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도덕 개념과 도덕의식의 발전
임 재 진(조선대 교수)
1. 서론
칸트에서 자연세계의 인식과 활동세계의 인식은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의 ‘비판’은 이성의 능력 자체를 따지는 작업으로서 서로 다른 영역에 관계하는 인식 능력에게 월권을 금지하고 각기 고유한 영역을 배당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각 영역의 인식에 있어 원칙을 주는 능력으로서의 순수이성은 활동의 영역에서는 의지를 규정하는 선험적이면서 순수한 원칙을 준다. 그러므로 그의 도덕철학에서는 정언명법과 그것의 원천으로서의 선의지 혹은 양심에 대한 구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거의 전 범위에 걸쳐 칸트철학과 대결한다. 특히 이성 장과 정신 장에서는 칸트의 도덕철학이 주요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를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그는 행위가 구체적인 삶의 산물임을 들어 단순히 실천이성만의 문제일 수 없음을 역설하는데, 도덕은 정신의 발전에서의 불완전한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간 ■■정신현상학■■에 관한 여러 논의가 있어 왔지만 그의 도덕철학을 주제로 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사실 도덕철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에게서는 매우 모호하다. 그것은 칸트에서처럼 어떤 통일된 하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더구나 도덕철학은 실천철학을 위한 한 부분에 그친다. 단순히 의지규정의 이론을 도덕철학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삶 속에서의 의지규정은 형식적 원칙만에 의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의 구체적 발전에서 자유의 실현을 위한 제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도덕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의 저작에서의 논의 순서를 따라 거칠게 말한다면 그의 도덕 개념은 소박한 자연적 의식과 인륜적 정신 개념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시대로 따지자면 근대 초기의 탈전통적인 주체성 철학의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대적 정신과 자기확신적인 근대정신 사이에 위치하여 양자를 매개시켜주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그의 도덕 개념은 근대적 주체성의 정점에 있긴 하나 여전히 자아와 세계의 분열 위에서 나타나는 개념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정신현상학■■ 전반에 걸쳐 정신의 발전을 추적하면서 그 속에서 도덕으로 이해되는 부분의 전개를 살펴볼 것이다. 그 중에서도 보다 구체적으로 도덕철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인 이성 장의 ‘행위하는 이성’과 정신 장의 ‘도덕적 세계관’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이성과 도덕
■■정신현상학■■의 변증법적 전개는 항상 의식-자기의식-이성의 세 계기로 이루어진 구조를 갖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의 의식은 자아 이외의 존재인 즉자적 존재를 그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자기의식은 자아 자신을 대상으로 함으로써 자신의 자립성과 자유를 위해 타자를 배제한다. 그런 한 정신의 이 두 계기는 항상 대립과 분열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두 계기의 대립은 이성에서 해소된다. 그래서 이성은 존재와 사유, 자연과 자유의 화해라고도 말해진다.
자기의식은 그 발전에서 배타적 개별성을 벗고 보편성으로 상승한다. 개별적 자기의식이 보편적 자기의식이 되는 것이다. 그 발전의 종점에서 대상지와 자기지가 일치한다. 이것이 이성이다. 이전의 ‘불행한 의식’이 이 세계로부터 도피하여 피안의 세계에서 구원을 찾았던 것에 비하면 이성에 이르러 의식은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무한성을 구한다. 그러므로 이성에서는 “자기의식이 지녔던 타자적 존재에 대한 부정적 관계”가 긍정적인 것으로 바뀐다. “사유하는 바가 직접적으로 현실을 의미”(같은 곳)하는 이런 이성의 입장을 헤겔은 관념론으로 부르는데, 이 때의 관념론이란 어떤 특정한 주의, 주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의 한 국면이다. 그리하여 헤겔은 이성을 관념론의 관점에서 “그 자신이 모든 것의 실재라는 데 대해서 의식이 지니는 확신(die Gewißheit des Bewußtseins, alle Realität zu sein)”(133, 311)으로 규정한다.
나아가 이성은 노예의 복종과 봉사를 통한 자기의식의 보편화를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는데, 노동을 통한 상호인정의 계기가 이성으로의 상승을 가능케 한다. 이뽈리트에 의하면 “이성은 자기의식이 서로가 서로를 매개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첫번째 결과”(Hyppolite, 275)이다.
한편 ■■엔찌클로패디■■는 보편적 자기의식이 이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설명하면서 이성과 정신의 차이를 언급하고 있다. 왜 자기의식은 이성을 거쳐 정신으로 나아가는가? 자기의식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의해 보편적 자기의식으로서의 이성이 되지만, 이 이성은 “아직 추상적이거나 형식적인 통일”의 의미를 가질 뿐이어서 정신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자기의식이 곧 바로 정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정신이란 개념의 주관성과 객관성, 보편성의 동일성으로서의 이성이 전개된 결과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성이 실체의 형식에 해당한다면 정신은 주체가 된 실체인 것이다. 이성은 그 자신이 실재 전체라는 것을 단언할 뿐 이를 개념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성은 자신의 역사적 생성과정에 대한 자기인식을 획득함으로써 비로소 현실세계 속의 지반을 얻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도덕을 정신과 관련하여 구명할 때 살펴볼 것이다.
헤겔에서 정신의 역사관련성을 염두에 둔다면 자기의식의 ‘불행한 의식’으로부터 ‘이성’에로의 이행은 중세의 교회로부터 근대로의 이행으로 이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은 근대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중에 ■■법철학■■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헤겔은 근대 시민사회가 지닌 분열된 인륜의 모습을 넘어서고자 하는데, 이를 보면 도덕에 대한 그의 부정적 태도는 분명하다. 시민사회가 욕망과 노동의 소외를 기초로 한 세계였고 이의 발전적 극복을 통해 고양된 인륜성이 헤겔의 목표였다면 그러한 해방된 욕망과 노동의 소외의 원천인 도덕의 추상성은 정신의 자기인식적 실현에 한 계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이성의 이와 같은 성격과 한계를 염두에 두고 어떻게 이성 장이 헤겔의 도덕철학으로 읽힐 수 있는지를 고찰해보기로 한다.
