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놀이’를 둘러싼 의자놀이
-진중권
“이 책은 수많은 분이 함께 만들었다. (....) 많은 분이 이미 쓴 기사나 칼럼, 인터뷰 등의 인용을 무상으로 허락해 주셨다. (...)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전 쌍용차 노조 기획실장 이창근씨, 시사평론가 정관용씨 (...)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 이 분들 모두 이 책의 공저자들이다.” '의자놀이'에는 하종강의 이름이 모두 세 번이나 표기되어 있다. 경향신문 칼럼의 출처 표시에, 감사의 말에 공저자로, 그리고 뒷표지에 인용문과 더불어 또 다시.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이 프로젝트의 공적 성격. 비록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이 책은 실은 개인창작에 공동창작의 요소가 합해진 것이다. 이제까지 축적된 자료를 모아 쌍용차 사태의 흐름을 재구성하고, 그것으로 대중의 분노를 일으켜, 거기서 나오는 행동으로 공공선을 이루자는 공적 기획이다. 책의 속표지에는 이런 인용구가 적혀 있다.
공지영은 노동운동가가 아니다. ‘의자놀이’를 이루는 콘텐츠는 공저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다. 누구나 그 사실을 알 게다. 공지영은 그저 자신의 문학적 재능과 대중적 인기를 이용해 이 “공저자”들의 집단적 노력의 산물을 대중적으로 널리 확산시키는, ‘스피커’ 역할을 하려 했을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남의 콘텐츠를 가져다가 슬쩍 제 것으로 취할 동기가 있었을 것같지는 않다. 인용의 부적절성 문제가 된 부분을 읽어보면, 그 부분이 왜 그렇게 처리됐는지 짐작이 간다. 장(章)의 시작부터 직접인용으로 사건을 전해들은 형식으로 처리하는 것보다는 마치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처럼 서술하는 게 몰입에 유리하다. 공지영으로서는 문제의 칼럼이 그 내용상 일종의 공적 증언이며, 원저자에게 허락까지 받았으므로, 쌍용차 상황을 더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 정도 변형을 하는 것은 용인의 범위 안에 있다고 판단했을 게다. 하지만 불행히도 원저자는 생각이 달랐다. ‘마치 인용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 ‘as if'를 공지영과 하종강-이선옥은 서로 다르게 이해한다. 공지영은 그것을 (1) ‘마치 자기가 직접 목격한 장면처럼 보이게 하는’ 문학적 가공으로 생각하는 반면, 하종강-이선옥은 그것을 (2) ‘마치 자기가 직접 쓴 것처럼 보이게 하는’ 문학적 표절로 의심하는 것이다. 하종강-이선옥은 공지영이 자신들의 저작을 함부로 대한 것이 기분 나쁠 것이고, 공지영은 그들이 자신을 ‘표절’로 의심하는 게 기분 나쁠 것이다. 그럼 공지영의 ‘최초의 입장’이 이해가 된다. 거기서 그녀는 사과를 하나, 그 사과가 온통 짜증으로 범벅되어 있다. 하종강-이선옥의 입장에서는 짜증 묻은 사과가 ‘괘씸해’ 보일 것이다. 반면, 공지영의 입장에서는 굳이 ‘사과’를 하라니 하긴 하는데, 그게 마치 자신이 남의 저작을 훔쳤음을 인정하는 것 같아, 닦달하는 그들이 ‘너무해’ 보일 것이다. 접촉사고를 냈는데 뺑소니로 신고 당한 기분이랄까? 조치의 적절성 하종강-이선옥이 취할 조치의 적절한 수준은 이것이다. 출판사에 연락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물론 본의는 아니겠지만, 그 부분이 마치 작가의 것처럼 읽혀질 우려가 있으니, 작가에게 얘기해 다음 판부터는 수정해 달라.” 그럼 출판사에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 후, 작가에게 이 사실을 통지하고, “예의상 그 분들에게 사과의 전화를 한 통 넣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랬다면 큰 문제가 없었을 게다. 그런데 하종강-이선옥은 그 수준을 넘었다. 첫 메일을 보내기 전에 그들과 출판사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그 통화의 내용이 그들이 출판사에 보낸 최초의 메일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거기서 그들은 표절을 의심하며, 공지영에게 입장을 표명해 줄 것을 요구한다. 하종강은 자신들이 요구한 사과의 수준을 이렇게 묘사한다.
