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2023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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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생명은 봄과 함께 오고,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왔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5-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의 굴레를 깨뜨려주시고, 새 생명을 선물해 주십니다. 새로운 희망을 선사해 주십니다. 주님 부활의 은총과 생명 그리고 새 희망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전 세계가 코로나 감염증의 긴 터널을 힘겹게 통과하는 동안, 지구 곳곳에서는 많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났습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지난 2월에는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튀르키예와 시리아 대지진까지 있었습니다. 더하여 점증하는 기후 위기는 지구 어느 편 이야기가 아니라 전 지구적, 세계 공통의 압도적인 위기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세상살이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겨울의 두꺼운 얼음 밑에서 동토를 뚫고 생명의 새싹이 돋아나듯, 죽음의 굴레를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빛, 희망의 빛을 새롭게 우리에게 비추어 주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다양성의 시대입니다. MZ세대라고 불리는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개별화와 개인화의 추세가 대세를 이루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한편으로 볼 때,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 우주의 중심이고, 자기 삶의 주인공이라는 인식은 맞습니다. 세계사의 흐름도 큰 틀에서는 절대왕정같이 소수의 권력자에게 집중되어 있던 ‘주인공으로서의 삶’이 모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공정하고 평등하게 나눠지는 과정을 향하여 역사는 흘러왔고, 또 그런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각자가 주인공인 이 세상 삶에서 서로 다른 각자를 상호 존중하기보다는 분자화, 고립화로 가는 듯해서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분자화된 개인들을 묶어주는 연결점은, 불행히도, ‘죽음’이라는 공통점뿐인 듯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죽음의 끈’이 모든 인간을 하나의 공통점으로 연결하는 유일한 끈인 듯합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개별화된 인간 – 죽음만이 우리 개개인을 묶어주는 유일한 공통점이었던 개별화된 인간을 넘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우리 인간에게 죽음 대신 영원한 생명이라는 새로운 연결점을 주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끈으로 묶인 채 저마다 제 잘났다고 아우성치며 ‘밟고 올라서서 높은 곳을 향하겠다.’는 우리 각자에게 죽음의 끈을 끊어 주시고, 우리 모두의 시원(始原)인 생명, 영원한 생명을 향한 존재로 만들어 주신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인 것입니다. 이 어찌 놀라운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이 어찌 놀라운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이천 년 전에 박제된 고고학이 아니라, 긴 어둠의 터널을 힘들게 걸으며 죽음이라는 공통점만 갖고 있던 개별화된 우리 인간을 ‘새 생명’으로 엮어주신 ‘지금, 여기서’ ‘나를 위한 사건, 우리 모두를 위한 사건, 우리 모두를 하나로 연대하게 해 주는 사건, 대(大)생명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재물의 많고 적음을 넘어서, 정치적 당파를 넘어서, 국경을 넘어서, 언어를 넘어서, 문화를 넘어서, 종교를 넘어서, 인류 모두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 참진리를 향해, 참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전(全) 인류적 시노드(‘함께 가는 길’)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5-6) 코로나 감염증은 끝나가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우리네 살림살이에 새로운 희망을 길어냅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성당의 제대 위에서 거행되는 미사성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인류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끈’을 끊어주시고, ‘생명’으로 묶어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자리입니다. 특별히 미사성제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의 힘으로 두려움을 떨치고 새롭게 나아갑시다. 우리 주변에 나보다 더 힘든 이웃이 있음에 눈뜨고 따뜻한 손길을 나누며 다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작은 무언가를 시작해 봅시다. 생명은 봄과 함께 오고,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부활의 새 생명과 새 빛이 어려움 중에 계신 모든 분들, 특별히 북녘 동포들에게도 널리 비추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모든 피해자들과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 피해자들에게도 따뜻이 비치기를 기도합니다.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광주대교구]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지난 3년간 우리는 ‘코로나19’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사실 죽음의 공포보다 우리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사랑하는 이의 임종 순간에 함께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서로를 위해 거리를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과 이것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또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경제적인 어려움은 ‘각자도생’이라는 말로 우리를 더욱 힘겹게 합니다. 남북 문제와 한일 문제를 굳이 더하지 않아도, 각자의 인생 여정만으로도 충분히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어려운 현실에도 서로를 위하고 돕는 공감과 사랑이 희망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우리는 체험합니다.
요즘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어도 영혼은 죽어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보게 됩니다. 살아있기에 먹고 자고 움직이지만, 영혼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격식을 갖추어 옷을 차려입고 수많은 시공간에서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지만, 실상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고 그 안에는 활기찬 생명력이 없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인 도리나 도의는 세속적인 물욕 앞에 땅속에 묻혔고, 인정과 우정은 옛말이 되었으며, 약자와 가난한 이들이 소외된 채 그들만의 공정과 논리로 불의만 가득합니다. 이러한 사회는 이미 죽은 무덤과 같습니다. 이 무덤은, 아무런 반대의 소리를 내지 못하고 생명을 잃은 진리로 남아 있으며 의로운 분노도 사라진, 어둠 속의 침묵과 정적 뿐입니다.
