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서쪽 숲에 갔다. 문학과지성사, 2012
“만약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재빨리 거대한 빛 무리를 피해 길을 마저 건너거자 아예 뒤로 물러섰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난데없이 술을 마시고 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형을 제사 지내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마을 사내들의 조용한 흥취에 홀려 과하게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아예 마을 사내들과 어울려 늦게 술집에서 나왔다면, 달라졌을까.
그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들어온 말 중에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게 있었다. 어머니는 형의 편을 들기 위해 그 말을 편의적으로 사용했지만, 그는 어떤 일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가지 일들의 연쇄가 전제되어 있다는 걸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상황을 하나만 바꾸는 식의 가정은 도대체가 무의미했다. 그럼에도 이하인은 자신이 바닥에 나뒹군다고 생각한 짧은 순간, 그 길고도 가망 없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 pp.121~122
“숲은 그가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하게 큰 덩어리로 뭉쳐진 채, 대낮인데도 검은 그림자를 깊숙이 내밀고 있었다. 그 거대한 숲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그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은 없는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저 숲에서 일어나는 일...“만약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재빨리 거대한 빛 무리를 피해 길을 마저 건너거자 아예 뒤로 물러섰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난데없이 술을 마시고 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형을 제사 지내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마을 사내들의 조용한 흥취에 홀려 과하게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아예 마을 사내들과 어울려 늦게 술집에서 나왔다면, 달라졌을까.
그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들어온 말 중에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게 있었다. 어머니는 형의 편을 들기 위해 그 말을 편의적으로 사용했지만, 그는 어떤 일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가지 일들의 연쇄가 전제되어 있다는 걸로 그 말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상황을 하나만 바꾸는 식의 가정은 도대체가 무의미했다. 그럼에도 이하인은 자신이 바닥에 나뒹군다고 생각한 짧은 순간, 그 길고도 가망 없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 pp.121~122
“숲은 그가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하게 큰 덩어리로 뭉쳐진 채, 대낮인데도 검은 그림자를 깊숙이 내밀고 있었다. 그 거대한 숲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그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은 없는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저 숲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발짝만 들어서도 방향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릴 정도로 깊은 미로가 된다는 저 숲 말이다.” ---p.170~180
“숲에 부엉이가 산다.
그 당연한 문장을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나가는 동안 박인수는 참을 수 없이 외로워졌다. 자신이 검은 나무숲에 숨죽여 앉은 부엉이같이 느껴졌다. 바람이 불면 무거운 날개를 쳐올려야 하는 부엉이가 된 것 같았다. 사방을 감시하며 머리통을 돌려 눈을 굴리는 부엉이 같았다. 가까운 곳에는 없는, 먼 곳에 있어 간혹 눈에 띄는 먹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부엉이 같았다.”--- pp.184~184
“취기는 그에게 모든 일은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고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며 삶의 여러 갈피 속에 고스란히 묻혀 누구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dl라고 생각하게 했고, 인생을 통째로 긍정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가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해버렸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순간들이 인생의 다른 순간과 마찬가지로 곧 지나가버릴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 p.245
“진은 벌목 일을 완전히 끝내고 숲에서 내려온 그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찾아주었다. 적어도 최창기는 그것이 새로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차가운 도끼를 버리고 뜨거운 다리미를 들게 되었으니까. 나무로 빼곡한 숲에 가는 대신 옷이 빼곡이 걸린 세탁소에서 지내게 되었으니까. 나무, 풀, 잡목, 썩어가는 토양 냄새 대신 드라이클리닝 용제 냄새와 고열의 다라미가 뿜어내는 열기를 맡게 되었으니까.
