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순수박물관은 어떻게 쓰여졌나?

나뭇잎숨결 2012. 8. 4. 10:18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경계와 조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금기(禁忌)`에 관한 것들이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보이는 `외적 경계`와 `내적 경계`가 있다. 외적 경계는 가족이나 민족의 비밀 등 노출될 경우 곤란에 처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반면 학문적 관점ㆍ유토피아ㆍ문학적 방법론 등 `내적 경계`는 보이지 않는다. 작가에게 더 중요한 건 내적 경계고, 이걸 깨는 것이 작가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오르한 파묵)

 

 

 

 

거울 앞에 있는 작은 선반에서 퓌순의 립스틱을 보았다. 그것을 집어 냄새를 맡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첫 장편소설 “나는 이 소설로 기억될 것이다.” ─오르한 파묵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장편소설 『순수 박물관』(전2권)이 민음사 모던 클래식(27·28)으로 출간되었다. 오르한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 『검은 책』 등으로 이미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순수 박물관』은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처음 발표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터키에서는 출간(2008년 8월) 당시, 초판 10만 부가 2주 만에 소진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고, 이탈리아에서도 출간 2주 만에 5만 부가 판매되는 등, 출간되는 모든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문명 간의 충돌, 이슬람과 세속화된 민족주의 간의 관계 등을 주제로 작품을 써 왔으며, 노벨 문학상 수상 당시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오르한 파묵은 『순수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다. 특유의 문체와 서술 방식으로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책에서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간 계속된 한 남자의 처절한 사랑과 집착-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1975년 터키 이스탄불. 부유한 집안, 잘나가는 회사, 아름답고 교양 있는 애인, 이 모든 것을 가진 남자 케말이 있다. 그는 아무것도 부러운 것 없이 삼십 년을 살아왔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도 그럴 것이었다. 사랑하는 연인 시벨과의 약혼식 준비로 바쁘던 어느 날, 케말 앞에 가난한 먼 친척의 딸인 퓌순이 나타난다. 그녀는 시벨의 선물을 사러 갔던 부티크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퓌순은 얼마 전 18세가 되었으며, 미인 대회에 출전했을 정도로 미모가 뛰어나다. 케말은 자신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녀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그래서 어머니 소유로 되어 있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아파트로 퓌순을 끌어들이는데, 무슨 생각인지 그녀도 적극적으로 그의 제안에 따른다. 그녀와의 밀회가 거듭될수록 케말은 점점 더 행복해지고 삶은 더욱 풍부해지는 것만 같다. 자신과 비슷한 집안 출신인 시벨과 약혼하고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한편으로, 퓌순과도 계속 만나면서 삶을 즐길 생각이었다. 어느 날, 퓌순은 문득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 역시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케말은 시벨과 헤어지고 퓌순과 결혼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금처럼, 약혼 후에도, 아마도 결혼 후에도, 계속 그렇게 퓌순과 만날 생각이었던 것이다.


친척과 친구를 모두 초대한 성대한 약혼식. 행복해하던 케말은 퓌순이 하객으로 온 것을 보고도 그저 반갑기만 했다. 그러나 약혼식 다음 날, 만나기로 했던 시간에 그녀는 오지 않았고, 그 후 어디서도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케말은 퓌순이 사라진 후에야 그녀를 향한 사랑을 깨닫고 고통스러워 하며,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사랑을 잃은 고통은 마음이 아니라 육체마저 병들게 하고, 그는 퓌순과 사랑을 나누었던 아파트에서 그녀가 남기고 간 물건들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결국 케말은 약혼녀 시벨에게 퓌순의 일을 고백한다. 시벨은 그것이 그저 지나가는 일이라 생각하며, 자신과 시간을 보내면 케말의 병(퓌순을 향한 사랑)이 나을 거라 여겨, 둘은 결혼도 하기 전에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퓌순을 향한 그리움은 점점 커져 간다. 결국 둘은 파혼하고, 케말은 본격적으로 퓌순을 찾아다니는데, 마침내 어느 날 퓌순에게서 그를 초대하는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8년간의 긴 기다림이 시작된다.

