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헤드 철학의 궁극자의 범주
김 영 진 (대가대)
한글요약
서구 철학에서 시간의 요소와 결부해서 실재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시작된다. 대표적인 사상가로 베르그송, 하이데거 등의 철학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철학은 범주의 형태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체계적인 형태로 과정범주를 구성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궁극자 범주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서 궁극자의 범주는 창조성, 다자, 일자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철학은 정태적인 동일자를 궁극자로 간주하였다. 즉 영속하고 불변하는 실체를 통해서 변화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경험의 가장 구체적인 요인은 과정으로 보았으며, 그것은 다자가 일자로 통합되는 형식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다자가 일자로 통합되는 것은 언제나 새로움을 동반한다. 새로움을 제공하는 것을 창조성이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서아시아나 유럽의 사상 보다는 인도나 중국의 사상의 기조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제어 : 형이상학, 궁극자, 창조성, 다자, 일자.
1. 서론
우리가 서양의 20세기 철학의 경향은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은 근대 철학의 주된 과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미 18세기에 칸트도 형이상학이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독단론이 되므로, 이성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 철학의 주된 과제로 여겼다. 19세기의 실증주의 철학도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에만 인식이 국한되어야 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배제되어야 할 학문으로 규정하였다. 20세기에는 비엔나 학파의 분석철학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도 형이상학은 사변적이고 초경험적이기 때문에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에서 사용된 ‘명제’는 사이비명제이기 때문에 무의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이성과 경험 및 관찰에 의해서 형이상학을 비판하였다면, 20세기는 언어를 통해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졌다.
형이상학의 주된 문제 중의 하나는, ‘존재(Being)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이데아가 존재이며, 중세에는 신이 존재이며, 근대에는 명석판명하게 인식하거나, 경험하는 주체가 존재가 된다. 존재에 해당하는 개념들은 변화를 겪지만, 그 존재의 본성은 불변적이다. 대체적으로 존재는 영속하고 불변하는 성질을 갖는다. 따라서 20세기의 형이상학의 폐기 혹은 주체의 해체는 절대적으로 영속하고 불변하는 주체로서의 존재를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절대 부정이라는 다른 방향의 극단은 해체론적 회의주의를 가져오며, 가치의 부재가 생겨난다. 즉 이것은 실재 속에서 가치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절대적 부정을 초래하여, 삶을 지탱할 어떠한 가치도 부재하게 된다. 이는 전문적인 지식에 함몰되어, ‘햄스터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과는 대조적으로, 화이트헤드(Whitehead)는 형이상학을 옹호할 뿐만 아니라, 그는 새로운 사변철학을 주조하고자 한다. 이것은 17세기에 착수되어, 18세기와 19세기에 견고하게 정착된 과학적 방법 및 이론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서양의 근대철학(실재론이든, 관념론이든)은 뉴턴 물리학에 의해 구축된 과학이론을 맹목적으로 수용하였다. 오늘날에 와서 우리는 영국의 경험론자들(로크, 버클리, 흄)과 대륙의 합리론자들(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은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인 뉴턴의 우주론을 밑바닥에 깔고 철학적 이론을 제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최근의 연구 동향은 당시의 자연과학과 철학의 관계를 살펴볼 것을 강조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보다 근본적으로 고대와 근대의 세계관은 유클리드의 ‘점의 사유’에 근거한 정태적 범주에서 나온 것으로 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재를 ‘선의 사유’로 변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이를 동적 범주에 근거한 형이상학의 구축으로 간주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에서 궁극자의 범주가 기존의 형이상학과는 다르다는 점을 고찰하려는 것이다. 이 궁극자의 범주를 통해서 우리는 기존의 절대적이고 영속하는 범주와는 다를 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 형이상학의 구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 논문에서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다. 먼저 2장에서는 형이상학의 기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한 논의를 통해서 기존의 형이상학과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차이점을 드러내려 한다. 이 설명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의 단초가 될 것이라고 본다. 