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5월은 성모 성월]성모신심의 방향성/요제프라칭거

나뭇잎숨결 2023. 4. 29. 09:53

 


[1]성모성월의 유래와 의미

[2]성모신심의 방향성" 요제프 라칭거(교황베네딕토16세) 추기경과의 대담 "

[3] 성모호칭기도문

[이해인 오월의 시]

 

[1]성모성월의 유래와 의미

 

카스티야(스페인 중부 옛 왕국)의 왕 알폰소 10세(1221~1284)는 5월이 주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에게 주는 영적 풍요로움을 처음 결부시킨 이다. 그는 5월 한 달간 특히 마리아를 위해 기도하자고 권고했다. 이때부터 5월을 성모의 달로 기념하는 전통이 생겨나 서방교회로 퍼지기 시작했다.

 

성모성월이 구체화된 것은 17세기 말이다. 1677년 이탈리아 피렌체 부근의 도미니코 수련원에 성모를 특별히 공경하는 단체가 생겨 5월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축제를 마련했다. 이때 신자들은 '성모호칭기도'를 바치고, 마리아에게 장미화관을 봉헌하는 등 성모신심을 고취했다.

 

1854년 교황 비오 9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선포하면서 성모신심은 절정에 달한다 이후부터 성모를 위한 갖가지 행사가 유럽교회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여러 신학자는 성모성월과 관련한 서적을 내놓는다. 이 시기부터 성모성월 행사는 공적으로 거행되기 시작했다.

 

교회가 성모성월을 제정한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계시는 성모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다. 성모 마리아가 보여준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모범이란 것이다.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통해 평생 하느님 뜻에 순종한 성모처럼 하느님을 뵙기를 염원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바람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모의 삶을 두고 "하느님과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뤄주는 표지요 도구"(교회헌장 1항)인 교회의 전형(典型)이 된다고 가르친다. 한국교회도 성모성월 행사를 장엄히 거행하고 있다.

 

 

 

 

 

[2]성모신심의 방향성 "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과의 대담 "

     - 페터 제발트/정 종 휴 옮김(전남대학교 교수/법학)

 

 

1. 하느님의 어머니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연도 계산은 따지고 보면 한 처녀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가 1,28) 라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나자렛이라는, 이름도 없는 조그만 마을 출신이었으며, 어떻게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이 사건의 규모는 역사가 흘러가면서 비로소 제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천사와의 만남이 이루어지지요. 그 만남에서 곧바로 마리아는 매우 특이하고 신비한 복음을 전해 받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 앞에서 은총을 입어 성자의 어머니가 되도록 선택받았다는 것이었죠. 마리아에게 그것은 분명히 엄청난 순간이었습니다.

 

   2.  사람이 신의 어머니!

 

    사실 그것은 대단한 역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작아지시죠. 사람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잉태와 출생의 조건까지도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께 어머니가 있고 그럼으로써 진정 우리 역사라고 하는 양탄자 안에 직조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정말 그녀의 아이, 곧 사람의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네 안에는 세상의 주님이 계시단다.""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라는 표현에 대해 오랫동안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네스토리아파는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죠. 그녀가 낳은 것은 예수라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릴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사실 여기서 논란이 되었던 근본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의 합일이 얼마나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난 이가 바로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합일이며 그래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정도냐는 문제지요. 물론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인 그런 사람의 어머니라는 의미에서 그녀는 하느님의 어머니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마리아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이요 교회의 근원적 모습 또는 자비의 어머니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빛처럼 발산되는 이 마리아의 힘은 계속해서 수백 만의 사람들을 움직이고 감동시킵니다. 그러니 그 힘을 일상적인 자로 잴 수는 없겠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 과정은 점점 더 여성의 영광으로 이해되기도 하였습니다. 마리아 안에서 여성의 근원적 본질이 발현되어 있습니다. 바로 인류와 교회의 순수한 형상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시조모"(始祖母), 곧 최초의 어머니요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의 어머니로 불리는 최초의 여성인 하와가 근본적으로 죽음의 운명을 함께 낳았다면, 마리아는 부활하고 생명을 가져온 구세주를 낳음으로써 하와라는 말에 본래 들어 있던 그 의미를 완전하게 완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성과 여성의 생산 능력의 축복을 말하는 것이지요. 마리아는 그래서 생명이요 생명을 주는 이의 어머니가 되었고, 생명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3. 아베마리아

 

    마리아에 대한 천사의 인사가 가톨릭 교회의 주요 기도가 되었습니다. 모차르트, 로시니와 같은 인류의 위대한 음악가들 중에서 몇몇은 이 아베마리아를 음악으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사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루가 1,30) 이에 대해 마리아는 무어라고 하지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그래요. 마리아는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배웁니다. 이는 성서 전체를 통틀어 곳곳에서 마주치는 장면이거든요. 목동들에게서나 사도들에게서나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가까이 하심을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너무나도 위대하신 하느님의 숭고함과 거룩함 앞에서 말로 할 수 없는 하느님의 무량무한과 함께 자신의 왜소함,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서도 복음을 전하는 최초의 말로 이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여기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기려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위대함 속에서 작아지시면서 두려움을 주는 요소들을 스스로 버리십니다.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으로서 처음 하는 인사말에서 바로 이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두려워 마시오. 그리스도 앞에 무서워 마시오." 그것은 정말이지 전체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꾸준히 지속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혹여 우리에게서 무엇을 앗아가시지 않을까, 우리를 위협하시지는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것은 죽음마저 극복하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도인 아베마리아(성모송)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두 개의 부분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 하나는 천사의 인사 부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에서 이야기한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루가 1,42). 이로써 마리아 공경을 예언하기도 한 셈이죠. 그것은 성령 속에서 예언적으로 이야기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스스로의 위대함과 선함을 몸소 보여 주신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을 통해 다시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4. 추기경님의 경우 개인적으로 마리아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십니까?

 

    하느님께서 가까이하심이 드러난 표징입니다. 마리아를 통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하느님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에게 사람의 어머니가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 이 어머니께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몹시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박히신 분이 요한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주시면서 하신 말씀은 당대의 순간을 넘어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써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는 사람들에게 신뢰감과 다정한 느낌이라는 특별한 차원을 열어 줍니다. 아울러 그 기도로써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관계가 열립니다. 저 개인적으로 처음에는 강한 예수 중심주의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쪽 친구들과의 대화로 그것이 더 강해지기도 하였죠. 하지만 전례상의 성모 축일을 넘어 5월의 성모성월, 10월의 로사리오 성월, 순례지 등 - 그러니까 마리아 신심 - 이 제게 점점 더 큰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이 천주의 모친 마리아가 제게 점점 더 중요하고 가깝게 느껴집니다.

