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들뢰즈의 예술 현상학 : 살, 집, 우주

나뭇잎숨결 2012. 9. 30. 12:31

들뢰즈의 예술 현상학 : 살, 집, 우주

 

- 김상민



1. 예술 현상학


인간은 세상과 사물을 어떻게 지각하고 감각하는가? 인간이 세계-내-존재로써 다른 존재들을 바라보고 만나며 소통하는 방식은 어떻게 특별한가? 무엇보다도 인간이 예술 작품을 또는 미적 대상을 지각하는 것은 다른 존재와 사물들을 지각하는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관점인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또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위항 속에서 바라 본다면, 그들 중 한가지를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되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대위항들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 말하자면,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변증법적 지양에 대해 ― 프랑스의 현대 철학은 계승과 극복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한 시도들 중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현상학적 철학의 관점은 계승보다는 극복의 노력으로 읽어야겠는데, 그 노력들은 다양한 철학적 주장들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아마도 그것들은 메를로-뽕띠에서 출발해서 데리다나 푸코, 그리고 이 글에서 살펴볼 들뢰즈에 이르기까지도 끊이지 않고 내재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들일 것이다.


메를로-뽕띠의 시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헤겔(적 의미에서)의 '즉자'/'대자'와 같은 구분을 거부하며, 또한 그 양자의 종합이라는 것에서도 해결책을 구하지 않는, 그 '둘 사이'에서 '유한한' 말하자면 미완성되고 불안정한 종합 속에서 추구1)하는 것이다. 그런 유한하고 불안정한 종합, 사물과 의식 또는 자연과 의식 사이의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메를로-뽕띠는 그 양자 사이의 매개를 인간(의식적 존재)의 육체로 본다는 점에서 이전의 데카르트적 전통에 놓인 주체(객체 또는 타자의 반대항) 중심의, 영혼(육체의 반대항) 중심의 철학들과는 확고히 구별된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를 다시 어떤 우월항에 놓는 것이 아니라, '지각하는 자아'와 '사유하는 자아'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며, 나아가 "나는 지각한다"가 "나는 생각한다"의 토대로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2)


우리는 들뢰즈의 미학 이론에서 위와 같은 현상학적인 단초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들은 대체로 건축학적인 ―그러나 그 자체에서 어떤 개념으로의 환원으로 나아가지는 않는 ― 구성으로, 각기 독립적이면서 긴밀히 연결되고 중복되며, 포함하고 초월하는 유기체적인 구성으로 나타난다. 살, 집, 우주라는 그의 독특한 개념들은 앞서 살펴본 현상학적인 토대 위에서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구축되고 더불어 상호보완의 역할들을 떠맡게 된다. 들뢰즈는, "논리학이 과학을 필요로 하듯, 현상학은 예술을 필요로 한다."3)고 한다. 예술은 현상학에서의 원초적 견해들이 가변적인 경험(사적 체험)을 넘어서기 위한, 진리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이, 견해가 원초적인 한계 안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현상학은 "예술의 현상학"({철학}, 256)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감각


들뢰즈는 예술을 철학이나 과학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범주의 지위에 올려 놓고 그들 사이의 상호연관성, 독립적 역할과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철학이 개념의 존재들을 통한 변주들 variations이고, 과학이 기능(함수)의 존재들을 통한 변수들 variables이라면, 예술은 감각의 존재들을 통한 다양성들 varieties이 된다. 사용된 유사한 용어들(변주, 변수, 다양성)은 이전의 그것과 어떤 다른 것을 창조해내며,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역할을 한다. 예술에 있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감각의 존재이다. 그런 감각의 존재들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할 수 있는 일종의 가능성으로서 열려있는,  사유와 존재의 바탕과 같은 것이다.


