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존재의 근거, 낯선 타자의 맨얼굴를 만져보는 것

나뭇잎숨결 2012. 8. 25. 08:54

 

 

 

 

철학은 충격과 망설임에서 시작된다. 나의 존재를 떠받쳐 주는 것, 나를 근거지워주는 바탕은 신체성이 아니라 사유라는 것이 일상의 파시즘, 반쪽의 존재론이라고 말하는 <타자의 얼굴>의  레비나스. 가끔 아니 늘, 우리는 나라는 존재의 근거에 대해 묻는다. 우리가 자신에게 물었기 때문에 인식하는 세계가 있고, 묻지 않거나(대부분은 묻지 못하거나) 물음마져  잊었을 때도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질문하는 존재다. 내가 지금, 여기에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세계와 타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나의 상태를 근거짓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타자가 없다면 '나'라는 말이 과연 성립될 수 있을까? 내가 '나'라고 할때 타인과 구별되는 '나'란 누구이며,  '오늘, 여기'라고 할 때, 과거나 미래에 구별되는 그 오늘은 무엇인지, 여기는 어떤 공간을 말하는지...또 나와 시간과 공간은 따로 존재하는 것인지,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만, 나라는 주체가 성립되며 '나- 오늘- 여기'는 세계를 여는 열쇠가 된다.  '나- 여기-오늘' 혹은 '나-타자-나'라는 존재의 스크럼은, 나라는 인류의 역사가 '타자와의 거리지움에서 타자에로의 열림'의 역사라고 말하는 듯 하다. 

 

 

타자와의 거리지움은 고독의 물질성이다. 그것은 타자와 확연히 구별되는 사유하는 자아와 타자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전체성이 깔린 동일성의 자아다. 전자가 고립적이라면 후자는 폭력적이다.  그것을 레비나스는 세상을 즐기는 향유적 자아라고 말한다.  혹은 고독의 물질성, 분리에의 욕망이라고 말한다. 나라는 존재는 자신과 동일한 존재자, 즉 홀로 있는 존재자에 의해 지배된다. 하지만 동일성은 자기로부터의 출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자기로의 귀환이다. 현재란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존립한다.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존재자의 존재자로서의 자리잡기로 치른 대가이다. 존재자는 자신에게 몰두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몰두하는 방식, 그것이 곧 주체의 물질성이다. 동일성은 자신과의 무해한 관계가 아니라 자신에게 얽매임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몰두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작은 자기 자신에 의해 짓눌린다. 그가 진 책임은 곧장 자유를 제한한다. 여기에 커다란 역설이 있다. 자유로운 존재이면서도 자신에 대한 책임으로 인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언제나 자유롭지만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얽매임이다. 현재의 물질적 성격은 과거가 짓누른다거나 자신의 미래로 인해 불안해 한다거나 하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현재의 물질적 성격은 현재가 현재인 한, 현재와 결부된다. 현재는 존재의 무한한 흐름에 균열(찢음)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현재는 역사를 모른다. 현재는 지금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또는 그 때문에, 현재는 자기 자신에 관여하며, 이를 통해 책임을 인식하고, 물질성으로 전환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심리학이나 인간학에서는 나는 이미 자신에게 못박혀 있으며, 나의 자유는 은총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이미 무거운 것이며, 자아는 어쩔 수 없이 자기라는 사실 등으로 표현된다.

