 빛낼 수 있는 새로운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제 중남미의 한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지식인으로서 선진국과 중남미 사이에 참여하는 것을 작가의 임무로 상정하면서, 이 둘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1981년에 멕시코의 칸쿤에서는 여러 국가의 수뇌들이 모인 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기자 자격으로 참석한다. 여기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친구인 미테랑 대통령은 그의 조언을 받아 선진국과 제 3세계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새로운 뱡향으로 바꾸게 만드는 중요한 연설을 한다. 또한 1982년에는 칸느영화제 심사 위원으로 참석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영화에의 관심이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는 단적인 예이다. 그의 영화에의 애착은 1948년에 제작된 채플린의 『베르도씨』에 대한 찬사로부터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으며, 이후 그는 1955년에 로마의 영화 실험 기관에 등록을 하고 1963년에 멕시코에서 후안 룰포의 『금으로 만든 닭』의 시나리오를 쓰고, 1965년에는 아르투로 립스테인 감독이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죽음의 시간』이란 작품을 영화화한다. 또한 1979년에는 칠레의 미겔 리틴이 『몬티엘의 미망인』을 영화화하며, 1983년에는 브라질의 루이 게라 감독이 『순박한 에렌디라』를 제작하며, 1987년에는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로시가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영화로 만드는데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러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또한 1983년에 그는 니카라과의 카스티요 콴트라는 정치가의 집을 주제로 다루는 실제 이야기를 허구화시킨 시나리오 『유괴』를 출판하며, 이 작품의 인세를 산디니스타 정권에 기증한다.


5.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 가르시아 마르케스 후기 작품

1982년 10월 21일에 스웨덴 아카데미는 그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선정되었다고 발표한다. 이는 그의 기대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는 “지금 스웨덴 한림원은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에게 그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상을 줍니다. 따라서 내 경우는 아닙니다”라고 평하면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내게는 불행입니다. 나는 내 사생활이 침해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해 12월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스톡홀름에서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 된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란 연설문을 읽게 된다. 그리고 157,000 달러의 상금으로 기자 생활을 하면서 꿈꾸어 왔던 《타인》(El otro)이란 신문을 창간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공포하며, 중남미와 유럽의 잡지와 신문에 계속하여 글을 발표한다. 1986년에 『칠레에 잠입한 미겔 리틴의 모험』이란 현장 취재를 책으로 출판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의하면 이 작품은 “군사 권력의 위험을 비웃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잘 쓰여졌으며, 원래의 목적보다 더 가슴을 메이게 하고, 감동적인 모험을 자신의 감정에 격받쳐 재구성한” 르포이다. 이 당시 미겔 리틴은 체포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피노체트 군사 정권의 혹독한 현실에 관한 영화를 비밀리에 촬영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칠레 일반 보고서』란 이름으로 공개되며, 그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이러한 정치 참여는 핵 위험에 관한 『다모클레스의 대이변』이란 강연회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1982년에 콜롬비아는 투르바이 정권에서 시인 출신인 베탕쿠르 정권으로 바뀌면서 그가 멕시코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조국으로 귀국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하지만 1984년 초부터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치적 참여를 잠시 중단하고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는데 전념한다. 그해 8월에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은 자신의 소설을 “아주 열렬히 사랑에 빠진 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인데 그들은 20세 때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결혼을 할 수 없었고, 인생을 마감한 80세 때에는 생의 모든 것을 경험한 후라 너무 늙어 결혼을 하지 못한다”고 요약한다. 이러한 소재를 다른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1985년 12월에 출판된다. 이 연애소설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이미 다루어진 자신의 친척들의 일화를 문학 소재로 잡아 재구성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아라카타카에서 전보사로 있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버지와 자신의 자전적 요소를 매우 많이 갖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작품에서 『백년 동안의 고독』의 분위기를 다시 맛볼수 있다. 가령 “그의 어머니는 송아지 털을 깎는 것처럼 그를 면도해야 했는데 이는 아주까리 기름을 달인 약을 다먹게 하기 위해서 였는데......”와 “장남은 자기 아버지처럼 대령이었지만 시에나가에서 일어난 바나나 농장의 대학살에 참여한 것을 수치스럽게 느껴 스스로 그만 두었는데......”와 같은 장면은 대표적이다.