 

    복음서에서는 마리아가 그리 자주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 생애의 중요한 순간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등장한다 하더라도 그다지 긍정적인 모습이나 사랑 받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복음서 전통에서 마리아가 대단히 주변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옳은 지적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경우 이 어머니는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조차 여기서는 요셉의 입장에서 기록됩니다. 살아 생전 마리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신중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정을 세우셨고, 그 가정에서 그를 잉태하여 낳아서 젖을 먹여 길러 준 이 여인이 찬양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가정으로 지금까지의 가족 관계의 모습을 고쳐 바로잡는 것입니다. 이 가정에서 예수님께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가족의 친밀함과 모성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를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3,35)라고 설명하십니다. 따라서 단순히 인간적 가족 관계를 벗어나서 새로이 세워야 할, 하느님의 의지를 갖춘 위대한 공동체 가족으로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는 루가는 이 말씀을 문학적으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 및 엘리사벳과의 만남과 연결지었습니다. 거기서 마리아는 육신적 차원의 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의 공동체 안에 서서 말씀을 듣고 신앙하는 어머니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루가 복음에 따르면 마리아는 모범적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5. 다른 여성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정하고 친근합니다. 그에 반해 정작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거칠고 무뚝뚝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나의 결혼식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손님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도록 어떻게 좀 해 보라는 어머니의 요구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요한 2,4)라고 대꾸합니다. 정말 자신의 어머니를 그렇게 심하게 대했던가요? 또 경우에 따라 인연을 끊는다고 선언했을 법도 한데요?

 

    요한 복음에 나오는 구절을 말씀하시는군요. 마리아에 대한 성 요한의 관점은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뒤늦게 씌어진 그의 복음서에서 이 어머니의 역할은 마태오 복음의 경우보다는 훨씬 더 분명하게 다루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를 때면 언제나 '부인'이란 말이 사용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종의 신학적 인물상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가 그저 '기네'(gynae), 곧 '여인'으로 불린다면, 가나에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사사로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역할로 접어들었다면 이미 여기서 새로운 하와의 모습이 비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말하지만 복음서의 구절들은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읽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이 경우 십자가 장면을 가나의 혼인 잔치 장면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당신의 시간 - 십자가에서 - 에 새로운 가정이 시작되기까지는 우선 당신의 가족을 벗어나고자 하시며, 그 새로운 가정에서 마리아가 새로운, 근본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맡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나에서도 겉보기에 매정해 보이는 이 말이 우선은 거절을 한 듯 보이지만 이 말 역시 매우 다층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으로 나타내시고자 한 것은 당신의 시간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여 가족적인 일에 매달릴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한편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면서 당신의 시간을 이른바 선취하시어 보여 주십니다. 바로 어머니의 청, 곧 중재에 따라서 말이지요. 우선 마리아는 거부를 통해 본연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동시에 이미 간구하는 교회의 원형으로서의 여인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교회는 이제 마리아처럼 예수님 시간의 선취를 간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텍스트는 매우 깊은 의미를 함축한 것으로 많이 생각하고 또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잠시 이 높은 신학의 고지를 내려가기 위해서 제게 마리아의 그런 모습을 떠올리게 해 준 어떤 만남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바이에른에 있는 알트외팅이라는 순례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추운 날씨였는데, 저는 커다란 광장을 가로질러서 (검은 옷의 성모상으로) 유명한 은총의 경당에 들어갔습니다. 그 조그만 공간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방 여기저기에 촛불이 타고 있었지만 그래도 좀 침침하였습니다. 예배당 안에는 거의 여자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를 드리고 아름다운 살베 레지나도 함께 불렀습니다.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처음에는 사람들이 좀 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노래는 대단히 아름다웠습니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갑자기 그 여인들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노랫말이 이상하게도 생생하게 마음에 파고들면서 아름답게 들렸던 것입니다. 그 노래에는 감동시키고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열쇠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태고의 기도와 축복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그 아름다운 감정에서 들려오는 말이었습니다. '너를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너와 함께 있으니. 그는 너를 몹시 사랑한다. 너를 이해하지. 그래서 네가 정말 고되고 힘들 때엔 와서 네 옆에 서서 너를 도와주리라.'


    6.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받은 느낌은 사람의 약한 곳을 직접 어루만져 줄 뿐만 아니라 기름을 부어 주기도 하는 그런 말씀이 정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마리아 공경에는 신앙의 성스러움과 그 신비의 상당 부분을 떼어내 버리려 하거나 아니면 이미 떼어내 버린 교회의 노선에 대한 자기 방어의 모습도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강단의 교수님들의 종교에 반대하는 단순, 소박한 사람들의 경건한 자기 방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충분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마리아의 형상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한편으로는 마리아의 형상 안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또 마리아를 아주 가까이 느끼는 여성들의 마음이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어머니와 동정녀에 대한 감수성을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남성들의 마음에도 감동을 줍니다. 마리아 공경은 전체 그리스도교에서 심장의 고동 소리와도 같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가 신뢰의 종교, 포근함의 종교로 다가오게 되지요. 그리고 이 순수한 자연에 가까운, 소박한 기도 속에서 온 백성들의 경건함이 자랐고 그러면서 한시도 항상 새롭고 항상 현재화하는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자연적이고 소박한 기도를 신앙 속에 지켜온 것은 기도 속에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을 가까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가까이 느껴져 더 이상 종교가 짐이 아니라 우리를 지켜 주는 신뢰요 우리 삶을 살아가는 것을 도와주는 힘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지요. 그 밖에 다른 기도들도 한번 생각해 볼까요? '자모신 마리아, 저와 함께하소서.' 얼마나 깊은 신뢰감이 공명하고 있습니까?한편 그와 달리 그리스도교에 일종의 경건주의적 풍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얼어붙을 정도로 냉기가 도는 합리화 같은 것입니다. 감정을 끊임없이 절제하고 정화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교수님들의 역할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감정이 단순한 감상주의로 퇴색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발 아래 현실이라는 토대가 사라져 버리고 하느님의 위대성조차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계몽주의 시대 이래 -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새로운 계몽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 합리화나 엄숙주의화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거대한 흐름을 겪어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이러한 흐름에 거역하고 오히려 성모님께 대한 경배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위대한 영국의 추기경 존 헨리 뉴먼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마리아 공경을 예수에 대한 침해로 간주하는 데 익숙해 있다."라고 쓴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회의주의자들은 도를 넘어선 마리아 공경이 그리스도교의 본래 핵심, 곧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를 밀쳐 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사람들이 항상 접해 왔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길을 열어 준 것이 바로 어머니였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남아메리카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곳에서의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스페인 사람들의 칼을 통해 부분적으로는 치명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멕시코에서는 처음에 선교라는 것은 도저히 생각도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과달루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요. 어머니를 통해 갑자기 그 아들까지도 친근하게 된 것이죠.

 

