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일은 요즘 세상과는 반대로 가는 일이다. 빠르고 간단하게가 아니라 느리게 천천히 가는 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마지막 추위가 다 지나갔다고 일기예보가 장담을 해도 한 번 짚어가는 답답한 느림, 누렇게 빛 바래가는 잎사귀가 보기 싫어도 식물 스스로가 이제는 됐다고 말해줄 때까지 기다려주는 무던함, 잘라놓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한 후 가위를 드는 신중함, 그게 정원의 일이다. 그 훈련이 정원사의 공부이기도 하다.(오경아, 소박한 정원)”
“정원은 시간의 예술이다. 가든 디자인 공부를 시작할 때 맨 처음 교수가 던진 질문이 바로 시간과 정원이었다. 정원엔 시간이 흐르고 시간은 무엇을 만들어낸다. 봄에 싹을 틔운 잎이 무성한 나뭇잎이 되어 여름을 덮고, 가을이 되면 그 잎을 다시 노랗게 물들인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다시 모든 것을 없음으로 돌려보낸다. 우리보다 훨씬 오랜 삶을 살아온 나무들은 시간의 흐름에 우리보다 현명하다. 그해 봄은 우리에게 딱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지만 그 봄에 꽃을 피우지 못했다고 절망할 것은 없다. 이듬해 봄에 더 많은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나무들이 늘 내게 말해준다.(오경아, 소박한 정원)”
영국 Great Dixter Garden의 정원사가 덩굴 식물의 줄기를 묶어주고 있는 모습. <사진: 오경아>
“걷다 보면 그 발걸음의 비트만큼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들어오고 나간다. 그리고 들고 나는 생각 속에 발걸음이 맨 처음 들어섰던 그 자리로 돌아올 때쯤이면 딱히 정답은 아니라 해도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생각들이 사라앉아 맑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못 견디게 생각을 끊어낼 수 없을 때 나는 정원을 걷는다. 아니, 내 마음속을 차곡차곡 걸어본다.”(오경아, 영국정원 산책)
“왜 정원을 만들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고 결국 나를 위해서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정원을 만드는 것은 본능이다. 내 마당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고, 휴식처를 마련하는 것은 모두 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다. 내 정원에 야생 새가 날아오기를 바라는 것도 새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걸 지켜볼 나를 위해서다. 행복한 일은 나를 위한 정원이지만, 정원은 지나가는 사람까지도 즐거움을 나눠주는 고마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나를 위해 열심히 정원을 만들고 가꿀 일이다.”
“사람들은 이 감당하기 힘든 자연과의 사랑을 정원에 가두었다. 동물원에 우리를 만들고 그 안에 동물을 가두듯 내 집 앞에 담장을 치고 그곳에 내 맘대로 하지 못하는 자연을 묶어두기 시작했다. 자연으로 뛰어들 순 없지만 끊어낼 수도 없는 소심한 인간의 사랑이 정원에 들어선 것이다.”
“참 신기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 건물은 어느 순간 정원의 일부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홀로 고고히 섰던 건물은 정원 속에 전혀 도드라지지도, 모나지도 않게 묻혀 그 일부가 된다. 건물이 스스로 정원의 일부가 되었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 태어난다. 인간도 자연도 결국 정원도 이 자연스러움으로 지극히 아름다워지는 거다.”
“정원은 인간이 창조한 또 하나의 음악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원 속에서 자연 자체를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우리가 정원 속에서 듣고, 들이마시고, 음미해야 하는 주체가 결국은 자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 걸 알아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450년 전의 정원을 걷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이 정원을 누군가 만들었고, 그 후손이, 또 그 후손이 정원을 잇는다. 한 세대가 지나갈 때마다 정원엔 작은 변화가 생기고, 새로움이 만들어진다. 그 새로움이 다시 이끼 가득 올라온 ‘오래됨’이 될 즈음, 또 다른 새로움이 나타날 것이다. 정원은 자연의 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역사다. 그러니 내가 찾는 정원에서의 위로도 결국… 사람의 위로다.”
