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먹는 입
황정은
입
사람은 얼굴을 맞으면 아프다.
몸 중에 맞아서 아프지 않을 곳은 없지만 얼굴은 그 가운데서도 특수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어느 한 가지 없어서는 안 될, 보고 듣고 먹는 기관들이 노출된 장소라는 물리적인 조건 말고도, 얼굴엔 상징적 차원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볼 때, 인생 굴곡이나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 삶에 대한 포즈 같은 것을 그 혹은 그녀의 얼굴을 통해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것들이 본의 아니게 노출되는 장소가 다름아닌 얼굴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닌 이 얼굴을 타자로부터 얻어맞았을 때 느껴지는 아픔은, 물리적 아픔이라기보다는 비(非)물리적인 아픔이라서 더 아프게 여겨지는 아픔이다.
사람은 입을 맞으면 아프다.
입은 얄궂다. 물리적으로는 가장 얇은 외피로 덮여 있으며, 가장 깊은 입구이자 출구라 할 수 있는, 이 구(口)가 일단 충족되지 않으면 몸의 나머지 기관들이 제대로 일해주지 않는다. 시험에 떨어지고 사랑에 실패하고 굴욕적인 노동을 하고 불시에 사고를 당해 손발을 잃고 애착하는 이의 죽음을 겪고도, 사람은 밥을 먹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구차하고도 귀한 기관을 통해 먹고 마시고, 나와 남의 사정에 관하여 발설한다. 이러한 입을 얻어맞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심을 느끼며, 각별한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다. 먹는 입을 향한 주먹질은 먹지 말라는 의미이고, 말하는 입을 향한 주먹질은 닥치라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던 입들이
남일당이라고 부른다.
4호선 신용산역 부근, 찾느라고 굽이굽이 헤맬 것도 없는 대로변에 이 건물이 있다. 현재는 구십 퍼센트 이상 철거가 진행된 재개발지구의 폐허 전면에서, 타워형 아파트 단지를 등지고, 반경 오백 미터 안으로 두 개의 전철역, 멀티플렉스 영화관, 백화점, 대형 마트, 이동식 간이주점과 노점 들, 사창가 등과 연결된 이 건물의 근처는 묘하다. 사람이든 차든 왕래는 많으나 황량하고, 도심이라고도 변두리라고도 말하기가 애매해서, 도심의 변두리라고, 다시 애매하게 말해볼 수 있을까.
2009년 1월 19일, 한 무리의 철거민들이 생존권, 주거권을 요구하며 이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짓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20일 새벽이었다. 그들의 망루는 검게 불타올랐고, 남일당이 고립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전철연 사람들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망루에 가족을 올려보냈던 사람들은 누가 얼마나 다쳤는지, 시신이 발견되었다는데 그가 누구인지, 그를 확인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혼란 속에 방치되어 있다가 저녁 무렵에야 사망자들의 소식을 통보받았다.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라벨이 붙어 가족들의 동의도 없이 시신 다섯 구의 부검이 이루어진 뒤였다.
유영숙 유족은 남편이 망루에서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살아나온 사람 중에 옥상에서 남편을 본 사람이 있었다. 망루를 이미 빠져나온 그가 건물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해질 무렵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시신을 확인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병원 영안실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신 다섯 구가 놓여 있었는데, 맨 안쪽에 남편이 있었다. 그을렸지만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고(故) 윤용헌씨가 그녀의 남편이다. 남일당 분향소 앞 천막에서 남편의 마지막 상태를 피로한 듯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그녀는 그가 맞아서 죽었다고 말했다.
“까맣게 타서 오그라든 다른 시신들과는 달랐다. 불에 탄 것이 아니고 그을음이 묻은 정도였다. 가슴뼈가 쪼개진 채로 어긋나 있었다. 배에 붕대가 감겨 있었고, 혈흔이 선명했다. 다른 분들은 턱이 벌어진다. 내 남편은 벌어지지 않는다. 고통을 견디느라고 이를 악물고 죽었다.”
망루에서 발견된 사람들의 사망 원인은 화재에 의한 질식사로, 구타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망루에서 살아나와 기소된 사람들 중에도 특공대원에게 구타를 당해 눈 부근의 뼈가 함몰되거나 망루 안에서 가리지 않고 얻어맞았다는 법정 증언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고(故) 윤용헌씨의 사례를 비롯해 두개골이 갈라지고 장이 파열되고 전동도구 등으로 말끔하게 손이 잘려나갔다는 시신들의 상태는 발표된 내용을 충분히 의심하게 만든다. 주머니에 든 소지품, 벨트, 지문 등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부검에 들어갔다는 경찰의 발표도 의심스럽고, 일반적으로 시신 한 구당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된다는 부검을, 두 시간 들여 다섯 구를 해냈다는 것도 의심스럽다. 유족들은 그 시간을 부검이 아닌 은폐와 인멸의 시간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진상규명을 위한 재부검을 강하게 원하고 있다.
