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변명제와 실체형이상학 비판
고 현 범** 충북대학교
【주제분류】독일근대철학, 형이상학
【주 요 어】헤겔 사변명제 실체-형이상학 라이프니츠 정신현상학 논리학
【요 약 문】
본고는 헤겔의 사변명제이론을 판단형식에 대한 실체형이상학적 정초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살펴보려고 했다. 특히 라이프니츠의 “포함이론”은 그러한 정초의 대표적인 시도로 볼 수 있으며, 주어-술어 관계를 고정된 실체-속성의 관계로, 포함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는데, 헤겔의 사변명제이론은 이런 관계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다.
판단형식에 대한 라이프니츠식의 실체형이상학적인 근거지움은 그 전일적이고 일의적인 의미이해의 전제로서 “최고의 모나드”를 상정한다. 이 최고의 모나드는 주어에 “잠재적으로”혹은 즉자적으로 포함된 술어의 의미를 정초한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이 최고의 모나드는 그 비규정성에 비추어서 어떤 자연언어를 사용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사용한다고 해도 유한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언어형식은 수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헤겔의 사변철학에서의 관건은 절대적인 것의 자기전개로서 표현과 서술이며, 이는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다. 이때의 언어는 이미 “굴절된”(Gebrochene) 것으로서, 의미의 단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 그럴 때에 일반적인 판단형식은 한계를 갖고 있다. 더욱이 판단형식의 요소인 주어 술어 관계에 대한 실체-속성으로서의 파악은 그 일면성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는 것”은 바로 근원적인 분리로서 판단을 그 형식과 내용면에서 근본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판단의 요소인 주어와 술어는 상호 운동하는 역동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식으로 헤겔의 사변명제이론은 일반 판단형식에 대한 검토와 함께 그 형이상학적 전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헤겔은 ?논리학의 학?(Wissenschaft der Logik) 시원(Anfang) 범주인 “생성”을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라는 문장에 따라 규정한다. 존재와 무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개념인 생성은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이라는 위상에 맞게 존재와 무와는 달리 하나의 완성된 문장으로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경우 “존재, 순수 존재 - 일체의 더 나아간 규정이 없는”처럼 계사(Kopula)를 “-”가 대신하거나, 무의 경우 “무, 순수 무”처럼 단어의 나열로 시작하는 데 반해서, 생성은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최초의 규정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존재론」의 서론이자 전체 ?논리학?의 시작을 고찰하는 “학문의 시원은 무엇에서 마련되어야 하는가?”에서 제기된 시원의 무전제성 내지는 직접성과 매개라는 복잡한 문제와 더불어 그런 문제설정이 존재 그리고 무의 범주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명이 제시되기도 전에 등장하는 생성 범주에 대한 최초의 규정은 헤겔 논리학 자체의 위상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과연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를 반영하듯이 존재, 무 그리고 생성이라는 시원 범주에 대해서 헤겔은 이례적으로 긴 네 개의 주석을 달고 있다. 그중에서도 관심을 끄는 것은 두 번째 주석인데, 여기에서 사변적 내용을 표현하는데 판단형식이 갖는 한계를 논의하고 있다. 다른 주석들이 시원범주에 대한 철학사적인 고찰과 그 추상성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고 있는 데 반해서 두 번째 주석에서는 “표현”과 “서술”이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논리학? 초판에서는 첫 번째 주석에 포함되었던 내용을 재판에서 독립적인 주석으로 분리했다는 점에서도 헤겔이 이 두 번째 주석에 부여한 중요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헤겔은 자신의 저작 여러 곳에서 판단형식의 한계를 거듭 논의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정신현상학? 서문, 그리고 ?논리학? 시원 범주의 두 번째 주석이다. 사변적 내용을 서술하는데 있어서 판단형식이 갖는 한계의 문제는 헤겔 철학에서는 바로 “사변명제”(der spekulative Satz)와 연관되어 있다.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와 같은 명제가 대표적인 사변명제이다. 사변명제는 주어와 술어가 구체적이거나 표상적인 용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주어와 술어가 모두 개념어로 이루어진 사변명제는 그 고도의 추상성으로 인해 헤겔 철학이 감수해야했던 악명높은 난해함이란 평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사변명제는 단지 한 문장으로 주장을 전달하는 비 담론적인(diskursiv)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사변명제가 논의되는 맥락을 통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서술과 표현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일반적인 수위에서의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사변명제가 일반적인 의미의 판단 “형식”에 대한 비판을 담지하고 있다는 파악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본다면 사변명제는 암묵적으로 전제되었던 판단형식에 대한 무비판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적인 수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명상적이거나 직관적인 태도나 논점을 흐리고자하는 의도에서 비롯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한 담론적인 태도의 견지에서 비롯했다는 전제 또한 가능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사변명제를, 판단형식의 이론적 기초를 구성하는 실체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적 서술”로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근대 철학의 실체 형이상학을 대변하는 라이프니츠 철학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변명제의 의미를 고찰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헤겔 철학이 그 이전 철학사에 대해서 갖는 다면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왜 라이프니츠이어야 하는가? ?철학사?에서 헤겔 자신의 라이프니츠에 대한 단정적인 평가가 있지만, ?논리학?에서는 실체 범주를 비롯해서 “부정”(Negation)이나 “모순”과 같은 주요한 개념을 해명하는데 있어서 라이프니츠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의 기본 원칙인 “술어는 주어에 포함되어 있다”(predicatum inest subjecto)는 소위 ‘포함이론’(Inklusionstheorie)은 판단형식을 형이상학적으로 정초하려는 대표적인 시도이다. 이 이론은 라이프니츠의 동일성의 진리론을 구성하고 있으며 모나드론의 존재론적 원칙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우선 이런 포함이론이 판단형식에 대한 존재론적 근거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에는 사변명제를 헤겔 자신이 직접 언급하면서 그 이론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정신현상학? 서문의 해당 부분이 판단형식에 대한 실체 형이상학적 기초를 그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논의한다. 더불어 사변명제와 판단형식의 문제가 사변철학과 오성적인 철학, 곧 독단적이거나 반성적인 철학의 관계와 연관된다는 점을 통해서 서술과 표현이라는 주제가 사변철학의 중심 계기를 구성하고 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정신현상학?에서 개진했던 사변명제이론이 ?논리학?에서 어떻게 보다 구체화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지, 그리고 비판적 서술로서의 과제를 과연 정당하게 이행하는지를 앞서 언급한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라는 생성의 규정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2. 판단형식에 대한 실체 형이상학적 정초
- 라이프니츠의 포함이론
일반적으로 말해서 판단은 두개의 개념이나 표상들 간의 연관이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판단은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형식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판단형식을 구성하는 두 요소인 주어와 술어가 어떤 연관을 맺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 이런 연관이, 즉 하나의 판단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이다. 이점에 관한 전통적인(아리스토텔레스) 이해는 판단을 ‘어떤 것에 관해서 어떤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때 판단에서 언급되는 어떤 것이 주어이고, 판단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므로, 말 그대로 ‘근저에 놓인 바’(Zugrundeliegendes, Hypokeimenon, Subjectum)이다. 그리고 주어인 어떤 것에 관해서 언급하는 어떤 것이 술어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판단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바로 ‘어떤 것에 관해 적절하게 언급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주어가 적절하게 바탕에 놓이는 경우, 다시 말하면 주어가 술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포함이론은 이처럼 판단형식에 대한 전통적인 파악의 뒤를 잇고 있다. 하나의 판단이 참일 경우 주어는 술어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런 관계는 실체와 속성의 관계와 같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포함이론을 「형이상학의 담론」과 「아놀드와의 서신교환집」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형이상학의 담론」을 인용하겠다.
“하나의 동일한 주어에 대해 여러 술어들이 언명될 때, 반면에 이 주어가 술어로서 다른 어떤 것의 속성이 될 수 없을 때, 그 주어를 개별 실체(individuelle Substanz)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정당하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아직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정의는 결국에는 단지 하나의 이름에 대한 해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술어가 특정한 주어에 참으로 귀속한다고 말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늠해야한다. 이제 모든 참된 진술은 그 어떤 근거를 사물의 본성에서 가지며, 따라서 하나의 문장이 동일하지 않을지라도, 즉 술어가 명시적으로(ausdrücklich) 주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술어가 잠재적으로(virtuell) 주어에 포함되어(enthalten) 있어야 함은 분명하다. 철학자들은 이를 ‘in-esse’라고 부른다. 술어가 ‘주어 속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말이다. 따라서 주어를 나타내는 용어는 언제나 술어의 용어를 자기 내에 포함한다(einschließen). 그래서 주어의 개념을 완전히 통찰하는 이는 술어가 주어에 귀속한다는 판단을 바로(sogleich) 내릴 것임에 틀림없다.”
위 인용문의 첫 문장은 정확히 전통적인 제일실체의 정의를 가리킨다. 하지만 다음 문장에서 이러한 정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때, 그리고 “개별 실체”로써 자신의 모나드(Monad)를 의미할 때, 라이프니츠는 문장형식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주어를 실체로, 술어를 속성으로 볼 때, 나아가 “술어가 주어에 참으로 귀속한다고 말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라이프니츠는 주어가 술어를 포함하는 방식을 두 가지로 보고 있다. 그 한 가지는 “하나의 문장이 동일”할 경우, 바꿔 말하면 “A는 A”일 경우이다. 이때 “술어가 명시적으로 주어에 포함되어”있다. 이 경우에는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이 전제되어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술어가 명시적으로 주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이다. 이 두 가지에 모두 관철될 수 있는, 주어와 술어의 참인 귀속관계를 라이프니츠는 “모든 참인 명제는 분석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 원칙에 따라 파악한다. 이 지점에서 라이프니츠의 포함이론은 진리이론과 교차한다. 술어가 명시적으로 주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라이프니츠에게서 이성(또는 추론)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 포함관계가 명시적인 경우 주어에서 술어를 단번에 분석할 수 있거나(“4=2+2”), 그렇지 않더라도 몇 번의 절차를 거듭하면 분석할 수 있다. 문제는 술어가 명시적으로 주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 경우, 바꿔 말하면 사실의 진리이다. 하나의 판단이 참이라면, 그 판단은 분석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술어가 주어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포함관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도 않고, 나아가 판단의 성격에 비추어 주어를 어디까지 분석해야지 술어와의 연관이 드러나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경우는 어떠한가?