우리는 이기심, 사리사욕, 탐욕, 권력욕, 명예욕 등 자기중심의 삶을 무덤에 단단히 묻어야 하고 철저하게 없애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소생할 수 있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부활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돌을 치워라.”,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자로를 살리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돌을 치우고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변인이었던 우리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이 소리는 껍데기 같은 삶을 치우고 어둠을 떨치고 나오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아직까지도 부활의 삶을 막고 있는 거대한 돌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답답하게 우리를 억누르고 어둠 속에 머물게 하는 죄의 돌들은 반드시 치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돌은 함께 치워야 할 공동의 몫입니다. 사실, 묶여있는 영혼은 스스로 돌을 치울 수도 없고 묶인 붕대를 풀 수도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돌을 치우고 붕대를 풀어줘야 합니다. 결국 주님 말씀을 듣고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각자의 몫이지만, 돌을 치우는 것과 붕대를 풀어 주는 것은 공동체의 연대와 나눔을 통해서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파견하셨듯이 주님은 개인의 구원을 공동체 안에서 구현하십니다. 서로 용서하고 묶여있는 것들을 풀어 주어 자유롭게 걸어가게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타인도 묶여있고 나 자신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주님 부활’은 우리에게 들에 핀 꽃들처럼, 흘러넘치는 샘물처럼, 새로운 생명으로 다가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초대에 기쁘게 응답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고, 이웃과의 관계도 새로이 하며, 더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노력도 지속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살리고 이웃 형제들을 살리며 환경과 지구를 살리는 우리의 노력은, 바로 ‘하느님 창조사업’에 협력하는 것이며 ‘주님 부활’을 사는 삶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주님께서는 오늘 죽음이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든다고 믿는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를 다시 살게 하시려는 ‘주님 사랑의 승리’입니다. 다시 한번 ‘주님 부활’의 기쁨을 전하며, 우리 모두에게 새 희망을 안겨주는 ‘주님 부활’이 되리라 믿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옥 현 진 시 몬 대주교
[대구대교구]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마태 28,5-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수난과 모욕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당신 뜻을 따르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어야 다시 산다는 것을,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죽음의 세력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아직도 전쟁으로 민간인들이 죽음에 내몰리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테러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저개발 국가의 극빈층은 먹을 것이 부족하여 심각한 영양 결핍에 시달리고, 깨끗한 물을 얻지 못해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있으며, 아파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살인, 강도, 강간 같은 흉악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인터넷을 이용한 온라인상의 숱한 범죄들도 사회의 약한 이들을 대상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소외 계층들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연명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은 아직도 건재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마치 죽음의 세력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 사건으로 우리는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배반당하고 군중에게 온갖 모욕과 고통을 받으시다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어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모든 게 끝난 것 같지만 죽음이 승리한 듯한 절망의 끝에서 ‘부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고 모든 희망을 잃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새벽에 주님의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천사에게서 듣게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태 28, 5-6)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러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납니다. 결코 평안할 수 없었던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는 “평안하냐?”고 물으십니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밤새 두려움에 떨던 마리아에게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라.”고 위안을 주십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는 누구나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되리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부활은 죽음의 세력 아래 신음하고 있는 우리에게 희망이 되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주님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모욕과 모함, 수난과 고통, 죽음을 감내하고 받아들이셨듯이, 우리도 나에게 주어지는 시련들을 잘 이겨 내고 스스로 쇄신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계 교회는 제16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이하 시노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구호로 축약되는 시노드 정신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친교를 본받아 일치를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에 맞춰 우리 교구는 장기 사목 계획의 두 번째 단계인 ‘친교’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친교, 이웃과의 친교, 모든 피조물과의 친교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친교를 나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것을 나누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이기심과 욕심에 사로잡혀 살던 과거의 나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다시 태어난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삶에서부터 참된 친교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새롭게 시작하는 부활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이 왔듯이, 고통과 보속의 사순 시기가 지나고 기쁨과 희망의 부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여 기쁘고 행복한 시기를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어둡고 답답한 마음을 걷어 내고 기쁘게 부활을 맞으며 희망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우리의 하루하루가 부활을 체험하고 친교를 나누는 삶이기를 기원합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와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성인과 복자들이여, 저희와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
[대전교구]
2023년 주님 부활 대축일 메시지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알렐루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떠올립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여러 가지 기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 곧 당신이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고 선언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시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능력이 아주 뛰어난 분이시니, 세상의 지도자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붙들려 가시자 제자들은 흩어져 도망갔습니다.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신비는 사람들의 이러한 기대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모든 사람이 경탄할 만한 큰 능력을 떨치며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죄 없이 의로우신 그분이 우리 죄를 안고 죽으심으로써, 그 죽음 안에서 우리의 죄 값이 치러지고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는 신비였습니다. 이렇게 의인이 죄인이 되어 죄인을 의롭게 해 주신 이 사건을 교환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의로움과 우리의 죄가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이 신비를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몸에 십자가의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만난 예수님은 죽음의 상처를 당신 몸에 그대로 지니고 계셨고,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 마음속에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를 위해 수난하고 죽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부활하시어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립시다.
이 구원의 신비는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하고 엘리사벳을 만나 불렀던 노래(루카 1,46-55) 역시 아브라함 때부터 이어오는 하느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최고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희생제물로 삼으시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과 다시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자비의 역사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비롭게 살아갈 때 주님 안에 살고 부활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봅시다. 오늘날 물질문명이 넘치게 발전해서 쓰고 버린 쓰레기가 심각한 환경오염이 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음식 쓰레기가 넘쳐나는데, 다른 쪽에는 음식은 물론 깨끗한 물조차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점차 더 병들어 가는 생태계는 자연재해의 규모도 더 크게 만들고, 그 피해는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이 훨씬 더 크게 받습니다.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역의 대규모 지진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많은 희생이 발생하고 있는 지역도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지역들을 위해, 그리고 평소 가까운 이웃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기도로 함께해 주신 형제자매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들 모두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우리와 한 형제입니다. 계속 필요한 지원과 기도에 지치지 말고 주님의 자비를 실천하면서 부활의 은총과 기쁨을 더 깊이 누리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는 우리에게 맡겨진 자연 생태계를 사랑으로 잘 보존하도록 촉구합니다. 이미 여러 본당과 시설에서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사제 성소를 위해서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제는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의 은총을 세상에 전하도록 축성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많은 젊은이들이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사제들이 거룩한 직무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같은 마음으로 수도 성소와 선교사 성소를 기억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는 사람보다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가르치십니다. 구원의 신비를 깊이 체험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고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태초에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기에 하느님처럼 자비롭게 사는 소질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 부활을 축하하는 인사를 드리며 주님의 강복을 전합니다.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마산교구]
2023년 부활 메시지
2023년 부활축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크신 축복을 기원합니다. 금년 부활절에도 주님의 메시지를 많이 묵상합시다. 다시 시작하라는 그분의 암시를 더 많이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동안 많은 부분에서 힘들었습니다. 코로나 여파는 약해졌지만, 생활 속에 남아 있는 습관들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행사 참여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혼자서 하는 신앙생활도 여전합니다. 조용한 변화가 있어야겠습니다. 믿음의 길은 함께 걸을 때 깨달음을 쉽게 체험합니다. 은총으로 사는 이들과 함께 걷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두려움 때문에 숨었지만 함께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사도로 바뀌었습니다. 부활은 변신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시신을 울면서 찾습니다(요한 20,11). 천사를 만나자 ‘당신이 주님을 모셔갔다면’ 알려달라고 합니다. 시신이라도 뵙겠다는 열정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듣자 즉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막달레나 역시 부활을 체험했고 삶이 바뀌었습니다.