내게 있어 행복은 이처럼 잊히지 않는 어떤 순간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 삶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처럼 선이 아니라, 이런 감정적인 순간들을 하나하나 놓고 생각하는 것임을 알면, 연인의 식탁에서 팔 년을 기다린 것이 조롱거리나 기행이나 강박관념처럼 보이지 않고, 그저 퓌순 가족의 식탁에서 보냈던 행복한 1593일의 밤으로 보일 것이다. 추쿠르주마에 있는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던 모든 날들을 - 가장 힘들고,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자존심 상하는 날조차 - 지금은 크나큰 행복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들이 주는 위로, 그리고 박물관
- “모든 사람들이 낭비했다고 생각하는 나의 삶을, 퓌순이 남겨 놓은 것들과 나의 이야기들과 함께 박물관에 전시해 설명할 수 있을 얰라고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순수 박물관』은 한 남자가 단 44일 동안 사랑을 나눈 한 여자를 평생 동안 사랑하면서, 그녀와 관련된 추억을 간직한 물건들을 모으고, 결국 그 물건들을 전시할 박물관을 만들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 케말은 사랑하는 퓌순과 관련된 모든 물건을 모으고, 전 세계 박물관 5,723군데를 다니며 자신의 박물관을 어떤 형태로 만들지 고민한다. 또한 퓌순이 살았으며, 그녀를 만나기 위해 자신이 8년 동안 드나들었던 집을 사서 그곳을 박물관으로 개조한다. 그리고 그곳에 전시될 물건들에 얽힌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책을 쓸 결심을 한 후, 그 책을써 줄 작가를 만난다. 바로 이 박물관의 이름이 ‘순수 박물관’이며, 이 책의 제목이 ‘순수 박물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 박물관』은 ‘순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건들을 독자들이 보고 있다는 설정하에 이야기가 전개된다. 예를 들면 “퓌순은 내가 박물관 입구에 한 짝을 전시해 놓은 그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와 같이 소설 중간중간에 박물관 전시품에 대한 언급이 계속된다.

달빛 아래, 물건들 하나하나는 빈 공간의 일부인 양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나뉠 수 없는 분자처럼, 나뉠 수 없는 어떤 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순간들로 이루어진 선이 시간이라고 했던 것처럼, 물건들이 모여 선을 이루면 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작가라면 내 박물관의 카탈로그를 한 편의 소설처럼 쓸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케말이 물건들을 수집하는 것은 그것에서 위안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 여인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녀의 머리카락과 손수건, 머리핀 등 그녀가 가졌던 모든 물건을 숨겨 놓고, 오랫동안 그것에서 위안을 찾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이 담겨 있고 그 사람의 손이 닿았던 물건들을 바라보고 또 만지면, 마치 그 물건에 어떤 위안의 힘이 있는 듯 사랑의 고통이 줄어들 뿐 아니라, 그 안에 쌓여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나의 박물관은 퓌순과 나의 모든 인생이고, 우리의 모든 경험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이 물건들을 보는 나의 시선은 수집가가 아니라 약을 바라보는 환자의 시선이었다. 퓌순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은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필요했을 뿐 아니라, 고통이 잦아든 후에는 다시 나의 병을 떠올리게 하여 이 물건들과 그 집에서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기 때문에, 나의 고통이 가벼워졌다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소설 속 그 작가의 이름이 바로 ‘오르한 파묵’이라는 점이다. 소설 속 오르한 파묵은 몰락해 가는 집안의 아들로, 세상 물정도 모른 채 소설가가 된답시고 혼자 틀어박혀 글만 쓰는 남자로 묘사되는데, 실제 오르한 파묵과 완전히 일치되는 모습이다. 또한 오르한 파묵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전 세계 곳곳의 박물관을 찾아다녔고, 『순수 박물관』의 주인공 케말이 돌아다녔다고 하는 박물관도 모두 오르한 파묵이 직접 가 본 곳들이다. 2008년 방한했던 오르한 파묵은 서울에서도 ‘리움 미술관’을 포함하여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에 들른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오르한 파묵은 주인공이 수집했다는 물건들을 직접 모아 집필실에 그 물건들을 놓아두고,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물건들과 박물관의 의미에 대해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오르한 파묵은 현재 터키 이스탄불에 직접 ‘순수 박물관’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소설 속 케말이 ‘순수 박물관’을 만드는 바로 그 자리에, 바로 그 형태의 박물관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에는 이 박물관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입장권(2권 386쪽)이 들어 있으며, 박물관 지도 역시 포함되어 있다. 케말이 꿈꾸던 박물관이 실제로 문을 열고, 『순수 박물관』을 읽은 독자들은 ‘순수 박물관’을 방문해 그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물건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다. ‘순수 박물관’은 2010년 8월말에 개관할 예정으로, 현재 막바지 작업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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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무크의 도발, 이 박물관은 또 하나의 소설이다[중앙일보] 입력 2012.08.04 00:00 / 수정 2012.08.04 04:28