■■정신현상학■■의 구성을 보면 ‘이성’ 아래에 ‘이성의 확신과 진리’라는 하나의 장만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관찰하는 이성’과 ‘자기자신에 의한 이성적인 자기의식의 실현’, ‘그 스스로 즉자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 등의 세 절이 편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도덕과의 보다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주는 부분은 물론 나중의 두 절이다. 특히 관찰하는 이성과 활동하는 이성의 대비가 그러하다. 이성 장 안에서 도덕의식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상당히 긴 내용을 할애하고 있는 ‘관찰하는 이성’의 절은 사물의 관찰에서 유기체의 관찰을 거쳐 관상학, 골상학 등을 의식 장에서의 서술방식에 따라 전개시키고 있다. 이런 이성은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이론이성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좀 더 직접적으로는 셀링적인 이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셀링적인 이성은 실제로 자연에서 자기 자신을 적접적인 실재로서 추구하였다. 그러나 헤겔에 의하면 “자연은 단지 자기 자신을 벗어나 방황하는 정신일 뿐이며 직관 속에 흡수되어버린 자아, 존재 속에서 상실된 자아”(Hyppolite 1, 292)이다. 관찰하는 이성은 개념을 존재 속에 고착시키는 것으로서, 개념을 추구하되 존재로서의 개념을 추구하고 자아를 추구하되 오직 직접적인 실재로서의 자아를 추구하는 데에 그친다. 즉 관찰하는 의식으로서의 이성은 “자기 자신을 존재하는 대상으로, 혹은 구체적이면서도 감각적 내지는 현재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동시에 이를 소유하고자 한다.”(138, 324)
관찰하는 이성은 이성 자신을 대상으로 하지 못하고 사물, 세계, 법칙, 자연체계 등을 외면적으로 고찰할 뿐이다. 기껏해야 “외면은 내면의 표현이다”(149, 348)는 법칙을 맹목적으로 쫒고 있을 뿐이다. 헤겔은 이 점을 관찰심리학이나 손금, 관상, 골상, 필적 등에 관한 학문들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내면의 참된 본질을 본래의 모습으로 간직하고 있는 그런 외면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인간의 의지와 행동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이로써 의식은 실재적인 삶의 영역, 즉 자기의 행동이나 사회적 윤리적 삶의 영역에 도달하고, 이성적 자기의식의 실현이 자신에 의해 이루지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논의는 이성장의 둘째 절인 ’자기자신에 의한 이성적인 자기의식의 실현‘에 이른다.
2-1. 행위하는 이성
관찰에 있어서 이성이 감성적 확신과 지각 및 오성의 단계로 이루어진 의식 장의 운동을 반복하였듯이 이제 2절에 들어서도 이성은 자기의식의 이중적 운동을 반복한다. 즉 이성은 여기서는 활동적 이성의 모습으로 그 자립성으로부터 자유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선 이와 같은 활동적 이성(tätige Vernunft)은 그 자신을 단순한 개체(Individuum)로 의식함으로써 바로 그와 같은 개체의 입장에서 자신의 현실성을 타자 속에서 요구하며 또 이를 산출해 내야만 하지만 그러나 이런 연후에는 이 개체의 의식이 일반성으로 고양되는 가운데 모름지기 이 의식은 일반적 이성이 됨으로써 동시에 즉자대자적인 면에서 이미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이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193, 437)
이러한 개체로서의 활동적 이성은 자신 안에서 갖가지의 자기의식을 통합하여 단순한 정신적 실재이자 현실적 실체가 된다. 헤겔에서 이성적 자기의식의 실현은 피히테의 실천적 자아나 셀링의 절대자에 의한 자유의 실현구상을 넘어선다. 이성이 현실적 실체라 한 언급 속에는 이미 사회적 질서로서의 인륜의 세계나 역사가 전제되고 있다. 즉 이론과 실천, 자연과 자유의 종합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의 인륜의 전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정신 장에서 본격적으로 서술되고 있거니와 이에 이르기 전에 헤겔은 이성 장의 2절에서 개별적인 자기의식을 검토한다. 왜냐하면 정신이 그 직접성을 벗어나 주체로서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체의 자기인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개별적 자기의식은 실체의 한 가운데서 활동하는 이성 또는 실천적 자아로서 실존한다. 헤겔은 이 자기의식이 자신의 고립상태에서부터 정신적 실체에까지 고양되어가는 경험을, 그 시대의 개인주의의 형식에 대응하는 세 단계로 재구성하고 있다.
a. 쾌락과 필연성
헤겔의 개체성(Individualität)은 아직 이성 자신의 확신을 객관적 진리로까지 고양시키지 못한 활동적 이성을 말한다. 그것은 민족정신이나 보편적 정신 속의 실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근대적 개체의 낮은 수준의 정신이다. 이러한 근대적 개인주의에서는 “실체적이고 직접적 생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켜 실체의 사유, 즉 도덕적으로 고양되어가는”(Hyppolite, 350) 자아가 나타난다. 이에 따라 활동적 자기의식은 개별적 개체성과 세계질서 혹은 다른 말로 사회적 현실로서의 인간세계간의 제관계를 중심으로 개별성과 보편성의 대립을 거쳐가는데, 그 첫째의 대립항이 쾌락과 필연성이다.
개별적인 개체성은 처음에는 자신을 존재 속에 정립하고서는 자신의 개별성(Einzelheit)을 향유하며 나아가 자신을 보편성으로 고양시키려고 한다. 여기서의 대립항은 개별자와 보편자, 대자적 개체성과 세계이다. 쾌락과 필연성이라는 형식에서 개체성은 어떻게 자신의 개별성과 세계를 화해시켜 나가는가?
우선 개체성은 순수한 욕구로서 타자의 부정을 의도하고 자신의 자립성만을 주장하였던 추상적 자기의식과 유사하다. 헤겔은 쾌락의 향유에 머물러 있는 자기의식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자기의식)의 욕망과 대상이 상호무관한 독자적 위치에서 서로 대립해 있도록 하는 터전을 이루는 것은 생동한 현존재일 뿐더러, 만약 이렇듯 생동한 현존재가 욕망의 대상이 되어 있는 한 바로 그 현존재는 욕망의 향유를 통해서 지양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기의식은 결국 쾌락을 향유하는 상태에 이르거나 아니면 자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와 같은 의식 속에서 자기를 실현시킨다고 하는 의식에 도달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서 그는 두 개의 자립적인 자기의식이 통일된 상태를 직관하는 단계에 다다른다.”(199, 449)
그러나 자기의식은 쾌락을 향유함으로써 대상적이게 되었지만, 타자는 그 현실성이 파괴당함으로써 결국에는 부정적 실재로서 오히려 자기의식을 잠식해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헤겔은 쾌락을 향유하는 자기의식의 본질적 대상을 다소 추상적으로 필연성으로 부른다. 즉
“이렇게 볼 때 결국 쾌락을 향유하는 상태에 있는 자기의식이 자신의 본질로 삼을 수 있는 대상이란 다만 이상과 같이 공허한 본질태, 즉 순수한 통일과 순수한 구별 그리고 다시 이들 양자간의 관계가 다기화되고 전개 발양된다는 데 있을 뿐이므로 결국 개체성이 자기의 본질로서 경험하게 되는 대상이란 더 이상 아무런 내용도 지닌 것이 없다. 이제 이러한 대상은 필연성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바, 왜냐하면 필연이나 운명 등으로 불리는 것은 본래 그것이 과연 무엇을 행하는지, 그리고 그의 특정한 법칙이나 적극적인 내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그 누구도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00, 451)
개체가 현실화시키려 하는 쾌락은 다른 사회적 세계 혹은 인륜적 실체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관철하려는 쾌락이다. 이 때 개체성은 오직 자신의 단일한 개별성만을 욕구할 뿐이다. 그러나 자기의식 장의 주노관계에서 확인했듯이 개체성이 쾌락실현의 대상으로 삼는 세계는 개체성 못지 않은 완강함을 가진 현실이다. 개체의 자기의식은 이러한 보편자의 무화시키는 위력을 운명 혹은 필연성으로 인식하며 생으로부터 죽음으로의 이행, 쾌락에서 무화상태로의 이행을 경험한다. 비록 활동적 이성의 형식을 갖긴 하지만 여전히 개별성을 본질로 하는 개체의 자기의식은 세계의 냉혹한 메카니즘에 의해 자신의 붕괴 즉 죽음을 맛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러한 형태의 자기의식이 지니는 현존자로서의 마지막 계기는 다만 필연성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다는 데 대한 상념,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이 다름아닌 자기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생소한 본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일 뿐이다.”(201, 454) 그러나 쾌락의 향유와 세계의 필연성 간의 모순을 떠 맡음으로써 의식은 활동적 이성의 가장 빈곤한 형태를 지양하게 된다.
