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나뭇잎숨결 2012. 10. 1. 07:29

 

"도취야말로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킬수 있는 결험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은 항상 함께 확인된다. 그중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는 결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말은 취함의 상태에서 우주와 소통하는 일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발터 벤야민)

 

벤야민의 아포리즘적 사유와 몽타주적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주는, 분명 『일방통행로』는 거리를 산보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공간들의 열림과 닫힘, 멀어짐과 가까워짐의 모습들을 벤야민은 관상학적 내지 현상학적 시선으로 '사유이미지'로 읽어낸다. 그것은 이미지로 응결된 사유, 또는 관상학적 이미지에서 촉발된 사유이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흔히 아는 이 책에 대한 이해이다.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걸어간다는 것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그 소망의 실현인 것과 마찬가지다."(벤야민, 사유이미지)

 

하지만 그가 책이 출간된 뒤 호프만스탈(그가 바로 이 책의 출판을 주선했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 책의 진정한 의미를 엿볼 수 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적ㆍ외적 구성에서 독특한 부분 어디서든 '시대의 흐름'과의 어떤 타협의 흔적도 엿보지 말아주십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기이한 요소들을 드러내는 곳에서 이 책은 내적인 투쟁에서 얻어낸 승리의 트로피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 투쟁의 기록일 것이고, 그 투쟁의 대상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그것은 현재성을 영원의 이면(裏面)으로서 역사 속에서 포착하고 동전 뒤에 가린 이 이면을 찍어내는 일입니다. 그밖에 이 책은 여러 가지 점에서 파리에 빚지고 있고 제가 이 도시와 벌인 대결의 첫 시도입니다. 저는 이 후속편에서 이러한 의도들을 이어갈 생각이고, 제목은 '파리의 파사주'(Pariser Passagen)이 될 것입니다.』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 텍스트가 낡은 글쓰기 전통을 파기한다는 점에서보다는 그 내용의 '급진성' 때문에 더 주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이 애초에 의도한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가 목적한 바는 변화에 적응하고 개인과 사회의 파괴적 발전을 중단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정치적 태도의 필요성이었다.


『일방통행로』의 입구에 위치한 첫 공간의 이름은 「주유소」이고, 그 단편은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로 시작한다. 주유소는 대도시 자동차 문화의 역동성, 속도, 에너지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부르주아 개인의 관념론적이고 휴머니즘적인 도덕에 뿌리를 둔 '확신'이나 '신념'은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속 사람들의 삶을 이끌기에는 고리타분한 덕목이 되었다. 따라서 이 도발적이고 의미심장한 첫 문장은 이 책 전체의 모토로 내세울 수 있으며,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일방통행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아울러 앞서의 호프만스탈에게 보낸 편지글에 드러났듯이, 이 책은 그의 미완성 역작 『파사주』(Passagen-Werk)의 선구적 작업임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아도르노는 『일방통행로』가 아포리즘들의 모음이라기보다는 '사유이미지'의 모음이라고 본다. 그 사유이미지는 초현실주의적 글쓰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벤야민은 이를 통해 초현실주의자들이 진부한 것, 낡은 것, 사소한 것, 우연적인 것, 아니 무의미한 것, 오해, 키취(Kitsch) 등에 대해 꿈의 해석을 시도한 점과 사람보다 사물에 경도된 점, 그러한 진부한 일상에서 '혁명을 위한 도취의 힘들'을 끌어내려고 한 점에 주목하면서 현대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상자 인간'(Etui Mensch)을 해체하고 파괴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즉 『일방통행로』는 단순한 꿈과 기지에 찬 아포리즘들의 모음, 아방가르드적 산문형식의 특이한 실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폭발력을 갖는 벤야민 중ㆍ후기 사유의 모티프들이 응축되어 있는 작품이다

 