모든 신심행위는 예수님을 만나려는 노력입니다. 느낌이든 깨달음이든 살아계신 예수님을 확신하려는 행동입니다. 현실의 숱한 사건 속에서 가끔은 그분 손길을 느껴야 합니다. 한 번쯤은 처음부터 개입하고 계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막달레나의 변신을 체험하는 행위입니다. 금년 부활시기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교구는 새 청사를 마련했고 이사를 마쳤습니다. 아직 헌당식은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기쁘게 참여하며 궂은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성직자 수도자 교우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따뜻한 축복을 내려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부활축일과 함께 자연의 생명력은 한층 강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움츠렸던 많은 곳에 부활의 힘은 분명 함께할 것입니다. 신앙생활 역시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갇혔던 라자로를 불러내셨습니다(요한 11,43).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저희들도 부르고 계십니다.
어두운 뉴스들이 많습니다. 삶을 보는 눈이 차가우면 많은 것들이 어둡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차디찬 죽음을 건너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힘입니다. 밝고 따뜻한 부활의 에너지입니다. 그 은총을 청하며 천박한 뉴스에 현혹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활시기를 영적으로 지내려는 지혜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만 여기면 혼돈은 떠나지 않습니다.
루카복음 24장에는 실망감에 젖어 엠마오 마을로 가고 있던 두 제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일는지요? 코로나 사태 이후의 신앙인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가시어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뒤 본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처음 위치로 돌아가려 애쓰면 주님께서는 눈을 뜨게 해 주실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엔 스승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분과 함께 살면서 숱한 기적을 보았건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놀라서 하는 말도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부활 후 발현하신 스승님은 왜 그렇게 믿음이 없냐고 꾸중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제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사건 이후 바뀝니다. 목숨까지 하찮게 여기며 스승의 부활을 사방에 전하러 다닙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 외칩니다. 놀라운 변신입니다. 다시 살아남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청해야 합니다. 죽음 같은 상황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이번 부활시기엔 청해야 합니다.
사순시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습니다. 부활사건은 ‘십자가 길 기도’의 완성입니다. 십자가는 억울함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억울함을 만납니다. 견디기 힘든 억울함도 많습니다. 그 아픔을 돌아보는 것이 십자가에 대한 묵상입니다. 그 고통에서 주님 뜻을 찾는 것이 영성생활의 시작입니다.
십자가를 지면 반전이 옵니다. 상상도 못 했던 반전을 만납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인생에서 부활은 한 번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억울함을 당할 때마다 부활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금년 부활절엔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으며 살아야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가정에 예수님의 따뜻한 축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은혜로운 부활시기 되십시오.
주님 부활 대축일
천주교마산교구 교구장 서리 신은근 바오로 신부
[부산교구]
부활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드립니다.
2,000년 전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날은 여느 날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그날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것이 당신의 뜻입니다.
총총한 별밤에 무덤은 비고
먼뎃바람 같은 아스므레한 기류만이
설핀 갈밭인 양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뜻입니다.
...
죽음은 멎고, 슬픔은 쉬고
생명은 저마다 무성하라십니다.
이것이 당신의 뜻이었습니다. (김남조, 부활의 새벽)
여느 날과 같았던 그날 이후 세상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된 이후 형벌처럼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간에게 궁극적인 희망이 되었습니다. 다시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희망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관의 고통으로 우리 인간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셨고, 십자가에서는 진정한 용서를 보여주셨으며, 마지막에는 주님조차 하느님께 원망 아닌 원망을 하심으로써 우리 인간들의 원망을 이해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공감을 몸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그리고는 결국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죽어야 할 인간의 운명을 ‘함께’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의 승리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시인의 묵상처럼 “죽음은 멎고/ 슬픔은 쉬고/ 생명은 저마다 무성”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죽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우리에게 ‘죽음의 멈춤’을 보여주시고, 수많은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쉴 수 있음’을 주시며 ‘다시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한 위로와 더한 희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러한 부활의 의미를 예수님의 제자들은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스승을 만난 제자들은 이전과는 달리 스승이 다 못하신 복음 전파의 전사가 되었습니다. 살아생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도 바오로조차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데 남은 생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라고 당시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향해 ‘부활 신앙’을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아무리 힘이 들어도 죽음이 멈추고 편히 쉴 수 있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신앙인들의 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 부활의 동참에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아드님의 죽음을 희생으로 보여주셨듯이, 우리의 부활에도 ‘사랑’이라는 희생이 있어야 함을 암시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현실은 사랑과 너무나 멀어져 있음을 목격합니다. 게다가 작금의 우리 사회는 정치 이념이나 사상으로 양분되어 서로 물어뜯어 모두가 피를 흘리며 고통 속에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둘로 나뉘어 사랑이 아니라 증오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원수조차 용서하라던 주님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이 없는 곳에 부활이 들어설 자리는 결코 없습니다.