유영숙 유족은 서울시 중구 순화동에서 식당을 경영하며 살다가 한겨울에 거리로 밀려나오기 전까지는 전철연이라는 연대를 모르고 살았다고 말한다.
“철거는 겪어본 사람만 안다.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겪어본 사람들끼리 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유품이라며 경찰이 내어주는 일회용 라이터와 장갑 한 짝을 받아왔다고 말했다.
216일째 입
2009년 8월 23일,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운구행렬이 용산 남일당 건물 앞을 지나갔다. 이 건물 옥상에서 여섯 사람이 목숨을 잃은 날로부터 216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날 아침, 남일당 주변으로 경찰병력이 평소보다 삼엄하게 배치되었다. 유영숙 유족은 상복을 입은 채로 남일당 분향소에 머물러 있다가, 경사 계급장을 단 경찰공무원이 분향소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길을 막아섰다. “이대로는 지나갈 수 없다, 정중하게 분향을 하고 가라”고 말하자 그는 주먹으로 유족의 입을 가격했다.
바닥에 쓰러졌던 유족은 서둘러 도망가려는 경찰공무원의 허리를 붙들었고, 그는 그 손을 털어내며 다시 한번 유족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천주교 사제들과 전철연 사람들이 분향소 곁에 천막을 쳐두고 머물러 있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 그들이 도망가려는 경찰공무원을 가로막고 사과하라, 고 요구하자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전의경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사제들과 전철연 사람들을 한 명씩 두 명씩 둘러싸서 고립시키고, 그 틈에 폭력을 행사한 경찰관을 도주시켰다. 폭행당한 유족은 팔꿈치에 체중이 실린 채로 쓰러져 통증이 심했고 얻어맞은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는 상황이었다. 유영숙 유족을 비롯해 다른 유족들도 나서서 가해자의 사과를 요구하며 남일당 앞 도로에 나와 앉았으나, 경찰공무원들은 유족들을 도로에서 보호하지도 끌어내지도 않으면서, 그들이 지쳐 스스로 물러나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발설하는 입을 향한 가격이 있었고, 공권력에 의한 폭력인데도 나서서 사과하는 이가 없었으며, 가해자는 공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서둘러 증발해버렸고, 피해자들은 대책도 없이 고립되고 방치되었다.
이날 사건은 1월 20일 새벽 이후의 용산을 상징하는 정황으로 빼곡하다.
유영숙 유족은 남일당 분향소 주변에서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벌어지는 경찰 및 용역업체 직원 들과의 대립상황에서 이미 팔꿈치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이날 이 팔꿈치를 다시 다친 그녀는 11월 현재까지도 부목을 풀지 못하고 있으며, 한 차례라도 더 다칠 경우 영구적인 장애후유가 남을 수 있다는 진단을 받은 상태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일주일 뒤에 남일당으로 돌아온 그녀는 폭력을 행사한 경사의 이름을 대며 가해자의 사과를 요구했다. 그녀가 받은 것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바람에 놀라서, 그도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대답이었다.
쇠틀에 붙은 입
아홉 명의 피고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이다.
이 재판에서 피해자는 망루에 투입되었던 공권력이고 가해자는 망루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다.
철거민 다섯 명 말고도 특공대원 한 명이 용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검찰은 그의 죽음과 망루 화재의 책임을 철거민들에게 묻고 있다. 그들이 망루 사람들을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 및 치상’ 혐의로 기소했으므로, 변호인단은 참사 당일 특공대와 경찰의 진압작전이 과연 공무수행으로 적법했는지를 따져묻고 있다.
이 재판의 중요한 증거자료인 수사기록은 애초 만여 쪽으로 작성된 문서였다. 검찰은 그중 삼천 쪽을 비공개로 묶어서 법정에 제출하지 않았다.1) 공개된 나머지 수사기록엔 참사 당시 진압작전을 명령하고 주도했던 지도부들, 이를테면 서울시경찰청장, 차장, 용산경찰서장, 경찰특공대장과 간부들의 진술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망루 사람들의 초기 변호를 맡았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은 삼천 쪽을 요구하며 그것이 공개되지 않은 재판을 거부했다. 사법부도 삼천 쪽을 공개하라고 명령했으나 검찰은 끝내 공개를 거부했고, 재판부는 그들의 위법행위를 묵인한 채로 재판을 진행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와 311호.
