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에 있어서 구별되어야 할 세가지 종류의 욕구
백 훈 승 전북대
이 글은 헤겔에 있어서 욕구의 의미와 발생 및 구조, 종류의 문제를 『정신현상학』 (1807)을 중심으로 하여 해명하고자 한다. 특히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章에서 나타나는 '직접적인 욕구'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는 일이다.
헤겔에 있어서는 적어도 세 가지 종류의 욕구가 구별되어야 한다.
첫 째로는 욕구일반으로서, 이것은 자기의식의, 자기 자신과의 통일을 향한 욕구다. 이것은 모든 욕구의 근저에 놓여있는 욕구로서, 분열을 지양하고 하나인 상태, 자기동일성을 회복·유지하려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욕구다.
두 번째의 욕구는 직접적인 욕구로서, 이것은 생 (대상의식)을 향한 욕구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생의 의미다. 헤겔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생'이란, 생명을 갖고 있는 외계의 대상도 아니고, 자기의식이 욕구로서 외계의 욕구대상에 관계할 때 그 욕구대상이 갖게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생동성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욕구하는 자아의 근저에 존재하는 생물적인 자연으로서의 생명도 아니다. 직접적인 욕구의 대상은 바로 대상의식이다.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 대상의식이 생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대상의식은 주체로서의 자아와 대상으로서의 관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관념 또한 자아다. 관념은 나의 관념이다. 관념이 따로 있고 자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상의식은 통일과 구별의 통일, 구별되지 않는 것의 구별, 구별된 것의 통일, 결합과 비결합의 결합, 동일과 비동일의 동일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생의 구조이며 정신의 구조다.
세 번째의 욕구는 외계의 대상을 향한 욕구다. 욕구발생의 원인은 바로 자아의 타자 혹은 자기의식의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만약에 이러한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타자에 대한 의식이 존재할 수 없고, 타자의식 (대상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기의식은 동어반복적인 추상적인 자기의식에 머무르고, 자아에게는 아무런 결핍의 감정, 분열의 감정도 생기지 않으며, 따라서 그러한 감정을 지양하려고 하는 욕구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생각해야 할 문제는,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직접적인 욕구와 『법철학』에서의 욕구의 직접성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며, 또한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저지된 욕구의 의미문제다. 이러한 문제들은 『엔쮜클로패디』의 서술을 참조하는 가운데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 주요어(key words) - 자기의식, 대상의식, 욕구, 생, 타자, 부정
1. 들어가는 말
헤겔에 있어서 욕구 (Begierde)란 과연 무엇이며, 거기엔 어떤 종류가 있으며, 또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하여 발생하는 것일까? 필자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며, 이 중에서도 특히 욕구의 종류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거의 모든 헤겔해석서들이 헤겔에 있어서 욕구의 문제를 그리 중시하지 않고, 예를 들면 1807년의 {정신현상학}의 경우엔, 대상의식에 대한 고찰 이후 자기의식의 성격을 간략히 언급한 다음 욕구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없이, 곧바로 '지배와 예속'의 문제에로 넘어가고 있으며, 욕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몇몇 해설서들의 경우에도, 단지 욕구일반에 관한 헤겔의 언급만을 취급하고 있거나, 아니면 헤겔에 있어서의 욕구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Kunio Kozu 같은 경우는 헤겔에 있어서 단지 두 가지 욕구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807년의 {정신현상학}에 나타나는 '직접적인 욕구'를 '외계의 대상을 향한 욕구'라고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오류는 단지 그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헤겔 해석가들이 범하고 있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음으로써,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章에 대한 종전의 미숙하고 잘못된 이해를, 성숙된 올바른 이해에로 인도하고자 한다. 우리의 주 텍스트는 1807년의 {정신현상학}과 1830년의 {엔쮜클로패디}가될 것이며, 이 밖에 1825년 여름학기의 {정신현상학}과 1827/28년 겨울학기의 {정신철학강의}를 참조할 것이다.
2. 자기의식과 욕구
1807년의 {정신현상학}에서 욕구는 자기의식章에서 비로소 등장한다. 감성적 확신, 지각, 지성이라고 하는 대상의식은 이론적 의식이며, 그것이 대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인 반면에, 자기의식은 실천적 의식이며, 그것은 자아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법철학 4절 참조) 이 점은 피히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즉 그에 의하면, 자아에 의한 비아의 반정립을 통해 성립된 가분적 자아와 가분적 비아가 상호 관계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그 하나는, "자아는 자기 자신을, 비아에 의해 제한된 것으로 정립한다 (... das Ich setzt sich selbst, als beschr nkt durch das Nicht-Ich)"고 하는 이론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는 비아를, 자아에 의해 제한된 것으로 정립한다 (Das Ich setzt das Nicht-Ich, als beschr nkt durch das Ich)"고 하는 실천적 방식이다. 헤겔에 있어서 욕구는 바로 의식의 이러한 실천적 태도 와 관련되어 있다. 대상의식에 있어서는 자아와 대상이 구별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지만, 의식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자기의식으로 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아)와 대상 사이의 구별을 인식하고, 이러한 구별(의 감정)로 인해 욕구가 발생하는 것이다. 즉, 대상의식에 있어서는 자아가 오직 대상만을 인식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런 구별이나 차이 (구별의 감정, 차이의 감정)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나는 나다"라고 하는 절대적 자기의식, 추상적 자기의식, 순수한 자기의식, 선험적 자기의식만으로도 욕구는 발생하지 않는다.