그런데 위 인용문에 따르면 이 경우에도 “잠재적으로(virtuelle)” 술어가 주어에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주어는 술어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사실의 진리에서도 주어를 분석하면 우리는 술어를 얻을 수 있다. 가령 “(1)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사실판단에서의 주어 ‘카이사르’를 분석하면 ‘루비콘강을 건넜다’를 얻을 수 있으며, 같은 주어를 갖는 다른 판단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했다”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주어인 “카이사르”라는 모나드가 그리는 연속적인 시간계열에 대한 “무한대”나 “무한소”의 분석이 요구된다. 이러한 무한분석을 하는 자가 바로 인용문 마지막 문장의 “주어의 개념을 완전히 통찰하는 이”이며, 이때 라이프니츠가 의미하는 바는 최상의 모나드인 신이다. 이 모나드는 “술어가 주어에 귀속한다는 판단을 바로 내린다.” 왜냐하면 주어 모나드의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포함하는 전 계열을 최상의 모나드는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표현’과 ‘의미이해’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1)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라이프니츠 이론에 따르면, 주어인 “카이사르”와 술어인 “루비콘 강을 건넜다”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우선 주어를 살펴보면, (1) 문장의 이해란 바로 (1) 문장의 술어가 언급하는 어떤 것, 즉 “카이사르”를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다시 말하면 이때의 카이사르는 로마인으로서 “알렉산더대왕”과 혼동할 수 없고, 혹은 같은 로마인인 “카토”와 혼동한다면, (1) 문장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즉 같은 (1) 문장이라도 주어 “카이사르”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서 문장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이는 (1) 문장에 대한 이해는 다른 언어나 문화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같은 언어권이라 하더라도 지식의 정도에 따라 그 이해의 다양한 편차가 존재함을 뜻한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이해나 파악과 같은 정신적인 능력의 경우는 상대적인 편차뿐만 아니라 그 절대의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최상급’을 생각하는 데에서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수의 계열에서는 ‘보다 큰’ 수를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수를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1) 문장에 대한 가장 완벽한 이해와 파악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러한 최상의 통찰능력을 지닌 모나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런 모나드는 “카이사르”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과 순차적인 이해의 정도에 따라 그 문장을 파악하지 않는다. 이미 카이사르에 대한 완벽한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최상의 모나드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으며, 원로원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한다는 술어의 전 계열을 파악하고 있다. 물론 이런 파악은 카이사르라는 모나드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을 수도, 클레오파트라와 만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이런 논리는 완벽한 의미이해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나아가 정도에 따른(유한한) 의미이해는 완벽한 의미이해의 가능성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완벽한 의미이해는 유한한 자연언어에 따른 표현에 의존하지 않는다. 인용문 마지막 문장에서 “바로” 혹은 “즉시로”라는 표현은 시간적인 “순간”이라기보다는, 시간적 계열과는 무관하며, 언어적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판단형식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실체형이상학적 정초는 (자연)언어적 매개에 의존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언어적 표현이 판단 의미에 대한 혼동을 불러온다는 입장이다. 또한 이로써 자연언어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근원적인 불신을 가늠할 수 있다. 이처럼 판단형식을 정초하는 문제는 형이상학적 근거, 그리고 언어적 서술과 표현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일반 판단형식에 대한 헤겔의 파악, 그리고 판단형식에 대한 실체형이상학적 입장에 대한 헤겔의 비판으로서 사변명제에 관해서 살펴보겠다.
3. 사변명제이론 - ?정신현상학? 서문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사변명제를 명시적으로 논의하고 있는데, 헤겔 철학에 있어서 “서술”의 문제와 또한 논리-언어적인 것을 탐구하는 데 핵심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정신현상학? 서문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이전에 우선 헤겔이 말하는 철학적 명제 혹은 사변명제를 구별하는 두 가지 특징을 들어보자. 우선 첫 번째 특징으로 주어와 술어의 용어들이 모두 개별 이름이나 표상어들이 아닌 논리적인 범주들이거나 개념어들로 이루어졌음을 들 수 있다. 가령 “이 장미는 붉다”와 같은 문장은 ‘이 장미’와 ‘붉다’처럼 표상어로 이루어져 있다. 대신에 “현실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와 같은 사변명제는 주어와 술어 모두 논리적인 범주들이다. 따라서 사변명제의 주어와 술어가 될 수 있는 용어들은 모두 “존재”, “본질”, “보편”과 같은 개념어들이다. 이런 특징이 일차적으로 일상적인 판단과 사변명제를 확연히 구분시킨다. 이점을 헤겔은 특히 강조하는데, ?정신현상학?에서 사례로 드는 “신은 존재이다”와 같은 명제는 사변명제이지만, ‘신’이라는 주어 용어가 일상적으로 개념어로서의 특징보다는 보편에 대한 이름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철학적 명제로서 논쟁의 여지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사변명제의 주어와 술어는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때의 동일성은 사변적인 동일성이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 차이를 함축하는 동일성이다. 따라서 사변명제는 “A=A”와 같은 동어반복이나, ‘보편은 보편적이다’와 같은-헤겔에 따르면 긍정적인 “무한판단”-문장이 아니다. 일반 판단형식에서 주어는 실체를 가리키고 술어는 이 실체에 대한 속성들이나 우유적인 것들인 데 반해서, 사변명제에서 주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술어와 역동적인 관계를 맺는다.
“논증적(räsonnierende) 사유는 내용이 되돌아오는, 자기(das Selbst)이었지만, 그와 달리 그 실정적(positiven) 인식활동에 있어서, 자기는 곧 우유적인 것(Akzidens)이며 술어로서의 내용이 관계하는 표상된 주어(Subjekt)이다. 이 주어는 내용이 결부되며 또 그 바탕 위에서 이러저러한 운동이 행해지는 기반(Basis)을 이룬다. 그러나 개념적인 사유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개념적 사유에서는) 개념이 대상의 고유한 자신(Selbst)인데, 이 자신은 곧 대상의 생성을 서술함으로써, 이것은 결코 부동의 상태에서 우유적인 것들을 담지하는 정지된 주어가 아니라, 스스로 운동하면서 자기의 규정을 자기 내로 되가져오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 속에서는 저 정지된 주어는 몰락한다(zugrundegehen). 이제 그 주어는 구별된 것들과 내용 속으로 진입하면서, 나아가 규정성을, 즉 -내용 자체의 운동에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구별된 내용을 형성한다.” (PhG. 49면)
전통적인 주어-술어 관계에서 주어는 “사물화”된다. 즉 주어는 관계를 벗어난 것으로 “실체화”되며, 부동의 것으로 고정된다. 반면 헤겔이 말하는 개념적 사유 혹은 사변을 통해서, 주어는 “탈사물화”되며, 따라서 그 자체 운동하는 관계항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논증적 사유가 정지해 있는 주어에서 마련해 놓았던 단단한 지반이 흔들리면서 이제는 이런 운동 자체가 대상이 된다.”(PhG. 50면) 이런 주어는 우유적인 것 혹은 술어와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그 자신이 “대상의 생성”, 우연적인 것, 차이를 이룬다. 이런 개념적 사유의 서술방식이 바로 사변명제이다.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스스로 운동하면서 자기의 규정을 곧 자기 내로 되가져오는” 사변명제는 주어에서 술어로, 술어에서 주어로의 이중 운동을 한다. “이로써 사실상 내용은 더 이상 주어의 술어가 아니라, 오히려 실체이며 또한 지금 논의되고 있는 바로 그 주어의 본질이며 개념이다.”(PhG. 같은 면)
가령 “이 장미는 붉다”와 같은 문장의 경우 일상적으로 “이 장미”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확고한 실체에 따라 그 실체를 구성하는 속성들을(붉다, 노랗다 등) 포함하거나 이 판단의 진위가 문제가 될 경우에, 그 포함관계를 가늠하게 된다. 하지만 “신은 존재이다”와 같은 사변명제의 경우 술어인 “존재”는 단순히 실체인 신의 속성이 아니라, 또는 신에 관해서 언급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실체적인 의미를 갖는 독립적인 개념이다. 술어가 더 이상 속성이 아니기 때문에 고정점인 주어로서 신이 갖는 실체적 의미는 상실되고, 술어로서 존재는 주어의 내용적 규정으로서 본질을 표현한다. “현실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사변명제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장에서 ‘현실적인 것’이란 주어의 자리를 가리키는 개념이며, 그 온전한 실체적 의미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술어에 따라 완성된다. 현실적인 것의 본질이자 내용은 바로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사변명제에서 전통적인 주어와 술어 관계가 전격적으로 문제시되며,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된다. 즉 사변명제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역전되며, 새로운 의미를 낳게 된다. 사변명제가 일차적으로 겨냥하는 점은 바로 이러한 역전된 주어와 술어 관계이며, 이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사변적 내용을 되풀이해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일반적인 독자들이나, 일정한 교양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철학문장을 접하면서 갖는 난처함이나 나아가 분노에 가까운 반응은 철학적 문장이 갖는 사변적인 성격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이는 “무엇이든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되풀이해서 읽혀져야만 한다는 데에 대한 불평이다.”(PhG. 52면)
하지만 그렇다고 사변명제가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기술적인 장치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헤겔에 따르면 무엇보다 사변명제가 갖는 특성은 사변적 내용 자체에서 기인하며, 의지와는 무관한 사유의 “중력”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표상적 사유는 표상작용을 펴나감으로써 반격을 당하게 된다. 마치 주어가 언제나 근저에 깔려 있다는 듯이 바로 이 주어로부터 출발한 표상적 사유는 오히려 술어가 실체가 되고 주어는 술어로 이행함으로써 바로 그 자신이 지양되어 버림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술어로 보이는 것이 전적이고 자립적인 질량이 됨으로 해서 이제 사유는 임의로 이리저리 헤맬 수는 없고, 오직 이러한 중력에 따라 제지당한다.”(PhG. 50면)
사변명제에서 판단형식에 대한 일상적인 이해방식이 제지당한다면, 사변명제의 이해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사변명제가 은유적인 방식으로 읽힐 수 없음은 우선 사변명제 역시도 주어-술어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아가 사변명제는 주어에서 술어로, 다시 술어에서 주어로의 이중운동을 한다. 따라서 그 지반이 붕괴된 주어는 술어에 따라 다시 주어로서 읽힐 수 있다. 이로써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는 실체로서 주어에서 유한한 분석이 전개되거나, 무한분석의 가능성이 펼쳐지는(explicate) 라이프니츠식의 판단형식의 모델은 이제 명제 내부에서의 운동으로 내재화된다. “(명제의 형식이 지양되는-논자) 이런 대립되는 운동은 발화되어야 한다. 이 운동은 저 내적 억제(Hemmung)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자기 내 복귀운동이 서술되어야 한다. 이전에는 증명이 수행해야하는 바를 형성하는 이 운동은 명제 자체의 변증법적 운동이다. 오직 이 변증법적 운동만이 현실적으로 사변적인 것이며, 이 운동을 발화하는 것만이 사변적 서술이다.”(PhG. 53면)
한편 헤겔이 사변명제에서 제기하는 서술의 문제는 “자기 지시적”(self-reference)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변명제 역시도 명제내지는 판단이라는 것이다. 판단형식에 대한 비판을 판단형식에 따라 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태가 바로 서술 자체가 비판을 담지하는 “비판적 서술”이 놓여있는 지형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 지시적 성격의 파악은 일차적인 판단형식에 대한 이차적인 판단형식에 따른 비판이라는 논리적 무한퇴행에 대한 고려를 함축한다. “변증법적 운동은 명제들을 자신의 부분이나 요소(Element)로 삼고 있음을 되새겨 볼 수 있다. 따라서 저 (주어-술어 형식을 공유하는 데에서 오는, 사변적 방식과 논증적 방식의 혼동이 만드는-논자) 난점은 언제나 되풀이되는 것으로 보이고, 또 사태 자체가 야기하는 난점으로 보인다. 이는 다음의 것과 유사하다. 즉 일상적인 증명에서 생기는 일로서, 그 증명이 사용하는 근거들 자체가 다시 근거지움(Begründung)을 요구하고, 또 거기에 대한 정초를 요구하는 식으로 계속 무한으로 진행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근거지움과 조건제시의 이런 형식은, 변증법적 운동과는 구별되는, 저 증명방식에 속한다.”(PhG. 53면) 따라서 사변명제는 일반 판단형식과 무관한 초월적 위상이나 내용을 갖는 명제가 아니다. 또한 사변적 내용을 담지하는 일반 판단형식에 대하여 완벽한 이해 가능성을 전제하는 식의 정당화가 아닌 비판적 서술이다.
