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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스스로의 선을 챙기느라 너무 바빠 다른 이들에게 불행을 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악인의 가장 주된 악덕은 바로 그가 자신보다 다른 이들의 생각에 더 정신이 팔려 있다는 점입니다."(진중권)
[자료1]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의 정신분석학적 사회이론 :
사회적 환상이여, 타자의 결핍을 메워라!―실재계에 대한 재해석을 중심으로*
-양운덕 / 고려대
I. 들어가면서
지젝은 흥미로운 이론가이다. 우리가 라깡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난해한 개념들을 그가 대중문화 현상으로 설명하는 점만으로도 흥미를 끌만하다. 물론 이런 해석이 단순히 라깡 이론을 쉽게 전달하려는 것만은 아니고 라깡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그가 라깡을 사회이론, 이데올로기 이론의 한가운데로 불러와서 무의식 이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점에서도 흥미를 끈다. 개인의 주관적 욕망과 사회 현실을 접맥시키려는 시도들이 별달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지젝은 나름대로 욕망의 사회철학으로 현재의 사회, 정치적 현실에 참여하고자 한다.
먼저 예를 보면서 얘기를 시작하자. 두 남자가 스코틀랜드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한 사람이 선반에 있는 꾸러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맥거핀MacGuffin'이라고 하면서 스코틀랜드 고지대에서 사자를 잡는 장치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고지대에는 사자가 없으니 어쩌랴! 그럼 맥거핀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 at all'이다.
그러면 이것은 쓸모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가? 히치콕의 생각은 다르다. 다음과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을 그려보자. 몇 사람이 포커를 하러 방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전에 누군가가 테이블 밑에 몰래 시한폭탄을 장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포커를 시작하고 폭탄에 장착된 시계 초침은 계속 자신의 목표지점을 향하여 긴박하게 가고 있다.
긴장감. 포커를 하면서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과 시계 초침이 가는 장면이 번갈아 나온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 한 사람이 엉뚱한 제안을 하고(영화나 보러 가자!) 그들은 무사히 방을 빠져나간다. 결국 이 장치는 줄거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관객들을 혼란과 서스펜스로 몰아넣는다.
이처럼 맥거핀은 영화 줄거리에 아무런 구실도 하지 않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하지만 히치콕의 영화에서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필수적이다. 플롯의 한 장치로서 관객이 줄거리를 따라갈 때 계속 헛짚게 만들면서 영화적 효과를 만든다.
지젝은 이런 맥거핀을 라깡의 '실재적 대상'(대상-a)으로 설명한다. (히치콕) 영화를 그저 즐기던 사람과 라깡의 대상-a에 대해서 오랜 궁금증을 안고 있었던 사람에게는 너무나 멋진 안내가 아닌가? 지젝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욕망의 텍스트들을 라깡의 영역으로 이끈다. 그래서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수많은 대중문화 현상들을 욕망, 무의식의 눈으로 볼 수 있다.
라깡이 자신을 '프로이트주의자'라고 선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수많은 자기 추종자들 앞에서 그들이 '라깡주의자'를 고수하더라도 적어도 자기만큼은 '프로이트주의자'로 남겠다고 했다. 라깡은 자신의 모든 이론적 작업이 '프로이트로 돌아가는 것'이고, 프로이트의 틀 안에서 프로이트를 (프로이트보다) 더 잘 이해하고 적절하게 보충하고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라고 본다.
물론 이런 주장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가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의 도움으로 프로이트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다시/다르게 말할 때 누구도 이런 해석이 갖는 독창성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記標 이론,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틀, 보로매우스의 매듭 등이 프로이트를 프로이트답게 만들기 위한 것이란 묘한 주장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지젝은 라깡을 재해석하고 보충하고 응용하려고 한다. 그는 '라깡주의자'로서 라깡 이론이 지닌 가능성을 자신의 문제 영역―대중문화에서 이데올로기 이론에 걸친 영역―에 펼치면서 그 이론의 가능성을 한껏 넓힌다. 이제 사회 현실과 정치적 영역은 욕망-현실의 다채로운 얼굴들을 갖는다. 프로이트가 제기했던 무의식의 문제틀이 사회적 욕망, 증상,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설명하는 틀로 발전된 셈이다.
지젝이 몸담고 있었던 슬로베니아 라깡 학회는 라깡의 틀로 전통적인 근대철학(독일관념론)을 재해석하고, 문화예술(특히 영화)을 라깡주의적으로 분석하고, 라깡의 틀로 이데올로기와 권력 이론을 구성하는 데 몰두했다. 지젝 역시 이런 이론적 지향을 공유했고 그들 가운데 이론적 성과가 두드러진 인물이다. 물론 이 학회와 지젝의 관심은 단순히 이론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슬로베니아의 '민주주의'를 세우려는 정치적 활동과도 연결된다.
지젝의 지적처럼 라깡 이론이 후기에 초점을 옮겼다고 한다면 종래와는 다른 해석틀이 필요할 것이다. 이 글은 이런 지젝의 재해석 가운데 라깡을 '실재계'의 이론가로 보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흔히 라깡을 상징계 이론가로 볼 때 주체가 상징계 안에서 기표들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고 기표들이 마련한 자리, 의미, 역할을 부여받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것을 주체를 무력한 존재로 보는 반주체주의적인 구조주의의 상투적인 논의라고 보면서 못 마땅해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라깡을 '양처럼 순하게' 늘어서 있는 주체들을 질서의 이름으로 길들이려는, 주체들에게 욕망의 허망함을 가르치려는 이론가로 여겼다. 지젝은 이런 해석에 반대하고 라깡의 '실재계'를 전면에 부각시켜서 새로운 방식으로 주체와 사회적 관계의 '진리'를 말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해석의 효과가 지젝의 이데올로기 이론, 사회적 환상, 전체주의적 욕망 만들기에서 잘 나타나므로 이런 사회적 욕망의 영역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II. 상징계의 두 얼굴―상징계가 온전히 전체가 아니라면?
라깡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설명한다. 이 세 영역은 서로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결코 하나로 통합될 수 없다. 이처럼 상호작용하는 세 영역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먼저 상상계l'imaginaire; the Imaginary는 라깡이 거울 단계로 설명하듯이 어린이가 거울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자기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잘못) 인식하는 영역이다.
여기에서 자기와 타자(거울에 비친 자기 이미지)는 구별되지 않는 '하나'이다. 이 영역에서 차이나 구별은 없고 두 항은 보완적이다. 아이와 엄마―또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는 조화로운 총체를 이룬다. 여기에서 각 항은 다른 항에게 그것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준다. 그래서 각자는 타인 안에 있는 결핍을 채워준다(고 상상한다). 나와 너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다'.
상상계가 조화로운 전체인 데 반해서 상징계le symbolique; the Symbolic는 차이가 작용하는 영역이다. '상징'은 대상을 대신하는 기호이다. 예를 들어서 '강아지'는 실제의 강아지를 대신한다. 그래서 '강아지'가 있는 곳에 실제 강아지는 없다. 그리고 '강아지' 기호는 다른 기호들―'송아지', '망아지' '박아지' '호랑이 새끼' 등―과 관계맺는다. 이 관계에서 한 기표는 다른 記票들과 다르기 때문에 자기일 수 있다. '사랑'은 원래 사랑이어서 사랑이 아니라 '사탕'이 아니어서 '사랑'이다. 이렇게 차이와 대립을 통해서 각 기표는 자기 의미-동일성을 마련한다. 한 기표는 이런 관계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어떤 기표도 이런 차이관계 바깥에 있을 수 없다.
상상계의 조화로운 관계와 달리 '상징적' 관계는 차이를 통해서 만난다. 각 항은 저마다 결핍을 안고 있고, 자기의 결핍을 상대방을 통해 채우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각자의 결핍을 상대를 통해서 채우려고 하는 '반쪽'들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나의 잃어버린 반쪽인가?" "그럼 너는?" 반쪽을 찾는 시도들이 성공할 수 있을까? 라깡은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매정한 표현은 성관계를 맺는 주체들이 서로를 통해서 자기의 결핍을 완전하게 채울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계는 두 얼굴을 지닌다. 한 얼굴은 상징 질서가 각 요소를 일정한 자리에 배치하고 나름의 의미와 역할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이런 상징질서는 요소를 뛰어넘는 전체이고 의미를 배당하는 우월한 주인이다. 그래서 이런 상징 질서는 그 요소들에게 낯설고 넘볼 수 없는 '他者l'Autre'로 여겨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군림하는 상징 질서가 온전한 전체를 이루지 못한 채 어떤 결핍을 지닌 점이 그 다른 얼굴이다.
1) 먼저 첫 번째 측면을 보자. 주체들은 말의 세계에 들어갈 때 어떻게 달라지는가? 말이 없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주체가 자신을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을 표현할 매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체는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말은 이런 주체에게 표현수단을 빌려준다. 구별 없는 혼돈에서 벗어나 이것과 저것이 다름을 표시함으로써 주체는 다른 것과 다른 자기를 나타낼 수 있다. (A는 B와 C가 아니기 때문에 A일 수 있다)
말을 통해서만 주체는 자신을 발견한다. 곧 주체는 기표에 의해서 표상된다. 그런데 주체는 기표에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대가는 주체의 자기 동일성의 상실을 말한다. 곧 언어 기호가 주체를 대신하면서 주체는 그 기호들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정립한다. 라깡은 이것을 "한 기표는 다른 기표들에 대해서 주체를 표상/대리한다repr senter"고 표현한다.1)
그런데 문제는 주체와 그것을 표상/대리하는 기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체는 자신에게 맞는 기표를 찾을 수 없다. (기표는 다른 기표와 다름을 지시할 뿐이다. '운덕'은 '준영', '영준'과 다름을 나타낼 뿐이고, '아버지'는 '아이'와 '엄마' 사이에 있다.)