다음으로 3장에서는 화이트헤드의 궁극자의 범주에서 그 구성요소들은 무엇이며, 그것들 각각이 기존의 개념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2.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서구의 형이상학에서 추구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이데거로부터 이 논의를 시작할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플라톤 이래 서양의 형이상학은 ‘모든 것(존재자)의 원천이자 근거가 되는 본질적이고 불변적인 실체’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을 규명하고자 했다. 즉 근거에 대한 추구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을 이데아와 같은 근원적인 일자에서 찾았으며, 중세의 신학자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지만 그 자신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창조되지 않은 근거, 즉 창조주 하느님을 찾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운동의 첫 번째 원인을 탐구하는데,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했지만 스스로는 운동하지 않는 근거, 부동의 동자를 찾아낸다. 이러한 근거를 찾는 태도를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즉 그것의 보편적인 성격에 있어서 사유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즉 그 전체에 있어서 사유한다.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존재를 가장 일반적인 것의…근거를 캐내는 통일성에 있어서 사유할 뿐만 아니라 그 모두를 정초하는 통일성에 있어서 사유한다. 그리하여 존재자의 존재는 근거짓는 근거로서 사유된다. 따라서 모든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철두철미 근거에 관하여 설명하고 근거를 알려주면서 궁극적으로는 근거의 해명을 추구하는 근거지움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들의 근거인 존재의 탐구가 형이상학적 질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서구의 형이상학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를 탐구하였다. 하이데거는 근거 자리에 어떤 존재자가 들어설 때,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든 제1원인이라고 부르든, 부동의 동자라고 부르든, 그것은 본질적으로 초월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일종의 기독교적 의미의 신이라고 해서, 서양 형이상학을 존재신론(Ontotheologie)이라고 명명한다. 이와는 달리 그는 존재를 포착하려면, “존재를 존재자의 근거로서 간주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심연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심연에서 나오는 존재의 일어남을 보고,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을 찾아냄으로써 세계에 대해 해명하고자 했던 것이란 점에서 존재의 철학, 존재의 형이상학이다. 그는 현존재를 통해서 존재론의 기초를 세우고자 한다. 하이데거철학을 계승해서, 보다 철저하게 형이상학을 비판한 데리다는 형이상학의 공통된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하는데, 하나는 자기 동일성을 갖춘 최초이자 최종의 원인 내지 토대를 철학적 공리로 설정하고 이 원인을 통하여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과 다른 하나는 일차적 원인과 그 파생물을 대립관계로 볼 뿐 아니라, 그 양자간에 선악 내지 우열의 위계적 가치 질서, 나아가 지배와 지배와 종속이라는 권력 질서를 설정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와 같은 비판을 통해서 해체철학의 극점에 도달한다. 화이트헤드는 데리다나 하이데거와는 다른 방식에서 기존의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그는 ‘영속’과 ‘유동’에 대한 존재론적 지위에 관한 사유에서 착수한다.
화이트헤드는 구체적인 사건 혹은 경험을 추상화한 것이 대체적으로 서구의 철학사라고 한다. 이는 ‘인간의 지성이 우주를 공간화한다’는 베르그송의 비난과 일치한다. 즉 ‘사실’의 철학 혹은 ‘실체’의 철학은 “유동성을 무시하고 세계를 정적 범주로서 분석하려는 경향”(PR 210)이 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궁극자의 범주를 ‘동적 범주’로 대체하고 이와 같은 정적 범주에 근거한 사유를 추상적인 것으로 비판한다.
근거에 관한 서구 형이상학의 추구는 ‘영속’과 ‘유동’이라는 두 개념에 대한 존재론적 지위의 부여에서도 차이가 있다. 존재의 형이상학이란 다름아닌 영속을 궁극적인 실재로 보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실체의 형이상학”(PR 209)이라고 한다. 존재 및 실체의 형이상학은 시공간이론에 깊은 영향을 미쳐서, 시공간도 아인슈타인이론이 전개되기까지는 절대적 시공간이론이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유동을 설명하는 시공간이 역설적으로 영속에 근거한 것이다. 예컨대 제논의 ‘날아가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역설이나, 근대 시공간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뉴턴의 절대 시간론을 보면, “어떠한 외적인 것과도 관계없이 균등하게 흐르는 절대적인 수학적 시간”을 통해 유동을 설명한다. 이것이 근대 철학에서 시간을 양적인 측정으로 보는 이유가 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근대철학이나 고대철학은 영속을 통해서 실재를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화이트헤드를 이러한 사유방식을 ‘단순한’(mere) 사유의 전형으로 본다. 즉 추상관념을 실재로 보는 경향이다.
