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카르미데스]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앎의 의미와 역할*
-유 혁(서울대)
1. 문제제기와 논의의 방향
플라톤(Plato)의 대화편들, 특히 초기의 것으로 분류되는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Socrates)와 그의 대화상대자는 각각의 뛰어남(֢ՑՅՔԾ: Tugend)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그것의 정의(definition)를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기에 대화의 진행은 아무런 긍정적인 결과나 성과도 없이 아포리아(길없음)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렇게 끝나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읽으면서 독자인 나도 의문을 지니게 된다. 플라톤은 과연 자신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그저 실제로 진행되었던 대화만을 기록했을까? 자기자신의 뚜렷한 생각이 없었다면, 이리저리 표류하는 것 같아 보이는 대화편을 왜 썼을까? 또 자기자신의 유한 견해가 있었다면, 굳이 대화형식을 채택해서 글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같은 의문에서부터 이 글은 출발한다. 나는 이 글에서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지니는 아포리아와 그것을 읽으며 내가 맞대하게 되는 문제들을 해소해 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 작업을 이 글에서는 플라톤의 대화편 {카르미데스Charmides}를 주된 재료로 삼아서 진행시킨다.
{카르미데스Charmides}에서는 "현명함(ՓՙՖՑՏՓ՝ՍՇ)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것을 규정하려는 시도가 전체 대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 스스로를 앎이 있을 수 있는가? 만약 있다면 어떤 이로움이 있는가?"라는 물음이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미 지적했듯이 {카르미데스Charmides}도 제시된 문제에 대해서 명백한 답을 제시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록 소크라테스가 계속되는 논박의 과정을 통해서, 현명함의 정의로 제시된 후보들을 물리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플라톤은 '대화편'이라는 형식의 도움을 얻어서 간접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본 논문에서 내가 보여주려고 하는 바이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논의를 서로 다른 두 수준(지평)위에서 진행시킬 것이다. 즉 대화를 통해서 진행되는 논의의 내용과 그 대화의 진행을 통해서 플라톤이 보여주려는 바를 구분하여 논의를 진행시킬 것이다.
우선 일차적으로 표면에 드러나는 내용에 주목해서,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의를 추적한다. 이 대목에서는 앎의 성립에 관련된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기본 바탕에 두고서 논변의 논리적인 진행에 초점을 맞춘다.
한편 그 다음에는 위의 논의 수준과 구분되고 대조를 이루는 또 다른 수준에서, 대화라는 형식의 특성에 주목해서 플라톤의 저술의도가 무엇인가를 추적해 본다. 대화의 곳곳에 슬며시 자리잡고 있는 것들, 대화 전체의 진행으로 플라톤이 보여주려는 바,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에 주목하면서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이 작업이 나의 의도대로 제대로 수행된다면, 대화편들에서 발견되는 아포리아는 플라톤이 자신의 의도를 지니고 고안해내고 극적으로 구성해 놓은 것임을 밝히게 될 것이다. 즉 그가 대화 속의 논변진행이 아포리아로 끝나게 구성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대화의 논변이 찾으려는 바가 대화 참여자들의 행위 속에서 드러나도록 글을 극적으로 꾸며 놓았음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애초에 내가 {카르미데스Charmides}와 다른 대화편들을 처음 읽을 때 지녔던 의문점들은 어느정도 해소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은 무엇이며, 어떠한 것인가?
"현명함이 무엇인가?"를 묻고 그것을 찾으려고 시도하면서 등장한 카르미데스(Charmides)의 제안들이 난관에 부딪친 후, 162c1에서부터는 크리티아스(Critias)가 논의의 전면에 나선다. 크리티아스는 아폴로(Apollo)의 델피 신전에 쓰여 있는 "네 자신을 알라.(ԵՍ،ՈՉ ՓՁՕՔ՜Ս)"라는 문구를 이야기하며 그것에 따라서 "현명함은 '자기 자신이 그 자신 스스로를 앎(Քש ԵՉԵՍ՞ՓՊՅՉՍ Ձ״ՔשՍ ֲՁՕՔ՜Ս)'이다."라고 정의할 것을 제안한다.(164c7-165b4) 이 글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바로 이 제안이다.
2.1. 자기 자신 스스로 그 자신 스스로를 앎이라는 것이 있는가?