이로써 “주어와 술어의 구별을 내포하는 판단이나 명제의 본성은 사변적 명제에 의하여 파괴된다. 그리고 그 판단이나 명제들이 그것이 되는 바, 동일한 명제는 저 (주어 술어) 관계에 대한 충돌을 포함한다.”(PhG. 51면) 그렇다면 사변명제 자체의 고유한 이해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변명제는 어떤 초월적인 형식이나 내용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일반판단형식과 사변명제 사이의 구별이 문제가 되며, 또 여기에서 사변명제의 고유한 이해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구별을 헤겔은 비유를 통해서 설명한다. “이러한 명제 일반의 형식과 이 형식을 파괴하는 개념의 통일과의 사이에서 야기되는 갈등은 마치 박자(Metrum)과 강세(Akzente) 사이에서 생기는 리듬 속의 갈등에 비할 수 있다. 말하자면 리듬은 양자간의 부유(浮遊)하는 중심과 그 통일에서 생겨난 결과이다. 이렇듯 철학적 명제에서도 역시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이, 명제의 형식이 표현하는, 바로 이 양자간의 구별을 소멸시켜서는 안되고, 오히려 양자의 통일이 하나의 조화(Harmonie)로서 등장해야 한다.”(PhG. 51면)
여기에서 헤겔은 주어와 술어의 구별이라는 판단 일반의 형식과 사변 명제에서 양자의 통일을 각각 강세와 박자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조화된다는 점에서 사변명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무형식의 문장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런 조화는 오성적 판단과 사변명제를 서로 뒤섞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의 관계는 헤겔 철학 전반에 걸쳐있는 반성적 사유 혹은 오성적 사유와 사변의 관계와 연관되어있다.
우선 주어와 술어의 분리에 기반을 두는 일반 판단형식은 오성적 사유에 의해서 수행된다. 헤겔은 사변명제보다 앞서서 오성적 사유의 특성을 표상의 분석이라는 측면에서 논의한다. “(분석에 있어서-논자)본질적 계기는 이러한 분리된 것(Geschiedenen), 비현실적인 것 자체이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것은 자신을 분리시키며,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기에,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리 활동은 가장 경이롭고 위대한, 혹은 나아가 절대적인 위력인, 오성의 힘과 노동이다. 자기 내 닫혀져서 정지된, 그리고 실체(Substanz)로서 자신의 계기들을 유지시키는 원환은 직접적인 관계이며, 따라서 그리 놀랄만한 관계가 아니다.”(PhG. 29면, 굵은 체 강조는 논자)
따라서 헤겔에게서 오성적 사유, 특히 분석적 논증은 사유에 있어서 ‘직접적인’ 것으로서 사유의 경향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이런 분리시키는 사유는 계몽적 사유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근원적(Ur) 분리(Teil)”로서 “판단”(Urteil)을 해석하는 것은 초기에서부터 헤겔의 일관된 입장이다. 사변적 사유가 파악하는 사태의 진지함과 심각성은 비매개적이고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사변적 사유가 메타(Meta)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형식적 혹은 반성적 사유의 근본성에서 유래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헤겔은 사변이 파악하는 사태와 그 서술의 비분리성에 더 깊이 관여했던 것이다. 이런 헤겔은 이런 입장을 ?백과사전? 1권 「논리학」의 서론 격인 “객관성에 대한 사상의 세 가지 입장”에서도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분석은 지각의 직접성으로부터 사유에로의 진전이다. 분석된 대상이 자기 내에서 결합시켜 포함했던 규정들과 분리됨으로써 보편성의 형식을 갖추는 한에서 말이다. 경험론은 대상들을 분석함으로써, 그것들을 그 자체로 보존한다고 나름대로 생각하는 때에, 오류에 빠져든다. 왜냐하면 경험론은 그럼에도 사실은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에로 변형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동시에 살아있는 것은 죽음을 맞이한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은 오직 구체적인 것, 분리되지 않은 것(Eine)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 분리는 개념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며, 정신 자체의 자기 내로의 분리운동(Scheidung)이다. 그럼에도 이는 단지 한 측면에 불과하다. 핵심은 분리된 것의 합일에 있다.”
현재 논점에 있어서 주목할 것은 구체적인 것을 분리시키는, 분석하는 것이 “절대적 위력”을 발휘하는 오성의 활동이란 점과, 그 활동을 통해서 고정된 것(Substanz)과 변화하는 것, 그것에 부수된 것이란 경계가 생긴다는 점이다. 이렇듯이 오성의 활동은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직접적인 것과 파악된 것을 가르는 활동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항의 전자들을 각각 후자들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헤겔이 주목하는 것은 이런 변화가 갖는 의미인데, 오성의 활동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그 결과물들을 돌변시킨다. 마치 ?정신형상학?의 “전도된 세계”에서처럼, 오성이 분리시켜 ‘죽은 것’은 정신 속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되살아난다. “하지만 그(원환의-논자) 범위에서 벗어난 우유적인 것 자체, 부수적인 것 곧 오직 다른 현실적인 것과의 연관에만 있는 것이 그 고유한 현존재, 그리고 변별적 자유를 획득한다는 점은 부정적인 것이 지닌 무시무시한 위력이다. 이것은 사유의, 순수 자아의 에너지이다.”(PhG. 29면, 굵은 체 강조는 논자) 즉 정신적 삶에 있어서 그러한 분리와 죽음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은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문제는 삶과 함께 그런 죽음을 견지하며, 또한 부정적인 것이 지니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주시하며 자신을 유지하는 정신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며 그 소멸로부터 자신을 순수하게 보존하려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담지하며 죽음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신의 삶이다. 정신은 절대적 분열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함으로써만이 자신의 진리를 획득한다. 이런 위력은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마치 우리가 어떤 것을 무실하거나 거짓이라고 말해버리면서, 그로부터 벗어나 어떤 다른 것으로 이행할 때처럼-긍정적인 것으로서 정신이 발휘하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직시함으로써 부정적인 것에 머무는 정신이 발휘하는 위력이다. 이런 머무는 것(Verweilen)은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환하는(umkehrt) 마력이다.”(PhG. 30면)
일반 판단 형식과 사변 명제와의 차이를 논의하면서 전개시킨 위와 같은 논점은 헤겔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논점에로의 진입을 보여준다. 우선 고정적인 부동의 점으로서 실체와 그에 따라 다니는, 의존적이며 변화하는 우유적인 것의 무차별적 분리와 그것에 기반한 판단형식,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직시하며 또 비판적으로 서술하는 사변 명제의 관계는 실체 개념의 변화와 더불어 주체 개념의 변화를 수반한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는 것”에서 “머무는 것”(Verweilen)의 의미는 단순히 그것에 그친다는 것이 아니라, “직시한다”는 의미에서의 “사변”이며, “횡단”(traverse)에 가깝다. 또한 “마력”(Zauberkraft)이라는 은유는 그 신비성에 강조를 두기보다는, 존재와 사유 간에 놓인 “심연”(Abgrund)에 대한 “도약”(Sprung)으로 보아야 한다. 헤겔이 보기에, 인간이 사유한다는 것은 “사유하고자하는 결단”이며, 존재에서 사유로의 도약을 감내하는 것이다. 이런 도약 자체를 근거지을 수는 없다. 정신적 삶이란 이런 심연 앞에서의 도약이며, 이를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물에 뛰어들지 않고서, 수영을 배우려는” 것과도 같다. 이런 도약 속에서 부정적인 것은 존재로의 일대 “전환”(Umkehrung)을 겪는다. 또한 이로써 존재 개념은 철저하게 재정의된다. 이렇게 실체 개념과 더불어 존재 개념 역시도 변화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며, 이러한 비판적 서술의 입장은 나아가 전통 형이상학의 범주를 재정의하는 ?논리학?에로 이어진다. 다시 말하면 사변 철학에서 존재는 비매개적인,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존재는 이제 절대적으로 매개된 것이다.”(PhG. 32면)
그런데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환시키는 마력”은 곧 “주체”를 의미한다. “주체는 자신의 터전에서 규정성에 현존재를 부여하면서, 추상적인, 즉 오직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직접성을 지양하고, 이를 통해서 참된 실체이며, 존재 혹은 직접성이다. 그런데 이 직접성은 매개를 자신의 외부에 갖지 않고, 오히려 이 매개 자체이다.”(PhG. 30면) 여기에서 “주체는 ...참된 실체, 존재 혹은 직접성이다”라는 이 문장 자체가 사변명제이다. 사변명제의 주어와 술어는 우선 무개념적 표상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동물은 질소이다”와 같은 문장은 사변명제가 아니다. 따라서 위 사변명제의 술어인 “존재”는 무개념적 표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매개된 것, 나아가 매개 자체로서 직접성이다. 다음으로 사변명제에서 주어와 술어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일치한다. 따라서 사변명제는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대표적인 사변명제인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는 또한 동시에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를 함축한다. 마찬가지로 존재, 직접성, 참된 실체는 주체이다. 이때 주체는 절대적 차이로서, 즉 동일성과 차이의 돌변, 혹은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으로서 주체를 의미한다. 이는 앞서의 논의에서 보았듯이, 표상적 실체 즉 고정성을 지닌 부동의 점으로서 실체이자 곧 문장 의미의 고정점인 주어로서의 주체가 아니다. 이런 절대적 차이로서 주체는 사변명제의 고유한 내용을 구성한다.
우선 지금의 논의 맥락에서 볼 때, 주체는 우선 하나의 활동, 그것도 형식활동이다. 그리고 형식활동으로서 주체의 고유한 의미는 “부정적인 것의 무시무시한 위력”, “부정적인 것을 전환시키는 마력”으로서 부정의 활동이다. 그런데 이 부정의 활동 속에서 주체는 무실함만을 길어내는 게 아니라, 부정성 속에서의 정체성, 즉 “자기관계적 부정성”이다. “자기관계적 부정성”으로서 주체는 절대적 차이 논리의 연장선에 서있다. 그리고 이런 절대적 차이는 서문에서 헤겔이 논의하는 주요 주제인 실체로서의 주체, 혹은 주체로서의 실체에서 주요한 논점이다. 이에 따라 전통형이상학에서 의미하는 “초월적 주체”는 그 전환을 맞이한다. Henrich에 따르면, 부정성의 자기관계로서 주체가 자기(Selbst)로서 정체성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주체가 실체임으로써 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가 실체가 아니라면, 부정은 자기관계할 수 없다. “실체로서 실체는 동일성의 범주 아래 사유된다. 그와는 달리 주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성이 지배적인 범주이다. 주체는 자기 구별의 활동성이다.” 또한 이때 “주체는 실체이다” 역시 사변명제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는 실체이다”란 사변명제는 주체로서의 실체와 실체로서의 주체를 함축한다.