철학적 사고가 지금까지 스스로 난점에 빠지게 된 까닭은 그것이 단순한(mere) 의식, 단순한 사적 감각, 단순한 정서, 단순한 목적, 단순한 현상, 단순한 인과작용과 같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에 매달려 왔다는 데 있다.(PR 18)
이러한 결과로 이전의 고대 우주론과 근대 우주론(17세기 우주론)은 대체적으로 ‘과정’, ‘변화’, ‘생성’ 등을 실재에 대한 이해에서 열등한 지위를 부여하였다. 화이트헤드는 기하학과 논리학, 물리학의 연구를 통해서 생성 및 과정이 실재라는 사유에 도달하며, 이것을 통해서 새로운 형이상학을 모색한다. 그는 존재가 아니라, 생성에서, 하이데거처럼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에서 보다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와 현실적 존재가 만나서 일어하는 생성의 철학을 탐구한다. 이것은 기존의 형이상학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실태와 그 속성들의 관계만을 추구한 초월성의 철학이 아니라, 상호 파악하는 현실태들 사이의 내재성의 철학을 탐구하는 것이다. 즉 그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와 존재 ‘사이에’ 일어나는 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불변의 원리가 아니라, 변화의 원리를 궁극자로 삼은 철학을 구성해 보고자 한다.
화이트헤드는 이와 같은 특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새로운 개념과 범주를 창조한다. 그는 경험의 가장 구체적인 요소를 드러내는 개념으로써, “현실적 존재자” (Actual entity), “결합체”(Nexus), “파악”(Prehension), “존재론적 원리” (On- tological Principle)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과정과 실재』의 전체적인 논의는 이 개념들과 동적 범주들의 “의미와 그 적용 가능성, 충분성”(PR 20)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각각 범주들은 ‘궁극자의 범주’, ‘현존의 범주’, ‘설명의 범주’, ‘범주적 제약’으로 나눈다. 모든 존재는 이 범주들의 특수 사례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네 가지 범주들이 현실태를 ‘생성’, ‘관계’, ‘변화’를 설명하는 기초원리가 된다. 즉 실체의 범주가 아니라 과정의 범주를 설정한 것이다. 이 범주들 가운데 궁극자의 범주는 세 개의 다른 특수한 범주들을 전제하는 ‘일반적 원리’를 표현한다. 이 궁극자의 범주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정태적이고 초월적인 범주를 궁극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동태적, 내재적, 및 관계적인 범주를 궁극자로 삼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이나, 이데아, 형상, 구조 등은 다양한 구체적인 요소들을 만들어 내는 원리이지만, 결코 그 자신은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개체들 속에는 없고, 그것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화이트헤드의 궁극자의 범주는 ‘사물’, ‘존재’, ‘존재자’의 의미 속에 근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개념이다. 즉 구체적인 개별적 사물 속에 들어가 있는 개념들을 가장 보편적인 궁극자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철학적 사고는 ‘궁극자의 형이상학적 범주’를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궁극자는 초월적인 ‘일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이질적이고 새로운 궁극자를 정하자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우유성‘ 혹은 ‘우연성’(accident)이라고 한다.
모든 철학이론에는 그 자신의 우유성에 의해 현실적이 되는 어떤 궁극자가 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우유적인 것들의 구현을 통해 그 특성이 규정될 수 있고, 이러한 우유성을 제외하면 현실성을 잃게 된다.(PR 7)
화이트헤드는 우연에 의해 현실적이 되는 것이 ‘우주’라는 개념의 선험적 조건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개별성에서 고찰된 개별적인 현실태들이 우연적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우리는 우주가 지금 그대로 있다는 것에 대한 어떤 ‘근거’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면 ‘부동의 동자’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에로, 어떤 다른 철학자들에게는 초월적 창조자로 이해된 신에로, 혹은 일원론적 절대자에로 이르게 했던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레클렉에 따르면, 화이트헤드는 완전히 초월적인 근거라고 하는 모든 이론들이 부정합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거부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원론적 도식들에서 보면, 궁극자에게 그 자신의 우유성들 중의 어떤 것에로 귀속시켰던 그 이상으로 최종적이며 탁월한 실재성이 불합리하게 허용되었다.PR 7)
화이트헤드는 이를 가리켜,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라고 부른다. 궁극자의 범주에는 ‘일’, ‘다’, ‘창조성’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범주를 알기 위해서는 이 용어들에 대한 점검이 요구된다.
