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두꺼운 언어와 얇은 언어

나뭇잎숨결 2012. 9. 29. 14:11

 

 

 

전통 미디어에서 소셜 미디어로, 이념의 시대에서 익명적 대중의 시대로, 두꺼운 언어에서 얇은 언어의 세계로, 변화하는 오늘의 세상을 읽고 해석하는 프레임을 말하다! (서평)우리는 드라마를 보며 웃고 울고, 잘 찍은 사진을 보며 감탄을 하고, 찬반 논쟁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도 하며, 인터넷 댓글에 공감하거나 분노하고, 나보다 한참 어린 아이돌을 보며 설레어 하기도 한다. 이러한 우리 개개인의 일상적 행위는 단순히 사적이고 일회적인 것에 불과한 것일까? 일상적 행위들을 하나로 엮고 분류하여 형성된 담론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가?

 

미디어와 텍스트의 행간에서 세상을 읽다 열 명의 미디어 담론 전문가가 함께 쓰고 엮은 『두꺼운 언어와 얇은 언어』가 문학과지성사의 ‘현대의 지성’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지금의 한국 사회를 설명해줄 아홉 장면을 선별해 담론적 변화의 양상과 그 사회문화적 의미를 추적하며, 필자들이 고안해낸 ‘두꺼운 언어’와 ‘얇은 언어’라는 프레임으로 이 시대 문화 변동의 경향을 바라본다. 신문기사, 방송 드라마, 정책, 인터넷 팬사이트 등 전통 미디어와 뉴 미디어에 속하는 다양한 문화 영역을 두루 다룸으로써 우리 사회 담론의 특징을 전반적으로 개괄해 볼 수 있게 했다. 독자들은 이를 발판 삼아, 변화무쌍한 문화 현상들과 미디어와 텍스트의 홍수 속에서 담론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법을 쉽고 재밌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드롬이라 할 정도로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미네르바 사건, 케이팝과 한류, 남북정상회담 등을 되짚어보는 것은 물론, 이 책에서 분석한 방식과 스스로 체감한 방식을 비교해 보는 즐거움 또한 누릴 수 있다.


이 책은 ‘두꺼운 언어’와 ‘얇은 언어’의 두 세계로 양분되어 있다. 이들은 각각 전문가 중심의 전통적 미디어 담론과 디지털 환경에 놓인 일반대중의 새로운 미디어 담론을 가리킨다. 언어의 두께는 생각의 두께를 반영하기에 많은 생각을 담은 이지적 언어는 두꺼워지고, 즉각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는 얇아진다는 생각에서 창안된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형식, 규칙, 관습 등을 중시하는 ‘현상적 텍스트’와 감각적이고 무의식적이며 비언어적인 특성이 강한 ‘생성적 텍스트’ 개념도 함께 제시되었다. 이렇게 나뉜 두 영역의 담론은 존재 방식이 다른 만큼 역할이나 기능도 다르며, 분석 대상이 되는 현상이 다른 만큼 분석 방법도 다르게 나타난다. 한편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등장 이후 생산, 유통, 소비되는 새로운 형태의 담론 질서는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접근 방법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하고 유동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이 책은 담론 분석 방법을 익히고 적용하는 데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는 참고서로서 기획되었다. 담론 분석 방법은 대상과 주제에 따라 무한 변신이 가능하므로 어떤 정형화된 틀을 제시하기보다 전반적인 방법론적 지도를 그리고, 각 방법론의 기본 전제와 지향점, 최소한의 원칙을 설명하는 데 주력했다.