그것은 성모상에 관한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과달루페의 성모 발현은 절대적인 분기점이 되었으며 그 사건 없이 남미 대륙의 그리스도교화는 생각할 수 없었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그리스도교가 정복자의 잔인한 얼굴이 아니라 어머니의 자애로운 얼굴이 된 것입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국민적 경건함의 불을 지피는 두 가지 연소점이 타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성모에 대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와의 동일시입니다. 이 두 개의 모습 속에 신앙이 저절로 드러나며, 그 속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정복자의 신이 아니시라 진정한 하느님이시요 동시에 그들의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마리아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그들을 우리의 합리주의적 시각에서 그리스도교를 잘못 물들인다고 비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마리아 공경에서 그들은 올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마리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며 파괴자의 편에 서지 않으시는 진정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이른바 식민지 종교로서 억지로 받아들일 필요 없이 그들 나름의 이해와 시각으로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마리아를 이미 오래 전에 신앙에서 축출해 낸 듯 보입니다. 루터 자신은 마리아 공경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었지만 마리아는 개신교에서는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마리아의 신화는 결코 어떤 마술도 또 부수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의 정수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심지어 확고부동한 진리의 봉인을 갖춘 도그마로서 보장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신화란 단어에 대해 말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단어가 실제 사실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대로 신화란 단어를 사용해도 좋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결코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라는 점입니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거기서 청교도적인 경향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은 사실 제대로 보신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인가를 앗아 가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개신교의 발전 과정에서 "솔루스 크리스투스"(그리스도 유일 사상)가 그런 식으로 극단화되어 그 둘, 곧 그리스도와 마리아 사이에 어떤 경쟁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남아메리카의 예에서 보았던 것처럼 어머니의 얼굴에서 그리스도 얼굴의 진정한 면모가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말씀들로 그것이 분명해진다는 사실을 보지 않는 것이지요.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도 수줍은 듯 머뭇거림이 없지 않지만 마리아의 형상을 다시 신앙 속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가 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복음에서 여성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인류학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학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나 그리스도교의 한가운데에 여성이 자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리아와 성녀들을 통해 여성적인 면이 그리스도교 종교의 핵심에 속한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와 마리아를 경쟁 관계로 설정하여 생각하는 것은 두 인물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것은 경쟁이 아니라 더욱더 심오한 차원의 가까움입니다. 어머니이시며 동정녀이신 모습은 그리스도교적 인간상에 본질적인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7. 도그마  마리아와 관련하여 바리게이트처럼 장벽을 치거나 비웃음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은 어떤 공포감 같은 것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잠시 마리아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 도그마들을 살펴보았으면 하는데요. 우선 가장 논란이 많으면서 도발적인 면도 가장 큰 도그마, 곧 553년도에 나와 영원히 간직된 동정성의 도그마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차원의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어떤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앞에서 예수님의 형제자매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이미 짧게 언급한 바 있었지요. 그리스도에게 친형제와 친자매가 있었고 마리아가 예수님 이후 다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히려 이 아들과의 관계의 특별함과 유일무이성 그 자체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그 형제자매라는 개념이 씨족적 범위에서만 제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적합한 부름을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누구에게도 속할 수가 없습니다.

   

8. 어째서 그렇지요?

 

    무엇보다 예수님의 출생 자체 역시도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손수 섭리하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그렇다면 이 과정에 생물학적인 것이 개입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생물학적인 것을 하느님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어떤 것으로 제쳐두려고 한다면 그 역시 다시 마니교적 행태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어쨌든 역시 생물학적 존재이기도 하거든요. 아울러 만일 예수님께서 육체적, 생물학적인 면이 함께 결부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마리아를 경시하고 밀쳐 내는 것이고 다시 그렇게 되면 결국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심은 하나의 거짓 눈가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러한 상투적인 의견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며, 그것이 바로 그런 주장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 곧 물리적, 생물학적, 물질적 생명까지 취하심으로써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신 것입니다.


    교부들은 이 점에서 아주 멋진 비유를 찾아낸 듯 싶습니다. 다름 아니라 에제키엘서 40장에서 새로운 성전의 모습에 대한 비전이 하나 나타납니다. "동쪽 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이지요. 오직 임금만이 그 문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교부들은 거기에서 하나의 비유와 상징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전제로 삼았던 것은 그 성전이 살아 있는 성전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살아 있는 교회인 것이지요. 그분께서 통과하여 들어오신 그 문은 이제 다른 어느 누구도 들어설 수 없다고 할 때, 그 문이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 또는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 다시 일상인, 보통의 사람으로 되돌아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임금에게만 속할 수 있는 이 성문의 유보적 특징 속에 마리아 역시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역사상 진정한 문이 되어 그 문을 통해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9. 그러니까 동정녀의 출산은 문자 그대로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1854년에 선포된 동정녀의 무염 시태의 도그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요?

    그 배경에 있는 것이 바로 원죄론입니다. 이 이론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다 우선 죄와 연루된 맥락에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관계의 장애"라고 말했던 바로 그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점에서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에 대한 관계에서도 애초부터 장애를 갖고 있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발전해 오면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런 생각이 싹터 자라났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하느님의 문으로 점지된 그런 사람들, 곧 하느님께 특별한 방식으로 봉사하도록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원죄라고 하는 맥락 속에 얽혀 들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그런 생각입니다.


    중세에는 이 문제를 두고 엄청난 논쟁이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도미니코회가 "아니다. 마리아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다. 따라서 역시 원죄를 타고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반대 입장에 선 것이 프란치스코회입니다. 이들 사이의 격론에서 서서히 다음과 같은 인식이 형성됩니다. 곧 그리스도에 대한 마리아의 소속성이 아담에 대한 소속성보다 더 크고 강하다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마리아의 관계는 미리 정해진 것이었고 -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보다 앞서시고 하느님의 생각들이 처음부터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이죠 - 그것이 바로 마리아의 일생을 실질적으로 특징짓는 것입니다. 마리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리아는 이 원죄의 맥락 속에 쓸려 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느님과 마리아의 관계에는 장애가 없고, 처음부터 특별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시야에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바라보셨고"(성모 찬가) 마리아에게 당신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마리아의 특별한 소속성은 마리아가 바로 특별한 은혜 속에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라는 처음에 그렇게나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천사의 말이 이제는 그 은혜가 근본적으로 마리아의 전 생애를 포괄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마리아 한 분만을 위한 특권이 주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연결되는 희망이 마련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도발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몸을 가지고 천국에 들었다는 도그마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뒤늦게 1950년에 와서야 확정된 도그마였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애초 마리아의 무덤이나 그 밖에 다른 어떤 유물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도그마가 무엇보다 우리에게 어렵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 천국에 몸과 같은 것이 자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욱더 모르지요. 그렇게 볼 때 이 도그마는 천국이 무엇이며 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크나큰 숙제를 마련해 준 셈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며 인간의 미래 전체에 대한 이해 등의 관점에서 볼 때 말입니다.

 

    10. 추기경께서는 개인적으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요?

 

    이 문제에서 내가 도움을 받는 것은 바로 성 바오로가 전개한 세례의 이론입니다. 여기서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게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에페 2,6)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례를 받은 자로서 우리는 이미 우리의 미래를 선취한 것이 됩니다.


    이 도그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례가 우리 모두에게 작용하는 바 그것, 곧 "하늘에서"(하느님은 곧 하늘이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자리를 잡고 앉는다")이 마리아에게서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세례(그리스도와 함께함)가 그 완전한 효력을 내게 되었다 함이죠. 우리의 경우 부활하신 분, 그리스도와 함께함이 아직 불완전하여 깨지기 쉽고 몹시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그렇지 않아요.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완전한 합일에 이르렀기 때문이지요. 이 완전한 합일에 포함되는 것이 바로 새로운 몸의 특성이며,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도그마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마리아가 완전히 하느님과 함께한다, 완전히 그리스도와 함께한다. 곧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11.  가톨릭 교회에서 마리아를 "공동 구속자"로 격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느 덧 백만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요구를 결국 받아들이게 되나요, 아니면 그것이 그릇된 믿음일까요?