터키 이스탄불 ‘순수박물관’

오르한 파무크가 터키 이스탄불 순수박물관 전시물 앞에서 웃고 있다. 파무크는 소설 『순수박물관』과 관련된 물건을 수집해 이곳에 전시했다. 그러나 소설 주인공인 케말과 퓌순의 사진은 없다. 그는 “케말과 퓌순의 모습만큼은 독자들의 상상력으로 남겨두고 싶었다”고 했다. [사진 순수박물관]

사랑은 질병이다. 이 질병은 고약해서 도무지 치료가 난망하다. 사랑을 앓을 때 우리는 기꺼이 이 질병을 견디리라 다짐하지만, 사랑을 잃을 때 우리는 이 치명적인 질병 때문에 평생을 앓을 수도 있다.

 이 남자를 보라. 케말 바스마즈(1945~ 2007). 터키 상류층에 속하는 이 남자는 서른 살에 한 여자를 만나 44일간 사랑을 나눴다. 여자의 이름은 퓌순(1957~84). 케말보다 열두 살 어린 가난한 친척이다. 퓌순과의 짧은 사랑은 그러나, 케말에게 평생을 앓아야 할 질병으로 남았다.

 둘의 사랑이 어긋난 뒤에도 케말은 퓌순을 잊지 못한다. 유부녀가 된 퓌순의 집을 8년간 드나들며 사랑을 되찾을 날을 기다린다. 결국 퓌순은 다시 케말의 손을 잡았지만, 뜻밖의 사고로 죽고 만다. 사랑을 잃은 케말은 지독한 집착 증세에 시달린다. 퓌순과의 사랑을 평생 기억하기 위해 퓌순의 소지품을 수집한다. 귀걸이·손수건·머리핀·담배꽁초…. 케말은 퓌순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모아 이스탄불 중심가에 박물관을 세운다.

소설 『순수박물관』에서 여자 주인공 퓌순이 입은 원피스. 퓌순은 케말에게 운전을 배우면서 이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다. “흰 바탕에 오렌지색 장미와 초록색 이파리가 그려져 있는 원피스”라고 묘사돼 있다. [이스탄불=정강현 기자]
이 이야기는 터키의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무크(60)의 장편소설 『순수박물관 1·2』(민음사)을 간추린 것이다. 이야기만 읽으면 그럴 법하다.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와 연관된 물건을 수집해 박물관을 세운다. 소설에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소설은 상상의 세계이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가 현실 세계로 튀어나온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소설 속 순수박물관이 실제로 우리 눈 앞에 나타난다면.

 파무크가 이스탄불 추쿠르주마에 지난 4월 말 순수박물관을 개장했다. 문학이 현실로 확장된 경우랄까. 소설 『순수박물관』이 활자로 만들어진 세계라면, 이스탄불 시내에 문을 연 박물관은 공간과 사물로 창조된 소설인 셈이다. 즉 독자가 직접 들어가 거닐고 물건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소설이다. 파무크는 상상과 현실, 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지난달 25일 한국 언론으로선 최초로 이 박물관을 공식 취재했다. 박물관은 사랑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파무크의 설립 의도에 따라, 사진 촬영과 취재가 엄격히 금지돼 있다. 개장 당시 유럽 언론을 상대로 공개 행사를 열었던 게 유일했다.