3. 화이트헤드의 궁극자의 범주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창조성(creativity), 다자(many), 일자(one)는 동의어인 사물(thing), 있음(being), 존재(entity)의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궁극적인 개념이다. 이 세 개의 개념은 궁극자의 범주를 완결지음과 동시에, 보다 특수한 모든 범주의 전제가 된다. 우선 일자부터 살펴보면, 일자라는 용어는 숫자 1이나 유적인 개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매우 추상적인 의미의 일자이다. 화이트헤드는 그런 의미로 일자 혹은 ‘단일성’(singularity)을 규정하는 것은 구체성을 상실한 것으로 본다.
일자라는 용어는 복합적인 특수 개념인 정수의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정관사 a, an, 정관사 the, 지시사 this, that, 그리고 관계사[which, what, how]의 밑바닥에 한결같이 깔려있는 일반적인 관념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가 갖는 단일성을 나타낸다.(PR 21)
우리는 일자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시대의 절대적 관념론자인 브래들리(Bradley)의 명제에 대한 접근에서 시작해 보자. 브래들리는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다’는 명제는 보편적인 명제로서, 절대자를 규정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것이 실재를 표현하는 참된 명제로 본다. 하지만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이것은 추상적인 의미로 늑대와 양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즉 어떤 늑대나, 어떤 양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늑대와 양의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즉 “경험되는 사물과 경험하는 행위의 일관된 개별성(particularity)”(PR 43)이 빠져 있다.
그 늑대는 그 양을 그 시간 그 지점에서 잡아먹었다. 그 늑대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 어린 양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독수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명제의 모든 표현은, 그것이 문장으로 표현된 경우에는 명시적으로, 그리고 그것을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주체의 이해 가운데서도 은연중에 지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PR 43)
예컨대, 우리는 어린 시절 집에서 개나 소, 닭을 기르다가 잡아먹거나, 파는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들은 커다란 슬픔에 잠기게 된다. 하지만 어른들은 다른 가축들을 기르면 된다고 위로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정을 담뿍 준 그 개나, 그 소, 그 닭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의 닭, 소, 개일 뿐이다.
이와 같이 화이트헤드에게 일자라는 용어는 이처럼 구체적인 부정관사, 정관사, 지시사, 관계사를 갖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그는 늑대와 양이 상호간에 먹고, 먹히는 이 구체적인 관계를 ‘파악’(prehension)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또한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현실태’로 규정하는 일자 혹은 ‘단일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이 개념이나 유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브래들리의 이 관점은 이미 신 중심이 아니라 이성 중심으로 사유하는 근대 철학에서도 절대적이다. 로크의 물체에 대한 사유나, 데카르트의 자아에 대한 사유에는 과정 속에서의 구체적인 일자가 아니라 영속하고 재현하는 ‘일자’라는 관념이 내재해 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로크의 일자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로크의 뚜렷한 관심사는 몇 해 동안, 또는 몇 초 동안, 또는 몇 세대 동안 유지되는 하나의 지속하는 물체가 갖는 자기 동일성의 관념이다. 그가 고찰하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개체화된 개별적 실체라는 통속적인 철학적 관념인데, 이는 변화하고 있는 우유적 속성들의 한복판에서 그 실체적 형상을 유지하면서 변화의 모험을 겪고 있는 것이다.(PR 55)