이 제안에 대해서 검토를 시작하면서 우선 소크라테스와 크리티아스는, 만약에 현명함이 무엇인가를 앎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어떤 하나의 앎이고 또한 무엇에 관련된 앎(ִՐՉՓՔԾՌՇ ՔՉՒ ֬Ս ՅיՇ ՊՁו ՔՉՍ՜Ւ)이라고 게다가 그것은 그 자신에 대한(ֲՁՕՔՏ) 앎이라는 점에 합의한다.(165c4-7)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몇가지 앎의 예를 드는데, 그는 우선 의술의 예를 들면서 제안된 정의가 적합한 것인지를 검토해 나간다.
(1) 의술은 건강함과 관련을 맺는 앎이다. 그리고 그 의술은 적지 않은 유용함, 즉 우리에게 좋은 결과물인 건강을 만들어 준다. (2) 그리고 집짓기 기술은 집짓기와 관련을 맺는 앎이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물은 집들이다. (3) 다른 기술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165c8-d6)
이와 같은 이야기에 서로 동의를 하고 나서, 그것을 원칙으로 삼아 소크라테스는, 자기자신에 대한 앎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도록 크리티아스를 유도한다. 소크라테스는 다소간 성급하게 일반화로 치닫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크리티아스는 "하지만 소크라테스! 당신은 올바르게 살펴보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앎들과는 그 본성이 비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도 서로서로 비슷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마치 그것들이 비슷하기라도 한 것처럼 탐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165e3-5)"라고 이야기한다. 즉 그는 자기자신에 대한 앎이라고 규정된 현명함에 대해서 위의 원칙은 적용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크리티아스는 위의 의술의 예를 원칙으로 삼아서, 산술이나 기하학에 대해서도 그것에서 비롯된 결과물이 있느냐고 소크라테스에게 묻는다. 그러나 (1) 산술은 짝수, 홀수와 관련된 것이다. 즉 다수의 것들을, 그것들이 그 자신과 관련지어서 그리고 서로서로와 관련지어서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고서 다룬다. (2) 한편 무게 다는 기술은 더 무거운 것과 더 가벼운 것을 그것의 무거움과 가벼움에 주목해서 재는 것이다. 그러나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은 무게 다는 기술 자체와는 다른 것이라고(166a3-b4) 소크라테스는 답할 뿐이다. 그는 그것들이 무엇에 대한 것인가, 즉 그것들의 대상들만을 이야기해 줄 뿐, 그것이 어떤 실질적인 결과물들을 가져다주는지는 답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수학적인 유형의 앎에도 대상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명함도 무엇과 관련된 앎이며, 또 그 무엇은 바로 현명함자체와는 다른 것이다."라는 동의를 이끌어 내려고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크리티아스는 동의하지 않으며 오히려 소크라테스의 잘못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다양한 유형의 지식들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유사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유사성을 가정한 채로, 소크라테스는 또 한 번 크리티아스가 성급하게 귀납적인 일반화를 하도록 강요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티아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기 자신 스스로를 앎은 그 자신과 구분되는 다른 어떤 것을 그것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다(바로 그 자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다른 지식들과 구분되는 고유한 특징을 지닌다.(166b7-c6)
그러면 과연 자기 자신과 관련을 맺는 앎(자신에 대한 앎)이라는 것이 있는가? 그런데 앎이 어떤 관련을 맺음(관계 맺는 작용 혹은 능력 : Մ՝ՍՁՌՉՒ)에서 성립하는 것이라면, 그 자신 스스로와 관련을 맺는 앎이 성립하는가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일단 자기 자신 스스로와 관계맺음이 도대체 가능한가를 우선 따져 보아야한다.
2.1.1. 자기자신이 자기스스로와 관계 맺음(Մ՝ՍՁՌՉՒ)이라는 것이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우선 영혼의 능력들과 관련지어서 이것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1) 다른 보기(ՉՒ)들이 관련을 맺고 있는, 바로 그것들(색)과 관련을 맺는 보기는 아니면서, (보기)그 자신과 관련을 맺고 있고, 다른 보기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보기이며, 그리고 똑같은 방식으로 보기가 아닌 것과 관련을 맺는 보기란 없다.
(2) 어떤 소리도 결코 듣지 않으면서, (듣기)바로 그 자신을 듣고, 다른 듣기들을 듣고, 또 듣기가 아닌 것을 듣는 듣기(֢ՊՏԾ)는 없다.