7월 하순 이스탄불은 뜨거웠다. 낮 최고 기온이 38도를 넘나들었다. 순수박물관이 있는 이스탄불 추쿠르주마 거리는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이 뿌려놓은 물로 축축했다. 입구에는 1445년 세워진 대중목욕탕이 있었는데, 이 목욕탕은 600년 가까이 이 거리에 증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축축하고 눅눅한 거리를 걷다 보면 붉은 벨벳 빛깔의 순수박물관이 나온다. 소설에선 퓌순의 집이 있는 곳이다. 주인공 케말은 퓌순이 죽자 퓌순의 집을 개조해 순수박물관을 짓는다. 파무크는 소설에 묘사된 그 위치에 실제 박물관을 세웠다. 파무크의 설명이다.

 “소설과 박물관은 동시에 구상된 것입니다. 소설 구상을 시작한 1999년 추쿠르주마에 있는 이 건물을 구입했고, 서서히 박물관으로 변모시켜 갔죠. 소설에서 1975년에서 84년 사이에 살았다고 상상했던 허구의 가족이 사용한 물건을 고물장수, 벼룩시장 등에서 샀습니다.”

 순수박물관은 한 번에 한해 책에 수록된 입장권으로 무료 입장할 수 있다. 이 또한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려는 파무크의 문학적 전략이다. 『순수박물관』은 케말이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써달라며 오르한 파무크에게 부탁하는 형식으로 서술돼 있다. 이를테면 무료입장권도 케말이 파무크에게 제안해 수록된다.(2권 386쪽)

 책을 펼쳐 무료입장권에 도장을 받고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박물관 문은 몹시 좁았다. 폭이 40㎝쯤 될까. 몸을 옆으로 돌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검표원에게 “문이 왜이리 좁냐”고 물었더니 “사랑의 문이 본래 쉽게 열리는 게 아니다”며 웃었다.

 로비 한쪽 벽면에는 담배꽁초 4213개가 전시돼 있었다. 소설에서 케말은 퓌순이 피운 담배꽁초를 몰래 수집하는데, 개별 꽁초마다 당시 자신의 감정을 기록해놨다. 첫번째 꽁초는 76년 10월 23일, 마지막 꽁초는 퓌순이 죽기 전인 84년 8월 26일이다.

 케말은 “사랑의 고통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퓌순이) 남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층짜리 목조 박물관은 퓌순의 영혼이 묻어있을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모두 83개에 이르는 소설 채프터 내용에 따라 관련 물건이 83개의 액자에 담겨 전시돼 있었다.

 1층에 올라서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소설의 첫 문장이 한쪽 벽에 기록돼 있다. 이때부터 관람객은 소설과 현실의 경계한 흐릿해진 문학적 공간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퓌순의 이름이 새겨진 귀걸이, 퓌순의 립스틱, 퓌순의 손이 닿았던 양념통과 스푼…. 박물관 속 물건이 소설의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전시물에는 특히 시계가 많았다. 갖은 모양의 시계 33개가 진열돼 있었다. 대개 오후 2시~6시 사이를 가리킨 채였다. 소설에서 케말과 퓌순은 주로 오후 시간대에 몰래 사랑을 나누곤 했다. 그러니까 사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시간이 멈춰버린 것이다.

 
퓌순이 피우고 남긴 담배꽁초. 케말은 퓌순의 담배꽁초 4213개를 수집해 박물관에 전시한다. 실제 순수박물관에는 1976년부터 84년까지 연도별로 수집된 담배꽁초가 진열돼 있다. 허구의 이야기가마치 실제로 존재했던 것처럼 재현돼 독자들의 문학적 체험이 확장된다. [이스탄불=정강현 기자]
순수박물관에서 시간은 순차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83개의 파편화된 전시 액자는 각각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시간 순서대로 관람하지 않아도 케말과 퓌순의 사랑 이야기는 하나인 듯 이어졌다. 소설 속에서 케말은 말한다. “(순수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은 시간이란 개념을 잊을 것입니다.”