 

 

나는 동어반복의 드라마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자아의 자기로의 복귀는 정확하게 말해서 조용한 반조도 아니며 순전히 철학적인 반성의 결과도 아니다. 자기와의 관계는 블랑쇼의 소설 <아미나답>에서 보는 것처럼 자아에 사슬처럼 묶여 있는 분신과의 관계인데, 이 분신은 메쓰껍고 굼뜨며 어리석지만 자아는 그것과 함께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 분신이 자아이기 때문이다. 함께 있음은 자기에게 관여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이를 벗어나려는) 모든 시도는 자신의 가구를 옮기느라고 야단법석을 떠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귀신처럼, 미소처럼,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렇게 가볍게)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책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는 소유와 겹쳐진다. 즉 나는 내 자신에 의해 차단된다. 바로 이것이 물질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물질성은 신체의 무덤이나 감옥으로 영혼이 우연히 추락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물질성은 필연적으로 존재자의 자유 안에서의 주체의 출현에 함께 수반되는 것이다. 신체를 이렇게 자아와 자기 사이의 관계가 생기는 구체적인 사건으로서의 물질성으로부터 이해한다는 것은 신체를 일종의 존재론적 사건으로 돌리는 것이다. 존재론적 관계는 신체를 벗어난 관계가 아니다. 자아와 자기 사이의 관계는 조용한 정신의 자기 반조가 아니다. 인간의 물질성 전체가 바로 이 자기와의 관계에서 존립한다.

 

 

"자아의 자유와 그의 물질성은 이렇게 서로 조화를 이룬다. 익명적 존재 속에서 존재자가 출현한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는 최초의 자유는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매이게 되는 대가를 치른다. 고독의 비극을 구성하는 이러한 존재자의 결정적 매임이 바로 물질성이다. 고독이 비극적인 것은 타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 안에 포로로 갇혀 있기 때문이고 고독이 곧 물질이기 때문이다. 물질에의 매임을 끊어버리는 것은 홀로서기의 결정적 매임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고독은 시간의 부재이다. 주어졌고, 그 자체로 실체화되고, 경험된 시간, 통과해야 할 시간, 주체가 그것을 통해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시간은 홀로서기와의 고리를 풀어줄 수 없는 시간이다. 향유적 자아는 자기중심적인 자기동일시(l'identification du moi)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자기이외의 것 즉 타자를 자기안으로 흡수한다. 이것이 바로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la reduction de l'autre au meme)하는 행위이다.(<시간과 타자>, 51-55)" 고독의 물질성은 타인과의 구별짓기의 바탕이다. 레비나스는 고독은 절망이고 버림받음일 뿐 아니라 남성적인 힘이고 오만이라고 말한다.

 

고독의 물질성을 넘어 타자에로의 열림은 어떻게 가능한가. 자아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인간의 내면성은 타인(autrui)의 내면성과 충돌할 수 밖에 없는가? 필연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사르트르가 말하듯이 적대적일 수 밖에 없는가? 적어도 레비나스에게서는 그렇지 않다. 레비나스의 타자윤리의 강점은 바로 생명체로서 인간의 자기보존성, 즉 자아의 내면성을 향유의 측면에서 인정하는 동시에 타자의 내면성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확립하는데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향유의 이기주의는 타자에 의존하여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자기를 유지한다. 즉 타자로부터의 자신을 분리시킨다. 향유적 자아의 내면성, 분리는 자아의 개별화를 의미한다. 내가 되는 것, 자신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집에 있음, 나의 시간, 분리, 행복 이들은 모두 같은 맥락에 있다. 이기주의, 향유, 감성, 내면성 등은 모두 자아의 분리를 설명해준다. 레비나스는 자아와 자아들간의 절대적 분리, 나와 너의 분리, 자아와 타자의 분리는 윤리적 관계의 성립에 절대적으로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내면성에 의해 자아와 자아들 사이의 근본적 분리가 이루어지며, 이는 동시에 동일자에 의한 타자의 침해나 자기화, 섣부른 동화나 통합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쓴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고독의 물질성에 갖혀있는 '나'가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내적공간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사물의 외형이 어두운 밤 속에 감추어져 버릴 때, 그 때는 새상도 아니며 대상의 성질도 아닌 밤의 암흑이 우리를 점령한다. ...파스칼이 말한 무한한 공간의 침묵이 우리를 불안케 한다. 다만 있을 뿐이다. 어떤 의미도 없이, 어떤 명사도 덧붙일 수 없디 다만 있을 뿐이다. 마치 비가오고 날씨가 덥듯이 그렇게 있을 뿐이다. 본질적인 익명성, 정신도 외재성도 맞서 있지 않다.(<존재에서 존재자로>, 94-95) ' 이것 혹은 저것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시간 속을 통과했을 때,  우리는 타자의 얼굴, 그 낯설음의 익명성(무한성)을 받아 들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자아와 자아들 사이의 분리가 이처럼 절대적으로 확고하다면 이들 사이의 상호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된다. 동시에 자아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내면성의 개별화로 말미암아 자아와 타자사이에 무너질 수 없는 경계가 그어진다면, 이들 사이에 자기동일시나 폭력적 소통이 불가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윤리적 소통의 실마리도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제기도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만일 자아와 자아들 사이에 즉 자아와 타자, 동일자와 타자, 나와 너 사이의 소통이 가능하다면, 더욱이 윤리적 소통이 가능하다면 어떤 계기를 통하여 가능해지는가? 또한 자기보존성을 지닌 이기적 존재가 어떻게 타자의 타자성을 빼앗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에 들어가는가? 