주체는 동일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표들의 도움을 받는데 이 기표라는 매개 수단 때문에 정작 자기 동일성을 잃어야 한다는 역설이 생긴다. 그리고 이런 역설, 또는 기표들 안에서 주체가 소외되는 것은 주체가 말의 세계에 들어온 이상 피할 수 없다. 라깡은 이처럼 말의 세계에서 주체가 자기를 표현하는 적합한 기표를 얻을 수 없음을 '상징적 거세'로 본다(Zizek, 1996, 46∼7). 이것은 한 요소가 자기자신으로부터 분열되고 구조 안에 자리잡는 것을 가리킨다. 주체는 처음부터 탈중심화된 채로 있고 그 의미와 논리가 자기 통제를 벗어난 구조의 한 부분이 된다.
기표들의 연쇄는 주체가 갈 길을 규정한다. 말하는 존재parl tre(말하다parle+존재 tre)인 주체는 상징계의 기표들 사이에 있다. 기표들이 주체를 자리 매김하고, 욕망을 배당한다. 그래서 주체들은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 우편배달부facteur에 해당된다. 하지만 상징계 안에서 주체는 자기가 기표들을 사용하여 충분히, 제대로 자신을 표현한다고 오해한다.
주체는 자신이 기표들의 주인이고 능동적인 존재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주체는 기표들의 작용에 따른 산물,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상호주관성에 사로잡힌 주체들은 '양보다 온순하게' 자기들이 지나가는 기표 연쇄 속에서 자리잡는다. 이런 주체들에게 상징 질서는 그를 지배하는 낯선 '타자'(l'Autre: 대문자 타자 또는 큰 타자)로 나타난다.
2) 다른 얼굴은 어떤 것인가? 라깡은 이런 차이관계網 자체가 하나의 온전한 전체를 이루거나 모든 요소들의 안정된 동일성을 마련하지 못한다고 본다. 상징계는 어떤 빈틈, 결핍을 지니고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모든 요소를 총괄하는 구조가 전체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런 구조가 어떻게 전체를 이룬 것처럼 여겨지고 각 요소들 위에 군림하는가?
앞에서 기표들의 차이관계에서 각 기표는 다른 기표와 다르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마련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가능하려면 (원리적으로) 각 기표가 갖는 개별적인 차이들에 앞서는 '차이 자체'가 있어야 한다. '사랑'과 '미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사랑'도 '미움'도 아니고 '사랑과 미움의 차이'이다. (이런 차이에 바탕을 두어야만 각 기호들이 자기 동일성을 세울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차이'를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차이 자체'를 나타낼 기호는 없다.2) '차이'는 고정된 내용을 갖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
원리적으로 차이 자체를 가리키는 기호를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차이 자체를 제거하거나 은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차이관계망에는 어떤 빈곳이 있는 셈이다. 이 구멍을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그것이 메워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기표들은 S1→ S2→ S3→ …처럼 끝없이 지시, 순환하므로 이것을 고정시킬 어떤 것을 상정해 보자. 그래서 어떤 Sw를 Sx에 고정시키자 (Sw=Sx라고 하고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대상a를 상정하자). 이런 경우에 비로소 기표들의 끝없는 지시관계가 매듭지어진다. '두 기표가 같아져서' 차이가 지워졌기 때문이다. 곧 다른 두 기표가 같은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런 요술 때문에 '차이 자체'가 마치 대상a로 구현된 것처럼 여길 수 있다(홍준기, 2001, 137∼8).
다시 정리해 보자. 차이 자체를 가리키는 기표는 가능하지 않지만 그런 불가능성, 부재, 결핍에 몸을 빌려주는embody 것을 가정할 수는 있다. (물론 이것은 다른 것들의 의미를 만들어주지만 정작 그 스스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무의미'이다―모든 의미 밑에는 무의미가 숨어있다.4)) 이런 것이 있고, 그것이 이런 은밀한 작용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이런 조작을 통해서 차이관계에서 끊임없이 운동하는 불안정한 상징계가 마치 단단한 지반 위에서 잘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상징질서는 안정된 의미체계로서 조화롭고 整合的인consistent 전체인 듯이 여겨진다.
라깡은 이런 점 때문에 상징 질서가 결핍을 안고 있고, 이런 결핍 주위에서 상징질서가 구조화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결핍을 지닌 큰 타자(상징질서)는 완결된 전체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 '큰 타자의 욕망'이란 표현이 어색할지 모르지만 이런 타자(상징질서)가 전체가 아니므로(pas-toute; not-all) 나름대로 완전성을 추구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정신분석 치료가 단순히 병든 개인을 치료해서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환자를 치료하는 분석자 역시 결핍을 안고 있다. 그는 단지 '안다고 상정된 주체sujet suppos savoir'일 뿐이다. 사회 질서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니다. 누가 누구를 치료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점 때문에 라깡은 정신분석을 부적응자를 치료하여 사회에 적응시키고 개인의 성숙한 인격 발달을 권장하는 것으로 본 미국식 '자아심리학'을 거부했다.
지젝은 상징계에 우연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헤겔이 《법철학》에서 든 왕의 역할을 보자. 합리적 총체성을 구현하는 국가는 그것이 왕의 신체로 구현되는 한에서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 왕은 (비록 그가 비합리적이고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현존을 갖는 것에 불과하지만) 국가이다. 국가는 그의 몸에서 그 유효성을 완성하고 국가의 필연성은 이런 우연성에 바탕을 둔다.
사실 왕이 하는 일은 글자 i에 윗점을 찍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끝맺음이 없이는(사실 이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국가 조직은 움직일 수 없다. 이처럼 어떤 한 요소가 형식적 구조 자체를 구현하고 그 우연성 위에 필연성을 세운다.
어쨌든 라깡에 따르면 "타자는 현존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종래처럼 상징계를 앞세우는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역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정성에 머물러' 그 역설을 견디어야만 욕망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III. 상징화될 수 없는 것이자 동시에 상징의 나머지인 실재
이제 실재계le r el; the Real를 살펴보자.5) 주체는 상징계에 들어가는 순간 前-상징적 실재의 직접성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만다. 이때 욕망의 참된 대상('엄마')은 불가능한 것,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주체가 현실에서 만나는 모든 대상들은 이미 이 잃어버린 기원적 대상의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 )를 원한다"에서 ( )의 자리에 들어갈 원래 대상이 빠진 채 그 자리를 다른 것들(젖병, 장난감, 과자, 친구, 애인 등)이 채운다. 이런 기원적 '사물'은 바로 언어 때문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라깡은 실재le r el가 사고할 수 있거나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는 이런 현존하지 않는 '빈 것', '부재'는 없지 않은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無'라고 본다. 라깡은 이것을 '불가능한 것l'impossible'이라고 부른다(Lacan, Semianr XI, 152). 또한 이것은 '항상 같은 것으로 있는 것', '항상 같은 장소로 돌아오는 것', '놓쳐버린 것', '다른 현실'이기도 하다(같은 책, 49).
이런 실재는 상징을 통해서 나타낼 수 없고, 고정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어서 그것을 표현하는 길은 막혀있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규정은 역설과 모순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실재계는 (어떤 의미로는) 상징 질서에 앞서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상징화 과정의 산물, 나머지, 잔여이기도 하다. 지젝이 드는 실재적인 대상le objet r el의 예를 하나 보자. 아킬레스와 거북의 경주에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쫓아갈 수는 있지만 거북에 이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실재적 대상을 추월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에 도달할 수는 없다.6) 이처럼 라깡의 실재계는 항상 놓쳐버리고 마는 어떤 한계이다. 우리는 항상 너무 빨리 오거나 너무 늦게 온다. 지젝은 실재적 대상의 예로 히치콕의 〈새〉에 나오는 새들을 들고, '성적 차이sexual difference', 사회적 적대 등이 실재라고 본다.7)
IV. 도착의 틀로 본 사회적 증상과 권위 유형
1. '나는 알아, 하지만…'의 논리
이제 이데올로기 비판과 관련하여 지젝이 라깡의 이론을 어떻게 사회 현실에 적용하고, 사회적 욕망 만들기로 확장시키는지 살펴보자.
라깡은 마르크스가 症狀개념을 고안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떻게 마르크스가 그의 상품을 분석하면서 프로이트가 꿈, 신경증 등에 관한 분석에 적용한 증상 개념을 만들었다는 것인가? 지젝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지젝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해석 방식(상품 분석과 꿈 분석)에 근본적인 相同性이 있다고 본다. 이때 양자의 내용이 아니라 그 구조나 형식이 동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은 문제가 되는 두 분석에서 (형식 뒤에 숨어있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 자체의 비밀에 주목한다.
그는 프로이트가 꿈을 분석할 때 흔한 해석학적 모델처럼 顯在的manifest 내용에서 그 숨겨진 핵심(잠재적 꿈 사고Traum-Gedanken)을 찾는 것이 아니라 왜 잠재적 꿈 사고가 그런 '형식'을 취하는가에 주목한다고 본다.8)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상품 분석에서도 상품의 숨겨진 핵심(노동)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 노동이 상품가치란 '형식'으로 나타나는가가 초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상품 형식의 '무의식'을 찾는다. 그는 상품 분석에 원용된 物神性Fetischismus 논리와 프로이트의 도착증(截片음란증 또는 페티시즘Fetischismus)을 연결시킨다.
지젝은 상품을 교환하는 주체들에게서 '마치…처럼'의 논리를 찾는다. 교환을 하는 동안에 개인들은 마치 상품이 물질적 교환에 예속되지 않는 듯이 행위한다. 비록 그들이 의식적으로는 그 사정이 잘 알고 있더라도 그러하다.
화폐는 다른 물질적 대상처럼 시간에 따라서 변한다. 그런데 시장의 사회적 현실에서 마치 그것이 변치 않는 실체를 지닌 것처럼 다룬다. 지젝은 .이런 점이 物神的 태도와 연결된다고 본다. '나는 잘 알아, 하지만…'
예를 들어서 "나는 엄마가 팔루스를 지니고 있지 않은 점을 알아. 하지만…[나는 그녀가 팔루스를 지닌다고 믿어]" "나는 화폐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적 대상임을 안다. 하지만…[화폐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특수한 실체로 만들어진 것이다]"(Zizek, 1989, 18∼9).