과연 그랬을까? 내가 보기에 하종강-이선옥의 요구는 이 차원을 훨씬 넘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이것을 모르는 듯하다. 첫 번째 메일에서 하종강-이선옥은 두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는 인용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함께 글을 쓰는 ‘공저’의 경우에나 가능한 일일 텐데, 사전에 동의를 구하는 절차도 없이 그렇게 글을 쓴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 지적은 합리적으로 들린다. 문제는 바로 그 앞에서 표명한 “의구심”이다. “왜...독자들에게는 마치 자신의 글처럼 읽히도록 썼는가 하는 점입니다.” 둘째는 책에 원저자인 이선옥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또 다른 “의구심”을 제기한다. “공지영씨는 책을 쓰기 전 쌍용차와 관련된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섭렵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신이 인용한 적지 않은 분량의 글이 이선옥의 글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가. 이어서 그들은 잘라 말한다.
여기서 하종강-이선옥과 출판사 사이에 전화로 오간 얘기의 핵심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하종강-이선옥이 원한 것은 결국 공지영의 사과였다. 그들이 공지영에게 사과를 요구한 근거는 물론 두 가지다. 하나는 ‘표절’(“마치 자신의 글처럼 읽히도록”), 다른 하나는 ‘저작권 침해’(“사전에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당연히 공지영은 사과를 할 수가 없다. 결국 애먼 출판사 직원, 혹은 (하종강의 표현을 빌면) “출판노동자”만이 두 저자의 사이에 끼어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 상황을 하종강은 이렇게 이해한다.
그런데 저 출판노동자를 울린 것은 과연 누구일까? 여기서 눈물을 흘린 출판노동자는 자신이 울음을 터뜨린 진짜 동기마저 졸지에 정반대 방향으로 재단 당하고 만다. 이런 걸 적반하장이라고 한다. 꺼내서는 안 됐을 카드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표절’이나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 ‘인용의 부적절함’이다. 그 정도의 문제는 위에서 제안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물론 본의는 아니겠지만, 그 부분이 마치 작가의 것처럼 읽혀질 우려가 있으니, 작가에게 얘기해 다음 판부터는 수정해 달라.” 그런데 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종강-이선옥이 애초에 사안을 실제보다 턱없이 무겁게 봤기 때문이다. 첫 번째 메일의 요구사항을 보자.
물론 하종강-이선옥이 정말로 책의 배포를 중단시키려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아마도 출판사를 압박해 공지영의 사과를 받아낼 생각이었을 게다. 요는, 그들이 이 사안을 서적의 ‘배포중지’까지 요구할 수 있을 만큼 중대한 사안으로 봤다는 점이다. ‘배포중지는 표절이나 저작권 침해의 경우에나 할 수 있는 요구니까. 하지만 저작권 전문가 김기태 교수에 따르면,
물론 이 의견서는 이선옥을 공저자로 표기하지 않은 데에 대한 판정이기에, 공지영이 칼럼을 인용하는 방식이 적절했다고까지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하종강은 여전히 공지영에게 인용방식의 부적절함을 지적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선옥은 이 사안에서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한다. 그런 그녀가 묻는다. “이미 배포된 3만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거냐?” 이상하지 않은가? 이선옥을 떼어내면 상황은 단순해진다. 하종강은 제 칼럼의 사용을 허락했으나, 그런 방식으로 인용하는 것까지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반면, 공지영은 남의 글을 훔치려는 것도 아니고, 공익을 위해 상황을 “더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정도의 가공은 하종강도 흔쾌히 허락할 것이라 믿었다. 말하자면 ‘허락’ 받은 사용 범위에 대해서 서로 기대치가 달랐던 것이다. 애초에 문제에 이런 시각에서 접근했다면 과연 이렇게 큰 소동이 일어났을까? 일이 꼬인 것은 하종강이 단식이 아니라 이선옥과 혼합복식조로 출전한 것 때문이다. “이선옥의 글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표절을 전제하고 들어가니 공지영으로서는 그냥 흔쾌히 사과할 수만은 없는 맥락이 생겨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 사과를 억지로 짜내기 위해 하-이 혼합복식조는 급기야 책의 ‘배포금지’라는 최강수를 꺼내들었다. 이 대목에서 공지영은 급기야 자제심을 잃는다. 