이번 부활에는 사랑과 용서를 실천합시다.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사랑하는 것을 우리 신앙인들부터 실천합시다. 그 가운데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함께하실 거라 확신합니다. 주님 부활의 은혜로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차고 희망으로 더욱더 환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 부활의 은총이 구체적인 여러분의 일상의 삶 안에서 사랑의 열매로 영글 수 있도록 하십시오, 주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손 삼 석 요셉 주교
[수원교구]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1.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주님의 무덤에 다녀온 제자들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교회는 오늘,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우리의 생명을 되찾아 주신(부활 감사송1 참조)’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기뻐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로마 5,2)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현세의 고난과 시련은 우리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지만, 우리는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로마 8,24-25 참조).
2. 신앙생활의 중심인 전례와 성사
오랫동안 지속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우리 사회에 많은 고통과 상처를 남겼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위기는 많은 신자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였지만, 신앙생활에서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려 우리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콜로 2,7 참조). 그리고 새로운 결심과 다짐으로 정성을 다해 전례와 성사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전례와 성사는 단순한 예식적 절차나 형식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활동하시며 우리가 지닌 희망을 일깨우는 영적 양식입니다. 사제는 전례와 성사 집전으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성화하도록 인도합니다(사제 직무와 생활 지침 89항 참조). 그리스도인은 전례와 성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신앙을 키우고 자신과 세상의 성화에 투신할 힘을 얻게 됩니다.
3. 어려운 이웃을 향한 마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과 폭력, 자연재해 등으로 수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갈등과 마찰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 양극화와 부정부패,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 등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상황을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오늘, 희망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고통받는 이의 울부짖음에, 절망 섞인 한숨 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들에게 다가가 이웃이 되어주고, 그들에게 참된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줍시다. 우리는 바로 그 희망과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4. 부활의 희망
이레네오 성인은 그리스도의 육체가 부활한 것과 같이 우리의 육체도 주님의 권능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이레네오, 이단자 반박 V,7,1 참조). 우리는 희망을 간절히 바라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희망을 전하기 위해 새로운 구원의 희망으로 무장해야 합니다(1테살 5,8 참조). 그 희망은 시련과 환난 없이 값싸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기도 안에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일상에서 다가오는 수고와 어려움, 반대로 점철된 현실을 피하지 말고 직시할 때입니다(2023년 사순 시기 교황 담화 참조). 고통과 시련으로 점철된 세상 한가운데서 주님의 사도로서 담대하게 부활의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 모두에게 내리기 바랍니다. 이로써 우리 가운데 고통받는 이들과 온 세상에 희망의 불이 지펴지기를 바랍니다.
수원교구의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수원교구장 이 용 훈 마티아 주교
[안동교구]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부활한 삶에 참여한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도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부활하리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살게 되었으니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가 서로 서로에게 부활의 축복을 비는 복된 인사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주님께서는 우리가 부활하신 그분을 믿으면 우리는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도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아서도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이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다른 곳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고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활로 우리가 함께 누리게 되는 부활의 은총과 축복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부활하신 그분을 믿으면 지금부터 그 은총과 축복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삶을 함께 삽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주님 부활의 은총과 축복을 얻어 누리도록 함께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특별히 전쟁과 지진 등 감당할 수 없는 최근의 대재앙으로 희생된 자들과 그들의 유가족들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지금의 경제위기 때문에 생활의 어려움을 겪으며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근심과 걱정, 슬픔과 고통, 가난과 불편을 그들과 함께 나누며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사랑과 희망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떠한 이유로든 인간다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 이웃이 있다면 그들이 겪는 편견과 차별, 억압과 멸시, 박해와 생명 위협의 고통까지 함께 나눌 각오로 그들이 인간 생명의 존엄을 정당하게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그리고 성장과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자연환경을 오염시키거나 대자연의 질서를 함부로 파괴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다면 그들의 잘못을 일깨우고 그들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질서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시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우리가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부활한 삶에 함께 참여하는 일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러한 일들을 하도록 함께 부름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가를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주님께서 부활에 이르시기까지 당하시고 겪으시고 참아내신 파스카 과정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참으로 의미가 있고 소중했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생명을 위한 사랑의 과정이었고 우리 구원을 위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길,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여정은 우리들의 복된 파스카 여정이 될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일상에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선택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 자체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부터 부활한 삶에 동참하며 이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복된 파스카 여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몸소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 대축제가 또한 우리 각자의 부활 축제가 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님 부활의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크리소스토모 주교
[원주교구]
2023 교구장 부활 메시지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몸 없는 영적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함께 대화를 나누셨습니다.(요한 21,12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다.(사도신경 참조)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삶과 상관없는 ‘육신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손과 발에 자국이 있습니다.(요한 20,27참조)
예수님의 부활은 썩어 없어질 몸의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
부활하신 예수님은 문이 잠긴 다락방에 나타나셨습니다.(요한 20,19-20참조)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나셨습니다.(1코린 15,43참조)
예수님의 부활은 윤회로서의 회생이 아니었습니다.
윤회는 우리의 삶의 역사와 다른 몸을 빌어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옷처럼 갈아입을 수 있는 부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몸으로서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래 오래 살고 싶어했던 인류의 행복한 염원의 참된 실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시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을 위한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시 죽을 수 있는 소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난 라자로처럼 다시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후손들의 삶으로, 가문의 대를 이음으로, 지속되는 삶으로서의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후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은 추억으로의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남긴 업적의 불멸성에 의해 기억되는 부활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한 처음에 빛이 생겨난 창조처럼, 하느님의 또 하나의 새 창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5,16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이 부활절과 부활시기를 마음껏 경축합시다. 알렐루야.