4. 판단형식과 사변적 내용의 관계
-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
이제 ?정신현상학? 서문에 따른 사변명제이론이 주제화한 판단형식과 사변적 내용의 관계를 살펴보자. 사변명제이론은 판단형식에 대한 반성이 실체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사변철학의 전개에 있어서 서술은 주변적이거나 외삽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중심적인 주제를 형성한다. 이때 사변철학의 서술은 판단형식에 대한 새로운 서술방식을 제시하거나 은유적 혹은 신비적인 방향을 갖지 않는다. 이는 한편으로는 서술의 문제가 언어의 “자기지시적” 성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를 ?논리학? 1권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사변명제를 통해서 살펴보자.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판단형식과 사변적 내용의 긴장관계를 보여준다. 우선 이 문장의 주어인 존재와 무는 가장 추상적이고, 무규정적인 범주들이다. 존재와 무는 그 직접성과 단순성에서 서로 동일하다. 이런 관계는 “‘존재=존재’는 무이다”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헤겔이 주목하는 사태의 진리는 존재와 무는 또한 서로 절대적으로 구별된다는 데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진리는 존재와 무의 무차별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동일하지 않으며, 절대적으로 구별된다.”(WdL1 83면)
그렇다면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존재와 무의 일면적 관계 즉 동일성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표현이다. 다시 판단형식에 대한 실체와 속성의 관계로 본다면, 실체화된 존재와 무의 성질로서 동일성만이 언급되고 있다.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판단의 의미에 대한 일상적인 기대와 그 기대를 뒷받침하는 형이상학적 바탕에 따르면, 우선 주어인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추고 있다. 또한 술어인 동일함을 부가하기 위해서는 동일하다는 속성이 갖고 있는 비교를 전제로 한다. 이런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그 바탕에 앞에서 보았듯이 “술어는 주어에 포함된다”는 포함이론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포함이론이 함축하는 바는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사변적일 때, 주어와 술어의 비동일함이 본질적인 계기이다.”(WdL1 93면) 그렇다면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라는 판단이 갖고 있는 한계는 판단형식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변적 내용인 존재와 무의 절대적 차이는 위의 판단에 “존재와 무는 동일하지 않다”는 판단을 부가함으로써 표현하지 못한다. 이 경우 문제는 배가되는데,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와 “존재와 무는 동일하지 않다”는 대립명제들이 병렬적으로 분리된 채 주장되기 때문에, 문제는 두 명제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되고 만다. 헤겔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일면적인 계기를 양자택일식으로 강요하는 것이 사변적인 사상에 가해지는 가장 일상적인 부당함이다. 대립하는 두 문장의 내용을 갖고 있는 사변적 내용은 “동요(Unruhe)이자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것, 운동으로서 발화될 수 있다.”(WdL1 94면)
그렇다면 이러한 사변적 내용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가? 헤겔이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문장형식을 반성해보면 문장이 지닌 구문론적 구조가 일상적인 기대와는 달리 그렇게 긍정적이지도 일면적이지도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문장을 발화하면서 기대하는 일의적인 의미의 전달은 문장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 구조에 의해서 충족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은 화자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것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이러한 문장과 발화의 다의성에 대한 반성을 사변적 서술은 포함하고 있다. 지금 논의하는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문장은 일상적인 화자가 기대하듯이 존재와 무의 동일함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를 함축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 문장은 주어 용어들의 동일성을 두개의 서로 다른 용어로 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에서 “강세는 무엇보다 하나이고-동일-함에 놓인다. 주어인 바를 일차적으로 술어가 언명하는, 일반적인 판단에서처럼 말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차이가 부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차이는 동시에 문장에 직접 출현한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존재와 무라는 두 규정을 발화하고 있으며, 구별된 것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WdL1 92면)
따라서 존재와 무의 동일성과 차이, 즉 절대적 차이를 말하기 위해서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와 “존재와 무는 동일하지 않다”를 병렬할 필요가 없다. 또한 판단형식에 대한 일상적인 기대와 형이상학적 정초에 대한 비판이 “새로운” 판단형식이나 언어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존재와 무의 절대적 차이가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판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바로 존재와 무가 가장 추상적이고 직접적인 규정이라는 점, 따라서 그 내용적인 표상이 아니라, 존재와 무의 관계적인 규정이 관건이라는 점에서 유래한다. 또한 이러한 최초의 논리학 범주들에 대한 파악의 결과가 “존재는 무이다”가 아닌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인 것은 이 문장 자체가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 전제를 문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의 생경함과 그 문장이 자기 내에 포함하고 있는 긴장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긴장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말하는 명제형식과 사변명제의 리듬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제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문장이 이 규정들의 동일성을 발화하는 한에서, 하지만 사실 그 양자를 구별된 것으로 포함하는 한에서, 이 문장은 자기 내에서 모순되며, 해소된다. 우리가 이를 보다 확실히 하면서, 조금 더 고찰해보면, 자신에 따라 사라지는 운동을 하는 하나의 문장이 정립된다. 하지만 더불어 그 자체에서 자신의 고유한 내용을 형성해야만 하는 것이 생겨나는 데, 이는 바로 생성이다.”(WdL1 93면)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라는 자기지시적인, 따라서 자기 내에서 모순되는 문장은 판단형식과 사변적 내용 간의 긴장을 보여준다. 이러한 긴장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 따라 사라지는 운동”을 한다. 이런 운동을 어떻게 파악하는가는 ?논리학?에서 범주들 간의 관계, 즉 형이상학적인 범주들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논점을 이룬다. 다시 말하면 범주들의 이행이 과연 내재적인 것인가, 아니면 헤겔의 의도와는 달리 외적 반성에 의한 것인가라는 점이다. 이는 사변적 내용의 서술과 표현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 다음의 인용은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 문장은 (존재와 무 범주의-논자)결과를 포함하며, 즉자적으로 그 결과 자체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상황은 다음과 같은 결함이다. 즉 그 결과는 자체로 그 문장에서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결과를 그 문장에서 인식하는 것은 외적 반성이다.”(WdL1 93면)
그 문장은 존재와 무의 절대적 차이를 포함하지만,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달리 말하면 즉자적으로 존재와 무의 절대적 차이이지만, 그 문장에서 피정립된(gesetzt) 것은 아니다. 그 문장이 자기 내에서 안고 있는 긴장과 모순, 그리고 운동이 “표현되는” 것은 바로 “생성” 범주에 의해서이다. “참된 결과는 오로지 판단에서만 현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통해서 표현되고 그 자체로 서술되어야만 하기”(같은 면) 때문에,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판단의 온전한 의미는 생성에 의해서 표현된다. 다시 말하면 생성은 존재와 무의 절대적 차이의 피정립존재(Gesetztsein)이다.
생성이라는 최초의 구체적인 개념의 등장은 범주들 간의 이행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생성 개념에 따라서 “존재는 무에서, 무는 존재에서 자신의 진리를 갖는다”(WdL1 83면)는 말이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생성은 존재와 무의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는 방법론적으로 중요한 “즉자존재”(Ansichsein)와 “피정립존재”(Gesetztsein)가 표현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중요한 것은 이전 범주에 포함된 것, 즉자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규정의 상이한 원환에서, 그리고 특히 해명(Exposition) 과정에서, 더 자세히 말하면, 개념의 해명과정에서, 여전히 즉자적인 것과 피정립된 것을 구별하는 것, 규정들이 개념 안에 있는 것인지, 그 규정들이 피정립된 것으로서, 혹은 대타존재(seiend-für-Anderes)로서 있는 것인지를 잘 구별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구별은 변증법적 전개에만 해당하는 것으로서, 비판철학 역시 속하는, 형이상학적 철학함은 이를 알지 못한다. 자신의 전제들, 구별들과 추론들이 오로지 존재하는 것만을, 더욱이 즉자존재하는 것을 주장하려고 하고, 산출하려는 방식이 바로 형이상학의 정의이다.”(WdL1 131면)
따라서 존재와 무, 그리고 생성이라는 ?논리학?의 시원범주들은 개념 전개과정의 동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동인이 언어표현과 판단형식에 대한 헤겔의 문제의식과 분리할 수 없음은 즉자존재와 피정립존재의 관계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문장은 판단 형식과 사변적 내용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며, 또한 한 문장을 발화할 때 염두에 두는 것(Meinen)과 그 표현 사이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이런 긴장과 불일치를 표현하는 개념 혹은 범주가 바로 생성인 것이다.
5. 맺음말
판단형식에 대한 라이프니츠식의 실체형이상학적인 근거지움은 그 전일적이고 일의적인 의미이해의 전제로서 “최고의 모나드”를 상정한다. 이 최고의 모나드는 주어에 “잠재적으로”혹은 즉자적으로 포함된 술어의 의미를 정초한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이 최고의 모나드는 그 비규정성에 비추어서 어떤 자연언어를 사용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사용한다고 해도 유한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언어형식은 수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헤겔의 사변철학에서의 관건은 절대적인 것의 자기전개로서 표현과 서술이며, 이는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다. 이때의 언어는 이미 “굴절된” 것으로서, 의미의 단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 그럴 때에 일반적인 판단형식은 한계를 갖고 있다. 더욱이 판단형식의 요소인 주어 술어 관계에 대한 실체-속성으로서의 파악은 그 일면성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는 것”은 바로 근원적인 분리로서 판단을 그 형식과 내용면에서 근본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판단의 요소인 주어와 술어는 상호 운동하는 역동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식으로 헤겔의 사변명제이론은 일반 판단형식에 대한 검토와 함께 그 형이상학적 전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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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Speculative Sentence and A Critique of Substance-Metaphysics
Hyunbum Ko
This article aims at illuminating Hegel's speculative sentence theory in view of its critique of substance-metaphysics that grounds the general form of judgement(Urteilsform). Specially, Leibniz's "Including theory" is the representative of such an attempt, which apprehends the relationship of subject-predicate as such of substance-attribute, that is, including-included. And Hegel's speculative sentence
theory criticizes it.
Leibniz's substance-metaphysical grounding of the judgement-form proposes one monad, namely, God as a presupposition of a univocal and perfect understanding. This monad grounds the predicate's meaning that "virtually"(or "an sich") included in a subject. For its un-determinedness, God does not care what natural language used. Rather, it does not use a language, even though it uses a language, its form of a language which a man could know at the best is a language of mathematics.
But the important point of Hegel's speculative philosophy is the expression and description("Darstellung), which is mediated by a language. Such a language is already "broken"("Gebrochene") and does not presuppose the unity of meaning. From this point of view, the general form of judgement has a limit. Further, if its moment, the subject-predicate relation be comprehended as substanz-attributes, its deflect would spread grow. "Tarrying with negative" means thinking and expressing a judgement as "Ur-Teil" radically in respect of a form and a content. So the subject and predicate are comprehended as dynamic one moving reciprocally. In this way, Hegel's speculative sentence theory reflects the general form of judgement radically and thus criticizes its metaphysical presupposition.
