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진중권의 탈회화적 추상

나뭇잎숨결 2012. 9. 29. 13:29

[진중권의 현대미술 이야기](4) 탈회화적 추상

 
- 진중권 | 문화평론가·동양대 교수
 
그린버그는 왜 팝아트를 못마땅하게 여겼을까? 이유가 있다. 모더니즘의 강령에 따르면 현대회화는 자연의 재현을 포기하고 회화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팝아트는 명백히 재현의 예술이다. 거기에는 구상이, 말하자면 대중에게 친숙한 스타와 상품들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린버그와 같은 모더니스트의 눈에는 이처럼 구상이 다시 등장한 것이 진화의 순서를 거슬러 ‘모던 이전’(premodern)으로 돌아가는 퇴행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따라서 추상표현주의의 대안 역시 추상예술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린버그는 1964년 뉴욕에서 ‘탈(脫)회화적 추상’(post-painterly abstraction)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조직한다. 이 전시회에는 프랭크 스텔라, 모리스 루이스, 케네스 놀랜드, 헬렌 프랑켄탈러, 엘스워스 켈리 등 당시 미국과 캐나다에서 막 떠오르는 추상 화가들이 참여했다. 그린버그는 이들의 작품이야말로 팝아트와 달리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라 주장했다.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탁티 술레이만’(Takht-i-Suleiman, 1967) ⓒ 2012, Frank Stella / SACK, Seoul


■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같은 추상이라도 이들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잭슨 폴록이나 드 쿠닝의 추상이 뜨겁다면 새로운 추상은 무엇보다도 차갑다. 이 차이를 그린버그는 ‘선적인’(linear) 것과 ‘회화적인’(malerisch) 것의 대조로 설명한다. 미술사가 뵐플린은 이 개념 쌍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회화의 차이를 특징지은 바 있다. 즉 르네상스 회화는 선적이어서 윤곽이 뚜렷한 반면, 바로크 회화는 색채의 효과를 위해 윤곽의 명료함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선적’ 회화는 윤곽선이 끊어지지 않아 경계가 뚜렷하며 색채 또한 채도가 높아 명료하다. 반면 ‘회화적’인 작품은 거친 붓질 속에 윤곽선이 흐르다 끊기며 색채 역시 채도가 낮아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폴록과 드 쿠닝의 추상표현주의가 ‘회화적’(painterly)이라면 그 뒤를 잇는 새로운 추상, 즉 ‘탈회화적’(post-painterly) 추상은 경계가 뚜렷하고 색채가 명료한 ‘선적’ 추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작위의 환영효과라 할까? 사실 폴록의 화면에는 여전히 공간감(우주공간?)이 느껴진다. 회화 이후의 추상은 이 최소한의 환영마저 없애려고 기하학적 규칙성을 도입한다. 이 결과 ‘그림’보다는 차라리 ‘간판’에 가까워진다. 폴록이나 뒤뷔페가 임파스토(두꺼운 물감칠)를 사용한다면, 탈회화적 추상은 화면에 아크릴을 얇고 평평하게 바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묽게 희석한 물감을 화면 위로 흥건하게 흘리기도 한다.

■ 연속과 단절

탈회화적 추상은 추상표현주의보다 더 평면적이다. 그것은 전통적 의미에서 회화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회화’가 화면에 물감을 칠하는 행위(painting)라면, 탈회화적 추상은 화면 위로 희석한 물감을 흘리는 자국 남기기(staining)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화가의 체취가 느껴지는 거친 터치(touch)를 통해 감동을 주는(touch) 작품이 아니라, 차라리 간판이나 인쇄물 같은 익명적, 비인격적 제작물로 느껴진다.

1950년대의 회화적 추상과 1960년대의 탈회화적 추상 사이에는 이런 ‘단절’이 존재한다. 하지만 탈회화적 추상은 동시에 회화적 추상의 ‘연속’이기도 하다. 왜? 그린버그에 따르면 회화에서 모더니즘이란 결국 화면에서 공간의 깊이를 몰아내고 평면성으로 나아가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탈회화적 추상은 그 어떤 공간의 환영도 남기지 않고 화면 자체도 매끄럽다. 그것은 여전히 평면성을 향한 모더니즘 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다.