늙음, 쇠퇴, 멸망과 죽음 등과 같이 가르시아 마르케스 소설 속에 내재하고 있던 개념은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다시 핵심적인 요소로 부각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이 작가의 소설세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고 볼 수는 없다는 평을 받았지만, 최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애 소설’이 각광을 받으면서 재조명을 받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이 작품은 노벨상이 악운을 가져온다는 소문을 재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기점으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일반 독자와의 교감을 책이 아닌 텔레비전과 연극을 통해 새로운 의사 소통의 수단을 실험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는 1988년에 『힘든 사랑』이라는 미니 시리즈를 스페인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과 국제 방송망 그룹과의 공동 제작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 해 8월 20일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가 최초로 쓴 극본인 『앉아 있는 사람에 대항한 사랑의 논박』이 상연된다.

1989년 3월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미로 속의 장군』을 출판하면서 다시 소설 세계로 돌아온다. 이 작품은 중남미의 해방자인 시몬 볼리바르가 죽기 직전에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보고타에서 산타 마르타까지 행한 마지막 여행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처음으로 고전적 의미의 역사 소설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품을 출판하기 전부터 수차에 걸쳐 19세기에 쓰는 것처럼 19세기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의도를 표명한바 있다. 이 소설은 출판 당시부터 많은 논란을 야기했는데, 많은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역사가들은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역사적 소재의 사실성에 대해 찬양했으며, 또 어떤 이는 그가 시몬 볼리바르를 피델 카스트로와 흡사하게 다룸으로써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비방하기도 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92년에 『이방의 순례자들』을 출간한다. 이 단편집은 『백년 동안의 고독』을 출판한 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5년간 살면서 구상하기 시작했으며 유럽에 있는 중남미 인들에게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에 관해 쓴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기억에 의존해 이 단편들을 멕시코에서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단편집에 대한 영감을 받은지 20여년이 지난 1991년 3월에 이 작품에 수록된 이야기들을 다 쓴 단계였지만, 이 기억이 확실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유럽을 여행한다. 그리고 나서 이 기억이 모두 틀린 것임을 알게 되는데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진정한 기억은 기억의 환영 같았다. 반면에 거짓스런 기억은 너무도 그럴듯해서 현실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8개월에 걸쳐 이 단편들을 다시 쓰는 작업을 벌여 1992년에 이 작품을 독자들에게 선 보이게 된다.

이 단편집을 출간하면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의 ‘돌과 하늘파’를 대표하는 시인인 에두아르도 카란사를 기리기 위해 콜롬비아 정부가 제정한 카란사 문학상을 수여하기 위해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로 돌아온다. 그후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보고타로 돌아오지만, 여기에서 자신이 폐암을 앓고 있다는 것이 판명되어 보고타의 산타 페 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된다. 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는 그 동안의 멕시코에서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문학적 토양을 제공해 준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로 돌아온다. 1994년에 그는 5년간의 침묵을 깨고 자신의 거처를 정한 카르타헤나를 다시 소재로 잡아 『사랑과 다른 악마들』을 출판한다. 이 작품은 신부와 광견에 물렸다는 이유로 수녀원 감옥에 갇힌 어린 소녀의 사랑을 그리면서, 어린 소녀 시에르바 마리아가 가톨릭의 엑소시즘의 희생물이 되는 과정을 통해 광견에 물린 소녀와 기존 사회였던 가톨릭 중에서 누가 정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1996년에는 메데인 카르텔의 우두머리인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꾸민 납치 사건을 소재로 『어느 납치 사건』을 발표한다. 르포이자 동시에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여러 개의 납치 사건이 하나의 목적에 의해 구성된 것임을 간파한다. 즉, 콜롬비아와 미국간의 ‘마약범 인도 협정’을 저지하기 위해 마피아들이 획책한 것임을 파헤치는 것이다.


6.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후계자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은 전 세계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런 현상은 특히 미국작가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윌리엄 케네디는 그의 작품 『섬꼬리풀Ironweed』에서 전차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기억과 망령을 서술하면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테크닉을 차용한다. 또한 그는 1973년에 「바르셀로나의 노란 기차와 다른 관점들」이란 제목으로 가르시아 마르케스와의 인터뷰를 출판하기도 한다. 한편 존 니콜스의 『밀라그로 콩밭 전쟁』(The Milagro Beanfield War)은 뉴 멕시코 주에서 일어난 스페인계 주민들의 토지권 회복 투쟁을 다루면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전유물인 과장과 비현실을 사용함으로써 1930년 식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한계를 극복한다. 또한 앨리스 워커의 영화인 《컬러 피플》(The Color People)은 영국령 아프리카의 식민지 및 제국주의를 기록하는 미국 남부 흑인 가족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백년 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바나나 농장’의 도착과 그들이 벌이는 행동과 유사하게 전개된다.