화이트헤드는 로크가 말하는 ‘이 개별적 실체’는 결코 일자 혹은 현실태가 아니라고 한다. 참된 일자는 결코 과정을 통해서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근대 철학의 시작점을 알리는 것은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우리는 앞에 나오는 ‘나’와 뒤에 나오는 ‘나’를 동일한 자아로 상정한다. 이것 역시 추상화된 일자이지, 결코 구체적인 일자는 아니다. 즉 여기서 자아나 물질은 영속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정태적인 실체를 궁극자의 범주로 보고, 유동을 하위의 종속물로 보는 모든 실체 철학의 근본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내가 그것을 언표할 때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참이다. 데카르트는 그의 철학에서 사고 주체가 계기적 사고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유기체의 철학은 이러한 순서를 역전시켜, 사고가 계기적인 사고 주체를 만들어 내는데 있어 구성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이 역전을 통해서 우리는 실체 철학과 유기체 철학 사이의 최종적인 대비에 이르게 된다.(PR 150-151)
이와 같이 데카르트 철학의 난점은, 유동성을 하위의 종속물로 보는데서 오는 관념들을 예시해주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종속화는 찬송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개념에, 플라톤의 통찰 속에, 데카르트의 수학적 정신 속에, 뉴턴의 시공간 이론에 존재한다고 본다.(PR 209-210)
일자라는 용어와 더불어 ‘다자’라는 용어는 궁극자의 범주의 한 축에 속한다. 일자라는 용어가 화이트헤드의 현실태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면, 다자라는 용어는 가능태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다자라는 술어는 일자란 술어를 전제하며, 일자란 술어는 다자란 술어를 전제한다. 다자란 술어는 이접적인 다양성의 관념을 전달한다. 이 관념은 존재라는 개념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이다. 다수의 존재들이 이접적인 다양성 속에 존재한다.(PR 21)
화이트헤드는 ‘존재’라는 개념을 ‘가능태’로 본다. 화이트헤드에게 다자는 새롭게 구성되지 않은 ‘객체화된 현실태’의 다항적 구성 요소들이 다자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현존의 범주들도 포함될 것이다. 다자가 존재들이라면, 그 존재들은 아직 현실태로 되기 전에 존재하는 다수의 이접적인 사물 혹은 이미 현재화를 구성하여, 과거의 현실태가 된 사물들이다. 예를 들어서, ‘오늘 저녁 나는 과정사상연구실에서 비빔밥을 먹는다’는 명제는 수많은 이접적인 사물들이 연접해 있는 것이다.(PR 10-13) 이 시간, 이 장소, 나, 밥, 식당, 주인 등은 하나의 명제로 구성되기 전에는 이접적으로 존재하는 객체화된, 즉 죽은 현실태일 뿐이다. 물론 그것은 힘을 가진 객체화된 현실태이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할 뿐이지, 존재와 존재 사이에 결합된 형태로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이것들은 각각 하나의 사건으로 통일되기 전에는 단순한 실재적 가능태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자라는 용어는 구체적인 일자 혹은 사건이전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물들을 일컫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자가 ‘존재들’을 가리킨다고 해서, 화이트헤드가 존재를 사유하거나, 존재의 근거를 사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존재들 사이에 상호 관련되는 것을 탐구하려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다. 그는 이미 초기 사상에서 점이 아니라, ‘점들 사이의 관계’가 더 기본적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그는 다양한 존재들이 하나의 일자로 통일되는 것에 더 주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시적인 의미에서는 다자가 일자로 통일되는 사건을 ‘현실적 존재’라고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거시적인 의미의 명제에서 다자가 일자로 통일되는 것은 ‘결합체’(nexus)라고 한다. 예컨대, 날씨가 화창한 날에, 감포에 가보니, 바다가 푸르다는 사실을 보았다. 나의 이 경험은 ‘감포의 바닷물은 푸르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근대 철학자들이라면, 감포는 주체 혹은 실체이며, 푸름은 속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직접 물속에 들어가 보면, 푸른색이 아니라 투명한 무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푸르다는 것이 어떤 속성이어야 하므로, 대상 속에 그 색이 없다면, 그것은 정신적 실체의 속성이 될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근거한 이항논리의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항 관계가 아니라 다항 관계로서 논리학을 새롭게 기술한다. 푸름이나 뜨거움과 같은 구체적 속성들은 여러 변수의 기능이지 단독변수의 기능은 아니다. 이렇게 되는 경우에, 물질적 실체나 정신적 실체를 찾을 필요는 없다. 푸름과 같은 구체적 사실은 여러 개의 변수들, 해가 있는가, 구름이 있는가, 내가 서 있는 장소 등을 묻지 않는다면, 추상적인 주어로 환원될 것이다. 푸름이 다항적 관계성을 위해서 ‘진입’한다는 사실은 자연을 실체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으며, 구체적인 관계를 가진 사건으로 보면 된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주어의 형태를 ‘결합체’라고 한다.