20세기에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지식인이자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독창적인 사유를 펼쳐 보인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보석 같은 사유와 상식을 뒤엎는 몽타주적 글쓰기의 전범으로 널리 알려진 『일방통행로』가 국내 초역으로 나왔다. 뷔퐁은 이미 18세기에 ‘문체는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했지만 벤야민에게서 그것은 ‘문체는 바로 그의 삶이다’라는 말로도 확장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일방통행로』에서 사유의 번뜩임이 기상천외의 몽타주적 글쓰기와 얼마나 절묘하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벤야민은 그동안 아포리즘적 사유, 몽타주적 글쓰기, 사유의 이미지의 조탁가 등으로 알려져 왔으나 막상 그의 이러한 면모의 진상을 보여주는 글은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짧은 단상 하나만 읽어보아도 우리는 당장 ‘벤야민적인 사유와 글쓰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내 글 속의 인용문들은 노상강도 같아서 무장한 채 불쑥 튀어나와 여유롭게 걷고 있는 자에게서 확신을 빼앗아가 버린다.” 즉 이것은 전복(顚覆)의 사유의 전형을 넘어서 사유의 본질 자체에 대한 벤야민의 생각을 간략하게 전달하면서 기존의 상투적인 글쓰기와 날카롭게 각을 이루는 것이다. 진리는 ‘돌발적인 것이고’, ‘놀라움’에 기반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인용이라는 극히 상투적인 아카데미즘의 도구를 바로 그러한 돌발적이고 섬광 같은 사유를 위한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 등은 그의 사유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것은 그의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벤야민에게서 ‘사랑’은 ‘놀라움’과 뜻밖의 선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불원천리하고 러시아의 리가에 살고 있는 연인 아샤 라시스를 불시에 찾아가며, 여행에서는 받는 사람을 깜짝 놀래킬 선물을 고르는 것에서 고통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 엄숙주의와 사유의 고루함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던 기성 제도에 맞서는 벤야민식의 사유의 도전이었다. 아마 ‘책과 매춘부’를 결합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벤야민뿐일 것이다. “책과 매춘부는 침대로 끌어들 수 있다.” “책과 매춘부 ― 양자에게는 저마다 이들을 갈취하고 괴롭히는 남자들이 달라붙어 있다. 책에는 비평가들이.” “책과 매춘부 ― 전자의 각주가 후자에게는 양말 속의 돈(foot-note).” 이러한 아포리즘을 읽으며 우리는 어느덧 통상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달리 책이 무슨 성스러운 정신의 산물인 것만이 아니라 이미 상품 물신주의의 회로에 포섭되어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는 벤야민의 혜안과 함께 오늘날의 기계적인 비평과 제도화된 글쓰기를 반성하는 우울한 시선에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벤야민의 놀라운 ‘현대성’ 하지만 벤야민에게서 정작 놀라운 것은 그의 빼어난 현대성이다. 벤야민은 살아생전에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같은 비판적 마르크스주의 진영, 브레히트 같은 좌파 작가들, 칼 슈미트와 같은 우파 이론가들과 다양한 정도의 친소 관계를 맺었지만 막상 그가 가장 매료된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와 19세기의 파리였다. 그는 당시의 대학이란 제도 밖에서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지만 사유에서도 철저한 아웃사이더로서 고독한 단독자의 사유를 펼쳐 보인 바 있다. 하지만 당대에는 홀대받았던 그러한 이방인적 사유와 단독자적 시선만큼 20세기도 다 저물고 21세기의 정보화 시대에 접어든 지금의 우리 현실에 살갑게 다가오는 것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비평의 죽음 또는 문학의 죽음과 관련해 벤야민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어보자. “바보들이나 비평의 쇠퇴를 이야기한다. 비평의 명맥이 끊어진 지 오래인데도 말이다. 비평이란 정확하게 거리를 두는 문제이다. … 그런데 오늘날 사물의 핵심에 가장 본질적으로 가 닿는 시선은 광고라고 불리는 상업적 시선이다. …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사물들이 그런 식으로 다가오도록 하는 것, 사물과 적절하게 접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돈이다.” 문학의 죽음이나 비평의 죽음은 비평-광고-돈이라는 삼각형과 관련 있다는 벤야민의 솔직하고 정곡을 찌르는 지적은 새삼스레 ‘인문학의 죽음’, ‘정신의 패배’ 운운하고 있는 현금의 우리의 아카데미즘의 ‘바보들’에게도 경종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의 소개는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오히려 인문학, 비평, 문학이 모두 죽음의 조종을 울리고 있는 우울한 지금, 글쓰기와 사유의 본질에 대해 오히려 많은 것을 시사하고 암시해줄 것이다.

글쓰기의 전략은 사유의 전략이다. 우선 이 책의 목차만 본 독자들은 도대체 무슨 제목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나 하고 의아함과 낯설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선 제목만 전부 훑어본 독자라면 이 책의 소제목들로만으로도 벌써 어떤 여행을, 그러니까 20세기 초의 독일의 어느 대도시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남성용’이라는 화장실 표시(여성용은 보이지 않는다), ‘돌아오너라! 모든 걸 용서하마!’라는 신문의 광고 문구, ‘계단 주의’, ‘독일인이여, 독일 맥주를 마시자!’라는 선동적인 문구, ‘거지, 잡상인 사절’ 등 그때나 지금이나 대도시 어디에서나 부딪힐 수 있는 세목들이 이 책의 소제목들로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도시는 ‘독일인이여, 독일 맥주를 마시자!’라는 선동적인 문구와 ‘마담 아리안느’와 같은 점 집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대도시에 걸맞게 활기차고 민주적인 어떤 도시가 아니라 파시즘으로 향하고 있는 듯한 짙은 조짐을 보이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제목의 몽타주는 대조와 충돌을 통해 대도시의 삶에 대한 독특한 일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시에 각 소제목 아래의 글들과도 충돌과 대조를 통해 사유의 불꽃을 튕겨 올린다. 예를 들어 ‘독일인이여, 독일 맥주를 마시자!’라는 소제목하의 글은 우중(愚衆)의 계산성에 대해, 그리고 ‘거지, 잡상인 사절’에서는 거지를 환대하던 과거의 전통과 거지가 공개된 치부가 된 현대를 대조하고 충돌시키면서 노동의 본질에 대해 되묻는다. 이런 식으로 벤야민은 아우라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지우는 등의 방법으로 몽타주적 글쓰기를 통해 돌발적 선물로서의 사유를 실천해 보인다. 마치 현대의 짧은 광고 문구나 선전 용어보다 더 빼어나게 온갖 도시의 사물의 핵심을 찌르고 있는 벤야민의 보석 같은 아포리즘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사유의 힘을 되돌려줄 수 있는 최고의 자극제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계단주의.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단계가 있다. 산문을 작곡하는 음악의 단계, 그것을 짓는 건축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것을 였는 직조織造의 단계가 그것이다.((일방통행로, p.93)

 

위대한 사람들에게는 완성된 작풉보다는 평생을 두고 작업했으나 완성하지 못한 단편들이 더 비중있게 다가온다. 완성에서 비할 바 없는 기쁨을 누리며 삶을 다시 선물받은 것처럼 느끼는 사람은 어딘지 더 부족하고 더 산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천재에게는 어떠한 단절이나 힘겨운 운명적 타격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근면함이 지배하는 작업실에 슬며시 차아온 잠에 불과하다.(일방통행로, p.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