(3) 감각지각(ՁיՓՈՇՓՉՒ), (4) 욕구(ִՐՉՈՕՌԿՁ), (5) 도모함(ՂՏ՝ՋՇՓՉՒ), (6) 사랑함(ֹՑՙՒ), (7) 무서워함(Ֆ՜ՂՏՒ), (8) 의견을 지님(Մ՜ՎՁ)들과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167c8-168a5)
여기에서 그는 각각의 경우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판단하기에)......그러한 어떤 것이 있다고 여겨지는가?(ՄՏՊՅז ՔԿՒ ՓՏՉ ՅסՍՁՉ)"라고 묻고 동의를 얻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다음과 같은 일반원칙(혹은 일반화된 명제)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일반원칙1>
(1) 관련을 맺음(맺는 작용 혹은 능력 : Մ՝ՍՁՌՉՒ)은 서로 다른 두 항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2) 그 각각의 관계맺음은 그것과 관련된 고유한 대상이 있다.
(3) 그 각각의 고유한 대상은 각각의 관계맺음자체와는 서로 다르다.
(4) 그 각각의 관계맺음들은 그 대상들을 기준으로 삼아서 분류될 수 있다.
(5) 그 각각의 관계맺음들에는 그 관계맺음에 의해서 산출된 결과물들이 있다.
이 <일반원칙1>은 165c8-166c3에서 앎들(만들거나 행할 줄 아는 앎들이 가장 기본적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과 관련지어 이야기된 것들을 관계맺음 일반으로 확장시켜서(앎이나 기술도 관계맺음의 하나이므로) 일반화한 것이다. 즉 어떤 것이 관련을 맺음이라고 온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그것의 고유한 대상과 관련을 맺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관계맺음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한정지어 놓으면, 우리가 관계맺음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색, 소리, 감각지각의 대상, 즐거움, 좋음, 아름다움, 무시무시한 것, 의견의 대상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들 뿐이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일반원칙을 고수하는 한, 이러한 영혼의 기능들을 놓고 생각해 볼 때에도, 바로 자기자신과 관련을 맺음이란 없다는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영혼의 구체적인 기능들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 기능들이 움직임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들과 관련지어서, "자기자신과 관련을 맺음이라는 것이 있는가?"하는 그 사실들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168b5-d1에서는 크기나 양과 관련된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속성들 혹은 성질들(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 혹은 바로 그 점에만 주목해 볼 수 있는 속성들)에 초점을 두고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즉 더큼, 두배임, 더많음, 더무거움, 더나이먹음과 같은 것들은 (그것이 그러한 것이면서) 더작음, 절반임, 더적음, 더가벼움, 더젊음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그 각각의 a임은 a임을 유지할 뿐, -a임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에 더큼자신이 그 자신과 관련을 맺는 (그리하여 그자신보다 더 크게되는) 관계맺음이 성립한다고 해보자. 그런 경우라면, 그 자신과 관련지어(그 자신보다) 더큼은 그 자신과 관련지어(그 자신보다) 더작음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a임은 -a임일 수도 있어야 한다는 모순된 결과가 나온다. 이런 결과는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a임(더큼) 자신이 그 자신과 관련을 맺는 관계맺음이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혹은 플라톤은) 자기 자신 스스로 자기 자신과 관계맺음이 도대체 불가능하다고 확언하고 있는가? 그는 재귀적인 성격을 지니는 무엇인가가 있을 법도 한데, 과연 앎도 여기에 속하는가에 대해서 여전히 의문을 지니고 있다.(169a1-7) 그는 아직도 분명한 이야기를 할 수 없으며, 설령 그러한 앎(앎 스스로와 관련을 맺는 앎)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러한 종류의 어떤 것이면서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져보기 전에는 그것이 현명함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169a7-c2)
그러나 중요한 점은, 여기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 맺음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대화가 곧바로 끝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 같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논의를 계속 진전시켜 나간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들은 지금 그들 자신의 무지함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논의를 계속해 나가고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앎과 현명함을 일정정도 나누어 갖게 되는 과정 속에 있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논의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앎에 대한 앎'이 있다고 가정하기로 한다.
2.2. 현명함은 이로운 것인가?
이제 그들의 대화는 현명함이 이로운 것인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이로움을 가져오는가를 따져 보게 된다. 169c3-175d3에서의 논의는 표면적으로 볼 때, 현명함이 가져오는 이로움이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논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의술과 정치술은 그것의 고유한 대상이 있다. 의술은 건강함과 병듦에 대한 것이고, 정치술은 정의로움에 대한 앎이다.(음악이나 집짓기도 마찬가지이다.)