하종강과 이선옥의 공저관계 하종강은 공지영으로부터 그저 “출판사가 권해서 그렇게 했는데, 내가 세심하게 신경을 못 썼어요. 좋은 일 하자는데 그 정도 갖고 뭘 그러세요?”라는 정도의 사과를 듣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하종강이 그 정도의 사소한(?) 이유로 거의 '자살-택'(tactic)에 가까운 카드까지 꺼냈는가 하는 점. 아마도 이선옥에 대해 느끼는 책임감 때문이었을 게다. 문제는 이선옥이 사실은 사안과 논리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이라는 데에 있다. 가령 하종강의 칼럼에 인용된 “어느 인터뷰”가 이선옥의 것이라 하나, 저작권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인터뷰 내용의 저작권은 원래 취재원에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인터뷰 내용의 저작권은 이선옥이 아니라 취재원에 있다는 얘기다. 물론 하종강의 칼럼에서 따옴표로 인용된 노동자들 목소리 외에 이선옥의 창작성을 인정받을 만한 부분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칼럼만 봐서는 어디까지가 이선옥의 인용이고, 어디까지가 하종강의 글인지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다. (이선옥이 하종강 칼럼의 공저자임을 주장하며, 공지영에게 표절 의혹을 제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게다. 그저 하종강의 칼럼에 인용된 자신의 몇 마디가 공지영의 책에 재인용됐다고 하는 얘기로는 보이지 않는다. 칼럼의 내용 대부분이 이선옥의 글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 없다. 한편, 그 칼럼이 어느 정도까지 이선옥의 것인지는 하종강이 참조한 이선옥의 다른 자료들을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선옥이 스스로 익명을 원했다면, 설사 같이 썼다 하더라도 그 칼럼의 ‘공식적’ 저자는 결국 하종강이다. 따라서 공지영에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공식적 주체도 하종강이다. 그런데 사건은 정작 엉뚱하게도 이선옥의 이의제기로 발생했다. 우습지 않은가? 애초에 이 사건 자체가 한 편의 부조리극이었던 것이다. 사적 채무를 이행하는 방식 이선옥은 애초에 공지영에 시비를 걸 근거 자체가 없었다. 그가 공저자라는 것은 자신과 하종강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내밀한 세계 속에서 적어도 하종강은 이선옥에게 사적으로 빚을 졌다. 하종강이 굳이 이선옥과 함께 공지영을 상대로 저작권 행사에 나선 것은 그 글이 자기 것이 아니라, 외려 남의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래 제 물건은 쉽게 빌려줘도, 남의 물건은 쉽게 빌려줄 수 없는 법이다. 거기서 나름 하종강의 선의를 읽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선의를 푸는 방식이었다. 사실 이 사건에서 하종강은 이선옥에게 빚을 진 게 없다. 그녀가 익명으로 남은 것은 그녀가 자원한 일이었다. 물론 사적 관계에서는 인간적 미안함이 남겠지만, 그것은 출판사에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것으로 풀었어야 한다. “사정이 이러저러하여 내 처지가 곤란하게 됐으니, 번거롭더라도 다음 판부터는 꼭 이선옥을 공저자로 넣어 달라.” 이 요청을 출판사에서 굳이 안 받아들일 리 없다. 하지만 (짐작은 가나 확언할 수는 없는) 어떤 이유에서 하종강은 이 사적 관계의 미안함을 공식적 차원에서 풀려고 했고, 그 결과 논리가 뒤죽박죽 꼬여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메일에 치명적 구절(“이선옥의 글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을 넣고, 기어코 이선옥을 위해 사과를 받아내 주려다 치명적 무리수(“배포는 중지해 주시고”)를 두게 된 것이리라. 하종강 자신도 이 사건을, 자신의 저작권을 되찾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라, “힘없는 무명 르포 작가의 권리”를 옹호하는 싸움으로 이해한다. 이선옥이 나서지 않았다면, 과연 하종강이 공지영에게 사과를 요구했을까? 그 경우 하종강은 그냥 ‘쿨’하게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사안 자체가 크지 않고, 기획에 공익성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설사 하종강이 깐깐해 공지영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해도,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경우 다툼의 대상은 표절이나 저작권침해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의도한 허락된 인용의 한계에 관한 얘기로 국한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공지영도 기꺼이 하종강이 듣고 싶었다던 그 얘기를 못 해줄 이유가 없다.