b. 마음의 법칙과 자만의 망상
이제 자기의식은 새로운 내적 반성 속에서 필연성 혹은 순수한 보편성을 자신의 고유한 본질로 받아들인다. 그 필연성은 자기 밖의 냉혹한 운명이 아니라 개체의 내면적 본질로 이행한다. 개체는 이제 쾌락의 추구가 필연적이며 보편적인 욕망임을 깨닫는다. “여기서 자기의식은 그 자체 내에 직접적으로 일반자나 혹은 법칙을 소유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거니와 이 때 이 법칙은 다만 직접적으로 의식의 대자적인 존재 내에 깃들여 있다는 규정을 받음으로 해서 모름지기 마음의 법칙(Gesetz des Herzens)으로 불리는 것이다.”(202, 455) 개체는 자신의 이러한 욕망의 추구를 보편적 법칙인 것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마음의 법칙은 아직 현존성을 지니지 못하며 다만 활동의 목적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법칙과 욕망의 직접적 통합체인 상태로 의식 속에 대자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아직 실현되었다고는 볼 수 없고 “개념에는 이르지 못한 어떤 타자로서의 법칙일 뿐”(같은 곳)이다. 한편 이 세계는 개별성을 향유하려는 개체에게는 마음의 법칙과는 배치되는 포악한 세계질서로서 그 속에서 인류가 시달리는 질곡으로 나타난다. “룻소나 낭만주의의 개인주의는 이러한 세계의 횡포에 저항하는 마음의 항변이다.”(Hyppolite, 358)
마음의 욕망이 세계의 질서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한 나는 나 자신 및 다른 사람과 대립상태에 있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마음의 법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나 인간 서로 간에 화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마음의 법칙은 실현되자마자 더 이상 마음의 법칙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현되는 과정에서 존재의 형식을 띰으로써 마침내 보편적인 위력으로 나타날 뿐더러”(203, 458) 특정한 개인의 마음과는 무관한 보편적 위력이 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법칙의 실현은 이처럼 보편자로서의 개체성이 스스로에게 하나의 대상이 됨을 뜻한다.
이 단계에서 의식이 어떻게 모순 속에 빠지게 되는가를 보기로 하자. 자기의식은 자신의 마음의 법칙만을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 사회의 질서인 “신적 내지 인간적 질서”(203, 457)는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가 활동적 이성인 한 그는 실제로 이 세계의 질서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런 착란 혹은 광란(Verrücktheit)은 의식이 세계의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동시에 의식하고 있는 한 불가피하다. 이로써 의식은 “광기어린 자만의 독무대”(206, 463)를 연출하거나 이런 파괴적인 도착을 회피하려고만 한다. 이것이 자만의 망상(Wahnsinn des Eigendünkels)이다. 이런 망상에 사로잡힌 의식은 여기서 이러한 마음의 법칙의 전도를 “광신적 승려나 갖은 전횡을 일삼는 폭군들, 그리고 이들에게서 당하는 굴욕을 보상할 심산으로 그 이상의 굴욕을 가하는 시종들”(같은 곳)에 의해 저질러진 인류의 불행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보편적인 세계질서의 변화가 어떻게 몇몇 개체의 작품일 수 있을까? 그것은 수많은 개체들의 상호작용의 산물로 여겨져야 한다. 세계의 질서는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도착된 질서일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보편적이면서 실재하는 질서이다. 이를 헤겔은 “공공질서의 현실성과 위력”(207, 465)이라 표현한다. 이것이 다음에 설명할 세계행정(Weltlauf)이다.
c. 덕성과 세계의 행정
세계의 질서는 그 자체로는 규칙적이고 항구적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저항과 투쟁”(207, 466)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개체들 간의 끊임없이 동요하는 유희다. 개체의 자기의식은 보편성으로 고양됨으로써 이와 같은 세계의 행정에 대항하는 덕성(Tugend)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근대 이전의 덕성이나 도덕적 의식은 법칙과 개체성 상호간의 운동 속에서 법칙을 본질적 측면으로 간주하였다.
고대의 덕성은 민중적 삶의 실체성과 통일된 도덕의 기초였다. 그 덕성과 세계의 행정은 대립관계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의 각성된 개체들의 주체성은 형식적 선의 원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인륜적 덕성으로부터 유리되고 말았다. 낭만주의적 개혁운동가들의 관념론적 의식이 바로 그 한 예이다. 이런 덕성은 완고한 세계의 행정에 대항하지만 항상 이상은 실현될 수 없다는 식의 공허함을 드러내고 만다.