311호는 3층이고 417호는 4층이다. 초기 재판은 417호에서 열렸다가 나중엔 그보다 법정 규모가 작은 311호에서 진행되었다. 층과 면적이 다르다는 것 말고 이 두 장소에 특별히 다른 점은 없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폭력시위 전문집단’이라고 말하는, 햇빛에 그을리고 어깨가 뭉친 사람들을 보았다. 용역업체 직원, 특공대장, 작전을 명령했던 경찰 간부 등이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해 참사 당시를 증언하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상당히 기묘하게 여겨질 것이 틀림없는 광경을 보았다. “사망한 분들은 사망했기 때문에 기소할 수 없었을 뿐”이라고 야무지게 말하는 검사를 보았다. 재판정 광경을 스케치하던 화첩을 압수당한 그림작가의 등을 보았고, 그쪽을 빤히 바라봤다는 이유로 이쪽을 빤히 담고 있는 카메라 렌즈들을 보았다.
9월 1일 417호 이야기를 해보자.
이날, 민변 변호인들은 삼천 쪽이 공개되지 않은 용산 재판은 피고인의 방어권 등 헌법적 권리를 무시한 부당한 재판임을 선언하며 일제 사임했다. 앞선 재판에서 방청객들이 삼천 쪽 공개를 요구하며 ‘난동’을 부렸다는 이유로, 이날 재판은 각별히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개정되었다. 채증이 이루어졌고, 양복을 입은 법원공무원들이 방청석 끝자리마다 마개로 막듯 자리를 잡았다. 변호인석엔 의뢰인들과는 대화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국선변호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용산4구역 철거민 대책위원장인 이충연씨를 비롯한 망루 사람들은 “새로운 변호인단이 변론 준비를 마칠 수 있는 시간을 달라. 이 재판을 우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다. 부디 말미를 달라”고 요청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재판을 받을 수 없다. 나가겠다”고 망루 사람들이 말하자 재판장은 “가라. 피고인들이 피고인석을 비워도 재판은 진행하겠다”고 대답했다. 다시 망루 사람들이 “항의의 의사표시로 돌아앉겠다”고 말하자 재판장은 “처벌하겠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망루 사람들이 어떻게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철거민들로부터 ‘용역깡패’로 불리는 용역업체 직원들이 증인으로 불려나오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법정 구석에서 땀을 흘리며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의 눈에 참으로 참담했던 것은, 정당하게 재판받을 권리를 말하기 위해 치켜든 망루 사람들의 팔이 부들거리고 있었으며, 그나마도 곧게 치켜들지 못하고 구부러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법정 좌석은 엉덩이받이와 등받이로 이루어진 딱딱한 나무의자이다. 앞, 뒤, 옆자리와의 간격도 별로 없이 대여섯 개의 나무의자들이 하나의 쇠틀에 고정되어 있고, 이 쇠틀은 다시 바닥에 볼트로 고정되어 있다. 이 비좁고 딱딱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에서 몇 번이고 ‘국가’를 실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질문을 해보자.
그들의 국가와 당신의 국가와 나의 국가가 다른가.
어떤 대답을 고를까.
같아도 문제, 달라도 문제 아닌가.
이날 법정에선 길쭉한 삼각대 끝에 고정된 두 대의 카메라가 좌우에서 쉼없이 방청석을 촬영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각각 캠코더를 할당받은 법원공무원 십여 명이, 한숨을 쉬는 정도의 거친 숨소리나 혀를 차는 소리 등에도 예민하게 반응해가며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채증하고 있었다. 이날 이렇게 많은 캠코더가 동원된 이유를 정중하게 물은 활동가 한 명이 영구추방 명령을 받고 법정 밖으로 끌려나갔다. 경찰 지도부의 진술서가 제출되지 않은 부당한 재판에 항의하기 위해서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던 아주머니 다섯 명도, 닷새간의 감치 명령을 받고 끌려나갔다. 방청석에 남은 사람들은 얼굴을 붉히고 입을 다문 채로, 증인으로 출석한 용역직원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용산 참사를 “천재지변”이라고 일컫는 것을 들었다. 그들이 참사 당일 남일당 건물 안으로 들어갔으나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진술하는 것을 들었다. 이 심리과정에서 두 명의 용역직원은, 피고인석에 앉은 망루 사람들로부터, 철거지역에서의 불법적인 폭행 가해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있다
망루에 누가 있다고 들었습니까.