레비나스는 전통적인 이성적 인간이해로부터 근본적인 시각의 전환을 가진다. 레비나스는 모든 의미를 자아로부터 구성하는데서 타자에 대한 폭력이 초래된다고 본다. 이 세계의 모든 것,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과거의 모든 것,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 한치 앞도 예측불가능한 나의 남은 생, 나의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들, 더욱이 분명이 있는 것이지만 도무지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죽음, 그리고 인류의 전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는 인간의 얼굴의 현현! 자아는 이들을 의식의 대상으로 삼아 표상하고 개념짓고 규정지을 수 있는가? 유한한 자아로서의 그릇은 무한으로 나타나는 존재의 타자를 담아낼 수 있는가? 나를 넘쳐나는 충만한 존재를 유한한 자아의식의 능동적 사유작용에 근거짓는 작업이 지닌 문제는 무엇인가? 보다 작은 그릇이 보다 큰 내용물을 담아낼 수 있는가?

자아의 이기성에 대해서 무한한 윤리적 저항을 현현하는 타인의 얼굴과 그 같은 현현에 노출되어 있는 유한한 자아, 이 같은 상황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유아론적 자기중심성을 고집할 수 있는 것일까? 타인의 있음, 존재사실, 타인의 얼굴을 마주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자아의 사유작용를 중심으로 타자를 구성하는 표상의 방식이 문제된다면, 보다 공정하게 타자를 대하는 방식이 있는가? 우리가 공정한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타인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적어도 그를 나에게로 통합시키거나 나의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의식의 능동적 작용에 의거하는 타자와의 관계말고 또 다른 인식의 방법이 있는가? 자아와 타자 사이에 분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연결시키는 윤리적 관계 형성이 어떻게 가능한가?

레비나스는 향유의 내면성에 의해 형성되는 자아들간의 분리, 닫힘, 패쇄성이 내면성으로부터의 탈출을 방해해서는 않된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기를 유지하면서 거주하는 자아에게서 세계의 타자성은 자아의 영향권으로 떨어진다. 이 같은 의미에서 물질적 세계의 타자성은 형식적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의미하는 윤리적 타자, 형이상학적 타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아의 지배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내용으로서의 타자성이다. 다시 말하면 타인으로서의 타자는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로 통합시킬 수 없는 내면성, 절대적인 다름, 절대적인 타자성을 지녔고 아울러 이같은 타자성을 존중해주는 관계에서만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절대적 타자성으로 나타나는 타자와 자아가 윤리적 관계를 맺는 방식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레비나스의 답은 타자에로의 초월과 타자를 향한 열망으로 보았다. 레비나스는 인간을 안으로 향하여 자기중심적 내면성을 유지하는 존재인 동시에 밖으로 향하여 타자를 향한 존재로 설명한다. 내면성을 통하여 분리되어진 자아들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기패쇄적으로 분리된 운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열망한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적 내면성을 지닌 자아성으로부터 다른 자아에로 향하여 초월해 간다. 이 같은 초월, 자아로부터 타자에로의 초월, 나로부터 타인에로의 초월이야말로 윤리적 관계형성의 올바른 계기라 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열망과 타자에로의 초월이야말로 자아가 타자를 대상화하여 자아 안으로 포섭하고 자기화하고 장악하고 동일시하는 방법과 구분된다.