회화적 추상과 탈회화적 추상을 이어주는 또 다른 요소는 디자인의 개방성이다. 가령 폴록의 작품은 화면이 사방으로 무한히 연장돼도 괜찮을 것처럼 보인다. 페기 구겐하임의 저택에 그림을 걸 때 벽면이 모자라는 바람에 그림을 잘라내는 일도 있었다. 탈회화적 추상 역시 어떤 거대한 패턴의 일부를 뭉텅 잘라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하여 그림이 안으로 완결되지 않고 밖으로 연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 물리적 명료함과 개방성

이제 왜 그린버그가 탈회화적 추상을 “현대미술의 진화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에피소드”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그린버그가 찾던 것은 결국 생명력이 다한 추상표현주의를 대신하여 모더니즘을 계속 추진해 나갈 예술적 대안이었다. 그 대안은 추상표현주의와 확연히 단절하면서도(“진정으로 새로운 에피소드”), 동시에 평면성을 향한 추상표현주의의 유업을 이어가야 한다(“현대미술의 진화”). 탈회화적 추상은 이 두 조건을 만족시켜준다.

그린버그는 탈회화적 추상의 특징으로 “선적 명료성”과 “물리적 개방성”을 든다. “명료성”이란 물론 추상표현주의의 ‘회화적’(malerisch) 특성과 대조되는 탈회화적 추상의 선적(linear) 성격을 말한다. ‘개방성’은 회화적 추상과 탈회화적 추상이 공유하는 특성을 가리킨다. 두 흐름은 관계주의(형태와 배경 사이의 적절한 미적 관계)를 배제하고 이미지가 화면의 사방으로 연장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공통성이 있다.

이 점이 또한 탈회화적 추상을 1920~30년대 유럽의 추상회화와 구별하기도 한다. 몬드리안과 바우하우스를 생각해 보라. 그들의 작품 역시 평면적 실루엣과 확고한 윤곽을 가진 차가운 기하학적 추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추상에는 여전히 ‘관계주의’가 지배적이어서 프레임 안에 기하학적 도형이 들어 있고, 형태와 프레임이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탈회화적 추상에서는 이 비례의 관계가 사라진다.

■ 부드러움에서 딱딱함을

돌이켜 보면 세계대전 이전에는 ‘추상’이라고 하면 주로 종합적 입체주의에서 갈려나온 기하학적 추상을 가리켰다. “깔끔한 드로잉, 부드러운 색칠, 명료한 윤곽, 평면적이고 명확한 색채.” 이것이 추상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하지만 폴록과 뒤뷔페는 임파스토, 드리핑과 거친 브러시워크로 추상을 ‘회화’적 효과와 결합시켰다. 당대인의 눈에 이런 결합은 모순으로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추상표현주의는 회화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는 이미 상황이 달랐다. 진 데이비스의 회상이다. “1957, 58년 추상표현주의와 회화적 추상은 도처에서 지배적이었다. 모든 예술대학이 드 쿠닝과 폴록과 클라인의 것과 같은 작품들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추상표현주의가 관학적인(academic) 것으로 보였다. 추상표현주의는 제 몫을 다했고, 우리는 어디론가 가야 했다. 그 반대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회화성(painterliness)에서 벗어나 깔끔해져야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쟁 전 유럽의 기하학적 추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탈회화적 추상은 “회화적 추상 자체 내에서, 즉 (…) 뉴먼, 로스코, (…) 심지어 폴록의 작품 내에서 시작됐다.” 아마도 뉴먼과 로스코가 회화적 추상과 탈회화적 추상을 잇는 가교였을 것이다. 뜨거운 열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둘은 여전히 추상표현주의의 틀 내에 있으나 정작 그들의 화면은 기하학적 추상처럼 차갑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하드에지와 색면추상

탈회화적 추상은 몬드리안, 말레비치, 혹은 바우하우스에서 나온 게 아니다. 그것은 추상표현주의의 부드러움에서 딱딱함을 배웠다. 비행기의 연착륙과 경착륙을 생각해 보라. 추상표현주의의 화면은 전체가 균등하여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행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반면 케네스 놀랜드의 화면을 보라. 하나의 색면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다른 색면과 뚜렷이 구별되면서 날카로운 색채의 대비를 이룬다. 이를 ‘하드에지’(hard edge)라 부른다.

사실 ‘회화적 추상’이라 불리는 흐름에는 크게 세 가지 경향이 뒤섞여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하드에지다. 이 흐름은 수직선으로 화면을 기하학적으로 분할한 뉴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색면추상’(color-field painting)이다. 뉴먼 역시 회화를 구성이 아니라 색면으로 간주했지만, 색면 추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로스코로 보인다. 프랑켄탈러의 화면은 물론 로스코의 것보다 색채와 윤곽의 대조가 뚜렷하다.