성경은 노래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천주교 원주교구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의정부교구]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루카 24,2)
예수님 부활의 기쁨을 의정부교구 모든 형제자매들과 나누며, 부활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이 힘겹게 세상을 살며 삶에 지치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전하는 부활의 기쁜 소식이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웃들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빈 무덤을 가로막았던 큰 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준 첫 증거는 빈 무덤이었습니다. 새벽녘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돌을 치우고 무덤에서 나오신 것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전해졌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큰 돌은 죽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제 그 돌이 옆으로 굴려 치워진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가르고 주님과 우리를 막아선 큰 돌은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이 안고 있는 죄와 같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불평등이 심해졌습니다. 소수의 부가 다수의 가난을 양산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기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불평등으로 소외되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관심은 점차 줄어드는 듯 보입니다.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와 나라들 사이에서도 팽배해지는 이기주의에 공동선은 설 곳을 잃은 듯한 느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복음의 기쁨」에서 이 같은 불의를 지적하셨습니다. 굶주리는 이들을 외면하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배척의 경제(53-54항), 오직 경제적 이득을 최우선으로 하는 돈의 우상화(55-56항), 봉사하지 않고 지배만 하는 금융 제도(57-58항), 폭력을 묵인하는 사회 구조(59-60항), 신앙과 교회를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하려는 세속화(64-67항) 등이 그러합니다. 이 모두는 ‘죽음의 문화’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이제 우리는 새로운 길로 나가야 합니다. 이 길은 예수님에게서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완성되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돌이 굴려진 무덤이 죽음이 아닌 부활의 장소가 되었듯, 죄를 걷어냄으로써 이 세상에 어둠이 아닌 빛을 드리워야 할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려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만나면서 느꼈던 뜨거움을 루카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24,32)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서 성경에 관한 말씀을 들으며 기쁨 가득해졌습니다. 이는 성경 말씀에 머물고 기도 안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새롭게 힘을 얻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들의 내달음이 밤길 어둠이 아닌 벅찬 희망이었듯, 우리 역시 기도와 말씀으로 힘을 얻을 때 절망이 아닌 기쁨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아울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가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두 제자는 스승의 죽음이라는 절망스러운 현실에서도 함께 슬픔을 나누었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알아보지 못했을지라도 예수님을 만나 걸을 때도 함께였고, 말씀을 나눌 때도 함께였으며, 빵을 나눌 때도 함께였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의 부활을 깨달은 순간에도 함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묵상하고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해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왔고 앞으로 계속 걸어갈 시노드 여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앞에 놓인 큰 돌, 곧 우리 자신과 주변 곳곳에 쌓인 부조리와 죄악은 깨끗이 치워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언제나 이웃 형제자매들과 함께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의 결실은 구체적인 사랑의 나눔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의정부교구가 신앙과 사랑의 연대를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하며,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 이기헌
[인천교구]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이 기쁨을 여러분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울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인 평화가 여러분 가정과 이 나라에 그리고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알려주시고,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인간의 삶을 억누르는 죽음을 이겼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삶과 영원한 삶을 얻게 되었다는 것. 이것처럼 큰 기쁨과 희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죽음을 넘어선 부활을 또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죽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보십시오.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죽음은 죽었습니다. 오 생명이여, 오 죽음의 죽음이여.”(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강론집)
인간 삶을 한계 지었던 죽음이 죽었다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사라졌다는 것에서 우리는 큰 희망과 용기를 품게 됩니다. 그러기에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세상을 사는 데 절망이 있을 수 없고,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삶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에, 또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신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신 부활을 모든 이들이 믿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빈 무덤을 찾아왔던 이들은 예수님 부활에 확신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고,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 하였다고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마르 16,8 참조)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6)라고 전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에서 당신에게 하신 말씀들을 설명해 주시면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셨고, 성찬례를 통해 그들에게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시며, 부활의 은총을 나누어 주시며 사명을 주시고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루카 24,36-48; 요한 20,19-23 참조)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의 은총을 주시며 우리 모두가 세상에 나아가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은총이고, 인간의 마음을 바꾸어 놓은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형제자매로 서로의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에페 2,14 참조)
1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 자체가 주는 인간의 비극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나라들이 이 전쟁을 이용하여 자국의 이득 챙기기와 편 가르기에 급급합니다. 21세기에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장은 탈냉전에서 냉전의 시대로의 회귀를 보여주고 있으며, 세계 각지의 많은 나라들이 전쟁을 통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유혹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심지어 중동지역에서는 지진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내전을 10년 이상 지속하고 있습니다. 힘의 논리, 정치의 논리가 만들어낸 비극은 서로가 서로에게 벽을 쌓게 하고 적대감과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는 참담함을 낳고 있습니다. 분명 모든 이들은 전쟁이 최고의 방법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어느덧 힘의 논리에 맛들인 사람들은 힘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꼭 전쟁만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힘의 논리로, 경제적 우위로, 다수의 논리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힘의 논리는 남들 위에 서려고 하는 교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에 대한 결과는 하느님께서 바벨탑 이야기를 통해 알려주셨듯 분열과 죽음입니다.(창세 11,1-9 참조)
“평화가 너희와 함께.”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의 욕망과 죽음으로 향하는 마음을 부수시며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부활의 증인으로 평화의 사도가 되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분열과 죽음이 아닌 조화와 존중과 생명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며, 그 은총을 널리 전하라고 하십니다. 부활의 기쁨에 넘쳐 지내는 것은 죽음의 문화, 힘의 논리를 버리고, 화합과 존경과 일치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 안에서부터 우리 모두 평화를 살아가는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이를 통해 세상에, 한반도에 부활한 주님이 주시는 평화의 은총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전주교구]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얼마 전에 선종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2006년 부활절 강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 진화론의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면 -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큰 돌연변이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의 결정적인 도약이 바로 부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로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죽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는 일찍이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은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하고 외쳤습니다. 우리 역시 이를 믿고 또 고백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어디에나 죽음이 아직도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속량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 8,23) 죽음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오늘날 억울하게 혹은 비참하게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쟁과 테러, 자연재앙, 전염병 등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으며 죽고 있습니다.