감각은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세상에 있음이다. 나는 감각 속에서 되어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하여, 하나가 다른 것 속에서 일어난다. 결국은 동일한 신체가 감각을 주고 다시 그 감각을 받는다. 이 신체는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이다.4)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감각한다는 것이다. 신체로서의 주체가 사유로서의 주체에 선행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그렇다. 세계의 감각은 나의 신체에 대한 감각이며, 나에게 주어지는 세계는 바로 나이다. 내가 세계의 주체이고 세계의 대상인 동시의 순간이 지각의 순간인 것이다. 주체도 대상도 구분되지 않는 신체들, 감각에 의해 서로 하나가 또는 다른 것이 되어지는 모순으로서의 신체들 : 차이나 동일성의 구분으로 환원되지 않을 존재들. 그 신체들은 어떻게 감각을 소유하는가? 들뢰즈가 보기에는 감각은 다른데 있지 않다.


감각이란 빛과 색의 자유롭거나 대상을 떠난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체 속에 있다. 비록 그 신체가 사과의 신체가 할지라도 상관없다. 색은 신체 속에 있고 감각은 신체 속에 있다. 공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려지는 것은 감각이다. 그림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신체이다. 그러나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되어진 신체이다.5)


세계가 저 홀로 감각은 될 수 없다. 감각은 신체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오로지 우리의 신체만이 아니라 세계의 신체, 사물의 신체와 동시에 가질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감각은 세계/사물이 신체에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세계와 우리의 신체가 함께 ― 우리가 세계를 체험함으로써 ―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은 예술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에게서는 더욱 더 원초적인, 나아가 초월적(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닌)인 개념으로 나타난다. 들뢰즈는, "감각은 원초적 견해, 즉 세계의 기초 혹은 확고부동의 토대인 원적견해(Urdoxa)로 동화될 수 있는가?"({철학}, 256)라고 질문을 함으로써, 일종의 현상학적인 문제설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3. 살, 집, 우주


i) 살(la chair/the flesh) :


우리의 육체가 무언가(어떤 사물이나 세계)를 지각한다 또는 경험한다고 할 때, 우리의 육체가 느끼고 겪게 되는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 외부의 사물/세계의 존재를 느낀 것인가, 아니면 단지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한 감각의 존재를 느낀 것일 뿐인가? 우리의 경험과 지각이 있기 위해서는 분명 두 가지 모두가 존재해야 할 것이지만, 세계와 우리의 육체가 어떻게 작용하며 지탱해 나가고 있는지는 (데카르트적 의미에서의) 과학적 탐구를 통해서는 불충분하다. 데카르트에게서는, 주체가 이미 대상에 대한 코기토를 작동시키고 있기에 모든 공간 내부의 사물들은 주체를 중심으로 수없는 연장선들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세계는 나로부터...). 이것은 우연히도 르네상스 시기의 원근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외부의 공간은 원근법이 해결하는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메를로-뽕띠가 볼 때, 공간이라는 것이 그것을 "위로부터" 내려다 보려고 하는 우리의 기도를 회피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6)


그렇다면, 우리의 육체는 어떻게 세계를 지각 또는 감각하는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의 육체와 세계의 접촉을 통해서 지각이 이루어 진다면, 우리의 육체와 세계가 만나게 되는 장소는 어디인가? 이는 앞서 살펴본 '감각'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그러한 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각과 정서의 집적인 감각의 존재는 느끼고 느껴짐의 일체성 혹은 그 불가역성으로, 말하자면 꽉 마주잡은 두 손과 같이 그들 간의 긴밀한 얽혀짐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곧 체험된 육체로부터, 지각된 세계로부터, 여전히 경험에 지나치게 얽매어 있는 상호간의 지향성으로부터 동시에 자유로워지게 될 살이다.({철학}, 257)