(2) 이러한 앎들은 그것이 무엇과 관련을 맺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즉 그것의 대상을 기준으로 분류된다.
(3) 그러므로 의술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 사람은 건강함과 병듦이 어디에서 성립하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의사인가를 살펴보려면, 건강함과 병듦에 주목해서 따져보아야 한다.
(4) 그러나 의술을 지니지 못하고서는(의술을 행할 줄 모르면서, 혹은 건강함과 병듦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한 채로) 건강함과 병듦에 관하여 이야기가 올바르게 진행되는지(혹은 치료하는 행위가 올바르게 행해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져 볼 수 없다. 이런 일은 의사만이 할 수 있다.
(5) 그런데 앎에 대한 앎은,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은 앎이고, 또 어떤 것은 앎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구분해 낼 수 있을 뿐이다. 즉 그는 건강함과 병듦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6) 그러므로 앎에 대한 앎을 지닌 사람은, 누군가가 의사가 아니면서 의사인 체하는지, 아니면 정말로 의사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7) 그리고 그는 이런 앎의 결과물도 알지(어떤 특정한 기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8) 그런데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런 결과물들이다.
(9) 따라서 그는 이런 이로움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가 지니고 있는 현명함은 (이런)이익을 주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170a1-175a8)
여기에서의 논의는 전체적으로 <일반원칙1>을 받아 들이면서 진행된 것이다. 즉 <일반원칙1>의 명제(3), 명제(4)와 명제(5)에 초점을 두고 진행된 논변이다. 즉 다른 앎들은, 그 행위와 그 대상이 명확히 구분되며, 그 행위의 결과인 유용한 결과물들이 있다. 그러나 '앎에 대한 앎'이라고 규정된 현명함은 다른 앎과 기술들이 제공해 주는 그런 결과물들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된 논의 속에서 "현명함은 이로운 것이다."라는 점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대화 상대자가 공통되게 받아들여온 일종의 공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현명함이 오히려 앎에 대한 앎이라고 한다면, 현명함은 이로운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3. 대화라는 형식과 재귀적인 특성
지금까지의 논의가 '논의와 탐구의 대상으로서의 현명함'에 초점을 두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의 성립가능성을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왔다면, 이제 '논의와 탐구의 진행방식으로서의 현명함'에 주목해서 대화를 추적해 보자.
소크라테스가 이끌어 가고 있는 대화는, "그것이 무엇인가?(ՔԿ ִՓՔՉ)"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내려는 시도이면서, 또 동시에 바로 지금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대화의 진행은 "그것이 무엇인가?(ՔԿ ִՓՔՉ)"를 물으면서도 항상 "지금 대화에 참여하여 논의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들인가?"를 놓치지 않으려고 의식하고 있으며, 바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 누구이고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점을 알게 되도록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은 변증술(dialectic)의 중요한 한가지 요소라고 하겠다. 그리고 변증술은 자기 자신을 아는 앎과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재귀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이제 이런 의미의 재귀적인 특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 보자. 이제부터의 작업은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서 드러나는 점들에 초점을 두면서 진행될 것이다.
3.1. {카르미데스Charmides}에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앎과 앎의 재귀적인 특성
이제 대화편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주목해서 살펴 보자. 다시말해 그 '결과들'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돌려 '탐구 과정 자체'에 주목한다면, 다소간 다른 그림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우선 {카르미데스Charmides}에서 소크라테스가 소년 카르미데스와 대화를 시작하는 부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한 번 눈여겨서 살펴보자. 카르미데스가 그의 외모 뿐만 아니라 그의 현명함 때문에도 명성이 자자하다는 이야기를 소크라테스는 크리티아스로 부터 전해 듣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카르미데스가 겪고 있는 두통(아마도 현명하지 못함 때문에 생긴 것일 텐데)을 치료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소년의 집안을 좀 과장되게 칭찬한다. 늘 그렇듯이 약간은 교활한 방식으로 소크라테스는 이 소년이 자만심에 빠져서 스스로가 현명하지 못함을 보여주게끔 유도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카르미데스의 집안을 칭찬하고 곧 그 소년에게 그가 현명한가를 단도 직입적으로 묻는다.(158b5 ff.) 이 질문이 특히나 심술궂은 것이 되는 이유는,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에 무관하게, 이 질문은 답하는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게 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카르미데스가 "예! 저는 현명합니다."라고 답한다면, 그는 거리낌없이 건방지게 으시대는 행위를 하게 될 것이며, 바로 그것은 그가 현명함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주게 된다. 반면에 그가 "아니오, 저는 현명하지 못합니다."라고 답한다면, 그는 아주 긴요한 뛰어남 하나를 결여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나이든 사촌이 거짓말을 했다고 이야기하게 되는 셈이 된다. 그러면 그것은, 그가 그의 손위 사람에게 존경심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며, 바로 또 그런 불경스러움은 그가 현명함을 지니고 있지 못함을 확증해 주게 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대답이 불가능한 질문이다. 그 소년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는 얼굴을 붉힐 뿐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중요성을 지니는 이유는 다음의 두가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 카르미데스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해서 내놓았을 수도 있는 질문은 어떠한 것이 되었든지 간에 그의 현명함이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을 것이다.