이런 화폐에 대한 신비화는 화폐가 '숭고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이런 화폐의 다른 몸, 비물질적 신체, '신체 안에 있는 신체'를 믿는 것이다. 교환행위를 하는 동안 개인들의 행위에는 어떤 오인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런 '오인'이 교환행위를 유효하게 하는 '필수조건'이다. 현실에 관한 非-지식이 있어야 교환과정이 유효하게 작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Zizek, 1989, 20).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근본 차원이 단순히 현실에 대한 '가짜 의식'이란 점보다는 이데올로기가 그 참여자의 非-지식을 포함하는 사회현실을 구성하는 점에 있다고 본다. 그는 주체의 非-지식이 포함된 점 때문에 이것을 '증상'으로 본다. 주체(환자)는 그 논리가 그를 회피하는 한에서만 그의 증상을 '향유할' 수 있다.
지젝은 이런 틀로 상품물신성을 새롭게 해석한다. 보통 상품물신성을 인간들 간의 사회관계가 사물과 사물간의 관계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9) 그런데 지젝은 물신성의 핵심이 이런 '사물화'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구조적 효과로 해석한다. 곧 구조와 요소들 간의 관계에 따른 효과가 마치 한 요소의 '직접적인' 속성인 것처럼 나타나는 점에서 찾는다. 한 요소가 다른 요소와 관계 맺지 않고 그 자체로 어떤 속성을 갖는다는 오인을 문제삼는다.
한 사람이 왕인 것은 오로지 타인들이 그에게 신하의 관계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들은 왕이 왕이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신하인 듯이 상상한다. '왕이 됨'은 왕과 신하간의 사회 관계에 따른 효과이다. 그런데 사회 안에 있는 이들에게 이 관계는 전도된 형식으로 나타난다. 마치 '왕이 됨'이 사회적 관계와 무관하게 (그들이 자신들을 신하로 여기고 그에게 봉사하는 것과 무관하게) 왕 개인의 자연적 속성인 것처럼 오인한다. '왕은 왕이기 때문에 왕이다.' 그런데 왕-신하 관계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Zizek, 1989, 24∼5; 1991, 254).
다른 예로 단순한 가치 형식에서 상품 A는 (등가인) 다른 상품B와 관련해서만 그 가치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상품이 다른 상품과 관계 맺지 않고 그 자체로 이미 가치를 갖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이때 '등가가 됨being an equivalent'이 다른 상품과 무관하게 그 상품의 자연적 속성인 것처럼 오인된다.
그러면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어디에서 생기는가? 사고 영역인가 아니면 행위 영역(또는 현실 자체)인가?
보통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사회 현실에 대해서 '가짜 표상'을 지니게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사회현실 자체에서 이미 작용하는 착각, 왜곡을 밝히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개인들이 화폐를 사용할 때 그것이 사회관계를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에 어떤 마술적인 힘도 없음을 매우 잘 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사회적 행위를 할 때 화폐가 '마치' 부 자체를 직접 구현하는 것'처럼' 행위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실제 행위에서 물신주의자처럼 행동한다(Zizek, 1989, 30∼1). (화폐는 모든 상품들의 보편성을 체현하는 비물질적인 몸을 지닌 '숭고한 대상'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적 착각이 지식의 측면이 아니라 이미 현실 자체, 개인들의 행위의 측면에 있다고 본다. 이데올로기의 근본 차원이 사회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무의식적 환상에 있다. (이런 무의식적 착각을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개인들은 자신들이 착각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행위한다'(Zizek, 1989, 32∼3).
2. 도착의 틀로 본 권위 유형들
방금 본 物神fetish은 倒錯perversion의 일종이다(도착은 거세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방식의 하나이다). 그런데 지젝은 이 물신주의의 정식('나는 알아, 그렇지만...')으로 권위를 행사하는 양식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가) 전통적 권위는 제도의 신비함에 바탕을 둔다. 이것은 상상적인 제의, 제도라는 형식으로 카리스마적 권력을 쌓는다. 왕, 심판자,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불성실하고 부패할 수 있지만 권위를 지니면 일종의 신비한 聖體변형transsubstantiation을 겪는다. 그는 더 이상 개인으로 말하지 않고 그를 통해서 법이 말한다. 이런 권위자의 지혜, 정의, 권력에 대한 신뢰는 사실상 가상이다.
지젝은 이런 '男根的' 권력이 잠재적일 때에만 현실적이라고 본다. 즉 그것이 실제로 행사되면 기만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의 권위는 잠재적 위협의 외관을 지닐 때 효과적이며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때리는 경우에 무력한 분노를 드러내거나 역효과를 낳을 뿐이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거세 공포가 거세 가능성으로 위협할 때 효과적이지 실제로 실행될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이처럼 상징적인 권위는 상호주관적 관계에 바탕을 둔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기표의 힘에 의존하지 강압의 직접적인 힘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신뢰의 '잉여'를 내포한다. 어떤 부정이 그의 이름으로 행해졌을 때 '만약 그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지체없이 그것을 바로잡았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다(Zizek, 1991, 249∼251).10)
나) 조작적 권위는 곧바로 주체들을 조작한다. 이런 논리는 병리적 自己愛narcism에 빠진 사회, 곧 사회적 게임에 내적으로 동일시하지 않은 채로 외면적으로 참여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잘 나타난다. 구성원들은 사회적 가면을 쓰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어떤 역할을 연기한다. 그 목표는 타인들을 속이는 것이다. 타인의 순진함과 쉽게 믿는 태도를 이용한다.
라깡이 지적하듯이 "큰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 질서는 허구일 뿐이고 어떤 현실을 준거점으로 갖지도 않는다. 하지만 큰 타자는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유효하게 작용한다. 개인들은 권위가 허구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허구가 개인들의 행위를 규제한다.
그런데 냉소주의자는 이런 상징적 허구에 거리를 두고 비웃는다. 그는 상징적 유효성을 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조작의 수단으로 이해한다(Zizek, 1991, 251). 동화 《임금님의 새 옷》에 나오듯이 지혜로운 냉소주의자는 가치, 명예, 정직은 빈말이거나 젖먹이들을 속이려는 것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실재적인 것(돈, 권력, 영향력 등)이라고 본다. 그런데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비웃는 냉소주의자는 우리 자신도 옷 밑에서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않는다. 곧 어떻게 '벌거벗은 실재'가 상징적 허구에 의해서 유지되는지를 보지 못한다.
다) 좁은 의미의 물신성은 전체주의적 권위의 모태가 된다. 이 권위의 초점은 타인들을 조작적으로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아주 잘 알지만') 특수하고 뛰어난 자질을 지닌 사람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서 黨-물신에 참여하는 개인들은 자신들을 역사 의지를 직접 구현하는 자라고 믿는다.
이들은 당이나 자신이 역사를 지배하는 객관적인 법칙을 직접 구현한다고 믿는다(Zizek, 1991, 251∼2). 스탈린주의적 도착자는 큰 타자(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법칙)에 대해서 스스로 그 도구가 되려고 한다. 그는 큰 타자(역사)의 의지를 실현하는 수단이 되어서 자신의 핵심을 이루는 분열을 회피한다. 이때 자유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전체주의적 주체 대신에 큰 타자의 몫이다. 그들은 숭고한 타자의 명령에 따라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타자의 향유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지젝은 사실 전체주의자도 상징적 허구를 믿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음을 잘 안다. 공산주의자는 실제로 체제가 타락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전통적 권위에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just because'를 보탠다. '바로 임금님이 벌거벗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뭉쳐야 한다. 바로 그 때문에 선을 위해서 일해야 하고 우리의 대의는 더욱더 필요하다(Zizek, 1991, 251∼2).
V. 큰 타자의 결핍을 메워라!―이데올로기적 환상의 작용
1. 이데올로기적 고정점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환상의 틀로 설명하면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러면 사회적 환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주체들의 욕망을 틀 지우는가?
라깡은 기표들의 체계에서 기표와 記意가 만나지 못한다고 보았다(S/s에서 /는 양자가 만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므로 의미는 고정될 수 없다). 기표들은 차이 관계에서 기의 없이, 고정된 의미 없이 떠돈다.11) 라깡은 이런 기표들을 잠정적으로 고정시켜서 의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고정점point de capiton'이 필요하다고 본다.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소파의 등받이를 잠정적으로 소파에 고정시킬 수 있는 것처럼 의미를 일시적이나마 고정시킬 수 없다면 의미는 끝없이 방황할 것이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어떻게 이데올로기적 고정점이 하나의 전체를 만드는지에 주목한다. 이데올로기 담론 공간을 떠다니는 요소들은 차이 관계망에서 고정된 동일성을 마련하지 못한다. '자유'는 무엇이고, 누가 '개혁파'이고, 누가 '민주주의자'인가?
자유를 예로 들어보자. 어떤 입장은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가 자유를 제한한다고 주장하면서 완전한 자유와 국가개입의 최소화를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입장은 개인적 자유가 민주주의적 질서, 경제적 기회의 평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Zizek, 1989, 88). 문제는 견해가 대립할 때 자유에 원래 고정된 의미, 본질이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만 맞거나, 어떤 하나가 다른 것보다 본질에 더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유의 '본질'은 처음부터 불변적인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표들의 연결이 만드는 효과일 뿐이다.
여기에 어떤 고정점이 개입해서 떠다니는 기표들을 꿰매어서quilting 그것들의 의미를 고정시킨다. 이런 꿰매기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안정된 전체로 만든다.
지젝은 이런 고정점이 (크립키의) '고정 指示詞rigid designator'와 같다고 본다. 이것은 지시된 대상의 속성들이 변하더라도 가능한 모든 세계에서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 변하는 상태들을 넘어서 있는 대상의 동일성을 지지하는 어떤 '잉여'가 생긴다. 이것은 '그것 안에서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다. (그는 이것을 라깡의 대상-a와 연결시킨다.)(Zizek, 1989, 95∼6).