"나는 나다"라고 하는 자기의식은, 여기에는 '나'의 타자 (의 경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순수한 자기의식, 직접적인 자기의식 (엔쮜 424)이며, 아무런 대립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절대적인 자기의식이며, 타자에 의해 매개되어 통일을 이루지 않은 상태이므로 추상적인 자기의식이며 또한 그것은 모든 의식의 근저에서 경험을 가능케 하는 자기의식이므로 선험적 자기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자기의식을 추상적인 자기의식이라고 우리가 부르기도 하지만, 헤겔은 {엔쮜} 425 보유에서, 추상적인 자기의식은, 대상의식에 대립해 있다는 점에서, 매개된 자기의식이지만, 그것이 "아직은 진정한 매개에 이르지 못한, 자아와 세계의 대립 (noch nicht zur wahrhaften Vermittlung kommende Gegensatz des Ich und der Welt)"이라는 점에서는 직접적인 자기의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여기서 헤겔이 말하고 있는 추상적인 자기의식이란, 오직 자아만이 존재하고 자아의 타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위에서 우리가 말한 첫 번째의 의미에서의 추상적인 자기의식이 아니라, 자아 외에도 그의 타자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아가 자신의 타자와 통일되지 못하고 대립된 상태에 있는 그러한 자기의식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첫 번째의 의미의 추상적인 자기의식에서는 욕구가 발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엔 오직 자아만이 존재하고 그의 타자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구별 (차이)의 감정이 생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의 의미의 추상적인 자기의식에서는 욕구가 발생하게 된다. 거기에서는 이미 자기의식과 대상의식 사이의 대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때, "추상적인 자기의식의 결핍" (같은 곳) 또는 모순이란, "자기의식과 대상의식 사이의 분열" (같은 곳), "자기의식의 그 자신과의" 內的 "모순" (같은 곳) 또는 "자아와 세계의 대립" (같은 곳) 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정신현상학}에로 돌려서, 헤겔에서 욕구가 어떠한 형태들로 나타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3. 첫 번째의 욕구
욕구 일반(Begierde berhaupt) - 자기의식의, 자기 자신과의 통일을 향한 욕구
우리의 분석을 위하여, 다소 길다고 생각되는 헤겔의 주장을 인용하고자 한다.
"따라서 자기의식에게는 타자가 하나의 Sein으로서, 혹은 구별된 계기로서 있는 것이지만, 자기의식에게는 또한 이러한 구별과 자기 자신과의 통일이 두 번째의 구별된 계기로서 존재한다. 저 첫 번째의 계기에서 자기의식은 의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식에게서는 감성적 세계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두 번째의 계기, 즉 자기의식의 자기 자신과의 통일이라는 계기와 관계되는 한에서만 보존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감성적 세계에 펼쳐진 모든 것들은 자기의식에 대해서 존립해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현상에 불과한 것, 또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Sein도 지니지 못한 구별이다. 그러나 자기의식의 현상과 진리의 이러한 대립은, 자기의식의 자기 자신과의 통일이라는 진리만을 자기의 본질로 삼고 있는데, 이러한 통일은 자기의식에 있어서 본질화될 수 밖에 없으니, 이것이 곧 욕구일반 (Begierde berhaupt)이다. 자기의식으로서의 의식은 이제부터 이중의 대상을 갖게되는데, 그 하나는 직접적인 성격을 지닌, 감성적 확신과 지각의 대상으로서, 이러한 대상은 의식에 대해 부정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표현된다. 다음 두 번째 대상은 자기 자신으로서, 이것은 참된 본질인데 처음에는 첫 번째의 대상과 대립된 상태로만 비로소 나타난다. 이 때에 자기의식은 운동으로서 나타나며, 이 운동 속에서는 이러한 대립이 지양되며 자기의식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과의 동등성이 형성된다"
위의 인용문은 과연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자기의식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나타내 보겠다: "① 나 = ② 나 ③ 나 + (대상=관념) " 우리가 "나는 나다"라고 말할 때, 이것이 순수한 자기의식이나 선험적인 자기의식일 경우에는, 세계에 관해서 아무런 정보도 알려주지 않는 공허한 동어반복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구체적, 현실적인 자기의식일 경우에는, '나' 이외의 대상, 내가 아닌 타자가 여기에 매개되어 있으므로 ② 나의 내용을 ③으로 풀어서 쓸 수 있다. 헤겔이 위에서 말하고 있는, 자기의식의 구별된 두 계기 중, 첫 번째의 구별된 계기가 바로 의식 (대상의식을 말한다)으로서의 자기의식의 계기로서, 이것은 ② 또는 구체적으로는 ③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에는 "감성적 세계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Sein도 지니지 못하며, 오직 의식 또는 자아에 의해서, 자아에 대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대상 또는 관념은 '나의 대상'이요 '나의 관념'인 것이다. 두 번째의 구별된 계기는 바로, 이러한 구별 (즉, 첫 번째의 구별된 계기: ② 혹은 구체적으로는 ③)과 자기 자신(①)과의 통일인데, 헤겔은 첫 번째의 계기는 현상이요 비본질적인 것이고, 두 번째의 계기를 진리 또는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두 계기의 통일, 즉 대상의식과 자기의식의 통일이 자기의식에 있어서 본질화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욕구일반이라고 말한다. 즉, 욕구일반은, "나는 나"의 궁극적인 실현에의 욕구다. 그런데 이러한 실현은 '나' 속에 있는 타자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러한 제거, 부정을 통해 다다르는 상태가 바로 대립이 지양되어 "자기 자신과의 동등성이" 형성되는 상태, 즉 욕구일반이 충족된 상태다.