일 년 넘게 계속되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광기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며 무고한 이들을 공포와 절망으로 내몰고 있고, 아울러 지구촌 전체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강진으로 하루아침에 많은 사람이 집을 잃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으며, 수많은 희생자와 이재민이 속출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절규는 해외에서만 들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여기저기에서도 들립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절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와 정부의 ‘강제동원 배상안’에 대해 피해자들과 국민이 크게 울부짖고, 직장과 일터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는 노동자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점점 사회의 변두리에 내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명, 반지하 셋방에서 매일 빚 독촉과 생활비에 시달리는 영세민들의 절규, 병실과 요양원에서 통증에 지친 환자들의 신음 등 고통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립니다.
계속되는 이런 고통의 소리는 우리 신앙인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규 앞에 부활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마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데, 이를 통해 변화된 것은 무엇인가? 아니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도대체 무엇이 변화되었는가?
아직도 불의와 죽음이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그리고 이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겠지만, 분명하게 변화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끝까지 견지하셨던 행동의 위력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다음, 당신의 부활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의기양양하게 선포하시거나 유력한 사람에게 알리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울고 있는 여인을 찾아가 “여인아, 왜 우느냐?”(요한 20,15) 하고 위로하셨습니다. 가련한 이의 눈물을 닦아주심으로써 그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절규를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그 절규를 기꺼이 들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곧 우리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거기에 위로의 기름을 부어 아픔을 덜어주시고, 자비로 싸매주시고, 연대와 관심으로 치유해주십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시고 함께 아파하십니다.
사실 주님의 이런 ‘함께 아파하는 마음’(compassio)은 부활 이전에도 쉽게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공생활 중에 누구보다도 죄인이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병자들, 고통받는 이들을 가까이하셨고, 그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엾은 마음으로 대하심으로써(마태, 9,36; 14,14; 15,32; 루카 7,13 등 참조), 그들을 곤경에서 구해주시고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따라서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주님이 늘 견지하신 마음이고, 이는 사람이 되신 주님의 고유한 본질입니다.
이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세상 전체를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그 가엾은 마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증오를 물리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정말 변화된 것은,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앞으로도 계속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활기를 띠는 곳이면 어디든지 항상 부활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부활이 명백하게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은 마음에서 싹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은 거의 무능하거나 연약하게 보이고,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활이 우리의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것을 서서히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이는 하느님의 마음이기에, 그 어떤 힘보다 더 강하고, 어떤 지혜보다 더 지혜롭습니다(1코린 1,25 참조).
사랑하는 교구민 여러분, 올해 우리 교구는 특히 ‘사랑의 실천’에 마음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초대하십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사회 안의 가장 힘없고 약한 이들을 동반하고 돌보며 지원하기를”(「모든 형제들」, 64항)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눈을 뜨고 세상의 비참상을 보고, 존엄성을 박탈당한 우리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직시합시다. 그들의 손을 잡아 우리의 가슴에 끌어주어, 우리가 함께 있음의 온기가 전달되고, 우정과 형제애를 느낄 수 있도록 합시다. 그들의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 되게 합시다.”(「자비의 얼굴」, 15) 그러면 우리는 고통과 어둠을 몰아내는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사랑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길 빕니다. 아멘.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제주교구]
주님의 뜻을 사는 부활의 길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 인사를 전해드립니다. 참으로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이 승리한 것이고, 진리와 선과 사랑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실상 헛된 것이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입니다.”(1고린 15, 14)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교도 없습니다. 오늘은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계시된 날이고, 인생의 의문이 해결된 날이며, 구원의 실마리가 풀린 날입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죄 때문에 죽을지라도 이제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죽을 우리까지도 살려주실 것”(로마 8, 11)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까지는 어두움과 죽음의 고통스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비는 주님의 뜻 안에서 침묵 속에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 침묵, 성 토요일의 무덤을 덮는 죽음의 침묵, 부활 아침 제자들이 놀라서 바라보던 빈 무덤의 침묵 속에서 비로소 부활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 금요일은 주님 수난의 날이고, 성 토요일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과 연대를 맺으신 날입니다. 이 시간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죄악과 폭력으로 얼룩지고, 죽음과 고통의 의문에 휩싸인 이 세계를 당신 사랑으로 품어 안으신 때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온 세상에 드러난 날입니다. “죽음보다 더한 사랑”(아가 8,6)이 승리한 날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소리 높여 선포하면서도 침묵 속에 침잠해야만 부활 사건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를 압박해오는 이 나라 현실이 주고 있는 침묵 속에, 깊이 잠겨야 주님의 부활의 길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고, 오늘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는 3년이 넘는 코로나 상황과 1년 전부터 계속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얀마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내전, 최근에는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덮친 지진, 전 세계적으로 다가오는 기후 위기 등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의 아픔과 상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옵니다. 무엇보다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10년 전 교황으로 즉위하신 후, 세계적인 문제와 교회의 여러 문제 앞에서, 올바른 쇄신과 변화의 과정을 통하여 이러한 고통과 아픔의 상황이 결코 서로 무관하지 않고 그러한 이면의 자리엔 인간들이 가진 개발의 탐욕이 있고 그로 인한 생태 파괴의 현실들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교종께서는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노달리타스의 길인 ‘함께 걸어가는 여정’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가는 통합된 식별의 단계를 제안하고, 모두가 형제애에 기반한 올바른 해결을 위한 책임과 사명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한국 사회는 이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개발의 광풍으로 인해, 점차 한반도를 넘어 아름다운 제주의 보물 역시 근본적으로 위협받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2공항 문제에 대한 환경부의 전략 환경영향평가의 조건부 통과 발표와 국토부의 기본계획안 고시는 무엇보다 국가가 추진하는 미래를 향한 진지한 고뇌의 문제이기보다, 제주가 가진 가장 소중한 보물인 청정 제주의 모습을 이제는 더 이상 지켜낼 수 없는 위기 촉발의 순간을 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엔 제주의 지속 가능성과 미래 지향성에 대해 도민이 가진 올바른 결정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야말로, 주님의 뜻을 찾아가기 위해, 보다 더 제주도민의 선택을 분명히 해야 하는 시간이라 여깁니다. 올해는 또한 제주도민의 아픔과 상처의 질곡이 깊은 제주 4·3 75주년과 관동 대지진 당시 계엄령과 유언비어가 불러온 조선인 학살사건이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맺은 정전 협정 역시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 앞에서 그리고 닥쳐온 위기들 앞에서 어둠의 세력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힘이 다시금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부활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의 감수성을 온전히 전해주셨고 우리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창조적 의지를 깊이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뜻을 선택하여 지금 이 세상을 파괴하고 있는 세력에 대하여 눈을 감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악과 죽음에 대항하고 이기심을 극복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축복이 되어야 할 이 세상의 삶이 죄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깨어나야 하겠습니다. 부활이 가르쳐주는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죽음 후에 새롭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힘으로 지금 여기서부터 새롭게 산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길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 모두의 가정이 부활의 축복으로 평화의 나날이길 빕니다.