이것이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예를 들어서 미국의 (매스미디어적) 상징인 코카콜라를 보자. 보통 코카콜라가 미국의 어떤 이데올로기적 비전을 내포하는지 그 내용에 주목한다. 하지만 초점은 이런 미국의 비전 자체가 코카콜라와 동일시되어서 그 기표를 얻는 점이다.
"America, this is Coke!"에서 코카콜라는 무엇인가? 다양한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비전은 그 기표 코카콜라에 압축된다. 이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잉여-X, '코카콜라 안에 있는 코카콜라 이상인 것'이다. 지젝은 이것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X이면서, 욕망을 일으키는 것(욕망의 원인-대상object-cause)이라고 본다(Zizek, 1989, 96).
이런 고정 지시사 때문에 '본질주의적 착각'이 생긴다. 예를 들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그것을 다양한 특징들, 긍정적 속성들로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영속적인 본질을 찾는다. 하지만 '모든 가능한 세계들'에서 항상 같은 것으로 남아있는 본질이나 긍정적인 속성이란 없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적'이라고 지시하는 정치적 운동과 조직을 포함한다. 곧 '민주주의'는 다양한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기표의 논리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그 긍정적인 내용(기의)이 아니라 '非-민주주의적인' 것과 관련된 다른 것, 대립된 것을 통해서 결정될 수 있다(Zizek, 1989, 98). 지젝은 이것을 헤게모니 투쟁과 연결시킨다. 다투는 관점들은 서로 상대방이 '덜 민주적'이라거나 '더 전체주의적'이라고 공격한다.
2. 큰 타자의 질문―'당신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젝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체가 동일시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긋남에 주목한다. 라깡은 (상상적, 상징적) 동일시를 통해서 주체와 그의 욕망이 일정한 사회적-상징적 영역에 통합되는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주체는 상징 질서가 위임하는 명령mandate을 짊어지고 있다. 곧 그는 상징 관계의 상호주관적 망 안에 주어진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
당신은 '아버지'/'학생'/'주부'이다. 이렇게 호명된 주체는 그 부름에 답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와 의미에 적합한 자기를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부름과 응답은 일치하는가?
지젝은 이런 명령이 자의적이고, 일정한 역할을 촉구하는 수행적인 것일 뿐이다. 주체의 실제 성질들이나 능력을 참조해도 그것은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 이처럼 동일시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항상 어떤 틈이 남는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이것은 내가 (참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주체는 호명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12)
이에 대해서 큰 타자가 질문한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Che vuoi?" 교사는 학생에게,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국가가 시민에게, 엄마는 아이에게 묻는다―지젝은 재미있게 mother를 (m)Other로 쓴다. '너는 나에게 이것을 원한다고 했지만 네가 참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너는 무엇을 목표로 삼는가?'
큰 타자는 마치 주체가 이 질문에 답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묻는다. 그런데 주체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주체는 왜 그가 상징적 관계망에서 바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모른다. (주체는 이런 상징화의 실패일 뿐이다.) 그러면 무엇이 이런 타자의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3. 환상이 큰 타자의 결핍을 은폐한다
지젝은 라깡이 환상을 그 답으로 제시했다고 본다. 이런 (사회적) 환상이 큰 타자의 수수께끼, 큰 타자 안에 있는 결핍을 은폐한다(Zizek, 1989, 118).
지젝은 환상이 흔히 오해하듯이 단순히 헛된 만족을 주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환상은 '현실'을 구성하고 주체들이 어떻게, 무엇을 욕망할지를 가르친다. 그래서 개인적 환상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상도 나름의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고 주체들에게 완전한 사회를 추구하려면 어떤 욕망의 좌표를 가져야 하고 무엇을 욕망 대상으로 삼아야 할지를 알려준다.
그러면 큰 타자가 환상을 구성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지젝은 라깡 이론의 근본적 차원이 (주체의 분열보다는) 큰 타자의 분열, 큰 타자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에 있다고 본다. 만약 큰 타자에 이러한 결핍이 없다면 완결된 구조를 갖출 것이다. 그러면 꽉 짜인 타자 안에 있는 주체는 소외를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큰 타자의 결핍이 주체에게 숨쉴 공간을 주고 전면적인 소외를 피하게 한다(Zizek, 1989, 122).
그러면 큰 타자의 결핍은 드러난 채로 있을까? 이 결핍을 어떻게든 채워야 한다. 자기 가족, 회사, 교회, 국가가 메울 수 없는 결핍을 지니고 있다면 큰일이 아닌가? 나는 어디에 의지한단 말인가? 주체들에게는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완전하고 이상적인 큰 타자가 필요하다.
'환상'이 큰 타자 안에 열려있는 빈곳을 채우고, 그 비정합성을 가린다. 환상은 큰 타자가 상징화될 수 없는 어떤 것―향유의 실재―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Zizek, 1989, 123∼4). 주체는 이런 환상을 통과하면서 마치 큰 타자 안에서 자신들의 욕망이 조화롭게 자리매김 된다고 여긴다. 아버지는 '참된 아버지'이고 사장님은 '훌륭한 사장님'이라는 상상적인 오인이 마련된다.
4. 사회적 환상 통과하기
(주체들이 환상을 통해서 욕망 대상을 찾듯이) 사회적 환상을 만드는 큰 타자는 조화로운 전체에 대한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이처럼 완전한 전체를 추구하는 욕망을 만족시키려면―사실 만족될 수 없지만―어떤 환상이 필요하고 욕망을 일으키는 어떤 원인-대상이 필요할까?
구조주의적 이데올로기 이론은 상징적 同一視(주체를 호명하여 상징 질서의 명령을 주는 것)에 대한 설명에 머물렀다. 그런데 '호명 너머'에는 여전히 욕망, 환상, 큰 타자의 결핍, (잉여-향유 주변을 동요하는) 충동이 여전히 남아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데올로기적 동일시가 주체를 장악하는 것은 주체가 글자 그대로 이데올로기와 똑같이 되고 권력의 순수한 도구가 될 때가 아니다. 예를 들어서 紐帶, 정의, 공동체에 귀속되는 감정 같은 초이데올로기적 '잉여'가 남아 있을 때이다. 이데올로기는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는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쓰고 있는 나도 알고 보면 인간이다.
' 국가 사회주의는 (사회생활 전체를 정치화하는 것보다는) 주체가 '공동체를 황홀하게 미학적으로 경험'하도록 함으로써 주체를 고무하고 이데올로기의 환상적인 배경을 마련한다. 주체가 이데올로기에 과잉 동일시되지 않고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이데올로기는 이런 超-이데올로기적인 향유를 조정해야 한다(Zizek, 1997, 21).
그러면 이것을 지젝이 종종 드는 반유태주의의 '유태인 형상' 만들기로 살펴보자.
1) 먼저 담론 수준에서 '유태인 형상'이 상징적 (重層)결정에 따라 만들어진다. (꿈의 왜곡 작업에서 본 '轉置'와 '압축'이 동원된다.) 먼저 轉置displacement를 통해서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의 자리를 바꾼다. 이 속임수로 사회적 적대를 엉뚱한 곳으로 옮긴다. 이것은 사회의 불가피한 적대를 건전한 부분과 그것을 타락시키는 힘(유태인) 사이의 적대로 바꾼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온전한 전체인) 사회는 불가능한 것'이고, 사회적인 것은 적대에 기초를 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이런 적대가 존속하고 조화로운 전체가 불가능한 이유를 유태인에게 떠넘긴다. 타락의 원천이 사회의 한 부분인 유태인에 배당된다. 적대의 원천인 노동계급↔지배 계급 대신에 생산계급↔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유태인)로 옮아간다.
이와 함께 '유태인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 대립적인 측면들을 압축condensation한다. 유태인들은 더럽고 '그리고' 지적이며, 탐욕적이고 '그리고' 무능하고 등등. 이런 조작으로 일련의 이질적인 적대들이 '유태인 형상'에 압축된다. 경제적(폭리를 취하는 자), 정치적(음모가, 비밀 권력을 지닌 자), 도덕적-종교적(타락한 반 기독교도), 성적(무고한 소녀들을 유혹하는 자) 적대 등등. 한마디로 유태인의 형상이 증상, 사회적 적대의 암호, 뒤틀린 대표물이 된다(Zizek, 1989, 125∼6).
그런데 이런 왜곡만으로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데 충분치 않다. 열광적인 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사회적 환상을 통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유태인'이 환상의 틀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향유를 훔쳐간다." 이처럼 환상은 적대적 분열을 가린다. 라클라우가 지적하듯이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항상 非整合的인 영역이어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곧 사회는 항상 (상징 질서로 통합될 수 없는) 적대적 분열에 의해서 관통된다. 그런데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완전한 사회'의 비전을 내세운다. 적대적 분리에 의해서 분열되지 않은 사회, 그 부분들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룬 사회가 필요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선 완전한 체제를 건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내세운 비전이 사실상 실현되지 않으면 이런 불가능성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어떤 방해자 때문이다. 누가/무엇이 이런 장애물인가?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건전한 사회를 타락시킨 외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物神fetish이다. 그것은 사회의 구조적 불가능성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구현한다. 이것은 '마치' 그것이 이런 불가능성을 긍정적이고,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이런 물신은 사회적 영역에서 향유를 폭발시킨다(Zizek, 1989, 126).
주체들이 환상을 통과하면서 '유태인'에게 귀속시킨 것이 사실은 사회 체제에 불가피한 적대, 무질서이다. 유태인에게 떠넘겨진 과잉excess에 담긴 내용은 바로 사회에 고유한 적대, 피할 수 없는 내부적 부정성을 '유태인'의 형상으로 (그 바깥에) 투사한 것이다. 상징계에서 배제된 것이 '유태인'으로 구성되어서 실재계로 되돌아온다(Zizek, 1989, 126∼8).