(2) 하지만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힘으로써, 카르미데스는 그의 현명함을 비록 적은 정도로나마 드러내 주고 있다.
물론 결국에 가서는 카르미데스가 지금 지니고 있는 현명함은 다소 피상적인 것임이 입증된다. 그렇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약간의 현명함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반응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조용히 얼굴을 붉히면서 카르미데스는 바로 그 자신이 잠시 뒤에 규정하게 될 현명함을, 즉 조용함(ֿՓՕՉ՜ՔՇՒ; 159b5)으로서의 현명함과 염치(부끄러움, 수치심: ՁדՄ՞Ւ; 160e4)로서의 현명함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카르미데스는 어리고 순진한 소년이므로, 그가 짓궂은 질문에 얼굴을 붉힌다든가, 현명함을 정의하면서도 바로 그가 실제로 경험하는 바 그대로를 묘사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가 카르미데스에게서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일상적인 수준에서 드러나는 '재귀적인 특성'은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장면을 더욱 중요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대화편의 나머지 부분들도 이런 모습을 좀더 높은 수준위에서 다시 한 번 재상연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화편의 결론에 이르게 되면, 소크라테스 자신도 "현명함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음이 입증된다. 단 차이가 있다면, 그의 반응은 단순한 얼굴 붉힘이 아니라, 그것을 좀더 세련된 방식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그는 스스로가 모르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게다가 대화편 전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눈여겨 본다면, 대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도, 위에서 카르미데스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과 똑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1) "현명함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내놓았을 수도 있는 정의(definition)는 어떠한 것이든지 현명함의 본성을 정확히 드러내 주지는 못할 것이다.
(2)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함으로써, 또 그 자신 스스로가 알고 있지 못함을 인정함으로써, 현명함의 본성을 보여주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카르미데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면서 보여주고 있는 현명함은, 대화 속에서 자기 자신 스스로를 앎이라고 정의된 현명함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앎은 대화 속에서 '앎에 대한 앎'이라고 별다른 이의없이 동일시된다. 즉 스스로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을 앎이다. 하지만 그들의 논의는 그런 '앎에 대한 앎'이 있을 수도 없고, 이롭지도 않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그런데 대화 속에서 자기 자신 스스로를 앎이라고 규정된 현명함의 정의는, 실은 장차 미래에 독재자(참주)가 되는 크리티아스가 제안한 것이다. 여기에서 놓치지 말고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비록 크리티아스에게 이 정의는 남의 이야기를 그 말만 빌어온 문구인 것 같아 보이고 그 자신 스스로는 체득해 보여주고 있지 못한 것이지만, 소크라테스에게 자기 자신 스스로를 앎이란 그가 탐구해 가는 바로 그 과정 속에서 그 스스로 보여주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현명함을 스스로 보여주지 못한 채로 "현명함이 무엇인가?"를 단지 정의로만 진술하고 있는 크리티아스와, 그렇게 제안된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 현명함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현명함은 자기 자신을 앎이다."라는 그 자신의 정의를 다소 자신만만하게 방어하면서, 크리티아스는 그렇게 규정된 현명함을 그 스스로는 결여하고 있음을 드러내게 된다. 즉 "당신은 현명합니까?"라는 질문에 긍정의 답을 함으로써, 바로 자기 자신이 주장하는 자신의 현명함이 거짓임을 입증하게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크리티아스는 자기 자신이 현명함을 지니고 있지 못함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현명함은 앎에 대한 앎이다."라는 정의가 지니는 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반박하는 과정 속에서, 이 정의가 진술하려고 의도했었으나, 진술해 내지 못한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현명함은 앎에 대한 앎이다."라는 정의의 주된 결점은, 그런 앎이 내용이 없고, 따라서 아무 이로움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다소 세련된 문구에 근거를 두고 있는 크리티아스의 다소 거만한 확신과 대조시켜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바로 그 자신을 검토하고 있는 바로 그 방식 속에서 그가 말하는 이로움과 좋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대화의 마무리 부분에 가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알고 있는 것과 그가 모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음을(그것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이 앎은 어떤 이로운 것임(그것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이로움', '좋음'이란, 어떤 획득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좋음의 본성은 기꺼이 자기 자신을 검토해 보려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에서, 바로 그 자신을 따져보고 재검토할 줄 아는 그의 능력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가 지니고 있는 앎에 대한 앎은 내용을 지닌다. 