전철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까.
전철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2009년 10월 9일 법정, 특공대원과 변호인의 질의응답에서
재판은 9월부터 집중심리에 들어가 일주일에 두 차례씩 열렸다. 보통은 오전 열시에 개정되어서 오후 일곱시를 넘어서도 심리가 계속되었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검찰의 기소 내용을 반박하는 증거와 증언 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다.
새롭게 꾸려진 변호인단의 김형태 변호인은 증인으로 출석한 특공대장으로부터 “서너 차례 검찰에 불려가 장시간 동안 진술했다”는 대답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서너 차례 불려가 장시간 진술했다는 그의 진술 내용은 검찰이 공개한 칠천 쪽의 문서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진압작전의 지휘관이었던 그는 심리가 진행되는 내내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명령하지 않았다. 아무도 명령한 사람이 없다”는 취지의 진술을 반복했다. 그는 참사 당일 남일당 현장에서 공권력과 용역업체 직원들 간의 공조가 있지 않았느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그런 사실은 없다”고 대답했다.
특공대장을 비롯해 용산경찰서장 및 경찰 간부들은, 1월 20일 당시 남일당 망루로 특공대를 투입해야겠다고 판단한 이유로 “옥상에 있던 철거민들이 대로와 시민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투척하는 등, 대단히 위험하고 위협적인 상황”이었다고 증언했다.
같은 날, 그리고 다른 날, 증거들이 제출되었다.
동영상 자료들이 제시되면서 참사 전까지 별다른 충돌 없이 조용했던 남일당 부근의 상황이 알려졌다. 당시 남일당 앞 도로를 규칙적으로 오갔던 학원버스 운전기사는 “십여 차례 지나갔지만 돌이나 화염병이 떨어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세 시간 동안 헬리콥터를 타고 남일당 부근을 살폈다는 특공대장 자신도, “특공대 투입 전까지, 옥상에서 아래쪽을 향해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결국, 경찰 지도부들이 특공대 투입을 결정한 이유는 “전날에 경찰과 살수차를 향해 두 차례 화염병 투척이 있었다는 보고를 전해들었고, 옥상에 새총 거치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두 가지 사항 때문이었다.
“장기간 이어지는 망루 농성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둘러 진압을 결정해야 했다”2)고 진술한 경찰 지도부들은 그들이 너무 잘 안다는 그 망루 내부에, 한겨울 난방 및 발전기 급유용으로 비축해둔 세녹스가 육십여 통3) 존재했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혹은 몰랐다고 말하거나, 알고도 특공대원들에게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남일당 건물이 이미 경찰병력으로 빈틈없이 둘러싸인 상황이었으니 보름 정도만 기다렸더라면 어땠을까. 농성이 벌어진 장소에 인화물이 있을 경우, 전부 소진되고 난 뒤에 진입한다는 것은 경찰의 진압작전 지침서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더도 말고 그들의 지침서대로만 했더라도,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공무집행과정의 적법성 여부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진압작전 당시, 용역업체 직원들의 역할이었다. 참사 직후를 비롯해 재판 심리과정에서 경찰 지도부들은 용역업체 직원들과의 협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없었다고 단언했으나 각종 동영상, 소방관 증언, 무전기록 등에서 그들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정황들이 드러났다.
1월 19일 월요일 오전부터 남일당 건물을 포함해 부근의 골목은 경찰들로 둘러싸여서 민간인의 접근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용역업체 직원들은 폴리스라인을 넘어 남일당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여덟 시간 이상을 그곳에 머물면서, 철거민들이 그들의 진입을 막으려고 설치한 방어막을 해체했고, 계단에서 불을 피워 옥상으로 연기를 올려보냈다. 이 과정에서 소방차가 여러 차례 출동했다. 당시 소방관들은 “용역업체 직원들이 내버려두라고 협박을 했다. 경찰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매번 진화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폴리스라인 안에서의 명백한 불법행위였으나4) 당시 현장에 있던 경찰공무원들은 여덟 시간 동안이나 그들을 내버려두었다.
내버려둔 것만은 아니고, 남일당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망루를 향해 살수하는 용역업체 직원을, 특공대원들의 방패를 사용해서 보호했다.
이 장면들을 촬영한 동영상 증거자료들이 제출되었다.
“가급적 용역을 시켜 방어막을 뚫게 하라”는 경찰 무전기록들도 법정에 제출되었다.
방염복, 방패, 투구, 진압봉 등 기본 장비만을 갖추고 진압했다는 특공대장 및 검찰의 주장과는 다르게, 현장검증에서 망루 외벽을 뜯어낸 전동 그라인더의 흔적이 발견되자 검찰은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절단기”였을 뿐이라고 말을 번복했다.
