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문예중앙, 2012
시는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저를 지우고 다시 돋아나기를 반복하며,
진실한 것이건 아름다운 것이건
인간의 척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에까지 닿으려고 정진하는
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 .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이다.(황현산)
첫 번째 평론집 『말과 시간의 깊이』를 상재했던 것이 2002년의 일이다. 그 이후 10년에 걸쳐 썼던 글 가운데 시와 관련된 평문을 따로 모아 이 책을 편집했다. 그동안 내가 비평에만 전념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프랑스의 상징주의부터 초현실주의까지의 중요 문헌들을 번역하고 주해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왔고, 그래서 그 일을 비평 활동과 병행하다보니 어느 쪽에도 마음을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시가 제 살아 있는 힘을 조용하거나 거침없이 뽐내는 현장의 비평 활동은 수의를 마름질하는 것과도 같은 저 팍팍한 번역·주해 작업에 구체성과 생기를 부어주었고, 거꾸로 이 작업은 저 활동에 숙고의 기회를 마련하고 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게 해준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 비평집은 한국 현대시 발상기의 시인들에서부터 최근의 젊은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수십 인의 시인에 대해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말하고 있지만, 그 역사적 조감도를 펼친 것은 아니며, 그 주력 선을 그어낸 것도 아니다. 몇 차례의 기획에 따라 쓴 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수 이상의 글이 눈앞에 떨어진 요청(그 주체가 좀 복잡하긴 하지만)에 따라 급하게 쓰였다. 내가 이 비평집의 통일성을 주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다른 데서, 말하자면 시와 끊임없이 교섭하였던 내 사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내 생각이 시에서 벗어난 적은 없으며, 내 삶과 크고 작게 연결된 제반 문제를 시와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늘 시에 대해서 말하고, 시와 말을 하면서, 일상에 쫓기고 있는 한 마음의 평범한 상태가 어떻게 시적 상태로 바뀌는가를 알려고 애썼다. 어떤 사람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기억을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오는 기술이 시라고 말했지만, 나에게 시는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 속으로 끌어당기는 계기이다.
시는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한다.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한 말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능변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 시를 잘 쓰는 것은 그럴 만도 한 일이겠지만, 어눌하게 말을 잇다가 자주 입을 다무는 사람들도 좋은 시를 쓴다. 물을 떠낸 자리에 다시 샘물이 고이듯 시가 수시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유장한 말이 되기에는 너무 기막힌 생각이나 너무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특별한 상태에서 그 생각이 돌처럼 단단한 것이 되거나 공기처럼 숨 쉴 수 있는 것이 되기를 기다린다. 시는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저를 지우고 다시 돋아나기를 반복하며, 진실한 것이건 아름다운 것이건 인간의 척도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에까지 닿으려고 정진하는 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이다. 이 비평집에 어떤 통일성이 있다면, 그것은 저 시적 상태의 계기와 그 상태의 은총으로만 얻게 되는 정진의 용기를 어느 시에서나 발견하려고 애써온 도정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제1부에는 시론(詩論)에 해당하는 글들을 모았지만, 현장의 구체성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의 글이라서 원론보다는 시론(時論)의 성격이 더 강하다. 시적 상태의 특별함이 일상의 범속함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문학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알려고 노력한 가운데 쓴 글들이다. 제2부는 작고한 시인들에 관해 쓴 글들을 모았다. 그 가운데 많은 시인들은 벌써 문학사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평문들은 그들의 작품과 생애 전체를 평설하는 일보다는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는 데 초점을 모았다. 제3부는 지금 이 땅에서 쓰이는 시들을 따라가며 쓴 글이다. 말 그대로 현장비평이다. 많은 글들이 시집에 따라붙는 해설의 형식으로 쓰였지만, 중요한 시집이나 시편이 발표되었을 때 자청해서 쓴 글들도 있다. 현장에서 약동하는 재능의 박력을 중시하면서도 일정한 비평적 거리가 유지될 수 있기를 바랐다. 한편 여기서 다룬 시인들 가운데 타계한 시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해당되는 평문은 그의 생전에 쓴 것이기에 여기 넣어 두었다. 제4부는 한 잡지사의 기획에 따라, 작고 한 시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난삽하거나 논의가 엇갈리는 시들을 골라 내가 독서한 바를 기술한 글들이다. 해당 시편들에 대한 ‘독서’라기보다는 ‘하나의 독서’에 해당한다고 해야겠으나, 때로는 제1부에서 말한 문학 존재론의 탐구와도, 제2부에서 말한 새로운 관점의 모색과도 연결되는 점이 없지 않다.