그러나 이 내용은 어떤 답이나 정의의 형식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이 내용은 바로, 앎에 대한 앎의 특징인, 재귀적인 특성을 지니는 탐구 과정 자체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실현되고 있는 변증술은 '재귀적'이며(앎에 대한 앎이며) 내용을 지닌다(좋음이 도대체 무엇이고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또 바로 이런 변증의 진행 과정 자체가 현명함과 뛰어남(֢ՑՅՔԾ)을 드러내 보여준다. 즉 변증의 진행과정은 그 탐구대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단지 수단 역할만 하는 그러한 것은 아니라. 그리고 현명함도 변증술이 언젠가 발견해내게 될 일련의 명제로 표현된 정의들 안에서 혹은 규칙들 속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다. 현명함은 바로 변증술 자체의 한쪽면이기도 한 것이다.
4. 맺는 글
지금까지 {카르미데스Charmides}를 주된 재료로 삼아서 앞에서 제기된 문제가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즉 비록 대화 속의 논변은 표면적으로 아포리아로 끝나지만 대화편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주목하게 되면, 다시말해 '탐구의 내용과 결과들'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돌려 '탐구의 진행 과정 자체'에 주목한다면, 다소간 다른 그림이 등장하게 됨을 살펴보았다. 이와 같이 문제해결과 작업진행의 편의를 위해서 나는 일단 논의를 두 수준으로 나누어 진행시켰다. 첫 번째 수준에서는 탐구의 대상으로서의 현명함(더 넓게는 뛰어남)에 주목했다면, 두 번째 수준에서는 탐구가 진행되는 방식으로서의 현명함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이 두 지평에 놓인 논의들이 플라톤에게서 서로 상관없이 별개의 것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탐구대상과 탐구방법을 별개의 것으로 나누는 논의 방식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고 그것을 당연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는 그 둘이 궁극에 가서는 하나로 만나게 됨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탐구대상으로서의 현명함과 탐구방식으로서의 현명함을 연결해 주는 고리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대화와 논의가 찾으려는 대상이, 바로 그 논의를 수행해 가고 있는 사람 자신에게 눈을 돌릴 때에 발견된다는 점에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변증술로 이루어지는 앎은 재귀적인 특성을 지닌다. 또 이런 재귀적인 앎은 '할 줄 아는 앎'이며, 탐구의 끝에서 결과로 만나게 되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바로 그 탐구의 과정 자체가 담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앎은 명제로 그 앎의 실질적인 내용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는 직관적인 앎이고,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서 약간은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표현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논문이 표현의 방법으로서 더 선호되는 철학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는 철학을, 플라톤의 철학에까지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 한, 우리가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지니는 형식을 정당하고 올바르게 평가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대화편들의 진정한 가치는, 그리고 그 대화편들이 지니는 끝없는 매력의 근원은, 그 대화편들이 그것의 내용과 그 형식 둘 모두를 통해서 계속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철학 탐구의 본성을 다시금 생각하도록 북돋우어 준다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발견되는 변증술로 이루어지는 앎을 이와 같이 해석하는 나의 작업은 그러나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어떤 점에서는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의 답을 찾아냈거나 아니면 그 문제 자체가 해소된 것 같아 보이지만,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오히려 내가 처음에 지녔던 의문과 제기했던 질문이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만약에 이 작업이 지니는 최소한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작업의 결과를 다시 한 번 검토하여 문제를 좀더 정확히 잡아낼 수 있는 조그만 단서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앎을 규정하고, 위치짓고, 앎의 내용과 앎의 표현형식간의 관계 등을 탐구하기 위한 여정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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