명도(明渡)라고 한다.
철거 기한이 지난 세입자의 강제 철거를 말한다.
김형태 변호인은 경찰과 용역업체 직원들과의 공조에 관해서 “결국 공권력이 용역으로 동원되어서, 민사 건인 명도집행을 도와준 셈이 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없다
검찰은 철거민들이 불을 냈다고 주장한다.
망루 사람들이 유증기로 가득 찬 망루 안에서 화염병을 투척해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증거가 없다.
망루와 사람들을 태운 불은 특공대원들이 두번째로 망루에 진입했을 때 일어났다. 법정 증인석에 앉은 특공대원들은 첫번째로 들어갔을 때와 두번째로 들어갔을 때의 상황이 달랐다고 증언한다.
“1차 진입 때 망루 이, 삼층 바닥이 꺼지면서 일층에 놓여 있던 세녹스 통들이 엎어졌다. 한 차례 철수했다가 십여 분 뒤 2차로 진입했을 때는 숨 쉬기가 어렵고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냄새가 가득했다.”
그들은 망루 내부에서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던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최초 진술에서 화염병을 보았다고 말한 특공대원도, 철거민들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거짓 진술을 했노라고 법정에서 고백했다.
화염병을 본 사람이 없다.
화재가 일어났을 때까지 망루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 중에, 망루 안에서 화염병이 터지는 불꽃을 보았고, 그것이 화재로 번졌다고 증언한 사람이 없다.
-20도
만약, 이라고 하고 싶지도 않은 가정을 몇 가지 해보자.
당신은 복집 주인이다. 중국집 주인이다. 치킨집 주인이다. 백반집 주인이다. 노점상 주인이다.
권리금, 설비투자비를 포함해서 이억 육천만원이 들어간 복집에 오천만원을 주겠으니 나가라고 한다. 일억 이천만원이 들어간 중국집엔 육천만원을 주겠으니 나가라고 한다. 보증금 천오백만원에, 권리금 삼천만원, 총 사천오백만원이 들어간 백반집엔 이천만원을 주겠으니 나가라고 한다.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다는 이주보상비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산정된 내역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일 수도 있다. 보상가격 산정내역을 받아보려고 노력하지만 조합이 알려주지 않는다. “이렇게 정해졌으니 다른 말 없이 받고, 나가라”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이런 경우도 있다. 당신은 월세를 내고 방을 빌려 주거하는 세입자다. 그들이 당신에게 십만원을 받고 나가라고 한다. 오십만원을 받고 나가라고 한다. 당신은 당신이 지금 사는 지역에서 십만원, 오십만원을 받고 나가서, 통근시간이 두 배로 늘어난 거리에, 지금보다 더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밀려갈 수도 있다. 당신은 고민한다. 복집의 당신도, 중국집의 당신도, 치킨집 당신도, 백반집 당신도, 노점상인 당신도 그대로는 떠날 수 없다.
어느 날 오백 명에서 칠백 명가량의 용역업체 직원들이 동네로 밀려들어와 상주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밤마다 쇠파이프를 끌며 골목을 돌아다니고, 낮은 층에 나 있는 창들마다 손전등으로 비춰가며 안을 들여다보고, 여자들이 보는 곳에서 옷을 벗고 다니고, 당신의 가게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이며 집기 등을 이리저리 밀쳐대고, 입구에 머물면서 가게로 들어서려는 손님들에게 이 집에선 아무것도 팔아주지 말라며 험악한 말을 해댄다. 목 매달린 사람의 목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겨눈 그림 등이 당신의 집 담벼락에 그려지고, 죽은 새가 문 앞에 던져지고, 겁을 먹은 이웃 사람들이 이사를 가서 동네는 점차로 비어가고, 대화를 해보자고 찾아간 조합 사무실 앞에서 철거 용역업체 직원들에게 거지새끼라는 욕을 얻어먹고 쫓겨나온 가장이 당신이라면, 구청에 호소해도 들어주는 이가 없고, 들어주는 이가 있어도 안타깝지만 인정받을 권리가 없다는 답답한 대답만 들을 수 있을 뿐이고, 대낮에 집 앞에서 용역직원들에게 얻어맞아 신고를 했는데도 한 시간 만에 나타난 경찰관이 그럭저럭 넘어가라며 어물쩍 사라지고 마는 상황에서 당신은, 알겠습니다, 나가겠습니다, 도시 개발을 위해서라는데, 나나 내 식구들의 생계 및 거주의 문제쯤은 달리 궁리해보겠습니다, 할 수 있을까.