{엔쮜클로패디}도 동일한 사태를 표현을 달리하여 서술하고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첫 번째 계기와 두 번째 계기의 대립은 여기서는 "자기의식으로서의 자기와 의식으로서의 자기와의 모순" (엔쮜 425))이며, 또는 "아직까지 서로 동등하게 되지 못한" 추상적 자기의식과 의식 간의 대립 또는 "자기의식과 의식 사이의 분열" 및 "자기의식의 자기 자신과의 내적인 모순"이다. 그리하여 '자기의식의 운동'은 바로 이 양자의 대립을 지양.통일하여 자신의 동일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자기의식의 운동으로서, 이것이 바로 욕구일반이다. 이 때, {정신현상학}과 {엔쮜클로패디}에서 서술된, "자기의식과 자기 자신과의 모순" 또는 "자기의식과 자기 자신과의 통일"에서의 두 자기의식들 즉 자기의식 1과 자기의식 2는 두 측면에서 생각될 수 있다. 즉, 한 편으로는 자기의식 1은 자기의식으로서 자기의식 (즉 추상적인 자기의식)이고 자기의식 2는 대상의식으로서의 자기의식으로 생각될 수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기의식 1은 즉자적인 자기의식, 결핍을 갖고 있지 않은, 따라서 만족한 상태에 있는 자기의식이며 자기의식 2는 대타적인 자기의식, 즉 결핍을 느끼고 있고 따라서 불만족 상태에 있고, 대상의식에 매개되어 있는 자기의식으로서 생각될 수 있는데, 결국 욕구일반을 충족시킨다 함은 자기의식 1과 자기의식 2를 통일시켜 "나는 나다"라는 상태, 생물학의 용어로 표현하면 homeorhesis의 상태로부터 homeostasis의 상태에 이른 안정된 상태, 운동이 일단 멈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상의식과 자기의식의 동일화를 추구하는 욕구일반은 "자기에 관한 추상적인 知에 내용과 객체성을 부여하며 또한 이와는 반대로 자신을 자기의 감성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주어진 객체성을 지양하여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정립하려고 하는 충동 (Trieb)"인데, 이 양자는 동일한 것이라고 헤겔은 말한다. 즉, 객체성을 지양하여 주체성과 통일하는 작용 (객체의 주체화)과, 추상적인 주체성을 지양하여 그것에 객체성을 부여하는 작용 (주체의 객체화)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자는 "대상의 타재 또는 대상의 외면성을 지양하는 것이고" (의식론 2 23), 후자는 "자아의 내면성을 지양하는 것" (같은 곳)이며, "자기 자신을 외화하고, 그럼으로써 자기에게 대상성과 현존재를 부여하는 것" (같은 곳)이며, 이로 말미암아 자기의식 (또는 자아)은 자기의 개념을 실현시키고 모든 것 속에 자기의 의식을 부여한다 (같은 곳 참조).
4. 두 번째의 욕구
직접적인 욕구 (unmittelbare Begierde) - 생 (대상의식)을 향한 욕구
1807년의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章을 읽어가다 보면 우리는 갑자기,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자기의식에 대해 부정적인 관계에 있는 대상은, 의식의 경우에도 그러했듯이 우리에 대해서 또는 그 자체로 자신 속으로 복귀했으며, 자신 속으로의 이러한 복귀 (반성)를 통해 대상은 생이 되었다" (정현 1807, 135).
'생'이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인데, 위의 인용문에서 헤겔이 말하고 있는 '생'이란 바로 '살아있는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바로 조금 뒤의 문장에서 그는, "직접적인 욕구의 대상은 살아있는 것이다" (같은 곳)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욕구대상들 가운데는 생명을 갖고 있는 것도 있지만 생명이 없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욕구의 대상이 人工物인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고, 자연물인 경우에도, 거기엔 무생물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헤겔이 여기서 말하는 욕구의 대상이란,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을 하나의 생명체로서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음식물로 섭취해야만 하는, 생명체로서의 대상만을 뜻하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욕구의 대상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남게 된다. 그것은 바로, 과연 자연 속의 생명체가 자기 자신 속으로 복귀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그렇다면 위의 문장은 과연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일까?
Ivan Soll (1969, 15)은, 헤겔이 여기서 말하는 "욕구의 대상은 외계일반이 아니라 생명을 갖고 있는, 외계일반의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Robert C. Solomon (1983, 397 이하)은, 헤겔은 여기서 'ein Lebewesen'이 아니라 'ein Lebendiges'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헤겔이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성숙한 애니미즘 (full-blown animism)이 아니라, 우리가 욕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역동적인 것 (dynamic entity)', '생명력 있는 것 (vital being)'이다. 그는, 자동차가 고장났을 때를 예로 들면서, 우리가 과학적 지식의 대상으로서의 자동차를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지만, 욕구의 대상으로서의 자동차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非理性的이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로 우리는 대부분의 대상들을 이러한 생동감 (sense of liveliness)을 가지고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이러한 대상들이 실제로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汎 生氣論 (pan-vitalism)이 아니라고 한다.
