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749

김경주. 눈 내리는 내재율

눈 내리는 내재율 - 김경주 뚜껑이 열린 채 버려진 밥통 속으로 눈이 내린다 눈들의 운율이 바닥에 쌓이고 있는 것이다 어린 쥐들의 깨진 이빨 조각 같은 것이 늦은 밤 돌아와 으스스 떨며 바닥을 긁던,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 같은 것이 양은의 바닥에 낭자하다 제 안의 격렬한 온도를, 수천 번 더 뒤집을 수 있는 밥통의 연대기가 내게는 없다 어쩌면 송진(松津)처럼 울울울 밖으로 흘러나오던 밥물은 그래서 밥통의 오래된 내재율이 되었는지 품은 열이 말라가면, 음악은 스스로 물러간다는데 새들도 저녁이면 저처럼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음역으로 열을 내려 보내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 속으로 뜨겁게 뒤집었던 시간을 열어 보이며 몸의 열을 다 비우고 나서야 말라가는 생이 있다 봄날은 방에서 혼자 꿇고 있는 밥물의 희미한 쪽..

시(詩)와 詩魂 2014.12.19

나무로 된 고요/심보선

나무로 된 고요함 / 심보선 나는 나무로 된 고요함 위에 손을 얹는다 그 부드러운 결을 따라 보고 듣고 말한다 그때 기쁨, 영원한 기쁨의 지저귐이 사물들의 원소 속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다 하느님은 여느 때처럼 말없이 황금 심장을 가슴속에 품고 계신다 아, 거기서 떨어지는 황금 부스러기들 그 하나하나로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유리와 불과 돌 속에서 지워질 이름이란 없을 것이거늘 쓸모를 모르겠는 완구(玩具)처럼 하늘의 언저리를 굴러가는 태양 아래 인간은 오래되고 희미한 기쁨의 필적들을 주워 모으는 절박한 수집광 아, 우리가 불안을 조금만 더 견뎠더라면 그것을 하느님이 조금만 더 도와줄 수 있었더라면 유리와 불과 돌 속에서 사라지는 이름이란 없을 것이거늘 나는 양손을 가슴팍 위로 거두어 모은다 망각이 그 부드러..

시(詩)와 詩魂 2014.12.12

이제니, 발 없는 새

발 없는 새 이제니 청춘은 다 고아지. 새벽이슬을 맞고 허공에 얼굴을 묻을 때 바람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지.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 이제 우리 무엇을 할까. 어디든 어디든 무엇이든 무엇이든. 청춘은 다 고아지. 도착하지 않은 바람처럼 떠돌아다니지. 나는 발 없는 새. 불꽃 같은 삶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옷깃에서 떨어진 단추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난 사라진 단춧구멍 같은 너를 생각하지. 작은 구멍으로만 들락날락거리는 바람처럼 네게로 갔다 내게로 돌아오지. 우리는 한없이 둥글고 한없이 부풀고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해. 질감 없이 부피 없이 자꾸만 날아오르려고 하지. 구체성이 결여된 삶에도 사각의 모퉁이는 허용될까. 나는 기대어 쉴 만한 곳이 필요해. 각진 곳이 필요해. 널브러진 채로 몸을 접을..

시(詩)와 詩魂 2014.12.09

Claude Monet. Impression: Sunrise

Claude Monet. Impression: Sunrise - Olga's Gallery Claude Monet. Water-Lilies - Olga's Gallery http:// www.abcgallery.com/M/monet/monet125.html @olgasgallery 에서 Claude Monet. The Water Lily Pond; Pink Harmony - Olga's Gallery http://www.abcgallery.com/M/monet/monet179.html @olgasgallery 에서 [경향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31) 모네의 수련 연못 -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우주가 깃든 한 송이 꽃, 수련 처음 연꽃을 보고 놀란 곳은 실상사에서였습니다. 연못에 연꽃이 시..

시(詩)와 詩魂 2013.01.10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

낙엽을 태우면서/ 이효석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언만, 낙엽은 어느덧 날으고 떨어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 수효보다 많은가 보다. 30여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언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벗나무, 능금나무 - 제일 귀찮은 것이 벽의 담쟁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연돌의 붉은 빛만을 남기고 집안을 통채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 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 쯤에는 벌써 다시 지릅떠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벗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시(詩)와 詩魂 2012.11.13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은 소리가?

낙엽 -구르몽 나뭇 잎 저버린 숲으로 가자낙엽은 이끼와 돌과 외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은 아주 부드러운 빛깔너무나도 나지막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낙엽은 너무나도 연약한 포착물들의 대지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황혼이 질 무렵 낙엽의 모습은 너무나도 슬프다 바람이 휘몰아칠 때 낙엽은 정답게 소리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이 밟을 때,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소리,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벼운 낙엽이 되리라 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고 바람은 우리를 휩쓴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은 소리가?

시(詩)와 詩魂 2012.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