“정원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정원이 설 자리다. 땅을 이해하고 그 땅을 비출 빛과 공기를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정원 디자인이 시작된다. 결국 우리 자신을 모르고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정원도 서야 할 곳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정원은 ‘구획된 폐쇄된 공간, 즉 인간이 바깥세상인 자연과 경계를 치고 그 안에 식물과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곳’이다. 다시 말하면 정원은 정말 자연스럽지 않은 공간이다.”
(네이버에서)가든디자인(정원설계)을 배우겠다고 겁도 없이 영국유학을 갔다. 그런데 가든디자인이 문제가 아니었다. 식물을 알지 못한 채 정원을 디자인한다는 게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그래서 잠시 학교를 휴학하고 1년 간 영국의 왕립식물원인 큐가든(Kew Gradens)에서 인턴정원사로 일을 시작했다. 나무를 관리하는 수목원, 초본식물을 키우는 하디 디스플레이, 그리고 재배를 담당하는 재배온실을 두루 걸치며 식물과 식물의 관리법을 배웠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가든디자인을 배우니 그때서야 내가 심어야할 나무가 정원 어디에 적합할지, 정원에서 사계절 무슨 일이 벌어질지가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가드닝, 식물부터 알자
식물은 물만 잘 주면 잘 살 수 있다? 맞다. 그러나 어떻게 물을 줘야할까? 식물을 잘 자라게 해주려면 우선 식물의 타고난 특성부터 이해해야 한다. 식성이 다른 우리도 누군가는 육식을 즐기지만 또 누군가는 채식만 고집한다. 물론 이념에 따른 선택도 있겠지만, 몸에서 특정 음식을 거부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채식자에게 매일 고기 반찬을 해 먹인다면 몸 자체의 거부 반응은 물론이고 탈이 나서 결국 병이 드는 주원인이 될 게 분명하다.
물주기는 정원 일의 가장 근본임과 동시에 정확함이 필요한 일이다. <사진: 오경아>
식물의 경우도 모든 식물이 하루에 한 번씩의 규칙적인 물주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난과의 식물들은 대부분 물을 싫어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도 그 양이 충분하다. 특히 일부 난의 경우는 아예 이끼나 나무의 껍질로만 화분 속을 채워주는데 이 또한 물을 싫어하는 난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반면 상추나 허브, 바질과 같은 식물군은 하루라도 물주기를 빼먹으면 순식간에 시들어버린다.
한 번 상상해보자. 물주기를 싫어하는 식물화분과 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식물을 베란다에 함께 키우고 있다. 그런데 매일 이 식물들에게 똑같은 물주기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어떤 식물은 견디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 가끔씩 듣게 되는 질문 중 하나가 “아니, 하루도 안 빼먹고 그렇게 정성껏 물을 줬는데도 결국 식물이 죽었어요”라는 하소연이다. 그런데 이 경우 가장 먼저 의심을 해야할 상황이 이것이다. 결론적으로 단순해보이는 물주기 조차도 식물의 특징을 잘 파악하지 않으면 오히려 식물에게 해가 될 수 있다.
하나의 식물에 붙여진 이름이 수백 가지가 넘다
인도의 토속 요리 커리를 만드는데 많이 쓰이는 ‘코리안더’로 알려져있는 허브 식물의 공식 이름은 ‘Coriandrum sativum’이다.
식물을 잘 알자. 그럼, 어떻게 해야 식물을 잘 알 수 있을까? 애완견을 집으로 데려올 때 우리는 어떤 종인지, 그 종의 특징이 무엇인지 등을 어느 정도 공부한다. 식물의 경우도 적어도 내가 데려오는 식물이 어떤 종인지, 어느 곳에서 자라던 식물인지, 꽃이 피고 지는 시기는 언제인지 정도의 기초 공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식물에겐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 모든 식물에게는 전세계가 공식적으로 쓰고 있는 이름이 있다.