Soll과 Solomon은 모두, 욕구로서의 자기의식의 대상이 외계의 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견해다. 의식은 여기서 대상의식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차원에 있다. 대상의식에 있어서 의식의 대상은 의식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지만 자기의식에 있어서 의식의 대상은 바로 의식 자신이다. 만약 이들의 견해가 옳다고 한다면, 외계의 物이 어떻게 자신 속으로 복귀하여 생으로 될 수 있겠는가? 따라서 필자는, 위에 인용된 헤겔의 진술은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의식에 대해 부정적인 관계에 있는 대상 (대상의식으로서의 의식)은, 의식 (자기의식으로서의 의식)의 경우에도 그러했듯이 우리에 대해서 또는 그 자체로 자신 (대상의식으로서의 의식) 속으로 복귀했으며, 자신 속으로의 이러한 복귀를 통해 대상 (대상의식으로서의 의식)은 생이 되었다"
이제 주체 자신이 의식의 대상으로 되었으며, 따라서 주체는 "살아있는 유기체인 인간주체" (Lauer, 1976, 94)로 나타난다. 즉, '이것'이 감성적 확신의 대상으로, '사물'이 지각의 대상으로, 현상과 초감각적 세계가 지성의 대상으로 나타났듯이, 생이 자기의식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대상이 자신 속으로의 이러한 복귀를 통해 생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대상의식이란, 의식과 대상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대상의식은 인식주관의 범주들에 의해 인식대상의 다양이 정돈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상인식 (대상의식)은 의식이 대상에로 나아갔다가 자신 속으로 복귀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은 더 이상 의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자신 속에 존재한다. 인식의 근원적이고 종합적인 통일을 이루는 것을 칸트는 '선험적 통각' (KrV, A 107), '순수통각' (같은 책 A 117) 또는 '근원적 통각' (같은 책 B 132)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관념을 낳게하는 자기의식이다 (같은 곳). 헤겔은 선험적 통각, 즉 자기의식에 대한 칸트의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면서 {엔쮜클로패디} 42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나는 대상을 나에게 속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상은 나의 관념이다). 그러므로 나는 대상 속에서 나에 관하여 알고 있다 ( (...) ich wei von dem Gegenstande als dem meinigen (er ist meine Vorstellung), ich wei daher darin von mir.)".
자기의식의 대상으로서의 대상의식은 주체로서의 자아와 대상으로서의 관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구태여 구분을 하려고 할 경우에 그러한 것이지 사실은 관념도 자아인 것이다. 관념은 '나'의 관념이다. 관념이 따로 있고 자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헤겔은 (피히테도 마찬가지지만) Gilbert Ryle과 마찬가지로, 어떤 基體로서의 의식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 의식은 활동으로서 존재한다. 즉 활동 또는 정신작용 외에 별도로 자아나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식의 구조는 바로 헤겔이 말하고 있는 '통일과 구별의 통일 (Einheit der Einheit und der Unterschiede)'이며, 이 구조가 바로 생의 구조이며, 정신 (Geist)의 구조인 것이다. 헤겔이 위의 인용문에서 말한 '생'은 바로, 자기의식으로서의 욕구 또는 욕구로서의 자기의식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대상인 대상의식이 바로 이러한 생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자기의식 章에서 바로 뒤에 따라오는 구절이 다시 확인해 주고 있다. 즉 거기서 헤겔은 "왜냐하면 즉자태나, 物의 內面에 대한 지성의 관계에서 얻어진 일반적인 결과란, 구별될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 혹은 구별된 것을 통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Denn das Ansich oder das allgemeine Resultat des Verh ltnisses des Verstandes zu dem Innern der Dinge ist das Unterscheiden des nicht zu Unterscheidenden, oder die Einheit des Unterschiednen)" (정현, 135)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로써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컨데 번갯불이 일어나는 특수한 현상을 지성이 설명할 때, 전기력과 전기법칙을 구별하지만, 사실은 전기력과 전기법칙은 동일한 내용과 성질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양자 간에는 하등의 구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책, 119 참조). 여기에는 구별의 정립 및 구별의 지양이 존재하며, 이것이 바로 생의 구조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헤겔은 1825년 여름학기의 정신현상학 강의에서 이러한 생의 구조를 자기의식과 관련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 어떤 대상에 관한 의식, 즉 생동성이 현존한다. 그리고 나는 살아있는 것에 관계한다. 나는 이제, 사유하는 자다. 그리고 내가, 사유하는 자로서 생동성에 관계함으로써 나에게 있어서는 주체성, 생동성 자체가 생성된다 ... 자아는 그 자체로 살아있으며, 자기의 생동성을 대상으로 삼으며, 그리하여 자아는 자기의식이다 (Es ist vorhanden Bewu tsein irgend eines Gegenstandes, die Lebendigkeit, ich verhalte mich zu einem Lebendigen, Ich bin nun das Denkende, indem es sich zur Lebendigkeit als denkend verh lt, wird ihm darin die Subjektivit t, die Lebendigkeit als solche... Ich ist selbst lebendig, macht seine Lebendigkeit zum Gegenstand und so ist es Selbstbewu tsein)".