 

    그 지지자가 수백만에까지 이른 주장이지만, 조만간에 이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신앙교리성에서 천명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이 주장에서 요구되고 있는 바는 이미 더욱더 적절한 방식으로 마리아의 다른 호칭 속에 들어 있다는 것, 그에 반해 "공동 구속자"라는 표현은 성서며 교부들의 말씀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라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점이 옳은가? 글쎄요, 궁극적으로 옳은 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 어디에 계신다거나 우리와 별개로 떨어져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깊고도 새로운 차원의 합일, 공동체를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 속해 있는 모든 것은 우리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이시어 당신의 것이 되도록 하십니다. 이러한 위대한 친교야말로 구원의 진정한 내용입니다. 우리 자신을 절제해 하느님과의 합일로 들어가는 바로 그것이지요. 마리아는 그런 것으로서의 교회를 선취하였고 이른바 인격체 속에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공동"이란 의미는 이미 그 안에서 모범적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공동"이란 말에서 그리스도의 "먼저 - 우선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에페소서와 또 골로사이서에 특별히 기록되어 있듯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며, 마리아의 모든 것 역시 바로 그를 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2. 기적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처럼 공경받는 인물도 없습니다. 수많은 성당이며 제단들, 노래와 의식, 성모 축일과 순례지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수천을 헤아리는 성모 순례지가 마치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신경망처럼 전세계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성모 마리아처럼 기적을 그렇게 많이 일으킨 인물도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마다 수많은, 불가사의한 사건들에 대한 증인이며 그것을 기록한 문서들로 가득합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성모 마리아에게 대단한 기적의 능력이 있는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마리아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희망을 잃는 일이 없으리라."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추기경님, 이 모든 기적들이 실제로 일어난 현실인가요?

 

    그 하나하나를 일일이 확인하여 규명할 수는 없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기적이라 특징지을 수 없는, 기막힌 우연들이 짜 맞추어진 경우도 많습니다. 어떻든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성모님을 향한 사람들의 특별한 신뢰감이 표현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방금 헤아리신 실제 일어난 그런 일들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를 통해 아드님의 신비와 하느님의 신비가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나 열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성모님을 특별히 신뢰하는 원인이죠.


    성모님은 말하자면 하느님께 이르는 열려 있는 문입니다. 사람들은 성모님과 대화하면서 아무 스스럼이 없고 어린아이처럼 응석도 부리고 무조건적인 믿음을 표현하게 되는데, 보통 그리스도께는 그렇게 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이 네트워크처럼 짜여진 순례지에서 발현하셨다 함은 바로 그런 곳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이중적인 사실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산도 움직이는 신앙인 것입니다.


    엄격한 기술적인 의미에서 실제 기적이 얼마나 일어나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대단한 신뢰가 실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 신뢰에 대답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신뢰 속에서 신앙은 생생히 살아 있기에 물리적인 것, 일상적인 것에까지 그 힘이 미쳐 거기에서 이 성모의 자애로움에 들어 있는 권능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이 실재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파티마의 예를 한번 보겠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파티마의 주인공들을 2000년 5월 13일 복자로 선언하셨습니다. 1981년 5월 13일 베드로 광장에서의 암살 기도에서 살아난 뒤 요한 바오로 2세 스스로, 그것이 파티마의 성모에 의한 기적 덕이었다고 직접 말한 바 있습니다. 심지어 그 만남이 자신의 전체 교황 직위의 임기 동안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는 말도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죠? 1917년 5월 13일 점심 무렵에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포르투갈의 작은 마을에서 세 명의 목동-루치아(10세)와 그의 여동생 히야친타(7세) 그리고 남동생 프란치스코(9세)-이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너도밤나무 위에 밝은 빛이 나타났는데 그 빛이 "매우 아름다운 부인"을 감싸고 있었다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 부인이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복음을 알리려 한다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말하자 처음에 사람들은 세 아이를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해 10월 13일에는 대략 70,000명의 사람들이 이 복음의 진위를 검증하려는 증인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 진기한 사건은 점심 무렵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쏟아지던 비가 한순간에 갑자기 멈추었습니다. 구름들이 흩어지고 갑자기 나타난 해가 마치 불 바퀴처럼 그들 주변을 엄청난 속도로 돌기 시작했습니다. 나무들과 사람들이 갑자기 환상적인 빛 속에 떠오르게 되었지요. 떼로 모여 있던 사람들은 아비규환에 빠졌습니다. 한순간에 태양이 떨어져 내려 그들을 덮칠 듯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순수한 자연과학적 시각으로 볼 때 그 10월 13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지 않았는지 실험 결과 알아내듯 그렇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사람들이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순간을 맞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특별한 어떤 것임을 그들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이들에게 태양이 그 뒤에 숨어 있는 비밀에 대한 어떤 징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태양의 옷을 입고 달 위에 서 있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우선 구약과 신약을 통합하는 하느님의 백성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특별한 방식에서 마리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여인이 옷으로 입고 있는 태양은 세상의 진정한 빛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 안에는 그리스도와의 파격적인 연결 관계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 되죠. 달은 무상을 비유하는데, 그 여인은 그 달을 발 아래 밟고 있습니다. 이 비유 속에서 우선 사람을 무섭고 놀라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거대한 위대함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 위대함은 다시 위안을 주는 힘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파티마 또는 루르드나 과달루페 등지로 순례하는 사람들은 그 성지에서 발산되는 위대함과 함께 위안을 주는 힘과 구원을 주는 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유명한 '파티마의 비밀'을 다루지 않고서는 파티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1917년 예언을 전한 아이들이 들었다는 그 메시지 말입니다. 첫 번째 '비밀'은 지옥을 들여다본 것이었습니다("너희들은 가여운 수많은 죄인들이 가게 되는 지옥을 보았노라"). 두 번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물론 ("주님을 욕보이는 일을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새로운, "더 끔찍한" 전쟁이 뒤따라 일어나게 되리라고 하였지만 말입니다. 그 안에는 러시아의 변화에 대한 예언도 함께 들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성모 발현 기념 미사를 집전하는 가운데 러시아의 변화를 밝혔습니다. 그러고 1년 뒤 고르바쵸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이끌었고 다시 10년 뒤 철의 장막은 무너졌습니다.


    세 번째 비밀에 대해서는 여러 해 동안 온갖 설이 무성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비밀 안에 아포칼립스, 곧 세계의 종말이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교회의 몰락에 대한 예언이 담겨 있다는 식이었죠. 또 그 메시지가 오직 해당 교황 신변에 관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공표되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교황의 세 번째 파티마 방문에서야 비로소 교황은 직접 그 비밀을 벗겨 주었습니다. 그때 소다노 추기경이 교황의 명에 따라 그 비밀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발표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예언을 전한 세 명의 아이들이 받았던 비전에 따르면 "하얀 옷을 입은 주교가 총을 맞고 바닥에 넘어졌는데 죽은 것 같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저격의 예언이었다는 것이죠.


    사실 파티마에서 전해진 메시지는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예언을 전한 세 명의 아이들은 그것을 "나는 사랑을 전하는 로사리오의 여왕! ......나는 사람들이나아지라고 온 것이니. 주님을 욕되게 하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라고 정리했습니다.

 

    정말로 메시지 자체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리고 셋 중에 유일하게 아직 살아 있는 루치아는 언제나 그 간단함에 가치를 두었고 또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함께 이야기된 다른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란 것이었죠. 저 역시 루치아 수녀님과 잠깐 이야기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때 수녀님은 아주 분명하게 힘주어 "사람들에게 그것을 말하세요!"라고 했습니다.