 사랑의 질병이 깊으면 행복에 이르는 걸까. 이 소설에는 행복이란 단어가 264번 나온다. 마지막 문장 역시 “나는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케말의 고백이다. 파무크는 한 남자의 고통스런 사랑을 통해 “사랑은 행복한 질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파무크는 “사랑과 박물관은 어떤 것을 간직한다는 점에서 관계가 깊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누군가의 마음을 평생토록 간직하려는 마음의 박물관일까.

 순수박물관에서 소설과 현실의 경계는 흐릿했다. 이 문학적 성취는 소중하다. 터키 문학 전문 번역가 이난아 교수(한국외대)는 “세계문학사상 최초로 허구가 실재로 변모하는 문학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박물관 2층 한 구석에선 한 터키 연인이 키스를 나누는 중이었다. 소설 속 케말은 “순수박물관은 키스할 장소를 찾지 못하는 연인들에게 활짝 열려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현실의 박물관이 이를 실천하고 있었다. 소설에서든 현실에서든 사랑은 기꺼이 감염된 황홀한 질병이었다. 소설이 현실로 뒤바뀐 순수박물관에서 사랑의 이야기들은 끝이 없었다.

 

오르한 파무크(Orhan Pamuk)=1952년 터키 이스탄불 출생. 건축학을 공부했으나 23세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동서문명의 충돌, 이슬람과 민족주의의 관계 등을 다뤄왔다. 2006년 ‘문화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을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검은 책』(1990), 『새로운 인생』(1994), 『내 이름은 빨강』(1998), 『눈』(2002) 등이 있다. 2008년 노벨상 수상 이후 발표한 『순수박물관』 각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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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현실 뒤섞인 상태에서 『순수박물관』 집필했다” 파무크, 2009년 특강서 밝혀

[중앙일보] 입력 2012.08.04 00:00 / 수정 2012.08.04 04:29
오르한 파무크의 장편 『순수박물관』은 어떤 배경에서 쓰여졌을까.

 파무크의 집필 의도를 엿볼 수 있는 강연록을 단독 입수했다. 파무크가 2009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했던 ‘순진하고 감성적인 소설가(The Naive and Sentimental Novelist)’라는 주제의 특강이다.

 파무크는 이 강연에서 소설 작법 등 자신의 문학관을 주로 설명했는데, 그 가운데 ‘박물관과 소설’이란 채프터가 있다. 『순수박물관』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는 대목이다. 이 강연록은 올 하반기 국내 출간될 예정이다.

 강연록에 따르면 파무크는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상태에서 『순수박물관』을 집필했다. “실제 물건들을 늘어놓고 그 물건에 적합한 상황과 장면을 상상하며 소설을 썼다”고 했다.

 이를테면 소설에서 퓌순이 운전을 배울 때 입은 원피스를 실제로 구입해 세부적인 묘사를 적었다. 파무크는 “실제 물건과 소설을 충동적으로 관련 지었다. 그 충동은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결핍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설이 마치 현실처럼 여겨지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허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독자들은 상상력의 결핍감을 느낀다”는 얘기다.

파무크는 “독자들은 자신들이 상상했던 소설 속 세계가 현실로 실현될 때 자긍심을 느낀다”며 “자긍심이야말로 소설 독자와 박물관 관람객을 통합시키는 공통 감정”이라고 밝혔다.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도 “순수박물관의 핵심은 자긍심”이라고 말한다.

 『순수박물관』은 소설 속 이야기가 실제 박물관으로 확장된 문학적 사건이다. 자신이 상상했던 소설 속 박물관이 실제 박물관으로 구현된 현장을 확인하면서 독자들은 일종의 자긍심을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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