이처럼 환상이 은폐하려는 타자의 결핍은 타자 안에 있는 (상징화될 수 없는) 실재, 사회적 적대이다. 이것은 모든 상징적 진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도록 하는 목에 걸린 뼈 같은 것이다. 적대 때문에 어떠한 메타언어도 없으며, 사회를 객관적 전체로 파악할 수 없다(Zizek, 1997, 216∼7).
이런 점 때문에 지젝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벗기는 폭로작업으로 보지 않는다. 초점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먼저 이데올로기적 텍스트에 대한 '症候的 讀解'를 한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영역이 이질적인 떠다니는 기표들을 짜 맞추려고 어떤 고정점을 개입시켜서 그것들을 총체화하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 다음 절차는 '享有'의 핵심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환상으로 구조화된 前-이데올로기적인 향유를 포함하고, 조정하고, 만드는 지를 드러낸다(Zizek, 1989, 125).
VI. 마치면서
지젝은 실재계의 틀로 본 욕망 이론이 이데올로기(사회적 환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라고 본다. 물론 이런 분석은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벗기고 그 배후의 진리를 폭로하는 것은 아니다. 그 가면 뒤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환상은 근본적 불가능성의 빈 공간을 채우고 그 공허를 은폐하는 스크린이다. 사실 환상의 장막은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음을 숨길 뿐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불러들이고 잉여-향유를 조직한다.)
그러며 이런 논리는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를 내세워 의미 있는 사회적 실천을 거부하기 위한 것인가? 그 반대이다. 역사 법칙과 진보에 대한 믿음, 충만한 주체에 대한 신앙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고, 그것이 비판적인 힘을 잃어버리고 도리어 전체주의적 기획을 지원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사회의 불가능성'은 새로운 분석과 실천을 요구한다.
지젝은 초기 저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자신의 이론적 지향을 제시한다. 그는 라깡 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들을 해설하면서 라깡에 대한 주된 오해(라깡을 '포스트 구조주의자'로 보는 점)에 맞선다. 그는 라깡이 합리주의의 계보를 이어서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려는 근본적인 계몽주의자라고 본다.
또한 지젝은 '헤겔로 돌아가기' 위해서 라깡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헤겔 변증법을 재해석한다. 그는 헤겔이 '관념론적 일원론'이 아니라 차이와 우연성을 중시한다고 본다. 이와 함께 그는 상품물신성 같은 고전 사회이론의 주제들과 (이데올로기와 무관해 보이는) 라깡의 주요개념들―고정점, 숭고한 대상, 잉여-향유 등―을 재해석하고 연결시켜서 새로운 이데올로기 이론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는 이처럼 라깡을 통해서 '헤겔을 구하는' 길을 찾는다. 이 작업은 '이데올로기 이후'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포스트 모던의 덫에 걸리지 않으면서 현대 이데올로기 현상들(냉소주의, 전체주의, 민주주의의 허약함)을 파악하려는 것이기도 하다(Zizek, 1989, 7).
그는 이처럼 본질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차이의 혼란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며, 동일성의 진리를 추종하지 않으면서도 변증법적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그가 욕망-현실의 動學을 독특한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힘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그의 실천적 이데올로기 이론이 욕망과 현실의 매개, 개인과 사회-역사의 변증법의 모범적인 예가 되길 기대한다.
한두 마디만 덧붙이기로 하자. 지젝의 행보 가운데 특징적인 것의 하나는 그가 모든 이론가를 라깡적 주제로 재해석하고 그들에게서 라깡적 사고틀을 찾고 라깡적 답을 보충하려는 점이다. 이것은 새로운 해석의 풍요로움을 낳을 수 있지만 라깡주의가 '이론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또한 그가 앞으로도 여전히 라깡주의자로 머물지, 아니면 독자적인 이론가로 나설 것인지가 궁금하다.
물론 필자는 라깡-지젝 이론이 모든 욕망 현상, 사회 현실, 이데올로기 현상을 '완전하게' 설명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욕망이라면 욕망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은 이론의 '실재'를 가리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지젝의 '이론 욕망'을 보면서 우리 현실과 문화(의 욕망)에 대한 생동감 넘치는 분석과 精緻하고 세련된 논의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욕망 이론가들'이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을 잘 설명하는 틀을 다듬어주길 바란다. 그래서 라깡과 지젝에게 묻고 싶었지만 감히 물을 수 없었던 것들을 우리 이론가들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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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내용
1) 이런 기표의 '대리' 때문에 주체는 대리되는 기표 뒤로 사라진다. 주체는 기의의 자리에 놓이고 기표 차원에서 보이지 않은 채로 억압된다. 라깡의 '은유', '증상'에 대한 설명을 참조할 것.
2) 만약 A, B를 다르게 만드는 차이를 기호 X로 나타냈다고 하더라도, 다시 A, B, X의 차이를 나타내는 기호 Z가 또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뒤로 물러서는 과정은 계속될 것이다.
3) 문제 해결을 위해서 우회해보자. 우리는 이미 해결책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상품교환을 보자. 각 상품(노동산물)은 다른 상품과 일정한 비율로 교환된다. A상품 1 단위와 B상품 2 단위, C상품 3 단위를 등가로 교환한다고 하자. A=2B=3C. 이 경우에 각 상품은 다른 상품의 가치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이 경우는 앞에서 본 기표들의 차이관계가 처한 상황과 '형식적으로' 같다.) 각 상품의 가치는 다른 상품의 가치들과 일정한 '차이'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이런 물물교환 방식 대신에 기준이 될만한 한 상품(이 경우에 상품A)으로 다른 상품들의 가치를 정하거나, 더 간편하게 아예 상품 대신에 모든 상품의 가치를 표상하는 '화폐'를 사용할 수 있다. 화폐는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비추는 '일반적인' 거울이 된다. 화폐는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상품이 아니란 점에서), 다른 상품들의 가치 차이를 재는 '어떤 것'처럼 작용한다.
이제 상품A와 B의 가치 차이(외적인 차이)가 화폐의 많고 적음의 차이(내적인 차이)로 표상된다. 화폐는 '차이 자체'를 순수하게 표상한다. 재미있게도 상품들의 차이 놀이는 이런 상품 아닌 것의 도움으로 조화롭게 진행된다. 화폐 그 자체는 차이 놀이에 참여하지 않지만 이 놀이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이런 화폐가 물질적인 몸을 갖추고 자신도 다른 상품과 같은 상품인 듯이 꾸미면 이런 화폐의 작용은 은폐된다.
4) 서로 다른 기표가 직접 일치함을 뜻하는 이 대상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고 '무의미'하다.
5) 물론 실재계가 언어 이전의 현실, 언어가 지시하는 원래적인 현실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소쉬르가 언어를 언어 바깥의 현실,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referent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지 않고 언어 구조로 설명한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라깡의 실재계도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저 너머에 있는 어떤 실체 같은 것은 아니다.
6) 이는 브레히트가 지적한 행복에 관한 역설과도 같다. 너무 지나치게 행복을 쫓아서 달려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추월하면 행복은 우리 뒤에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7) 근래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에 대해서 생물학적 설명을 하는 논의에 대해서 이런 차이가 문화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남근 중심주의에 의해서 구성된 것으로 보는 비판이 제기된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결국 여성성을 규정가능한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해서 라깡-지젝은 성적 차이를 어떤 방식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불가능한-실재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새로운 논의방향을 제시한다. 라깡은 성을 구별하는 생물학적인 기준은 물론이고 문화-사회적 기준도 없다고 본다. 성적 차이를 남/여의 두 자리로 (생물학적, 문화적으로) 상징화하고 의미를 정하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이 차이가 어떤 신비하고 접근할 수 없는 X, 상징화 너머에 미리 주어져 있는 외적인 실체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징계 안에 있는 내적인 실패의 지점, 상징화를 방해하는 얼룩과 같은 것이다. (Zizek, 2000, 120)
8) 이런 지적은 프로이트에 대한 흔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우리 심리 안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것으로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억압에 의해서(Ur-Verdr n gung:원-억압) '다른 무대'로 밀려난 무의식은 우리 안에 없다. 무의식은 의식에 들어오기 위해서 의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프로이트는 꿈에서 왜곡과 전치라는 꿈 작업의 왜곡 장치를 지적했다. 지젝은 이와 관련하여 무의식이 사고가 아니라 '사고 형식'이라고 본다. 이런 사고 형식은 사고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사고 바깥에 있는 것, 주관적이면서 또 객관적인 것이다. 이런 사고 형식은 상징 질서를 구성한다.
9) (예를 들어서 생산 자본을 투입해서 잉여가치가 산출된 경우에 이 잉여가치를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 산출한 것이라고 믿는 태도는 자본을 물신화하는 것이다. 자본이란 사물-신이 스스로 운동하고 잉여가치를 창조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10) 이런 맥락에서 너무 위력적이어서 사용할 수 없는 무기들을 쌓아둔 상태에서 평화공존하는 역설적인 '공포의 균형'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집합은 필수적인 잉여, 텅 빈empty 요소(공집합)를 포함한다--라깡의 plus-One(le plus-Un). 그런데 이것이 다른 모든 요소들의 '충실한' 타당성을 보증한다. 사용되지 않은 채 단지 축적되는 무기들이 지켜주는 평화는 '가능한' 위협으로만 작용한다. 이 게임은 아무도 무기를 실제로 사용하지 않는 것을 전제하는 위협놀이이다. 물론 누구든 그 무기를 사용하면 모두가 끝장이다!
11) 예를 들어서 '자유'를 '억압이나 구속이 없음'이라고 한다면, 다시 '억압'이나 '없음'이 무엇인지 물어야 하고, 더 많은 기표들이 동원되므로 기표들의 운동은 끝나지 않는다.
12) 호명에 저항하는 주체는 히스테적이다. 라깡은 주체가 근본적으로 히스테리적이라고 본다.
참고문헌
Jacques Lacan(1973), Le S minare XI: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oanayse, Paris, Seuil.