    수녀님은 우리가 처음 보았던 천사들은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을 익히게 하였고, 전체 메시지의 내용은 우리가 이것을 배워 내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를 정화시키는 동시에 회개하도록 하시는 것이죠. 회개는 바로 우리 삶의 자세를 내적으로 고쳐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지고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뿐인 눈앞의 세태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회개는 바로 방향을 바꾸어 돌아오는 것,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스스로를 내어 주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되고 그래서 다시 믿음을 전제로 하여 소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 성모 발현의 모든 현상들은 그것이 믿을 만한 신빙성을 가지고 있는 한에서 어떤 무엇인가를 복음서에 따로 덧붙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호기심을 충족시키자는 것도 아니요 센세이션이나 그런 어떤 것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우리를 단순한 것, 본질적인 것으로 이끌어 되돌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단순한 것과 본질적인 것을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리곤 하죠. 온갖 문제점 투성이로 복잡한 것이 오늘날인데, 바로 이때 그리스도교 자체가 너무나 복잡하게 보여서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때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하고 간단한 중용으로 인도되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고 마음을 돌이키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밖에 신앙교리성에서는 2000년 6월 26일자 기자 회견을 통해 이른바 파티마의 세 번째 비밀의 완전한 내용을 공개하였습니다. 동시에 신앙교리성은 세계 수많은 언어로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였습니다. 그 책자에는 루치아 수녀님이 친필로 쓰신 텍스트를 복사한 것도 들어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책자 내용에 빠진 것이 없다는 완전성과 신빙성을 두고 더 이상 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죠. 이 책자에는 환상처럼 보았던 그 사건의 진행 과정은 물론 루치아 수녀님을 통해 그 사건에 관해 글로 작성된 과정들 그리고 세 번째 비밀에 담겨 있는 섭리 등이 세심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밖에 조금 전에 언급하신 소다노 추기경의 인사말도 들어 있습니다. 저 자신도 그 텍스트의 해석을 위한 작업에 힘을 보탰습니다. 이 책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니까 여기서 잠깐 정리해도 될 것 같습니다.


    환상에 보인 것은 하얗게 입은 주교(그 주교가 교황이었다는 사실은 예언을 전한 세 아이들이 직접 확인하였습니다)가 십자가가 꽂혀 있는 어떤 언덕 위로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길은 반쯤 파괴된 도시를 가로질러 갑니다. 주교들, 사제들, 평신도들에 이어 마침내 교황까지 죽임을 당합니다. 하지만 죽임을 당한 이들의 피는 천사가 거두게 되고 세상은 끔찍하게 변합니다. 이 텍스트 속에서 우리는 20세기에 일어난 여러 순교자들에

대한 교회의 비전이 축약되고 상징적인 그림 속에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리카르디 교수(성 에기디오 공동체의 의장)는 우리 세기에 이런 저런 독재 정권 하에서 순교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책을 펴냈는데, 이 예언에서 나타난 모습을 매우 인상적인 방식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는 듯 싶습니다. 그렇지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그 비밀의 전모를 볼 때에만 비로소 핵심적인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를 알리는 소리이며 동시에 이 예언이 피할 수 없는 숙명적 결정론으로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이미 쓰여진 것으로 더 이상 변화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 이야기로 남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회개가 그 비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전체의 비밀은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극적인 부름입니다. 스스로를 변화시킴으로써 역사의 흐름을 변화시키라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비밀의 텍스트는 요한묵시록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교황이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도를 통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루르드도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순례지의 중심으로, 메카보다도 더 큽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스의 피레네 산맥 속에 환상에 젖은 듯 고요한 곳이지요. 사람들 말로 성모 마리아가 1858년 2월과 7월 사이에 열여덟 번이나 모습을 나타내고, 그러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저 평범한 방앗간집 딸이 변화하는 모습을 함께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얀 옷, 새하얀 면사포에 푸른 허리띠를 두르고 발에는 노란 장미가 달린 귀부인의 모습이었어요."라고 벨라뎃다는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성모님의 분부에 따라 맨손으로 조그만 샘을 팠던 그 자리에서 그때부터 매일 122,000리터의 성수가 솟아나고 있습니다.


    유다인 작가 프란츠 베르펠은 맹세하길, 나치로부터 벗어나 구함을 입는다면 이 벨라뎃다의 생애를 소설로 쓰겠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정작 본인인 벨라뎃다의 주변은 곧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죽음에 임박하여 그녀는 "보세요, 제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답니다. 동정녀께서 저를 잠시 빌려 쓰신 것이지요. 그러고 난 다음에는 저는 다시 구석에 조용히 있었습니다. 거기가 바로 제 자리인 것이죠. 거기서 저는 행복했고, 그렇게 거기 머물렀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루르드의 이야기는 제 개인적으로 특별히 깊은 감동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베르펠의 글에서 저도 정말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내적인 공감 속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 갔어요. 그는 유다인 민족에 대한 연대감 속에서 가톨릭 신자가 될 마음은 없었다고 하지만, 벨라뎃다와 더불어 내적으로 성모님을 보았고 성모님을 신뢰하고 또 마음으로 귀의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 점을 두고 구구하게 따지고 들 일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 평범하고 소박한 소녀는 자기 자신에게서는 내적인 위대한 순수함 외에 달리 내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소녀가 합리주의의 세기, 주위가 온통 고약스럽고 반교회적인 합리주의에 젖어 있는 시대, 거기다 교회의 권위조차도 회의적이고, 물론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그런 어떤 차가운, 얼어붙을 지경의 정신적 풍토 속에서 성모님의 얼굴 모습을 세워 모실 수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살아 숨쉬는, 구원의 힘이 있는 성수의 표식 속에 동시에 창조를 구원하는 구원의 힘을 위한 마리아의 표시도 함께 보여 줍니다. 창조가 성모님에 의해 새롭게 일깨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합리주의적, 아니 달리 말해서 바로 이 합리주의적 맥락 속에서야말로 단순한 영혼이 혜안의 영혼이 되고, 그리스도교를 다시금 마음의 종교로, 구원의 현실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그 사실이 위대한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 신비"를 접할 수 있는 접점을 찾는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또 대단히 긍정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 성수 속에서 사람들은 세례라고 하는 위대한 구원의 성수를 새삼 돌이켜 생각해야 합니다. 세례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진정한 새로운 샘물입니다.

 

    자선

    성서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 2,14) 마태오 복음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드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정의 속에 일종의 통장을 가지고 계시다가 어느 날엔가는 결산을 하시게 되리라고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5,40). 따라서 믿음이란 것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기에 교회는 복음서에서 일곱 가지 신체적인 자선 행위들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아 주는 것, 갇힌 이를 구하는 것, 아픈 이를 돌보아 주는 것, 죽은 이를 묻어 주는 것.

 

    맨 처음 말씀은 야고보서에서 나온 것으로 유다 그리스도교적 색채가 몹시 강합니다. 야곱은 예루살렘의 주교였거든요. 그가 교회사에서 대변했던 그리스도교 형식은 신앙이 일상 생활 속에 구체화되는 것, 신앙이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는 것, 신앙이 실천 속에서 스스로 입증되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말씀은 복음서에 직접 나온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 최후의 심판의 비유를 보여 주는데, 주님께서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들과 동일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는 가난한 자 속에서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에서 하나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 말씀은 교회 역사 안에서 거듭해서 새롭게 불붙곤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지요. 멸시받는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만나는 바로 그 순간 그들 속에서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비유의 말미에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형식의 베풂에 대해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 주님께서는 이로써 가련한 사람들의 유형학을 소박하게 제시하셨고, 그리스도는 바로 그 유형들을 통해 이 세상에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죠.