나는 시를 강의하면서 가끔 엉뚱한 질문을 받는다. 그런 질문은 대체로 ‘시를 잘 모르는 학생’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에 응해 재차 삼차 설명을 하다보면 내 설명체계에 약점이 있다고도 느끼게 되고, 그 약점이 내가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는 ‘코드’에서 기인하다고도 생각하게 된다. 시를 잘 안다는 것이 시에 대한 설명의 ‘코드’에 익숙하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코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시가 본래 지닌 힘에 의해서일 뿐이다. 어느 일에서나 마찬가지로 시를 읽는 일에서도 마음을 비우는 연습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난 10년 동안 여기 실린 평문들을 쓰면서도 다시 확인하게 된 것이 또 하나의 수확이겠다.
문예중앙과 그 편집진들에게 감사드린다. 이 비평집의 편집을 도와준 권혁웅 교수와 조재룡 교수에게도 뜨거운 마음을 전한다.(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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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문학비평가이자 탁월한 번역가이며 전설의 불문학자로 잘 알려진 황현산 교수(고려대 불문과 명예교수)가 10년 만에 두 번째 비평집 『잘 표현된 불행』(문예중앙, 2012)을 펴냈다.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프랑스 현대시의 가장 믿을 만한 연구자이자 번역가이고, 근현대 철학에 대한 높은 학식과 문학사와 담론사, 사회사에 대한 폭넓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시에 대한 가장 충실한 해설자로 유명한 저자는 오랫동안‘ 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본질과 역사를 규명하는 데 노력해왔다.『 잘 표현된 불행』은“ 시와 끊임없이 교섭하였던”황현산 교수의 애정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결정체로서, 지난 10년간 한국현대시에 관해 발언해왔던 글들을 4부에 나누어 담고 있다.
문학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책의 머리글에서 저자는 시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고백한다. “내 생각이 시에서 벗어난 적은 없으며, 내 삶과 크고 작게 연결된 제반 문제를 시와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평범한 마음 상태가 어떻게 시적 상태로 바뀌는가, 사라진 기억을 다시 기억 속으로 불러오듯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 속으로 어떻게 끌어오는가라는 질문은 저자가 비평 활동에서 늘 염두에 두었던 질문이다. 제1부 「시와 말과 세상」은 이처럼 시적 상태의 특별함이 일상의 범속함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문학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탐색한 탁월한 에세이다.
한 겹 레이스의 베일은 항상 물질적 찌꺼기를 남기는 언어의 현실이고, 따라서 인간의 현실이고, 언제나 마지막 한 장의 베일이 남을지라도, 그 베일을 차례차례 벗겨가는 것은, 그것이 “가려 감추”게 하기보다는 “떠오”르게 하는 것은...“이것이 한국 시비평이 도달한 현재의 수준이다.”
뛰어난 문학비평가이자 탁월한 번역가이며 전설의 불문학자로 잘 알려진 황현산 교수(고려대 불문과 명예교수)가 10년 만에 두 번째 비평집 『잘 표현된 불행』(문예중앙, 2012)을 펴냈다.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프랑스 현대시의 가장 믿을 만한 연구자이자 번역가이고, 근현대 철학에 대한 높은 학식과 문학사와 담론사, 사회사에 대한 폭넓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시에 대한 가장 충실한 해설자로 유명한 저자는 오랫동안‘ 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본질과 역사를 규명하는 데 노력해왔다.『 잘 표현된 불행』은“ 시와 끊임없이 교섭하였던”황현산 교수의 애정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결정체로서, 지난 10년간 한국현대시에 관해 발언해왔던 글들을 4부에 나누어 담고 있다.
문학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책의 머리글에서 저자는 시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고백한다. “내 생각이 시에서 벗어난 적은 없으며, 내 삶과 크고 작게 연결된 제반 문제를 시와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평범한 마음 상태가 어떻게 시적 상태로 바뀌는가, 사라진 기억을 다시 기억 속으로 불러오듯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 속으로 어떻게 끌어오는가라는 질문은 저자가 비평 활동에서 늘 염두에 두었던 질문이다. 제1부 「시와 말과 세상」은 이처럼 시적 상태의 특별함이 일상의 범속함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문학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탐색한 탁월한 에세이다.
한 겹 레이스의 베일은 항상 물질적 찌꺼기를 남기는 언어의 현실이고, 따라서 인간의 현실이고, 언제나 마지막 한 장의 베일이 남을지라도, 그 베일을 차례차례 벗겨가는 것은, 그것이 “가려 감추”게 하기보다는 “떠오”르게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다. 반복해서 떠오르는 그 레이스 뒤에 어떤 언어의 찌꺼기도 없이 순결하게 태어날 음악이 비록 몽상의 형태로나마 존재한다고 믿게 하는 것도, 어떤 초월적인 힘의 은총이나 개입이 아니라, 역시 인간의 실천이다. (…) 인간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이 거기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극진한 노력과 항상 연결되어 있음을 끝없이 확인하는 언어적 노력이다. (…) 시는 포기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고 시범한다.