한편 다니 다까오 (谷喬父)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욕구의 대상이 생이라는 것은, 자기의식이 대상으로 삼는 자아의 심연에 존재하는 것이 생명이라는 뜻이다. 자기의식을 지니고 있는 인간은 '나는 나다'라는 자아의 근저에 생물적 자연인 생명을 갖는다. 자기의식의 육체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그것은 생명이며, 그 주체가 욕구로서 관계하는 객체 또한 생명이다". 그러나 다니 다까오는 "(...) 대상은 (...) 자신 속으로 복귀했으며 (...) 자신 속으로의 이러한 복귀를 통해 대상은 생이 되었다"라는 구절의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생명'은 육체적 생명으로서, 이것은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지배와 예속>이라는 節에서 등장하는 생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다. Werner Becker (1970, 60 그리고 1971, 55)는 자기의식의 대상을 대상의식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지만, 이 대상의식은 물질 및 모든 외부의 對象性을 물활론적으로 지성화하는 형태를 띠고 생으로 등장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대상의 물활론적 지성화는 헤겔이 말하는 대상의식에는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다. 헤겔은 대상의식의 구조가 '통일과 구별의 통일'이라는 생의 구조로 되어있음을 말하려고 한 것 뿐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헤겔에 있어서의 두 번째의 욕구를 발견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직접적인 욕구의 대상은 살아있는 것이다" (정현, 135)라고 헤겔이 말할 수 있었던 사상적 배경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헤겔은 {기독교의 정신과 그 정신의 운명}이라는, 그의 Frankfurt 시절의 단편에서 "순수한 생을 사유하는 것이 ... 과제다 ..." 라고 말하며, 또한 철학의 사명을 '결합과 비결합의 결합으로서의 생'을 파악하는 데에 두고 있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유한자를 무한자 안에 생으로서 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은 청년기 헤겔철학의 중심개념이고 최고의 대상이며, 그것은 나중에 '정신' (Geist)에 의해 대치된다. 그리하여 헤겔은 1800년의 {체계단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한한 생은, 추상적인 多와 대립해 있는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정신이란, ... 다양한 것들의 살아있는 통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생 또는 정신은 과연 어떤 구조를 갖고있는가?
생은 "대립과 관계의 결합" (N, 348), 또는 "결합과 비결합의 결합" (같은 곳)이라고 규정되고 있다. 루카치 (1973, 353)는 "변증법적 모순의 이러한 정식화" 즉 결합과 비결합의 결합 를 "Frankfurt 시절의 헤겔이 이룩한 최고의 성과"라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결합과 비결합의 결합이라는 헤겔의 생규정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자신과 타자를 자신의 타자로 확보하는 동시에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면서 포괄하는 결합의 구조다. 예를 들면 하나의 생명체는 자기의 생을 보존.유지하기 위하여 자기의 타자를 필요로 하며, 이 타자를 자기에게 同化시킴으로써 자기의 신체를 유지.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생명체의 타자는 생명체에 의해 부정.지양되어 생명체의 일부로 흡수.변화된다. 따라서 생명체는 ① 타자와의 관계와 ② 자기 자신과의 관계라고 하는 두 가지 측면의 관계를 갖는다. 첫째로, 생명체는 자기를 보존하기 위하여 자기의 타자인 비유기적 자연과 관계해야 한다. 그것은 "외면적 과정으로서, 그리고 외면성을 향한 과정으로서", "외면적인 유기체"이며, 두 번째로, 생명체는 타자로부터 "자기에게로 복귀함으로써" (실재철학2, 140, 158)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 Manfred Riedel (1976, 15)이 지적하고 있듯이, 복귀 (Reflexion)의 'Re-'는 이미, 생명체가 관계하고 있는 타자를 지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복귀는 외면성과의 관계로부터의 자기 자신에로의 "부정적 복귀" (엔쮜 353)다. 이러한 생의 구조는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즉 헤겔에 의하면, 절대자를 나타내는 최고의 표현은 "동일과 비동일의 동일"이며, "절대자 속에는 대립과 하나임 (Einssein)이 동시에 존재한다". 만약에 절대자, 무한자가 운동하지 않고, 자신의 타자인 유한자에 매개되지 않고 타자에 대립된 상태로, 그 자체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절대자, 공허한 절대자이며, 헤겔에 의하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절대자라고 할 수 없고, 유한자에 대립되어 있는 상대자 혹은 악무한에 불과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직접적인 욕구의 대상은 살아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직접적인 욕구의 대상은 대상의식인데, 이 대상의식 자체는 통일과 구별의 통일이라는 구조, 혹은 Frankfurt 시절 및 Jena 시절의 용어로 표현하면 결합과 비결합의 결합 내지는 동일과 비동일의 동일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 구조가 바로 생의 구조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상의식만이 생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 자체가 이미 생의 구조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선험적인 순수한 자기의식에 있어서는 아무런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나다"라는 진술에서, 우리가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주체로서의 나와 객체로서의 나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의식의 개념이 대상으로 갖고 있는 자아는 사실은 대상이 아니며" (정현, 140 또한 엔쮜 424 참조), 거기엔 오직 '나'만 이 존재할 뿐이다. 