【Key words】 Hegel, speculatve-sentence(der spekulative Satz), substance- metaphysics, Leibniz, phenomenology of mind, Logic 범한철학회논문집
고 현 범** 충북대학교
【주제분류】독일근대철학, 형이상학
【주 요 어】헤겔 사변명제 실체-형이상학 라이프니츠 정신현상학 논리학
【요 약 문】
본고는 헤겔의 사변명제이론을 판단형식에 대한 실체형이상학적 정초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살펴보려고 했다. 특히 라이프니츠의 “포함이론”은 그러한 정초의 대표적인 시도로 볼 수 있으며, 주어-술어 관계를 고정된 실체-속성의 관계로, 포함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는데, 헤겔의 사변명제이론은 이런 관계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다.
판단형식에 대한 라이프니츠식의 실체형이상학적인 근거지움은 그 전일적이고 일의적인 의미이해의 전제로서 “최고의 모나드”를 상정한다. 이 최고의 모나드는 주어에 “잠재적으로”혹은 즉자적으로 포함된 술어의 의미를 정초한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이 최고의 모나드는 그 비규정성에 비추어서 어떤 자연언어를 사용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사용한다고 해도 유한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언어형식은 수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헤겔의 사변철학에서의 관건은 절대적인 것의 자기전개로서 표현과 서술이며, 이는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다. 이때의 언어는 이미 “굴절된”(Gebrochene) 것으로서, 의미의 단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 그럴 때에 일반적인 판단형식은 한계를 갖고 있다. 더욱이 판단형식의 요소인 주어 술어 관계에 대한 실체-속성으로서의 파악은 그 일면성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는 것”은 바로 근원적인 분리로서 판단을 그 형식과 내용면에서 근본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판단의 요소인 주어와 술어는 상호 운동하는 역동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식으로 헤겔의 사변명제이론은 일반 판단형식에 대한 검토와 함께 그 형이상학적 전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헤겔은 ?논리학의 학?(Wissenschaft der Logik) 시원(Anfang) 범주인 “생성”을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라는 문장에 따라 규정한다. 존재와 무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개념인 생성은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이라는 위상에 맞게 존재와 무와는 달리 하나의 완성된 문장으로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경우 “존재, 순수 존재 - 일체의 더 나아간 규정이 없는”처럼 계사(Kopula)를 “-”가 대신하거나, 무의 경우 “무, 순수 무”처럼 단어의 나열로 시작하는 데 반해서, 생성은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최초의 규정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존재론」의 서론이자 전체 ?논리학?의 시작을 고찰하는 “학문의 시원은 무엇에서 마련되어야 하는가?”에서 제기된 시원의 무전제성 내지는 직접성과 매개라는 복잡한 문제와 더불어 그런 문제설정이 존재 그리고 무의 범주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명이 제시되기도 전에 등장하는 생성 범주에 대한 최초의 규정은 헤겔 논리학 자체의 위상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과연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를 반영하듯이 존재, 무 그리고 생성이라는 시원 범주에 대해서 헤겔은 이례적으로 긴 네 개의 주석을 달고 있다. 그중에서도 관심을 끄는 것은 두 번째 주석인데, 여기에서 사변적 내용을 표현하는데 판단형식이 갖는 한계를 논의하고 있다. 다른 주석들이 시원범주에 대한 철학사적인 고찰과 그 추상성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고 있는 데 반해서 두 번째 주석에서는 “표현”과 “서술”이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논리학? 초판에서는 첫 번째 주석에 포함되었던 내용을 재판에서 독립적인 주석으로 분리했다는 점에서도 헤겔이 이 두 번째 주석에 부여한 중요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헤겔은 자신의 저작 여러 곳에서 판단형식의 한계를 거듭 논의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정신현상학? 서문, 그리고 ?논리학? 시원 범주의 두 번째 주석이다. 사변적 내용을 서술하는데 있어서 판단형식이 갖는 한계의 문제는 헤겔 철학에서는 바로 “사변명제”(der spekulative Satz)와 연관되어 있다.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와 같은 명제가 대표적인 사변명제이다. 사변명제는 주어와 술어가 구체적이거나 표상적인 용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주어와 술어가 모두 개념어로 이루어진 사변명제는 그 고도의 추상성으로 인해 헤겔 철학이 감수해야했던 악명높은 난해함이란 평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사변명제는 단지 한 문장으로 주장을 전달하는 비 담론적인(diskursiv)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사변명제가 논의되는 맥락을 통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서술과 표현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일반적인 수위에서의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사변명제가 일반적인 의미의 판단 “형식”에 대한 비판을 담지하고 있다는 파악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본다면 사변명제는 암묵적으로 전제되었던 판단형식에 대한 무비판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적인 수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명상적이거나 직관적인 태도나 논점을 흐리고자하는 의도에서 비롯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한 담론적인 태도의 견지에서 비롯했다는 전제 또한 가능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사변명제를, 판단형식의 이론적 기초를 구성하는 실체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적 서술”로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근대 철학의 실체 형이상학을 대변하는 라이프니츠 철학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변명제의 의미를 고찰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헤겔 철학이 그 이전 철학사에 대해서 갖는 다면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왜 라이프니츠이어야 하는가? ?철학사?에서 헤겔 자신의 라이프니츠에 대한 단정적인 평가가 있지만, ?논리학?에서는 실체 범주를 비롯해서 “부정”(Negation)이나 “모순”과 같은 주요한 개념을 해명하는데 있어서 라이프니츠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의 기본 원칙인 “술어는 주어에 포함되어 있다”(predicatum inest subjecto)는 소위 ‘포함이론’(Inklusionstheorie)은 판단형식을 형이상학적으로 정초하려는 대표적인 시도이다. 이 이론은 라이프니츠의 동일성의 진리론을 구성하고 있으며 모나드론의 존재론적 원칙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우선 이런 포함이론이 판단형식에 대한 존재론적 근거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에는 사변명제를 헤겔 자신이 직접 언급하면서 그 이론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정신현상학? 서문의 해당 부분이 판단형식에 대한 실체 형이상학적 기초를 그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논의한다. 더불어 사변명제와 판단형식의 문제가 사변철학과 오성적인 철학, 곧 독단적이거나 반성적인 철학의 관계와 연관된다는 점을 통해서 서술과 표현이라는 주제가 사변철학의 중심 계기를 구성하고 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정신현상학?에서 개진했던 사변명제이론이 ?논리학?에서 어떻게 보다 구체화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지, 그리고 비판적 서술로서의 과제를 과연 정당하게 이행하는지를 앞서 언급한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라는 생성의 규정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2. 판단형식에 대한 실체 형이상학적 정초
- 라이프니츠의 포함이론
일반적으로 말해서 판단은 두개의 개념이나 표상들 간의 연관이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판단은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형식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판단형식을 구성하는 두 요소인 주어와 술어가 어떤 연관을 맺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 이런 연관이, 즉 하나의 판단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이다. 이점에 관한 전통적인(아리스토텔레스) 이해는 판단을 ‘어떤 것에 관해서 어떤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때 판단에서 언급되는 어떤 것이 주어이고, 판단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므로, 말 그대로 ‘근저에 놓인 바’(Zugrundeliegendes, Hypokeimenon, Subjectum)이다. 그리고 주어인 어떤 것에 관해서 언급하는 어떤 것이 술어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판단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바로 ‘어떤 것에 관해 적절하게 언급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주어가 적절하게 바탕에 놓이는 경우, 다시 말하면 주어가 술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포함이론은 이처럼 판단형식에 대한 전통적인 파악의 뒤를 잇고 있다. 하나의 판단이 참일 경우 주어는 술어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런 관계는 실체와 속성의 관계와 같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포함이론을 「형이상학의 담론」과 「아놀드와의 서신교환집」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형이상학의 담론」을 인용하겠다.
“하나의 동일한 주어에 대해 여러 술어들이 언명될 때, 반면에 이 주어가 술어로서 다른 어떤 것의 속성이 될 수 없을 때, 그 주어를 개별 실체(individuelle Substanz)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정당하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아직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정의는 결국에는 단지 하나의 이름에 대한 해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술어가 특정한 주어에 참으로 귀속한다고 말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늠해야한다. 이제 모든 참된 진술은 그 어떤 근거를 사물의 본성에서 가지며, 따라서 하나의 문장이 동일하지 않을지라도, 즉 술어가 명시적으로(ausdrücklich) 주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술어가 잠재적으로(virtuell) 주어에 포함되어(enthalten) 있어야 함은 분명하다. 철학자들은 이를 ‘in-esse’라고 부른다. 술어가 ‘주어 속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말이다. 따라서 주어를 나타내는 용어는 언제나 술어의 용어를 자기 내에 포함한다(einschließen). 그래서 주어의 개념을 완전히 통찰하는 이는 술어가 주어에 귀속한다는 판단을 바로(sogleich) 내릴 것임에 틀림없다.”
위 인용문의 첫 문장은 정확히 전통적인 제일실체의 정의를 가리킨다. 하지만 다음 문장에서 이러한 정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때, 그리고 “개별 실체”로써 자신의 모나드(Monad)를 의미할 때, 라이프니츠는 문장형식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주어를 실체로, 술어를 속성으로 볼 때, 나아가 “술어가 주어에 참으로 귀속한다고 말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라이프니츠는 주어가 술어를 포함하는 방식을 두 가지로 보고 있다. 그 한 가지는 “하나의 문장이 동일”할 경우, 바꿔 말하면 “A는 A”일 경우이다. 이때 “술어가 명시적으로 주어에 포함되어”있다. 이 경우에는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이 전제되어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술어가 명시적으로 주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이다. 이 두 가지에 모두 관철될 수 있는, 주어와 술어의 참인 귀속관계를 라이프니츠는 “모든 참인 명제는 분석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 원칙에 따라 파악한다. 이 지점에서 라이프니츠의 포함이론은 진리이론과 교차한다. 술어가 명시적으로 주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라이프니츠에게서 이성(또는 추론)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 포함관계가 명시적인 경우 주어에서 술어를 단번에 분석할 수 있거나(“4=2+2”), 그렇지 않더라도 몇 번의 절차를 거듭하면 분석할 수 있다. 문제는 술어가 명시적으로 주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 경우, 바꿔 말하면 사실의 진리이다. 하나의 판단이 참이라면, 그 판단은 분석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술어가 주어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포함관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도 않고, 나아가 판단의 성격에 비추어 주어를 어디까지 분석해야지 술어와의 연관이 드러나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경우는 어떠한가?