모든 것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 당시는 새로운 인생이라는 게 집을 찾은 직장을 찾듯 새로운 옷을 고르듯 찾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 그들이 잃은 것이 길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걸 몰랐다.” --- pp.267~268
“세 사람은 처음부터 친구였으나, 그 무렵 일을 하면서야 진정으로 친구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숲 한가운데 고립된 채 맨손으로 도끼질을 하면서 우정이 생성되는 육체적인 경로를 목격하고 우정의 질감과 공기 같은 걸 체득했다. 세 사람에게는 몸을 써 고된 일을 하는 사람 특유의 결속력과 비밀을 도모했다는 공모의식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 p.278
“이안남은 맞지 않기 위해 몸을 구부려 버둥거리는 이경인의 다리를 펴서 꽉 잡는 것으로 합류했다. 술에 취한 한성수가 홀린 듯 계속해서 주먹질을 해댔다. 몸이 뜨거웠고 열기가 발바닥부터 끓어올랐다. 이경인은 얻어맞으면서도 소리를 내거나 움직이거나 눈동자를 떨지 않았다. 그는 이경인을 그저 묵직한 나무통을 두들겨 패는 것 같은 느낌으로 때렸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경인이 정신을 잃은 후였다.” --- p.290
“박인수 씨는 사고를 선입견이나 불확실한 의심으로 합니??? 내가 어떤 증거를 대도 자기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생각을 바꾸지 않나요?”
“믿지 못해서 안 믿는 것뿐입니다.”
“이해해요. 나도 그럴 때가 있으니까요. 장이 아플 때가 있었는데, 그때 내 생각은 구불구불 꼬인 장에서 나오는 것 같았어요. 모든 게 꼬이고 또 꼬이기만 했어요. 내가 생각하기에, 삶에서 아주 많은 것들이 내가 보는 게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는지 하는 것에 달려 있어요. 그 가장 기본적인 생각이 적절한 균형 감각을 만들어주죠. 나만 보고 나머지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반대로 세상은 다 봤는데 나만 못 보는 건 무엇인지 알아야겠죠. 모두 알 수는 없어요.” --- p.318
“타자가 언제 공을 칠 것 같아요?”
진 선생이 대답을 알려주기 싫다는 듯 시간을 끌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이 들어오기 전에 쳐요. 공이 들어오기 전. 나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가오는 공을 완전히 보기도 전에 뭔가를 결정하는 거지요. 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해요, 아주 짧은 순간에. 그런 게 인간의 판단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 대령과 나는 말하자면 박인수 씨라는 공을 잘못 쳤죠. 홈런이 될 줄 알았는데 기껏 파울이 된 거죠. 아, 홈런이라는 말은 과장된 거고요. 최소한 안타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파울이라고 좌절할 필요는 없어요. 아무리 타율 높은 선수들도 5할이 채 안 되니까요. 최선을 다해도 두 번 중에 한 번은 언제나 헛스윙이라는 거죠.” --- p.322
“숲을 헤매다 보니 숲에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감지하는 거리감을 믿을 수 없었다. 아주 가까이 있을 때 멀게 느껴졌고, 크고 길게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멀리 있을 때도 있었다. 시야를 믿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길을 헤맨다는 두려움이 더해졌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까. 알 수 없었다. 무엇인가 알려줄 거라 믿었던 소리마저 어느 순간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 pp.335~336
“그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웠고 시험에 떨어질까 두려웠고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할까 두려웠고 아내가 떠날까 두려웠고 일이 실패할까 두려웠다. 두려움이 혈관을 타고 흘러 두려움과 분리된 자신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두려워 화를 내고 억울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실과 착각과 오해와 혼돈의 격차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동안 만난 사람은 누구일까. 그가 끝내 다다른 이곳은 어디일까. 무엇보다 자신은 누구일까. 박인수는 이런 상태가 난감하기만 했다. 생전 처음으로 괴한을 마주친 느낌이었다. 복면도 없고 형태도 없고 그를 겨냥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어 방어조차 할 수 없는 괴한을.” --- p.337
“작은 범죄가 거대한 심연을 감추고, 결정적인 것은 끝까지 말해지지 않는다. […] 모호한 소리에 몸체를 찾아주려 했으나 어느 샌가 입을 벌린 대지의 틈,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는 주체의 모험담. 이 틈과 폐허를 텅 비어 있는 상태로 보전하기 위해서 자기 지시적 알레고리와 스트레칭 서스펜스가 동원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박인수가 모호한 소리를 현실적인 몸체로 환원하려들지 않는 한에서만 주체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과 동시에, 박인수가 주체의 자리를 고수하는 한에서만 소리를 쫓는 모험을 지속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쪽 숲에 갔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절망적인 메아리와 부엉이 울음소리는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 '해설 "세계의 일식이 지나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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