Jacques Lacan(1975), Le S minare XI: Encore, Paris, Seu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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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voj Zizek(1992), Enjoy Your Symptom! Jacques Lacan in Hollywood and Out. 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Slavoj Zizek(1993),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Slavoj Zizek(1994), The Metastases of Enjoyment: Six Essays on Women and Causality. London and New York, Verso.
Slavoj Zizek(1996), The Invisible Remainder: An Essay on Schelling and Related Matters. London and New York, Verso.
Slavoj Zizek(1997), The Plague of Fantasies. London and New York, Verso.
Slavoj Zizek(1998), The Ticklish Subject: A Treaties in political ontology. London and New York, Verso.
Judith Butler, Ernesto Laclau & Slavoj ZiZek(2000),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Contemporary Dialogues on the Left. London and New York, Verso.
홍준기(2000), 지제크의 라캉 읽기: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문학과 사회 52호 pp.1881∼1899. 2000년 겨울.
홍준기(2001), 라캉의 성적 주체 개념―『세미나 20권: 앙코르』의 성 구분 공식을 중심으로. pp. 116∼151. 철학과 현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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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현재의 자본주의 한계… 단일한 해결책은 없어… 변화보다 해석이 필요뉴욕 '점령하라' 시위… 빠른 해법 기대 못해도 새로운 형태의 운동 긍정적한국 정치, SNS와 긴밀… 시민 발언 기회 늘었지만 정부의 통제 고민해봐야 (2012.2.7)
■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은 누구영화·SF소설 등 대중문화를 철학의 대상으로… '지젝거리다' 조어도
2000
년대 한국 사회를 풍미한 사상가 맨 앞줄에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가 지난해 <실천문학> 가을호에 기고한 '포스트 근대문학의 시대, 또는 연장선에 대하여'에 따르면, 2000년 이후 국내에 출간된 지젝의 저서는 23권으로, 가라타니 고진(12권), 위르겐 하버마스(10권), 미셸 푸코(7권)를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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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옛 유고연방에서 태어난 지젝은 1972년 류블랴나대에서 철학 박사학위, 85년 파리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89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통해 이름을 알린 뒤 세계 철학ㆍ사상계에 파장을 일으켜 온 그는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해 이미 50여권을 출간한 그는 영화, SF소설 등 다양한 대중문화를 철학의 대상으로 끌어들인다.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국내에서는 지젝의 저서가 특히 비평계에서 많이 읽힌다. '지젝거리다'는 조어가 있을 정도로 담론장에서 많이 회자된다"고 말했다. 지젝 연구자인 민승기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인문학계에서 지젝의 사유에 관심을 갖는 것은 가장 대중적인 대상에서 철학의 정수를 뽑아내고, 일상에서 철학적 사유를 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지젝의 이론ㆍ사상적 토대는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관념철학,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지젝이 해석한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하나의 닫힌 체계를 완성하는 것의 정반대 편에 있다. 정(正)도 반(反)도 아닌, 하지만 동시에 정이면서 반인 합(合)을 지향하는 변증법이다(지젝에 따르면 영화 '에일리언' 속 에일리언이 사람도 괴물도 아니면서 동시에 사람과 괴물인 것처럼 : 이거 엘리트들이 세계를 지배할때 써먹는 이론 아닌가요? ). 그는 새롭게 해석한 헤걸의 변증법을 일상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깨부수는 비판의 도구로 활용한다. 지젝의 라캉도 이렇게 해석된 라캉이다. 자기동일적 주체?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란 언제나 분열된 주체, 분열된 채로 자기정체성을 구성해나가는 주체다.
민승기 교수는 "지젝은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지금 상황을 뒤흔들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생산해내는 절차를 만들고자 한다. 현실적인 문제에 개입하면서 손쉬운 해결책이 주는 이데올로기적의 함정을 지적하고 '왜 이게 문제가 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학자"라고 말했다.
[지젝 인터뷰 전문 ①] "이제 변화보다는 해석이 필요한 시대" 인터뷰=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 교수 입력시간 : 2012.02.07 21:13:21 수정시간 : 2012.02.07 22:06:42
슬라보예 지젝은 이 시대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로 꼽힌다.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정치와 대중문화 현상을 독창적으로 해석해왔을 뿐 아니라, 현실정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이를 학문적 영감의 발판으로 삼으면서 철학적 지평을 넓혀왔다. 1990년 옛 유고연방이 해체된 후 슬로베니아의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활발한 대외 활동 덕에 지젝은 그의 사상을 깊이 접하지 못한 대중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낯설지 않은 학자로 회자된다. 가깝게는 지난해 10월 '점령하라' 시위의 진원지인 뉴욕 맨해튼 주코티 공원에서 한 연설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를 통해 퍼져나간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지젝은 지난달 30일 한국일보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전세계적으로 복잡다단한 사회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대해, "우리는 신세계질서의 붕괴를 경험하고 있다" 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는 "당장 손쉬운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보다 사유를 해야 한다" 면서 "20세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너무 많이 세계를 변화시켜왔는데, 이제 변화보다는 해석이 필요한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대 연구실에서 전화 인터뷰에 응한 그는 "요즘 많이 아프다" 면서도 각 분야에 걸친 질문들에 장시간에 걸쳐 친절히 답을 했다. 인터뷰는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가 진행했다.
-인터뷰에 응해줘서 감사하다. 요즘 몸이 좋지 않다던데 괜찮은가? "그냥 평범하게 겪는 일이다. 별 것 아니다. 온갖 진단을 다하지만 시간 낭비다."
-오늘 인터뷰할 내용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것과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당신의 의견이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최근 다보스 포럼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실제로 그들조차도 자본주의의 종언을 말하고 해결책을 만들고자 한다. 당신 의견은 어떤가? 이런 위기가 치유될 수 있다고 보는가?
"나는 이 위기가 파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치, 금융경제, 재산권, 생명공학윤리 등 다양한 영역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단기처방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를 좀더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세계 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위기는 해결될 수 없다. 금융체계, 지적재산권 갈등, 사유재산 문제 등은 이미 알려진 책이나 이론으로 풀릴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신세계질서의 붕괴를 경험하고 있다. 슬럼과 배제된 자로 가득 찬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신세계다. 이 와중에도 한국이나 싱가포르 같은 국가들은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인) 문제는 더 악화되고 있다. 나는 지금 존재하는 어떤 제도를 통해서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점령하라' 시위가 남긴 교훈도 이런 것이라고 본다. 이 시위가 명백하게 보여준 것은 위기의 체제, 또는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위기가 위험하게 보이는 것은 단일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월가 점령 시위 현장에서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기도 했지만, 뉴욕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 모인 사람들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유럽의 경우도 마찬가지도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다. 그리스,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 보듯이 전문가들을 찾는 것이 무슨 해결책처럼 제시되고 있다. 이런 이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 진짜 해결책 같은 것을 지금 마련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냥 앉아서 자본주의의 파국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한다. 사회적인 연대나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다만 이런 운동이 손쉬운 해결책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과거 냉전시대와 같은) 집단적인 신념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단일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서) 파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유행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실재의 세계' 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지젝은 9.11테러 직후 영화 '매트릭스' 의 대사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서 구절을 딴 동명의 저서를 출간했다. 여기서 실재란 매트릭스 속 레오가 모피어스가 제시하는 '빨간 약' 을 먹고 알게 된 '진짜 현실' 을 말한다.) 빠른 해결책을 기대할 수 없지만, 분명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 출현하고 있다. 점령하라 시위도 마찬가지다. 이 시위는 과거처럼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5월 스페인에서도 정부 긴축재정에 반대하는 '분노하라(indignant)' 라는 거대한 운동이 있었다. 말하자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의 문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원하는 기술은 무엇인지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요즘 당신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그것과 당신의 학문적 작업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명확히 하자. 나에게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대안이나 해결책이 아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공산주의 관점에서 우리가 다 함께 공유하고 있는 자연에 대해, 어떤 국가가 좋고 어떤 국가가 나쁜지에 대해, 누가 지적 재산권을 관리하고 있는가에 대해, 갈수록 사유화되는 공통의 지식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의 문제, 달리 말하자면 우리 삶을 떠받치고 있는 자연적이고, 문화적인 토대에 대해 공산주의 관점으로 심사숙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단순한 반(反)자본주의자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생산력이 높은 체제다. 과거 40~50년 동안 한국이 이루어온 것을 봐라. 중국도 마찬가지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나에게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3월 중국 전인대가 열렸을 때, 온 세계가 중국의 결정에 관심을 집중했다. 중국이 새로운 세계강국으로 부상하기 위해 국방예산을 2배로 올릴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는가? 중국은 오히려 내수확대를 위한 예산을 2배 증액했다. 재정정책 같은 경제문제 해결에 우선순위를 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역설이다. 생산력은 증가하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 등) 위험도 높아진다. 이런 위험은 서서히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이나 터키처럼 직접적으로 위기에 노출되지 않은(경제성장을 지속하면서도 높은 인플레이션을 겪지 않은) 운 좋은 국가들도 있다. 라틴아메리카 몇 개국도 그렇다. 그러나 이런 국가들은 예외적인 것이다. 나는 우리가 위기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턱대고 무엇인가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발 뒤로 물러나서 이 상황을 주시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에 대해 생각을 하라는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까지 우리가 겪은 것은 금융자본주의이다. 이 때문에 위기가 왔고, 이 위기의 긴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 고민한다. 이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예를 들어, 유전자 조작 같은 생명윤리의 문제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고민하고, (이주노동자나 디아스포라처럼) 수많은 국가에서 많은 이들이 공공체계로부터 배제되어 있다. 유럽과 이슬람 간 문제도 그렇다. 이런 것들이 사회 긴장을 초래하고 갈등을 만들어낸다. 지난해 런던에서는 대규모 도심 폭동이 있었다(지난해 8월 런던에서 시작된 청년들의 폭동은 영국 전역과 벨기에 등지로 번졌지만, 폭동을 주도한 주체도, 요구사항도 없어 이목을 끌었다). 이 폭동은 어떤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저항행위가 아니었다.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또는 합리적인 요구가 없었다. 말 그대로 특별한 의미가 없는 순수한 폭력의 현신(現身)이었다. 가게를 약탈하고 물건을 파괴하고, 자동차를 불태우기도 했다. 참으로 혼란스러운 폭력이었는데, 이것이 중대한 신호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폭력의 행동들이 어떤 일관된 이론이나 관점으로 번역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엇을 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행동은 하되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닌가? 당신의 주장이 비판을 받는 것도 이런 지점이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주지 않는다.