난무하는 해방의 서사 ‘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하종강-이선옥이 새로 건물을 짓고, 그것을 하종강의 이름으로 등록하기로 합의한다. 이후 하종강이 그 건물을 공지영에게 임대한다. 그러자 이선옥이 나타나 자신이 건물의 공동소유주이니 자신에게도 임대료를 내라고 하는 격이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이선옥은 이 사안에서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권리를 스스로 포기, 혹은 양도했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책의 기획 자체가 공익을 위한 것이고, 저자는 물론이고 인용된 필자들, 책을 만든 출판노동자들 모두가 재능을 기부했다. 게다가 칼럼의 내용도 되도록 널리 복제될수록 좋은 공익적 콘텐츠에 속한다. 그런데 소유권 등기도 안 한 이선옥이 나타나, 그 공익적 콘텐츠에 대한 사유권을 주장하다가, 저자의 사과가 없다고 공익적 콘텐츠의 배포중지를 요구한다. 남세스럽지 않은가? 자본주의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사유재(저작권)로 보나,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공유재(공익적 콘텐츠)로 보나, 애초에 이선옥이 낄 자리는 없다. 그런데도 하종강과 일부 자칭 좌파들은 특유의 스테레오타입를 사용하여 이번에도 신속히 또 하나의 이야기를 찍어냈다.
이로써 공지영은 밤의 여왕이 되고, 이선옥은 착취당한 민초가 되고, 하종강은 정의의 기사가 되고, 트위터러들은 그 뒤를 따르는 민중의 군대가 된다. 이 해방의 서사가 아무리 숭고해 보여도, 그것은 오직 그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순도 100%의 허구다. |
무단도용은 누가 했는가?
공지영이 한 일이 표절이나 무단도용에 해당한다면, 그 일은 이미 그 이전에 일어났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하종강이 참조했다고 밝힌 이선옥의 글은 하종강의 칼럼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서로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지만, 양자 일치하는 유일한 부분은 다음 대목이다.
이 부분은 대책위 대표의 발언의 인용으로 되어 있다. 이 부분은 하종강의 칼럼에 인용되었고, 이는 다시 공지영의 책 속에 재인용되었다. 한 번 인용되고, 또 다시 인용된 이 콘텐츠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을까? 저작권 전문가 김기태 박사의 말에 따르면, "인터뷰에 의한 것으로 표기된 부분"은 "창작성을 부가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 그 저작권이 채록자가 아니라 취재원에 돌아간다고 한다. 즉 저 발언의 저작권은 이선옥이 아니라 대책위 대표에게 있다. 결국 이선옥은 이선옥은 노동자의 삶에서 나온 ‘타인의’ 콘텐츠를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자기 것으로 ‘사유화’한 후, 공지영을 향해 그 권리를 행사하려 든 셈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나의 지적에 이선옥은 사적으로 구성한 해방의 서사로 대응했다. 거기에 따르면, ‘문화권력자 진중권이 기록노동자가 하는 노동의 가치를 무시하고 있으며, 그가 그러는 것은 결국 자기들이 힘없는 현장 르포 작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클리셰는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려, 그들을 반-진중권 투쟁의 전선에 결집시켰다. 다시 묻자. 이선옥이 과연 노동계에서 힘이 없는가? 나아가 힘없는 르포 작가라면 남의 발언을 온전히 제 것으로 취해도 되는가? 타인의 절절한 삶에서 나온 이야기를, 그저 자신이 채록했다 하여 자신의 소유물로 독점하고, 심지어 그것의 배포를 금지해도 되는가? 그 발언을 한 대책위 대표가 과연 그것을 원할까? )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고약한 상황이 있다. 일단 이 대목이 하종강의 칼럼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용되었는지 보자.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종강-이선옥이 공지영의 인용 방식에 드높은 기준을 들이댔다는 점이다. 그 기준에서 볼 때 그들의 인용 방식은 얼마나 모범적이었지 살펴보자. 다음 글을 위의 글과 비교해 보라.