덕성은 개체성의 쾌락 추구가 세계행정의 필연성에 부딪혀 좌절하게 된 것을 경험했고, 또 “개체성이 이 세계 속에 마음의 법칙을 표명하다가 또 다른 개체성의 편으로부터 일반적인 저항을 체험하고 결국 보편자는 물론 과정 속에서 실현되더라도 그것이 우회적인 방식으로 실현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Hyppolite, 364) 세계행정은 수많은 개체성들의 유희의 장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덕성은 세계행정의 대자적 존재인 개체성에서 악이 비롯된다고 생각하여 개체성을 파괴하려 하고,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보편자로서의 법칙을 개체성과 대립시킨다는 것이다. “도덕적 의식은 세계의 행정을 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하며 이에 대한 싸움을 벌이긴 하되 다만 이 싸움판에서 세계의 행정이 도덕적인 의식에게 내보인 것은 일반자이긴 하면서도 결코 이것이 추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일반자가 아니라 개체성에 의해서 활력이 불어넣어진 그리고 동시에 어떤 타자에 대해서 현존하는 그러한 일반자이거니와 이것은 즉 구체적인 효력을 나타내는 현실적인 선일 뿐이다.”(211, 474) 이러한 의미의 세계행정은 덕성이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덕성은 세계행정에서 보편자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목적과 세계행정이 대립하고 있는 것 못지 않게 근원적으로 통일되어 있음도 깨닫는다. 그리고 덕성은 세계행정과의 대립이 가상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한다. 덕성은 다만 세계행정에 있어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인 셈이다.
이제 새로운 구체적 종합으로서의 덕성과 세계행정의 변증법적 운동의 결과를 간단히 요약해 보기로 하자. 참된 것으로서의 즉자태는 개체성의 활동에 의해 의식에 대해 실현됨을 덕성은 깨닫는다. 세계의 행정은 바로 덕성의 실현인 것으로 드러나고 세계행정이 없었다면 덕성도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다. 양자는 처음처럼 대립해 있지 않다. 보다 쉽게 말하여 나는 내가 나의 개체성에 의해 제약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나는 나를 넘어서고 있는 보편자를 어느 정도는 구현하고 있다. 즉 나는 대자적이면서 동시에 즉자적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개체성의 운동은 곧 일반자의 실재성을 나타낸다”(213, 480).
앞에서 관찰하는 이성은 실재성 속에서 자신을 추구하였던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의 경험의 결과에 있어서 관찰하는 이성의 진리는 그 실재성이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에 대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데 있었다. 이리하여 의미는 그 담지자로부터 분리되어 활동적 이성에게로 넘겨졌다. 이제 활동적 이성은 실재성 외부에 자신의 목적을 의미로서 투영한다. 개체성은 쾌락의 향유나 마음의 법칙 등에서 보편적인 것 즉 세계의 질서에 대립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이 실재성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개체성은 이 단계에 이르러 스스로를 창출하는 이성, 활동 속에서 성취된 종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헤겔은 당대의 모든 당위의 관념론에서 드러난 관념과 실재성 간의 분리를 지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뽈리트는 인간 개체성이 보여주는 이 세 가지 경험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즉 “개체성은 목적으로서의 대자를 즉자-소여된 실재-에 대립시킨다. 이러한 대자는 점차적으로 풍부해진다. 마지막 경험(덕성의 경험)에 가서는 즉자가 목적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목적은 소여된 실재와 재결합하며, 그들간의 구별이란 단지 추상에 불과해진다. 우리는 현실로 되돌아오지만 이는 단지 활동으로서의 현실인 것이다.”(Hyppolite, 370)
2-2. 즉자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
개체성은 쾌락의 직접적인 향유와 마음의 법칙, 덕성을 위해 세계행정에 항거하는 데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변증법적 운동의 결과 그것은 이제 ‘즉자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이 된다. 이 단계에서 개체성의 목적은 세계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개체성과 세계는 서로 통일된다. 의식적 개체성과 대상적 세계는 하나의 현실 속에서 결합되는데 이 현실이 바로 행위 또는 활동이다. 개체성은 구체적인 활동에 의해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일, 관찰이성과 활동이성의 통일을 성립시킨다. 이러한 개체성에 있어서 세계는 사물(Ding)로서가 아닌 새로운 대상 개념으로서의 사상(Sache)이다. 이것은 단순한 개체성을 초월한 보편적 자기의식의 작품(Werke)이다. 이렇듯 이 ‘즉자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체성’이란 용어는 이성 장의 최종적인 도달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종요하다. 이성장의 3절에서 등장하는 작품이나 사상 자체라는 용어도 이것의 또 다른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이 단계의 개체성이 새로운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겪어나가는 변증법적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아무런 규정이나 제약도 받지 않는 동물”(216, 487)도 물, 공기와 같은 자연적 요소나, 그 스스로의 여러 자연적 본성, 기관 등에 의해 한정된 동물적 생명을 지니게 되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개체성도 우선은 역시 하나의 개별적이며 한정된 의미를 지닌 개체성일 뿐이다.”(216, 485) 즉 개체성은 이 세계에서 신체나 환경 등에 의해 한정된 본성의 특수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정신적 동물의 왕국”(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체성은 활동하는 이성으로서 그 즉자적인 한정성을 벗어나게 된다. 즉 “행동하는 개체성에서는 한정이나 규정성은 전적으로 부정성이라는 것 속으로 다시 말하면 모든 한정성을 총괄하는 개념 속으로 용해, 해소되고 만다”(217, 488)는 것이다. 개체성은 행위 속에서 자신의 근원적으로 한정된 본성을 지양해나간다.