천주교 제주교구 감목 문창우 비오 주교
[청주교구]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마태 28,6)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 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큰 자부심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하느님의 정의와 그분의 평화와 형제애를 말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온 세상에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죽음에 대한 승리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고, 인간적인 논리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하나의 선언, 곧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마태 28,6; 사도 2,32 참조)는 성경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세상에서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마주하여 놀라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분의 부활을 전합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이제껏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현실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그들 곁에 살아 계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2, 307쪽 참조).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두려워하고 외면했던 제자들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었고 그들을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을 믿는 우리의 인생도 바꾸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새로운 삶, 영원한 생명의 삶을 희망하며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로마 6,4-11 참조).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우리도 그분의 제자들처럼 이 세상에서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을 새롭게 다짐합시다.
2. 우리는 사랑의 증인입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제자들은 모두 서둘러 길을 갑니다. 왜 그들은 뛰어갔을까요? 무엇이 그들을 가슴 벅차도록 뛰게 했을까요? 무엇이 마리아 막달레나를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게 했을까요?(마태 28,8; 루카 24,9; 요한 20,2 참조). 무엇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를 한 걸음에 무덤으로 달려가게 했을까요?(요한 20,4 참조). 무엇이 베드로를 물속으로 뛰어들게 하여 해변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헤엄쳐 가게 했을까요?(요한 21,7 참조). 이들에게는 한 가지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사랑이 그들 마음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은 지상에서 그분께 충실한 사랑을 지녔던 이들의 몫이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예수님께 대한 깊은 사랑 체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체험하는 자리는 언제나 사랑으로 시작되고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부활을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부활의 희망을 간직하고 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에 힘입어 그 자신도 부활의 영광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의 공동체인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인생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내어주신 그 사랑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그 위대한 사랑에 감사하며 세상에서 이 놀랍고도 아름다운 주님 사랑의 증인이 되어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부활을 믿는 우리를 통해 우리와 가까운 곳에, 그리고 또 먼 곳까지도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이 미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3. 우리는 희망의 증인입니다
오늘 부활 미사의 복음에는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지진이 일어나고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는 광경을 보자 그들이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마태 28,3)고 했습니다. 예전처럼 지금도 세상에는 악의 세력이 위세를 떨칩니다. 부가 특정한 소수에게 집중되고, 비참한 가난이 증대되는 경제적 불의가 난무합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먹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리며 죽어가는데도 다른 한쪽에서는 산더미처럼 먹다 남은 음식이 버려집니다. 어느 순간 종교처럼 되어버린, 신격화된 시장의 논리, 자본의 논리 앞에서 사람과 사람의 터전인 대자연이 올바로 보호받지 못하고 소모품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불의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오늘 부활의 복음 말씀에 다시 귀 기울여 봅시다. 파스카 날 이른 아침에(마태 28,1 참조)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이 부패하도록, 끝내 실패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무덤을 굳게 닫아놓았던 돌을 굴려 떨어져 나가게 하시고, 사람들의 죄악으로 유발된 모든 불의와 절망의 상황을 예수님의 부활로 완전히 뒤바꾸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간 모든 이가 결코 죽음의 권세 아래에 내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보증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불의한 현실을 뛰어넘는 희망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덤에서조차 생명이 움터 나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의 빛으로 언제나 희망을 얻는 우리는 세상의 불의에 굴하지 않고 복음의 의로움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불의를, 모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희망으로 복음의 기쁨을 간직하며 부활의 삶을 살도록 우리 모두 용기를 냅시다.