금방 심각한 문제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먼저 여기에는 저작권자(“가족대책위대표”)의 이름이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다. 한 마디로 출처 표시가 통째로 빠진 것이다. 둘째, 원래의 발언도 심각할 정도로 해체-편집-재구성되어 있다. 한 마디로 남의 콘텐츠를 가져다가 멋대로 재단한 셈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밑줄 친 부분을 비교해 보라. 하종강의 칼럼에서는 대책위 대표의 발언이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따옴표 바깥으로 빠져나와 있다. 말하자면 대책위 대표의 발언을 마치 자신의 기술인 것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설정한 그 높은 기준에 따르면 명백한 도용이다. 다시 말해, 하종강-이선옥이 공지영의 인용방식에 사과를 해야 할 정도로 윤리적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면, 공지영이 인용한 경향신문의 하종강 칼럼 자체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도 지키지 않은 인용의 윤리를 상대에게 요구하는 셈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비난하는 공지영의 인용방식은, (문제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그리하여 그들 자신도 실천하는) 어떤 일반적 관행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 전에 그들은 자기 자신부터 비난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종강이 출처로 밝힌 이선옥의 원글은 하종강의 칼럼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종강은 그 글 외에도 이선옥의 (발표되지 않은?) 다른 글들을 보았을 것이다. 하종강이 그 칼럼을 쓸 때 참조한 이선옥의 그 ‘다른 글들’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공지영이 ‘이선옥의 글임을 몰랐을 리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굳이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는 글인 것 같은데, 인터넷으로는 아무리 검색해도 걸리지가 않는다. 그 글도 공개했으면 좋겠다. 사실, 표절이니, 저작권 침해니, 무단인용이니 논하기 앞서서 먼저 검토되어야 할 것이 바로 그 자료다. 요약하자. 현재까지 확인할 수 있는 한에서, 하종강의 칼럼을 통해 공지영의 책에 인용되어 들어간 것은 딱 저 대목뿐이다. 그 대목의 저작권은 인터뷰를 한 이선옥이 아니라 취재원, 즉 가족대책위 대표에게 있다. 이선옥-하종강은 경향신문에 기고를 할 때, 저작권자를 표기하지 않았고, 저작권자인 가족대표의 발언을 (아마도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변형했으며, 심지어 그 중의 일부를 자기 것으로 취했다. 현재로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대목에서 벌써 이 만큼의 표절, 내지 저작권 침해가 발생했다. 하종강이 이선옥에게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다른 부분들은 과연 안녕하실까? 추신. 한 마디로, 이 문제는 굳이 깐깐하게 물고 늘어지자면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은 아니나, 관행상 용인의 범위 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서로 양해하고 넘어가기도 하는, 그런 부분이다. 그런 간단한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진보진영의 소통능력에 개인적으로 한 없는 좌절감을 느낀다. 그래도 그것을 문제 삼아야겠다면, 오직 사안에만 집중하면 될 일이다. 1. 공지영의 인용이 표절이나 저작권 침해인가? 이런 것이 논점이다. 이 부분만 건조하게 논함으로써 해결될 문제였다. 그 다음에 벌어진 공지영 vs. 하종강-이선옥의 감정싸움은 그냥 사적인 문제, 그냥 개인들의 성격이 충돌한 것으로 보고 넘어갔어야 한다. 열 받으면 욕 할 수 있다. 내로라하는 유명한 철학자들도 감정이 상하면, 유치하게 싸운다. 이상한 해방서사를 동원하여 상대를 계급적으로 묘사하거나, 공맹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 인격 파탄자로 몰아갈 필요 없다. 그게 논점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설사 계급의 적이나, 인격파탄자라 하더라도, 옳은 소리를 못하는 건 아니다. 나한테 차마 들어주기 힘든 쌍욕을 퍼부었던 한모 기자와 이모 작가에게 굳이 대응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의 욕 속에는 논점이 없다. 그들은 그냥 내가 이해할 알 수 없는 이유에서 기분이 나빴고, 그것을 다소 과격한 표현주의적 방식으로 표출했을 뿐이다. 거기에는 나름 절실한 실존적 이유가 있었을 게다. 거기서 그들의 인격이나 사상에 관해 더 진전된 결론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다. 누구를 향해서든 더 이상의 비난은 의미 없다. 그냥 그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냉정하게 돌아보고 넘어가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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