그런데 다자가 일자로 통일된다는 것은 어째서 가능한가? 그것은 이전의 존재들과는 별개의 사물이 된다는 것인가? 대개 근대의 관념론 등의 일원론 철학에서는 초월적이고, 정태적인 ‘신’이나 ‘절대자’를 통해서 그것을 해결하였다. 이는 외재적인 원인을 통해서 다자와 일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정적 범주에 근거한 실체 철학의 절대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관계를 ‘우유성’(accidents)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보며, 그는 이것을 유기체 철학의 궁극자로 삼는다. 그는 이러한 궁극자를 “창조성”이라고 한다. 창조성은 일자와 다자를 결합하는 ‘접속’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다자를 이접으로 보고, 일자를 연접으로 보며, 이들의 결합을 창조성을 통해서 설명한다. 창조성을 통한 다자의 일자에로 공제(togetherness)는 다자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다. 이것은 이전의 다자들이 새로운 일자가 되는 것이다. 즉 창조성은 전혀 이질적인 새로운 일자를 구성하는 새로움의 원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창조성은 다자들이 일자로 되는 것을 비대칭적인 결합의 원리로 본다. 창조성은 어떤 하나의 척도, 하나의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의 결합이며, 하나가 추가되는 것이 전체의 의미를 크게 다르게 만드는 원리이다. 우리는 자물쇠의 위치 하나만 바뀌어도 방이 감옥으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창조성은 상호 관련된 다수의 현실태들을 하나로 끊임없이 개별화시키는 영원적 기체(SMW 103, 154, 219, 255)이다. 다시 말해서 각각의 현실태의 “개별적인 활동은 일반적인 활동이, 부과된 조건에 따라 개별화되고 있는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SMW 255)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성은 스피노자의 ‘무한 실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각각의 현실적 존재에 있어 특정한 양태를 취하면서 그 모두의 기저에 놓여 있는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특성이 되고 있는 것이다(PR 7, SMW 102-103, 255-256). 그러나 스피노자의 철학이나 절대적 관념론 등의 일원론적 철학에서는 이런 결합의 근거를 신이나 절대자로 보는데 반해서, 창조성은 우연적인 것들을 통해서만 생겨난다. 즉 그는 ‘우연성’에 그 결합의 원리를 둔다(PR 7).
창조성은 이접적인 방식의 우주인 다자를, 연접적 방식의 우주인 하나의 현실적 계기로 만드는 궁극적 원리이다. 다자가 복잡한 통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PR 21)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창조성의 성격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개념과 관련을 짓는다. 이것은 창조성의 특징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많은 존재들과 존재들 사이를 결합시킬 때, 창조성은 특별한 근거에 의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연성의 원리에 근거해서 행하는 것이다. 이 점은 ‘근거’에 대한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과는 매우 배치되는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창조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및 근대의 ‘중성적 질료’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술어에는 형식이라든지 외적 관계와 같은 수동적인 수용성의 관념이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현실세계에…의해 제약되는 유적 활동성의 순수관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가 그 자신의 성격을 갖지 아니한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의미에서 창조성은 그 자신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성의 기초에서 가장 높은 보편성의 궁극적 관념이다. 모든 성격들은 그것보다 특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성격으로도 특징지을 수 없다. 그러나 창조성은 늘 여러 조건들 아래서 발견되어지며, 조건적인 것으로 기술된다.(PR, 31)
창조성의 범주는 우주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데 초월적 창조자가 없어도 우주의 존재를 확보한다. 창조성은 우주의 존재를 위한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 끊임없이 자기 창조하는 활동이라는 본성을 가진 창조성을 통해서 궁극자의 범주는 규정된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그것을 규정한다.