그런데 위 인용문에 따르면 이 경우에도 “잠재적으로(virtuelle)” 술어가 주어에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주어는 술어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사실의 진리에서도 주어를 분석하면 우리는 술어를 얻을 수 있다. 가령 “(1)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사실판단에서의 주어 ‘카이사르’를 분석하면 ‘루비콘강을 건넜다’를 얻을 수 있으며, 같은 주어를 갖는 다른 판단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했다”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주어인 “카이사르”라는 모나드가 그리는 연속적인 시간계열에 대한 “무한대”나 “무한소”의 분석이 요구된다. 이러한 무한분석을 하는 자가 바로 인용문 마지막 문장의 “주어의 개념을 완전히 통찰하는 이”이며, 이때 라이프니츠가 의미하는 바는 최상의 모나드인 신이다. 이 모나드는 “술어가 주어에 귀속한다는 판단을 바로 내린다.” 왜냐하면 주어 모나드의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포함하는 전 계열을 최상의 모나드는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표현’과 ‘의미이해’의 측면에서 살펴보자. (1)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라이프니츠 이론에 따르면, 주어인 “카이사르”와 술어인 “루비콘 강을 건넜다”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우선 주어를 살펴보면, (1) 문장의 이해란 바로 (1) 문장의 술어가 언급하는 어떤 것, 즉 “카이사르”를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다시 말하면 이때의 카이사르는 로마인으로서 “알렉산더대왕”과 혼동할 수 없고, 혹은 같은 로마인인 “카토”와 혼동한다면, (1) 문장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즉 같은 (1) 문장이라도 주어 “카이사르”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서 문장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이는 (1) 문장에 대한 이해는 다른 언어나 문화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같은 언어권이라 하더라도 지식의 정도에 따라 그 이해의 다양한 편차가 존재함을 뜻한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이해나 파악과 같은 정신적인 능력의 경우는 상대적인 편차뿐만 아니라 그 절대의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최상급’을 생각하는 데에서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수의 계열에서는 ‘보다 큰’ 수를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수를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1) 문장에 대한 가장 완벽한 이해와 파악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러한 최상의 통찰능력을 지닌 모나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런 모나드는 “카이사르”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과 순차적인 이해의 정도에 따라 그 문장을 파악하지 않는다. 이미 카이사르에 대한 완벽한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최상의 모나드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으며, 원로원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한다는 술어의 전 계열을 파악하고 있다. 물론 이런 파악은 카이사르라는 모나드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을 수도, 클레오파트라와 만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이런 논리는 완벽한 의미이해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나아가 정도에 따른(유한한) 의미이해는 완벽한 의미이해의 가능성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완벽한 의미이해는 유한한 자연언어에 따른 표현에 의존하지 않는다. 인용문 마지막 문장에서 “바로” 혹은 “즉시로”라는 표현은 시간적인 “순간”이라기보다는, 시간적 계열과는 무관하며, 언어적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판단형식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실체형이상학적 정초는 (자연)언어적 매개에 의존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언어적 표현이 판단 의미에 대한 혼동을 불러온다는 입장이다. 또한 이로써 자연언어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근원적인 불신을 가늠할 수 있다. 이처럼 판단형식을 정초하는 문제는 형이상학적 근거, 그리고 언어적 서술과 표현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일반 판단형식에 대한 헤겔의 파악, 그리고 판단형식에 대한 실체형이상학적 입장에 대한 헤겔의 비판으로서 사변명제에 관해서 살펴보겠다.
3. 사변명제이론 - ?정신현상학? 서문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사변명제를 명시적으로 논의하고 있는데, 헤겔 철학에 있어서 “서술”의 문제와 또한 논리-언어적인 것을 탐구하는 데 핵심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정신현상학? 서문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이전에 우선 헤겔이 말하는 철학적 명제 혹은 사변명제를 구별하는 두 가지 특징을 들어보자. 우선 첫 번째 특징으로 주어와 술어의 용어들이 모두 개별 이름이나 표상어들이 아닌 논리적인 범주들이거나 개념어들로 이루어졌음을 들 수 있다. 가령 “이 장미는 붉다”와 같은 문장은 ‘이 장미’와 ‘붉다’처럼 표상어로 이루어져 있다. 대신에 “현실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와 같은 사변명제는 주어와 술어 모두 논리적인 범주들이다. 따라서 사변명제의 주어와 술어가 될 수 있는 용어들은 모두 “존재”, “본질”, “보편”과 같은 개념어들이다. 이런 특징이 일차적으로 일상적인 판단과 사변명제를 확연히 구분시킨다. 이점을 헤겔은 특히 강조하는데, ?정신현상학?에서 사례로 드는 “신은 존재이다”와 같은 명제는 사변명제이지만, ‘신’이라는 주어 용어가 일상적으로 개념어로서의 특징보다는 보편에 대한 이름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철학적 명제로서 논쟁의 여지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사변명제의 주어와 술어는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때의 동일성은 사변적인 동일성이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 차이를 함축하는 동일성이다. 따라서 사변명제는 “A=A”와 같은 동어반복이나, ‘보편은 보편적이다’와 같은-헤겔에 따르면 긍정적인 “무한판단”-문장이 아니다. 일반 판단형식에서 주어는 실체를 가리키고 술어는 이 실체에 대한 속성들이나 우유적인 것들인 데 반해서, 사변명제에서 주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술어와 역동적인 관계를 맺는다.
“논증적(räsonnierende) 사유는 내용이 되돌아오는, 자기(das Selbst)이었지만, 그와 달리 그 실정적(positiven) 인식활동에 있어서, 자기는 곧 우유적인 것(Akzidens)이며 술어로서의 내용이 관계하는 표상된 주어(Subjekt)이다. 이 주어는 내용이 결부되며 또 그 바탕 위에서 이러저러한 운동이 행해지는 기반(Basis)을 이룬다. 그러나 개념적인 사유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개념적 사유에서는) 개념이 대상의 고유한 자신(Selbst)인데, 이 자신은 곧 대상의 생성을 서술함으로써, 이것은 결코 부동의 상태에서 우유적인 것들을 담지하는 정지된 주어가 아니라, 스스로 운동하면서 자기의 규정을 자기 내로 되가져오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 속에서는 저 정지된 주어는 몰락한다(zugrundegehen). 이제 그 주어는 구별된 것들과 내용 속으로 진입하면서, 나아가 규정성을, 즉 -내용 자체의 운동에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구별된 내용을 형성한다.” (PhG. 49면)
전통적인 주어-술어 관계에서 주어는 “사물화”된다. 즉 주어는 관계를 벗어난 것으로 “실체화”되며, 부동의 것으로 고정된다. 반면 헤겔이 말하는 개념적 사유 혹은 사변을 통해서, 주어는 “탈사물화”되며, 따라서 그 자체 운동하는 관계항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논증적 사유가 정지해 있는 주어에서 마련해 놓았던 단단한 지반이 흔들리면서 이제는 이런 운동 자체가 대상이 된다.”(PhG. 50면) 이런 주어는 우유적인 것 혹은 술어와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그 자신이 “대상의 생성”, 우연적인 것, 차이를 이룬다. 이런 개념적 사유의 서술방식이 바로 사변명제이다.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스스로 운동하면서 자기의 규정을 곧 자기 내로 되가져오는” 사변명제는 주어에서 술어로, 술어에서 주어로의 이중 운동을 한다. “이로써 사실상 내용은 더 이상 주어의 술어가 아니라, 오히려 실체이며 또한 지금 논의되고 있는 바로 그 주어의 본질이며 개념이다.”(PhG. 같은 면)
가령 “이 장미는 붉다”와 같은 문장의 경우 일상적으로 “이 장미”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확고한 실체에 따라 그 실체를 구성하는 속성들을(붉다, 노랗다 등) 포함하거나 이 판단의 진위가 문제가 될 경우에, 그 포함관계를 가늠하게 된다. 하지만 “신은 존재이다”와 같은 사변명제의 경우 술어인 “존재”는 단순히 실체인 신의 속성이 아니라, 또는 신에 관해서 언급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실체적인 의미를 갖는 독립적인 개념이다. 술어가 더 이상 속성이 아니기 때문에 고정점인 주어로서 신이 갖는 실체적 의미는 상실되고, 술어로서 존재는 주어의 내용적 규정으로서 본질을 표현한다. “현실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라는 사변명제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장에서 ‘현실적인 것’이란 주어의 자리를 가리키는 개념이며, 그 온전한 실체적 의미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술어에 따라 완성된다. 현실적인 것의 본질이자 내용은 바로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사변명제에서 전통적인 주어와 술어 관계가 전격적으로 문제시되며,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된다. 즉 사변명제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역전되며, 새로운 의미를 낳게 된다. 사변명제가 일차적으로 겨냥하는 점은 바로 이러한 역전된 주어와 술어 관계이며, 이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사변적 내용을 되풀이해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일반적인 독자들이나, 일정한 교양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철학문장을 접하면서 갖는 난처함이나 나아가 분노에 가까운 반응은 철학적 문장이 갖는 사변적인 성격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이는 “무엇이든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되풀이해서 읽혀져야만 한다는 데에 대한 불평이다.”(PhG. 52면)
하지만 그렇다고 사변명제가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기술적인 장치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헤겔에 따르면 무엇보다 사변명제가 갖는 특성은 사변적 내용 자체에서 기인하며, 의지와는 무관한 사유의 “중력”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표상적 사유는 표상작용을 펴나감으로써 반격을 당하게 된다. 마치 주어가 언제나 근저에 깔려 있다는 듯이 바로 이 주어로부터 출발한 표상적 사유는 오히려 술어가 실체가 되고 주어는 술어로 이행함으로써 바로 그 자신이 지양되어 버림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술어로 보이는 것이 전적이고 자립적인 질량이 됨으로 해서 이제 사유는 임의로 이리저리 헤맬 수는 없고, 오직 이러한 중력에 따라 제지당한다.”(PhG. 50면)
사변명제에서 판단형식에 대한 일상적인 이해방식이 제지당한다면, 사변명제의 이해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사변명제가 은유적인 방식으로 읽힐 수 없음은 우선 사변명제 역시도 주어-술어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아가 사변명제는 주어에서 술어로, 다시 술어에서 주어로의 이중운동을 한다. 따라서 그 지반이 붕괴된 주어는 술어에 따라 다시 주어로서 읽힐 수 있다. 이로써 자명한 것으로 전제되는 실체로서 주어에서 유한한 분석이 전개되거나, 무한분석의 가능성이 펼쳐지는(explicate) 라이프니츠식의 판단형식의 모델은 이제 명제 내부에서의 운동으로 내재화된다. “(명제의 형식이 지양되는-논자) 이런 대립되는 운동은 발화되어야 한다. 이 운동은 저 내적 억제(Hemmung)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자기 내 복귀운동이 서술되어야 한다. 이전에는 증명이 수행해야하는 바를 형성하는 이 운동은 명제 자체의 변증법적 운동이다. 오직 이 변증법적 운동만이 현실적으로 사변적인 것이며, 이 운동을 발화하는 것만이 사변적 서술이다.”(PhG. 53면)
한편 헤겔이 사변명제에서 제기하는 서술의 문제는 “자기 지시적”(self-reference)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변명제 역시도 명제내지는 판단이라는 것이다. 판단형식에 대한 비판을 판단형식에 따라 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태가 바로 서술 자체가 비판을 담지하는 “비판적 서술”이 놓여있는 지형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 지시적 성격의 파악은 일차적인 판단형식에 대한 이차적인 판단형식에 따른 비판이라는 논리적 무한퇴행에 대한 고려를 함축한다. “변증법적 운동은 명제들을 자신의 부분이나 요소(Element)로 삼고 있음을 되새겨 볼 수 있다. 따라서 저 (주어-술어 형식을 공유하는 데에서 오는, 사변적 방식과 논증적 방식의 혼동이 만드는-논자) 난점은 언제나 되풀이되는 것으로 보이고, 또 사태 자체가 야기하는 난점으로 보인다. 이는 다음의 것과 유사하다. 즉 일상적인 증명에서 생기는 일로서, 그 증명이 사용하는 근거들 자체가 다시 근거지움(Begründung)을 요구하고, 또 거기에 대한 정초를 요구하는 식으로 계속 무한으로 진행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근거지움과 조건제시의 이런 형식은, 변증법적 운동과는 구별되는, 저 증명방식에 속한다.”(PhG. 53면) 따라서 사변명제는 일반 판단형식과 무관한 초월적 위상이나 내용을 갖는 명제가 아니다. 또한 사변적 내용을 담지하는 일반 판단형식에 대하여 완벽한 이해 가능성을 전제하는 식의 정당화가 아닌 비판적 서술이다.