시인 김춘수님이 그랬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 말씀이 딱 맞다. 그 식물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냥 식물일 뿐이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식물의 정체성이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식물의 이름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똑같은 식물을 두고도 나라에 따라, 심지어 같은 나라에서도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이다. 이러니 같은 식물을 놓고, 같은 식물인지 아닌지 그 구별에 엄청난 혼동이 생긴다. 이건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유럽의 경우도 중세에 발간된 식물도감을 도면 식물의 이름을 표기하는데 무려 한 페이지 반이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예를 들면 “키가 30센티미터 정도의 하트 모양으로 생긴 잎사귀에 흰점이 찍혀 있고, 분홍의 꽃이 대롱대롱 매달려 가을철에 피는 초본성 식물” 이런 식으로 식물의 이름을 밝혔다. 이러니 식물학, 분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혼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18세기, 이 혼동과 무질서를 깔끔하게 정리한 식물학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스웨덴의 의사이면서 식물학자였던 칼 폴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다.
신은 만물을 창조했고 린네는 만물을 정리했다
칼 린네가 발표한 [자연의 체계(Syetema Natura) 1758년 에디션 북의 표지.
칼 린네라고 불리는 과학자! 우리에게는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닦은 '식물학의 시조' 정도로 알려져있지만, 과학계에서 바라보는 그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쟈크 루소는 그를 ‘이 지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렀고,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그를 ‘문학의 세익스피어, 철학의 스피노자’라고 칭할 정도였다.
원래 의사였던 그는 의학보다는 생물학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러던 중 그는 1735년 세상을 뒤집어놓을 책 한 권을 발표하는데 그게 바로 [자연의 체계(Systema Naturae)]다. 이 책은 초판이 달랑 12페이지 분량의 작은 책이었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연구가 숨어 있었다. 바로 식물을 암술과 수술, 그리고 어떻게 수분을 맺는지에 따라 분류하고 거기에 맞게 식물의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이 발표된 뒤 그는 엄청난 비난에 휩싸였다. 여신의 아름다움에나 비유하던 꽃을 감히 암술, 수술 등 생식기로 분류한데다, 수분 방법을 정밀하게 묘사해서 일명 3류 저급 식물학자라는 비난을 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난은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전 생물학계가 그 진가를 인정하며 그의 방식으로 지구 상에 존재하는 식물과 동물을 분류하기 시작한다.
린네의 신비의 작명법
린네가 택한 식물 이름 짓기 방법은 우리의 이름과 아주 유사하다. 예를 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자의 이름은 오경아다. ‘오’는 가족 이름이고 ‘경아’가 나의 본이름이다. 그는 식물의 경우에도 같은 방법을 적용해 비슷한 부류를 통칭할 수 있는 우리의 성에 해당하는 Genus(속), 그리고 고유 이름에 해당하는 Species(종)으로 이름을 지었다. 예를 들면 아래 사진 속의 식물의 이름은 우리나라에서는 ‘붓꽃’이라 부르고, 영어권의 국가에서는 ‘아이리스’라고 부르는데, 린넨의 분류법에 의한 공식 이름은 ‘Iris sanguinea’다.
린네는 성에 해당하는 속명과 이름에 해당하는 종명을 분류해 식물의 이름을 지었다.
식물의 공식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여권이 있다는 점과 비슷해서,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이 이름 하나로 같은 종의 식물을 찾을 수가 있다. 바로 이 점이 흔히 신은 만물을 창조했고, 린네는 그 만물을 정리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이름을 알면 식물을 알 수 있다
린넨은 식물과 동물의 이름을 지어줄 때 대부분은 라틴어를 사용했다. 라틴어는 고대 로마제국 사람들이 사용했던 말로, 현재 이탈리아어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지구에서 사라져버린 죽은 언어다. 때문에 단어가 생소하고 읽기도 매우 힘들다.