법정에 선 망루 사람 천모씨는 검찰이 전철연에 가입한 이유를 묻자, 한동안 눈물을 삼키며 말을 못 하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철거에 관심이 없었다. 철거가 뭔지도 몰랐다. 이십오 년 동안 내 동네에서 장인정신으로 장갑만 만들고 살았다. 동네에 용역깡패 칠백 명이 들어왔다. 그들이 집사람의 귀를 때려 바닥에 넘어뜨리고 배를 걷어찼다. 집사람이 길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바지에 오줌을 싸고 있었다. 도망간 용역직원을 내가 붙잡아 경찰서로 데려갔다. 경찰은 뇌진탕 가능성이 있었던 집사람을 두 시간 삼십 분 동안 붙잡아두고 조사했다. 응급조치부터 하자고 부탁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소수민이지만, 철거민이지만, 이기고 싶었다.”
막대한 금액의 이주보상비를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임대 상가, 임시 상가를 마련해서, 삼십 년, 이십팔 년, 십팔 년 장사하며 살던 자리로, 나 살던 자리로 다시 돌아와 장사하며 살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뿐이었다. 용산4구역에서만 재개발로 발생하는 건설사 이익이 일조 사천억원, 조합원 이익이 천팔백억원이 되는 상황에서, 원주민들의 생존권, 주거권이 그다지도 거센 지출이었나.
겨울 새벽이었다.
용산4구역에 남은 소수의 사람들과, 다른 재개발지역에서 철거를 겪어보거나 현재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남일당으로 모였다. 그들은 전기가 끊기고 물도 끊긴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건축 전문인력이나 용접공이 동원된 것도 아니었다. 길을 가면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공사현장의 파이프, 함석 등이 망루의 재료였다.
1월 19일 오전, 경찰이 출동했을 당시 남일당의 망루는 미처 완성되지도 못한 상태였다. 콘크리트 한 점 없는 이 조악한 건축물에 물대포를 쏘기 위해서, 살수차들이 속속 도착했다. 남일당이 경찰병력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이면서 두어 번 충돌이 벌어졌다. 옥상에 있던 철거민들은 건물 아래쪽에서 그들을 향해 모욕적인 손짓을 해대는 용역업체 직원들을 향해 돌을 떨어뜨렸다. 살수차와 경찰차를 향해 화염병을 던졌다. 이 과정에서 화염병 하나가 남일당 옆 공터에 떨어지기도 했고, 바로 옆 건물에 불똥이 튀어서 불이 옮겨붙기도 했다.
망루 짓는 것을 도우려고 옥상에 올라와 있던 사십여 명의 철거민들은, 초반엔 아래층에서 연기를 피우며 머물고 있는 용역업체 직원들에게 가로막혀서 밑으로 내려가지 못했고, 후반엔 용역업체와 경찰병력의 진입을 막으려고 자신들이 스스로 설치한 방어막에 막혀 내려가지 못했다. 20일 새벽이 되자 특공대원들이 곧 진입해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나가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옥상에서 지상을 향해 밧줄이 몇 개 드리워졌다. 그걸 타고서라도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나가라.
어째서 그때 나가지 않았느냐는 검찰의 추궁에, 초로를 넘긴 망루 사람 김모씨는 허탈한 듯 대답했다.
“옥상에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그걸 타고 내려갈 생각은 못 한다. 자신이 없었다. 타고 내려가다가 떨어진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나 혼자서 그걸 잡고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두려웠다.”
1월 20일 화요일.
오전 여섯시를 조금 넘긴 무렵에 살수가 시작되었고, 컨테이너를 이용해 특공대원들이 투입되었다.
망루 삼층에서 쪽잠을 자고 있던 김씨는 느닷없이 쏟아지는 물에 놀라 사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뒤를 이어서 옥상에서, 망루 일층에서, 특공대원들의 진압봉과 최루액이 섞인 물을 만난 사람들이 망루 이층으로, 삼층으로, 마침내 더는 갈 곳도 없는 사층으로, 다급히 쫓겨올라갔다. “어째서 망루에 남아 있었나,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가 있었던 것 아닌가”라는 검찰의 질문에 김 씨는 “결의고 뭐고 겁에 질려 있었다, 가스가 섞인 물포를 쏘니 눈도 뜰 수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컨테이너에 실린 특공대원들이 망루 창에 호스를 넣고 물대포를 쏘아대는 상황이었다. 폭이 육 미터 정도 되는 망루에서 물을 피할 곳은 없었다. 망루 사람 김씨는 이곳에서 고(故) 양회성씨가 등으로 물을 막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쪽 창으로 들어와서 반대편 창으로 똑바로 건너갈 만큼 물줄기가 거셌다. 가스 냄새가 섞인 악취도 가득해 망루 사람들은 숨을 쉬려고 각자 창에 달라붙었다. 김씨는 창을 통해 옥상으로 뛰어내린 덕분에 살 수 있었다. 넋이 나간 채로 옥상 난간에 달라붙어 있을 때, 망루가 단번에 불타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사층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나온 그는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꽉 메우고 있는 특공대원들을 향해 울며 외친 사람이 자신이라고 증언했다.