이로써 “주어와 술어의 구별을 내포하는 판단이나 명제의 본성은 사변적 명제에 의하여 파괴된다. 그리고 그 판단이나 명제들이 그것이 되는 바, 동일한 명제는 저 (주어 술어) 관계에 대한 충돌을 포함한다.”(PhG. 51면) 그렇다면 사변명제 자체의 고유한 이해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변명제는 어떤 초월적인 형식이나 내용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일반판단형식과 사변명제 사이의 구별이 문제가 되며, 또 여기에서 사변명제의 고유한 이해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구별을 헤겔은 비유를 통해서 설명한다. “이러한 명제 일반의 형식과 이 형식을 파괴하는 개념의 통일과의 사이에서 야기되는 갈등은 마치 박자(Metrum)과 강세(Akzente) 사이에서 생기는 리듬 속의 갈등에 비할 수 있다. 말하자면 리듬은 양자간의 부유(浮遊)하는 중심과 그 통일에서 생겨난 결과이다. 이렇듯 철학적 명제에서도 역시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이, 명제의 형식이 표현하는, 바로 이 양자간의 구별을 소멸시켜서는 안되고, 오히려 양자의 통일이 하나의 조화(Harmonie)로서 등장해야 한다.”(PhG. 51면)
여기에서 헤겔은 주어와 술어의 구별이라는 판단 일반의 형식과 사변 명제에서 양자의 통일을 각각 강세와 박자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조화된다는 점에서 사변명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무형식의 문장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런 조화는 오성적 판단과 사변명제를 서로 뒤섞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의 관계는 헤겔 철학 전반에 걸쳐있는 반성적 사유 혹은 오성적 사유와 사변의 관계와 연관되어있다.
우선 주어와 술어의 분리에 기반을 두는 일반 판단형식은 오성적 사유에 의해서 수행된다. 헤겔은 사변명제보다 앞서서 오성적 사유의 특성을 표상의 분석이라는 측면에서 논의한다. “(분석에 있어서-논자)본질적 계기는 이러한 분리된 것(Geschiedenen), 비현실적인 것 자체이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것은 자신을 분리시키며,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기에,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리 활동은 가장 경이롭고 위대한, 혹은 나아가 절대적인 위력인, 오성의 힘과 노동이다. 자기 내 닫혀져서 정지된, 그리고 실체(Substanz)로서 자신의 계기들을 유지시키는 원환은 직접적인 관계이며, 따라서 그리 놀랄만한 관계가 아니다.”(PhG. 29면, 굵은 체 강조는 논자)
따라서 헤겔에게서 오성적 사유, 특히 분석적 논증은 사유에 있어서 ‘직접적인’ 것으로서 사유의 경향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이런 분리시키는 사유는 계몽적 사유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근원적(Ur) 분리(Teil)”로서 “판단”(Urteil)을 해석하는 것은 초기에서부터 헤겔의 일관된 입장이다. 사변적 사유가 파악하는 사태의 진지함과 심각성은 비매개적이고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사변적 사유가 메타(Meta)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형식적 혹은 반성적 사유의 근본성에서 유래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헤겔은 사변이 파악하는 사태와 그 서술의 비분리성에 더 깊이 관여했던 것이다. 이런 헤겔은 이런 입장을 ?백과사전? 1권 「논리학」의 서론 격인 “객관성에 대한 사상의 세 가지 입장”에서도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분석은 지각의 직접성으로부터 사유에로의 진전이다. 분석된 대상이 자기 내에서 결합시켜 포함했던 규정들과 분리됨으로써 보편성의 형식을 갖추는 한에서 말이다. 경험론은 대상들을 분석함으로써, 그것들을 그 자체로 보존한다고 나름대로 생각하는 때에, 오류에 빠져든다. 왜냐하면 경험론은 그럼에도 사실은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에로 변형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동시에 살아있는 것은 죽음을 맞이한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은 오직 구체적인 것, 분리되지 않은 것(Eine)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 분리는 개념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며, 정신 자체의 자기 내로의 분리운동(Scheidung)이다. 그럼에도 이는 단지 한 측면에 불과하다. 핵심은 분리된 것의 합일에 있다.”
현재 논점에 있어서 주목할 것은 구체적인 것을 분리시키는, 분석하는 것이 “절대적 위력”을 발휘하는 오성의 활동이란 점과, 그 활동을 통해서 고정된 것(Substanz)과 변화하는 것, 그것에 부수된 것이란 경계가 생긴다는 점이다. 이렇듯이 오성의 활동은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직접적인 것과 파악된 것을 가르는 활동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항의 전자들을 각각 후자들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헤겔이 주목하는 것은 이런 변화가 갖는 의미인데, 오성의 활동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그 결과물들을 돌변시킨다. 마치 ?정신형상학?의 “전도된 세계”에서처럼, 오성이 분리시켜 ‘죽은 것’은 정신 속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되살아난다. “하지만 그(원환의-논자) 범위에서 벗어난 우유적인 것 자체, 부수적인 것 곧 오직 다른 현실적인 것과의 연관에만 있는 것이 그 고유한 현존재, 그리고 변별적 자유를 획득한다는 점은 부정적인 것이 지닌 무시무시한 위력이다. 이것은 사유의, 순수 자아의 에너지이다.”(PhG. 29면, 굵은 체 강조는 논자) 즉 정신적 삶에 있어서 그러한 분리와 죽음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은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다. 문제는 삶과 함께 그런 죽음을 견지하며, 또한 부정적인 것이 지니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주시하며 자신을 유지하는 정신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며 그 소멸로부터 자신을 순수하게 보존하려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담지하며 죽음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정신의 삶이다. 정신은 절대적 분열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함으로써만이 자신의 진리를 획득한다. 이런 위력은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마치 우리가 어떤 것을 무실하거나 거짓이라고 말해버리면서, 그로부터 벗어나 어떤 다른 것으로 이행할 때처럼-긍정적인 것으로서 정신이 발휘하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직시함으로써 부정적인 것에 머무는 정신이 발휘하는 위력이다. 이런 머무는 것(Verweilen)은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환하는(umkehrt) 마력이다.”(PhG. 30면)
일반 판단 형식과 사변 명제와의 차이를 논의하면서 전개시킨 위와 같은 논점은 헤겔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논점에로의 진입을 보여준다. 우선 고정적인 부동의 점으로서 실체와 그에 따라 다니는, 의존적이며 변화하는 우유적인 것의 무차별적 분리와 그것에 기반한 판단형식,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직시하며 또 비판적으로 서술하는 사변 명제의 관계는 실체 개념의 변화와 더불어 주체 개념의 변화를 수반한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는 것”에서 “머무는 것”(Verweilen)의 의미는 단순히 그것에 그친다는 것이 아니라, “직시한다”는 의미에서의 “사변”이며, “횡단”(traverse)에 가깝다. 또한 “마력”(Zauberkraft)이라는 은유는 그 신비성에 강조를 두기보다는, 존재와 사유 간에 놓인 “심연”(Abgrund)에 대한 “도약”(Sprung)으로 보아야 한다. 헤겔이 보기에, 인간이 사유한다는 것은 “사유하고자하는 결단”이며, 존재에서 사유로의 도약을 감내하는 것이다. 이런 도약 자체를 근거지을 수는 없다. 정신적 삶이란 이런 심연 앞에서의 도약이며, 이를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물에 뛰어들지 않고서, 수영을 배우려는” 것과도 같다. 이런 도약 속에서 부정적인 것은 존재로의 일대 “전환”(Umkehrung)을 겪는다. 또한 이로써 존재 개념은 철저하게 재정의된다. 이렇게 실체 개념과 더불어 존재 개념 역시도 변화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며, 이러한 비판적 서술의 입장은 나아가 전통 형이상학의 범주를 재정의하는 ?논리학?에로 이어진다. 다시 말하면 사변 철학에서 존재는 비매개적인,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존재는 이제 절대적으로 매개된 것이다.”(PhG. 32면)
그런데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환시키는 마력”은 곧 “주체”를 의미한다. “주체는 자신의 터전에서 규정성에 현존재를 부여하면서, 추상적인, 즉 오직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직접성을 지양하고, 이를 통해서 참된 실체이며, 존재 혹은 직접성이다. 그런데 이 직접성은 매개를 자신의 외부에 갖지 않고, 오히려 이 매개 자체이다.”(PhG. 30면) 여기에서 “주체는 ...참된 실체, 존재 혹은 직접성이다”라는 이 문장 자체가 사변명제이다. 사변명제의 주어와 술어는 우선 무개념적 표상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동물은 질소이다”와 같은 문장은 사변명제가 아니다. 따라서 위 사변명제의 술어인 “존재”는 무개념적 표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매개된 것, 나아가 매개 자체로서 직접성이다. 다음으로 사변명제에서 주어와 술어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일치한다. 따라서 사변명제는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대표적인 사변명제인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는 또한 동시에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를 함축한다. 마찬가지로 존재, 직접성, 참된 실체는 주체이다. 이때 주체는 절대적 차이로서, 즉 동일성과 차이의 돌변, 혹은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으로서 주체를 의미한다. 이는 앞서의 논의에서 보았듯이, 표상적 실체 즉 고정성을 지닌 부동의 점으로서 실체이자 곧 문장 의미의 고정점인 주어로서의 주체가 아니다. 이런 절대적 차이로서 주체는 사변명제의 고유한 내용을 구성한다.
우선 지금의 논의 맥락에서 볼 때, 주체는 우선 하나의 활동, 그것도 형식활동이다. 그리고 형식활동으로서 주체의 고유한 의미는 “부정적인 것의 무시무시한 위력”, “부정적인 것을 전환시키는 마력”으로서 부정의 활동이다. 그런데 이 부정의 활동 속에서 주체는 무실함만을 길어내는 게 아니라, 부정성 속에서의 정체성, 즉 “자기관계적 부정성”이다. “자기관계적 부정성”으로서 주체는 절대적 차이 논리의 연장선에 서있다. 그리고 이런 절대적 차이는 서문에서 헤겔이 논의하는 주요 주제인 실체로서의 주체, 혹은 주체로서의 실체에서 주요한 논점이다. 이에 따라 전통형이상학에서 의미하는 “초월적 주체”는 그 전환을 맞이한다. Henrich에 따르면, 부정성의 자기관계로서 주체가 자기(Selbst)로서 정체성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주체가 실체임으로써 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가 실체가 아니라면, 부정은 자기관계할 수 없다. “실체로서 실체는 동일성의 범주 아래 사유된다. 그와는 달리 주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성이 지배적인 범주이다. 주체는 자기 구별의 활동성이다.” 또한 이때 “주체는 실체이다” 역시 사변명제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는 실체이다”란 사변명제는 주체로서의 실체와 실체로서의 주체를 함축한다.