로버트 쿠버는 『공개 화형』(The Public Burning)에서 줄리어스와 에셀 로젠버그의 처형을 둘러싼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가르시아 마르케스처럼 거의 마술적인 장치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관해 「스승의 목소리」란 에세이를 출판하기도 한다. 이 이외에도 미국의 메타픽션가 중의 하나인 레이몬드 페더만은 『두배의 진동』(The Twofold Vibration)에서 전쟁과 학생 시위 및 홀로코스트 등을 다루며서 『백년 동안의 고독』의 시작 부분을 인용한다. 그리고 업다이크는 『일격』(The Coup)에서 상상적인 아프리카 국가의 독재자를 다루는데, 이 작품은 『족장의 가을』을 연상케하는 많은 장치들을 사용한다.

이런 일련의 작가들 이외에도 1980년에 존 바스는 「소생의 문학」이란 글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이자 스토리텔링의 거장”으로 평가한다. 특히 그는 이미 오래전에 소진되었지만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의해 다시 부활된 ‘스토리텔링’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의 작품 『카이메라』(Chimera)는 어설픈 방식이긴 하지만 이런 테크닉을 시도하는 소설이다. 또한 199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토니 모리슨 역시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녀의 소설 『솔로몬의 노래』(Song of Solomon)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엿볼수 있는 마술적 아우라가 주요 요소로 등장한다. 그리고 살만 루시디의 『한밤중의 아이들』(Midnight's Children)도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잭 리차드슨이 지적하는 대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번역되기 이전인 1960년대 말만 해도 세계 문학은 “독특하고 의식적으로 복잡한” 문학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 이후 걸작이란 반드시 어렵고 진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함과 장난의 경계를 없애며, 미묘한 사회· 정치· 경제적 문제들을 문학적으로 재미있게 풀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전세계에 전파한다. 이런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문학은 이제 라틴아메리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및 세계의 여러 문학 속에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은 문학계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 여러 나라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세계의 많은 문인들은 그의 눈부신 재주가 현대 세계 문학사의 멋진 순간을 계속해서 장식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이렇듯 『백년 동안의 고독』 이후 세계의 문학은 달라졌으며, 가르시아 마르케스란 존재는 이제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21세기를 여는 초석이 되고 있다.


7.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소설의 소생

이와 같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복잡하고 한편의 소설로조차 보이는 삶에서 소설을 형상화함으로써 지식인의 테두리에 스스로 갇혀 버렸던 현대문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다. 즉, 소설의 미래에 관한 참담한 예언이 나돌고 있을 때 그의 민중과의 유대를 꾀할 수 있는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과 비범한 문체를 통해 넓은 대중성을 확보함으로써 아직도 소설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 준다. 바로 이 점이 체코의 소설가인 쿤데라가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 인들의 지엽적인 걱정일 뿐이다. 동구나 중남미 작가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떻게 서재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 놓은 채 소설의 죽음에 대해 중얼거릴 수 있다는 말인가?”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중성과 소설 미학의 획득은 아마도 세르반테스와 그 중요성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처럼 그의 소설은 “아이들도 만지고 젊은이들도 읽으며 어른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노인은 극구 칭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소설 세계의 환상적 총체성은 중남미 인과 세계인의 정수를 동시에 획득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과 시적 환상의 병치로 구성되어 있다. 즉, 그의 소설은 20세기를 위협한 사악한 요소들을 극적으로 다루면서 강한 도덕적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아이러니와 인간의 가치는 영원하다는 신념을 그 기조로 삼고 있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라 일컬어지는 현대 사회의 문학에 분명히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좌표를 형성해 주고 있음이 자명하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연보

1928년 3월 6일 콜롬비아의 아라카타카에서 출생
1936년 장학생으로 보고타 근교 도시인 시파키라의 국립중등학교에서 공부를 함.
1946년 보고타에 있는 콜롬비아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함. 「세 번째 체념」이란 단편이 《엘 에스펙타도르》(El Espectador)란 신문에 게재되는데 이후 1952년까지 이 신문에 10편의 단편을 발표함.
1948년 ‘보고타소’(Bogotazo)라고 불리는 정치 폭력이 일어나 법학 공부를 그만두고 카르타헤나 대학으로 옮김. 카르타헤나의 《세계》(El Universal)란 신문에 셉티무스(Septimus)란 가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함.