그런데 이 식물명도 조금만 상식적인 몇가지를 알고나면 외우기가 쉬어진다. 앞서 Iris의 사례에서 살펴봤듯이, 일반적으로 식물 속명으로는 신화 속 신의 이름을 빌어오기도 하고, 식물학자의 이름, 식물의 생긴 모양, 식물이 살고있는 곳 등에서 힌트를 가져온다. 예를 들면 제라늄(Geranium)은 그리스말로 ‘두루미’를 뜻하는데, 꽃의 생긴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핏 두루미를 닮아 있는 게 보인다. 또 캄파뉼라(campanula)는 라틴어로 ‘종’을 뜻한다. 꽃이 피어있는 모양이 꼭 종을 닮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임에 틀림없다. 그런가하면 베고니아(Begonia)라는 꽃은 마이클 베곤이라는 프랑스 출신의 캐나다 정치인의 이름을 땄다. 또 부겐벨리아(Bougainvillea) 역시도 루이스 드 부겐벨이라는 프랑스 탐험가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름을 알아야 식물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식물의 이름을 아는게 중요할까?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식물학자도 아닌데 모든 식물을 줄줄이 외우고 있을 일도 아니고, 또 식물의 이름을 모른다고 식물을 못 키울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 속담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식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건 그만큼 식물에 대한 지식이 꽤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식물을 키울 때 분명 큰 도움이 된다.
재미있는 예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우리는 고구마, 감자를 참 비슷하게 본다. 흙에 알뿌리를 달고 있으니 비슷해 보일만도 하다. 그런데 두 식물은 전혀 다른 속의 식물이다. 고구마의 학명은 ‘Ipomoea batatas’고, 감자는 ‘Solanum tuberosum’이다. 오히려 고구마는 나팔꽃과 식물학명 속이 같다. 그리고 감자는 가지와 똑같다. 결론적으로 나팔꽃과 고구마가 같은 집안이고, 감자와 가지가 같은 집안 식구인 셈이다. 그 이유를 꽃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1) 나팔꽃을 그대로 닮은 고구마꽃(왼쪽). 실제로 일부 고구마는 꽃을 보기 위한 관상식물로 재배되기도 했다. <출처: (cc) H. Zell at en.wikipedia.org>
2) ‘Solanum’이라는 같은 속명을 지니고 있는 가지꽃(가운데)과 감자꽃(맨 오른쪽). 꽃의 모양이 매우 비슷하다.
호수에서, 산 중턱에서, 레이크 디스트릭트가 너무 아름다워서 때때로 울컥한다. 친정어머니는 생전에 늙는 건 서럽다고 하셨다. 맞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내게 눈물이 날만큼 아름다운 이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자연은 만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깊이였다. 그건 꽃도 피울 수 없게 되어 버린 수백 년 된 고목이 주는 아름다움이었고, 이제 막 쪼개진 바위가 아니라 수천 년 전 갈라져 그 사이를 이끼가 채운 묵은 바위에서, 막 지은 집이 아니라 수백 년 전에 지어져 눈비에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그 오래됨에서 느껴졌던 아름다움이었다.(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아름답게 늙자)
아는 만큼만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영국의 한 식물관계자가 일본을 포함한 동양의 여러 나라를 방문한 뒤, 이런 칼럼을 썼다. ‘일본의 경우 식물시장에 나온 식물이 정확한 명찰을 달고 있어서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 외 나라들은 식물의 명찰을 확인할 길이 없어 연구를 지속하기 힘들었다.’ 이 이야기가 우리의 식물 재배와 관리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일본의 식물시장을 가보면 작은 화분에 담긴 식물에도 명찰이 달려있고, 그 명찰 안에는 식물의 공식 학명이 정확하게 적혀 있어 국민 누구나가 식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쉽다. 우리도 이제 서둘러 식물들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줄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 이게 식물에 대한 사랑 그 첫 시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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