우리의 (사실 우리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감각의 존재는,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만지는 것과 만져지는 것의 하나됨이라는, 주체와 대상 양자를 동시에 벗어나면서 모두가 접촉되는 '살'이다. 육체의 살은 들뢰즈가 박피된 짐승이나 껍질이 벗겨진 과일의 표상을 예를 통해 살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과 같이, 내면이 없는 것이다. 곧 자아라고 하는 존재의 내면은 사실 없는 것이며, 인간의 신체가 존재하는 것은 위에서와 같은 살들(세계의 살과 육체의 살)의 겹쳐짐 또는 격렬한 포옹, 꽉 마주잡은 두 손과도 같은 상호교접의 상태를 통해서 일종의 섬광7)의 번쩍임으로 존재하게 된다.


ii) 집(house), 골조물(framework) :


그러나, 살은 예술에 있어서 그것만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는 하나의 형상(figure)과도 같은 것이다. 마치 회화에서 하나의 형상과 그 형상의 장소가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에도 그것을 흘러내리지 않고 고정시키도록 하는 또 다른 힘이 필요하다. 살이 우리의 감각의 발현에 관여할지라도, 살은 감각이 아닌 것이다({철학}, 258).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인물(형상)을 둘러싸고 있으며, 그를 가두거나, 붙여놓는 어떤 장소로서의 원형경기장, 혹은 동그라미, 트랙, 유리나 거울로 만든 평행육면체, 이상한 모양들이 결합된 안락의자는 바로 그러한 또 다른 힘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들이 바로 장소이며, 이 장소들은 형상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놓지는 않으며, 오히려 형상이 장소나 자기 자신에 대해 하고 있는 일종의 모색과 탐험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8) 그렇게 해서 형상과 장소는 서로를 격리하고 고립시키면서도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이미지 또는 이콘이 되는 것이다.


세잔이 인상주의자들의 색채의 광학적 혼합으로서 표현된 사물의 아른거림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그림에서 추구하고자한 사물의 견고함, 지속성, 영원성은 바로 들뢰즈가 '집' 또는 '골조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육체는 집 안에서 활짝 열린다(집과 등가인 샘 혹은 숲). 그런데 집을 정의[규정]하는 것은 '면들', 말하자면 앞면과 뒷면, 수평, 수직, 왼쪽과 오른쪽 면들, 수직과 경사면들, 직각면 혹은 곡면들……과 같이 살에다가 그의 골격을 부여하는, 여러 방향으로 향해진 면들의 조각들이다. […] 이는 정확하게 감각에다가 제 스스로 자율적인 틀들 안에서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는 것들이다.({철학}, 258-9)


집을 가진다는 것은 스스로 그 틀 안에서 비로소 존재가 홀로 서며 생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이 예술이기 위해서 창조되고 존재하게 되는 바인 감각의 집적은 부단한 노력과 지속을 위한 질료의 형상화 작업이 동반된다. 질료는 아직 감각의 존재가 아니며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없다. 개인이 가진 그만의 체험(경험)과 무수한 기억, 아직 구조화되어지지 못한 우물거림은 예술이 아니다. 자전적 요소들이 그 자체만으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착각일 뿐인 것이다. 들뢰즈가 "예술은 살과 더불어가 아니라 집과 더불어 시작된다."({철학}, 270)라고 할 때에는 분명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화가들이 색채와 구도에 대해서 가지는 경외심과 존경심은 결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색의 체제와 구도의 구축이 바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집'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동양에서 말하듯이, 한 분야에서 대가(大家)가 되었다라든가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스타일(style) 또는 비젼(vision)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체험된 지각작용을 지각으로, 체험된 감정들을 정서로 고양시키기 위해 언제나 필요한 작가의 문장, 음악가의 음계들과 박자들, 화가의 필치와 색채들과 같은 스타일"({철학}, 244).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기호들의 유출과 시간의 생성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해 낸다. 그곳에서 들뢰즈는 예술의 기호가 다른 기호들에 비해 가진 우월함을 설명하면서 본질(혹은 이데아)이 어떻게 예술 작품에서 육화하는지를 스타일의 문제를 통해 보여준다:


예술은 질료의 진정한 변환이다. 본질, 다시 말해 근원적인 세계의 성질을 굴절시키기 위해, 예술 속에서 질료는 정신화spiritualiser되고 물리적 환경들은 비물질화d mat rialiser된다. 그리고 물질을 이렇게 다루는 일은 오로지 스타일을 통해 이루어진다.9)


예술이 아니었더라면 언제까지고 각자의 비밀로만 남아있게 되었을 '차이diff rence', 즉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 속에 들어 있는 질적인 차이 ― 이것이 바로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가 허구화, 비물질화 또는 형상화라는 질료들의 변환을 통하여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타자의 영역, 즉 타자의 눈에 비친 풍경에 관해서 알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장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즉, 세계가 증식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10) 우리가 타자로 생성되어 가며 인간 이전의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오로지 예술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다.


아직 살로 존재하는 것들은 마치 날 것의 고깃덩이와도 같은 알려지지 않은, 보여지지 않은 힘들이다. 살이라고 하는 원초적, 야생적(카오스적) 형상들을 일으켜 세우고 골격을 부여함으로써 그 자체로 무언가로 생성, 구축되도록 하는 '집'은 따라서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명명하고 겨우 존재하는 것들을 굳건히 존재하게 한다. 들뢰즈는, "예술은 살과 더불어가 아니라 집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래서 건축은 예술의 으뜸"({철학}, 270)이라고 한다.


iii) 세계(the universe), 우주(the cosmos) :


살은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도록 집과 골조물로 지탱되지만, 집은 또한 우주를 향해 나아간다. 감각 존재는 살과도 같이 흐물거리는 인식 관계 속에서의 형상이 아니라 집의 거주자, 한 영토의 거주자로 생성되지만, 또한 그 집의 영토 내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다시 혼돈의 영역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더욱 아니다. 집은 우주로 열려있기 때문이다. 


세계-우주는 살이 아니다. 모든 구도들이 무한으로 이어진다면 우주가 구축될 수도 있겠지만, 우주는 면들이 아니며, 서로 결합되어 다양하게 방향 지워진 구도들의 일부도 아니다. 우주는 단색조의 균일함, 위대한 하나의 구도, 채색된 공백, 단채색적 무한으로 표상된다.({철학}, 260)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의 집을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우주를 창조해낸다. 카오스로부터 하나의 구도를 구축하여 내는데, 그 구도가 감각을 억누르거나 고립시키는 것에 멈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한으로 확장시키고 연장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이 세계이며, 우주이다. 또한 그것이 예술이 나아갈 바, 또는 예술의 본성인 것이다. 베이컨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단채색의 한결같은 색조(아플라aplat)는 어떠한 형상도 아니며, 단지 형상의 배경도 아니다. 마치 배경처럼 존재하지만 그것은 배경 이상의 것이며 형상을 초월하여 무한으로 나아가게 하는 순수한 색채의 긴장된 힘이다. 단채색의 비표상이 우리를 무한의 구도, 우주적 무한성으로 우리를 이끌고 나아가는 셈이다.


살은, 아니 차라리 형상은 이제 더는 한 장소나 집의 거주자가 아니라, 집(생성)을 떠받치는 우주의 거주자이다. 그것은 유한으로부터 무한으로의, 그리고 영토로부터 탈영토화로의 이행과 같다. 바로 그것이 실로 무한의 순간이며 끝없이 다양한 무한함들이다.({철학}, 260-1)


살이 또는 감각의 원초적 존재가 집의 거주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는 앞서 본 것처럼 집은 하나의 구도로서 무한, 또는 혼돈으로서의 살을 제한하고 속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리적 인과관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집과 함께 우주는 동시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예술은 본성상 스스로를 옭아매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뿌리치며 한 발 앞서 나가 있는 것이므로, 어느새 하나의 구축은 동시에 새로운 무한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의 철학이 예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4. 영토화와 탈영토화