이는 세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 행위하는 의식은 첫째로 목적으로서 현존하며, 목전의 현실에 대립되어 있다. 그러나 다음으로 그것은 정지해있는 그 목적을 운동시키는 것, 즉 목적의 실현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수단을 뜻한다. 그러나 다시 “세번째 계기가 되는 것은 행위가 자신이 직접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의식하는 그러한 목적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 행위가 이미 행위자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바로 이 행위자에 대한 어떤 타자를 의미하는 것 같은 대상이다.”(같은 곳) 목적과 수단에 뒤이은 이 세번째 계기로서의 ‘대상’이 개체성이 본래 갖고 있던 목적을 존재의 요소 속에 표현한 것, 즉 작품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는 이미 우리의 내부에 있던 목적이 행위를 통해 실현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의식에 대립해 있는 현실의 즉자적인 존재는 한낱 공허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217, 489)
인간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각기 지닌 고유한 개체성을 표현한다. 그런데 작품을 낳는 행위는 그 고유의 목적 때문에 현실에 대해 부정성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제 부정성은 또 다른 맥락에서 등장한다. 행위하는 이성으로서의 의식은 대자적 자각을 통해 보편성으로 고양되거니와 이 점에서도 그 의식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부정성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그 의식은 자신의 작품을 초월하여 또 다른 행위의 맥락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 때 작품과 행위하는 의식 사이에 끊임없는 모순이 발생한다. 즉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은 개체 자신과 세계의 통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 세계는 아니다. 나의 작품은 나의 행위의 표현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모순은 개체의 행위가 상호주관적 지반 위에서 다른 개체의 행위와 만나고 그리하여 나의 작품이 다른 개체들의 작품이기도 할 때에 해소된다. 어떻게 해서 나의 작품이 공동의 작품, 혹은 ‘만인의 작품이면서 각인의 작품’이 될 수 있는가? 바로 이와 같은 성격의 작품을 헤겔은 ‘사상 그 자체’라고 말한다. “모든 개별적 계기을 총괄하는 보편적 류로서의 사상 그 자체”(224, 505)는 새로운 대상성의 개념으로서 다름아닌 정신적 본질이다. 앞질러 이야기한다면 인륜 공동체 속에서 개체들의 자기의식은 이런 대상 속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들의 행위도 보편적인 상호 인정가능한 작품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상 자체’라는 말은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적 삶의 객관적 실현을 뜻하게 된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실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것을 보편적인 국면 속으로 노정시킴으로써 바로 이와 같은 자기의 것이 만인의 관심사가 된다”(227, 512)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성의 이 단계에 이르러 사유와 존재, 주관성과 객관성, 개체와 개체, 작품과 작품, 행위목적과 현실 등의 통일이 ‘사상 자체’라는 표현으로 합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앞에서 만인의 작품이면서 동시에 각인의 작품인 이러한 ‘사상 그 자체’에서 인간이 개별적인 자기의식을 넘어서게 됨을 보았다. 형식적으로 본다면 개체성은 보편적 자기로 고양되었지만, 그러나 사상 자체의 내용은 행위하는 개체들로부터 얻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즉 보편자는 특수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내용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구조를 헤겔은 존재와 자기(사유 혹은 행위)가 하나가 되어 있는 인륜적 세계로 본다. 앞에서의 작품은 이런 의미로 이해된다. 인륜적 세계는 특수한 의식의 산물이 보편적일 수도 있는 그러한 세계이다. 헤겔철학의 근본테제 중의 하나인 ‘지와 지의 대상의 일치’가 여기서는 인륜적 실체와 그에 대한 의식의 일치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사상 자체라는 말이나 주체로서의 실체라는 말도 모두 이것의 표현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헤겔은 정신 장으로 이행하기 전에 아주 짧은 지면을 할애하여 ‘법칙제정자로서의 이성’과 ‘법칙검증적 이성’을 말하면서 개체성의 변증법적 운동을 마무리한다. 이는 헤겔적 의미의 도덕성과 인륜의 차이를 언급한 것이어서 주목을 끈다.
헤겔은 여기서 인륜에 대한 고찰을 뒤로 역행시켜 다시금 도덕성과 관련짓고 있다. 그는 개별자의 사유에 불과한 도덕의 우연성이나 비도덕의 가능성이 어떻게 지양되는지를 보여준다. “인륜적 실체의 여러 법칙이나 그 주된 요소들은 직접적으로 인정된 것이어서 결코 그 근원이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229, 516) 것들이며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자기충족적인 실재”(같은 곳)이다. 그와 다른 것이 있다면 기껏해야 자기의식 정도일 것이지만, 이 후자 또한 이러한 실재의 대자적 존재라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 이러한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기의식은 스스로 안에 있는 법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즉 “건전한 이성은 과연 그 무엇이 정당하고 선한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229, 517)는 것이다. 헤겔의 예를 들어보자. ‘누구나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무조건적 의무가 과연 이성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위의 도덕적 언명이 진정으로 타당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진실을 알고 있어야 하는데, 사실 그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진실이란 그 자신의 확신일 뿐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율도 마찬가지이다. “지적 판단이 따르지 않는”(231, 520) 이웃 사랑은 자칫 이웃에게 오히려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이성이 이처럼 법칙을 제정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계율을 주장한다면 그 의무의 요구와 함께 이성은 어느덧 그 내용을 방기시켜 버리게 된다. 도덕적 주장의 요구는 결국 그 어떤 내용으로부터도 자유로와야 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성이 제정하는 법칙은 이런 의미에서 한낱 당위로 그칠 뿐이고 현실성을 지닌 것이 아니므로 이것은 법칙이 아니라 한갓 계율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 내용이 포기됨으로써 이성에게는 이제 형식적 보편성만이 남게 된다. “아무런 내용도 주어질 수 없는 상태에서 행해지는 법칙제정이란 다만 보편성이라고 하는 순수형식에 지나지 않거니와 ...... 의식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231, 522) 칸트에서처럼 이성은 이제 법칙을 제정하는 역할이 아니라 제정된 법칙을 검증하는 일이나 떠맡는 데에 그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에 있어서 단순한 동어반복에 그치는 모순율이 “실천적 진리의 인식을 위해 형식적인 기준 이상의 역할을 한다는 듯이 여겨진다면 이는 실로 해괴한 현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234, 527) 헤겔은 이와 관련하여 재산을 예로 들고 있거니와 사유재산제나 재산공유제나 아무런 자기모순이 없으면서도 다른 시각에서 보면 또한 자체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법칙검증적 이성으로서는 인륜적 실체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법칙을 제정하거나 검증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난 것은 “유리된 개별자의 위치에서 한낱 불안정하게 방황하는 인륜적 의식”(234, 527)의 실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개체적 이성의 규정적 법칙은 자의적 내용을 지닌 개별적 의식의 법칙에 불과하다. 이런 이성에 대해 인륜은 순종을 강요하는 폭군의 전횡과도 같다. 그리고 법칙의 제정과 검증, 이 두 계기는 실재하는 정신적 실체와 부정적 관계에 놓인다.
그러나 “이제 법칙제정과 검증이라는 두 가지 태도가 지양됨으로써 어느덧 의식은 보편적인 것의 내부로 복귀하는 가운데 모름지기 이들 두 계기 사이의 대립도 해소되기에 이른다.”(235, 529) 이리하여 정신적 실재도 구체적인 실체일 수 있게 되고, 의식도 자신을 이러한 정신적 실재 안에 정립하여 “바로 이 정신적 실재를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자각적 본질로 되게 하는 것이다.”(같은 곳) 이제부터 ‘정신적 실재’라는 개념이 헤겔의 논의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를 헤겔은 여러가지로 표현하는데, ‘자기의식에 대해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법칙’, ‘불변적인 영원의 법칙’,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직접적인 존재의 형식을 지닌 절대적이고도 순수한 만인의 의지’, ‘범주로서의 일반적인 자아’(235, 529-530 참조)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실재에 대응하여 ‘인륜적 마음가짐(Die sittliche Gesinnung)’은 정당하게 여겨지는 그와 같은 정신적 실재를 조그만 동요도 일으키지 않고 또한 그 근본원인을 찾아 뒤흔드는 일도 없다. 심지어 헤겔은 여기서 “내가 법칙을 검증하려고 할 때면 이미 나는 부도덕한 길목에 들어서 있는 것”(237, 533)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로써 그에게 “인륜적 실체는 마침내 자기의식의 본질을 이루게 되고 ...... 자기의식은 그 인륜적 실체의 구체적인 현실성과 현존성을 나타내며 동시에 바로 이 실체의 자기이며 의지이기도 한 것이다.”(같은 곳)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주체적인 실체이자 존재 자체로서 정립된 이성인 정신에 도달한다.