 
중심과 주변, 전문과 비전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담론 분석의 실제와 적용. 이 책의 중심축을 이루는 박명진의 권두논문은 다른 아홉 편의 글의 함의와 방법론적 특성을 개괄하고, 그것이 현재 우리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지니는 적합성과 유용성을 조망한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사용된 비판적 담론 분석, 사회기호학, 수행성 이론, 멀티모달리티 분석 방법 등을 한눈에 정리해 보여준다. 권두논문이 담론 분석 방법에 관한 전반적인 상을 잡게 한다면, 이어지는 아홉 편의 글은 여러 방법론을 실제 사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좀더 상세히 보여주는 작업이다. 이들은 각각 머리-몸통-꼬리의 세 마디로 구성되는데, 독자의 호기심과 흥미를 돋우는 재미있는 소개문으로 시작하여 구체적인 담론 분석 방법과 사례를 결합한 연구 내용이 몸통을 이루고, 각 장에서 사용한 방법론에 대한 간명한 해설로 끝맺음된다. 이러한 구성은 독자들이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창의적 시각을 키우게 하며, 담론 분석 훈련을 해보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오늘날 담론 분석 방법은 커뮤니케이션과 문화 연구, 정치학, 사회학, 교육학 등 사회과학의 비판적 연구 분야를 넘어서 마케팅이나 실용 등 전 사회 영역으로 확대되며 필수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으로 거듭났다. 변화하는 문화 환경에서 담론을 어떻게 적용하고 분석해야 하는지, 더 나아가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볼지에 관해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더더욱 현실적이고 실질적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언어나 문화 장르는 세월을 거치면서 다듬어지고 체계화·구조화되면서 틀을 갖추게 된다. 그렇게 발달하다가 활력을 잃게 될 때, 혹은 그것이 (드러나게) 유연성을 잃고 억압적이 될 때, 혹은 권위와 신뢰를 잃을 때, 그것에 도전하는 새로운 언어와 담론이 등장한다. 새롭게 등장한 언어들은 견고해 보이는 담론에 충격을 가하고 그것을 무너뜨리거나 변모시키거나 서로 융합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형태의 담론을 발생시킨다. (박명진, 「오늘의 담론 세계」, 82쪽)

 

사극이 아무리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는 해도 사실 그 자체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사극에 사실 그 자체일 것을 요구한다거나, 또는 사극이 스스로 사실의 재현임을 표방한다면 그것은 사실성의 바깥쪽 경계선을 넘어선 것이다. 드라마 「허준」에는 허준이 각종 병증을 처방하고 치유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드라마에서는 그때마다 마치 한방상식을 전달하듯 그 내용들을 자막으로 전달했다. 「대장금」에서는 각종 궁중요리를 조리하는 장면들이 나왔고, 현실에서 그것은 일종의 레시피처럼 받아들여졌다. 매실이 대표적인 예가 되는데, 「허준」에서 매실이 역병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대장금」에서 매실 장아찌 담그는 장면이 방영된 이후 현실에서 매실 철이 되면 매실 판매가 급증했다. (손병우, 「고대 영웅에 대한 상상적 기억」, 98쪽)

 

매그넘 사진전의 사진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20명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한국 사회에 대해 미리 정해진 여러 가지 주제들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장소에서 여러 시간대에 촬영한 것들이지만 단순히 사람이나 사물들을 보여주는 시각적 구성물로만 머물지는 않는다. 한국인의 객관적 초상이라는 의미가 부여되기 전에 이미 사진들은 한국 사회를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 담론으로 작동한다. 그것들은 한국 사회에 대한 지식을 만들어내거나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게다가 그 지식은 객관적인 것이라고 소개되기 때문에 지식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상징적 힘을 갖게 된다. (주형일, 「이방인이 본 한국의 모습」, 136~37쪽)

 

이 글의 관심은 남북정상회담 자체가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재현된 남북정상회담에 있다. 뉴스특보와 생방송 형식으로 재현된 남북정상회담은 ‘뉴스 이벤트’가 아니라 ‘미디어 이벤트’였고, 여기서 북한은 더 이상 정지된 혹은 무음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장의 소리를 수반한 움직이는 이미지로 체험되었다. 이것은 이전 북한 재현의 특징이었던 ‘추측 과장보도’나 ‘소설쓰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재현 양식이었다. (곽현자, 「미디어 이벤트로서의 1차 남북정상회담의 서사」, 171쪽)

 

현실에서 조선족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의 저임금 하층 노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지만, 담론을 통해서는 조선족의 이주가 민족 공동체를 해체 위기에 빠뜨리고, 한국 사회를 불안하게 하며, 국제적 분쟁을 야기하는 것으로 재현됨으로써 이들의 삶을 둘러싸고 작동하는 불평등한 힘의 관계는 감추어진다. 어떻게 이민 정책이 이들에게 단기계약 노동자로서 제한된 권리와 이동성의 구속을 통해 가족과 장기적으로 이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가, 불법이라 할지라도 더 나은 권리와 이동성을 보장받기 위한 이들의 선택이 오히려 이들의 권리와 이동성을 더욱 제약하는 아이러니를 개인적 차원에서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양은경, 「민족의 역이주와 위계적 민족성의 담론」, 241쪽)