 

  14.   이러한 자선 행위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준다." 입지 않는 헌옷을 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겠지요?

 

    물론 이 말은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헌옷 모으기도 물론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면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사소한 것들이라도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바로 사람이 원칙 속에서만 사랑하고 때때로 돈을 송금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눈을 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겠지요. 꺼림칙한 게 무엇인가가 어긋난 것 같을 것입니다. 강도를 맞은 사람을 지나쳐 가는 사제와 레위 사람들을 한번 볼까요? 아마도 그들에게는 중요한 약속이 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이 끔찍한 지역에 너무 오래 머물다 보면 자신들한테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엄습했을지도 모르지요. 이유는 언제 어디에나 다 있는 법입니다.


    신체적인 자선 행위의 선행 범주도 물론이지만 예수님의 이 최후의 심판 비유는 아주 구체적인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저 추상적, 보편적으로 전체 인류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내가 불쌍한 사람을 만나는 바로 거기서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하더라도, 하필 그때 시간이 없더라도 또 그에 필요한 수단이 내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말입니다. 하나하나 구체적인 경우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 거창한 사업만이 필요한 것이 아닌 것이죠.


    바로 그 점에서 그리스도교에서 요구하는 사랑은 거대한 계획에만 몰두하여 구조적 변화를 추구한 나머지 개별적인 경우들은 지나치고 마는 마르크스주의와 구별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거꾸로 좀 더 큰 질서, 규모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만 하며, 다시 말해 개별적인 자선이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개별 사안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더 나은 가능성들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교회에서 복지 시설들이 생겨난 것이고 아울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학교들이며 그 밖에 많은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 점에서 두 가지는 함께 엮이는 것이지요. 정말 바로 내 이웃을 살피는 시선, 그것은 내가 아무리 커다란 구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부당한 구조들을 극복하는 일과 아울러 이른바 옷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구조적인 도움도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입니다.

 

    육체적인 자선 행위 말고 정신적인 자선도 7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회의에 빠진 이에게 조언을 주고, 무지한 이에게 가르침을 주고, 죄지은 이를 바른길로 이끌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고, 내게 주어진 부당함을 용서하고, 성가시게 하는 이를 참을성 있게 견뎌 주고,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중요한 점은 자선 행위가 물질적인 것에만 관련지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질적인 면만 신경 쓴다면 우리가 베푸는 것이 너무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 원조에서도 멀리 내다보는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들을 교육하여 그들이 자신의 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모셔다 드리는 것은 그만큼 더 중요한 일이겠지요. 도덕적인 기준을 세워 주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자선 행위 중에서도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그 중에 한 가지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무지한 이에게 가르침을 주어라." 제 생각에는 그 당사자는 보통의 경우 그러한 가르침을 주는 것을 자선 행위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개발 원조를 다시 살펴보기로 하지요. 여기에서는 교회뿐만 아니라 좌익 그룹들도 사람들에게 글을 깨우쳐 주는 것을 자신들의 핵심 사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무지한 이상 그들은 계속해서 종속적이고 의존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들 스스로 이러한 상태, 일종의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어야 비로소 그들은 제대로 도움을 받는 것이 됩니다. 이제 그들은 남과 동등한 상태가 될 수 있고 자신들의 나라, 자신들의 사회를 제대로 발전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에게서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말이 또 전적으로 이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하여 정신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오늘날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에 대한 열쇠를 얻게 된다고 말입니다.


    전에 유럽에서 있었던 그 비슷한 운동들, 이를테면 프랑스에서 빈민 학교를 세웠던 장 밥티스트 드 라살 성인을 생각해 보더라도 그 대상은 바로 수세대에 걸쳐 그때까지 종속적이고 의존적인 상태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로, 그들에게는 배울 수 있다는 것이 그야말로 대단한 기회였습니다. 배움의 기본적 기회는 정신적인 것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을 여는 것으로 정신적 자선 행위의 기본적인 과업입니다. 물론 그저 단순히 읽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정신적인 맥락 속에서 읽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단순히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의 길까지 열어 준다는 것과 결부되어야 하겠습니다.

 

    묵주기도

 

   15.  성모 마리아의 신비와 직접적으로 결부된 것이 바로 가톨릭 교회만의 독특한 기도인 묵주기도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끈에 구슬을 꿰어 놓고 그것을 한 알 한 알 짚으며 기도하는 일종의 연도입니다. 성호경으로부터 시작하여 마리아와 예수님을 연결하며 그 근본적인 면에서 전체 신약을 집약시켜 놓은 다섯 가지 "신비들"을 세 번 암송하게 되지요. 위대한 사상가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이 기도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며 그 영적인 힘을 깊이 존중해 왔습니다. 오늘날 묵주기도는 어떤 이들에게는 거북할 정도로 구태의연한 것으로 생각되는가 하면, 일상 생활에서의 도움은 물론이요 더 나은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초월적인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일정한 기간이 필요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이를테면 티벳의 불교도들이 명상을 배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어쩌면 백 번이고 만 번이고 묵주기도를 드려야만 할 것도 같습니다. 그러고 나면 그 기도가 저절로 이루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꾸로 사람들은 이제 좀 더 자신을 잘 알기 시작하고 자기 고유한 정체의 중심, 핵심을 발견하기 시작하겠지요. 추기경님께서는 묵주기도의 비밀이 어디 있다고 보시는지요?

 

    묵주기도의 역사적 기원은 중세 시대입니다. 성가를 부르는 것이 일상적인 기도였던 시대였지요. 하지만 성서의 시편이 당시 글을 모르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전달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맞는 미사용 시편을 구하게 되었고 그때 찾게 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담긴 비밀과 함께 결부되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였습니다. 그것이 꼭 줄에 꿴 진주알 같았지요. 사람들은 그 묵주알을 명상하듯 어루만지는데, 그것을 반복하는 가운데 영혼이 안정을 찾게 되고 말씀과 특히 성모 마리아의 모습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모습들에 더욱더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말씀이며 모습들이 영혼을 더욱 편안하고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비전을 선물합니다.


    정말로 이 묵주기도는 우리에게 근원적인 지식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바로 반복이야말로 기도와 명상에 속하는 것이요, 반복이야말로 고요의 리듬 속에서 사뿐히 침잠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엄격하게 합리적으로 따지며 매달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반복과 태연한 균형 속에 그대로 몸을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내게 위대한 형상들이며 비전을 가져다 주는데 무엇보다도 바로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모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며 영혼 속으로 들어간답니다.


    중세 때의 일반 백성들은 정말 힘들게 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도 아직 이렇다 할 지적인 길을 실천할 수 없는 형편이었죠. 거꾸로 그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그들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그들을 온갖 걱정거리들에서 벗어나게 하고 위안과 구원을 보여 주는 그런 기도였던 것입니다. 종교사에서 이러한 근원적인, 시원적인 체험은 바로 반복, 리듬, 함께 입을 맞추어 하는 말, 곧 합창의 체험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방 안 가득 리듬을 채워 나를 그 위에 태우고는,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고 아늑하게 해 주고 위로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근원적 체험이 성모 마리아의 맥락 속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는 가운데 아주 단순하게 기도를 드리고 그러면서도 그 기도가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는 가운데 이 묵주기도는 그야말로 온전하게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지적인 것을 넘어서서 영혼의 리듬 속에서 말씀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16. 묵주기도를 바치는 데 나름의 특별한 방법을 가지고 계신지요?