3. 정신과 도덕적 세계관
이성은 이제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모습을 띰으로써 자신의 진리에 도달하고 정신이 되었다. 그것은 인륜적 현실성이나 인륜적 본질, 혹은 민중의 인륜적 생활, 하나의 세계로서의 개체를 의미한다. 정신은 이 생동하는 인륜적 세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지의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을 겪어나간다. ■■정신현상학■■의 정신 장은 먼저 참된 정신으로서의 ‘인륜’에서 시작한다. 그 후 정신은 교양과 신앙 속에서 스스로의 소외된 자기분열을 겪은 다음, ‘도덕성’이란 제목 하의 자기확신적 정신으로 복귀하고 있다. 이처럼 직접태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상실을 거쳐 다시 자기복귀하게 된 자기의식은 도덕성 속에서 그 자신을 본질태 혹은 구체적 자기로서 포착하는 ‘자기확신적 정신’이 된다. 이 글에서는 정신 장의 운동을 모두 살펴보는 대신에, 헤겔이 칸트적인 의미의 도덕을 넘어 어떻게 인륜적 자각이 깃든 참된 정신에 이르는지를 세번째 절인 ‘도덕성’, 특히 그 중에서도 ‘도덕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고찰하기로 한다. 여기서 헤겔은 칸트나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에서의 도덕적 세계관을 비판하여 최종적으로는 양심과 보편적 정신과의 화해를 모색한다.
정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지를 기반으로 행위하는 정신이 된다고 할 때 이러한 자기지의 주관성의 차원이 자기확신적 정신, 곧 도덕성이다. 이런 도덕적 세계관에 이르는 정신의 운동은 정신 장의 목차 구성을 보면 대략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로 정신은 자기의식과 의무의 직접적인 통일로서의 인륜에서 출발한다. 의무는 자기의식의 본질 자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신은 교양의 과정 속에서 보편성을 획득해가는 자기운동을 거치게 되거니와 이로써 직접적 인륜의 자연적 실존이 흔들리게 된다. 이것이 두번째의 단계로서 정립의 직접적 부정이라 할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말로 개별적 의지가 보편적 의지에 의해 부정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논구되고 있는 대상은 계몽주의의 자유 개념이다. 그러나 추상적 자유 속에서 스스로의 소외를 경험하게 된 정신은 이제 세번째 단계에 접어드는데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칸트적인 순수의무를 자기확신에 차서 행위의 목표로 삼게 된다.
이러한 도덕적 세계관은 정신의 실체를 이전의 교양이나 신앙에서와는 달리 밖에서 구하지 않고 자신 안에서 구하고 있다. 도덕성의 절대적 계기는 바로 의무에 대한 개체적 확신과 인식이다. 개체 차원에서 자기의식의 본질로 여겨지고 있는 바로 이것이 순수의무이다. 이 순수의무 안에서 정신은 자기 자신을 소유하는 정신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자기확신적 정신은 먼저 두 측면에서 규정된다. 그것은 계몽적 자아처럼 자신의 특수한 의지를 보편적 목적으로 삼는 정신도 아니며 그렇다고 참으로 구체적인 보편적 목적을 가진 정신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형식적일 뿐인 추상적 보편성, 즉 순수의무만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 정신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신에서 보편적 목적은 형식적 보편성에 그칠 뿐 내용적으로는 여전히 개체의 특수한 의지에 매여 있다. 자유와 자연의 두 상반된 계기 사이에 있는 이런 정신의 입장이 어떻게 도덕적 세계관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지를 헤겔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상과 같은 규정에 따라서 마침내 하나의 도덕적 세계관이 형성되거니와, 이것은 곧 도덕적인 ...... 존재와 자연적인 ...... 존재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결국 이러한 관계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자연과 이에 반대되는 도덕적 목적 및 행위 사이의 전혀 상호무관한 각자의 독립성인가 하면 또한 이와 다른 면으로는 오직 의무만의 본질성에 대한, 그리고 자연의 완전한 비자립성과 비본질성에 대한 의식이다. 결국 도덕적 세계관은 이렇듯 서로가 전적으로 상반되는 두 전제 사이의 관계 속에 가로놓인 여러 계기의 전개를 내포하고 있다.”(325, 730)
3-1. 칸트의 도덕주의와 의무개념
도덕적 세계관에서 헤겔이 논의의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크게 보아 칸트적 도덕주의와 이에 대립하여 생겨난 낭만주의의 세계관이다. 먼저 칸트적인 도덕적 세계관은 헤겔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칸트에 있어서 도덕적 자기의식은 순수의무를 본질로 한다. 그는 오직 의무에 의해 규정된 행위만을 도덕적이라 한다. 도덕법칙은 자아 안에서만 발견되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진정한 자아로 여겨진다. 도덕적 자기의식은 순수의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덕적 자기의식은 개별성의 측면을 나타낸다고 할 자연인 의무와 결합되지 않으면 형성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자유와 자연적 본성은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상충하는 계기이기 때문에 도덕적 세계관은 결국 모순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도덕적 세계관을 운동 속에 빠뜨린다. 이 모순은 어떻게 해소되는가? 칸트는 이에 요청의 개념으로 대응한다. “도덕과 행복이라는 양자간의 통일은 하나의 소망이 아닐 뿐더러 다시 이러한 통일을 목적으로서 간주한다면 그것은 결코 성취 여부가 아직도 불확실한 그런 목적이 아니라 오직 이성의 요구이며 나아가서는 이성의 직접적 확신이자 그 전제일 뿐이다.”(326, 733) 통일이 요청으로 제기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 한 그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요청에 대한 의식일 뿐이고 감성과 순수의식의 대립일 뿐이다.
칸트는 순수의무라는 보편자에 의한 자기규정성을 노리는 자기의식이 자유(도덕)와 자연(본성)간의 모순에 빠지는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실천이성의 요청 개념에 호소한다. 헤겔에 의하면 이 때 칸트에게서는 세 가지의 요청이 등장한다. 첫번째 요청은 “도덕성과 대상적 자연과의 조화를 지향하는, 즉 세계의 궁극목적에 관한 것”(328, 736)이다. 이는 행복과 도덕의 즉자적인 종합에의 요청이다. 두번째의 요청은 “도덕성과 감성적 의지와의 조화로서, 즉 자기의식 그 자체의 궁극목적에 관한 것”(같은 곳)이다. 이는 대자적인 종합에의 요청이다. 그리고 세번째의 요청은 위의 두 “궁극목적을 매개적인 중심, 매사(媒辭)의 위치에서 서로 연결하는 ...... 현실적인 행동 자체의 운동”(같은 곳)에 대한 요청이다. 이것은 즉자대자적인 종합에의 요청이다. 그런데 이를 보다 간단히 완전선에 대한 요청, 최상선에 대한 요청, 성스러운 도덕적 입법자에 대한 요청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들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하고 총괄적인 설명만 덧붙이기로 한다.