 

어떤 미디어를 접하는가가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그림을 달라지게 한다는 것이야 너무 흔한 말이 되었지만, 선거 기간이 되면 더욱 이 흔한 사실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되곤 한다. 정책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정치라 하지만 방송을 타고 혹은 인터넷 공간에서 떠도는 말씀들의 의미는 그 내용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는 않는다. 누가, 어떤 수사학을 동원해서, 어떤 형식으로 말하는지에 따라 사실상 같은 단어의 의미도 다르게 이해해야 할 때도 있다. (홍종윤, 「방송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 비판적 담론 분석 연구」, 250쪽)

 

당시 담론의 핵심이 팬덤의 정상성 문제에 설정되었기에, 정상적이지 않은 음흉한 팬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성인 남성 팬덤은 스스로를 명명하는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했다. 이를 대표하는 말은 ‘삼촌팬’으로, 삼촌이라는 가족적 용어를 중심으로 구성된 해석적 레퍼토리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삼촌팬은 적어도 20대 후반이거나 30대, 다시 말해 숭배의 대상이 되는 아이돌과 열 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있다는 점을 함의하는 단순한 연령대의 의미라고 간주될 수도 있지만, 아저씨가 아닌 삼촌이라는 명명은 가족주의적인 함의를 갖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김수아, 「케이팝 아이돌의 성인 팬덤과 정체성 문제」, 301쪽)

 

한국의 아이돌 문화는 이러한 명백한 성도덕상의 비판 대상이라기보다는, 좀더 모순적이고 복잡한 담론들을 생산하고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아이돌과 꽃미남이 연기하는 연인은 여전히 신체접촉을 아끼고 첫 입맞춤을 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많이 수줍어하지만, 텔레비전 연예 프로그램에서는 미성년 아이돌들에게‘도덕적으로 옳지 않은’신체노출과 행위를 요구하고, ‘반전드라마’라고 부르는 극적 상황 뒤집기를 통해 공공연하게 동성애 관계를 연출해낸다. 이것은 방송이냐 공연이냐, 공연의 사전등급 문제, 팬 서비스를 중시하는 한국의 팬덤 문화와 연결된 복잡한 문화적 코드와 실천의 결과이지만, 이러한 사례들이 환기하는 성 담론들은 모순적이고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홍석경, 「세계화와 디지털 문화 시대 여성 팬덤과 성 담론」, 325쪽)

 

집단지성 모델이 기여자들을 익명적인 존재로 환원시킴으로써 지식 생산에서 위계구조를 말소시키는 것과 달리, 평가체계에 기초를 둔 지식 공동체 모델은 기여자들 간에 새로운 위계를 만들어냄으로써‘시민지성’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여기서 지식은 여전히, 그러나 다른 유형의 여과장치와 방식을 통해 인터넷상에서 권력으로 전환된다. 이 경우 문제의 초점은 위계의 소멸이 아니라, 지식생산과 관련된 기존 위계들 중 어떤 것이 살아남고 어떠한 것이 재구성되는가이다. 요컨대 인터넷상에서‘시민지성’으로 인정받는 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탐색할 필요가 있다. (최선정, 「미네르바 신드롬과 ‘시민지성’의 조건」, 371쪽)

 

불안은 단지 개인의 병리적인 심리상태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관계 속에서 구조화되고 체험되는 현실이다. 그러기에 지속적으로 대면하고 투쟁해야 하는 조건이자 대상인 것이다. 불안의 구조에서 구성원들은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진화하거나, 적어도 외양적으로는 적응을 잘하는 순발력 강한 체제의 구성원으로 계발되거나, 자의든 타의든 좀비족, 폐인, 백수와 같은 유사족속들로 변신하며 공적 세계의 그늘인 지하세계로 숨어 사라지는 운명을 걷게 된다. (김예란, 「불안: 그 느낌, 표정, 말들에 관하여」, 4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