4. 판단형식과 사변적 내용의 관계
-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
이제 ?정신현상학? 서문에 따른 사변명제이론이 주제화한 판단형식과 사변적 내용의 관계를 살펴보자. 사변명제이론은 판단형식에 대한 반성이 실체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사변철학의 전개에 있어서 서술은 주변적이거나 외삽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중심적인 주제를 형성한다. 이때 사변철학의 서술은 판단형식에 대한 새로운 서술방식을 제시하거나 은유적 혹은 신비적인 방향을 갖지 않는다. 이는 한편으로는 서술의 문제가 언어의 “자기지시적” 성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를 ?논리학? 1권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사변명제를 통해서 살펴보자.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판단형식과 사변적 내용의 긴장관계를 보여준다. 우선 이 문장의 주어인 존재와 무는 가장 추상적이고, 무규정적인 범주들이다. 존재와 무는 그 직접성과 단순성에서 서로 동일하다. 이런 관계는 “‘존재=존재’는 무이다”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헤겔이 주목하는 사태의 진리는 존재와 무는 또한 서로 절대적으로 구별된다는 데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진리는 존재와 무의 무차별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동일하지 않으며, 절대적으로 구별된다.”(WdL1 83면)
그렇다면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존재와 무의 일면적 관계 즉 동일성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표현이다. 다시 판단형식에 대한 실체와 속성의 관계로 본다면, 실체화된 존재와 무의 성질로서 동일성만이 언급되고 있다.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판단의 의미에 대한 일상적인 기대와 그 기대를 뒷받침하는 형이상학적 바탕에 따르면, 우선 주어인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추고 있다. 또한 술어인 동일함을 부가하기 위해서는 동일하다는 속성이 갖고 있는 비교를 전제로 한다. 이런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그 바탕에 앞에서 보았듯이 “술어는 주어에 포함된다”는 포함이론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포함이론이 함축하는 바는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사변적일 때, 주어와 술어의 비동일함이 본질적인 계기이다.”(WdL1 93면) 그렇다면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라는 판단이 갖고 있는 한계는 판단형식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변적 내용인 존재와 무의 절대적 차이는 위의 판단에 “존재와 무는 동일하지 않다”는 판단을 부가함으로써 표현하지 못한다. 이 경우 문제는 배가되는데,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와 “존재와 무는 동일하지 않다”는 대립명제들이 병렬적으로 분리된 채 주장되기 때문에, 문제는 두 명제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되고 만다. 헤겔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일면적인 계기를 양자택일식으로 강요하는 것이 사변적인 사상에 가해지는 가장 일상적인 부당함이다. 대립하는 두 문장의 내용을 갖고 있는 사변적 내용은 “동요(Unruhe)이자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것, 운동으로서 발화될 수 있다.”(WdL1 94면)
그렇다면 이러한 사변적 내용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가? 헤겔이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문장형식을 반성해보면 문장이 지닌 구문론적 구조가 일상적인 기대와는 달리 그렇게 긍정적이지도 일면적이지도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문장을 발화하면서 기대하는 일의적인 의미의 전달은 문장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 구조에 의해서 충족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은 화자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것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이러한 문장과 발화의 다의성에 대한 반성을 사변적 서술은 포함하고 있다. 지금 논의하는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문장은 일상적인 화자가 기대하듯이 존재와 무의 동일함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를 함축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 문장은 주어 용어들의 동일성을 두개의 서로 다른 용어로 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에서 “강세는 무엇보다 하나이고-동일-함에 놓인다. 주어인 바를 일차적으로 술어가 언명하는, 일반적인 판단에서처럼 말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차이가 부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차이는 동시에 문장에 직접 출현한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존재와 무라는 두 규정을 발화하고 있으며, 구별된 것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WdL1 92면)
따라서 존재와 무의 동일성과 차이, 즉 절대적 차이를 말하기 위해서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와 “존재와 무는 동일하지 않다”를 병렬할 필요가 없다. 또한 판단형식에 대한 일상적인 기대와 형이상학적 정초에 대한 비판이 “새로운” 판단형식이나 언어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존재와 무의 절대적 차이가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판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바로 존재와 무가 가장 추상적이고 직접적인 규정이라는 점, 따라서 그 내용적인 표상이 아니라, 존재와 무의 관계적인 규정이 관건이라는 점에서 유래한다. 또한 이러한 최초의 논리학 범주들에 대한 파악의 결과가 “존재는 무이다”가 아닌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인 것은 이 문장 자체가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 전제를 문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의 생경함과 그 문장이 자기 내에 포함하고 있는 긴장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긴장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말하는 명제형식과 사변명제의 리듬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제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문장이 이 규정들의 동일성을 발화하는 한에서, 하지만 사실 그 양자를 구별된 것으로 포함하는 한에서, 이 문장은 자기 내에서 모순되며, 해소된다. 우리가 이를 보다 확실히 하면서, 조금 더 고찰해보면, 자신에 따라 사라지는 운동을 하는 하나의 문장이 정립된다. 하지만 더불어 그 자체에서 자신의 고유한 내용을 형성해야만 하는 것이 생겨나는 데, 이는 바로 생성이다.”(WdL1 93면)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라는 자기지시적인, 따라서 자기 내에서 모순되는 문장은 판단형식과 사변적 내용 간의 긴장을 보여준다. 이러한 긴장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 따라 사라지는 운동”을 한다. 이런 운동을 어떻게 파악하는가는 ?논리학?에서 범주들 간의 관계, 즉 형이상학적인 범주들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논점을 이룬다. 다시 말하면 범주들의 이행이 과연 내재적인 것인가, 아니면 헤겔의 의도와는 달리 외적 반성에 의한 것인가라는 점이다. 이는 사변적 내용의 서술과 표현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 다음의 인용은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 문장은 (존재와 무 범주의-논자)결과를 포함하며, 즉자적으로 그 결과 자체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상황은 다음과 같은 결함이다. 즉 그 결과는 자체로 그 문장에서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결과를 그 문장에서 인식하는 것은 외적 반성이다.”(WdL1 93면)
그 문장은 존재와 무의 절대적 차이를 포함하지만,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달리 말하면 즉자적으로 존재와 무의 절대적 차이이지만, 그 문장에서 피정립된(gesetzt) 것은 아니다. 그 문장이 자기 내에서 안고 있는 긴장과 모순, 그리고 운동이 “표현되는” 것은 바로 “생성” 범주에 의해서이다. “참된 결과는 오로지 판단에서만 현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통해서 표현되고 그 자체로 서술되어야만 하기”(같은 면) 때문에,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판단의 온전한 의미는 생성에 의해서 표현된다. 다시 말하면 생성은 존재와 무의 절대적 차이의 피정립존재(Gesetztsein)이다.
생성이라는 최초의 구체적인 개념의 등장은 범주들 간의 이행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생성 개념에 따라서 “존재는 무에서, 무는 존재에서 자신의 진리를 갖는다”(WdL1 83면)는 말이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생성은 존재와 무의 동일성과 차이의 동일성을 표현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는 방법론적으로 중요한 “즉자존재”(Ansichsein)와 “피정립존재”(Gesetztsein)가 표현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중요한 것은 이전 범주에 포함된 것, 즉자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규정의 상이한 원환에서, 그리고 특히 해명(Exposition) 과정에서, 더 자세히 말하면, 개념의 해명과정에서, 여전히 즉자적인 것과 피정립된 것을 구별하는 것, 규정들이 개념 안에 있는 것인지, 그 규정들이 피정립된 것으로서, 혹은 대타존재(seiend-für-Anderes)로서 있는 것인지를 잘 구별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구별은 변증법적 전개에만 해당하는 것으로서, 비판철학 역시 속하는, 형이상학적 철학함은 이를 알지 못한다. 자신의 전제들, 구별들과 추론들이 오로지 존재하는 것만을, 더욱이 즉자존재하는 것을 주장하려고 하고, 산출하려는 방식이 바로 형이상학의 정의이다.”(WdL1 131면)
따라서 존재와 무, 그리고 생성이라는 ?논리학?의 시원범주들은 개념 전개과정의 동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동인이 언어표현과 판단형식에 대한 헤겔의 문제의식과 분리할 수 없음은 즉자존재와 피정립존재의 관계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존재와 무는 동일하다”는 문장은 판단 형식과 사변적 내용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며, 또한 한 문장을 발화할 때 염두에 두는 것(Meinen)과 그 표현 사이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이런 긴장과 불일치를 표현하는 개념 혹은 범주가 바로 생성인 것이다.
5. 맺음말
판단형식에 대한 라이프니츠식의 실체형이상학적인 근거지움은 그 전일적이고 일의적인 의미이해의 전제로서 “최고의 모나드”를 상정한다. 이 최고의 모나드는 주어에 “잠재적으로”혹은 즉자적으로 포함된 술어의 의미를 정초한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이 최고의 모나드는 그 비규정성에 비추어서 어떤 자연언어를 사용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사용한다고 해도 유한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언어형식은 수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헤겔의 사변철학에서의 관건은 절대적인 것의 자기전개로서 표현과 서술이며, 이는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다. 이때의 언어는 이미 “굴절된” 것으로서, 의미의 단일성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 그럴 때에 일반적인 판단형식은 한계를 갖고 있다. 더욱이 판단형식의 요소인 주어 술어 관계에 대한 실체-속성으로서의 파악은 그 일면성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는 것”은 바로 근원적인 분리로서 판단을 그 형식과 내용면에서 근본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판단의 요소인 주어와 술어는 상호 운동하는 역동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식으로 헤겔의 사변명제이론은 일반 판단형식에 대한 검토와 함께 그 형이상학적 전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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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Speculative Sentence and A Critique of Substance-Metaphysics
Hyunbum Ko
This article aims at illuminating Hegel's speculative sentence theory in view of its critique of substance-metaphysics that grounds the general form of judgement(Urteilsform). Specially, Leibniz's "Including theory" is the representative of such an attempt, which apprehends the relationship of subject-predicate as such of substance-attribute, that is, including-included. And Hegel's speculative sentence
theory criticizes it.
Leibniz's substance-metaphysical grounding of the judgement-form proposes one monad, namely, God as a presupposition of a univocal and perfect understanding. This monad grounds the predicate's meaning that "virtually"(or "an sich") included in a subject. For its un-determinedness, God does not care what natural language used. Rather, it does not use a language, even though it uses a language, its form of a language which a man could know at the best is a language of mathematics.
But the important point of Hegel's speculative philosophy is the expression and description("Darstellung), which is mediated by a language. Such a language is already "broken"("Gebrochene") and does not presuppose the unity of meaning. From this point of view, the general form of judgement has a limit. Further, if its moment, the subject-predicate relation be comprehended as substanz-attributes, its deflect would spread grow. "Tarrying with negative" means thinking and expressing a judgement as "Ur-Teil" radically in respect of a form and a content. So the subject and predicate are comprehended as dynamic one moving reciprocally. In this way, Hegel's speculative sentence theory reflects the general form of judgement radically and thus criticizes its metaphysical presupposition.
【Key words】 Hegel, speculatve-sentence(der spekulative Satz), substance- metaphysics, Leibniz, phenomenology of mind, Logic 범한철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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