마지막은 후에 ‘미니멀리즘’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다. 모리스 루이스는 색면추상의 화가로 분류되지만, 그의 작업에는 그와는 또 다른 경향이 숨어 있었다. 그는 화면에 희석한 옅은 물감을 부어 화포와 물감이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이는 화폭에 물감을 칠한다기보다는 차라리 화포를 염색하는 것에 가깝다. 이 경우 화포의 거친 텍스처가 그대로 드러나 작품은 그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물처럼 느껴지게 된다.

■ 미니멀리즘과 팝아트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랭크 스텔라다. 이 “범례적인(paradigmatic) 탈회화적 화가”(어빙 샌들러의 표현)는 회화를 그림이 아니라 “오브제”(object)로 간주한다. 미니멀리즘의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셈이다. 그가 그림을 사물로 간주하는 것은 물론 회화에서 환영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다. 그림이 그림인 한, 아무리 추상적이어도 거기에는 모종의 공간감이 남을 수밖에 없다. 환영효과를 피하려면 그림은 아예 사물이 되어야 한다.

텅 빈 배경에 붉은 삼각형과 하얀 동그라미만 그려 넣어도, 우리는 거기서 공간을 느낀다. 이를 피하려면 형태만 남기고 배경을 없애야 한다. 이를 위해 스텔라는 캔버스를 형태와 똑같은 모양으로 잘라낸다. 이를 ‘세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라 부른다. 스텔라 외에도 케네스 놀랜드 등 몇몇 탈회화적 추상화가들이 세이프를 사용하곤 했다. 원조는 뉴먼이 아닐까? 그는 수직선(‘지퍼’)을 그리는 데에 같은 모양의 캔버스를 사용한 바 있다.

그린버그는 점점 막강해지는 팝아트의 위력에 탈회화적 추상으로 맞서려 했다. “아무리 팝아트가 재미있어도,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렇게 참신하지 않다. 피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취향에 도전하는 것도 아니다. 아직까지는 그것은 취향의 역사에서 새로운 에피소드일지는 몰라도, 현대미술의 진화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에피소드는 아니다.” 그가 보기에 진정으로 새로운 에피소드는 역시 탈회화적 추상이다. 여기서 모더니스트의 고집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탈회화적 추상과 팝아트 사이에도 유사성이 존재한다. 가령 화가의 제스처를 지우고 생산의 익명성을 지향한다는 점, 인쇄한 것처럼 매끈한 표면을 가졌다는 점(이는 레오 스타인벡이 말한 ‘평판화면’을 연상시킨다), 공간의 깊이를 지우기 위해 평면성을 지향한다는 점(팝아트는 아예 평면적 사물, 즉 사진이나 만화를 그렸다), 스텔라의 경우처럼 종종 시리얼한 제작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시리얼 제작은 수공업과 다른 공업생산의 특징이다). 이는 탈회화적 추상이 팝아트와 공유하는 특성이다.

비록 추상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 팝아트도 탈회화적이었다. 아마 그것이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는 1960년대의 시대정신일 것이다.

ㆍ“워홀의 팝아트에 맞서라” 60년대 추상주의의 ‘차가운 진화’

“추상표현주의는 특정한 예술 스타일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다른 예술 스타일들처럼 거기에도 상승기가 있었고 몰락기가 있었다. 중요성을 갖는 예술을 생산한 후, 그것은 화파가 되고 화법이 되더니 결국 매너리즘에 빠져 버렸다. 추상표현주의의 리더들은 많은 모방자를 끌어 모았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리고 그 리더들 중 몇몇은 자신을 모방하게까지 되었다. 회화적 추상은 유행이 되었다가 이제는 한물 가 버렸다.”

■ 두 개의 대안

이것이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묘사하는 1960년대 초반 미국 미술계의 상황이다. 정체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추상표현주의를 대체할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사실 1960년대에는 이미 그 대안이 존재했다. 바로 앤디 워홀의 팝아트다. 하지만 팝아트는 추상이 아니라 구상이다. 거기에는 먼로가 있고 엘비스가 있고 재클린이 있으며 캠벨 수프 깡통과 브릴로 세제 박스가 있다. 하지만 그린버그는 팝아트를 “또 다른 유행”으로 폄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