-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중에서
위의 글에서 저자는, 시는 포기하지 않고 모든 것에 대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끝까지 말하려 하며, 이치와 박자마저 부족하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현실에 내재하는 현실 아닌 것의 알레고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책 머리글에서 다시 “시의 용기와 훈련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이 세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극히 절망적인 순간에 그 절망을 말하면서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 시는 포기하지 않음의 윤리이며 그 기술이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이처럼 삶과 문학의 형식을 결부시켜 시와 삶, 더 나아가 번역과 비평의 접점을 추적해가는 저자는, 이 비평집의 통일성을 “저 시적 상태의 계기와 그 상태의 은총으로만 얻게 되는 정진의 용기를 어느 시에서나 발견하려고 애써온 도정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시가 태어나는 동시대의 현장을 바라보는 현장비평가의 애정
시의 존재론에 관한 제1부의 질문과 짝을 이루는 것은 제3부, 시가 태어나는 동시대의 현장에 대한 성실한 보고문들이다. 주로 시집의 해설로 담긴 제3부 「시 쓰기의 현장」이 그것이다. 머리글에서 그는 “시가 제 살아 있는 힘을 조용하거나 거침없이 뽐내는 현장의 비평 활동은 수의를 마름질하는 것과도 같은 저 팍팍한 번역, 주해 작업에 구체성과 생기를 부어주었고, 거꾸로 이 작업은 저 활동에 숙고의 기회를 마련하고 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게 해준 것도 또한 사실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저자는 시가 태어나는 현장을 특유의 감성적이고도 치밀한 논리로 소묘해낸다. 그의 손끝에서 형체를 얻은 시인들 - 이문재, 이수명, 고은, 이영광, 김록, 문인숙, 이경림, 권혁웅, 김근, 김이듬, 황병승, 위선환, 송승환, 이은봉, 정재학, 박철, 이문숙, 김성규, 김혜수, 최승자, 이성복, 신현정 - 을 보노라면, 한국의 현대시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한 번도 현장의 구체성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대가 비평가의 유려하고도 정교하며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언어의 힘은 놀랍다. “아마 어느 멍청하거나 재치 있는 중학생이 영어의 ‘dearest’를 처음 번역하였을 법한” ‘완전소중’이라는 유행어로 황병승의 시세계를 명명한 「완전소중 시코쿠」가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쟁점의 시편들, 이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저자는 이 책의 제2부와 제4부에서 이미 문학사에 편입된 시인들의 작품들 중에서 아직까지 논쟁과 담론의 대상이 되는 시와 시인들의 비평을 담아내고 있다. 제2부의 글들이 문학사 기술의 일환이라면, 제4부의 글들은 문학사에서 문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의 의미를 새롭게 밝히는 개별 작품 연구이다. 제2부에서 저자는 김소월의 시편들에서 발견되는 ‘자연’을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소월의 자연은 “그에게 생각의 연장이고, 그의 생각은 자연의 연장이다. 자연과 소월 사이에는 시공간의 거리가 없다”고 밝히며, 늘 자연을 말하지만 그 자연으로 풍경을 만들지 않았던 김소월의 시편들을 통해, “민요적 자연”이 아닌 것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또한 한용운, 김기림, 이상, 윤동주, 김수영, 김현승, 이성선의 시편들, 그리고 송욱의 『시학평전』을 통해 저자가 제시하는 다형적인 해석의 즐거움 느낄 수 있다. 제4부(이 글들은 1999~2000년까지 《현대시학》에 연재됐던 글이다)는 김소월의 「왕십리」, 이상의 『오감도』, 이육사의 「광야」 등 아직도 현대문학사의 쟁점이 되는 시편들에 대한 저자만의 독창적인 해석이 펼쳐진다. 예를 들어, 저자는 이상의 시 「시제1호」의 시구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에서 “모였소”의 시제가 과거형이 아님을 지적하고, 이를 통해 난해한 이상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평집은 대가 비평가가 완성한 한국 현대시의 조감도이다. 독자는 이 책에서 현대시의 씨줄(동시대의 시)과 날줄(문학사의 시)과 매듭(개별적인 시)과 옷감(시가 놓인 사회, 정치, 철학적 맥락을 포함한 존재론적 자리)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평집은 지난 10년 동안 황현산 교수가, 시와 삶 앞에 한시도 그 긴장의 자락을 놓지 않고, 문학과 함께 세상을 호흡해오면서 일구어낸 비평 활동의 성과물이며, 한국 시비평이 도달한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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