“저 안에 사람이 있었다. 너희들이 다 죽였다.”
용산에 남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남자가 별로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대책위원회 조직부장을 맡았다는 그는 이십팔 년 동안 용산에서 세입자로 살았다고 말했다. 심리 초반엔 조용하고 침착하게 앉아서 진술하던 그는 화재 당시를 증언하는 동안엔 격한 울분과 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증인석에서 말한다.
“이 사건, 망루에서 내가 미치지 않고 살아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세녹스라고 한다.
망루를 불태운 유류와 유증기의 성분이 세녹스라는 것이 밝혀진 뒤에도 검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비슷한 물질이므로 시너라고 부르겠다”고 고집한다. 한겨울 물이 끊기고 전기도 끊긴 건물에서 버티려고 철거민들이 가지고 올라간 물건들 중에는 발전기 두 대가 있었다. 이 발전기들의 밥이 세녹스였다. 이 물질은 용기 바깥으로 흘러나오면 곧바로 기화되어 유증기가 된다. 유증기의 인화점은 영하 20도. 불이 나기 직전의 망루 내부는 “숨 쉬기가 어렵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유증기로 가득 찬 상태였다. 세녹스 유증기는 최소 점화 에너지가 무척 작아서, 0.002밀리줄(mJ)의 에너지로도 불이 붙는다고 한다. 인체의 정전기 에너지가 200밀리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김형태 변호인은 망루 화재의 가장 의심스러운 원인으로 발전기를 꼽는다. 두 대의 발전기 중 망루 안에 놓여 있던 것은 특공대원들이 망루로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가동되고 있었다. 이 발전기의 배기가스의 온도는 2500도까지 올라가고, 전원을 차단한 상태에서도 발전기 몸체가 약 십오 분간은 200도의 고온을 유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밖에도 “사람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인체적 마찰, 특공대원들이 사용한 그라인더의 불꽃을 포함한 기계적 마찰 등, 화재의 원인이 될 요소는” 많았다.
이날 망루 안에 있었던 모든 물질, 모든 생명이 모두, 발화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맥락을 잘라내고 원인을 따지기 앞서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누가 그들을 그곳에 몰아넣었나.
배후
검찰은 망루의 배후로 전철연을 지목하며 그들의 연대를 직업적이며 전문적인 폭력집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사망하거나 기소된 사람들 중의 대다수가, 최근 삼 년 내에 살던 곳이나 장사하던 곳에서 철거가 진행되어 주민들끼리 세입자 대책위원회를 꾸리면서 2007년이나 2008년에 전철연에 가입하기 전까지, 전철연이라는 연대의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철거지역에서의 폭력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다고 말한다.
1심 최후변론에서 김형태 변호인은 말했다.
“망루의 진정한 배후는 사람이 배제된, 목숨이 배제된, 시민의 기본권이 배제된, 어떠한 권리보다도 재산권을 우위에 둔, 재개발정책이다. 실무 관계자들도 철거민들을 향해서 도울 방법이 없어 안타깝다고 말하는 구시대의 현행법이다. 헌법에도 위배되는 현행법을 철저하게 이용해서, 없는 사람들, 즉 철거민, 용역, 경찰끼리 싸움을 붙이고 관망하는 자본이다. 자본과 유착된 정치권력이다.”
검찰로부터 징역 7년을 구형받은 또다른 망루 사람 김모씨는 1심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가족들이 폭행을 당하고, 살림이 거리로 내던져져 박살이 나고, 살던 집에서 어린 자식들이 용역들에게 들려나오는 것을 목격한 가장이다. 가족을 지키고자 했다. 철거민을 인간으로 봐달라.”
망루 사람 아홉 명의 최후진술이 이어지는 동안, 법정을 조용히 끓어오르게 만들었던 그 소리를, 그 기척들을 제대로 전달할 방법이 지금 내게는 없다. 방청석에서 철거민들은 신음했고 입술을 물며 울었고 더러는 통곡했다. 슬픔이고 절망이고 무엇보다도 울분이고 억울함이었으므로 “그 소리가 두려울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한 시인은 말한다.