대자연의 모든 것이 다시 깨어나는 부활의 계절입니다. 돋아나는 온갖 나무의 잎새와 생생하게 피어나는 들꽃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처럼 우리의 믿음도 봄날의 햇살처럼 촉촉한 봄비같이 다시 깨어나 새롭게 부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건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한생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언제나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사신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생각하며 부활을 새로이 살고자 다짐하는 모든 신자 여러분에게 복되신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부활의 기쁨 안에서 용기와 희망을 얻고 새롭게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주님 부활 대축일
청주교구장 김 종 강 시몬 주교
[춘천교구]
“평화가 너희와 함께!” (루카 24,36)
저는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신 본능인 '신앙 감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우리가 가정이나 일터 등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인식하고, 복음적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 감각’의 중심에는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남은 상처는, 우리를 위해 죽음도 마다하며 자신을 희생하신 완전한 사랑의 표징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로도 참된 평화가 도래하지 못한 세상 곳곳에는, 여전히 수많은 상처로 고통받는 이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전쟁과 지진으로 고통받는 이들, 끝없이 이어지는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 고향을 떠나 살아야만 하는 이주민들이 평화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우리 교회의 몸에 새겨질 상처를 감수하고, 그들을 치유하는 복음적 실천에 동참합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와 우리에게 새겨질 상처를 거부한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부활과 평화의 기쁨은 요원할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는 우리 모두의 ‘신앙 감각’은, 개인 삶의 여러 상황에서 이루어 내는 ‘신앙 실천’을 위해 꼭 있어야 하는 감각입니다.
춘천교구 하느님 백성 여러분! 끊임없이 우리 ‘신앙 감각’을 뜨겁게 하고 그 감각이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말씀살기’에 동참합시다. 또한 인류의 존폐가 걸린 기후 위기, 환경 문제, 무너져 가는 생태 보존을 위한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에 임하면서,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불편함’의 상처를 기꺼이 우리 몸에 새기도록 합시다. 평화를 잃어가는 우리 사회, 한반도, 세상의 여러 상황을 남의 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것을 깊이 새깁시다. 우리가 이루려는 변모는 십자가 고통을 동반하겠지만, 참된 부활을 살아낼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평화의 삶이 여러분과 가정, 우리 춘천교구 하느님 백성 공동체 안에 충만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군종교구]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마태 28,8)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예수님 부활의 기쁨이 전후방 각지에서 애쓰고 계신 교구민과 병사들 모두에게 가득 전해지길 기도합니다.
부활 축하의 의미
부활 시기가 시작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서로 부활 축하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나누는 이 축하 인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으로부터 오는 기쁨의 탄성이자 이분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라는 믿음과 희망의 고백입니다. 기쁨 안에서 전하는 주님 부활의 나눔은 ‘지금 여기’에서 부활을 몸소 살아낼 수 있게 합니다.
떠나야 할 무덤들
부활을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활을 산다는 것은 무덤을 떠나는 일입니다. 무덤 앞에서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곧바로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 길 위에서 여인들은 예수님을 마주합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평안하냐?”고 물으십니다. 이처럼 무덤을 떠날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부활을 축하한다고 말하면서도 무덤을 떠나지 못한다면 진정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떠나야 할 무덤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나만 더 부유하게 살고자 하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행태, 인간관계 안에서 나만 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자기중심적인 마음, 명예에 대한 탐욕, 다양한 형태의 성장 우선주의 등이 여기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 무덤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 애쓰기보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나서야 합니다. 나의 명예를 위해 누군가를 고통으로 밀어 넣는 행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라는 세상에 갇혀 있기보다 ‘너’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인간만을 위한 우선적 발전을 벗어나 생태환경을 보살피는 마음도 갖춰야 합니다. 이처럼 각자의 무덤을 떠날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올해 2월, 튀르키예 동남부와 시리아 북부 일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지진의 희생자와 그로부터 고통받는 이들의 소식을 접한 교구민들께서 함께 기도하셨고, 사랑의 성금을 모아주셨습니다. 부활 시기가 시작되는 오늘도 여전히 기도와 행동으로 사랑을 전하시는 분들이 계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내 자리를 벗어나 몸소 부활을 살아내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군종교구장으로서 지금도 튀르키예의 재건과 구호 활동을 펼치고 계신 군인과 봉사자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서로 자리한 곳은 달라도 튀르키예와 시리아 곳곳에 예수님의 사랑과 부활의 기쁨이 따스하게 전해지기를 소망합니다.
부활의 증거와 선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군종교구는 올해 “선교의 열매, 세례성사!”라는 표어 아래 이웃과 동료들을 세례성사의 은총으로 초대하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과거 부활 대축일이 찾아올 때면 성당이 많은 군 장병들로 붐볐지만, 이제는 성당에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맞이하는 이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이런 현실 안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사목교서의 내용을 이행하려면 사람들에게 부활 소식을 더욱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기에 돌이 굴러진 무덤 안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로 입구가 막혀 있어 부활을 못 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천사가 돌을 굴리고 무덤이 열린 것은 여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확인하게 해주시려는 배려였습니다.
여인들과 제자들은 빈 무덤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만날 많은 사람들 또한 우리가 보여줄 빈 무덤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선교입니다. 신앙을 담아 보여줄 빈 무덤을 통해 선교의 열매가 익어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우리의 구원자이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부활의 신비를 전하기 위하여 우린 부활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니 신앙인의 삶을 막고 있는 다양한 돌들을 치우고 빈 무덤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달려 나갑시다. 무덤을 벗어나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으로 향합시다. 그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며 기쁨을 누릴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우리와 함께 부활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지금, 함께 전하는 부활 소식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던 이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달려갔습니다. 올해 사목 표어인 “선교의 열매, 세례성사!”를 향한 우리의 여정도 홀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군종교구민 모두가 함께 가는 길입니다. 비신자뿐만 아니라 ‘쉬고 있는 신자’들을 독려하여 함께 부활하신 주님께 나가는 신앙의 여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기쁨 안에서 이 길을 끊임없이 걸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 노력은 내일 행해야 할 자세가 아닙니다. 내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지금’ 움직여야 할 모습입니다. 그러니 부활의 기쁨을 전하러 지금 무덤을 떠나갑시다. 무덤을 떠나 몸소 부활을 살아갑시다. 아멘.
2023년 부활절에
천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 티토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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