"아니다. 내 말은 언제 실현될지 모를 장기적인 해결책에 매달리지 말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것이다. 물론 월가 점령시위나 런던 폭동의 군중들이 해결책을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시도들을 해야 한다. 금융자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은행 규제를 요구해야 하고, 정의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물론 이런 과정이 위기 자체를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이 위기가 점점 더 깊어지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탈산업자본주의 등으로 불리는 이 문명은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이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발전했다는 믿음이 있다. 한국을 보면 알 수 있다. 군사독재를 거쳤지만,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이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싱가포르이나 중국의 경우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발전하지 않았다. 이 국가들의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자본주의는 매우 잘 돌아가고 있다. 이 사태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자유주의자가 말했던 것과는 다른 '공산주의의 종언'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후쿠야마의 선언처럼) 자본주의는 이겼다. 그런데 그 이겼다는 것이 과거 공산주의 국가에서 최고였던 공산주의자가 훌륭한 자본가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웃음) 이런 현실은 우리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래서 지금 현재 발생하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위기는 장기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 ②에 계속
[지젝 인터뷰 전문 ②] "새 미디어의 속성은 양가(兩價)적이라는 것"인터뷰=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 교수 입력시간 : 2012.02.07 21:15:26 수정시간 : 2012.02.07 22:07:26
# 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빅브라더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정치가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 당신이 아랍혁명과 SNS의 관계에 대해 쓴 칼럼을 보면 SNS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하게 SNS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스마트폰이나 휴대용 디지털기기에 의존한 미디어는 시민사회를 위한 발언 기회를 더 확대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국가의 통제 바깥에서 집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려는 권력의 시도가 있다. 구글, 위키피디아 검색제한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은 인터넷 사용을 감시ㆍ규제한다. 아랍 봉기가 일어났을 때, 정부는 인터넷과 휴대폰 연결을 끊어서 시위 참여자들이 서로 통신을 못하게 해버렸다. 서구는 이런 사례를 야만적이라고 규정하며 우리는 절대 그렇지 않다, 민중은 자유를 원한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런던 폭동이 일어나자 영국 정부도 마찬가지로 인터넷과 휴대폰 통신접속을 차단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누가 이 미디어들을 통제하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라. 컴퓨터는 점점 작아지고 데이터는 중앙으로 모이는 클라우드 시스템(소비자가 가진 모든 전자기기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연동 서비스)이 구축되고 있다. 아이팟이든, 노트북이든, 아이패드든, 모두 클라우드에 데이터를 저장한다. 누가 이 디지털 공공영역을 관리하고 통제하는가? 이것이 문제다. 중국이든, 아랍이든, 서구든, 모두가 이 정보를 지배하고자 한다. 물론 이런 주장이 SNS에 대해 전적으로 회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내 주장은 이 새로운 미디어의 속성이 양가(兩價)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 당신 주장도 이런 통신기술을 바탕으로 과거보다 우리가 훨씬 더 나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런 조건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렇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런 측면과 더불어서 누가 이 디지털 세계를 통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이 모든 시스템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빅브라더' 를 상정하는 것 같지도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강박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런 통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달리 말하자면, 빅브라더가 아니고 다양한 브라더들, 똑똑하거나 뚱뚱하고, 또는 멍청한 많은 브라더들이 통제하는 것이다."
-가히 형제애라고 불러야겠다.(웃음)
"북한의 경우를 제시하면서 한 명의 빅브라더나 또는 그 아들이 통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겉으로 보기와 달리 그 통제가 제대로 먹혀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강력한 정보기관이 배후에서 민심을 조종한다거나, 국가권력이 주도면밀하게 모든 것을 계획한다는 것은 강박적 상상이라는 것이다. 권력 작동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어 2008년 금융위기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쉽게 하나의 국가를 상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파워엘리트들이 있었지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보라. 공화당과 민주당이 서로 논쟁을 벌였는데, 거기에 등장한 정치인들의 모습은 정말 끔찍한 것이었다.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파워엘리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배후에서 비밀스럽게 일을 처리하는 비밀스러운 권력에 대해 노스탤지어를 느낀다. 멋있게 보이긴 한다.(웃음)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위기가 왔지만 이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당사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에서 위험한 것이다."
# 아감벤, 푸코와 차이점 -당신 이야기는 통치성의 문제를 제기한 미셸 푸코의 견해와 다른 것처럼 들린다.(통치성은 18세기 전후 유럽에 등장한 새로운 통치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푸코가 고안한 개념으로 근대 국가의 통치는 인구의 감시와 처벌이 아니라 건강, 안전, 복지를 증진하는 개인과 집단의 행동, 실천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런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수단이 '폴리스' 로 불리는 행정관리 기구이며 여기 수반되는 지식이 경제적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정치경제학-고전경제학-이라는 게 푸코의 분석이다.)
"물론이다. 통치성의 문제가 아니다. 통치성에 대한 주장은 심각한 이론적 문제를 안고 있다. 푸코뿐 아니라, 조르조 아감벤 같은 이들이 범하는 오류는 너무 과도하게 권력, 지배, 통치성의 관계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들은 경제를 너무 무시한다. 착취라든가, 자본의 운동이라든가, 여기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성차별이나 저항, 국가권력의 통제, 그리고 통치성 같은 서로 다른 형식들에 너무 집중한다. 이들의 의견이 틀린 것은 아니다. 명백하게 우리 사회는 과거보다 더 강하게 통제를 받고 있다. 더 많은 디지털 통제의 가능성이 있다. 이런 통제가 한 사람이나 소수를 통해 이루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미국의 사례에서 봤듯이, 이들이 경제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입장이다. 이제 경제는 거의 전지구적 단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것을 일관성 있게 누군가 관리하고 지배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무엇이 문제라는 것은 알릴 수 있지만, 누구도 그에 대한 답을 줄 수가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말했는데, 최근 한국에서 '알튀세르 다시 읽기' 를 요청하면서 국내외 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알튀세르 효과>(그린비 발행)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주로 후기 저작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오늘날 알튀세르의 의미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알튀세르의 철학은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우발성의 유물론*을 주장하는 후기 알튀세르는 유명론**적이라고 생각한다. 푸코 역시 이와 비슷하다. 나는 이런 입장에 서 있지 않다. 우발성이나 다자성, 마주침 이런 개념들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역은 언제나 근본적인 모순과 적대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국가장치에 대한 견해는 여전히 효과적이다. 오늘날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준다. 대중적으로 운위되는 것처럼 공산주의가 종언에 이른 후에 이데올로기도 끝났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지금 이데올로기의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 스스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알튀세르의 이론이 여전히 실질적인 효용성을 가진 이유이다." *우발성의 유물론=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갖고 있는 필연성 개념을 극복하기 위해서 알튀세르 후기, 고대 원자론을 참고해 유물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이론으로 현재의 철학, 현재성의 철학이라고도 불린다. 어떤 사건의 인과관계, 필연성에 대한 맹신은 폭력이며 인간이 생각해내고 지배해온 모든 의미들은 비와 어떤 곳의 만남 같은 무의미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유명론= 실재(實在)를 부정하는 철학상의 입장으로 명목론(名目論)이라고도 한다. 실재하는 것은 개체(個體)뿐으로, 예를 들면 빨강이라고 하는 보편개념은 많은 빨강이라는 공통 성질에 대하여 주어진 말, 혹은 기호로서, 빨간 것을 떠나서 빨강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후기 알튀세르보다도 그의 이데올로기론을 더 중요하게 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관련해서 당신은 요즘 알랭 바디우와 비슷한 노선을 견지하게 된 것 같다. 최근에 바디우와 공동으로 책도 냈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그에게 많이 근접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판단이 적절한가? 아니라면 바디우와 당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디우는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서 좋은 벗이다. 하지만 엄연히 차이가 있다. 바디우와 나는 헤겔과 라캉을 참조하고,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바디우는 국가 아래에서 일어나는 여러 다른 작동들에 깊은 신뢰를 주고 있다. 나는 본래적인 정치는 오직 국가로부터 떨어질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바디우는 지난해 일어난 월가의 점령하라 시위나 스페인의 분노하라 시위, 아랍혁명 같은 사건에 깊은 공감을 표명했다. 이와 같은 공공적인 저항운동이 국가를 압박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국가가 어떻게 권력을 조직할 것인가, 어떻게 경제를 재조직할 것인가,' 이런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바디우는 경제이론을 누락하고 있다. 경제는 그의 정치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점이 알튀세르와 바디우의 다른 측면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무엇보다도 정치경제학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발전시킨 것이다. 젊은 알튀세르가 썼던 <자본을 읽는다>는 오늘날에도 엄청나게 유효하고 중요하다. 이런 시도를 재평가하고 갱신해나가야 한다. 지금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의 생각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나도 이 생각을 발전시키고 싶었다. 지난 책에서 내가 시도한 것은 어떻게 착취가 오늘날 작동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한 이탈리아 경제학자가 했던 말에 동의하는데, 예를 들어, 자애로운 빌 게이츠 같은 경우 전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쓰게 되어 있다. 월가 점령시위를 보더라도 그렇다. 시위 중에 의사전달을 하려고 해도 (마이크소프트나 애플사의 기계) 장치를 동원해야 한다. 최근 들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실업이다. 실업이 모든 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다. 실업률이 거의 20~30%에 육박하는 현실이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공장 폐쇄로 직장을 잃어버리면 다시 취업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부르주아는 정말 높은 임금을 받는다. 이런 격차가 발생하는 까닭이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마르크스주의가 토대가 될 수는 있겠지만, 이런 현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을 아직 가지지 못했다."