헤겔은 이러한 사태를 가리켜 무구별적인 구별, 내적 구별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우리는 통일과 구별의 통일이라는 생의 구조가 이미 현전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위와 같은 선험적이며 순수한 추상적 자기의식이 아닌 구체적 자기의식의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는 생의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즉,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자기의식이란, 앞에서도 이미 살펴 본 것 처럼, 타자에 의해 매개되지 않고 점의 형태로 고정되어 있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자기의식이 아니라, 자기의 대상인 대상의식에 의해 매개되고 또 그것을 지양하면서 자신 속으로 복귀한 자기의식이다. 이 때, 이러한 타자로부터의 자기 내 복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타자가 존재해야 하는데, 이 타자는 자기의식에 의해 의해 지양되어야 할 부정적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자기의식이 진정한, 현실적인 자기의식이기 위해서는 타자를 지양하여 자신 속으로 포함시켜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생명체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의 타자인 비유기적 자연을 섭취하여 자기의 것으로 동화시키는 작용과 그 구조가 동일하다. 대상의식이 자기의식의 지양작용을 통하여 자기의식 속으로 포함되는 것 처럼, 생명체도 자기의 대상을 섭취함으로써 그것을 자기의 피와 살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체에 의한, 주체와 객체의 동일화작용이다. 생명체는 그저 그것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를 스스로 현존하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즉 생명과정의 성과로서 존재한다" (엔쮜 352).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의식도, 단순한 Sein으로서 존재한다면 살아있는 자기의식이 아니다. 자기의식은 자기를 자기의식으로 만듦으로써 자기의식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Hans G. Gadamer (1979, 129)는 생명체의 자기관계와 "나는 나다"라고 하는 관념주의의 진술, 즉 자기의식의 특징을 Platon의 ' '이란 용어로 해석하고 있다.
5. 외계의 대상을 향한 욕구 : 욕구 3
세 번째로는, 헤겔이 "외계의 대상을 향한 욕구"라는 명확한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저술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욕구'를 발견할 수 있다. 만약에 우리의 의식 외부에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상의식은 성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구체적인 자기의식, 진정한 자기의식도 존재할 수 없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2년 후의 저술인 {의식론 2}에서, "자기의식은 그것의 형성 또는 운동에 있어서 세 단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① 욕구의 단계 ② 주노관계의 단계 ③ 보편적 자기의식의 단계다. 그런데 ① 욕구의 단계에서는 자기의식이 다른 物들 (andere Dinge)에 향해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욕구일반과 생 (대상의식)을 향한 욕구라고 하는 두 가지의 욕구에 대해서만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 외계의 대상에 대한 욕구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데, {의식론 2}에서는, 자기의식으로서의 욕구 또는 욕구로서의 자기의식은 "다른 物들에 향해 있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또한 "자기의식의 否定 또는 他在는 자기의식에 대하여" ① "의식으로서" 그리고 ② "자기의식과는 다른 외적인 物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욕구는 의식 또는 외적인, 욕구에 대립하여 무관심하게 존립하는 대상으로 인해 제약된다"고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의식'은 욕구 2의 대상을, 그리고 '외적인, 욕구에 대립하여 무관심하게 존립하는 대상'은 욕구 3의 대상을 각각 가리키고 있다.
6. 욕구 1, 욕구 2 그리고 욕구 3의 관계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욕구가 발생하는 까닭은 바로 자아의 타자 또는 자기의식의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욕구란 바로, ① 외계의 대상을 부정하여, 자아의 대상과 자아를 통일시키려고 하는 의식의 운동 (욕구 3 ), 혹은 ② 자기의식의 대상인 대상의식을 부정하려는 의식의 운동 (욕구 2)이며, 더 나아가서는 ③ 자기의식 (자기의식 1)과 자기의식 자신 (자기의식 2)을 통일시키려는 의식의 운동 (욕구 1)이다. 이 때, 욕구를 발생시키는 근원적인 것은 외계의 대상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이념적인 것이든 간에 이다. 왜냐하면, 만약 외계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대상에 대한 의식이 존재할 수 없고, 대상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기의식은 동어반복적인 추상적 자기의식에 머무를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여기서는 아무런 욕구도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자아의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아에게는 아무런 결핍의 감정, 분열의 감정도 생기지 않으며, 따라서 그러한 감정을 지양하려고 하는 욕구도 당연히 생기지 않으며, 그러한 자아는 단지 點과 같은 형태로만 존재할 뿐이어서,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는 죽은 자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외계의 대상을 향한 욕구인 욕구 3이 충족되면, 욕구 2가 충족되는 동시에 욕구 1도 충족된다. 