헤겔에 의하면 칸트에서의 이러한 요청들은 그의 도덕철학의 내적인 자기모순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온다. 칸트에서 도덕적 의식의 형식은 도덕법칙의 보편성에 있는 데에 반하여 그 내용은 자연적 감성에서 얻어진다. 헤겔은 칸트에서 이러한 형식과 내용 사이의 내적인 모순 못지 않게 도덕법칙과 현실적 행복 사이의 외적인 모순도 있음을 지적한다. 헤겔이 보기에 칸트는 후자에만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외적인 모순에 들어있는 내적인 모순을 보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내적 모순에 대한 자기 반성을 통해 새로운 의식형태로의 발전을 시도하지 못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칸트의 도덕적 세계관을 다른 방식으로 세 측면으로 정리해보자. 우선 그의 도덕적 세계관은 “의식 자체가 그 대상을 의식의 힘으로 산출해내는”(332, 744) 것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 “의식은 그 스스로가 자기의 대상을 오히려 피안에 해당하는 자기의 외면에 정립시킨다.”(같은 곳) 이런 두 측면을 볼 때 “실제로 도덕적 세계관은 오직 그 근저에 깔려있는 모순이 각기 서로 다른 여러 측면에 따라서 형성된 것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아니다.”(332, 745) 헤겔에 따르면 칸트 도덕철학 안에 들어있는 이런 모순들 때문에 도덕의식은 이제 변위(Verstellung)에 빠진다. 즉 어떤 때는 하나의 계기를 설정하고 또 다른 때는 그와 대립된 다른 계기를 설정하는 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끊임없이 전환하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요청을 약술했거니와 도덕의식의 변위도 이에 대응하여 진행된다. 그리하여 “실존과 순수의무 간의 모순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또 ‘도덕적 의식이 존재한다. ....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율배반에 도달했던 도덕적 세계관을 구출하는 데는 의식 자체의 변위를 실행에 옮겨 차안 곧 우리 자신의 의식 속에 놓일 수 없는 것을 피안이라는 다른 의식 속에 정초시키는 길만이 남아”(Hyppolite, 208-9) 있게 된다. 도덕적 세계관을 지배한 변증법적 운동은 결국 초월을 향한 변위로 끝맺음하게 되는 것이다. 순수한 도덕법칙과 의무를 토대로 성립한 칸트적 도덕의식은 그 실현을 위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내적 모순이 빚어내는 동요를 진정시킬 수 없다. 이 점에서 헤겔은 도덕적 세계관을 위선으로 표현하여 비판하고 이로부터 도덕의식은 새로운 형태의 정신으로서의 양심으로 나아간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양심은 자신 내부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절대적 의무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도덕의식보다 일보 진전된 정신이다.
3-2. 양심의 문제
헤겔은 칸트의 도덕적 의식이 순수의무와 자연적 의지. 보편적 도덕법칙과 개별적 현실 사이의 대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고 누차 강조한다. 이런 도덕적 세계관에서 주체는 행위하는 개체성으로 제시되지만 실제로는 행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덕적 의식에 있어서 그 의식의 즉자태는 추상적인 비현실적 본질이거나 몰정신적 현실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록 정언명령을 통해 칸트 도덕철학이 행위 원칙의 객관성을 확보하였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 실현의 문제와는 다르다. 칸트 이후의 독일관념론자들은 본성과 의무가 자기(Selbst), 즉 자율적인 정신적 주체 안에서 유기적으로 통일되고 있다고 봄으로써 칸트의 미제를 넘어서려 한다. 양심은 바로 이와 같이 의무와 그에 대한 지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자기확신적 정신, 즉 자기이다. 양심은 보편적 의무를 자기의 내면, 주관적 확신 속에서 즉각적으로 인식하며, 또한 양심은 자연적 의지임에도 사적인 특수 의무가 아니라 보편적 의무를 수행한다.
그런데 양심에서 눈여겨 볼 것은 ‘자기’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것이 직접적 현존을 갖는다는 점이다. 양심에서 “자기의식 자체는 스스로 우연성을 지닌 가운데서도 완전한 자기타당성을 지님으로써 이것이야말로 그의 직접적 개별성을 곧 순수지이며 순수행동으로, 그리고 다시 참다운 현실이며 참다운 조화로서 깨우친다.”(341, 763) 헤겔은 여기서 “그 자신을 절대적인 진리이며 또한 존재임을 확신하는 정신으로서의 양심”(같은 곳)을 지니는 자기를 제삼의 자기라고 부르면서 이전에 등장했던 자기와 구별한다. 인륜의 세계의 진리인 총체성 내지 현실, 즉 인격(Person)을 제일의 자기, 순수통찰에서의 순수자아를 제이의 자기라고 한다면 양심은 제삼의 자기라는 것이다. 양심에 이르러서 “비로소 자기의식은 단지 공허했던 의무와 법과 그리고 일반의지에 대한, ...... 내용을 그 스스로의 자기확신으로 간직하면서 또한 ...... 양심 속에서 자기의 구체적 현존재를 마련하기에 이른다.”(342, 764) 제이의 자기가 순수자아로서 절대적 부정성이었다면 이제 구체적 현존을 가진 정신인 양심은 인정된 현실 속에서 존립한다.