 

    제 방법은 아주 단순한 것으로, 저의 부모님이 하시던 그대로입니다. 두 분은 묵주기도를 무척 좋아하셨지요. 나이가 드실수록 그 사랑은 더해갔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정신 집중이 많이 요구되는 큰 일들을 해내기 어려워지고, 다른 한편 그럴수록 내면적 안식과 교회의 기도 속으로 함께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죠. 저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똑같이 합니다.

 

    17. 그런데 어떻게요? 묵주 기도 한단만 바치시나요? 아니면 세 가지 신비를 한번에 다 하시나요?

 

    아닙니다. 세 가지 신비는 저에게 너무 많아요. 그러기에는 제정신이 너무 혼란스러워요. 다하면 제가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저는 한가지 신비만 바칩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그중에서도 두단 혹은 세단만 바칩니다. 왜냐하면 격무에서 벗어나 잠시 쉴 시간이 제게도 필요하거든요. 고요히 있으면서 맑은 정신을 다시 가다듬을 필요가 있어요. 5단을 다 바치는 것은 너무 많아요.

 

    18. 이번 대목을 마치면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신앙의 신비, 신앙의 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요? 2년, 5년,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일까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요. 종교적으로 소양이 있는 그런 사람들이면 내적으로 직접 종교와 연결될 수 있는 힘이 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힘든 사람들도 있지요. 중요한 것은 스스로 그릇된 길로 접어들지 않는 것이요, 믿음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신이 서서히 신앙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물론 믿음 생활을 하는 데는 손쉬운 시기도 있고 혼란스런 시기도 있기 마련입니다. 정말로 내면적으로 깊은 감동을 받아서 무언가를 보기 시작하는가 하면, 그러다가는 다시 몹시 힘들어지는 그런 때가 올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정신적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날 때나 필요할 때에만 기도를 드리고 신앙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원칙과 규칙을 지키는 것입니다. 과르디니는 언제나 그 점을 매우 힘주어 강조했지요. 신앙도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내가 재미와 기분에 따라 멋대로 기도를 하면 그렇게 되지요. 그래서 신앙에는 훈련이라는 힘든 시간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고요함 속에 모르는 사이 무엇인가가 자라겠지요. 겨울철의 논밭처럼 그렇게 보이지만, 바로 그 속에는 성장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겨울철에 빵이 자라네." 프레데리케 괴레스가 했던 말입니다.

 

    19. 그럼 무엇으로 시작해야만 할까요? 질문과 함께?

 

    저라면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 시작하지는 말라고 하겠어요. 생각의 레토르트, 곧 증류기 속에 하느님을 불러 모신다거나 순전히 이론적으로 하느님을 소유하려고 한다면 결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갖되 언제나 행동과 함께 해야만 합니다. 파스칼이 신앙을 갖지 않은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단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해 보게. 그것이 자네한테 아직은 말도 안 되는 짓으로 보이더라도 말일세."사람마다 다 자기 자신만의 계기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 우선 성모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신앙에 들어가기 위한 문이 되기도 합니다. 그와 달리 그리스도가 제대로 된 시작이요 복음서들을 제대로 보는 것인 그런 사람들도 있지요. 복음서들을 읽는 것은 언제나 신앙에 들어가기 위한 길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것이 역사가들이 하는 것처럼 텍스트를 낱낱이 분해하고 그 안에 어떤 근원이 숨어 있나 찾아내고 싶어하는 그런 이론적인 독서여서는 아니 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향한 독서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독서 속에서 언제라도 기도로 넘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실제 종교 생활과 그리고 추구하는 독서와 생각의 걸음걸이들 - 드물지 않게 걸려 기우뚱거릴 때도 때때로 있지요 - 사이를 넘나들며 오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혼자 고립된 신앙 생활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또 어쩌면 비슷한 상황을 거쳤을 수도 있고 어떻게든 나를 인도하고 도와줄 수 있을 그런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우리 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혼자서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잘못된 셈이지요. <사목, 20021월호>

 

 

 

 

[3] 성모호칭기도문

 

 

1) 역사와 내용

 

성모님을 공경하는 여러 칭호들을 부르며 성모님께 드리는 일련의 탄원기도를 성모 호칭 기도라고 하는데, ‘로레또(이탈리아의 유명한 성지)의 성모 호칭 기도’라고도 부릅니다. 12세기에 신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던 최초의 호칭 기도는 15개의 호칭으로 되어 있으나, 이를 변형시켜 1587년 교황 식스토 5세가 인가하고 대사를 허락하였습니다. 1601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이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후대에 오면서 새로운 호칭 - “착한 의견의 어머니여, 평화의 모후여,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모후여” 등이 첨가되어 현재는 49개의 호칭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기도는 성체 강복 때 종종 외워지며, 많은 수도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가르멜 회는 매일 저녁기도 후에, 도미니코 회는 토요일 끝기도 후에 이 기도를 드립니다.

청원형태의 후렴(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은 7-8세기초에 전 유럽이 폭넓게 사용하고 있던 ‘성인들의 호칭 기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성서적 성모 호칭 기도에대하여

 

 

교회가 전례나 혹은 공식 예배에서 사용하도록 인가한 "성모 호칭기도"외에 각 시대마다 개인적으로 사용했던 호칭 기도들이 몇가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올바른 개인적인 호칭 기도로서 오늘날 인정받고 있는 것은 성경 구절로 연결된 성모 호칭 기도, 즉 성서적인 호칭 기도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동정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는 긴 목록을 만들 수 있는데, 이 호칭 기도는 마리아께 헌정된 구체적인 칭호로 구성되었고,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에서 그리고 신비체 내에서 수행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한다. 우리가 이런 칭호로 마리아께 간구할 때에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며, 교회가 각 시대마다 마리아께 적용시켜 온 오랜 전통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성서적인 마리아 호칭 기도는 A.M. 로꿰, O.P.신부가 만든 것으로, "영성 생활" 제553호("LA VIE SPIRITUELLE" NO, 553, PP213-217)에 수록되어 있다.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를 받으신 이여: 루가 1,28

은총이 가득하신 이여: 루가 1,28

예수의 어머니여: 루가 1,28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의 어머니여: 루가 1,32

다윗 후손의 어머니여: 루가 1,32

이스라엘 왕의 어머니여: 루가 1,33

성령이 감싸 주신 어머니여: 루가 1,35 마태1,20

주님의 중이여: 루가 1,38

임마누엘의 어머니이신 동정녀여: 루가 1,23

당신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여: 요한1,14

당신 안에 말씀이 우리와 함께 사시는 이여: 요한 1,14

여인 중에 복되신 이여: 루가 1,41

주님의 어머니여: 루가 1,43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복되신 이여: 루가 1,43

주님의 비천한 여종이여: 루가 1,48

모든 백성이 복되다 부르신 이여: 루가 1,48

전능하신 분이 큰 일을 해주신 이여: 루가 1,48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상속자시여: 루가 1,55