창조성은 현실적 계기들과 영원한 대상들이 존재들이라는 의미에서의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궁극자의 범주인 창조성을 자신의 존재 범주들 사이에 넣지 않는다. 그는 창조성은 각각의 생기들을 위한 특수한 양태 안에서, 모든 생기들을 낳는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특징이라고 말한다.(SMW 220)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다자인 존재들이 창조성을 통해서 하나의 현실태 속으로 ‘공재’(together)하는 것을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원리”(PR 21)로 본다. 이런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은 존재의 철학이 아니라, 생성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존재의 철학에서 사용하는 정적 범주가 아니라, 우유성이라는 창조성과 일, 다라는 동적 범주를 자신의 궁극자로 간주한다.
4. 결론
우리는 화이트헤드철학에서 궁극자의 범주가 무엇이며, 그것이 기존의 형이상학적 체계와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알아보았다. 그가 궁극자의 범주를 ‘일’, ‘다’, ‘창조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다고 볼 때, 기본적으로 이것은 생성과 변화를 실재로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유기체 철학의 이런 특성이 아시아의 철학적 전통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본다. 여기서 아시아의 전통적인 사상은 불교와 유교, 및 도교이며, 이 사상들 각각은 연기적인 관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생각이나, 어떤 것이 무엇과 관계하는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고 관계의 질(주역에서 상생과 상극)이 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어떤 대상을 상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여가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간의 내재적인 관계에 의해 모든 것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내재적인 사유이다. 즉 그것은 어떤 초월적인 것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노자의 도에서 도란 형식화될 수 없고, 명명될 수 없다. 여기서 도는 무 내지 공이며, 어떤 것도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 원리라는 말이 무의미하다.
유기체의 철학은 서아시아나 유럽의 사상보다는 인도나 중국의 사상의 기조에 더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후자 쪽에서는 과정을 궁극자로 보는데, 전자 쪽에서는 사실을 궁극자로 보고 있다.(PR 7)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동일성이나 영속을 제일 범주로 두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의 궁극자의 범주는 영속을 우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세계를 우위에 둔다는 것을 설명한다. 실체의 철학 혹은 ‘사실’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서양의 형이상학은 대체적으로 영속하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우위에 두고, 과정을 열등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전복일 뿐만 아니라, 17세기 우주론에 대한 비판적인 극복이라고 볼 수 있으며, 초월성의 철학이 아니라 내재성의 철학을 탐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Abstract
Category of the Ultimate in Whitehead's Philosophy
Kim, Young-gin (Daegu Catholic Univ.)
Heidegger's overall critique of western metaphysics is still especially significant for Whitehead's philosophy. Heidegger reproached traditional metaphysics since the time of Plato for its onto-theological character, in which Being (Sein) had time and again come to mean merely Seiendes, substance, God. It turns out that the proper analogue to Heidegger's conception of Being in the Whitehead's scheme can only be creativity. Creativity for Whitehead, as Being for Heidegger, is all inclusive, all-process that never itself appears and yet reveals itself in everything that really happens.
In Process and Reality 'creativity' along with 'one' and 'many' is called the category of the ultimate. These three are said to be "the ultimate notions involved in the meaning of the synonymous terms 'thing', 'being', 'entity'". The category of the ultimate is that ultimate principle by which the many, which are the universe disjunctively, become the one actual occasion which is the universe conjunctively.
An Actual occasion is distinct from the many entities in response to which it becomes a new one, which can be referred to as a, an, or the. The three elements, creativity, one and many, in the category of the ultimate, give matters of fact as outcomes of a process in which contains many entities. This fits with the notion of an organism, as a active, atomic unit maintaining itself by inputs from its environment.
Key-words : Metaphysics, The Ultimate, Creativity, Many, One.
참고문헌
Whitehead, A. N., Adventures of Ideas, New York: The Free Press, 1967.
, 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corrected edition, ed. P. R. Griffin and D. W. Sherburne), New York: The Free Press, 1978.
,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25.
Leclerc, I., 안형관 이태호 역,『화이트헤드 철학의 이해』,이문출판사, 2002.
가라타니 고오진, 권기돈 역,『탐구 2』, 새물결,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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