들뢰즈는 차이의 철학자로서 해체론의 데리다와 유사한 점을 많이 가진 철학자이다. 그들은 헤겔의 변증법에서와 같이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동일성의 단순한 반대항으로 또는 동일성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차이와, 타자와, 육체와 같은 비변증법적 담론들로 자신의 철학을 구성해 나간다. 하지만, 데리다가 형이상학에 대항하여 바로 그 형이상학의 담론 내부에서 형이상학의 개념들로 집요한 투쟁들을 해나가고 있다면, 들뢰즈는 형이상학의 내부에서 텍스트들을 통해 죽지 않을 형이상학과 싸우기보다는 또 하나의 대안적인 세계를 창조해내는(창조적 허구로서의 집짓기?) 점이 다르다.


이와 같이 들뢰즈가 데리다의 해체론과 비교해서 낙관적일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비판이 차이의 긍정, 부정에 대한 진정한 긍정, 부정을 해방시키는 긍정을 배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데리다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들뢰즈는 푸코와의 대담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론적 실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 "... 우리는 한 이론을 고치기보다는 새로운 이론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11) 이것은 들뢰즈에게 있어서 사유가 가지는 실천으로서의 창조적 성격을 보여주는 말이다. 들뢰즈의 이론적 실천은 한마디로 영토화와 탈영토화의 동시 작업이다. 이는 바로 예술의 영역에서 보이는 특성이기도 한 것이다.


지각과 정서들로 이루어진 구성적 감각은 자연적이고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어떤 환경 내에서의 지배적인 지각작용들과 감정들을 집결시키는 견해체계를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구성된 감각은 구성의 구도상에서 재영토화한다. [……] 이와 동시에 구성의 구도는 감각들을 무한한 우주를 향해 열리고 트이게 하는 일종의 틀 벗어나기를 감행함으로써, 그것을 보다 높은 차원의 탈영토화로 이끈다.({철학}, 284-5)


우리가 앞서 살, 집, 우주라는 개념들을 지나쳐 오는 동안 이같은 작업들이 텍스트의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우리가 예술 현상학으로서 들뢰즈의 사유를 바라보고자 할 때 나타나는 것들이며, 들뢰즈가 그의 전 이론적 실천(철학) 속에서 추구하는 개념들의 구도와 분배의 방법인 일종의 사유의 이미지 또는 내재성의 구도와 같은 것들이다. 카오스의 블랙홀과도 같은 불안정성, 순간적 시/공간에 현실화하여 매몰되거나 와해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속적으로 집을 지어야 할 것이고, 또 집의 견고함 내에서 안주하지 않으며 우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예술의 현상학으로 볼 때 들뢰즈가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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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Vincent Descombes, {동일자와 타자}, 인간사랑, 1990, 74쪽.

2) 바로 이것이 현대 철학이 그토록 열망했던 (추상으로의 상승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으로의 귀환인 것이다. {동일자와 타자}, 82쪽 참고.

3) Gilles Deleuze․F lix Guattari,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1995, 213쪽.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철학}이라 약하고, 쪽수만 표기함.

4) Gilles Deleuze, {감각의 논리(Logique de la sensation)}, 민음사, 1995, 63쪽.

5) {감각의 논리}, 63-4쪽.

6) M. Merleau-Ponty, [눈과 마음], {현상학과 예술}, 서광사, 1983, 313쪽.

7) [눈과 마음], 293쪽.

8) {감각의 논리(Logique de la sensation)}, 3-6쪽.

9) Gilles Deleuze,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1997, 80쪽. 역자는 style을 문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들뢰즈는 문학에서의 style만을 말하고 있지0 않으므로 여기서는 그대로 스타일이라고 옮기기로 한다.

10) {프루스트와 기호들}, 73쪽 참고. 이 구절은 프루스트의 {되찾은 시간}에서 들뢰즈가 인용하는 부분이다.

11) Ronald Bogue, {들뢰즈와 가타리}, 새길, 1995, 255쪽, 들뢰즈와 푸코의 [지식인과 권력], {언어, 반-기억, 실천}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