-자본주의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말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말인가?
"이런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다양한 용어들이 있다. 즉흥적 자본주의, 탈산업 자본주의, 탈근대 자본주의 등등. 그러나 이런 용어들은 이론이 아니다. 때로 통찰력을 주지만, 기업의 로고 같은 것이다. 충분히 이론적으로 발전시킬 수 없다."
-결국 문제는 정치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집단적인 정치 주체를 구상할 수 있는가? 사회운동은 언제나 정치적 주체성에 대한 전망을 요구하는데, 이런 윤리적 요청에 대해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내가 우려하는 것은 요즘 너무 도덕주의적인 경향이 짙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도덕적 분노는 정치적인 분석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주변에 보면 정말 많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들을 수가 있다. 신문을 봐도, 이 회사는 친환경적이고, 저 회사는 선량하지 않다는 식으로 보도된다. 좋다. 그러나 이렇게 부정과 부패, 그리고 비리에 대한 도덕주의적 비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점령하라 시위의 경우도 도덕주의적인 비판이 많았다. 주로 기업들의 부도덕에 대한 성토였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훨씬 더 구조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사적인 생활에서 윤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정치는 대답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도덕주의적 비판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
"해결책은 간단하다. '본래적인 정치' 를 직시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그 비판을 통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묻는다면 대답을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비판은 속이 비어 있는 말이나 되돌려줄 것이다. 노동자가 복직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좋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면, 정확하게 답을 내리기 어렵다. 40~50년 전이라면 우리는 비록 틀렸지만 명쾌하게 대답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를 생각해보자. 그때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다면 당 규율을 준수하며 사회주의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런 큰 이야기를 해봤자 틀렸다는 것을 안다. 지금은 고작 국가를 재조직해서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쉬운 해결책을 찾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해결책을 찾기보다 사유를 해야 한다. 유명한 마르크스의 구절이 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 이라는 말인데, 20세기에 우리는 이 말에 따라 너무 많이 세계를 변화시켰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변화보다도 해석이 필요한 시대가 왔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생산력은 높지만, 자본주의는 내재적인 한계를 보유하고 있는 체제다. 또한 이 체제는 점점 위기가 깊어져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지만, 예전의 마르크스주의로 다시 돌아가자는 의미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공통적인 것(관습, 이데올로기와 같이 한 사회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의 문제이다. 20세기에 공통적인 것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제로 포인트에서 다시 정치에 대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당신은 점령하라 시위가 있던 주코티 공원 현장에서 연설을 했던 것 같다. 거기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가?
"근처 뉴욕대학에 특강을 갔다가 우연히 참가하게 되었다. 사전에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연설한 내용은 앞서 출판했던 내 책에 나오는 내용을 조금 수정한 것이었다. 나의 메시지는 '자기 스스로 만족하지 말라' 였다. 끝까지 무엇인가를 요구하라는 것이었다. 이 시위가 끝난 뒤에 정상이라고 불리는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지금 구체적인 요구에 대해 모른다. 그냥 사유를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토대를 고민한다는 것은 어떤 사회를, 어떤 자유를, 어떤 정부를, 어떤 행복을 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사람들 반응은 어땠는가?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응은 썩 나쁘지 않았다.(웃음) 앞에서 말했듯이, 이 시위는 다분히 도덕주의적이었다. 내 문제 제기는 이 시위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이 없다면, 쉬운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 ③에 계속
[지젝 인터뷰 전문 ③] 지젝이 헤겔을 주제로 책을 내는 까닭은인터뷰=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 교수 입력시간 : 2012.02.07 21:17:06 수정시간 : 2012.02.07 22:07:51
# 헤겔을 다시 읽는 이유 -예전에 가디언에서 당신은 소유물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헤겔전집>이라고 답했다. 올해에 헤겔에 대한 당신의 책이 나올 예정이다. 이 책에 담길 내용들은 무엇인가?
"거의 1,0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인데, 사람들이 다 미쳤다고 한다.(웃음) 누가 이 책을 사겠는가. 출판사는 정치에 관한 작은 문고판 책을 내자고 했는데, 두껍고 어려운 책을 써도 팔린다고 고집을 부렸다. 독자들이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 일갈을 해줬다. 여기에서 다룰 내용은 최근 관심 있는 이론적 주제들이다." -그런데 왜 헤겔을 주제로 책을 내는 것인가? "헤겔을 선택한 까닭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미스터리한 측면마저 있다. 나는 어떻게 헤겔을 재현실화할 것인지(최근 서구 학계에 '헤겔 다시 읽기' 붐이 일고 있다. 물론 예전 헤겔의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 맞춰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에 정신분석학 등 최근 주목받은 인문학 연구 성과를 헤겔 독해에 반영하기도 한다. (지젝은 이런 새로운 독해방식을 '재현실화' 라고 표현했다), 이 문제에 대해 아주 오랜 전부터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지금 우리가 헤겔이 살았던 시대와 유사한 처지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헤겔을 되풀이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 두꺼운 책에서 나는 지금까지 쓴 책보다 더 체계적인 내용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헤겔만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철학자들도 있는데,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내 멍청한 정치적인 저작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철학자로서 나는 추상적 사고를 하는 것에 흠뻑 빠져 있다."
-철학자로서, 요즘 같은 시절에 철학자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오늘날 철학은 매우 특별한 것이다. 철학자는 대답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다. 환경위기나 경제위기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내놓지도 않는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섣불리 문제를 제시하고 대답을 구하는 것은 철학자의 본분이 아니다." -
한국 독자에게 해줄 말은 없는가? "사유를 시작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종교만 해도 복잡하다. 내가 믿는 신이 다른 사람에게도 신일 수 없다. 이런 걸 고민해야 한다. 호기심에 그치지 말고, 전 생애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시작해야 한다."
-당신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알고 있나? "한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나는 한국 독자의 관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자 한다. 나는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전에 방문했을 때 느낀 것이지만, 활력 넘치는 지적인 환경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한국인을 존경한다."
-아마 당신의 영향력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당신 책에서 영감을 얻는다. 끝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특별히 전할 말을 해 달라. "아마 그런 영향력은 대부분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일 테다. 영향력 자체가 오해이다. 오해는 최초의 이해보다도 더욱 지적인 것이다. 역사적인 것이다. 원조 철학자보다 더 훌륭한 지적인 성취가 오해에서 오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모두 (서로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외국인이 되어야한다. 나는 사도 바울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 12명에 속하지 않지만, 가장 훌륭하게 기독교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예수를 본 적도 없다. 내 책을 한국인들이 읽어준다는 점에 감사한다. 경제적 발전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지적인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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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3]지젝, 경희대서 강연 “자선활동·유기농 식품도 이데올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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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화·김경학 기자 tingco@kyunghyang.com (2012.6.27)
한국을 찾은 슬라보예 지젝(63)이 27일 오후 서울 경희대학교 평화의전당에서 대중강연에 나섰다. ‘지금, 여기,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란 제목으로 열린 강연에서 지젝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분석과 함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실천방안을 제시했다.
먼저 지젝은 1940년대 말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를 예로 들어 ‘없는 것’, 즉 부정이 정체성의 일부라는 점을 설명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카페에 가서 ‘크림 없는 커피’를 주문했는데 웨이터가 “ ‘크림 없는 커피’는 없지만 ‘우유 없는 커피’는 있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는 “물리적으로 봤을 땐 둘 다 똑같은 커피지만 무엇이 없는 커피냐에 따라 둘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무엇이 없느냐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지젝은 이 커피를 헤겔의 ‘총체성’ 개념을 빌려와 자본주의에 빗댔다. 그는 “헤겔의 총체성은 현상 너머 숨겨진 조화를 찾자는 게 아니라 특정 개념에 다양한 부정과 실패를 포함시키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이 27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정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이어 “오늘의 자본주의를 총체성으로 바라보려면 ‘자본주의가 이상적으로 좋은 시스템이다’라고 묘사하는 것으론 충분치 않으며 자본주의 이면에 숨겨진 실패 지점들도 살펴봐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중국 폭스콘 공장을 예로 들었다. 지젝은 “폭스콘의 한 임원이 폭스콘 노동자들을 폄하하면서 ‘100만마리의 동물들을 관리할 방법을 동물원에서 배워야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또 “한국을 포함한 개발국가들이 아프리카의 비옥한 토지를 사들이는 바람에 기아 문제가 새로 발생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같은 자본주의의 실패 지점들도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개념 안에 포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더해 지젝은 점점 늘어가는 실업률을 예로 들며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자본주의의 실패들을 명확히 예측해 내지 못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답은 ‘이데올로기’였다. 그는 “미디어를 보면 특정 기업이 아동을 착취하고 또 다른 회사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특정 은행은 투기를 하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나온다”며 “자본주의에 대해 이렇게 많은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는 탐욕스럽다’는 식의 해석만 넘쳐난다”고 지적했다. 단순히 사람을 탓하고 사람들의 탐욕과 부패만을 지적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분석은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분석을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종의 미신과 같은 신념을 작동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젝은 “자선활동이나 유기농식품도 모두 이데올로기”라고 말했다. 그는 “볼품없는 유기농 사과를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하는 건 정말로 그 제품이 환경에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고 말했다.
지젝은 유기농 식품 구매는 ‘환경파괴는 좋지 않다’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힌 채 환경파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생각을 하는 대신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지젝은 같은 사례로 쓰레기 분리수거의 한계를 설명했다. 그는 “쓰레기 분리수거가 필요한 것은 인정하지만 환경문제의 근본을 외면하고 있다”며 “환경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바꿔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역사적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얼마큼 구제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진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젝은 “상황이 침울할지라도 터널 끝에는 항상 ‘희망의 빛’이 있다”며 대학과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지식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를 진실로 인식하도록 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지식인을 양성할 대학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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