 

타자는 끝까지 낯설 수 있다. 익숙함이 아니라 낯설음, 같음이 아니라 다름, 이 타자성은 절대적으로 보존되며, 존중받을 수 있는 근거다. "타자는 타자로서 높음과 비천함의 차원에 스스로 처해 있다. 영광스런 비천한, 타자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동시에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존재에서 존재자로>, 229>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고, 나에게 낯선이로, 나의 사람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자로 남아 있다. 각자는 타자에게 <낯선 이>로 남아 있다. 타자의 얼굴의 출현은 친밀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측면을 보여준다. 타자는 나와 동등한 자가 아니다. 그는 그가 당하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나의 주인일 뿐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비대칭성 분균등성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시초라고 보았다. 레비나스는 이런 의미의 평등만이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의 법을 폐기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타자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열망한다. 열망의 개념은 욕구의 개념과 비교하면 그 뜻이 더 분명해진다. 욕구는 항상 만족을 얻고자 한다. 이는 자신에게 결핍된 것, 불완전한 것을 얻으려는 인간의 지향을 나타낸다. 이에 반하여 열망은 자신의 빈 곳을 채우려는 몸짓이 아니다. 열망은 자아의 바깥을 향해 있는 것으로 외재성, 타자의 다름, 낯섬을 향한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채워질 수 없다. 외재성에 대한 열망은 만족될 수 없으며, 채워질 수도 없으며, 완성될 수도 없으며, 통합될 수도 없다. 열망은 열망하는 것에 도달할수록 커진다. 타자에 대한 열망은 타자를 타자로서 열망할 뿐이지 타자를 자기에게로 통합시키거나 동화시키는 구조가 아니다. 그리고 타자가 독립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요컨대 자아는 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타자에게로 향한다. 타자윤리에서 열망은 유한한 자아가 무한한 존재의 타자를 대하는 방법이다. 타자를 열망하는 태도는 타자를 자기 안으로 통합시키거나 자기화하는 작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열어 젖히고 헌신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열망과 초월은 자아의 열림, 개시, 내 집의 현관문을 열어 주고 타자를 환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자에게로 열려진 문, 그것은 타자에 대한 초월적 열망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와의 충만한 관계,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나라는 존재의 물적인 근거- 잠, 불면, 음식, 노동, 거주, 타인의 존재, 여자와 아이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처해 있는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요소들이다. 나는 타인과 윤리적 사회적 관계를 갖는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이 정신적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은 신체다.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육체를 통해 드러내듯, 인간이 이 시간 속에 혹은 죽음을 통과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 속에서 배태된다. 그러므로 나는 사회, 경제, 문화, 정치 그 모든 관계를 떠나서 성립할 수 없다.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문제는 신이 내려주는 정답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오늘, 내가 '나'에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들려주는 답이다. 타자를 통해 나의 주체가 확인된다는 것은 타자의 낯설음을 그냥 있는 존재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이 간단한 말이 지니고 있는 힘- 타인을 만나서 ‘너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던지는 순간 ‘나’를 넘어서서 ‘너’라는 타자의 실재에 접근하게 된다. 그러므로 타자를 통한 나라는 존재의 근거는 감정적 공유가 아니라 '낯선 타자의 맨얼굴를 만져보는 것'이다. 낯설음에 대해 놀라지 않는 당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