새로운 이사악의 어머니여: 루가 1,37(창세18,14)

베들레헴에서 첫 아기를 낳으신 이여: 루가 2,7

첫 아들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누이신 이여: 루가 2,7

예수께서 태어나신 여인이여: 갈라 4,4

구세주의 어머니여: 루가 2,11 마태 1,21

메시아의 어머니여: 루가 2,11

목자들이 요셉과 새 아기와 함께 만나신 이여: 루가 2,16

모든 일을 깊이 마음 속에 새겨 간직하신 이여: 루가 2,19

성전에 예수를 바치신 이여: 루가 2,22

시메온의 팔에 예수를 안겨 주신 이여: 루가 2,28

예수에 관한 말을 듣고 감격에 잠기신 이여: 루가 2,33

예리한 칼에 마음이 찔리신 이여: 루가 2,35

동방 박사들이 아기와 함께 찾아보신 이여: 마태 2,11

요셉이 에집트로 피신시킨 어머니여: 마태 2,14

해방절이 되어 어린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신 이여: 루가 2.42

사흘 후에 예수를 찾아내신 이여: 루가 2,46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예수를 찾아내신 이여: 루가 2,46-49

예수가 나자렛에서 순종하신 어머니여: 루가 2,51

과부들의 모범이여: 참조. 마르 6,3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신 예수님의 일행이여: 요한 2,1-2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이르신 이여: 요한 2,5

예수께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게 하신 이여: 요한 2,11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예수의 어머니요: 마태 12,50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신 복되신 이여: 루가 11,28

십자가 밑에 서 계신 어머니여: 요한 19,25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의 어머니요:요한 19,26-27

함께 기도하신 사도들의 여왕이시여: 사도1,14 태양을 입으신 여인이여: 묵시 12,1 열 두 개의 별이 반짝이는 월계관을 머리에 쓰신 여인이여: 묵시 12,1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는 교회의 어머니여: 묵시12,2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어머니여: 묵시12,5 새 예루살렘의 모상이여: 묵시21,2

 

 

 

 

 

 

2) 성모호칭기도문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소서.

●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하늘에 계신 천주 성부님 ,

● 자비를 베푸소서(다음은 같은 후렴)

○ 세상을 구원하신 천주 성자님,

천주 성령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 성모 마리아님,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다음은 같은 후렴)

○ 천주의 성모님,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그리스도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천상 은총의 어머니,

티없으신 어머니,

지극히 깨끗하신 어머니,

순결하신 어머니,

흠 없으신 어머니,

○ 사랑하올 어머니,

탄복하올 어머니,

슬기로우신 어머니,

창조주의 어머니,

구세주의 어머니,

지극히 지혜로우신 동정녀,

공경하올 동정녀,

찬송하올 동정녀,

든든한 힘이신 동정녀,

인자하신 동정녀,

성실하신 동정녀,

정의의 거울,

상지의 옥좌,

즐거움의 샘,

신비로운 그릇,

존경하올 그릇,

지극한 사랑의 그릇,

신비로운 장미,

다윗의 망대,

상아 탑,

황금 궁전,

계약의 궤,

하늘의 문,

샛별,

○ 병자의 나음,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다음은 같은 후렴)

○ 죄인의 피신처,

근심하는 이의 위안,

신자들의 도움,

천사의 모후,

성조의 모후,

예언자의 모후,

사도의 모후,

순교자의 모후,

증거자의 모후,

동정녀의 모후,

모든 성인의 모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모후,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모후,

묵주기도의 모후,

가정의 모후,

평화의 모후,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를 용서하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 자비를 베푸소서.

○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 기도합시다.

주 하느님, 저희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복되신 평생 동정 마리아의 전구로 이 세상의 슬픔에서 벗어나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3) 새로운 호칭: ‘교회의 어머니’

1980년, 교황청의 성사성성 장관(녹스 추기경)은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그리스도의 어머니’와 ‘천상 은총의 어머니’ 사이에 넣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4년 11월 11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우리의 위로자이시며 복되신 동정녀의 영광을 위하여, 마리아는 가장 거룩한 ‘교회의 어머니’이심을 선언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은, 즉 모든 신자들과 사목자들은 그분을 가장 사랑하는 교회의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 라고 이 호칭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

또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전 세계 각지에서 들어온 요청에 따라, 이 호칭을 성모 호칭 기도 속에 삽입하도록 허가하시면서, 이는 교계의 의지일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요구에 대한 응답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성모 호칭 기도의 호칭이 지금은 50개입니다.

 

4) 여왕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새로운 호칭 기도

 

1981년 3월 25일, 교회는 초대교회부터 마리아께 대한 교회 신심을 드러내는 예식 대신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관 예식’을 공포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여왕이신 마리아’ 호칭은 ‘강생하신 말씀의 모성’이 자연스럽게 발전된 호칭입니다. 따라서 이 예식의 기도문은 ‘여왕이신 마리아’와 빠스카 신비에 대한 마리아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여왕 신분은 제자 신분, 봉사 그리고 사랑이라는 복음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호칭 기도의 핵심은 ‘여왕이신 마리아’를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또한 이 호칭 기도문은 마리아가 당신의 봉사와 순결한 사랑에서도 여왕이시기 때문에, 천사들과 구약 그리고 신약의 위대한 봉사자들의 여왕이심을 강조합니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천사들, 예언자들, 사도들, 순교자들, 증거자들, 동정녀들 그리고 모든 성인들의 모후라 부르는 것입니다.

끝으로, 당신 아드님의 나라에서 마리아가 차지할 위치를 다음과 같이 보고 찬양합니다: 마리아는 세상, 천국 그리고 우주의 여왕입니다. 그리고 성서에서 인용한 호칭으로서는 “시온의 딸, 주의 여종, 별이 반짝이는 월계관을 쓴 여인”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서 인용된 호칭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원의 숭고한 열매’(전례.n103), ‘천지의 모후와 구세주의 동반자'(교회. n.59,61), 그리고 전례서에서 인용된 호칭은 ‘은총의 중재자’, ‘하늘의 여왕’, 그리고 ‘자비의 여왕’입니다

 

 

 

수유리 가르멜수녀원 성모자상

 

 

5월의 시

 

 

 

- 이해인

 

 

풀잎은 풀잎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축복의 서정시를 쓰는 5월
 
하늘이 잘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오
 
피곤하고 산문적인 일상의 짐을 벗고
당신의 샘가에서 눈을 씻게 하십시오

물오른 수목처럼 싱싱한 사랑을
우리의 가슴속에 퍼올리게 하십시오
 
말을 아낀 기도속에 접어둔 기도가
한송이 장미로 피어나는 5월
 호수에 잠긴 달처럼 고요이 앉아
불신했던 날들을 뉘우치게 하십시오
 
은총을 향해 깨어있는 지고한 믿음과
어머니의 생애처럼 겸허한 기도가
우리네 가슴속에 물 흐르게 하십시오
 
구김살 없는 햇빛이
아낌없이 축복을 쏟아내는 5월
어머니 우리가 빛을 보게 하십시오

욕심 때문에 잃었던 시력을 찾아
빛을 향해 눈뜨는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십시오

 

 


 나뭇잎숨결에 들어오는 모든 분들께,  성모님의 사랑이 가득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