그러나 욕구와 그 충족의 과정은 의식의 분열 통일 분열 ...의 반복된 과정, 즉 대자 즉자 대자 ...의 과정인데, 이러한 운동은 자기의식으로서의 인간이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계속되며, 따라서 궁극적인 통일.충족은 있을 수 없다. 분열로부터 통일에 도달하려는 욕구, 즉 대자가 즉자로 존재하려는 욕구를 J. P. Sartre는 '무익한 정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 속의 주인공의 반복적인 노동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헤겔은 "파괴적이고 我慾的인 욕구는 충족 속에서 거듭 산출되며 ... 욕구의 충족도 개별적인 것, 일시적인 것이요 ... 자기의 목표에 절대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무한진행만을 초래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 가지의 욕구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가 {법철학} 187과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점이 있다. 여기서 헤겔은, 해방으로서의 노동과 관련하여 "욕구의 직접성 (die Unmittelbarkeit der Begierde)"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욕구가 다 직접적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 가운데서 직접적인 욕구만을 가리키는 언급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선 욕구일반 (욕구 1)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것은 욕구 3의 충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충족되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직접적인 욕구'란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앞에서 살펴 본 {정신현상학}에서의 직접적인 욕구를 생각할 수 있다. 거기에서 헤겔이 말하는 직접적인 욕구란, 살아있는 것에 대한 욕구, 즉 대상의식에 대한 욕구였다. 왜 이것이 직접적인가 하면, 욕구로서의 자기의식과, 그 대상인 대상의식 사이에는 아무런 것도 매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의식으로서의 나와 대상의식으로서의 나와의 관계, 결국은 나와 나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직접적인 욕구에 대해 말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즉 욕구로서의 자기의식은 두 개의 대상에 관계하는데, 첫째로는 자기 자신에 관계하고 이와 동시에, 이와는 반대로 또한 직접적인, 관념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타자, 외부의 객체, 비아에 관계한다 (엔쮜 426 보유 참조). 이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는 자기의식의 첫 번째 대상은, 대상의식으로서의 의식 자신이고, 두 번째의 대상은 외부의 객체다. 그런데 자기의식이 이 첫 번째의 대상, 즉 대상의식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관계할 때 갖는 욕구가 바로 {정신현상학} (정현, 135)에서 말하고 있는 직접적인 욕구며, 그리고 자기의식이 두 번째의 대상, 즉 직접적인, 관념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타자, 외부의 객체, 비아에 관계할 때 갖는 욕구는 욕구 3을 가리킨다. 이것이 직접적이라고 불려지는 이유는, 그것이 대상의식으로서의 의식과 외부의 대상 사이에 아무 것도 매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며, 관념적으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구 2도 욕구 3도 다 같이 '직접적인 욕구'라고 불려질 수 있지만, 각 경우에 있어서 관점이 다르다. 그런데 위의 {법철학}에서 말하는 직접적인 욕구는, 외계의 대상을 파괴.소비하려는 욕구로서, 후자를 가리킨다.
7. "저지된 욕구"란?
{정신현상학}의 승인을 위한 생사를 건 싸움에 대한 서술 뒤에 노예의 노동을 다루고 있는 대목에서 헤겔은 노동을 가리켜 "저지된 욕구" (149쪽)라고 말하고 있다. 노동이, 저지된 욕구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노동은 대상의 순수한 부정으로서의 욕구 (정현, 148 참조)가 아니라, 이러한 순수한 부정이 저지된 욕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노동은 대상을 무화시키지 않고 그것을 가공하여 다른 物 (작품)로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행위이므로, 순수한 부정으로서의 욕구나, "소멸에 불과한" (같은 책, 149) 충족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의 욕구는 욕구 2와 욕구 3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저지되는 것은 파괴적이고 순수하게 부정적인 욕구이지, 자기의식의 자기 자신과의 통일을 그 본질로 갖고 있는 욕구일반의 저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의 "욕구의 저지"에 관하여 헤겔은 {예나실재철학}에서, 욕구는 그것이 인간적인 욕구인 한, 관념적으로 되어야 하고 지양되어야 하며, 욕구의 대상 또한 전적으로 부정.무화되지 않고 관념적으로 지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욕구의 무화작용 (무화시키는 욕구의 작용)은 저지되어야 하는데, 바로 욕구와 대상 사이에서 욕구의 직접성을 지양하여 욕구를 매개된 욕구로 고양시키는 중심으로서 이러한 저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노동이다. 여기에서 욕구의 저지는, "욕구가 지양 자체 속에서 관념적으로 되어야 하고, 지양되어야 한다"는 표현으로, 그리고 "무화작용의 단순성이 단순성 자체 속에서 분열됨으로써 자체 내에서 저지되고 대립되는 것이어야 한다", "무화작용의 단순성은 양자 (욕구와 대상: 필자가 삽입함)의 대립이 지양된 보편적인 통일이어야 한다"는 등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물은 자신의 욕구와 대상을 모두 직접성 속에서 무화시킴으로써 욕구의 악무한에 빠진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욕구의 직접성이 지양됨으로써 대상 또한 무화.소멸되지 않고, 지양되어 존속하게 된다.