양심은 앞선 두 자기를 어떻게 통일하는가? 먼저 양심은 구체적인 행위 각각에 도덕법칙이 적용될 수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인식한다. 나아가 “양심은 행위의 상황을 여러 의무들로 구별할 필요가 없다...... 행위의 상황은 하나의 유기적 전체이며, 따라서 양심은 자기의 행위가 이런 유기적 전체를 동시에 만족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결국 양심은 자연적 의욕 속에서 보편적 의무를 수행하고 자신의 행위가 타자에 의해 인정되고 있는 것으로 확신한다. 칸트적인 객관적 타당성은 헤겔에서는 사회적 상호인정 속에서만 충족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양심은 근본적으로는 도덕의식의 모순을 해결하고 있지 않다. 양심이 자기확신을 벗어나 행위와 관련될 때 양심은 그 행위의 본질을 인식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우연적이며 개별적인 수준에 머물 뿐이다. 양심은 도덕적 세계관의 모순을 불완전하게만 해결한다. 즉 양심은 개체의 자의에 불과한 것을 보편적 법칙이며 의무라고 사칭하는 것이다. 순수의무와는 달리 개체성의 측면을 중시하는 “양심은 스스로를 최고라고 느끼고 이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영혼의 ‘도덕적 천재성’으로 바뀐다. 이 아름다운 영혼은 신성이 지니는 직관을 향유하는데 정신이 팔려 의무에 따른 그 어떤 행위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양심 안에서 획득된 대립들의 통일은 다시 붕괴되어 위선이 되고 만다.” 헤겔이 이와 같은 낭만주의적 양심 개념을 위선이라고 비판한 것은 그의 ■■법철학■■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법철학■■에서 양심은 “즉자대자적으로 선한 것을 의욕하는 심성”으로 정의되고 있다. 진정한 양심은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으며 이 원칙을 대자적 객관성을 지닌 규정이자 의무로 삼는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적 의무 내용과 주관적 지의 합일은 인륜에서야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에 인륜 속에서 펼쳐지지 못하는 양심이란 형식적 양심, 즉 일개 주관의 확신에 지나지 않는다. 형식적 양심은 쉽게 주관적 속견이나 독단적 확신에 빠져버린다. 여기서는 선도 주관화되어 버린다. 이러한 위선의 근원은 자기 내면으로의 도피에서 빚어지는 도덕의식의 추상성이다. 이로써 악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데, 양심이 형식적 주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양심은 즉자대자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원리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 못지 않게 자기만의 특수성을 원리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 즉 악의 가능성이기도 한 것이다. 양심은 언제라도 악으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다.
양심으로 표현된 주체 즉 행위하는 개별자는 언제나 유한한 행동이라 할 자신의 자유 속에서 한계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고 그리하여 자체 내에서 악 자체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의식이다. 여기서 양심은 행위하는 의식과 판단 혹은 평가하는 의식 양자 사이의 변증법적 운동을 거친다. 이 운동 속에서 양심은 개별성이나 특수성을 본질로 하는 행위하는 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영혼으로서, 보편성을 본질로 하는 판단 혹은 평가하는 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의식은 행동적이기보다는 관조적이다.
그런데 전자의 행위하는 의식은 양심에 있어서는 악을 범하는, 즉 죄를 짓는 의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영혼은 그 관조적 성격 때문에 행위를 통해 현실에 자신을 실현하려는 외화의 힘을 결여하고 있다. 그 영혼은 현실적 행위로 인해 더럽혀진 자신을 회복하려는 막연한 동경에 머문다. 바로 여기서 종교를 통한 죄와 용서의 변증법이 펼쳐진다. 즉 행위하는 양심은 자신의 행위의 악을 악으로서 고백하고 아름다운 영혼 또한 그 완고한 마음을 접고 악 안에서 자신을 직관하여 그 악과 자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용서이다. 고백과 용서의 이와 같은 관계에서 양심의 개별성은 지양되며, “보편자와 특수자, 인륜의 비현실적인 본질과 현존하게된 현실적 행위가 통일되는 그러한 상호인정에서 절대정신이 출현한다. ...... 정신이 자신의 절대성을 ‘용서하는 정신’으로 실현하는 한에서 정신은 ‘현상하는 신’이 되며 종교의 단계로 고양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심에 있어서의 고백과 용서를 통한 상호인정이야말로 정신이 기나긴 도정의 운동을 거쳐 절대정신으로 고양되려 하는 마지막 계기인 셈이다.
낭만주의적 양심 개념에 대한 비판에 이어 헤겔은 근대정신의 발전의 최종단계를 기독교적인 고백과 용서로 보고 있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개신교적인 구원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헤겔은 자기의식을 지닌 근대 시민들간의 상호인정이 아니라 신과 인간간의 화해를 절대정신의 최종적 계기로 삼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중의 ■■법철학■■에서는 종교가 ■■정신현상학■■에서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는 않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그의 이상론적인 사상이 보다 현실적인 경향을 띠어간 것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4.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도덕’ 개념과 ‘도덕적 의식’이 헤겔에서는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살펴보았다. 물론 헤겔은 도덕 개념을 그 나름의 엄밀한 의미에 따라 사용하고 있어서 정신 장에 나타난 인륜이나 양심 같은 개념까지 논의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의문이긴 하지만 헤겔의 도덕철학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데 영역의 확장은 불가피하고도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에서는 절대지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도덕적 의식의 발전은 독자적인 주제가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도덕과 인륜의 대립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헤겔의 도덕철학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정신현상학■■의 이성 장과 정신 장에 걸쳐 제시되고 있는 헤겔의 도덕철학을 이끌고 있는 관점은 동일성 내지 통일에 대한 그의 열망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크게 보아 세 가지로 압축되거니와 뤼터펠츠의 설명을 빌어 이를 제시함으로써 글을 마치고자 한다. 즉 뤼터펠츠에 따르면 헤겔의 도덕철학을 지배하고 있는 동일성은 (1) 개별적인 도덕적 자기이해와 보편적인 도덕적 확신 사이를 지배하는 동일성, 나아가 (2) 주관적인 도덕적 확신과 객관적인 도덕적 진리 사이의 동일성, 마지막으로 (3) 실현되어야 할 도덕적 목적들 및 의도들과 행위에서의 사실적인 목적실현 및 의도실현 간의 동일성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해온 여러 요소들은 모두 이러한 동일성의 전개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헤겔의 도덕철학이 이러한 동일성을 향한 운동을 구체화하고 있는 한, 그것은 세계 속에서의 자기인식이자 자아와 세계의 간격을 극복하는 일을 목표로 하는 그의 철학의 전반적 과제에 속한다. 도덕이란 궁극적으로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이 세계를 자신의 행복추구의 장으로 인식하고 또 그런 터전으로 만드는 활동으로 이해된다. 다른 말로 이것은 한 개인과 다른 개인의 관계, 나와 세계의 대립이 점차적으로 극복되어 이 세계를 진정한 우리의 세계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하는 정신발전의 한 단계인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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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 (G.W.F. Hegel Gesammelte Werke, W. Bonsiepen & R. Heede hrsg. Bd. 9, 1980) 임석진 역 ■■정신현상학■■, 지식산업사.
G.W.F.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1827) (G.W.F. Hegel Gesammelte Werke, W. Bonsiepen & H-C. Lucas hrsg. Bd. 19, 1989).
G.W.F. Hegel,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oder Naturrecht und Staatswissenschaft im Grundrisse (Werke Bd. 7) Suhrk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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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Kroner, Von Kant bis Hegel, Bd. 2, J.C.B. Mohr(Paul Siebeck), Tübingen 1961.
W. Lütterfelds, “Hegels Konzept der Moral als Kritik der Diskursethik”, in Hegel-Hahrbuch 1993/1994 (hrsg. A. Arndt, K. Barol, H. Ottmann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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