2009년 10월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7부 한양서 부장판사는 검찰의 모든 혐의를 인정하며 철거민들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남일당의 입
“화염병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화염병이라고 보이므로 화재 책임은 철거민들에게 있다.”
선고 순간조차 화염병이라고 확언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화재 원인이 화염병이라며 철거민들에게 유죄를 선언한 것은 마치, 위법이나 유효하다, 라는 상황과 비슷하지 않은가. 두렵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이러한 화법이 이 세계의 어떤, 노골적인 패턴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참사로부터 열 달이 지났다.
겨울에 남일당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바로 그 건물에서 설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추석을 맞고, 이제 다시 겨울을 맞는 참이다. 장례도 치르지 못해서 유족들은 상복을 입고 열 달을 살아왔다.
정운찬 국무총리가 내정자였던 시절, 진보신당의 한 의원은 “용산 참사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해결된다면, 영혼을 팔아넘기는 심정으로, 그의 임명에 동의할 수도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얼마나 되는 영혼이 얼마나 되는 헐값에 넘어갔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는 국무총리가 되었고, 10월 2일, 추석 전날 아침에, 내정자 시절의 약속대로 용산 남일당 분향소를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얼마나 상심이 크겠는가”라고 적힌 편지를 읽으며 울먹였고, 그 자리에 동석한 언론들이 그 광경을 열심히 담아냈다.
총리가 다녀갔으므로 기다려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들은 총리의 분향소 방문이 있었던 날의 하루 전날인 10월 1일 아침, 남일당 앞에 걸려 있던 만장 열여섯 기가 모두 잘려나간 사실을 모른다.
유족들, 전철연 사람들, 문화활동가들, 사제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른 시각에, 누군가 커터 등을 사용해서, 죽은 이를 애도하는 문장들을 말끔하게 잘라놓았다. 1일 아침에 이 소식을 듣고 착잡해했다가 2일 아침에 총리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접하니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그려지지 않을 수가 있나. 남일당 부근에 상주하는 경찰들은 유족들이 범인을 보았느냐고 물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불가능하다. 만장이 걸린 자리는 경찰병력들이 24시간 동안 머물면서 멍하니 응시하는 곳이다. 이런 방식으로 남일당을 방문한 총리는 청와대로 돌아가서 대통령에게 “원칙을 잘 말해주었다”고 보고했다.
남일당에는 매일 저녁 일곱시가 되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성당이 있다.
‘남일당 본당 성당’이라고 부른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제들의 집전으로 생명평화미사가 열린다. 이 자리에, 떠날 수 없어 남일당에 머무는 사람들, 어제 왔다가 오늘 다시 찾아온 사람들이 모여 남일당의 입이 열린다. 현재도 남일당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곳에서 용산을 말하고자 하면 곧바로 체포되고 연행되는 상황에서, 이 미사는 유일하게 평화적으로, 연행되거나 물리적으로 부상당하는 사람 없이, 용산을 말할 수 있는 자리이다.
일인시위용 피켓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동생에게 그 자리에 같이 가자고 말하자 단번에 싫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곰곰 생각하더니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용산이 참혹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점을 알며 그러한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기는 무섭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처지가 있을 수 있다.
한 가지만 생각해보자. 광장에 모인 오십만, 칠십만의 촛불을 향해 “촛불을 들지 않은 나머지 사천 몇 백만의 손이 있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시절에, 당신의 침묵과 부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용산역에서, 사유지란 이름으로 폐쇄되어버린 광장에서, 거리에서, 버스정류장에서, 피켓 한 장을 들고 부끄러울 만큼 무력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부끄러움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진작부터 나의 침묵으로써 일조했던 것은 아닌가.
여름 내내 두려움에 땀을 흘렸다. 남일당을 향해 맥락도 없이 욕을 하거나 눈을 흘기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진정 무서운 것은 그것이 거기 없는 듯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며,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사제들은 매일 저녁 남일당의 미사 자리를 숨구멍이라고 말한다. 그 자리에 앉는 사람들의 머릿수로 이 숨구멍이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당신들이 아무리 도시를 말하고 도심을 가리켜 보여도, 남일당이 그런 방식으로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한, 내게는 그곳이 도심(都心)이다.
* 사진 출처 : 평론가 조형래, 용산 철거민 범국민대책위원회.
▶ 황정은 |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가 있다.
2010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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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계간 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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