"저지된 욕구"가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의미는, 욕구를 단지 욕구 2와 3의 의미로만이 아니라 욕구일반을 포함한 의미로 생각할 때 발생한다. 즉, 노예는 자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명령에 따라 주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한다. 따라서 이 때에 주인의 욕구는 관철되는 반면에 노예 자신의 욕구 (단지 욕구 2, 욕구 3뿐만이 아니라 욕구일반으로서의 욕구)는 저지된다. 이렇게 보면, 첫 번째 의미의 "저지된 욕구"는 노동일반에 관한 언급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두 번째 의미의 "저지된 욕구"는 노예의 노동에 관한 언급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노예의 행위는 본래 주인의 행위" (정현, 147)이며, 그는 "주인에 대한 봉사 속에서 자기의 개별의지와 고유의지를 제거해 버린다" (엔쮜 435 또한 의식론 1 27, 29 참조). 그러나 헤겔에 의하면, 노예의 욕구는 노동 속에서 저지되기는 하지만 완전히 무화되지 않고 존속하며, 노동 속에서 단지 자기의 욕구만이 아니라 타자 (주인)의 욕구도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주인 보다 우월하며, 노예의 이기심의 극복이 인간의 진정한 자유의 시초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노예의 욕구 (대상을 무화하려는 욕구)는 노동 속에서 한 편으로는 저지.부정되는 것이 사실이나, 다른 한 편으로 볼 때, 새로운 대상을 가공.창조하려는 욕구는 보존된다고 말할 수 있다.
8. 맺는 말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헤겔에 있어서는 적어도 세 가지 종류의 욕구가 주장되고 있으며, 자기의식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욕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생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임을 알게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처럼, 1807년의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장에 서술된 직접적인 욕구의 대상으로서의 살아있는 것이란, 외계의 생명체나, 혹은 擬人化된 物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대상으로서의 의식 자신이라는 점이 밝혀짐으로써, 우리는 헤겔의 정신철학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우리가 얻은 성과는, 헤겔에 있어서 직접적인 욕구가 두 가지 상이한 맥락에서 상이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논문의 성격상 그의 생개념에 대한 상세한논의는 생략했으나, 그에 있어서 생개념은 논리적 생, 살아있는 개체로서의 생, 생명과정으로서의 생, 類로서의 생, 정신의 생, 육체적 생 이에 대해선 {Wissenschaft der Logik}의 제 3부 (Die Idee) 제 1장 (Das Leben) 및 {정신현상학} (1807) 참조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선 다음에 다룰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글을 끝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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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drei zu unterscheidenden Begierde bei Hegel
- Paek, Hun Seung -
Diese Abhandlung zielt sich ab, die Bedeutung, Entstehung und Struktur, das Problem der Arten der Begierde bei Hegel zu betrachten, namentlich das falsche Verst ndnis f r das unmittelbare Begierde im Selbstbewu tseinskapitel in der Phaenomenologie des Geistes 1807 zu korrigieren.
F r Hegel gibt es mindestens drei Arten von Begierde zu unterscheiden. 1. Begierde ueberhaupt: Begierde nach der Einheit des Selbstbewu tseins mit sich selbst. Das ist die allen Begierden grundliegende Begierde und kommt aus der Natur des Selbstbewusstseins heraus, welche die Zerrissenheit aufhebt und somit die Einheit, Selbstidentit t wieder herstellen will. 2. Unmittelbare Begierde: Begierde nach Leben (Gegenstandsbewu stsein). Es handelt sich dabei um die Bedeutung des Lebens. Das von Hegel gemeinte Leben ist kein Gegenstand der u eren Welt, welcher Leben hat. Das Leben deutet nicht auf die vermeinte Lebendigkeit eines Gegenstandes der Begierde hin, falls sich das Selbstbewu tsein als Begierde auf einen Gegenstand der Begierde der u eren Welt bezieht. Au erdem ist das kein Leben, welches einem begehrendem Ich grundliegendende, biologische Natur ist. Der Gegenstand der unmittelbaren Begierde ist eben Gegenstandsbewu tsein. Da dieses Gegenstandsbewu tsein die Struktur des Lebens hat, das will Hegel sagen. Gegenstandsbewu tsein besteht aus Ich als Subjekt und Vorstellungen als Objekt. Vorstellungen sind jedoch Ich. Vorstellungen sind meine Vorstellungen. Vorstellungen und Ich existieren nicht getrennt. Dieses Gegenstandsbewu tsein hat die Struktur der Einheit der Einheit und des Unterschiedes, des Unterscheidens des nicht zu Unterscheidenden, der Einheit des Unterschiednen, der Verbindung der Verbindung und der Nichtverbindung, der Identit t der Identit t und der Nichtidentit t. Diese Struktur ist gerade diejenige des Lebens und des Geistes. 3. Begierde nach u eren Gegenst nden. Begierde entsteht aus dem Anderen des Ich oder des Selbstbewu tseins. G be es kein Anderes, w rde kein Bewu tsein von diesem Anderen sein. G be es kein Bewu tsein von Anderem (Gegenstandsbewu tsein), bleibe das Selbstbewu tsein ein tautologisches, abstraktes Selbstbewu tsein. Dabei w rde dem Ich kein Gef hl des Mangels und der Zerrissenheit entstehen und somit keine Begierde, welche ein solches Gef hl aufheben will.
Au erdem ist ein Zusammenhang zwischen der unmittelbaren Begierde in der Ph nomenologie des Geistes und der Unmittelbarkeit der Begierde in der Philosophie des Rechts zu betrachten. brigens ist die Bedeutung der gehemmten Begierde in der Ph nomenologie des Geistes zu erkl ren. Solche Probleme sind mit den Hinweisen der Darstellungen in der Enzyklop 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zu l sen.
※ Key Words : Selbstbewu tsein, Gegenstandsbewu tsein, Begierde, Leben, das Andere, Neg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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