1950년 대학 공부를 그만두고 바랑키야로 이사함. 여기서 출판되는 《선구》(El Heraldo)란 신문에 ‘기린’(La Jirafa)이란 칼럼에 글을 씀. 『낙엽』의 초고인 『집』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함. 이 당시에 현재 부인인 메르세데스 바르차를 알게 됨.
1954년 보고타의 《엘 에스펙타도르》신문 기자로 일을 함.
1955년 단편 「토요일 다음날」이란 단편으로 상을 수상함. 「마콘도에 내리는 비를 보고 있는 이사벨」을 출판. 그의 첫 번째 소설인 『낙엽』(La hojarasca)를 출판. 생애 처음으로 외국으로 나가게 되며 이후 파리에서 살게 됨.
1956년 중편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a)를 탈고.
1957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출판되는 《엘리트》(Elite)와 보고타의 《다색화(多色畵)》(Cromos)란 잡지에 사회주의 국가에 관한 10편의 글을 발표함.
1958년 카라카스에서 독재자 페레스 히메네스의 몰락을 지켜봄. 메르세데스 바르차와 결혼함. 이해에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이란 단편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단편을 씀. 보고타의 《신화》(Mito)란 잡지에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가 게재됨.
1959년 ‘중남미 통신’(Prensa Latina)에서 일을 하기 위해 보고타로 감. 첫째 아들인 로드리고가 태어남. 단편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을 씀.

1960년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에서 중남미 통신기자로 일을 함.
1961년 뉴욕 주재 중남미 통신 부지국장직을 맡음. 하지만 곧 사표를 내고 멕시코로 건너감.
1962년 둘째아들인 곤살로가 태어남.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함. 광고 회사에서 일을 함. 두 번째 소설인 『불행한 시간』(La mala hora)을 출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Los funerales de la Mamá Grande)이 출판.
1965년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쓰기 시작함.
1967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백년 동안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이 출판됨. 이 해는 중남미 낭만주의 소설의 백미인 콜롬비아가 자랑하는 호르헤 이삭(Jorge Issacs)의 『마리아』(María)가 출판된 지 백년이 되는 해이기도 함.

1970년 벨라스코(Luis Alejandro Velasco)의 표류기인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뗏목에서 열흘간 표류하고, 조국의 영웅으로 추앙 받으며 미의 여왕들에게 키스를 받고 널리 알려져 갑부가 되었으나 그 후 정부의 미움을 받아 영원히 잊혀진 표류자의 이야기』를 출판.
1971년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음.
1972년 『순박한 에렌디라와 포악한 할머니의 믿을 수 없이 슬픈 이야기』(La increíble y triste historia de la cándida Eréndira y de su abuela desalmada)를 출판. 베네수엘라의 로물로 가예고스상을 수상함. 1947년과 1955년 사이에 쓴 11개의 단편을 모아 『푸른 개의 눈』(Ojos de perro azul)이란 단편집을 출판.
1973년 열두 편의 기사가 실린 『행복한 무명 시절』(Cuando era feliz e indocumentado)을 출판.
1974년 『칠레, 쿠데타와 미국 놈들』(Chile, el golpe y los gringos) 출판.
1975년 8년간의 침묵을 깨고 『족장의 가을』(El otoño del patriarca) 출판.
1976년 『연대기와 취재』(Crónicas y reportajes)를 출판.
1977년 세 편의 신문 기사 성격의 글이 실린 『카를로타 작전』(Operación Carlota) 출판
1978년 『사회주의 국가 기행문』(De viaje por los países socialistas) 출판

1981년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Crónica de una muerte anunciada) 출판
1981년~1984년 자크 질라르(Jacques Gilard)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신문기자로 활동할 당시의 글을 수록한 『기사 모음집』(Obra periodística)을 스페인의 브루게라 출판사에서 4권으로 출판함.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 「라틴 아메리카의 고독」이란 제목으로 수상연설을 함.
1983년 시나리오『유괴』(El secuestro)를 출판.
1985년 『콜레라 시대의 사랑』(El amor en los tiempos de cólera) 출판.
1986년 르포 『칠레에 숨어사는 미겔 리틴의 모험』(La aventura de Miguel Littín, clandestino en Chile) 출판
1989년 『미로 속의 장군』(El general en su laberinto) 출판.

1992년 『열두 편의 방황의 이야기들』( Doce cuentos peregrinos) 출판.
1994년 『사랑과 다른 악마들』(Del amor y otros demonios) 출판. 희곡 『앉아 있는 사람에 대항한 사랑의 논박』(Diatriba de amor contra un hombre sentado) 출판.
1996년 르포 소설 『어느 납치 소식』(Noticia de un secuestro) 출판
2002년 자서전 제1권 『이야기꾼의 삶』(Vivir para contarla) 출판


▷ 관련 웹사이트

1. Macondo A Gabriel García Márquez Web Site (영어) - 대표적인 가르시아 마르케스 웹사이트. 연보, 작품, 노벨상 수상 연설, 비평, 서평.
2. Centro Virtual Cervantes - García Márquez (스페인어) - 가르시아 마르케스 소개, 연보, 작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